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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국에서 생긴 일.
‘아싸. 12 포인트.’
진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야. 12 포인트면 꽤 감동했나 본데?’
일반적으로 고맙다는 정도는 5 포인트 내외. 굉장히 고맙다거나 상당한 호감을 가지면 10포인트 정도를 얻는다. 그동안의 경험에 의하면 그렇다. 그러니 12 포인트면 상당히 감격했다는 말.
- 한천위 (24세, 남) 무직. 내공 수위 15년
나에게는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정보가 보인다. 물론 처음에는 몰랐다. 그런데 어쩌다가 길 가던 사람을 도와줬더니 이상한 것이 보였다.
‘깜짝 놀랐지. 맑은 종소리 같은 알림음 같은 게 들리더니 포인트를 얻었다는 게 눈앞에 보였으니까. 그리고 사람을 집중해서 쳐다보면 저런 정보가 보인다는 것도 알았고.’
이상한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현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꿈도 참 스펙터클하게 꾼다고 생각했고, 깨면 게임 좀 그만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한참이 흐른 뒤에야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뭐라고 할까.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감정? 그러니까 호감, 감동, 존경. 뭐 그런 걸 끌어내면 포인트를 받는다. 반대로 악감정이 생기면 포인트가 깎이고.
그러면 포인트가 모이는 건 어떻게 아느냐. 포인트가 모이면 내 손목에 있는 푸른색 팔찌에 불이 조금씩 들어온다. 마치 게임 속 게이지가 차오르듯.
‘어디 보자. 이제 절반 정도인가?’
팔찌는 정확하게 10등분이 되어 있었는데, 그중 6개에 불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하나에는 50% 정도 불이 들어와 있었고.
‘이번에는 또 무슨 능력이 생기려나.’
칸에 불이 꽉 찰 때마다 뭔가 달라지는 게 있었다. 6레벨. 그러니까 여섯 번째 칸이 꽉 찼을 때는 병을 고치는 방법이 눈에 보였다.
침을 놓는 순서와 자리가 다 보이니 그대로만 따라 하면 된다. 방금 한천위라는 사람을 고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이었다. 5레벨일 때는 다른 사람의 무공의 장단점이 보였고.
“나는 천위라고 하오. 한천위. 검을 주로 쓰고. 어디 출신이라고 하기는 좀 뭐 한데..”
천위라는 녀석은 내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스스럼없이 말을 했다. 사부가 낭인 비스무리 한 일을 했고, 덕분에 강호를 떠돌았다는 말. 그러면서 무공을 배웠고, 얼마 전에 사라졌는데 아마 변을 당한 것 같다는 이야기.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하기 어려운 사정을 술술 털어놓았다. 강호를 떠돌았다고 하더니 사실은 사부 밑에서 곱게 큰 모양이다.
강호에 믿을 사람이 어디 있나. 항상 조심해도 모자란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사람을 믿다니.
“그렇구려. 그런데 그 팔찌는?”
“아. 이건 사부님의 유품이라서 항상 차고 다닙니다.”
물론 뻥이다. 나에게 사부 같은 건 없다. 물론 사부라고 칠 수도 있는 사람이 두 명 있기는 한데, 사연이 좀 복잡하다. 사실 처음 이곳에 와서 지금까지 겪은 일을 설명하려면 책으로 서너 권 분량은 족히 나올 것이다.
아무튼, 팔찌는 이곳에 떨어지고 난 후 정신을 차려보니 손목에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저도 무공을 익혔습니다. 이런 일 말고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이고. 무슨 소리. 내가 보니까 의원을 차려도 먹고 사는 건 충분할 것 같던데..”
맞는 말이다. 어디가 아픈지도 알 수 있고,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단, 아주 가벼운 병에 대해서만. 중한 병은 제대로 된 정보가 보이지 않는다. 포인트를 더 많이 모으면 중한 병도 고칠 수 있을 것 같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저 얕은 잔재주에 불과합니다. 제대로 된 의술을 펼치려면 어림도 없습니다.”
“이 친구. 사람이 너무 겸손해도 안 좋은 거야. 어지간한 의원보다 나아 보이더만.”
한천위는 말을 한동안 섞더니 이제는 아주 친구처럼 대했다.
‘사회 경험은 별로 없는 녀석인가? 아니면 쉽게 감동하는 스타일?’
어쨌든 상관없었다. 나야 포인트만 모으면 그만이니까. 아니. 이런 스타일이 포인트 모으기에 더 좋았다. 진혁은 표정을 유지한 채 호감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천위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디 지원인가? 갑급? 을급?”
“갑급입니다.”
한천위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같은 임시 표사라도 갑급과 을급은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와 있는 사협 표국과 같은 중소 표국에는 일거리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평소에는 최소한의 인력으로 유지하다가 굵직한 일거리가 생기면 임시 표사를 뽑아서 쓴다.
임시 표사는 다시 갑급 표사와 을급 표사로 나뉜다. 갑급은 내부 인력과 맞먹는 수준의 무공을 갖춘 사람. 표행의 정예로 활용할 수 있는 인력이다. 당연히 보수와 대우가 좋은 편이다.
을급은 쟁자수가 하는 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업무를 하는 자들이다. 노숙할 때 번을 서거나 잡다한 일을 도맡아서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갑급 표사로 채용되기를 원한다. 현실은 대부분 을급 표사가 되지만.
“요즘은 갑급이면 거의 표두와 대등한 실력이 있어야 한다더군. 중소 표국이나 상단에서 표두 하던 자들이나 큰 방파의 본산 제자가 오는 경우도 있다던데?”
뒤에서 누군가가 천위와 진혁의 말을 들었는지 수군거렸다.
‘그건 그렇고. 어디 또 포인트 모을 일이 없나?’
진혁은 대화를 하면서도 포인트 적립할 수 있는 데가 없나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기회는 바로 찾아왔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바로 들어가는 거요?”
옆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는데, 옆문으로 몇 명의 사람이 들어가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표국에서 초청한 사람이라 들어간 거요.”
표국 사람의 냉정한 말소리. 손님이라는데 뭐라고 할 것인가. 하지만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은 삿대질을 하면서 따졌다.
“내가 분명히 시험은 볼 필요 없이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니까. 아니 누구는 여기서 쎄 빠지게 이러고 있고, 누군 무사통과고. 이게 말이 되는 거냐고.”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았다. 뙤약볕에서 시험을 치를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몇 명이 안으로 들어가니 기분이 확 상한 거다.
“그런 거 아니니 소란 피우지 마시오.”
의혹은 있었지만, 밝힐 방법은 없다. 따지던 사람도 씩씩대다가 결국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떠들어댔다.
“어디서 또 밀어 넣었나 보구만. 니미. 드러운 세상.”
“그러게. 쓰벌.”
사방에서 온갖 욕설이 난무했다. 하지만 웅성대기만 할 뿐, 실제로 앞으로 나가서 따지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찍히면 곤란하니까.’
만약 항의하러 나섰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이 바닥에서 다시는 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더럽고 치사해도 참을 수밖에.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조금 지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그런데 그렇게 봉합된 것 같았던 것이 확 터져버렸다. 얼마 후 표두라는 자가 나와서 한 말 때문이었다.
“갑급 표사는 더 이상 뽑지 않으니 을급 표사 지원자만 남고 나머지는 다 돌아가시오.”
잠시 정적이 흐르다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멀쩡하게 뽑던 갑급을 왜 안 뽑는다는 건데?”
“씨발. 지금 이게 말이야 똥이야?”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처럼 사납게 날뛰었다. 처음에는 황당함에 항변하는 거였다면 차츰 아까 들어간 사람들 이야기가 돌면서 분위기가 난폭해졌다.
아까 들어간 사람들이 갑급 표사 자리를 차지해서 더 뽑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뻔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얘기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공이 실린 소리가 귀와 머리를 쾅쾅 두들겼다.
“어떤 놈이 불만이냐? 앞으로 나와!!”
표두가 험악한 인상을 쓰고는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장내는 삽시간에 정리되었다. 내공이 실린 일갈. 다수의 잔챙이들을 제압할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자들은 자신보다 고수라고 생각되면 일단 위축되기 마련이다. 붙게 되면 당하는 건 자신일 확률이 높으니까. 어찌해 볼 수 있을 정도면 전의를 불태우겠지만, 그럴 의욕이 생기지 않을 정도의 고수라면 일단 몸을 사린다.
그게 강호에서 오래 살아남는 법이다.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낄 때와 그러지 않을 때를 구분하는 것. 그걸 노리고 표두는 소리를 지른 거였다. 내가 이 정도 실력이 있으니까 까불지 말라는 경고.
진혁은 정신을 집중해 표두의 정보를 살폈다.
- 마헌량 (남, 41세) 사협표국 표두, 내공 수위 30년
상당한 수준이었다. 내공이 30년이라면 한 지방에서는 난다 긴다 하는 수준은 된다. 마헌량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니 불같이 화를 내던 자들이 다들 고개를 숙였다.
불합리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하수의 설움인데. 하지만 이런 상황이야말로 기회다. 하진혁은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대협. 갑급 표사 선발을 갑자기 멈춘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마헌량은 벙찐 표정이 되었다. 짖어대는 개들을 향해서 호랑이의 울부짖음을 들려주었으니 상황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생같이 생긴 멀끔한 녀석이 나와서는 먹물을 잔뜩 머금은 것 같은 말을 하니 황당할 수밖에.
“지금 뭐라고 했지?”
“연유를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럴 때는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강호 초출 같은 표정이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이 반감을 가지지 않는다. 말투도 정중해야 하고 당당하지만 정말 몰라서 물어본다는 그런 느낌을 풍겨야 한다.
진혁은 당당하게 앞으로 나가 표두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섰다. 등 뒤로 수많은 지원자가 기대에 찬 눈초리로 상황을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잘하면 폭렙이다.’
표두도 좀 난감한 표정이었다. 일단 복장이나 얼굴이 서생처럼 보였다. 그런 자가 정말 의아해서 물어본다는 표정으로 나오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연유가 있으니.. 크흠.. 이만 돌아가시오.”
말투가 한결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포인트를 모을 수 없다. 진혁은 앞으로 한 발 나서면서 물었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줄 압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시험을 보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입장도 좀 헤아려 주시지요. 대협.”
진혁은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아주 정중하게. 마헌량 표두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그럴 수는 없네. 소협.”
사협 표국의 대장궤가 나선 거였다. 대장궤는 총관 같은 자리였는데, 자리가 자리인지 말빨이 제법이었다. 이런저런 말을 죽 늘어놓았다.
너희가 약간 억울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힘과 권력이 강하니 입 닥치고 돌아가라는 말. 그걸 어려운 단어와 고급스러운 표현을 사용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내용이 변하지는 않는다.
“강호에는 강호의 법도가 있는 법일세.”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조금이나마 기대를 했는데 이제는 끝났다는 탄식. 하지만 이 정도에 물러날 진혁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기다린 사람들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건 불합리한 처사 아닙니까? 옳지 않은 일입니다.”
진혁의 말에 대장궤는 살짝 짜증이 나는 눈치였다. 하기야 이렇게 꼬치꼬치 따져 물으면 짜증도 나겠지. 하지만 이렇게 안 될 듯하다가 기대감을 주고 해야 사람들 반응이 좋거든. 그래야 포인트도 많이 나오고.
“옳지 않은 일을 해도 좋다는 강호의 법도는 없는 줄 압니다.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진혁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