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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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이가 부쩍 더 자라 이제 조금 더 태가 나기 시작했다. 태영의 러트가 겨우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귤이의 성장이 눈에 띄게 빨라진 것이었다.

정말 태영의 페로몬이 이렇게나 도움이 되는 건가. 배가 조금 더 나오자 허리가 무거워진 은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정원을 거닐었다. 귤이가 자람과 동시에 정원도 푸릇푸릇해졌다. 새로 심은 나무들이 가까운 곳에 자리했고, 새싹을 틔운 나무들도 많이 보였다. 사시사철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 나무들도 훨씬 더 풍성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매일 산책을 하는 것도 이제는 재미가 조금씩 붙었다. 민 회장이 심어 준 나무를 보고, 그 옆에 자리한 태영의 나무, 귤이의 나무를 보고 오면 시간이 훌쩍 지나고 심지어 땀까지 날 정도였다.

우리 귤이는 따뜻한 계절에 태어나겠네.

오늘도 그렇게 푸른 정원 속을 거닐다 들어와 물을 마시고 있으니, 정 실장이 2층에 올라가 보라며 권해 왔다.

“……2층이요?”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그렇지만 은재는 어쩐지 태영이 그곳에 있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아직 올 시간이 아닌데, 심지어 태영의 차도 보지 못했는데 태영이 그곳에 있는 듯했다.

“모셔다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올라갈 수 있어요.”

정 실장은 은재가 허리를 두드리는 것을 보고 돕겠다 했지만 걸을 수 있었다. 산책을 하고 와서 다소 무겁게 느껴질 뿐이지 괜찮았다.

물을 한 잔 더 마신 은재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조금씩 더 진해지는 페로몬을 느끼며 태영의 방문 앞까지 다가갔다.

이 옆방에 귤이의 방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그곳에는 시선도 두지 못하고 곧장 태영을 찾았다.

“태영아.”

그런데 태영은 이전 제가 쓰던 방에 누워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너 어디 아파?”

놀란 은재가 다가가니 태영은 손을 머리 위에 올렸다가 내렸다. 그러곤 은재의 손을 이마에 짚게 하며 헐떡이는 소리를 냈다.

“열이 나는 것 같아요.”

“열? 아파? 많이 아파? 감기인가……. 아침까진 괜찮더니. 바로 최 박사님 부를게. 잠깐만 있어.”

열이 난다고 하는 태영의 혈색은 아주 좋아 보였고, 평소와 같은 싱그러움이 넘치고 있었지만 은재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다급히 방을 나서 정 실장을 부르려 했다.

그러자 태영은 나가려는 은재의 손을 붙잡아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페로몬을 진하게 뿜어냈다.

“발현열인가 봐요…… 어떡하지.”

“…….”

“약 먹어도 열이 안 떨어질 것 같은데…….”

그제야 은재는 태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지 알았다. 이전, 겨우 열일곱이던 제가 발현하던 때를 따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어 은재가 주춤대자, 태영이 손을 뻗었다.

“그때처럼 곁에 있어 주실 거죠?”

“…….”

“당신 페로몬이 망가져도…… 그래서 내가 없는 7년 동안 그렇게 힘들었어도 제 곁에 있어 주실 거죠.”

“……당연하지.”

태영은 이불을 확 걷어 내며 은재를 끌어안았다. 훨씬 더 크고 단단한 태영이 몸을 숙여 은재가 보이지 않도록 조여 안으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제 영원히 제 곁에 있어 주실 거고요.”

“……응.”

“그럼 이제 불안하실 일 없어요.”

“…….”

“전 오늘 발현해서 알파가 되었으니까, 이사님은 언제나 제 곁을 지켜 주신 거예요.”

이렇게 한다고 한들, 은재의 마음속에 새겨진 그 회한의 기억은 가시지 않겠지만 그래도 은재는 시큰거리는 콧등을 느꼈다. 귤이…… 알파 아빠를 닮아 눈물도 많은 우리 귤이.

은재는 애써 귤이에게 감정의 원인을 돌리며 태영을 고쳐 안았다.

도저히 흘려보낼 수가 없어서, 쏟아지는 태영의 애정에도 제가 저질렀던 실수를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아 갖고 있던 미안함과 불안함이 이 순간 차츰 테두리가 흐려지고 있었다. 애초부터 그것을 원했던 듯, 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눈가에 입술을 묻었다.

“언제나 이사님은 제 편이셨어요. 제가 나쁜 짓을 해도, 또 미운 짓을 해도요.”

“그런 짓 한 적 없었어.”

“있었어요. 이사님한테도 못되게 굴었어요. 심지어 얼마 전까지도 그랬어요. 그래서 이사님이랑 귤이가 위험했던 거였어요. 제가 이사님 마음 아프게 했잖아요. 저한테 각인하신 것도 모르고.”

“……그건.”

“그러니까 더 이상 과거 생각하지 마세요. 전 이사님 때문에 구원받아서 여기까지 왔어요. 이사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전 세상에 없었을지도 몰라요.”

상상도 하기 싫은 무서운 말에, 괜한 생각을 하지 말라 말하려던 것도 잊고 그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태영은 덤덤히 은재를 도닥이며 곧 그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마음 조금이라도 불편하실 일 없게 할게요. 그래도, 그래도 제가 처음이라서 부족하면 꼭 말해 주세요. 이사님은 그럴 자격이 충분하신 분이잖아요.”

“……부족한 적 없어. 마음 아프게 한 적도 없고.”

“이사님이 조금이라도 마음 다치는 거 이제 싫어요.”

정말 그런 적은 없었지만…… 은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태영은 그의 눈꼬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 입맞춤에 모든 것이 전해졌다.

그 애정을 담뿍 받으면서도 더 이상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수 없었다. 태영이를 사랑하는 만큼 일어서야 했다. 사랑만 담고 있기에도 모자란 가슴이었다.

“이거 한 번 더 해 줄 수 있어?”

“그럼요. 어떤 상황으로 해 드릴까요. 또 발현열?”

“아니, 이거 말고……. 나중에 귤이 낳고 영국 가서. 예전처럼 네가 짐도 옮기고, 공연 준비도 하고 그런 거 보고 싶어. 내가…… 네가 담당한 그림을 처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고 싶어.”

솔직한 속내에 태영이 씨익 미소 지었다. 뭐가 어렵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태영이 너도 있으면 말해. 나도 해 줄게. 다 해 줄게.”

언제나처럼 둘은 침대에 걸터앉아 서로를 끌어안고 다리를 얽으며 입을 맞추었다. 태영의 뺨을 어루만지며 더 깊게, 더 깊게 입 안을 탐하던 은재는 불현듯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이내 큰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1층으로 내려와 거실에서 마주 앉았다.

“……하고 싶은 거 하나 더 생각났어.”

“네.”

막상 하려니 긴장되고 머쓱한지 은재는 숨을 몇 번 골랐다. 그러고는 책장에 놓여 있는 책을 하나 가져와 그 앞에 들이밀었다.

“고등학교 목록이야. 공부도 잘하고, 펜싱도 잘 하니까…… 과고나 외고도 괜찮고, 같은 재단의 자사고도 괜찮은 것 같아. 아니면 유학을 가는 것도 방법이고.”

마찬가지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영은 입 안에서 터지는 탄식을 꾹 눌러 삼켰다. 절 보며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는 은재의 얼굴을 살피며 울컥 치솟는 감정을 억눌렀다.

그때 당신은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나.

“생각해 둔…… 학교가 있니.”

자신도 두려워하면서, 어찌할 줄 모르면서 날 챙기려고 애를 쓰고 있었나.

한 번도 이때를 원망한 적 없었지만, 태영은 이 순간이 뼈저리게 아쉬웠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때,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더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는 뺨을 한번 제대로 만져 줄 수 있었더라면.

“유학을 가도 좋겠지만…….”

크게 숨을 삼킨 은재는 기어코 붉어진 눈꼬리를 한 채 옅게 웃어 보였다.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

“여기서 같이 지내자.”

“…….”

“우리 둘 다 어설펐지만 그동안 잘해 왔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거야. 난 알파랑 같이 지내는 게 어렵고, 낯설지만 태영이 너랑은 잘 지내고 싶어. 많이 모자라겠지만,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눈물점 주변에 물기가 어렸지만 은재는 조금 더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같이…… 지낼래?”

그리고 눈을 맞추며 하는 말에 태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사님은 정말…….”

그를 위해 준비한 자리인데. 저는 그에게 선택받아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런데도 제 마음을 신경 쓰며 하는 말에 태영은 참을 수가 없었다. 힘주어 안으면 그가 아프다는 것을 알면서도 뼈와 살을 뚫고 나올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정말, 한순간도 떨어져 있지 않았던 거예요.”

태영은 은재의 윗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며 속삭였다.

숨소리가 벅차게 차올라 헐떡이는 은재의 숨을 마시며, 낮게 갈라진 음성을 토해 내며 말했다.

“우리가 만난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한 번도 헤어지지 않았어요.”

은재가 태영의 뒷덜미를 붙잡아 당겨오며 입술을 꾹 눌렀다. 혀 대신, 서로를 깊게 이해하는 숨을 마시며, 입술을 맞대고 속삭이며 몇 번이나 미끄러지는 손에 힘주어 당겨 안았다.

눈꼬리를 타고, 속눈썹을 적신 물기를 닦아내며 이마를 맞대고 뺨을 맞댄 채 거푸 안고 또 안았다.

한 번도 헤어지지 않았던 연인들은 앞으로도 영영 헤어지지 않겠노라 그렇게 약속했다.

* * *

그해 초여름, 귤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민아영. 민 회장과 은재의 성을 따고, 태영의 이름을 넣은 알파 여자아이였다.

아영이가 아장아장 겨우 걸음마를 옮길 즈음, 태영과 은재는 멀지 않은 섬에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는 세헌도 참석했고, 의준과 테오를 비롯한 문화 재단의 새로운 직원들과 가까운 지인들도 모두 참석했다.

극비리로 입수한 그들의 결혼식 사진은 신문 1면을 도배했고, 그들이 서로에게 각인했다는 사실 또한 공식적으로 확인이 되었다. 

로망스(Romance)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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