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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는 철문을 지나쳐 들어오면서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에린도 상황은 비슷했다. 오십 평생 살아오며 이렇게 커다란 저택에 발을 디딘 적은 없었다.
꼭 프랑스에 있는 고성이 떠오르는 분위기였다. 그것보다 훨씬 한국적이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풍기는 저택이었지만, 정원을 지나 길게 이어진 가로수 길을 통과하며 드러나는 저택을 본 순간 그 웅장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눈이 이리저리 바삐 돌아갔다.
요즘 기자들이 많으니 이리저리 빙 돌아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믿어지지 않는 규모가 드러났다. 널따란 대지 전반이 잘 관리된 듯 보였고, 중간중간에 서 있는 건물들은 저택과도 자연스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심지어 외부에서 경호를 서고 있던 이들이 차량 앞뒤로 따라붙어 안쪽까지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저택 입구에 도착하자, 정장을 차려입은 사용인이 나와 경호원으로부터 이들을 인계받으며 인사를 건넸다. 때마침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태영도 짧게 손을 흔들었다.
“딱 맞게 오셨네요.”
“……한 대표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부자구나.”
“제가 아니고 이사님이 부자세요.”
“장난 아니다. 하긴, 대경이었지…….”
아직도 입을 다물지 못한 테오가 에린을 따라 엉거주춤 차에서 내렸다. 윤 비서는 안으로 이들을 안내했고,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태영은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한 대표한테 잘 보여야겠네.”
“뭘요.”
“나 일 열심히 했어, 한 대표! 내가 네 일까지 많이 했잖아.”
“그래. 알아.”
테오와 에린은 괜한 소리를 하며 전실로 들어섰다. 작지 않은 크기의 전실에는 그림 몇 개와 조각상 같은 게 놓여 있었다. 그곳을 지나 들어가니 높은 층고의 실내가 나타났고, 양옆으로 복도가 길게 이어진 것이 더 많은 공간이 안쪽에 자리한 듯했다.
적재적소에 놓인 그림들과 물건들이 예사 것이 아닌 건 너무 분명하게 느껴졌다. 제법 시간의 흐름을 지닌 것들도 보였지만, 그것은 곧 이 저택의 주인이 오랫동안 부자였음을 증명하는 표시였다. 사치스러운 것은 없었으나 부유의 냄새가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서 느껴졌다.
“저 옆에 있는 건 뭐야. 저것도 집이야?”
“아, 예전에 나 펜싱 연습한다고 이사님이 만들어 주신 거야. 그 전에는 축구장이었는데 지금은 안 써. 나중에 애기 놀이터를 짓든지.”
“그럼 저 뒤에 거는?”
“차고.”
“그러면 저기 저거는? 정원 초반에…….”
태영은 대강 대답하며 제일 큰 응접실로 이들을 이끌었다. 안으로 들어설수록 테오의 눈이 더욱 크게 뜨이고 있었다. 봐도 봐도 구경할 것이 넘치고 있었다.
“진짜 크다…….”
응접실은 간단한 가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층고가 높았고, 몇 개의 악기와 장식용 가구 같은 것도 보였다. 복도로 보이는 것을 슬쩍 들여다보니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용도가 아닌, 응접실을 안과 밖으로 살짝 구분해 놓은 복도였다. 이 광활한 크기가 모두 응접실인 셈이었다.
그 놀라운 규모를 구경하고 있자니 어느새 맛있는 냄새가 솔솔 스며들어 왔다.
“이렇게 큰 집에서도 냄새는 퍼지는구나.”
테오가 혼잣말처럼 이야기하자 에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밖에서 보던 것보다 실내에서 느껴지는 저택의 규모가 훨씬 더 컸기에, 황당하지만 그 말에 공감이 갔다.
“태영아.”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은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 저택인데도 잠시 응접실 입구에 서 있던 은재는 살짝 웃으며 들어왔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설프게 자리에서 일어선 이들을 마주했다.
이전에 보았던 것보다…… 은재는 훨씬 더 편안해 보였다. 정장을 입고, 머리를 넘겨 완벽한 총수의 모습을 보일 때도 우아함이 철철 흘러넘쳤는데, 가볍게 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에도 그 고상함은 가시지 않았다. 요 근래 혈색이 더 좋아져 미모가 도드라졌다. 빛이 가까워지며 넓게 퍼지는 게 그 얼굴 때문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심지어 아이를 품고 있음에도 여전히 늘씬한 몸이었고, 희고 매끄러운 피부가 시선을 당겼다. 왜 그렇게 태영이 나와 일을 하는 동안 절절매는지, 잠시라도 통화가 되지 않으면 전전긍긍을 하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 저택의 주인이라는 게 어울리고, 또 어울리지 않고…….
“별 건 아니지만 귤을 주로 드신다고 해서요. 귤정과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도 얼이 빠져 있는 테오 대신 에린이 들고 온 것을 내밀었다. 원래도 익숙지 않은 한국말이 이 순간은 정말 더 어색하게 굴러 나왔다.
“이런 거 준비 안 해 주셔도 되는데요. 그래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부드럽게 음성을 낸 은재가 정과를 받아 들었다. 그 잠깐도 무거운 것을 들게 할 수 없던 태영은 곧장 그것을 가져가며 은재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이전에 뵙고 또 뵙네요. 초대가 늦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반갑습니다!”
은재는 굳어 있는 테오에게도 인사를 했다. 그러자 테오가 부르르 몸을 떨며 인사했다. 은재는 조금 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 태영이가 두 분을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아서요.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리려 준비한 자리입니다. 편하게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식사부터 할까요?”
“그래. 그러자.”
혼자만 있어도 누구나 형질을 알 수 있는 우성 알파인데. 제 연인 옆에 서자 태영은 더욱 듬직해 보였다. 제 몸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오메가를 품에 안듯이 감싸 걸었다.
열성 알파인 테오의 페로몬이 혹시 불편할까 연신 살피고, 페로몬으로 감싸며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품이 은재에게도 아주 익숙해 보였다.
자리에 앉자 화려한 요리들이 끊이지 않고 놓였다. 태영의 페로몬에 불쾌해하며 정신을 차렸던 테오는 다시 눈이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입을 벌렸다. 테오의 집 또한, 망하기 전에는 그래도 유복한 집이었는데. 이런 곳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많이 드세요. 저희 직원들이 정성껏 차렸습니다. 부족하면 말해 주시고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맛있게 먹겠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와인 잔을 챙겨 들고 은재와 눈을 맞추며 개구지게 웃기도 했다. 은재는 그런 테오의 모습에 웃으며 와인 대신 주스를 머금었다.
별다른 말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무난했다. 테오가 너무 맛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띄웠고, 태영은 부지런히 고기 같은 것을 잘게 잘라 은재의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단단한 음식들은 미리 칼집을 내 넘겨주었고, 껍질을 까야 하는 요리들은 모두 태영의 손에서 해체되었다.
“너 먹어, 태영아.”
“저 많이 먹었어요. 이사님은 2인분씩 드셔야 하잖아요. 어서 드세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시중 받는 게 민망한지 은재가 슬쩍 귀를 붉히며 말했다. 그 음성이 정말 보호자 같고, 동시에 연인 같았다. 제일 연장자인 에린은 은재의 부드러운 말투에서 제 알파를 향한 애정과, 제 아이를 향한 애정이 동시에 살아 숨 쉬는 것을 느꼈다.
챙김을 받는 게 좋으면서도 어색하고, 또 제 아이가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었다.
“영국에 있었을 때 서로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오래된 인연이라고요.”
식사가 절반 정도 진행되었을 때, 은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태영이가 그때 어떻게 지냈는지 늘 궁금했거든요.”
“태영이야 뭐…… 워낙 인기가 많았어요. 저도 도움 많이 받았고요.”
대답을 하고 나선 건 테오였다.
“도움이라면…….”
“갑자기 좀 힘들어져서 유학을 중단해야 했거든요. 그때 한 대표가 도와줘서 남았고요.”
“별 건 아니었어요.”
태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감자를 콕 집어 은재의 입가에 대 주었다. 테오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에린은 이제 그 모습이 귀여워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고, 은재는 난처하게 주변을 살폈다.
“빨리 드세요. 너무 못 드셨잖아요. 아가 태영이 버티시려면 살찌셔야 하는데.”
하는 수 없이 은재가 그것을 받아먹었다. 태영은 그제야 좀 만족스러운지 와인 잔을 집었다. 저도 모르게 태영이 울대를 들썩이며 와인을 마시던 것을 보던 은재는, 나중에야 절 바라보는 테오와 에린의 시선을 발견하고 어설프게 웃었다.
에린은 소리 없이 웃으며 테오를 바라보았다. 신혼이네, 그들의 얼굴에 비슷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별로 고지식한 대표는 아니에요. 컨테이너에서 일할 때부터 힘쓰는 일은 한 대표가 다 했고요. 사람들도 한 대표를 많이 의지해서 한번 작업한 사람들하고는 꾸준히 연락도 하고, 또 다른 작업도 하고 그랬어요.”
네 사람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제 이야기를 하는데도 태영은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은재의 곁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은재의 손을 잡았다가 손가락을 보고, 또 귓불 같은 데를 건드렸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렸으니까 간혹 무례하게 구는 사람도 있었는데, 뭐. 알아서 잘 처리하더라고요. 어쨌든 저희는 그랬어요. 한 대표는 영국의 메디치라고. 한국의 메디치인지도 모르겠지만.”
은재는 간지러움을 많이 타는지 웃으면서도 테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태영의 장난이 심해질 때는 손을 꼭 잡으며 눈썹을 살짝 구기기도 했다. 그러면 태영은 입을 맞추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로 어깨에 이마를 비벼댔다.
또 은재가 제가 아닌 테오의 이야기에만 몰두하는 것 같으면 손을 뻗어 지그시 뺨이나 턱을 감싸 제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몸이 달아 죽겠다는 눈빛으로 은재를 훑으며 대신 인중과 뺨 같은 데에 겨우 입을 맞추고 물러났다. 그러다가도 이마를 어깨 같은 데에 비비며 시선을 요구했다.
은재만 밖에서 보았던 것과 다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숭은 태영이 더했다. 사람들과 잘 지내고, 그를 의지하는 사람이 많은 건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는 무뚝뚝하고 우직한 성격을 내보였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고 성가신 일에는 시선도 던지지 않았다.
가끔 그의 독보적인 외모 때문에 다른 뜻을 품고 접근하는 오메가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말도 한 마디 붙이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여유가 묻어나는 분위기에 그의 배경에 대한 여러 소문이 생겨날 때에도 끝끝내 입을 열지 않기도 했다. 덕분에 에린은 작년에야 태영이 대경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런 꼴이라니.
그렇게 선을 긋기로 유명하던 알파가.
“아, 한 번은 좀 큰 소동도 있었어요. 워낙 눈에 띄는 우성 알파니까 가끔 만나자고 애원하는 오메가들이 있었거든요. 그런 쪽으로도 인기가 많을 수밖에요.”
“그런 이야기는 왜 해.”
하지만 은재는 궁금했는지 태영의 말을 막으며 다시 테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테오는 신이 나 이야기를 이어 갔다.
“원래도 항상 반하는 사람들은 많았어요. 베타한테도 고백을 받았다니까요.”
“그 소동은 어떤 거였는지 궁금한데요.”
“아, 그거요. 소프라노였나. 오페라 가수였어요. 저희랑 작업 중이던 어떤 화가랑 친구여서 한번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때부터 한 대표한테 관심을 많이 보이더라고요. 만나자고 몇 번 그랬는데 어찌나 지독하게 거절하던지 제가 다 민망하더라니까요. 심지어 파티도 거절하고요.”
정 실장은 소리 없이 다가와 새로 와인과 치즈, 하몽과 크래커를 놓아 주었다. 은재의 잔에도 새 주스와 탄산수를 채워 주었고, 에린을 위해 커피를 또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모두가 각자 다른 것을 마시고 있었지만 미묘하게 섞여 한 공기를 마셨다.
“울고불고 집 앞에 찾아왔는데도 파티는 절대 안 갔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저희 공연 피날레 파티에 와서 태영이 잔에 글쎄 약을 타 가지고…….”
“거기까지만 해.”
태영은 잔에 손을 뻗으며 테오를 제지했다. 그제야 태영의 눈빛을 확인한 테오는 말을 꿀꺽 삼켰다. 태영은 은재의 시선이 닿을 때면 감추고 있던 그을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경고를 보내는 중이었다.
지금도 뺨을 은재에 어깨에 기대고는 까맣게 가라앉은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저 깨끗해요. 걱정 마세요.”
“알아.”
“마, 맞아요. 그건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 매번 러트 때마다 약 먹고 틀어박혀서 안 나왔거든요. 파티도 거의 안 가고. 그래서 언제는 다들 분명 한 대표는 고자라고 내기를…….”
하지만 테오는 영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에린이 옆구리를 찌르고 나서야 입을 다물 수 있었다.
테오는 재차 태영을 돌아보고는 크게 몸서리를 쳤다.
“하하…… 제가 취해서 별 이야기를 다 하네요……. 어떡하죠…….”
그래도 은재는 기분이 나빠 보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제 옆에 앉아 뺨을 기울이는 태영을 바라보다 고개를 젓기만 했다.
“너무 오래 있었나 봅니다. 여러모로 피곤하실 텐데요. 저희가 생각이 짧았네요.”
“아니에요. 전혀 아닙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괜찮으시면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또 불러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결국 그쯤에서 에린이 테오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오는 아무래도 제가 뭔가 실수를 한 것 같았는지 횡설수설하며 말을 덧붙였다.
“하여튼 이사님…… 다들 한 대표를 많이 믿어요. 그래서 사실 이번에도 영국에 출장을 가야 하는데, 안 간다고, 저한테 가라고……. 거기는 정말 한 대표를 보고 일을 주는 거라 가야 하는데…….”
“테오, 그만해.”
보다 못한 에린이 그 입에 크래커를 욱여넣으며 말렸다. 테오는 시무룩한 얼굴로 태영과 은재를 번갈아 보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는 말도 따라 나왔다.
그 모습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태영이 한숨을 뱉었다. 은재는 그런 태영의 손목을 붙잡아 살짝 밀었다. 배웅을 하라는 것이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태영은 에린에게서 테오를 뺏어 어깨에 걸치고 걸음을 옮겼다. 종이 인형처럼 팔랑거리며 끌려간 테오는 앞서 사라졌고, 에린은 감사했다는 점잖은 인사를 한 번 더 하고 그 뒤를 따랐다.
아악! 미안해……! 테오는 차에 실리면서도 그렇게 외쳤다. 태영은 묵묵히 그를 실어 보냈다. 차가 우렁차게 정원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은재는 먼저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사님.”
약간 차가운 공기와 함께 등 뒤가 무거워졌다. 은재에게 다가와 덥석 끌어안은 태영은 뾰로통한 얼굴로 뺨을 비볐다.
주변을 에워싼 차가운 공기와 달리, 약간 술이 들어가 더 뜨거워진 몸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 잠깐 저택을 나섰다고 정원에서 조금씩 피어나는 풀향이 몸에 묻은 것도 같았다.
“화나셨어요?”
은재는 웃으며 복도를 걸었다. 제 무게를 싣지 않고 은재를 쫓아 걸은 태영은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은재의 앞으로 돌아가 눈을 맞췄다.
“네? 화나셨어요?”
“화가 왜 나.”
“……그러게요.”
그 미소를 보고 나서야 태영은 마음이 놓이는 듯 뺨을 맞대고 비비며 마구 애교를 부렸다. 은재는 태영의 머리카락을 흩트려 주며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출장 가.”
“화나셨네. 다짜고짜 출장 가라고 하시고.”
“안 났어. 네가 필요하다니까 그렇지.”
“거짓말.”
“……아! 태영아. 놀랐잖아.”
이미 침실에 들어섰는데도 태영은 은재를 번쩍 안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아가 태영이가 생긴 이후 자주 들려 다녔지만, 갑작스러워 놀란 은재가 숨을 내쉬며 그를 마주했다.
태영은 사과의 의미로 입술을 내리며 은재의 허리를 도닥였다. 은재도 조금 더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좋았어. 사람들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 수 있고…….”
그리고 조금 더 가까워진 것도 같고……. 주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은재는 조금씩 태영의 옆자리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보호자로서 그 시간을 알고 싶은 점도 분명 있었지만, 어느샌가 슬그머니 색이 바뀌어 있었다.
태영의 곁에 있는 사람과 저도 잘 지내고 싶었다.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 제가 태영의 연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이제 태영만 은재를 욕심내는 게 아니었다. 은재는 태영의 친구들에게, 그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아홉 살이나 많은, 또 영원히 보호자일 제가 누구나 반기고 좋아하는 알파의 연인이라는 것을 그들에게도 인정받고 싶었다.
너무나 사랑하고 애가 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런 속내가 부끄러워 말할 순 없었지만.
“인기 많았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정말 그랬다니 귀엽기도 하고.”
커다란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한 태영은 은재의 옷을 손수 벗겨 주며 그 옆에 바짝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곧 그것도 안 되겠는지 은재를 들어 올려 제 위에 앉혔다.
물어보지 않아도 엉덩이를 찌르는 두툼한 막대기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 은재는 잠자코 앉아 숨을 골랐다. 태영은 그 희고 늘씬한 등에 연신 입을 맞췄다.
“……기분 좋다.”
은재가 길게 숨을 토하며 말하자 태영은 살짝 부푼 배를 감싸 더 진하게 입술을 묻었다. 흰 등 군데군데 사랑받은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그 위로 새로운 흔적이 새겨졌다.
* * *
또 며칠을 저택에서만 지내던 은재가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이전, 방문했던 미술관의 전시가 끝나 그림을 가져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관장은 은재의 몸 상태를 배려해 직접 옮겨다 주겠다고 했지만, 은재는 직접 나서기로 했다.
며칠 동안 안에만 있었더니 외출을 하고 싶었다. 그사이 날씨도 서서히 누그러지고 있었고, 잠깐의 외출이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 주변에 가득히 보였던 기자들도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저택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하나둘씩 포기를 한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은재는 귤이가 자고 있는 배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마침, 보육원에서 아가 알파에게 영상 메시지가 도착했다. 깍두기 알파. 태영의 가장 어린 라이벌.
―……이사님. 저 시윤이에요. 이사님 보고 싶어요…….
그새 아이는 조금 자란 듯 보였다. 아직도 아기 티가 줄줄 났지만, 씩씩하게 카메라 앞에서 짧은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하트를 그리고 있었다. 은재를 기다린다고, 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시윤이가 꼭 보내고 싶다고 해서요.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뒤이어 원장 선생님의 염려가 어린 메시지가 도착했다. 은재는 전화를 걸어 요즘 방문이 뜸해진 이유로 임신 소식을 전했다. 이미 기사로 확인을 했겠지만 원장은 축하드린다며 기쁜 목소리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아무래도 근래에 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 대신 태영의 편에 이것저것 보내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귓가에 깍두기 알파의 목소리가 맴돌아 영상을 보다 보니 미술관 근처에 다다라 있었다.
원래 아이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은재는 언젠가 백화점에서 아이를 만나고, 또 아이가 제법 익숙해진 것 같다고 말하던 강 비서의 말을 떠올렸다.
“이런 날도 오네요.”
그래서 앞뒤 맥락 없이 말했다. 강 비서는 구태여 무슨 뜻인지 묻지 않고 작게 웃었다.
오랫동안 곁에서 일을 해 온 사람이니 눈치로 상황을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미술관에 오는 내내 차 안에서 깍두기 알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으니까.
오늘은 방문을 미리 알린 탓에 주변이 정돈되어 있었다. 사람들도 하나 보이지 않았고, 편안할 정도로 고요했다. 얼었던 호수는 테두리에서부터 서서히 녹고 있었고, 낙엽으로 가득 찼던 길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조금씩 녹색의 싹이 보이는 조경이 다가올 봄을 알렸다.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쳐 온 은재는 나와 있는 관장과 반갑게 인사한 후 다시 그림을 둘러보았다. 이전에 미리 구매를 했던 그림 외에도, 아가 태영이의 방에 걸어 주면 좋을 그림을 하나 골라 구매했다.
“커피 괜찮으신가요?”
“네. 한 잔쯤은 마십니다.”
“다행이네요. 그땐 먹고 싶은 걸 못 먹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없는데요.”
관장은 달큼한 냄새가 나는 커피를 두 잔 타와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커피와 곁들이면 잘 어울릴 만한 쿠키와 케이크도 놓여 있었다. 은재는 먼저 커피로 속을 데우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몸이 안 좋으셨다고 들었는데……. 이젠 괜찮으신 건가요?”
“이제 많이 좋아졌습니다. 임신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네요.”
오십 대를 넘어 이제 육십 대에 들어선 차 관장은 공감 어린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저는 둘을 낳았습니다만 둘 다 지독했죠. 입덧이 워낙 심해서 저도 한동안 누워 있던 기억이 있네요. 심지어 그때는 산모에게 커피라니, 말도 안 되는 시절이었지요.”
귤이는 이 대화를 듣고 있는지 퉁, 하고 발길질을 했다. 은재가 손으로 배를 지그시 덮었다.
“식은 언제쯤 생각하시는지 여쭤도 될까요?”
“글쎄요.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다 하면 할까 싶은데…… 사실 좀 여러 생각이 드네요.”
관장은 묵묵히 잔을 들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관장님께서도 이제 다 아시겠지만 제 아이였던 친구여서요. 그런 아이와 식을 공개적으로 올리는 게 가능할까 싶네요.”
“고작 식일 뿐인데요.”
“네. 그렇죠.”
“이렇게 겨우 손을 잡으셨는데 더 남들 눈을 신경 쓰실 이유가 있을까요.”
“…….”
“민 이사님의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이렇게 기자들이 아직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기자들이, 또 사람들이 어릴 적부터 어떤 이야기를 붙여 왔는지 어떻게 모를까요. 막상 민 이사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직접 겪은 제가 더 잘 알고 있는데요.”
종종 만남을 갖고, 이렇게 시간을 갖는 사람이었지만 가까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은재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거리를 유지했고, 적당한 인품을 보여 주었다.
“민 회장님을 많이 닮으신 분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묵묵히 견뎌 오신 것도 보았고요. 그런데 이 일에서까지 그러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한 번도 민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 없던 차 관장이 미소를 지은 채 다과를 밀어 주었다.
“때로는 강한 수도 필요하니까요.”
그 생각도 물론 있었지만…… 은재는 옅게 웃으며 쿠키로 손을 뻗었다. 달콤한 향을 풍기는 쿠키를 작게 부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결혼식 날에 걸어 놓을 그림도 몇 점 더 사야겠네요.”
“그런 의도로 말씀을 드린 건 아니지만, 거절은 못 하겠네요.”
차 관장은 조금 더 크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상에서 간략하게 정리된 파일 하나를 가지고 오더니 이내 그것을 은재의 앞에 펴 보여 주었다.
“올 한 해 예정된 일정입니다. 미리 확인해 보시고 말씀 주시면 저녁에 비워 두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든 편하게 연락 주세요. 아, 그리고 곧 류 전무의 미술관은 폐점 조치가 될 예정이라서요. 들으셨죠?”
“……아, 네.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마 전까지도 구속 조사를 받는 것 같더라고요. 미술관도 초반에는 이어서 할 회사를 찾더니, 아예 닫는 모양입니다.”
몇 주 전, 류 전무의 구속 소식이 뉴스에 전해졌다. 불법 투기 의혹이라는데……. 은재는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지 않아 굳이 내용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정당과 연계된 비리 의혹과 봐주기 수사 의혹이 연달아 터져, 류 전무가 손을 댔던 사업 전반에 감사가 들어갔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미술관이 소속되어 있는 일성의 경영 실적도 문제가 있어 곧 이사회가 소집될 거라는 소문도 파다하게 돌았다.
자연스레 미술관의 주인이 바뀔 거라 생각은 했지만…….
“아, 이 작가 전시회가 열리네요.”
“네. 이사님이 좋아하시는 취향일 거라고 저도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재원 문화 재단에서 애를 쓴 것 같더라고요.”
“재원 문화 재단이요?”
“네. 한 대표님께서 한동안 오가셨거든요. 규모가 큰 작업을 하는 분이시다 보니 한국에서 전시를 열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없었는데 저희와 논의가 완료가 되었어요. 저희 별관이 적절하게 어울려서요. 그 외에도 내후년 작업쯤을 논의하고 있는 게 있고요.”
“…….”
“또 저희 외에도 I 미술관하고도 일을 많이 하시는 것 같던데요. 작가분과 꽤 가까워 보이셨고요.”
은재는 듣지 못했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들으며 일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는지 차 관장은 조금 난처한 얼굴이 되어 실수를 했는지를 물었다.
은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문화 재단의 일이고, 문화 재단의 사정은 은재에게 보고할 이유가 없었기에 당연한 걸 알면서도 왠지 모를 기분이 들었다.
태영의 일은…… 다 알고 싶었다.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지, 어디서 열리는지 다 알고 싶었다. 황당하게도 그랬다.
사실 태영은 은재에게 일에 대한 이야기를 꽤 자주 하는 편이었다. 지금은 어떤 작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테오가 누구를 만날 것 같아요, 여기 지역 전시관보다는 여기가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음엔 공연을 올릴 건데…….
전혀 모르는 주제들도 있었고, 겨우 들어만 본 것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태영은 늘 은재의 의견을 물었고, 생각에 귀를 기울였다. 은재의 의견대로 일을 진행하지 않더라도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을 선호했다.
그런데 이 일은 왜 말하지 않은 걸까. 별것 아닌데도 점점 더 서운해지려는 것 같아 그쯤에서 고개를 털어 버렸다.
“그때 그럼 또 자주 뵙겠네요.”
“네. 그렇겠네요.”
은재는 애써 덤덤한 척 커피를 마셨다. 별일 아닌 것을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 관장과 대화를 마치고 나오니 태영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걸려와 있었다. 은재는 그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그의 회사가 있는 쪽으로 차를 돌렸다.
가까운 카페에서 커피 몇 잔을 사 들고 건물에 들어서니, 마침 1층에 나와 있던 테오가 놀라 손을 흔들었다.
“이사님. 어쩐 일이세요?”
“잠깐 나왔다가 태영이 좀 볼까 해서요.”
“아…… 지금은 조금 애매한데. 미팅이 있어서요.”
“전화를 하고 올 걸 그랬네요.”
“안 그래도 미팅 들어가기 전에 이사님하고 전화가 안 된다고 어찌나 찡찡거리던지. 그 큰 몸으로 성질을 부리면 얼마나 무서운지 이사님은 모르시죠?”
테오는 자연스럽게 은재의 손에 들린 것을 가져가며 건물 안으로 은재를 이끌었다. 처음 와 보는 공간이었지만, 묘하게 묻어나는 태영의 페로몬과 분위기에 은재는 주변을 살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건물을 통째로 쓰기는 하는데, 저희는 주로 꼭대기 층에 있어요. 그 밑에는 작업할 곳이 마땅치 않은 작가들이 쓰고요. 저희가 영국에서 출발하다 보니 한국에 급작스럽게 들어온 작가들이 많거든요. 한 대표가 그런 작가들 작업실을 지원하는 셈이에요.”
크지 않은 건물이라 금세 꼭대기 층에 올라왔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어딘가 낯설고도 익숙한 페로몬이 코끝을 스쳤다.
“지금은 피아니스트 미팅이 있어요. 오스트리아 쪽에서 꽤 이름을 알린 사람인데 한국계라 정착을 또 하고 싶은가 봐요.”
오메가 페로몬. 이전에 태영의 몸에서 느껴졌던 오메가 페로몬이었다.
태영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 없던 은재는 그 페로몬을 느끼자마자 주춤했다. 분명히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병원에서 느꼈던 그 페로몬.
먼저 내렸던 테오가 멈칫하며 뒤를 돌더니 급하게 다가와 손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막았다. 은재가 내리지 못한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있었다.
“이사님!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아요. 생각을 좀 하느라.”
“저희가 건물이 오래되어서 엘리베이터가 빨리 닫혀요. 다치시면 안 되는데……. 정말 괜찮으시죠?”
엉겁결에 이끌려 더 깊은 공간 안으로 발을 디디니 그 페로몬이 더 선명했다. 태영에게 잔뜩 호감을 지닌 페로몬이었다. 끝이 달고 끈적한 것이 알파를 유혹하려 들고 있었다. 태영은 이미 저에게 각인을 해서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하지만, 그래도 느낄 수는 있을 텐데…….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은재를 테오가 곤란한 얼굴로 부축해 소파로 이끌었다. 겨우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불쑥 닫혀 있던 안쪽 문 하나가 열렸다.
눈썹을 크게 찌푸린 태영이 갑작스레 나타난 것이었다.
“이사님?”
“……미팅 끝났어?”
“아직요. 그건 아닌데……. 여기까지 말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각인 때문인지 은재의 상태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한 태영은 다소 찌푸린 낯으로 달려와 은재의 몸을 살피곤, 이내 제 페로몬으로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 다정하고 익숙한 페로몬을 맡으면서도 은재는 편안함 대신 묘한 기분을 느꼈다. 오메가가 태영의 몸에 보란 듯이 묻힌 페로몬이 그 끝에 묻어 있었다. 그래서 태영에게 안긴 기분과 동시에 그 오메가가 손을…….
“우욱.”
“……이사님! 괜찮으세요?”
결국 은재가 입을 틀어막으며 구역질을 했다. 놀란 테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 비닐봉지 같은 것을 찾으러 다녔고, 태영은 다급히 은재를 안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긴 다리가 성큼성큼 움직여 빠르게 화장실로 들어섰다.
“나, 놔줘…….”
번쩍 들려 이동한 탓에 멀미가 일어났다. 더 견디기가 어려워져 은재가 이를 물어 가며 말하자 태영은 화장실 문을 잠그곤 그를 내려놓았다.
“……욱.”
발이 닿자마자 은재가 참고 있던 것을 토해 냈다. 요즘은 이렇게 구역질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던 탓에 지켜보는 태영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는 다가와 은재의 등을 두들기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은재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꾸만 오메가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절 끌어안는 제 알파의 페로몬이 아닌, 그 알파를 탐내는 아름다운 오메가의 페로몬.
도대체 어떻게 페로몬을 뿌려 댄 건지, 태영의 가슴팍과 귓불 근처에서 그 페로몬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접촉이 있던 게 분명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구역질이 더욱 심해졌다. 이미 먹은 것은 다 토해 냈는데도 위장을 쥐어짜며 속을 게우고 있었다. 태영은 제가 해 줄 것이 없는 이 상황에 막막한 기분을 느끼며 계속 은재의 곁을 지켰다.
차라리 제가 대신 아프고 싶은 심정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럴 때는 몸을 바꾸고 싶었다.
“……나가.”
“싫어요. 여기 있을게요. 등 두드려 드리면 좀 나으시잖아요.”
“지금은, 별로…… 욱.”
은재는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하면서 연거푸 태영을 밀어냈다. 그게 저에게 묻은 오메가 페로몬 때문이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한 태영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났지만, 화장실을 떠나지 못했다.
“태영아, 나가…… 나가 있어…….”
끝내 은재가 젖은 소리로 힘겹게 애원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태영은 화장실을 나섰다. 지금도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진 않지만, 그 울음소리 같은 것을 듣고 차마 그 뜻을 꺾어 누를 순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발이 추를 매단 것보다 훨씬 더 무거웠지만 끝끝내 잠갔던 문을 열고 나와 섰다.
하……. 깊고 막막한 숨이 터져 나왔다.
“어떠셔.”
사색이 되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테오가 다가와 물었다. 태영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근데 왜 나왔어.”
“보여 주기가 싫으신가 봐. 약해지는 거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으셔.”
“…….”
“저건 뭐야.”
“이사님이 오시면서 들고 오셨어.”
화장실 문에 기대어 안쪽을 들여다본 태영은 그제야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발견했다. 거듭 한숨이 터졌다.
“오늘은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그때, 아직까지 미팅 룸에 있던 피아니스트와 그의 매니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에 또 자리 하죠.”
요즘 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마주치기는 하지만…… 별로 달갑지 않은 인물이었다. 나름 부족함 없는 집에서 자라 거리낄 것 없이 예술을 한다는 우성 오메가였다. 그의 곁에 달려 있는 온갖 추문들은 개의치 않았으나 그의 노골적인 태도는 달갑지 않았다.
태영은 제 욕망과 욕구를 드러내는 이들에게 별다른 생각을 가진 적 없었다. 제가 그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허다했고, 형질과 성별을 막론하고 다가오는 이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사생활이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오메가는 제법 독했다.
다른 작가의 소개로 그를 처음 만났던 날, 태영은 그와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는 끈질겼다. 제 공연을 거절하면, 현재 재단에서 담당하고 있는 제 지인들의 작업을 모두 끊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당장 두 달 뒤에 올릴 공연마저 문제가 생겼다. 그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그를 소개해 준 작가가 긴밀히 부탁을 해 왔다. 제가 큰 빚을 진 것이 있는데, 한 번만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간곡한 부탁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 뜻을 따라 주고는 있었는데, 점점 그의 아슬아슬함이 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태영이 은재와 결혼을 약속했고,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불륜 따위는 유희와 비슷하다는 태도였다. 어쩌면 은재와 태영의 관계가 거짓일 거라고도 믿는 듯했다.
약 기운을 견뎠던 것이 제일 버거운 일인 줄 알았는데, 일을 건드리는 상대를 만나니 또 다른 쪽으로 교묘하게 신경이 긁히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일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나. 이런 상대들은 오히려 거부하는 반응을 내보이면 더 날뛰기에 놔두었는데…….
“오늘 이렇게 미팅을 중단하신 값은 충분히 보상해 주시겠죠?”
피아니스트는 다가와 태영의 넥타이를 툭툭 털었다. 손끝으로 태영의 턱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야살스러운 덧니가 보이게 웃어 보였다.
“보상은 여러 가지로 받을게요. 술이나, 시간이나……. 그러면 호텔에서 뵐까요?”
이것이 기회다 싶었는지 그는 태영의 두툼한 가슴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내려와 종내에는 벨트를 톡, 건드렸다.
“……이사님!”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며 지켜보던 태영은 테오의 소리에 미간을 구기며 뒤를 돌았다. 어느새 화장실에서 나온 은재가 그 장면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이사님, 몸 좀 괜찮으세요?”
하얗게 질린 얼굴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재는 태영의 바로 앞에 서서 싱그럽게 웃고 있는 오메가를 잠시 바라보더니 곧 제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또 그러세요? 약 사다 드릴까요? 아니면 집으로 갈까요?”
“누구셔.”
“아, 피아니스트예요. 재단하고 일을 하고 있는 중이긴 한데…….”
“안녕하세요. 민은재 이사님. 한시호라고 합니다.”
예쁘게 눈웃음을 지은 피아니스트가 태영의 옆으로 고개를 빼꼼 빼며 인사했다. 그는 이미 은재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은재와 태영이 어떤 사이인지 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가 못 볼 꼴을 보여 드렸네요. 일도, 방해한 것 같은데.”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요.”
태영은 대신 대답하며 은재를 끌어안았다. 다른 이들에게 은재가 보이지 않도록 안으며 조금 전 사용한 미팅 룸이 아닌, 다른 방에 그를 데려가 눕혀 놓았다.
이전보다는 가라앉았지만 아직 속이 불편한 눈치였다.
“물 좀 가져다드릴까요?”
“……그래.”
담요를 끌어 올려주고 태영이 방을 나섰다. 여전히 밖에 서 있던 한시호의 앞에 다가가 숨을 터뜨렸다. 구겨지는 표정을 이제 참지도 않고 거만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은재의 앞에서는 순한 양과 같던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에 날이 서 알파들이 가진 특유의 사나움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가라앉는 눈빛 속에 혐오와 짜증이 새겨졌다.
“자기 오메가 앞에서는 귀여움도 떠시네요. 귀여워라.”
그럼에도 한시호는 꿋꿋했다. 오히려 그 모습이 더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역시 알파들은 이렇게 곁에 오메가가 있어야 더 멋있다니까.”
그래서 태영도 그 반반한 낯짝을 내려다보며 오만함이 깃든 얼굴로 말했다.
“한시호 씨를 참아 주는 건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난 이사님을 신경 쓰기에도 바쁩니다. 그쪽한테 나눠 줄 정신이 없어요. 그런데 한 번만 더 이딴 짓을 해서 내 신경을 거스르면…… 공연이고 뭐고 중단할 겁니다. 얼마나 손해가 나든, 이 꼴보다는 나을 테니까.”
태영은 뇌까리듯 낮은 음성으로 말하며 메고 있던 타이를 풀어 소파로 내던졌다. 풀어진 타이가 허물처럼 힘없이 소파 위로 추락했다.
“상황 파악이 아직도 안 되나 본데, 나는 아무리 나와 가까운 사람이었어도 이사님께 함부로 구는 사람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겨우 한시호 씨가 이렇게 굴면 곤란하지.”
그제야 매니저가 한시호의 손을 당기며 그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한시호는 꽤 자존심이 상하는 얼굴을 하고도 코웃음을 쳤다.
“내 안목은 어쩜 이렇게 곧은지……. 제가 뭐 이사님의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했나요? 공연 준비하면서 서로 즐기자는 건데요. 어차피 이사님 임신하셨다면서요. 건강하지도 못해서 요양 중이라던데, 오늘 보니 제대로 알파를 받아 주지도 못하겠네요. 당신같이 건강한 알파는 하루 참는 것도 고역일 텐데.”
“한시호 씨, 시호야 그만하자…….”
매니저가 한시호를 불러 보았지만 한시호는 더 빙긋 웃었다.
“워낙 알파들을 많이 봐서 그런가 전 페로몬 냄새를 맡을 줄 알거든요. 보니까 한 대표님 곧 러트가 오실 것 같은데……. 그때 연락 주세요. 깔끔하게 제가 채워 드리고 떨어질 테니까요. 서로 윈윈하자는 거 아니겠어요?”
쪽, 한시호는 비쥬를 빙자하여 태영의 뺨을 감싸 붙이고 입을 맞추는 듯한 소리를 냈다. 태영은 그의 손을 붙잡아 거칠게 털어내며 문을 턱으로 가리켰다. 매니저는 황급히 한시호를 끌고 사라졌고, 그 공간에는 흉흉한 정적만이 남아 있었다.
곧장 화장실로 향했던 태영은 손과 뺨을 여러 번 씻고 나와 물을 따랐다.
“……너 곧 러트야?”
가득 차 있던 페로몬을 내보내려 테오는 어느새 창문을 하나하나 열고 있었다. 아직까지 불쾌한 얼굴의 태영은 차가운 물로 입 안을 헹구며 침묵했다.
“약 구해다 줘?”
“있어. 괜찮아.”
“……출장 가. 너 그때 집에 있으면 이사님이 어떻게 하실 것 같아.”
“자기랑 보내자고 해 주시겠지.”
태영은 지난번 은재의 검진 때 제 러트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요즘 몸이 무겁고 자꾸 허리가 뻐근해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날짜가 다가오자 생각이 많아졌다.
제가 러트를 함께 보낼 오메가는 은재 하나뿐이었지만 위험했다. 최 박사는 지나치게 과격한 행위만 아니라면 함께 보내는 편이 오히려 나을 거라 했지만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인생에서 오메가라곤 유일하게 하나, 은재만을 알았다. 그래서 은재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춰 주기만 해도 배가 당겼다. 은재가 전화를 해 오면, 그 음성만 들으면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정신을 차리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매일 그와 했던 전화를 들으며 회사에서 어떤 꼴을 보이는지…….
“이사님.”
은재는 태영이 들어가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왔다. 두르고 있던 담요를 곱게 접고는 태영에게 손짓했다.
“잠깐 얼굴 보려고 왔던 거야. 일 방해했어?”
“아니에요. 그림 가지러 가신다고 하시더니. 잘 마무리하셨어요?”
“응.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같이 가요. 저도 들어갈게요.”
“일 많은 거 알아. 아까 차 관장님 만났는데 너 두 달 뒤에 전시 한다며.”
“……아, 그건.”
“왜 말 안 했어?”
은재가 차가운 손으로 태영의 뺨을 문지르며 물었다. 태영은 그 손을 감싸 뺨을 더 깊게 묻으며 곧 은재를 끌어안았다.
“저희 재단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저희가 하는 게 아니었어요. 영국에서 가끔 도와주던 단체 일이었어요. 지금 들어올 상황이 안 돼서 저희가 도운 거였고요. 제가 깊은 곳까지 관여하지 않아서 말하기가 애매했어요.”
“그렇구나.”
“숨긴 거 아니에요. 왜 숨기겠어요.”
옅게 웃은 은재는 천천히 태영을 떼어 냈다.
“알아. 너 믿어.”
사무실로 들어오는 찬 바람에 은재가 추운 듯 몸을 떨었다. 태영은 제 외투를 가져와 둘러 주며 그의 어깨를 감쌌다.
“같이 들어가요. 이렇게 혼자 못 보내요.”
“아냐. 강 비서도 있는데 뭘.”
“그래도 안 돼요.”
“한 대표.”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저 이사님한테는 한 대표 아니에요.”
태영은 초조한지 은재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더 깊게 다가와 안았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결국 은재는 양손을 들어 태영을 안아 주었다.
“그럼 퇴근할 때까지 기다릴게.”
“몸 안 좋으시잖아요.”
“괜찮아. 이제 괜찮아졌어.”
“…….”
“나 때문에 일 못 하는 거 싫어. 귤이가 방해하는 건 나로 충분해.”
달래듯 태영의 뒷덜미를 쓸어내리며 곧 손을 붙잡았다. 이마를 맞대고 윗입술을 마주한 채 입을 맞추듯, 속삭이듯 말했다.
“대신 누워 계세요. 급한 것만 끝내고 들어가요.”
태영은 소파에 담요를 다시 펼치고 서둘러 문을 닫았다. 이미 자리를 비운 테오의 의자를 끌어와 다리를 올릴 수 있도록 해 주었고, 편히 누워 쉴 수 있도록 커피와 물까지 챙겨 주었다.
“커피 감사해요. 잘 마실게요.”
그러곤 은재의 눈가에 입을 맞춘 뒤 그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은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근처에 놓인 책을 만져 보았다가, 깍두기 알파의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또 책을 보다가…….
“조앤한테 그냥 도와 달라고 해. 이번 일 우리가 도운 거잖아.”
“…….”
“일단 나중에 해. 그렇게 급한 건 아냐. ……알았다고. 내가 연락할 테니까.”
소리를 죽인 채 통화하던 태영이 제 손을 잡아 오는 손을 발견하고 시선을 돌렸다. 끊어. 태영은 가타부타 자세한 말없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숙였다. 잠에서 깨어난 은재의 포근한 입술을 물며 이마를 맞댔다.
정신이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숨결부터 나누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영국에서의 이야기였다.
“……그 소프라노는 끈질겼어요.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거든요.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물러나는 것 같더니, 다 알고 왔다면서 만나 달라고 했어요. 자기가 돈이 있으니 재단을 크게 후원할 수 있다면서요.”
사무실에는 어느새 불이 어둑어둑하게 내려져 있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다른 건물의 빛이 희미하게 공간을 가로질렀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어둠 속에 그려진 태영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은재는 크게 숨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태영의 손을 당겨 와 제 위에 올라올 수 있게 만들었다.
귤이가 깔리지 않도록 비껴 누운 태영이 은재를 조여 안았다. 허리에 손을 넣어 척추를 쓸어 주며 곧 아래로 손을 내렸다.
“나중에는 한 번만 자 주면 물러나겠다고 하더라고요. 전 파티도 즐기지 않아서 잘 가지 않았더니 다른 공연 뒤풀이 파티에 다짜고짜 왔더라고요. 그리고…….”
“약을 탔구나.”
“네.”
“……어떻게 참았어?”
“생각보다는 참을 만했어요. 혼자 풀면 되니까요.”
태영이 은재의 허리를 감싸며 동시에 은재의 엉덩이 사이로 진입했다. 벌써부터 물을 흘리는 그 조그만 구멍에 지그시 손가락을 넣으며 터지는 달큼한 신음을 삼켰다.
“애초에 모르면…… 애초에 그 감각을 모르면 그리워할 것도 없어요. 혼자 푸는 걸로 견딜 수 있어요. 오래 걸릴 뿐이지.”
질척이는 소리가 커져 갔다. 은재는 태영의 옷깃을 잡으며 숨을 골랐다. 손가락 하나일 뿐인데도 삽입이 이루어지지 않던 통에 감각이 간질간질 몸을 타고 올랐다. 몸이 절로 들썩이며 퍼지는 페로몬을 붙잡아 마셨다.
“……키스해도 돼요?”
태영은 조금 전까지 입술을 핥아 놓고 모른 척 물었다. 은재는 그 뺨을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를 벌려 그 사이에 태영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며 앓는 소리를 뱉었다.
은재의 젖은 점막을 핥으며 동시에 태영이 바지 버클을 풀었다. 흉흉하게 일어선 것을 대충 몇 번 흔들다 은재의 구멍에 대고 정액을 터뜨렸다.
“읏…….”
엉덩이 사이에서 퍼지는 뜨끈한 감각에 은재가 몸을 떨며 태영의 목에 입술을 붙였다.
“넣어도 돼…….”
삽입하고 싶은 것을 참느라 목 위로 도드라진 핏줄을 고양이처럼 할짝이며 말했다.
“조금 더 나중에요. 오늘은, 몸이 안 좋았잖아요.”
사정을 한 뒤에도 뻣뻣한 그것은 은재의 입구를 연신 찌르며 들어가기를 원했다. 은재가 엉덩이를 들며 넣으려 하자 태영이 제 것을 다급히 붙잡았다.
“다쳐요. 나중에.”
그러곤 그렇게 제 것을 흔들다 이내 은재의 엉덩이골에 대고 비비기 시작했다. 그렇게 은재의 손과 엉덩이를 빌려 사정했다. 그때마다 정액은 모두 은재의 구멍 위로 쏟아졌다. 빽빽한 주름을 적시고, 골을 적시며 뚝뚝 흘러내렸다.
저택으로 돌아가 함께 샤워를 할 때까지 은재는 태영의 진한 냄새가 제 몸 안에서 맴도는 것을 알고 많이 부끄러워했고, 또 욕실 바닥에 뭉친 정액이 떨어지는 모습에 자못 흥분했다.
비록 태영은 오메가 페로몬을 묻히고 있었지만…… 이제 그의 정액이 닿는 곳은 오로지 제 몸뿐이었다.
저만 그의 사정액을 받을 수 있었다.
* * *
“진짜 가요?”
세심한 태영은 한시호와 은재가 부딪쳤던 날 이후로 며칠간 출근을 하지 않았다. 함께 저택의 3층에서 각자의 일을 보았고, 그러다가 입을 맞추고, 몸을 더듬었다.
출근을 해도 되는데. 은재가 말하지 못한 불안이 남아 있을까 더욱 바짝 붙어 평소처럼 입맞춤을 요구하고, 안아 달라 팔을 벌리며 곁을 지켰다.
태영이 온종일 곁에 붙어 있어서 그런지, 은재는 이전보다 조금 더 나른함을 느꼈다. 이제 태영의 몸에서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페로몬만이 느껴졌다.
저에게 각인한 오메가를 위해, 그리고 그 배에 담긴 아이를 위해 페로몬을 풀어 줄 때면 온몸이 노곤노곤해지며 잠이 몰려왔다. 태영이 출근을 하고 난 뒤에도 꼭 낮잠을 잤어야 할 정도인데, 그와 함께 있자 토막잠이 더 늘었다. 아가 태영이가 태영의 페로몬을 기뻐한다는 것이 몸소 느껴졌다.
그건 좋지만…….
“빨리 갔다가 와.”
“혼자 계실 수 있겠어요? 제 일은 거기 있는 사람들한테 도와 달라고 하면 돼요.”
“안 될 것 같은데.”
태영이 은재의 곁에서 일을 보는 동안 정말 많은 연락이 쏟아졌다. 은재가 짧게 눈을 붙일 때마다 일들을 몰아서 처리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쉴 새 없이 연락이 들어왔다. 그게 영국으로 가서 확인해야 할 일 때문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어차피 출근도 안 하잖아. 집에만 있을 거니까 걱정할 일 없어.”
“제가 이사님 보고 싶어서 못 가요. 마음 같아서는 캐리어에 이사님 넣어서 들고 가고 싶은데.”
작게 웃은 은재가 태영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넘기며 만져 주었다. 엉망으로 머리카락을 붙잡아 넘겼는데도 또렷한 이목구비가 근사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보니 또 보내고 싶지 않지만, 조금 더 어른인 제가 마음을 굳게 다잡아야 했다.
“나하고 있을 때 자꾸 연락 오잖아.”
“하지 말라고 할게요.”
“한 대표.”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니까.”
태영은 굳어지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시무룩한 척 입술을 달싹였다. 은재는 그 입술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난 네가 인정받는 게 좋아. 사람들이 널 많이 신뢰하고, 찾아서 기뻐. 이렇게 잘 큰 게 늘 신기해.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오래 인정받았으면 좋겠어.”
“…….”
“할 수 있는 일이잖아.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다녀와.”
“또 속이 안 좋아지시면 어떡해요.”
“요즘은 잘 안 그래.”
“그러다가 제가 없는 데서 쓰러지시면요.”
“…….”
“또 저 때문에 괴로워지시면 저 못 살아요. 이미 저 때문에 여러 번 괴로우셨잖아요.”
그날, 호텔에서 그 장면을 본 것이 아직도 태영에게는 충격으로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은재는 불안을 떠올리는 제 알파의 눈을 들여다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 소년에게는 늘 좋은 것만 주고 싶은데. 좋은 것만 보게 하고 싶은데.
“이제 괜찮아.”
“…….”
“네가 있잖아. 이번에는 아주 잠깐 떨어져 있는 거고. 그럴 일 없어.”
은재는 손을 뻗어 태영의 네 번째 손가락에 걸려 있는 반지를 쓰다듬었다. 그 위에 입을 맞추고 마디마디마다 입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네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
“매일 전화하자. 얼굴 보고.”
“…….”
“잘하고 와.”
키스를 받은 손으로 태영이 은재의 뺨을 감싸 쥐며 이마를 맞댔다. 비슷한 숨소리를 웃음소리처럼 흘리며 코끝을 비볐다.
다음 날, 태영은 곧장 출장길에 올랐다. 도대체 얼마나 시급한 일을 미루고 있던 건지…… 말하자마자 바로 출발하는 모습에 은재는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나와 그를 배웅했다.
조금씩 날이 풀리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안개가 낀 이른 시간에는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태영은 제 손으로 은재의 뺨을 붙잡아 데워 주며 옷깃을 더 단단히 여며 주었다.
“공항까지 가고 싶은데.”
“나중에요. 귤이 낳은 다음에.”
“…….”
귤이를 낳은 후에는 출장지까지 같이 갈 수 있는데. 어제는 절 캐리어에 넣고 들고 가고 싶다고 하더니. 은재는 제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서운해지는 것을 스스로도 믿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귤이가 저랑은 매우 다른 성격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사이 짐을 모두 실은 윤 비서가 준비가 다 되었다며 다가와 말을 전했다. 태영은 차를 돌아보며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얼마 전, 새로 구매한 차량이었다. 차고에 이미 태영의 몫의 차는 여러 대 있었지만 은재는 또 새로 차를 사 주었다. 그냥…… 은재는 지금도 늘 태영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가 해 주고 싶었다.
“어디 아프시거나 무슨 일 생기면 꼭 말해 주세요.”
“응. 그럴게.”
“드시고 싶은 거 생겨도요.”
“알았어.”
“아가 태영이가 괴롭혀도 이르시고.”
은재가 옅게 웃자 태영이 고개를 숙여 배에 입술을 쪽쪽, 여러 번 내렸다.
“아빠 괴롭히지 말고 있어야 해.”
귤이는 심술이 났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은재가 손을 내어 배를 쓸자 그제야 통, 가볍게 발길질을 해 왔다.
“벌써 삐졌네, 우리 귤이.”
“올 때 귤이 선물 사 와.”
“그럴게요. 이사님은?”
“난 괜찮아.”
“벌써 보고 싶은데 어떻게 가지.”
태영은 은재의 어깨를 붙잡고 끌어당기며 은재의 뺨이 밀려나도록 힘주어 입맞춤을 했다. 너무나 거센 입맞춤에 은재가 뒤로 한껏 밀려났다.
“아파.”
태영이 물러난 뺨에는 정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본 태영은 한 번 더 쪽, 뽀뽀를 한 뒤에야 차에 올랐다.
“금방 올게요. 가자마자 전화 드릴게요.”
“알았어. 잘하고 와.”
윤 비서는 은재의 수행원 중 한 명이었지만, 태영을 따라 차에 올랐다. 은재는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드는 태영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차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느린 속도로 방향을 돌린 차는 이내 매끄럽게 정원을 빠져나갔다. 조금씩 새순이 나기 시작하며 푸릇푸릇한 기운이 보이기 시작하는 정원을 빙 돌아 나섰다.
저 멀리 굳건하게 서 있는 철문이 열리고, 태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도 한참 뒤에야 은재가 따뜻한 실내로 발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공항까지 못 가 줬네.”
아쉬움이 벌써부터 마음속을 헤매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감정 속을 덩달아 헤엄치는 듯한 귤이는 통통 연달아 발을 움직였다. 은재는 그 움직임을 쓰다듬으며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입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귤이를 위해, 또 태영이를 위해 잘 먹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살이 빠져 있으면 태영이가 돌아왔을 때 마음이 아플 테니까.
“…….”
그렇지만 고작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요 며칠 태영이 출근도 하지 않고 계속 곁에만 있어 줬기에 더 그런가. 원래 이 시간엔 이렇게 고요한 게 맞는데도 저택이 새삼스럽게 크게만 느껴졌다. 사용인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적막한 바람 소리만이 공간을 울렸다.
일주일은 있어야 태영이가 오는데. 아직 영국에 도착하지도 않았을 텐데.
은재는 3층 소파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 밖을 내다보며 그렇게 태영의 생각만 했다. 조금씩 푸르름을 띠는 정원에서 곧 태영과 귤이가 함께 걸음마 연습을 하는 상상을 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런데 잠시 뒤, 핸드폰이 울렸다.
―이사님.
반가운 진동에 은재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저 공항 왔어요. 이제 곧 비행기 타요.
태영의 주변은 시끌벅적했다. 온갖 소리가 넘쳐흘렀다. 제가 있는 곳과 너무 다른 생동감에 은재는 슬그머니 미소를 걸쳤다.
―이사님 보고 싶어요.
나도. 나도 보고 싶어, 태영아.
―영국에서 상사병 걸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나도 그럴 것 같아.
하지만 은재는 그 말을 뱉지 못했다. 그 말을 하고 나면 더욱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어른스럽게,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을 꾹 참아 가며 보냈는데. 그 말을 한다면 저도 뒤따라 영국에 갈 것 같았다.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잘 하고 오라고 씩씩하게 보냈으니까 기다려야 하는데.
보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너무 보고 싶어질까 봐 두려울 정도였다.
―어디에 계세요?
“……3층.”
―제가 담요 올려다 놨어요. 3층에서 눈 붙이시면 꼭 덮고 주무세요.
“그럴게. 고마워.”
―사랑해요.
“……나도.”
시끌벅적한 애정의 목소리는 그렇게 끊어졌다. 은재는 그 목소리를 듣고 나니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태영의 상쾌한 체향이 남아 있는 담요를 끌어와 덮으며 덩달아 아쉬움을 느낄 귤이를 도닥였다.
“같이 잘 기다려 보자. 올 때 귤이 선물 사 온다고 했으니까…….”
담요를 덮자 귤이가 더 크게 움직였다. 은재는 귤이를 계속 쓰다듬으며 따뜻함 속으로 잠겨 들었다. 벌써부터 일주일이 길 것만 같았다.
식사는 생각보다 더 고역이었다. 입덧은 올라오지 않았지만 입맛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태영이를, 귤이를 생각해서 몇 술 더 떴다. 정 실장이 근처에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어 또 몇 술 더 먹었다.
그렇게 먹으니 속이 편할 수가 없었다.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회하듯 2층을 걸어 다녔다. 사진들을 보고, 그림을 그리다가 태영이 예전에 쓰던 방에 들어와 드레스 룸을 열었다.
……태영이 냄새. 드레스 룸으로 향하니 태영의 페로몬과 체향이 담뿍 느껴졌다. 그 안에서 은재는 잠시 앉아 있다가 곧 셔츠 몇 개를 들고 1층으로 내려왔다.
함께 생활하는 방에서도 태영의 냄새를 찾을 수 있었다. 은재는 오랜만에 직접 귤을 하나하나 까먹으며 그 향을 오래오래 마셨다. 태영의 셔츠를 이불처럼 덮으니 어느새 부드러운 잠이 밀려왔다.
첫 고비는 사흘째 되는 날 찾아왔다. 아예 2층 방으로 거취를 옮긴 은재는 태영의 셔츠를 더 많이 꺼내 와 침대 주변에 쌓아 두었다. 평소에도 3층 대신 태영의 옷가지가 주변에 동그랗게 모인 곳에서 책을 읽고, 잠을 잤다. 식사를 하러 내려올 때가 아니면 그곳에서 지내는 편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태영의 옷을 입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흘쯤 지나자 태영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태영의 옷가지와 물건이 이제 산처럼 둥그렇게 쌓여 있는데도 그랬다.
―얼굴 보여 주세요.
“…….”
―안 보여요……. 보고 싶어 죽겠는데.
태영도 상황은 비슷한 듯했다. 일이 많은지 화면 속 태영은 더 날렵한 눈을 하고 있었다. 잘 먹는다고 먹는데도 살이 빠진 건 은재도 마찬가지인지라, 은재는 눈만 겨우 내놓은 채 태영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빨리요. 보고 싶어요. 이사님. 응?
결국 태영이 애원을 하고 나서야 은재가 얼굴을 보여 주었다. 태영은 수줍은 듯 나오는 은재의 얼굴을 보며 깊게 숨을 터뜨렸다.
―살 빠졌네.
“……너도 그래.”
―아니에요. 화면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에요.
“나도야.”
서로가 곁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살이 빠져 버린 연인들은 서로를 안타까워하며 화면을 쓰다듬었다.
“일은 잘하고 있어?”
―네. 잘하고 있어요. 이사님은 다 괜찮으세요? 뭐 먹고 싶다고 말도 안 하고.
“요즘은 별로 먹고 싶은 거 없어. 귤이는 그냥…… 아빠가 보고 싶대.”
―아빠도 귤이 보고 싶어.
태영은 꼭 은재의 배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쪽쪽 소리를 냈다.
―그리고 우리 은재도.
가볍게 웃은 은재는 베개에 뺨을 대고 엎드려 눈을 깜박였다.
“피곤해 보인다.”
―안 피곤해요.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하고 와.”
―이럴 때 세헌이 형이라도 있으면 나았으려나.
세헌의 이야기에 은재가 조금 더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세헌은 미국으로 떠났다. 은재가 편안히 태영의 곁에서 지내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났다. 당연히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도 없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친구로 다시 보자고 했는데. 아직도 그 준비가 되려면 한참 남은 모양이었다.
―이럴 땐 세헌이 형이 필요하네.
태영도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 뒤로 태영과 세헌은 가끔 전화를 하는 듯 했지만, 은재는 굳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건강하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 살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림 산 거 네 방에 걸어 뒀어.”
―좋아요. 가서 볼게요.
“아, 내일 조한미 작가랑 미팅 있어.”
―이사님도 가세요?
“그럴까 해.”
―저택에서 하면 안 되겠죠?
“조심히 갔다 올게.”
몇 번이나 약속을 한 후에야 태영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고도 태영이 오늘 뭘 했는지, 또 뭘 할 것인지 하는 이야기를 한참 들었다. 그런 소소한 이야기에 은재는 다정함을 느끼며 더 베개 속을 파고들었다.
충만해지는 마음과 달리 배 깊은 곳이 차츰 뭉치며 뜨끈해졌다. 전화를 타고 넘어오는 낮은 음성이 간질간질하게 배에 쌓이는 것만 같았다.
결국 은재는 태영과 전화를 끊고 난 뒤 저도 모르게 꼼질거리며 이불에 하체를 비볐다.
“읏…….”
온통 태영의 냄새가 묻어나는 곳. 조금 전까지 절 바라보던 화면 너머의 눈빛과 목소리. 은재는 태영이 곁에 없어도 그 손길을 느끼며 조금씩 아래를 세웠다. 다리 사이에 힘이 들어가고 참기 어려운 기분이 고간으로 모였다.
“……후.”
은재가 엉덩이를 치켜든 채 하의를 벗었다. 일어서기 시작한 제 것을 쥐고 흔들며 동시에 젖어드는 뒤를 느꼈다. 하아……. 더운 숨을 내쉬며 베개에 묻은 태영의 향을 더 길게 마셨다.
울컥, 하며 뒤에서 젖은 액체가 쏟아졌다. 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에 은재는 손을 뒤로 넣어 굳게 닫힌 구멍 주변을 지분거렸다.
“태영, 아……. 태영아…….”
자위를 한 경험이 많지 않은 은재였다. 혼자 풀면 풀수록 오히려 더 쌓이는 것 같아, 가끔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 올 때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래서 손을 대자마자 모여드는 주름 주변이 낯설었다. 손끝에 묻어나는 끈적한 액체에 성기도 더욱 힘을 받았다.
“……으응.”
입고 있던 태영의 셔츠를 입에 물고 손을 조심스레 안으로 진입해 넣었다. 그와 동시에 핏, 하며 정액이 터져 나왔다. 태영의 셔츠에 은재의 백탁액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아직 남아 있는 저릿저릿함에 은재는 손가락 하나를 부지런히 앞뒤로 움직였다. 평소 채워지던 것보다 훨씬 더 부족하게 느껴졌지만, 허리를 흔들어 가며 뒤를 쑤셨다. 숨을 크게 삼키고 손가락 하나를 더 넣어 내벽을 꾹꾹 눌렀다. 뻐끔거리며 물결치기 시작한 내벽을 낯설게 더듬으며 감각을 좇았다.
“흣, 으읏…….”
셔츠를 물고 있어서 그런지 몸속에 태영의 페로몬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태영이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다. 호흡기로 페로몬이 번지고 있었다.
‘이사님. 다리 조금 더 벌리셔야죠. 이러면 다쳐요.’
머릿속에 부드럽고 낮은 음성이 재생되었다. 은재는 홀린 듯 다리를 더 벌리고 다른 손으로 엉덩이를 붙잡아 구멍이 더 드러나게 당겼다.
‘너무 작네……. 이래서 어떻게 매번 내 걸 다 받아먹지.’
“아, 태영아. 읏…….”
‘하나 더 넣을게요. 아직 풀리려면 멀었어요.’
“응, 아…….”
‘빨아 드릴까요? 이사님은 손가락보다 빨아 주면 더 잘 풀리는데.’
어느덧 손가락 세 개를 넣은 은재는 태영에게 뒤가 빨리는 상상만으로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세가 망가져 저도 모르게 앞으로 엉금엉금 기었다.
‘안 돼요. 다쳐요. 뒤 열어 놓고 움직이면 다친다고 했잖아요.’
“……알았어. 안 움직일게. 아…….”
은재는 이마를 베개에 비비며 갸르릉 소리를 내듯 앓았다. 완전히 젖어 뚝뚝 떨어지는 액체로 구멍 주변을 마구 문지르다 깊은 곳까지 넣어 열고, 볼록 튀어나온 곳을 건드리며 숨을 삼켰다.
“……아!”
‘여기 좋아하시죠.’
“……태영아, 태영아…… 아읏!”
‘만져 드릴게요.’
손가락으로는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더 깊은 곳까지 꽉꽉 채워져 눌러 주었으면 좋겠는데. 겨우 스치기만 할 뿐, 묵직하게 안을 채워 오는 것이 없었다.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어떻게든 만지며 절정에 오르려 해 봐도, 맥박이 뛰며 그 위를 비비고 벅차게 밀고 들어오는 것이 필요했다.
“태영아……. 흑.”
은재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쾌감에 허리를 더 들썩였지만 몇 번 닿은 것 말고는 그곳을 건드릴 수조차 없었다. 크고 흉흉한 게 필요했다. 절 보면 언제든지 일어서 엉덩이를 찔러 오는 그게 필요했다.
다정하고 무거운 것. 묵직하고 사나운 그것이 필요했다. 태영의 것.
“……태영아.”
더 깊게 손을 넣어 뒤를 쑤셔 보았지만 애매하게 감각은 손끝으로 스쳐 사라지기만 했다. 은재는 연신 바르작거리며 제 성기를 태영의 셔츠에 비볐다. 도저히 혼자서는 해소할 수 없는 감각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었다.
그가 지독하게 그리웠다.
* * *
[이사님. 축하드려요. 이건 아가 선물이에요. 결혼 축하 선물은 나중에 결혼식 날 드릴게요. 그리고 베이비 샤워 꼭 해 주세요. 아가 보러 가고 싶어요. 완전 기대 중! -의준
p.s. 혹시 저한테 대부 자리를 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다음 날, 미팅을 위해 준비를 하고 나서니 응접실에 커다랗게 놓인 박스 여러 개가 보였다. 그 위에 올라온 귀여운 카드를 여니 의준의 글씨가 보였다.
태영의 친구라 아무래도 민망하지만…… 그래도 맨 위에 올라온 박스를 열어 보니 작은 신발이 보였다. 손바닥에 올려도 작기만 한 신발이었다.
“마음에 들어?”
배에 손을 올리며 묻자 귤이는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꼬르륵거리며 움직였다. 은재는 짐들을 2층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하며 주스를 마신 뒤 회사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직원들도 모두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은재는 조금 난처한 얼굴로 귓불을 붉히며 감사인사를 했다. 조한미 작가도 선물이라며 작은 그림을 가져다주었고, 덕분에 미팅을 하러 나왔는데도 간지러운 기분을 느꼈다.
일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저택에서 일을 할 때와는 확실히 다른 효율이었다. 조금 더 일을 볼까 하다, 차라리 백화점에 들러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회사를 나서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똑똑, 이사실에 상주하는 비서 하나가 문을 두드리며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그 뒤로 보이는 얼굴은 에린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아, 오랜만에 뵙네요. 여기는 어쩐 일로.”
예상치 못했던 방문에 은재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가시는 것 같은데. 타이밍을 잘못 맞췄나 보네요.”
“아닙니다. 들어오세요. 저도 오랜만에 회사에 나와서요. 헛걸음하시지 않았으니 다행이네요.”
“그러시군요. 저는 한 대표가 하도 이사님 얼굴 좀 보고 오라고 괴롭혀서요. 테오는 바쁘고, 그나마 제가 작업이 좀 여유로워서 대표로 왔습니다.”
안쪽으로 에린을 안내한 은재는 커피를 가져다 달라고 요청한 후, 코트를 다시 벗어 걸어 두었다.
“한 대표가 별 부탁을 다 하네요.”
“다정한 알파죠.”
커피는 금방 들어왔다. 에린은 고소한 향이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은 뒤 말을 이었다.
“살이 조금 빠지신 것 같은데.”
“그런가요?”
“한 대표도 듣자하니 잔뜩 날카로워졌다고 하더라고요.”
“……각인의 영향이죠.”
“사랑의 힘이 아닐까요.”
그래도 이렇게 만남을 가진 게 두 번째인 탓인지, 에린은 이전보다 편하게 말을 했다. 은재는 에린이 마음이 들었다. 넉넉한 인품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고, 또 다른 분야에서 이렇게 잘 자리를 잡은 중년의 오메가라는 게 특히 매력적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몰랐지만, 은재는 에린이 오메가이고, 또 이제는 페로몬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기자들은 이제 많이 가신 것 같던데요.”
“네. 또 아이가 태어나면 시끄럽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죠.”
“큰 결심 하셨네요.”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태영이가 큰 결심 했죠.”
둘 다 각자의 자리에서 큰 결심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분명한 사실이었다. 태영에게도, 은재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기에, 어느 순간 마음이 맞았어도 이렇게 긴 시간을 들여 돌아왔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에린은, 오메가인 은재에게 조금 더 마음이 쓰였다. 각인을 하고도 알파 없이 버티며 보호자의 역할을 하려던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제 마음을 어느 순간 알아채고도 어쩔 수 없이 도리를 위해 물러나던 올곧음에 공감했다.
“그림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네. 보는 걸 즐깁니다.”
“나중에 그럼 제 전시회에도 한번 와 주시죠. 올해 말쯤으로 생각 중입니다.”
“초대해 주시면 감사히 가겠습니다. 언제든지 말씀 주세요.”
그 마음 때문인지 은재도 에린과의 시간이 편하게 느껴졌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혹시 말 하나에 꼬투리가 잡힐까, 약점이 잡힐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은재는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저 혹시……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에린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인한 알파들은 오메가가 먼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들어 본 적이 없어서요. 아니면…… 각인을 그 전에 깰 수 있나요?”
“…….”
“혹시 아실까 해서요. 주변엔 딱히 여쭤볼 사람이 없네요.”
무엇을 묻는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것 같은 말이었다. 에린은 두 손을 모으며 옅게 웃었다.
에린과의 대화를 마친 은재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조금씩 피로가 느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았다. 저택에 있으면 태영이 생각만 나서 더 외로우니, 가볍게 둘러보고 갈 생각이었다.
은재는 강 비서와 함께 이전 공사를 진행했던 공간을 먼저 둘러보았다. 그사이 빠르게 공사가 마무리된 공간은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투명한 천장에서부터 들어오는 볕이 넓게 퍼져 뛰노는 아이들을 비췄고, 잘 조성된 벤치와 식음료들이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실내에는 인공 해변처럼 모래를 풀어 모래 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고, 놀이기구가 가득 놓인 외부 정원과도 연결이 되어 있었다. 신발을 벗고 뛰다가 넘어져도 다치지 않게 적당히 푹신한 매트가 넓게 깔려 있기도 했다. 이전에 보고를 받았을 때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안전하게 만들어져있었다.
“반응이 괜찮아 보이네요.”
“네. 덕분에 관련 용품들 매출이 훨씬 더 늘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매대 매출도 그렇고, 이 근처 카페 매출들도 그렇고요. 인터넷상에서도 반응이 좋아서 꾸준히 수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은재는 멀찍이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전에는 아이들만 봐도 두려움부터 덜컥 들었는데.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은재의 임신 소식이 알려지며 백화점이 더 복잡해졌다. 특히나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공간이 화제였다. 정확한 인과관계는 알 수 없었지만, 임신 소식이 아이들을 위한 공간의 배려로 이어질 거라는 인식 때문인 듯했다.
그래서 은재도 이곳에 더 신경을 썼다. 귤이와 깍두기 알파와 같은 아이들이 뛰어논다고 생각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는 그 인식이 사실인 셈이었다.
“이쪽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면 아이들 용품 매장이 있는 층으로 연결되어서 더 반응이 좋은 것 같습니다. 유아용품부터 청소년 매장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연스레 은재와 강 비서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이동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사진을 찍는 게 보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아기용품 매장에 들러 손수건과 딸랑이, 우주복과 같은 옷을 몇 개 구매했다.
천천히 사도 될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의준이 보낸 것을 보고 나니 작고 귀여운 물건들을 더 많이 들여놓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은 이렇게 작나 보네요.”
이미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강 비서는 아내가 아이를 안고 있던 장면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크기가 작아서 그런지 여러 개를 담아 포장을 했는데도 쇼핑백은 자그마했다. 은재는 그 작은 쇼핑백에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손에 꼭 쥐었다.
“이제 2층에 아이 방을 만들어 놔야겠네요. 이전에 태영이가 쓰던 오른쪽 방이 지금도 빈 걸로 아는데. 의준이 선물도 거기에 넣고요.”
“네. 공사할 업체 알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렇게 하나를 사기 시작하면 더 사고 싶은 걸까. 은재는 자꾸만 눈에 밟히는 아가들의 내복과 신발, 양말 따위를 계속해서 보았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이렇게 다 사고 싶은데. 어차피 애들은 금방 자란다니까 별로 입히지도 못하겠지. 그래도 살까.
“또 여기서 뵙네요.”
그렇게 아쉬움과 고민을 담아 뒤적이고 있으니 누군가 성큼 다가와 말을 붙였다. 경호원이 제지를 하는데도 어깨로 직접 그것을 뚫으려 하는 그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한시호.
“제가 좀 사 드려도 될까요?”
경호원들에게 막혀 다가오지도 못하면서 한시호는 당당했다. 밀고 싶으면 밀어내 보라는 듯 당당하게 절 들이밀고 있었다. 저 같은 작고 어여쁜 오메가를 경호원들이 함부로 밀어내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강 비서가 그에게 다가가 물러서라는 말을 했지만, 한시호는 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주변에 쇼핑을 나온 이들의 시선을 모조리 앗아 가며 저를 좀 봐 달라는 듯 외치고 있었다.
“왜요. 제가 이사님 알파를 뺏을까 봐 겁이 나서 이제는 마주하지도 못하시겠어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돌아가시죠.”
“손 놓으세요. 어딜 만지는 거야. 만지지 마! 놔! 할 말이 있어서 온 거라고!”
하. 은재는 가벼운 숨을 터뜨리며 한시호를 돌아보았다. 그는 제가 은재의 일을 훼방 놓고 나섰으면서, 억울하다는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놔두세요.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봅시다.”
그제야 경호원들은 한참 밀려난 한시호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코웃음을 친 한시호는 보란 듯이 널따란 어깨를 자랑하는 경호원들을 밀어내며 은재에게 다가왔다.
“더 이상 접근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은재의 바로 앞으로 올 수는 없었다. 강 비서와 은재의 경호를 오랫동안 담당해 온 이 팀장이 막고 나선 것이었다.
결국 한시호는 그쯤에서 멈춰 섰다.
“이렇게 해도 한 대표와 저의 사이를 끊어 놓을 수는 없어요.”
우스운 말이었다. 한시호는 마치 제가 태영의 숨겨진 연인인 듯한 행세를 하고 있었다.
“불안하신가요?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보는데요. 전 정당하게 소개를 받아 한 대표와 만났어요. 제 공연을 맡아 줄 적임자라고 생각했고, 피차 그랬어요. 그래서 만났을 뿐이에요! 그런데 이제는 그것마저 못 하게 하시네요. 그렇게 제 길을 막는다고 제가 겁이라도 먹을 줄 아셨나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들어 보니 태영이가 한시호 씨와 일을 못 하겠다고 한 모양이군요.”
“모른 척하지 마시죠. 그전까지는 서로 분위기 좋게 잘하고 있었어요. 한 번 더 저한테 기회를 준다고 했다고요! 그런데 그날 이사님이 오신 이후로 갑자기 중단됐어요. 이사님이 절 보시고, 제가 한 대표와 있는 걸 보고 저에게 넘어올까 두려워서 그러신 거잖아요! 이런 일이 한두 번인 줄 아세요?”
점차 주변 시선이 몰리는데도 한시호는 소리를 내질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와 사진을 찍는 소리, 호기심에 찬 눈동자들이 가까워졌다. 은재는 가벼운 숨을 내쉬며 대충 손에 잡히는 옷 하나를 꺼내 난처한 얼굴로 서 있는 직원에게 내밀었다.
“여기 매장에 나와 있는 옷들 다 구매하죠. 우선 이것까지 포장해 주시고 나머지는 차에 싣겠습니다.”
“민은재 이사님!”
“작게 말해도 다 들립니다. 미리 언질도 없이 다짜고짜 찾아온 사람을 만나 주는 것만으로도 나한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역시 불안하시죠? 이사님보다 어리고 예쁜 제가, 능력도 있는 제가 한 대표 옆에 얼쩡거려서요.”
그제야 은재는 나른한 숨을 터뜨리며 한시호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한시호는 저를 빤히 관찰하는 그 시선에 뒤늦은 모욕감을 느꼈다.
누가 보아도 관심 없어 보이는 눈길이었다.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이제야 확인할 정도로 시선 끝에 무심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대화를 받아 주고는 있지만, 특별히 신경이 쓰이지도, 위협을 느끼지도 않았다.
“황당하네요. 그날은 한 대표님 앞에서 약한 척 구역질을 하시더니, 한 대표님이 옆에 없으니까 이렇게 뻔뻔하신데요. 한 대표님도 이 사실을 아시나요?”
한시호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은재는 붉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그저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그렇게 한 대표한테 페로몬을 묻혀도 싫다는 소리 한 번 안 하신 분이에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시겠죠.”
“태영이는, 나한테 각인한 알파입니다.”
“알파의 각인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어요. 그리고 각인을 한 게 사실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한시호 씨.”
“생각이 있으신 분이라면 한 대표님한테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놓아주셨어야죠. 더 어른이 되어서 알파 발목을 잡고 매달리는 게 무슨 추태예요? 나이 차이도 많이 나면서. 심지어 보호자셨잖아요. 이런 관계가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
“한 대표님은 아직도 한참 젊으신데, 한때의 감정일 뿐이라고요. 어른이 그걸 막아야지, 역겹게 이런 일을!”
말의 수위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은재는 그새 포장된 귤이의 새 옷을 쇼핑백에 넣으며 넌지시 한시호를 마주 보았다.
“정확히 하죠. 난 태영이한테 그쪽하고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은 한 적 없습니다. 내가 태영이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걸 수도 있죠. 설령 그렇다고 한들 한시호 씨가 신경 쓸 일도 아니고.”
“이사님이 먼저 놔주세요. 그럼 한 대표도 자유롭게 갈 거예요.”
“내가 태영이를 놓으면, 한시호 씨한테 갈 것 같아요?”
가볍게 던진 말인데 한시호는 두 주먹을 그러쥐어야 했다. 제가 보기에도 은재는 아름다운 오메가였다. 저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저와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몸짓 하나에도 여유와 차분함이 묻어났다. 대화를 하고, 직원의 이야기를 듣는 얼굴에서도 아찔함이 풍겼다. 그런 이가 배를 감싸며, 아이 옷을 고르는 장면은 그 어떤 알파가 보아도…….
제가 잠시 그들의 앞에 등장했을 때, 그 얼굴 위로 드러났던 살벌한 분노 하며, 그 전까지 어디 하나 상처라도 날까 애지중지하던 태영의 모습이 눈앞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한시호는 은재가 결코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갑작스레 공연을 담당할 수 없다고 통보를 받아 억울해 찾아왔지만 그럴수록 제 자존심만 상했다. 속을 긁는 말을 해도 전혀 흥분하지 않는 얼굴에, 그들이 서로를 얼마만큼 믿고 있는지만 알게 되었다.
왜 한 대표가 그렇게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한 사람만 바라보는지 알 것만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생긴 알파가 진정으로 누굴 사랑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확신도 없으면서 날 찾아온 용기는 인정할게요.”
“…….”
“그래도 유부남을 마음에 둬 봤자 이루어지는 건 없습니다. 괜한 생각은 말아요. 헛된 꿈이니까.”
소식을 들었는지 백화점 전용 가드들이 몰려왔다. 사색이 된 한시호의 매니저 또한 부랴부랴 이쪽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은재는 괜찮다며 손을 들어 보이고는 한시호의 매끄러운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대로 된 알파를 잡아요. 남의 알파를 뺏어서 가져 봤자 평생 불안하기만 할 텐데.”
“…….”
“나도 겨우 붙잡은 알파예요. 차라리 돈을 달라고 했으면 줬을 텐데…… 내가 절대 못 주는 걸 달라고 왔네. 한시호 씨한테 이런 소리 듣고 있을 만큼 목매는 사람이라는 거 알겠죠, 이제.”
“…….”
“또 찾아오고 싶으면 찾아와요. 지난번에 보니 한 대표보다는 내가 한시호 씨한테 훨씬 더 친절한 것 같네요.”
시호야! 한시호의 매니저가 가드들 밖에서 바삐 손짓했다. 이만 가자고 애원하며, 안쪽으로 들어오지는 못하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다른 알파를 찾았다는 소식이 들리면 좋겠네요. 한시호 씨 말마따나 어리고 예쁜데, 아이까지 있는 알파를 상대할 이유 있을까요. 그것도 이미 각인까지 한 알파를.”
은재는 마지막으로 한시호의 매끄러운 손등을 살짝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한시호 씨가 먼저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홱,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린 한시호는 인파를 뚫고 나와 발을 구르는 매니저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가도 다시 돌아와 당돌한 얼굴로 은재를 마주했다.
“근데 모르시죠? 왜 한 대표가 지금 이 타이밍에 영국에 갔는지.”
“…….”
“각인을 하면 뭐 할까. 알파한테 가장 필요한 걸 주지도 못하는데.”
놔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간 시호는 매니저의 손도 뿌리치며 잽싸게 자리를 떴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은재는 백화점 가드들에게 한시호를 끝까지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아무 일도 없던 척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한시호의 앞에서 당당하게 말은 했지만……. 며칠 동안 태영을 보지 못해 바짝 마른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다들 저렇게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리고…… 출장에 다른 이유가 있었나. 그런 건 없을 텐데.
쓴웃음을 지은 은재는 애써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 버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오랜 고민 끝에, 확실한 마음 정리 끝에 태영의 손을 잡은 것이지만 오래 묵은 불안이 이렇게 불쑥 고개를 들 때가 있었다. 이럴 때 태영이 곁에 있으면 나았을 테지만…….
하지만 아직도 태영의 출장은 며칠 더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태영의 옷을 더 가득 쌓아 놓고 잠을 청해야 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