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화 (16/19)

〈로망스〉, Fin.

외전

1

창을 지나쳐 들어오는 3월의 햇살은 꽤 따뜻해 보이는 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창을 열고 공기를 마시면 금세 온몸이 저릿저릿할 찬 공기를 지녔음을 알기에, 태영은 손을 뻗어 이불을 끌어 올렸다. 눈을 감은 채였지만 익숙하게 이불을 더 끌어당겨 제 품에 안겨 있는 이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그와 동시에 태영의 짙은 눈동자가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곧장 방으로 쏟아지며 이 순간 함께하고자 고개를 빼꼼 내미는 볕을 응시했다. 그 볕이 제 연인의 잠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곤, 턱 아래까지 다시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

약한 웅얼거림이 은재의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 아가 태영이가 생기기 전에는 움직임도 거의 없이 얌전히 자는 이였다. 그런데 아가 태영이의 영향인지, 은재는 요즘 부쩍 귀여운 소리를 내곤 했다.

그럴 때 코끝을 살짝 누르거나 아랫입술을 누르면 은재는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가끔은 미간을 구겼고, 또 가끔은 입술을 내밀기도 했다. 그렇게 귀여움을 떠는 모습이 마치 애교를 부리는 것 같고, 입맞춤을 요구하는 것 같아 태영은 자는 이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곤 했다. 윗입술을 가볍게 물어뜯고, 인중을 혀로 핥으며 매일 터질 것처럼 아침부터 차오르는 음심과 애정을 눌렀다.

해가 바뀌기 전, 겨우 서로의 진심을 확인한 이들은 이제 완전히 방을 합쳐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방에서 지낼지 정한 적은 없지만, 태영이 자연스럽게 은재의 1층 방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크고 단단한 알파가 새롭게 입주자로 들어왔는데도 방은 크고 널찍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태영은 은재의 곁에서 웬만하면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샤워를 할 때도 은재와 함께하기를 원했고, 식사도 그랬다. 잠은 더더욱.

원래 태영은 오래 자는 편이 아니었지만, 은재의 침대에 정당하게 올라갈 수 있게 된 후로는 더욱 잠이 줄었다. 저에게 안겨 있는 은재의 얼굴을 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처음 며칠은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새워 눈에 핏발이 설 정도였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아챈 은재는 태영이 먼저 잠드는 것을 보고 나서야 자겠다며 의자를 끌어와 잠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후로부터 태영은 밤을 새우는 일은 그만두었다. 은재보다 조금 늦게 잠들었고, 조금 더 일찍 일어났다.

이렇듯 혼자 눈을 뜨는 은밀한 아침 시간에는 은재의 부드러운 뺨을 어루만지고 제 체온을 나눠 주며 아직 끝나지 않은 겨울 아침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곤 했다.

창 밖에서 맴도는 바람이 조금이라도 닿아서는 안 되었다. 이불 밖으로 재차 나온 단단한 팔은 이불을 꾹꾹 눌러 다시 여러 번 확인한 뒤 은재의 뺨을 지그시 덮었다.

“……태영아.”

그래도 오늘은 별로 안 만졌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분명한 제 이름에 태영이 멈칫 손을 떼자, 은재가 눈을 감은 채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출근해?”

파르르, 긴 속눈썹이 나직한 음성과 함께 흔들렸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너 깬 것 같아서.”

“더 주무세요. 아직 일러요.”

어렴풋이 깬 줄 알았는데, 아예 은재는 일어나려 했다.

요즘 은재는 배가 살짝 불러 와 저택 3층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작은 위험이라도 피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택을 나서 출퇴근을 하는 건 태영뿐이었다.

항상 은재는 이르게 나서는 태영을 배웅해 주고 싶었지만, 아가 태영이는 그 생각을 따라 주지 않았다. 아가라서 그런가. 아가 태영이는 잠이 많았다. 아침에 약한지 아침잠이 낯설 정도로 늘었다.

그런데도 일어나려 버둥거리자, 태영은 그 어깨를 완전히 감싸 안으며 어느새 흘러내린 이불을 다시 끌어 올려 주었다.

“5시밖에 안 됐어요. 주무세요. 아가 태영이도 자고 싶대요.”

“……벌써 나가려고?”

그 틈새로 둘의 눈이 짧게 마주쳤다. 은재는 절 뚫어져라 바라보는 태영의 눈빛에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이른 시간에 보는 얼굴이지만 더욱 몸이 따뜻해지는 그런 눈빛이었다.

“샤워 좀 하고요. 식사하고 나면 나갈 때 돼요.”

“…….”

“주무세요.”

말을 하면서도 은재의 눈은 느리게 끔벅거렸다. 이제는 깜박거린다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 눈이 꼭 감겨 있었다. 태영이 얼굴을 더 보고 싶었는데…… 아가 태영이의 고단한 횡포였다.

그 눈두덩이에 쪽쪽 입을 맞춰 주자, 은재는 다시금 깊은 잠에 빨려 들어가면서도 태영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럼 나가기 전에…….”

그렇게 숨소리처럼 말하곤 완전히 수마에 잠식되어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네. 그럴게요. 나가기 전에 꼭 인사하고 갈게요.”

다 듣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 태영은 잠든 은재의 뺨에 한참 입을 맞춘 뒤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살짝 말려 올라가 있는 은재의 실내복 상의를 끌어 내려주고, 배에 가볍게 손을 올려 인사했다. 도톰해진 그 위에 입을 맞추며 아가 태영이에게도 아침 인사를 전했다.

아가 태영이는 졸린 와중에도 통, 발을 차 인사를 해 주었다. 태영은 그 씩씩한 움직임을 느낀 후에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은재가 빈 옆자리를 느끼지 못하도록 꽁꽁 이불로 더 두껍게 싸맨 뒤 몸을 일으켰다.

걸어 나와 근처에 놓여 있는 물병을 빠르게 비우는 태영은 나신이었다. 볕에 그을린 듯한 피부색을 지닌 알파는 간밤이 꽤 더웠는지 험악한 등줄기에 송골송골 땀을 매달고 있었다. 그 땀으로 인해 근육으로 빼곡하게 잡힌 피부가 매끄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물병을 내려놓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형태를 바꾸는 근육들의 모습이 선명해지며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한 병을 모두 비운 후에야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여러모로 더위가 물씬 느껴졌던 침대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나서야 욕실로 향했다.

슬리퍼도 없이 맨발로 걸어온 태영은 언제나처럼 오래 물을 맞았다. 상쾌한 바디 워시의 향 대신 어쩐지 비릿한 향취를 남긴 태영은 멀쩡한 모습으로 나와 다른 곳에서 머리를 말리곤 식사를 했다.

담배를 한 대 피운 후 정장 차림으로 갈아입고 커프 링크스를 바꿔 달았다. 얼마 전 ‘예물’이라는 이름으로 은재에게 받은 시계를 차고, 잠시 그 시곗줄 위를 손으로 덮었다.

“…….”

그렇게 한참 있은 후에야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아직도 은재는 이불 속에 폭 싸여 있었다. 그 곁으로 다가간 태영은 다시 한번 시곗줄을 덮어 차갑지 않게 만든 뒤 은재의 뺨을 감쌌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니. 매일 보는 얼굴이었지만, 매일 보는 사람이었지만 태영은 은재를 볼 때마다 머리가 펑하고 터져 나갈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나른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을 때는 특히 더했다.

아이를 품고 있어서 그런지 더욱 요요해진 선이 보기만 해도 성감을 부추겼다. 아이를 품고 있는 몸으로 보이지 않는데도 묘하게 바뀐 분위기가 어딘가 성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손으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이가 곁에서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이 나의 보호자라니. 내 연인이라니.

“이사님.”

그를 부르는 것과 동시에 이불을 살짝 내려 귓불이 드러나게 했다. 귓불을 입에 넣고 굴리며 목선을 따라 내려와 자국을 만들었다. 대답하지 않는 턱을 들어 아프지 않게 씹은 후 뺨과 코에 입을 맞추니, 은재가 이불 속에서 느릿하게 손을 뻗어 왔다.

심지어 팔을 뻗는 몸짓마저 황홀한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절 찾아 배회하는 손이 꼭 누군가에게 축복을 내리는 듯한 성인의 것만 같았다. 태영은 기꺼이 그 손을 맞았다.

“……지금 나가?”

“네. 출근해요.”

“언제 와?”

조금 더 몸을 숙여 은재의 양팔에 깊숙이 안겼다. 아직도 포근한 분위기에 잠겨 나른한 목소리로 말하는 제 연인의 모습에 낮게 침음했다. 영원히 이대로 안겨 있고 싶은 마음과 그를 쟁취할 만한 알파로서의 자격을 유지해야 한다는 마음이 언제나처럼 충돌하고 있었다.

“일찍 올게요.”

“……바빠?”

“괜찮아요.”

“응. 잘하고 와. 기다릴게.”

잠결에는 더 부드러워지는 은재였다. 그는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손가락으로 태영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어설프게 뺨을 쥐었다.

“싸우지 말고…… 대표니까, 네가 더 너그럽게 해 줘.”

“네. 그럴게요.”

“……태영이는 너는 영리하고 착하니까, 뭐든 다 잘할 수 있을 거야.”

“네. 전 이사님 아이니까요.”

“……응. 내 아이니까.”

보호자와 피보호자 사이의 스킨십이라고 하기에는 진득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은재는 권태로운 숨을 마시며 제 입술을 탐하는 태영을 느꼈다. 이제는, 연인이라는 이름이 더 걸맞은 알파의 열기를 느끼며 온 얼굴을 만지고 또 혀를 빨고, 점막을 훑는 그 혀를 느꼈다.

물기 젖은 소리와 함께 두 입술이 아쉬움을 남긴 채 떨어졌다.

“사랑해요.”

“…….”

“사랑해요, 이사님.”

그저 잠시 일을 하기 위해 떨어져 있는 것뿐인데 전해지는 고백이 절절했다. 은재는 부르르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있는 힘껏 태영을 끌어안아 소리 내어 대답했다.

“……나도.”

“…….”

“나도, 너를…….”

대답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태영은 은재를 눕히고 그 위를 타고 올랐다. 입고 있던 재킷을 거칠게 벗어 던지고 은재의 목에 본격적으로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바르작거리며 아…… 소리를 내는 입술을 핥고 도드라진 빗장뼈에 치흔을 남겼다. 옅은 색의 유두를 핥고 문지르며 눌렀다가 아가 태영이를 담고 있는 배를 핥고 또 핥았다.

“……출근, 해야지.”

“네. 갈게요.”

잠기운이 가시기도 전에 느껴지는 감각에 은재는 허우적거리며 침대 아래로 꺼질 듯 호흡했다. 배와 가슴, 그리고 그 아래 예민한 곳에서 맴돌던 태영은 기어코 은재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아, 태영아…….”

바싹 솜털이 서며 성감이 예민하게 일어났다. 아가 태영이를 가진 이후 더 예민해진 몸은 이제 태영의 단단한 몸에 기대기만 해도, 그 열기를 만지기만 해도 배 속이 은근하게 끓어오르곤 했다. 제 알파의 숨결에는 더 날 서게 반응을 해 왔다.

태영은 은재가 헐떡이며 제 머리카락을 붙잡는 것을 알면서도 더 깊게 성기를 머금었다. 젖기 시작한 작은 엉덩이 사이에 이불을 대어 주며 골반을 붙잡고 성기를 삼켰다.

결국 은재는 잠을 떨쳐 내기도 전에 온몸을 죄이는 성감에 휩싸여 헐떡여야 했다.

절정은 빠르게 찾아왔다. 이제는 언제든지 느낄 수 있는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에 몸이 가벼워지고 정신은 날카로워졌다. 간지럽고 야릇한 감각이 본격적인 절정이 되어 달라붙었다.

그리고 마침내 몸을 누르는 열기와 함께 참지 못하고 사정을 했을 때.

“…….”

놀란 은재가 확 이불을 걷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 제 위에 올라 열기를 뿜으며 단단한 몸으로 짓누르던 알파는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혹시 귤이한테 문제가 생길까 배를 피해 스스로 제 무게를 감당하는 알파는, 언제나 먼저 절정을 선사해 주고 빼 놓은 곳 없이 입맞춤을 해 주는 그 알파는…….

그렇지만 분명히 사정을 했는데.

은재는 얼굴이 새빨개져 슬그머니 이불을 걷었다. 그리고…….

“……아.”

은재가 손으로 뺨을 감싸며 탄식했다. 이불이 축축했다. 비릿한 냄새를 지닌 정액과, 또 뒤에서 새어 나온 것으로 젖어…….

다 꿈인가. 태영이와 아침 인사를 한 것도 꿈이었나. 그것부터 몽정의 시작이었나.

동시에 핸드폰이 울었다. 차마 축축한 이불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던 은재가 갑작스럽게 울린 진동에 놀라 심장을 부여잡았다.

덩달아 놀랐는지 아가 태영이도 쿵쿵 배를 발로 찼다. 은재는 미안…… 하며 배를 문질러 준 후 전화를 받았다.

“……응.”

―일어났어요?

꿈에 나왔던 그 알파였다. 제가 사랑하는 알파. 제 아이이자, 연인인 알파.

“응, 조금 전에.”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아냐. 좀 놀라서 그래. 갑자기 전화 와서.”

―진동 소리인데도 놀랐어요?

“…….”

―죄송해요. 일하다가 이사님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은재는 놀랐냐는 태영의 별것 아닌 물음에 제가 그의 꿈을 꾸고, 몽정을 했다는 것을 들킬까 숨을 골랐다.

“……지금 몇 시야?”

―열 시 반이에요.

“아, 늦게 일어났네.”

―귤이가 잠이 많아요.

“나도 이제 3층에 올라가야겠다.”

―무리하지 마세요. 아셨죠?

응, 은재는 대답하며 이불을 걷었다. 사락사락 부드러운 소리가 나는 이불을 잘 걷어 접어 놓고 창가 쪽으로 다가가 작게 창을 열었다. 마침 밖에서 정원을 다듬고 있던 정원사와 민망하게 인사한 뒤 태영이 놓고 간 물을 마셨다.

―지금 바로 식사하실 거예요?

“응.”

―조금만 이따가 가세요.

“왜?”

―일하다가 갑자기 야한 생각이 났거든요.

“……어?”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사님이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그래선지 배가 당겨서 화장실에 왔어요. 아무래도 이대로 못 들어갈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태영의 목소리가 웅웅 울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인지할 수도 없었고, 조금 전부터는 알 수 있었지만 화장실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비상구나, 주차장이나…….

―제 이름 좀 불러 주세요.

“…….”

―선 지 한참 됐어요. 이사님 목소리 없으면 이제 사정도 못 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가 화장실에, 그것도 일하던 중에 나와 화장실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니, 애써 다듬은 목소리 사이에 어떠한 열기가 끼어 있다는 것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은재는 마시던 물을 떨떠름하게 내려놓았다.

―네? 이사님…….

하아……. 태영은 낮은 숨을 토했다. 그것으로 은재는 확신할 수 있었다.

태영이, 은재가 그를 상상하며 몽정하던 순간 태영 또한 급하게 화장실로 들어와 제 것을 움켜쥐어야 했다는 것을. 각인으로 인한 결과가 그 순간에도 작용을 했다는 사실을.

“……태영아.”

―……후.

조금 더 낮아진 숨이 벽에 부딪쳐 전화기로 넘어왔다. 태영이 스스로 욕정을 해소하는 소리와 목 안에서 끓는 숨이 자극제가 되어 귓가에 고였다.

은재는 걷어 냈던 이불을 바라보다 다시 슬며시 침대 위에 깔았다. 수건이나 혹은 다른 것을 깔 생각도 못하고, 이미 젖은 이불에 앉아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음성을 들었다.

―녹음하실래요?

“…….”

―가끔 이사님도, 그러실 때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안 참아질 때요.

“…….”

―후, 그럴 때 들으세요. 전 언제나 이사님을 달래 드릴 수 있지만, 그래도요…….

이전 같았으면 진작에 싫다고 했어야 하는데. 은재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안 해도 돼.”

―정말요?

“……응. 괜찮아.”

―그럼 제 이름 좀 불러 주실래요? 쌀 것 같아요.

이름을 불러 주자 더 짧아진 숨소리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은재는 다시 힘을 받는 제 성기를 살짝 움켜쥐고 동시에 배를 쓰다듬었다. 귤아, 귀 막아…….

뒤에서도 울컥 물이 새어 나왔다. 임신 후 몸이 변한 탓에 뒤도 이제는 금세 젖곤 했다. 은재는 차마 뒤에 손을 넣지는 못하고 앞을 쥐고 흔들며 빠르게 파정했다.

전화기 너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사정을 맞은 후에도 여운에 호흡이 떨리며 새어 나왔다.

―……하아.

그 뒤로도 한참 후에야 사정한 태영은 곧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보고 싶어요.

“……나도.”

―근데 벌써 11시 되네.

은재는 아직도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 같았지만 손을 닦으며 역시 미소를 지었다.

―금방 마치고 갈게요.

또다시 사랑해요, 하는 고백과 끝인사가 길게 이어졌다. 전화를 끊는 것인데도 오래오래 인사를 한 연인들은 각자의 여운을 마저 떨쳐낸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다시 이불을 걷은 후 씻고 나온 은재는 멀끔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뒤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이사님, 속은 어떠십니까?”

“괜찮아요.”

“일반식으로 드려도 될까요?”

“네. 주스까지 부탁드립니다.”

귤이는 아직도 주스를 좋아했다. 태영의 페로몬이 꾸준히 공급된 이후로 입덧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주스를 찾았다. 그 외에는 특별히 먹고 싶다고 하는 것도 없었다.

식사에 앞서 주스가 먼저 나왔다. 귤이는 감귤 냄새를 맡았는지 배 속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은재는 얌전하게 굴어야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주스를 마셨다.

그리고 식사를 한 후에 덤덤한 척 말했다.

“이불을 바꿔야 할 것 같은데. 걷어서 놔뒀습니다. 세탁 좀 해 주세요.”

“……아, 네.”

별로 당황하는 일이 없는 정 실장은 어쩐지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정 실장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 도련님께서 나가시면서 이불 세탁을 맡기셨거든요. 그래서 새로 가지고 들어가신 걸로 아는데…… 제가 착각을 했나 봅니다.”

정 실장은 노련하게 제 착각이라며 말을 돌렸다. 하지만 은재는 알 수 있었다. 태영이 꿈에서처럼 그렇게 제 성기를 흡입한 게, 출근하기 전부터 제 몸을 만지던 게 정말…….

* * *

어딘가 묘한 얼굴이 된 태영은 서류를 휙휙 넘겨 보며 빠르게 무언가를 적어 내렸다. 화장실에서 나온 것뿐인데 얼굴이 어딘가 좋아진 것도 같고, 외설적인 기운이 더 선명해진 것도 같고.

익숙한 듯 옆 자리에서 흥얼거리며 영어가 가득 적혀 있는 사이트를 보던 테오는 이내 사이트 주소를 긁어 전송하며 발을 까딱였다.

“한 대표. 출장 좀 가지 그래. 언제까지 미루려고?”

“네가 가라니까.”

“그럼 네가 에린 작업 봐 줄 거야?”

“뭐가 어렵다고.”

“미아 킴 공연 조율하고, 그 성격 받아 주고, 협연할 오케스트라 마저 확인하고? 아, 새로 매니저도 구해 달라는데.”

“까짓거.”

“그 둘 외에도 우리가 한국에 끌고 들어온 사람들 많은 거 알지? 2주 뒤에 Y 기념관에서 전시 있고, I시 시립 합창단에서 제안 온 것도 있어. 아, 이건 어차피 네가 미팅 가야 하고…….”

테오는 줄줄이 해야 할 일을 일러주었다. 원래도 둘이서 감당하기엔 벅찬 일들이었다. 그래도 영국에서 일을 할 때는 파트타임 직원들이 있어 괜찮았으나, 한국에 와서는 아직 직원을 구하지 못했다.

직원을 뽑을 정신 따위가 없었다. 애타게 기다려 돌아온 한국인만큼 모든 정신과 시간을 오롯이 은재에게만 쏟았다. 지금도 다를 바는 없지만, 그래도 반지를 나누어 끼게 됐으니까.

한참 할 일을 읊던 테오는 그것마저도 질리는지 의자에 기대며 눈썹께를 긁적였다.

“하여간 그러니까 영국에 갔다 와. 가서 한국에 온다는 사람들 좀 만나고.”

“조율해 봐. 지금은 나가기 적절하지 않은 거 알잖아. 이사님 또 문제 생기면 위험해.”

“이제 건강하시잖아.”

“임신한 사람을 두고 어떻게 나가. 최대한 조율해서 나갔다 와. 내가 여기서 시간 상관없이 도와줄 테니까.”

재단 대표인 태영이 가는 편이 여러모로 낫지만……. 어쨌든 한국에서 할 일도 있고, 은재의 사정도 알고 있으니 테오는 한숨을 쉬며 일정을 최대한 조절해 보기로 했다. 한번 큰 소동을 겪었으니 쉽게 나가지 못하는 마음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제 일을 몰아줘 버릴까 싶어 태영을 흘긋 넘겨보았는데. 대화를 하면서도 고개를 한 번 들지 않은 그는 바쁘게 화면과 달력을 살피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써 내려 가고 있었다. 제가 일이 많다고 투덜댔지만, 역시 대표의 사정은 더한 모양이었다.

복지 재단의 일도…… 대경과 협업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태영의 손이 많이 가긴 했다. 대경에선 후원하던 보육원의 일을 차츰 재원 복지 재단 쪽으로 넘기고 있었다. 그 외에도 이쪽이 먼저 고려하고 있던 후원 사업도 있었고.

심지어 마무리된 신 의원의 일이나, 은재와 관련된 사소한 일까지 매일 확인하고 있으니…….

“우리 직원 좀 써야 하지 않냐. 둘이서 언제까지 해?”

“이제는 구해야지.”

“한 세 명만 들어오면 좋겠다.”

“알았어. 공고 내 봐, 그럼. 입 무거운 사람으로.”

그나마 건진 반가운 소식에 테오는 크게 숨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의 스트레칭에 몸이 찌뿌둥하게 당겨왔다. 아침에 커피를 들고 들어와 이제 처음 일어서 보는 것이었다.

“일단 나 나갔다 온다. 오늘 K동 가야 돼.”

“그러든가.”

“갔다가 바로 들어가도 되지?”

“할 일 했으면 들어가. 일 줄여야 편하게 출장 가지.”

“……잔인한 새끼.”

테오는 결국 미팅을 하러 나가면서도 태블릿 PC를 챙겨야 했다. 때마침 우는 전화에, 테오는 전화를 받으며 어깨로 문을 밀어 나섰다.

“테오.”

테오는 대답 대신 뒤를 돌아 태영을 응시했다. 태영은 테오의 자리에서 안경집을 찾아 던져 주었다.

“아, 땡큐.”

밖은 시끄러웠다. 태영과 은재가 결혼을 발표하고, 임신 소식까지 한 번에 터뜨린 이후 기자들이 온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저택에서 출근을 하러 나오는 길목까지 모두가 태영을 지켜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언가 보도할 거리라도 발견할까 회사 근처에서 몇 날 며칠 지내는 이들도 있었다. 커피를 산 카페에 들어가 직원을 달달 볶는 경우도 이틀에 한 번꼴로 발생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어떤 난잡한 소식을 터뜨려도 기자들이 태영과 은재를 외면할 리는 없었다. 그렇게 시선을 받던 대경의 민은재의 결혼과 임신 소식이라니. 은재에게 향하는 관심도가 늘 높은 와중에 대경의 직접적인 미래와 연결되어 있는 일까지 생긴 셈이다. 당분간의 몸살은 감수해야 했다.

영국에 다녀오라는 데는 차라리 이 틈에 좀 몸을 숨기라는 의도 또한 있었다. 그럼 좀 시선이 분산될 테니까.

어쨌든 테오는 기자들 사이를 뚫으며 차에 올랐다. 밖에서부터 약간의 소란이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태영은 굳이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홀로 남은 태영은 그 뒤로도 서류에 몰두하다 한참 뒤에야 뻐근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좌우로 어깨를 풀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사이에 시간이 또 훌쩍 지나 있었다.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지금쯤이면 은재가 3층에서 일을 보고 있을 시간이었다. 곧장 답장이 오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귤이는 아빠 보고 싶다고 안 하나]

[난 우리 귤이도, 우리 은재도 보고 싶은데]

그럼에도 메시지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태영은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펜을 들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이들의 작업과 일정, 지원해야 할 것들, 그 외에도 세금을 비롯한 모든 부분까지 확인을 해야 했다.

영국에서 일할 때와 비슷하고도 또 다른 일들에 태영은 약간 정신이 없었지만 버텼다. 결국 은재를 손에 쥐었고, 귤이까지 생겼으니 감당해야 했다. 이 정도야 뭐…… 그 둘을 얻는 값이라고 치면 턱없이 가벼울 정도였다.

태영은 피식 웃으며 다시 숫자로 가득 찬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귤이도 그렇대.]

그런데 지잉, 예상치 못하게 우는 진동에 태영이 곧장 핸드폰을 확인했다.

[은재는?]

이미 온 답장만으로도 그에겐 최선이었음을 알았다. 그래도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다시 물으니 은재는 고민을 하는지 잠시 침묵했다.

[나는 우리 이사님 너무 보고 싶은데]

[너무너무]

태영은 벅찬 애정을 고백하며 대신 제가 마구 메시지를 보냈다. 은재는 고민이 끝났는지 답장을 보내 왔다.

[사진은?]

보고 싶다는 말은 없었지만 엉뚱한 그 답장에 은재의 본심을 알 수 있었다. 가끔 태영은 출근하고 나면 저택에서 일을 하고 있을 은재를 위해 사진을 보내 주곤 했다. 오늘은 일이 바빠서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급히 태영이 머리를 정리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것을 보내니, 은재는 기다리고 있었는지 금방 답장을 해 왔다.

[고마워]

분명 좀 전에 화장실에서 자위를 했던 것 같은데……. 은재에게 받은 세 글자에 다시 배가 끓는 것을 느낀 태영은 오늘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빠르게 훑었다.

[^^]

머리를 빠르게 굴리고 있으니 뒤이어 메시지가 도착했다. 제 말투가 영 딱딱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웃는 얼굴을 뒤늦게 보낸 그 마음을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아이까지 가진 사람이 아이보다 더 귀여워도 되는 건가.

태영은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섰다. 테오와 마찬가지로 태블릿 PC와 다른 서류를 챙겨 들곤 뛰듯이 빠져나왔다.

그 시각, 태영의 사진을 보고 또 보던 은재는 그렇게 30분이 흘렀음을 알고 놀라 숨을 삼켰다. 오늘 이 결재까지는 해야 하는데.

따끈한 감귤차를 마시며 흩어진 집중력을 끌어모았다. 다시 서류에 집중하여 세세하게 확인한 뒤, 복지 재단의 일을 좀 거들었다. 새로운 일이라 조금 더 여러 가지를 확인해야만 했다.

“……졸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아가 태영이의 급습이었다.

“오늘 많이 잤는데…….”

실재인지, 몽정인지 알 수 없는 것 때문인지 오래 잤음에도 몸이 피곤했다. 은재는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는적는적 걸어 다녔다. 2층에 있던 강 비서가 발소리에 올라와 인기척을 냈다. 혹 필요한 게 있으시냐며 물어왔지만 고개를 저었다.

강 비서는 대신 은재가 확인한 서류를 정리해 주고, 급한 건들만 내려놓았다. 그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일정을 정리하는 편이었다. 은재가 아이를 낳기 직전까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알기에, 컨디션이 될 때마다 일을 볼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그래도 약간은 속상했다. 이전에는 거뜬히 했던 일들이 버거워지는 게 익숙지 않았다. 지금도 눈이 감기고 있었지만 아가 태영이를 달래 가며 서류를 읽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내용을 확인했고, 돌려보내야 할 것들을 세심하게 체크해 두었다.

그러자 아가 태영이는 심술이 난 듯 뻥뻥 발차기를 했다. 은재는 창틀에 기대어 배를 더 쓰다듬었다.

“왜. 화났어?”

아이가 대답할 리는 없지만…….

“……조금만 더 하면 돼, 귤아. 조금만 더 같이 하자.”

귤이라고 불러 주자 아가 태영이는 더 신이 난 듯 뻥뻥 차기 시작했다. 비슷한 발차기인데도 괜히 귤이의 기분이 느껴지는 것 같아, 은재는 배를 만지며 웃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귤이가 기분이 좋으면 저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이렇게 소리 내어 귤이에게 말을 붙이면 듣고 있다는 듯 표현을 해 주는 게 대견했다.

그때 쿵쿵, 하며 묵직한 걸음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믿기지 않는 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 왔어, 귤아.”

아가 태영이를 다정하게 부르며, 저를 아빠라 일컬은 태영은 곧장 다가와 은재의 뺨에 키스를 했다. 놀라 눈을 크게 뜬 은재를 보며 씨익 웃고는 이내 몸을 숙여 배 위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귤이가 아빠 보고 싶다고 해서요.”

“너무 이른데.”

“그리고 우리 은재도 그렇고.”

“……너 자꾸.”

짓궂은 장난에 은재가 살짝 눈썹을 구기자 태영은 그를 번쩍 안아 올렸다. 바람이 스미는 창가 대신 책장 쪽에 놓여 있는 소파에 은재를 내려놓았다.

태영은 은재의 손을 제 목에 두르게 한 뒤에 자연스레 입술을 물었다. 아가 태영이가 눌리지 않도록 익숙하게 옆으로 누워 끌어안으며 다리를 얽었다. 은재는 두툼한 몸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겨울 냄새에 몸을 떨면서도 조심스레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절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너른 품에 안겼다.

“그렇게 웃으면 돌아오라는 거잖아요.”

“…….”

“웃어 주면 설레는 거 알면서.”

“……별 뜻 아니었는데.”

“전 이사님이 절 보기만 해도 떨려서 죽을 것 같아요.”

태영은 콧대를 은재의 뺨에 대고 비비며 동시에 하체를 문질렀다. 귀엽게 애교를 부리며 말하던 것과 달리 아래는 흉흉했다. 매일 이렇게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부풀어 오른 것 같아 가끔은 신기할 정도였다.

“귤이랑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귤이가 졸려 하는 것 같아서.”

“그럼 좀 자지, 왜.”

“많이 잤어.”

“더 자도 돼요.”

아예 몸을 일으킨 태영은 본격적으로 은재의 뺨과 손, 배와 발 같은 데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은재가 말을 할라 치면 입술에, 눈두덩이에 입을 맞추어 온몸이 정말 흠뻑 입술에 젖은 것처럼 만들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면 그곳에 입술을 묻고 간질이며 자국을 새겼다.

끝내 은재가 소파에 늘어져 손가락만 겨우 까딱할 무렵이 되어서야 태영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저 씻고 올게요.”

“……씻고 나갔잖아.”

“그래도요. 더러워요. 이사님이랑 귤이 보는데 깨끗해야죠. 금방 올게요.”

태영은 은재를 일으켜 앉게 한 뒤 내려갔다. 은재는 그대로 앉아 있다가 제 배 안에서 유영하는 듯한 귤이의 움직임을 느끼고 계단을 내려왔다. 민 회장님께 인사하고, 태영이 씻고 있는 2층 욕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쏴아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습관처럼 들고 내려온 서류를 읽었다. 단조롭게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니 집중도 잘 되는 듯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태영이 나올 때까지 서류를 읽었다.

“……이런.”

몇 분 지나지 않아 푹 젖어 나온 태영은 배스 가운을 걸친 차림이었다. 그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은재를 발견하곤 곧장 그를 안아 들었다.

“기다리시는 줄 알았으면 일찍 나올걸.”

그제야 은재는 제가 조금 전까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잠깐, 그 샤워하는 잠깐이 떨어지기가 싫어서 욕실 앞에…….

뒤늦게 은재의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이렇게 머리를 내려 이마를 덮고 있는 태영의 청초한 얼굴을 보니, 그가 소년이었던 때가 생각나 더욱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 내려놓은 양심이 불쑥 고개를 쳐든 것만 같았다.

“괜찮아요. 편하게 계세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몸을 뒤척이자, 태영은 허리를 도닥이며 말했다. 결국 태영에게 안겨 1층에 내려온 은재는 침대에 앉아 이불로 배를 감쌌다. 아빠를 너무나 좋아하는 귤이에게 차마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민망해 입술만 달싹였다.

“물 드릴까요?”

“……응.”

태영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먼저 물을 챙겨 주었다. 은재는 잔을 비우며 절 부지런히 좇는 태영의 눈동자를 피했다.

지금 이 순간은 태영과 눈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침대에서는, 그리고 밖에서 볼 때는 그렇게 낯선 알파처럼 굴더니 지금은 귀엽기만 했던 소년인 것 같아 보였다. 고작 이마를 덮고 있는 것뿐인데 장난기가 가득하고 싱그러운 청년의 향이 물씬 느껴졌다. 그의 아이를 가지고 있는 제가 갑자기 타락한 존재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배덕한 감상에도 이제는 그 사이에서 묘한 기분이 피어오른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요즘 왜 이렇게 귀여우세요?”

“안 귀여워.”

“귀여워요.”

하지만 태영이 볼 때, 요즘 은재는 정말 귀여웠다. 슬쩍 전화해 말은 하지 않고 있거나, 가끔은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모른 척 옷깃을 붙잡기도 했다. 샤워를 하러 갈 때 같이 할 거냐고 물으면 고민하다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늦게까지 서류에 매달려 있으면 다가와 옆에 묵묵히 앉아 있거나, 태영의 손을 끌어가 배 위에 올려두고 기대어 쪽잠을 자기도 했다.

“너무 귀여워.”

“…….”

“내가 이사님 아빠 같…….”

“그런 말 하지 마.”

편안한 마음의 발로인 것도 같았고, 아가 태영이의 영향인 것도 같았다. 어쨌든 결론은 명백했다. 은재도, 귤이도 모두 태영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가까이 있고 싶어 했다.

“저 머리만 말릴게요. 여기 계실래요? 아니면 3층에 바래다드릴까요?”

“……뭘 바래다줘. 계단만 올라가면 되는데.”

“그래도요. 우리 이사님 고운 발로 계단 잘못 밟으면 안 되니까.”

태영도 이제 참지 않고 간지러운 말을 했다. 이전에도 가끔씩 온몸이 간질간질한 말을 했는데, 이제는 매일같이 그런 말을 달고 살았다.

“머리 어서 말려. 감기 걸려.”

얼굴이 빨개진 것을 외면하며 은재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홀로 3층에 올라갈 생각은 또 없는 모양이었다. 의미 없는 손장난을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태영은 서둘러 머리를 말리고 곧장 은재의 품에 뛰어들었다. 은재는 조금 뾰로통한 얼굴을 하면서도 그 커다란 등을 안아 주었다. 부드러운 태영의 머리카락을 슥슥 넘겨 어릴 적 모습이 사라지게 한 뒤 다시 얼굴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휴. 그제야 거의 소리가 나지 않은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일 다 했어?”

“……음.”

“대표가 그러면 안 되지.”

은재가 태영을 이길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태영은 은재와 함께 다시 3층에 올라가야 했고, 서로를 곁에 둔 채 기묘한 침묵을 느끼며 미처 다 못 본 서류를 보았다.

귤이도 아빠 두 명이 곁에 있으니 좀 괜찮은 모양이었다. 나른한 기운은 가시지 않았지만, 오늘의 할당량은 채울 수 있었다. 최소한의 일만 할 수 있도록 해 준 강 비서의 배려로 금세 근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은재는, 맞은편에서 절 뚫어져라 보고 있는 시선을 뒤늦게 발견하곤 배에 올려 두었던 손을 떼어 냈다.

이제 배에 손을 올리고 있는 건 습관이 된 지 오래였다. 초반에 귤이에게 못 할 짓을 많이 해서 그런가. 지금이라도 많이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그때 상황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인 아이에게 어설프게라도 애정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태영이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가끔 태영은 이렇게 낯설도록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서류를 들고 기대어 앉아 있으면서도 은재를 계속해서 응시하던 분위기였다.

꼭 먹잇감에게 잠시 시간을 주며 관찰하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빠르지 않은 속도로, 어쩐지 느릿하게까지 느껴지는 걸음으로 다가와 은재의 곁에 서 허리를 굽혔다.

“…….”

“…….”

가까이서 보니 훨씬 더 육욕적으로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이제 은재는 태영이 이런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선을 보러 간 날, 류 전무와 태영을 스쳤던 날……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잘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가끔 참을 수 없는 날이면 태영은 이 표정을 드러내 보이곤 했다.

커다란 손 하나가 묵묵히 뻗어져 나왔다. 태영은 저도 한껏 몸을 숙이고는, 은재의 턱을 조심스레 감싸 들어 올려 절 바라보게 만들었다.

“전 가끔 이사님이 제 아이를 품고 있다는 게 안 믿겨져요.”

“…….”

“어떻게 이 판판한 배에 내 아이가 살고 있지.”

“…….”

“어떻게 이 몸 안에…… 내 아이가 생겼지.”

그러더니 곧 꿇어앉아 은재의 허벅지에 뺨을 묻었다.

태영은 은재가 이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을 유독 좋아했다. 아이가 생기기 전, 이 책상에 은재를 눕혀 놓고 섹스를 할 때도 있었다. 담배를 피우며 다리를 벌리고, 부드러운 리듬으로 흔들리던 모습. 상대적으로 옅은 색의 머리카락을 책상에 비비적거리며 흰 연기를 뿜고, 마음껏 신음하며 희게 도드라진 손가락으로 쾌감의 정도를 표현하던 얼굴.

그것 외에도 커다란 책상 위에서 곧은 자세로 앉아 이것저것을 보며 담담히 정리해 나가는 모습이 기꺼웠다. 모든 것이, 그렇게 크나큰 대경이 그의 이 아름다운 손 아래에서 굴러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저 또한.

넓은 공간임에도, 넓은 책상임에도 그 가녀린 몸으로 공간을 차지하고 저만의 분위기로 채우고 있었다. 3층에 발을 디디기만 해도 은재의 우아한 분위기가 몸속에 스미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발에 입 맞추고 바짝 바닥에 엎드려 찰나의 시선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태영은 은재가 일을 하는 것을 말리지 못했다. 그의 노력을 알았고, 그가 갖고 있는 열망을 알았다. 아닌 척하지만 일에서 만족감을 얻고 자신감을 얻는 그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감히 지금도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로 대경과 약한 아이를 함께 지탱하는 것이 보기만 해도 과분하게 보일 정도였다.

“밖에…… 시끄럽지?”

뒤늦게 은재가 진작 물었어야 했을 것을 물었다. 태영은 은재의 다리를 벌려 그 사이에 제 뺨을 비비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으로 하고 싶어요.”

“…….”

“해도 돼요?”

대답 없이 은재는 허리를 들어 바지를 벗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신혼이라 그런가……. 태영은 시도 때도 없었다. 그나마 은재가 임신 중이라 참고 있는 게 이 정도였다. 아이가 없었더라면, 정말 밖에 나가는 것도 어려웠을 지경이었다.

사실 사정은 은재도 비슷했다. 요즘 들어 시도 때도 없이 욕구가 치밀었다. 태영은 회사에 나가 있는데도 숨이 토해지며, 별안간 허리가 저릴 때가 있었다. 임신으로 인한…… 변화인가. 늘 건강한 알파를 연인으로 두고 있으니 부족할 일은 없는데.

태영은 어느새 제 두툼해진 허벅지를 만지며 뜨거운 숨을 뱉고 있었다. 은재의 부드러운 샅을 제 숨으로 적시며 살짝 일어선 것을 뺨으로 문질렀다. 짐승처럼 제 뺨에 대고 비비며 벌써 묻어나는 프리컴을 묻혔다.

“…….”

은재는 거부의 말 없이 의자 손잡이만 쥐었다. 다가오는 습하고 좁은 입 안에 발끝을 꺾으며 신음했다. 벌써부터 오싹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태영은 제가 입고 있던 실내복 상의를 벗어 깔아 준 뒤, 손으로 젖은 뒤를 문질렀다. 물기에 젖어 척척한 소리를 내는 내벽을 오가며 곧 흐르는 액체를 모두 삼켰다. 허벅지를 양손으로 붙잡아 고정한 채 혀와 점막으로 뒤를 정성스레 빨았다. 좁은 구멍에서 새어 나온 액체를 핥고 성기를 삼키기를 반복했다.

뜨거운 입 안에서 빠져나온 성기는 꺼덕이며 흔들렸다. 태영은 그것을 손으로 잡고 흔들며 회음부와 입구를 샅샅이 핥았다. 힘겨워하지 않는지를 계속 살피며 제 바지를 풀었다.

“…….”

은재는 숨을 삼키며 다리를 더욱 벌렸다. 크게 부풀어 핏줄 선 성기를 보니 아래가 미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제 안을 무겁게 밀고 들어와 채우면 따뜻하고 좋을 것 같았다. 뻐근하게 아래를 밀고 들어오며 묵직하게 몸을 채우는 것의 만족감을, 이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영은 삽입하는 대신 은재의 회음부에 제 것을 대고 비비기 시작했다.

“……아.”

은재의 성기와 제 것을 맞대고 비비며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의자가 쿵쿵거리며 밀려나 덜컥일 정도였다. 은재는 금세 묽은 정액을 토했다. 태영은 그것을 제 성기에 바삐 묻히곤 뻐끔거리는 입구 쪽에서 오가기 시작했다.

은재는 엉덩이를 들어 아예 허벅지를 사용하라고 몸을 내주었다.

그러자 태영은 은재를 책상에 엎어두고 그 위에 제 상체를 기울여 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끌어안았다. 은재가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조여 안으며 허벅지 사이에서 추삽질을 했다.

“읏, 응…….”

계속해서 달아오르는 감각에 은재가 책상을 붙잡지도 못하고 몸을 떨었다. 그저 태영에게 완전히 무게를 맡긴 채 거칠게 흔들렸다. 제 음낭을 찔러 오는 두툼한 것을, 제 성기 아래에서 오가는 묵직한 감각을 느끼며 그 손을 붙잡았다.

굳이 비벼지는 아래를 보지 않아도 얹히는 무게와 힘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버겁게 선 은재의 다리 바깥에 버티고 있는 다리의 두께는 차마 비교할 수도 없었다. 곧게 뻗은 늘씬한 다리로 근육으로 새겨진 몸을 버티고 있었다. 두 배 이상은 될 것 같은 두꺼운 허벅지가, 은재의 다리보다 더 단단한 것 같은 팔이 은재를 끌어안아 쳐올리고 있었다.

페로몬이 매끄럽게 뒤엉켰다. 날카로운 쾌감과 달리 부드러운 페로몬에 은재는 괴리를 느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절 달래는 페로몬과 몸을 헤집어오는 쾌감.

“……흣, 아.”

태영은 은재의 어깨를 물어뜯으며 허리를 뒤로 크게 뺐다가 쳐올렸다. 은재가 정액 같지도 않은 것을 다시 성기 끝에 매달 때까지 그 몸을 붙잡고 있었다. 코를 목에다 대고 숨을 들이켜며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해 허리 짓을 했다.

후……. 덜덜 떠는 은재를 그렇게 끌어안은 채 태영 역시 사정했다. 은재는 가쁜 숨을 토하며 책상에 엎어지려 했다. 태영은 배가 다치지 않도록 돌려 눕혀 은재의 다리를 벌렸다.

아직도 끈적한 액체를 달고 있는 아래에 뺨을 비비고 코를 비비며 혀로 내벽을 문질렀다. 언제 이 안에 들어가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것 같지만…….

위험한 고비가 있던 터라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아직 삽입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이 내벽의 조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제 저에게만 허락된 이곳을, 그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이곳을, 누구도 맛볼 수 없는 이 액체를 저만 즐겨야 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비부에 혀를 대고 있었다. 뻐끔거리며 입을 열 때마다 흐르는 액체를 모조리 삼키고 난 후에야 일어섰다.

밭은 숨을 내쉰 은재가 태영에게 손을 뻗었다. 힘에 겨워 손이 떨렸지만 끌어당겨 안으며 키스를 했다. 기꺼이 은재의 키스에 응한 태영은 곧 절 눕히는 손길에 의해 그의 옆에 드러누웠다.

“…….”

“…….”

책 냄새와 적막한 공기, 고요한 볕만 머물던 곳에 이제 이 비릿한 냄새는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태영은 그 공기를 깊게 마셔 제 폐부 속에 모조리 저장해 두었다.

사랑하는 이의 옆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안온함.

나른함이 밴 공기가 느리게 떠돌며 색정적인 향을 서서히 밖으로 내보냈다.

“영국에서 아주 잘 지냈어요.”

“…….”

“더 자세하게 말할까요?”

“……응.”

종종 은재는 태영의 과거를 물었다. 7년 동안, 태영이 영국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그저 어떻게 살았는지 보지 못해 호기심이 일어 묻는 게 아니었다. 갑작스레 알파로 발현한 뒤, 제대로 도움을 받지도 못하고 홀로 버틴 7년이 어땠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분명 그 시기에 태영이 제가 알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은재는 그렇게 자신을 더 궁지에 몰아넣곤 했다. 이제라도 그때의 일을 제대로 알고 사과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태영은 단조로운 영국 생활을 보냈다. 테오라는 친구를 이르게 만났고, 그로 인해 형질을 가진 이로서의 생활도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히려 영국에선 형질을 가진 이들을 더욱 많이 만나, 별안간 얻게 된 형질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심어졌다.

“지난번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떠난 것까지 말했어.”

해코지를 하려는 사람을 만났다거나, 배경으로 대경이 있는 걸 알고 한탕을 노리려는 사람들은 없었다. 세헌의 배려로 소박한 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다른 이들만큼 고생했고, 다른 이들처럼 살았다. 특별히 더 괴롭거나, 더 끔찍했던 순간은 없었다.

오히려 떨어져 있음에도 분명한 은재의 염려와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세헌은 꽤 자주 영국에 들러 은재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볼 때마다 눈에 띄게 자라 있는 태영을 훑으며 연적을 대하듯 굴었지만, 끝내는 은재가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항상 전해 주었다.

그렇지만 연락을 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것은 빠른 시간 내에 이룰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건 분명했다. 영국에 오던 순간부터, 제가 발현하던 때 옆을 떠나지 않았던 그를 안 순간부터, 혹…… 그전부터 원하는 건 하나였다. 민은재.

그렇지만 은재의 연락을 전전긍긍하며 기다렸다간 그에게 돌아갈 수 있는 시간만 허비하는 것 같아 이를 악물고 연락을 끊었다.

그것도 너무 견딜 수가 없던 순간부터 하나씩 소포를 보냈고, 또 한국에 있는 의준의 도움을 받아 꽃을 보내기 시작했다.

연락이 되지 않더라도 자신이 은재의 아이라는 건, 은재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건 변함없었지만 가끔은 뼈저리게 외로웠다.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그와 연결된 끈을 제가 스스로 끊은 것만 같다는 사실이 아득했다.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가끔은 두렵기도 했다.

그게 은재의 잘못은 아니었다. 은재는 두려운 와중에도 절 지켜 주었고 최선을 다했다. 제가 은재의 소년이라는 자리를 넘어서 그를 쟁취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을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의 죄는 없었다.

“맞아요. 지난번에 첫 전시를 열었던 것까지 말했죠.”

“응.”

“그 화가분이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그분과 연이 오래 이어졌고, 다른 전시도 많이 볼 수 있었어요. 일손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여러 가지 작업을 도와드렸고, 또 전시회장이 없어서 처음에는 길거리에 그림을 놓기도 했어요. 바다가 근처였거든요. 잘 어울리는 그림들이었어요.”

“…….”

“그 작가님은 오히려 그 전시를 좋아했지만, 전 지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림의 색이 변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근처에 있는 빈 컨테이너를 빌려서 페인트칠을 했고…… 한동안은 거기서 여러 전시를 했어요. 작은 공연도 했고요. 그때 했던 연극이 지금도 생각나요. ‘고도를 기다리며’. 그게 공연으로써는 처음 올린 거였어요. 조명도 달고…….”

태영은 옆으로 누운 채 팔을 괴고 은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재는 그를 올려다보며, 그때를 회상하는 태영의 눈동자가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전시가 열렸던 동네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파도가 밀려오고 사람들의 활기가 들어찬 곳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깊은 눈동자만 보아도 그 시절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얼굴에 검댕을 묻히고 직접 자재들을 나르는 태영,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조명을 설치하고, 낡은 벽에 페인트를 바르고, 연장을 들고 다니며 그림을 옮겨 달고…….

사업을 이어받아 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구상하고 일으키는 것은 경험해 본 적 없는 은재였다. 민 회장이 잘 일궈 놓은 밭에서 계속 씨를 뿌리고, 영양분을 주며 소산을 거두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태영은 차원이 다른 노력을 해 온 것만 같았다.

다름 아닌 제 곁에 돌아오기 위해.

태영은 늘 그 시절에 대해 건조하게 말했지만, 은재는 그 덤덤한 말 뒤에 숨어 있는 무수한 노력들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었겠지만…….

저도 그 순간에, 그 장면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나중에 귤이 낳고, 몸 추스르면 같이 갈까요?”

“……네가 첫 전시를 했던 곳?”

“네. 이사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한국에 있는 미술관처럼 깨끗하고 정갈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새로울 거예요.”

은재가 태영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영은 그 손가락 마디마디에 입을 맞춰 주며 깍지 껴 잡았다.

“에린은 두 번째 전시를 열었던 작가였어요.”

“오래된 사이였구나.”

“네. 나이가 있으셔서 제가 부족한 것도 이해를 많이 해 주셨고요. 덕분에 이렇게 될 수 있었어요. 좋은 분이세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은재가 태영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

“같이 식사하자. 이제 정말 인사해야지. 지금도 늦었는데.”

“귤이 낳고 나서 해도 되는데.”

“귤이 낳고 나면 더 바쁠 거야. 아가들은…… 밤낮없이 울잖아.”

“음, 그렇네요. 우리 귤이를 잘 돌봐 줄 사람을 서둘러 알아봐야겠어요. 이 저택에 그렇게 갓난아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

민 회장은 은재 외에 자녀를 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저택에서 정말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날 일이 없었다. 그 새로운 역사를 기어코 은재가 이뤄 낸 것이었다.

새삼스럽게 은재의 목덜미가 울긋불긋해졌다.

“어쨌든 곧 데려와. 기사도 그렇게 많이 났는데 더 늦어지면 민망해.”

“알았어요. 그럼 병원 가서 최 박사님한테 물어본 후에요.”

“괜찮아.”

“네. 그래도요. 우리 아가 태영이랑 은재는 안전해야 되니까.”

태영은 자연스레 책상을 내려가 은재를 안아 들었다. 걸을 수 있다며 말하면서도 은재는 슬그머니 태영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나직하게 웃은 태영은 더욱 그를 조여 안으며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1층에서는 벌써 식사 준비가 되고 있는지 맛있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훈기가 담뿍 올라오고 있었고, 사용인들이 대화를 하며 작게 웃는 소리도 들렸다.

“저희 들어가도 되나요?”

“그럼요. 자리 봐 드리겠습니다, 도련님.”

그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며 태영이 다이닝 룸에 들어섰다. 은재가 그의 품에 안겨 있었지만, 사용인들은 익숙한 듯 받아들이며 은재의 자리를 먼저 정돈했다.

정작 은재는 여전히 뺨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이러한 상황에 태연한 척 자리에 앉긴 했지만, 아직도 은재는 이런 상황이 쑥스러웠다.

“맛있는 냄새 나는데요.”

“어제 도련님께서 홍합 스튜 이야기 하셔서요. 오늘 새로 들어온 재료들이 신선도가 괜찮아서 그렇게 준비했습니다.”

“역시 정 실장님은 대단하시다니까요.”

태영은 지나치게 능글맞게 굴지도 않았고, 과하게 애교를 떨지도 않았다. 적당히 기분 좋은 얼굴로 대화를 하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맞춰 주었다.

은재는 어느새 제 앞에 놓인 주스로 입술을 축이며 잠시 그 분위기를 목도했다.

이 저택에서 이런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는구나. 저만 있을 때는 늘 고요하고 적막한 곳이었는데. 사용인들 또한 소리를 죽인 채 대화했는데. 지금은 저택 곳곳이 평화롭게만 여겨지고 있었다.

“혹시 속이 불편하시면 말씀 주세요. 다른 식사도 준비했으니 바로 올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들이 절 배려하여 그렇게 소곤거렸다는 것을 알지만, 그런 분위기에 익숙한 은재에겐 오히려 저택의 활기가 어색했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하는 태영이 낯설었고, 역시 그런 것을 좋아하는 듯 꾸물거리며 배 속에서 유영하는 아가 태영이가 귀여웠다.

아가 태영이는…… 아무래도 태영이를 닮아 활력이 넘치는 모양이었다. 귤이 역시 태어나면 태영이를 닮아 이 저택의 자연스러운 주인이 되겠지. 이렇게나 매끄러운 성격으로 사람들과 교류하며, 모든 이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겠지. 활기차게 저택을 뛰어다니며 계단을 밟고, 침대 위에서 뛰기도 하고, 높은 곳에 손이 안 닿아 끙끙거리기도 하고.

어릴 적 태영이가 그랬던 것처럼.

“마침 이번 주에 병원 검진이잖아요.”

커틀러리 옆에 놓인 물수건으로 깨끗하게 손을 닦은 태영은 함께 테이블에 놓인 게와 새우를 까 은재의 접시에 놓아 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교복을 처음 입은 태영이 모든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등교했던 날을 떠올리던 은재도 식탁 위의 대화로 돌아왔다.

“가서 다른 사람들 만나도 되는지 물어보고 초대해요.”

정 실장은 은재의 식사를 확인한 뒤 뒤이어 태영의 옆에서 이것저것을 확인해 놓아 주었다. 그 시중을 익숙하게 받는 태영을 보며 은재도 고개를 끄덕였다. 스프를 떠 마셔 속을 데우며 나른한 숨을 삼켰다.

서서히 사용인들의 대화 소리가 끊어지고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은재는 묘한 고요를 느끼며 가만가만 태영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예쁜 얼굴로 보셔도 최 박사님한테 허락받은 후에 초대할 거예요.”

“……알았어.”

그가 직접 까 준 새우가 오동통하게 씹혔다. 아가 태영이는 귤 외에도 해산물을 좋아하는 눈치였다. 이건 저의 식성을 닮았는지……. 은재는 하나를 집어 태영의 빈 접시에도 놓으며 작게 웃었다.

사실, 묻고 싶은 건 또 있었다. 태영의 영국 생활이 늘 궁금했지만, 어떻게 살아왔는지 속속들이 알고 싶었지만 태영이 끝까지 말하지 않을 듯한 것.

러트.

러트 기간 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알파들은 약으로 충분히 참을 수 있으니 그렇게 지냈을까. 괴롭지는 않았을까.

제가 태영의 처음인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은재는 태영과 이렇게 함께하게 된 생활을 몹시 기뻐했다. 속내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기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그래도 가장 안전하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민 회장을 만나 저택에 온 날, 그리고 지금이 제일 좋았다.

그래서인지 깨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조금 견디면, 굳이 꺼내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아도 되는 것들.

그렇게 은재는 자신만의 아슬아슬한 평화를 지키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저를 위해 태영이는 정말 오래 참았으니까, 오래 괴로움을 견뎠으니까.

* * *

병원으로 가는 길은 예상한 것만큼 혼잡했다. 은재의 외출을 눈치챈 것인지 기자 몇 명이 눈에 띄게 따라붙었다. 그 외에도 먼 곳에서 따라오는 이들 또한 있을 게 뻔했다.

은재가 평소에 자주 가던 곳곳에 미리 잠복하고 있는 이들도 있겠지.

태영과 은재는 반지를 나눠 끼자마자 발표를 했다. 사랑하는 사이이며, 그 사이에 아이까지 생겼다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모든 언론이 뒤집어졌다. 한창 호가를 달리던 리조트 사업이 잠시 휘청였다. 이전에 있던 둘의 모호한 사이에 대한 찌라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다시금 대경과 재원 문화 재단, 그리고 신사업 관련한 음모론 또한 힘을 얻었다.

그러나 태영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하게 나갔다. 도움을 받지 않았으니 물러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은재도 태영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렇지만 언론의 호기심은 줄어들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었다.

그렇게나 세간의 이목을 당기던 오메가. 도저히 기업의 실질적 대표라고 믿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가느다란 오메가의 임신. 그리고 그의 알파는 다름 아닌 그의 입양아.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는 수식어들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오랫동안 두문불출하던 은재의 외출이라 더더욱 이목이 쏠렸다. 덕분에 은재는 경호원에 휩싸여 병원으로 들어갔다. 추운 날씨가 몰아치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차에서 내려 곧장 으슥한 통로로 향했다.

“이사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미리 도착해 있던 태영이 경호원들을 가르고 다가와 은재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제야 은재는 숨을 몰아쉬며 제 손을 꽉 잡은 알파를 올려다보았다.

경호원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게 서 있는 태영. 경호원들이 그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보호받아야 할 것 같은 몸집의 남자.

눈이 마주치자 태영은 표정을 풀고 옅게 웃어 보였다. 다정한 열기가 손끝에서부터 전해지고 있었다.

“오는 길에 괜찮으셨어요?”

“응. 괜찮았어.”

“그러게 제가 모시고 나온다니까.”

“아냐. 오늘 잠깐 들를 데도 있었고. 너 일도 있었잖아.”

병원은 텅 비어 있었다. 이들을 위해 예약을 잡지 않고 비워 둔 것이었다.

그럼에도 경호원들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태영과 은재의 주변을 둥그렇게 감싸고 진료실까지 친히 바래다주었다.

태영은 은재를 안전하게 품에 끌어안고 걸었다. 아무도 없는 광활한 공간이었지만 그렇게 몇 겹으로 둘러싸인 보호를 받으며 걸었다.

……근데 문득 약한 페로몬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항상 그에게서 느껴지는 알파 페로몬 외에 다른 페로몬이 묻어 있었다. 오메가 페로몬인 것처럼 부드럽고 간지러운…….

“이사님. 먼 길 오셨습니다.”

“오랜만에 또 뵙네요.”

“몸은 좀 어떠신지요.”

은재는 태영의 몸에 묻어 있는 낯선 페로몬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나타난 최 박사에게 인사를 하며 진료실에 들어섰다. 태영 또한 최 박사와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평소 같은 그 모습에 은재는 괜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냥 어디서 잠깐 흘러 들어온 거겠지.

검진 절차는 늘 비슷했다. 초음파를 보았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했다. 배를 드러내고 젤이 발리는 건 어쩐지 수치스러웠지만…… 그럴 때마다 태영은 곁에 앉아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언제든 입술을 어깨와 손등에 붙일 수 있도록 기대어 앉아 화면을 보고, 은재를 위로했다.

아이는 예상했던 것처럼 건강했다. 언제 성장이 더뎠나 싶을 정도로 쑥쑥 자라 있었다. 그에 비해 은재의 몸무게는 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은재가 힘들어질 수 있기에 최 박사는 살을 찌우는 것을 권했다.

그 외에도 익히 알고 있는 말들이 이어졌다. 태영은 그럼에도 새겨듣다, 이내 은재의 허벅지를 슬쩍 쥐며 물었다.

“아직 좀 입덧이 남았는데요.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잠을 설치기도 하고요.”

“개개인마다 입덧이 끝나는 시기는 다릅니다. 많이 심하시면 약을 좀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제일 좋은 건 알파 페로몬을 받으시면서 쉬시는 겁니다. 스트레스를 피하셔야 하고요.”

입덧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전에 있던 것에 비하면 많이 가라앉았다. 가끔 속이 불편한 것 말고는 없었는데. 그래서 딱히 태영에게 말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걸 알고 있었다니.

“과로도 하시지 말고요.”

태영은 것 보라는 듯 눈가를 찡긋거리며 은재를 바라보았다. 은재는 왠지 부끄러워져 제 허벅지를 쥔 태영의 손을 붙잡았다.

“일 많이 줄였는데.”

“피곤하면 눈 붙이시고요. 자꾸 참지 마세요.”

이어지는 애정 어린 소리에 은재가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사람들 초대를 좀 하려는데요. 상관없겠죠.”

“네. 사람들 만나시는 건 괜찮습니다. 무리하지 않으시면요.”

하는 수 없다는 듯 태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도련님 몸 상태는 괜찮으십니까? 각인을 하시고 시간이 조금 지났는데…… 혹 별다르게 느껴지는 반응은 없으신가요.”

“아, 네. 전 괜찮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러트 관련 검사를 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러트라……. 최 박사의 제안에 태영은 잠시 고민하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던 탓이었다.

“금방 올게요.”

은재는 붙잡고 있던 태영의 손을 놓아주었다. 최 박사는 태영과 함께 진료실을 나섰고, 곧 다른 간호사에게 그를 맡기고 진료실로 먼저 돌아왔다.

“간단한 검사이니 금방 오실 겁니다.”

“네. 저 그리고, 한 가지 더 여쭐 게 있습니다만.”

“예. 말씀하시죠.”

“관계를 맺어도 안전한 건가 해서요. 그때 하혈이 있어서 아직까지 조심하고 있는데…… 이제는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데요.”

“아, 네. 물론입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그 체위만 피하시면 괜찮습니다. 이사님은 또 우성이셔서 아기집이…….”

언젠가도 한 번 들었던 설명이었다. 우성이라 아기집이 더 안쪽에 있고, 튼튼하다고. 이전에 하혈이 있었지만 괜찮을 거라고. 깊게 들어가는 자세만 피해서 하라고.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을 때쯤, 재킷을 벗은 태영이 들어왔다. 손에 재킷을 들고 들어온 그는 간단한 셔츠만을 입고 있었다. 때문에 단단한 그의 가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걷어붙인 소매 뒤로 드러난 핏줄마저 보이고 있었다.

“추운데.”

“괜찮아요.”

그리고 그가 곁에 와서 앉자 다시금 그 페로몬이 문득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달콤한 오메가의 페로몬.

최 박사는 전달받은 검사지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문제는 없다고 말하며 간략한 말을 덧붙였지만, 은재는 듣지 못했다. 이미 사라진 그 페로몬 때문에 자꾸만 정신이 흩어졌다.

분명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재킷을 벗었는데도 느껴지는 건, 셔츠만 입고 있던 때 묻었다는 뜻인데. 착각이 아니라 더 선명해진 오메가 페로몬에 최 박사의 말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럼 다음 검진일은 어떻게 할까요.”

“이사님.”

“…….”

“……이사님.”

괜찮으세요? 태영이 묵묵부답인 은재를 향해 물었다. 뒤늦게 은재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절 보고 있는 이들을 응시했다.

“뭐라고 하셨죠?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태영은 낮게 웃으며 검진 날짜를 잡아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은재는 무작정 눈에 보이는 날짜를 손으로 가리켰다.

최 박사는 함께 진료실을 나와 이들을 배웅했다. 태영은 잠시 주변을 둘러싼 경호원들을 살폈다.

“이사님, 저 잠시만요. 박사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여기서 해도 돼.”

“잠깐이면 돼요.”

강 비서가 다가와 은재의 옆에 붙어 섰다. 그제야 한 걸음 물러난 태영은 멀지 않은 곳에서 걸음을 멈춰 무언가를 물었다. 최 박사는 잠시 은재를 돌아보았다가 무어라 대답을 해 주었다.

대화는 정말 금세 끝이 났다. 그렇지만 은재는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별일 아닌데……. 귤아,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제 불안을 혹시 귤이가 같이 느낄까 싶어 배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러자 어느새 다가와 허리를 끌어안은 태영이 손을 겹쳐 배를 쓸어 주었다.

“힘드세요?”

“아니야. 안 힘들어.”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가…… 어서 들어가요. 가는 길엔 제가 모실게요.”

둘이 끼고 있는 반지가 겹쳐진 손 너머로 느껴졌다. 은재는 그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크게 호흡했다. 아무 일 없다고, 태영은 저에게 무언가를 숨기지 않는다고…….

그렇지만 배는 조금씩 조여들었다. 점차 차오르는 불안감을 느낀 걸까. 차에 오르자마자 태영은 은재의 양 뺨을 부드럽게 붙잡아 입 맞춰 주었다.

“……조금 더.”

눈을 감고 있던 은재는 입술이 떨어지자 나직이 말했다. 태영은 기꺼이 다가와 쪽, 쪽 입을 맞추고 혀를 빨아주었다. 두려움이 모두 흩어져 사라질 만큼 깊숙하게 혀를 섞고, 훑어주며 마치 제 페로몬을 잇새로 불어넣듯 호흡하게 해 주었다.

몸을 차분히 감싸는 페로몬을 느끼고 나서야 은재가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러고도 태영은 은재의 콧대 옆에 오래오래 입술을 내렸다.

“좀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아가 태영이가 지독하네. 이렇게 우리 이사님 힘들게 해서 어쩌지.”

태영은 은재의 손을 깍지 껴 꽉 잡아 주었다. 힘든 것은 제가 모조리 가져가겠다는 그런 태도였다. 그 힘에 은재는 깊은 안도를 느꼈다. 천천히 출발하는 차를 느끼며 반대편 손을 뻗어 태영의 뺨을 만져 주었다.

자연스레 그 손을 끌어와 태영이 입술을 묻었다. 몸을 접어 제 연인의 품에 안기며 공연히 피어난 불안을 완전히 없애려 들었다.

은재는 그 열기와 무게를 받아 안으며 호흡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태영에게 의지하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태영을 안으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커다란 몸을 쓰다듬고 안으며 감정을 정리했다.

고작 이 외출을 했다고 몸이 노곤했다. 정신이 붙잡을 새도 없이 불현듯 뚝, 끊어졌다.

눈을 뜨니 낮은 음성이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이 듣기 좋은 소리가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깨셨어요?”

“…….”

“잠깐 잠드셨어요. 아직 하루 안 지났고요.”

통화를 하고 있던 태영이 다가와 은재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누군가 ‘한 대표? 야, 한태영!’ 하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테오인 모양이었다.

옅게 웃은 은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턱으로 핸드폰을 가리켰다. 그러나 태영은 말도 없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면 어떡해.”

“괜찮아요.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언제 오기로 했어?”

“……그건 아직 안 정했는데.”

“난 이번 주가 좋아. 금요일에 괜찮다고 하면 초대해.”

“오늘 이렇게 지치셨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피곤 때문에 마음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니 그런 불안이 언제 느껴졌냐는 듯 가뿐했다.

임신이란……. 은재는 제가 아이의 영향을, 바뀌는 호르몬의 영향을 잘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괜히 별것도 아닌 태영의 사소한 행동이 신경 쓰이는 거겠지.

오늘 제가 느꼈던 불안이 황당해 은재가 더 크게 웃으며 태영에게 손을 까닥였다. 태영은 기다렸다는 듯 기어 침대 위로 올라왔다.

언제나 저에게 복종하겠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이 알파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잠잠히 웃었다.

“다들 뭐 좋아해.”

“다 좋아해요. 안 가려요.”

“그럼 뭘 준비하라고 하지…….”

“이사님이 드시고 싶은 거요. 우리 아가 태영이가 먹고 싶은 거.”

다시 태영의 전화가 지잉지잉 울었다. 하지만 태영은 보란 듯이 핸드폰을 멀리 던지고 와 은재가 덮고 있던 이불을 와락 끌어 내렸다. 꽤나 쇼맨십이 돋보이는 행위였다. 고전 영화에 나오는 마당쇠…… 그런 것처럼 보였다.

연상되는 장면들에 은재가 웃음을 터뜨리자 태영은 아예 은재를 들어 올려 안았다. 그야말로 신방에 들어가는 신랑처럼 은재를 안고 난잡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 입술을 피해 고개를 돌려 보아도 태영은 지치지 않고 따라붙어 입을 맞췄다. 입술을 주욱 내밀고 눈을 가늘게 뜨며 절 안아 달라 독촉했다.

은재는 조금 더 크게 웃으며 태영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귤이도 은재의 배 속에서 뻥뻥 제 존재를 알리며 그 순간에 동참했다. 태영은 자연스레 그 배에 손을 올려 쓰다듬으며 혀를 맞대고 비볐다.

혀를 타고 나른한 숨이 전해졌다. 태영은 그 숨을 받아 마시며 희미하게 웃었다.

둘 모두 혀를 맞대고 웃는 방법을 이제는 터득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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