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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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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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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따갑고 건조했다. 몇 번 눈을 감았다가 떠야 그나마 시야가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이런 건 꽤 오래 눈을 감고 있었을 때의 증상인데.
은재는 고요히 숨을 죽인 채 눈만 깜박였다. 그걸 눈치챈 듯, 누군가가 물수건을 살포시 덮어 눈 주위를 닦아 주었다. 그제야 하얀 천장이 시야에 담겼다.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다.
“정신이 조금 들어?”
곁에 있는 것은 세헌이었다. 은재는 세헌이 왜 여기 있는지, 제가 있는 곳은 또 어디인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눈만 더 깜박였다.
“아직도 눈 아파? 목은 어때. 다른 데는.”
은재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세헌은 한숨을 뱉으며 은재를 일으켜 앉게 해 주었다. 물을 따라 그 손에 건네며 자신 역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점차 정신이 깨어날수록 목이 따끔거렸다. 몸의 통증이 덩달아 깨어나고 있었다.
“……어디야?”
물 한 잔을 다 비운 후에야 은재가 물었다. 그럼에도 갈증과 통증이 가시지 않아 다시 물을 따르려 하니, 세헌이 잔을 받아 가 물을 다시 채워 주었다.
“병원.”
“병원?”
그러고 보니 이불에 최 박사가 원장으로 있는 병원의 이름이 적힌 게 보였다. 멀어졌던 시야가 천천히 다시 돌아오고 감각들 또한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뒤늦은 현실감이 번졌다.
“기억 안 나?”
은재는 두 손으로 물컵을 받아 마시며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무슨 기억이 마지막으로…….
“……아, 태영이.”
잠시 가득 찬 물컵을 들고 있었다고 손이 떨렸다. 세헌은 인상을 찌푸리며 컵을 받아 갔다.
“태영이는?”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어. 기억 나?”
“류 전무는. 어떻게 됐어?”
“태영이가 알아서 잘 처리했고.”
“많이 다쳤대? 보상은? 태영이는 안 다쳤지?”
“그 새끼는 생각보다 조용해. 지도 부끄러운 것 같고. 그리고 지금 그거 물어볼 때야?”
“태영이 다쳤어?”
“……걘 멀쩡해.”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고작 몇 마디 했다고 숨이 차기까지 했다. 은재는 세헌이 가져갔던 컵을 다시 끌어와 마시며 어설프게 주변을 살폈다.
“얼마나 됐어?”
“너 이렇게 된 지? 너 하루 꼬박 잤다. 저녁 열 시 무렵에 수술하고 그리고 그다음 날까지 자고 모레야.”
“……꽤 됐네.”
묻고 싶은 것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고민했다. 무언가 흐르던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당연히 피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흘러내릴 만한 무언가가 없었다.
그런데 하얗게 질리는 태영의 얼굴이 대신 상황을 알려 주었다. 그제야 은재는 뚝뚝 제 다리를 타고 흐르는 피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에도 은재는 태영부터 끌어안았다. 정신이 흐려지기 전까지 놀란 얼굴의 태영을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괜찮다 말했다. 절 끌어안는 힘을 받아 주며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읊조렸다.
태영도 고개를 흔들었다. 주변이 요란하게 바뀌고 차가운 공기와 온화한 공기가 번갈아 덮쳤지만, 그럴 때마다 태영은 은재의 뺨에 입 맞추고 차갑게 식는 몸을 어루만지며 코를 비볐다. 별거 아닌 일처럼, 별일 없는 것처럼 은재의 목줄기에 이마를 대고 온기를 나눴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의식이 흐려질 때는 태영이 다리를 만져 주기도 했다. 허벅지부터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며 몸이 추워지자, 은재는 그에게 안긴 채 덜덜 떨었다. 춥다고 말하면 태영이 염려할까 얼핏 입꼬리를 당기며 굳어진 태영의 뺨을 만져 주었다.
억지로 표정을 풀어 낸 태영은 테오와, 의준과 있었던 별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며 다리를 문질렀다. 다리를 주무르며 체온을 전해 주고 제 코트로 은재를 억세게 감쌌다. 숨결을 불어넣어 주고 만져 주며 추위가 더 틈타지 못하도록 해 주었다.
마침내 도착한 병원 베드에 누워 수술실로 실려 갈 때에도 태영은 나직이 고개를 흔들었다. 기다릴게요. 그 말을 하고 자꾸만 감기는 은재의 눈꺼풀에 연달아 입을 맞추었다.
그게 이틀 전의 일이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한심하게 군 것인지. 태영이가 많이 놀랐을 텐데.
“…….”
뒤늦게 떠오르는 그날의 일에 차마 은재는 입을 열지 못했다. 아가 태영이가…… 어떻게 되었냐고. 아가 태영이가 간 것이냐고 물을 수 없었다.
그저 세포, 배아, 그리고 이제 겨우 태아가 된 것을 지우려 했다. 수술을 하려고 날짜까지 잡아 두었다. 배가 텅 비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태영이도 알았겠다.”
태영이한테는 아가 태영이가 왔었다고 말도 못 했는데. 아가 태영이를 보낸 것을 먼저 말하게 되다니. 얼마나 그날의 일이 충격이었을까.
“……수술 잘됐어?”
굳은 얼굴로 앉아 있던 세헌은 쯧, 혀를 차며 숨을 뱉었다.
“무슨 의미로 묻는 건데.”
“…….”
“그걸 묻고 싶어? 정말?”
이제 습관처럼 배를 감싸려 했다. 그래 봤자 좋을 게 없는데, 그 짧은 기간 배 안에 있었다고 만지는 데 익숙해졌다.
사람은 모두 다 이렇게 모순적일까. 수술을 하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지만, 다시 최 박사를 만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러면서 그것과 함께 외로운 시간을 견뎠다. 그때는 정말 세포였을 텐데. 몸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세포와 다를 바가 없었을 텐데도, 그게 자라 숨이 트이고 생명이 된다 생각하니 무언가가 곁에 있었다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태영을 밀어내고 대신 의지하던 태영의 조각이었다.
그 때문인지 한동안 최 박사를 찾지 못했다. 곁에 둘 것이 필요했다. 은재도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내재된 깊은 외로움 때문인지, 종종 이성을 좇으면서도 충동을 택하곤 했다. 가야 할 길을 알지만 용기는 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대신 위장한 자신감을 두르고 살았다.
그래서 그것으로 태영을 찌르고도 제가 제일 아픈 척했다.
그것을…… 이제 하지 않으려 그곳에 갔었는데.
“어떻게 됐어.”
“…….”
“죽었어?”
도저히 아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마지막 보루였다.
태영이를 택하려고, 태영이에게 잘못을 빌려고 마음을 먹었으니 아가 태영이에게도 그래야 마땅했다. 그래서 용기를 쥐어짜 물었다.
깊은 숨을 내쉰 세헌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계속 태영이가 곁에 있었어. 태영이 페로몬이 안정에 도움이 된대서.”
“…….”
“아이가 아기집에 비해 커서 위험했대. 네가 원했던 수술 날짜까지는 아직 조금 남아 있고…… 수술을 버티든, 혹은 아이를 키우든 아기집이 더 커야 안정적이라더라. 그래서 태영이가 계속 고생했다.”
그 말의 뜻은.
“하혈은 아기집이 약해서 그랬던 거래. 조금만 늦었으면 정말 위험할 뻔했어.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해서 너도, 아기도 건강하고.”
……아직 있었구나. 은재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세헌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숨을 참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이제 보니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몸 안에 생긴 것을 낳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도 안도가 되었다.
“마음 정리될 때까지 보지 말자고 했으면 이런 일은 없어야지.”
“고마워. 그리고…… 미안.”
“됐다. 너 보러 온 거 아니고 태영이가 부탁해서 온 거야.”
“……태영이가?”
“낮에 일을 꼭 봐야 하는 게 있다고. 웬만하면 좀 있어 달라고 직접 와서 부탁하더라. 그 얼굴을 보면…… 그렇게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안 들어주냐. 내가 빚진 것도 있고. 너보다 태영이 말이 더 급했어.”
그러니까 좀 참아. 세헌은 눈가를 닦아 주었던 물수건으로 은재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닦아 주었다. 은재는 세헌의 손을 밀어내며 멋쩍게 웃었다.
“이런 거 하지 마.”
“오늘까지는 누워만 있으랬어. 참아.”
“그럼 내가 할게.”
은재는 제가 수건을 가져가 직접 손을 닦았다. 그러면서도 아직 하지 못한 말을 조금 더 삼켰다.
태영이는 어디에 있을까. 태영이가 보고 싶은데. 아직 아무런 말도 해 주지 못했는데.
“저녁 때 온댔어.”
꺼내 놓은 이야기가 아닌데도, 세헌은 은재의 얼굴만 보고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알아챘다. 은재는 묵묵히 목을 붉히며 닦은 손을 또 닦았다.
“피곤하면 더 자. 소파에 있을 테니까.”
세헌은 은재의 곁에서 물러나 소파로 향하며 말했다. 그가 가져온 듯한 은근한 커피 냄새가 방 안에 천천히 고이고, 은재는 숨을 마시며 몸을 뉘였다.
뒤늦게 문득 다른 한 가지가 더 떠올랐다.
“……그, 문진은 못 봤어?”
“문진? 모르겠는데? 들고 있었어?”
“없어졌나 보네…….”
“찾아봐 달라고 할게. 우선 쉬어.”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과 달리 아가 태영이는 이 순간에도 주스를 원했다. 은재는 배를 살살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곧장 깊은 수면에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고, 또 그 다음 날이 되어도 태영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점차 컨디션은 회복되었다. 밤중에 누군가가 와 배를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페로몬을 쏟아 주는 게 분명했다.
그 따뜻한 손길을 그릴 수도 있었고, 그 순간 느껴지는 인기척을 알았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키고 태영을 붙잡고 싶은 마음과 달리 몸은 축 늘어지기만 했다. 입을 벌려 태영을 부르려고도 해 봤지만 입술 또한 천근만근이었다.
“…….”
그래도 입술을 벙긋거리려 하면 태영이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불도 켜지 않고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 쓸쓸한 모습이 잠깐씩 보였다.
그러고 아침에 일어나면 주스가 가득 쌓여 있었다. 은재는 그 주스를 마시며 마저 기력을 회복했다. 아직도 깎여 나간 체력이 돌아오지 않아 낮잠을 많이 자고, 온종일 눕거나 앉아 있어야 했지만 천천히 나아졌다.
그렇게 사흘이 되고, 또 나흘이 흘렀다. 여전히 태영을 볼 수는 없었으나, 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부터는 태영이 더더욱 간절해졌다. 좀처럼 만나지 못한 그 얼굴이 너무 그리워졌다.
괜찮으냐는 그 한 마디를 묻지도 못하고 시간만 속수무책으로 흐르고 있었다.
닷새가 흘렀을 즈음, 무작정 기다리던 은재는 결국 새로운 수를 꺼내 들었다.
“강 비서님.”
“네. 이사님.”
“원래 어제 신화역 시공사 관련한 회의 날이었던 것 같은데.”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진행하지 못했고요.”
“관련 서류 오늘까지 올리라고 해 주세요. 검토하겠습니다.”
“아직은…… 쉬시는 편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강 비서의 제안에도 은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불을 걷어 앙상해진 다리를 내려다보곤 이내 슬리퍼에 발을 꿰어 신었다.
“그리고 태영이한테 전해 주세요.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
“서류 놓친 것도 많고…… 제대로 집중하기 어려우니까 오래 걸릴 겁니다. 얼마든지 기다릴 테니까 꼭 오라고만 해 주세요.”
언제 이렇게 살이 빠졌지. 아가 태영이가 성질낼 만하네. 은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느리게 침대에서 내려와 걷다 가습기를 세게 틀었다. 세헌을 위해 놔둔 커피를 한 잔 따라 태블릿 PC와 함께 침대에 앉았다.
“이사님.”
강 비서는 다시 한번 만류했지만 은재는 듣지 않았다. 태영을 볼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방법이 이것임을 알았다.
제 몸을 혹사시키는 것.
그때부터 은재는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활자들을 읽고 또 읽었다. 커피와 그나마 속이 편하게 받아들이는 주스를 마시고 또 마시며 화면을 넘겼다.
영 집중이 되지 않고 머릿속에서 글자가 날아다니는 듯한 기분이 느껴질 때면 다시 태영의 기사를 찾아보았다. 그러면 이전에 보지 못했던 기사와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앳된 얼굴과 그 시절 생각이 묻어나는 인터뷰를 읽고 또 읽다 문득 시간을 확인하니, 한참 시간이 흐른 게 보였다. 밝았던 밖이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빈 잔에 다시 주스를 가득 따르고 또 태블릿 PC를 들었다. 애꿎은 조명을 한 번 조절하고 서류를 확인하며 몰려오는 피로도 참았다.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몸이 때때로 무겁고, 가슴이 답답하게 짓눌리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잠들 수 없었다.
어느 순간에는 무섭게 집중하기도 했다. 속도가 붙고 제대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자 여러 개의 서류를 잇달아 확인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쓰러지듯 잠들어 있었다.
아직 태영이 오지 않았나. 은재는 눈을 비비며 겨우 20분 정도 쪽잠을 잔 것을 확인했다. 또 서류를 보려 하다 더 시큼한 주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불을 걷었다.
“거기 계세요.”
빛이 닿지 않은 깊은 어둠 속에서 낮은 음성이 들렸다. 온 줄도 몰랐는데……. 움찔하며 놀란 은재는 그 어둠 속에서 천천히 나서는 인영을 보고는 슬쩍 마른침을 삼켰다.
“있는 줄 몰랐어.”
“좀 됐어요. 서류 보시느라 제가 온 것도 모르시던데.”
“……말을 하지.”
태영은 은재를 마주하지도 않고 무심히 손에 들린 컵만 가져갔다. 뚜벅뚜벅 걸어 냉장고 문을 열고, 가득한 주스 병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감귤……. 은재는 이 와중에도 감귤을 원하는 아가 태영이를 문지르며 숨을 삼켰다. 차마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뱉지도 못하고 속으로 읊조렸다.
묵묵히 냉장고 앞에 서 있던 태영은 몸을 숙여 감귤 주스를 집었다.
샛노란 주스가 희미한 빛을 받으며 컵에 담겼다. 은재는 태영이 무뚝뚝하게 건넨 컵을 받으며 고맙다 말했다.
“……낮에만 해도 냉장고 비어 있었는데.”
태영이 또 주스를 가득 사 온 모양이었다.
“고마워.”
대답도 하지 않는 태영은 그저 커피를 따라 조금 전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모든 것이 숨겨져 보이지 않는 그곳.
겨우…… 길게 뻗어 꼬아진 다리만 살짝 보이는 곳.
“아직 무리하면 안 된다고 그러던데.”
“괜찮아. 할 만해.”
“그러다가 나중에 또 무슨 일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그럴 일 없어.”
“어떻게 알아요. 그때는 제가 곁에 있다는 장담도 못 하는데. 또 그런 새끼만 있는 곳에서 쓰러지면 누구 좋으라고.”
“…….”
아닌 말은 아니기에 은재는 대답을 삼켰다. 요즘 들어 저는 이상할 정도로 생각이 느렸으니까.
“왜 부르셨어요.”
그리고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냥.”
네 얼굴이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 화를 내려나.
“……네가 안 보여서.”
태영이를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해야 할 말이 많아 쉽게 정리가 되지 않을 정도였는데.
너를 붙잡고 싶었는데.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제가 품은 감정에 대해 늦게라도 말하고 싶었는데. 며칠을 긴장하며 시간을 보내 놓고 왜 막상 말이 나오지 않는지.
“저 기다리셨어요?”
“…….”
“…….”
“……응.”
은재는 속이 울렁거려 가슴을 두들기다 주스를 겨우 한 모금 머금었다. 낮은 탄식을 뱉은 태영은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여, 은재가 앉은 곳에서도 제 얼굴이 보이게 해 주었다.
“왜요?”
반쯤 어둠이 고인 듯 보이는 얼굴은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묘한 냉담함이 살갗에 묻어나고 있었다.
그 얼굴에 은재는 컵을 세게 쥐어야만 했다. 그저 절 향하는 표정에도 감정이 늘 묻어났다는 것을 이 순간 몸소 깨닫게 된 탓이었다.
제가 아니라고 했던 순간에도 쌓여 가던 감정들.
그리고…… 저 또한 알지 못하는 순간에 쌓이던 제 감정.
울컥 말들이 입 안에 차올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네. 하세요.”
“그게…….”
이제 태영은 숨도 삼키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는 심해처럼 담담한 눈빛을 하고 은재의 입술을 지켜보았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어둠에 동화될 것 같은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넌 다친 곳 없어?”
그리고 첫 물음이라고 뱉은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조소인지, 아니면 정말 웃겨서 웃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태영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그 얼굴 위로 드리워진 기운에 은재는 숨을 뱉었다. 자꾸만…… 태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표정이 너무 아쉬울 정도로 찰나였다.
“다행이다. 걱정했어. 네 손…… 다쳤을까 하고. 또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 그 자리에, 그 사람이랑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절 걱정하세요?”
“항상 널 걱정해.”
태영은 제 손에 뺨을 묻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전 안 다쳤어요. 그런 싸구려 알파 페로몬에 위협당하지도 않고요. 대경도 마찬가지예요.”
그러곤 잠시 말을 끊고 커피를 머금었다.
“뒷말 안 나오게 잘 이야기했어요. 알려져 봤자 그쪽에게 불리하다고 상황 설명도 했고요.”
“…….”
“기사도 안 났어요. 강 비서님이 고생하셨어요.”
“너도…… 고생했겠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물론 류 전무 쪽에서는 거의 머리가 반쯤 깨졌던 일을 크게 걸고넘어지려 했지만 대경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마침 H호텔은 WB그룹이 홍콩의 한 호텔과 협력하여 세운 호텔이었다. 설령 류 전무 쪽에서 직원들을 매수하려 시도할지라도, 그 의지에서 그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세헌은 결코 은재에게 불리한 쪽으로 여론이 뒤집히게 놔둘 인물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조작을 가해서라도 도움을 줄 이였지. 굳이 힘들게 손을 쓰지 않아도 류 전무가 시도해 볼 방법은 없었다.
“필요하면…… 기사 내도 돼.”
“…….”
“현실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면 어떻게든 내 이미지에 흠집을 내려 할 거야. 무슨 일을 당할 뻔했던 오메가는 더 쉬워 보일 테니까. 진실을 차라리 빠르게 공개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어.”
영 상상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날 보았던, 그 광기에 절었던 눈동자. 그라면 은재를 어떻게든 흠집 내려 할 수 있었다. 증거는 없겠지만 자신과 엮어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렇게 된다면 사실이 무엇이든 은재에게 미칠 파장이 컸다. 빌어먹을 소문이 생길 수도 있었다.
물론 그 길을 택하려면 류 전무 쪽에서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많았다. 이미 한번 구질구질한 이혼 소송으로 이미지가 크게 추락하여 이제 막 사업으로 일어나 보려는 참이었다. 그것도 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되지 않아 작가들의 전시를 빌려서.
그때도 꽤나 구설수가 많았던 이혼이니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타격은 그쪽이 훨씬 더 큰 셈이었다. 평판이 좋지 않은 이의 증거 하나 없는 주장은 그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태영은 은재가 그런 일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을 절대로 알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 말 하려고 하셨어요?”
태영은 눈썹을 문지르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태영아.”
“네.”
“사실 그날…… 널 보러 갔었어.”
은재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돌릴 수 없었다. 이런 이야기로 오랜만에 만난 태영과의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널 데리러 갔었어.”
“…….”
“네가 아직도 그러는지, 혹시 그사이에 질려서 마음이 변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그 말을 하려고 갔었어. 그 자리에서 널 데려와야겠다고 계속 생각했어.”
“…….”
“……태영아 나는.”
말이 줄줄 새어 나오는데도 가슴이 벅찼다. 고작 이 말을 했다고 긴장이 다시 몰려들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급하게 숨을 삼키며 컵을 쥐었다.
“천천히 하세요.”
그 모습에 태영이 은재의 곁으로 다가왔다. 조심스레 허락을 구하듯 눈으로 그 옆자리를 가리켰다. 은재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자 가깝게 앉아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저 안 가요. 그러니까 천천히 하세요.”
전해지는 체온이 변함없이 뜨거워 은재는 안도했다. 주스가 담긴 컵을 내려놓고 태영의 손을 슬그머니 쥐었다. 차마 태영을 올려다보지는 못하고 큰 손만 붙잡았다.
“…….”
“…….”
태영은 묵묵히 은재가 제 손을 그러쥐는 것을 보며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그 손길에 은재는 조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긴장이 들어 있던 눈도 살짝 풀어져 느슨해졌다. 그럼에도 감정이 곧잘 추슬러지지 않아, 손을 있는 힘껏 움켜쥐며 숨을 정리했다.
“……미안해. 내가 겁이 많아. 특히 태영이 너한테는 조금 더 그런 것 같아.”
“…….”
“네가 나한테 품었다고 한 감정…… 제대로 받아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후의 대처도 어른답지 못했어. 그리고…….”
은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절 붙잡고 있는 손에서 시선을 떼어 내 태영을 마주 보았다.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얼굴. 은재는 이 얼굴이 몹시도 그리웠다는 것을 인정하고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마치 처음 만지는 것처럼 태영의 뺨을 살포시 어루만졌다.
“네가 그리웠어.”
“…….”
“네가 영국에 있는 순간에도, 그리고 한국에 있는 순간에도 네가 항상 그리웠어.”
“미안해서요?”
태영은 아직까지 쥐고 있는 은재의 손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때문인지 찌릿찌릿하게 전해지는 감각에, 은재가 어색하게 표정을 만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네 마음은 그대로인지 물어도 될까.”
“…….”
“혹시 네 마음이 변했다고 하더라도 말하고 싶었어. 나도 너랑…… 비슷한 것 같아.”
“절 좋아하세요?”
그제야 태영이 제 뺨에 닿은 손에 고개를 기울였다.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 귀엽고 해사한 미소를 보여 주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심해 같은 눈동자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재는 잠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움직임에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이렇게나 무거울 줄 몰랐으나 이제는 그 무게를 감당하며 재차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이제 마음이 변했다고 해도 괜찮아. 늦은 만큼 내가 감당할 몫이라고 생각해.”
“…….”
“그런데 만약 네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혹시라도 날 받아 줄 생각이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아.”
“…….”
“아주 잠깐만 기회를 줘도 돼. 네가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말하면, 언젠가 나를 떠나고 싶다고 말하면 붙잡지 않을게. 다시 네 보호자 역할만 할게. 영영 곁에 있지 못하게 해도 괜찮아. 그러니까 그때까지라도…….”
태영은 제 뺨을 감싸고 있던 은재의 손을 끌어내려 이불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니까, 받아 달라고.”
닿는 것도 거부하는 듯한 그 몸짓의 의미를 알 것 같아, 은재는 제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럴 경우를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가슴이 시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이제 막 감정을 깨달았다고 해도, 태영은 아니니까. 태영이 이제 이 남루한 관계를 완전히 끊어 버리고 싶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했다.
태영에게 몇 번이나 상처를 내고, 싫다는 자리에 떠민 건 저였으니까. 그가 더 모질게 굴어도 할 말이 없었다.
“네가 싫다면…….”
싫다면 받아들여야지. 태영이 보여 준 애정의 깊이에 도달하기엔 제가 마음 고생한 시간의 길이가 너무나 짧으니까.
“절 정말 좋아하세요?”
“……응.”
은재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감정을 담아 내지 못하는 것 같아 다른 언어를 찾고 싶다가도 뱉어서는 안 될 것도 같았다.
“지나간 시간이 아깝고, 미안하고…… 후회될 만큼 절 사랑하세요?”
“……말로 하기 민망할 만큼.”
“정말 너무하네.”
나직이 말한 태영은 제 빈손을 들어 보였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요? 반지도 없고, 하다못해 꽃도 없어요.”
“……아.”
“저 지고지순하게 동정까지 지켜 가면서 이사님 기다렸어요. 이사님 알파 하겠다고 영국에서 버티면서 여기 와서 계속 기다렸어요. 근데 꽃도 안 주세요?”
그러곤 눈썹을 꿈틀거렸다. 은재는 거듭 아…… 하며 탄식했다.
“저도 꽃 좋아해요. 저도 멋있게 고백받고 싶어요. 그 길었던 기다림이 이루어지는 순간인데 아무것도 못 받는 건 서운해요.”
“……어, 응. 내가 생각을 못 해서.”
둘러봐 봤자 줄 건 없는데도 은재가 허둥지둥 주변을 살폈다. 피식 웃은 태영은 다시 표정을 지우고선 은재의 허리를 당겨와 끌어안았다.
일순 얼굴이 가까워지며 코끝이 닿았다. 절로 은재의 숨이 멎었다.
버석버석 굴러가는 눈동자가 태영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추락했다. 미안……. 약한 사과가 흘러나왔다. 왜인지 모를 어색함과 멋쩍음이 뱃속에서 끓어올랐다.
태영은 대신 숨을 고르며 이마를 맞댔다.
“오늘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나중에 다시 멋있게 고백해 주세요.”
“……응. 그럴게.”
그다음 은재의 윗입술에 짧게 입술을 내렸다.
“제가 알겠다고 할 때까지 계속 해 주세요.”
“알았어.”
“언제든지 보내 준다는 그런 소리는 하지 말고.”
은재는 그 입술이 닿자마자 몸서리를 쳤다. 그토록 오래 기다렸던 무언가가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자꾸만 몸이 경련하듯 떨려 붙잡을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천천히 몸을 기울여 태영의 입술을 물었다. 작은 동물이 우물을 퍼마시는 것처럼 혀를 내어 조심스레 입술을 핥았다. 아직도 신중한 공기가 어려 있었으나 그것을 삼키며 할짝였다.
“……조금 더 해.”
이내 태영의 목을 끌어당겨 제 쪽으로 숙이게 하며 조금 더 깊게 입술을 겹쳤다.
“까칠까칠해.”
태영은 순순히 입술을 내어 주며 중얼거렸다. 천천히 두 사람의 몸이 겹쳐졌다.
“예쁜 목에 상처도 남고…….”
“…….”
“살도 많이 빠지고.”
커다란 손 두 개가 은재의 척추를 하나하나 더듬었다. 원래도 늘씬했던 몸에 살이 더욱 내려 척추가 도드라질 정도로 느껴졌다. 툭 튀어나온 날개뼈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금방 돌아올 거야…….”
은재도 오랜만에 만져 보는 태영의 귓바퀴와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입술 새로 태영의 낮은 숨이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더 가득히 그를 끌어안았다.
입술을 떼어 내고 아직 붉은 흔적이 남은 은재의 목덜미에, 그리고 쇄골과 어깨에 입술을 연달아 묻은 태영은 느릿하게 마른 몸을 쓸어내렸다. 기다렸다는 듯 페로몬을 풀며 허리를 도닥였다.
“안 아프세요?”
“괜찮아. 난…… 너만 안 아프면 안 아파.”
단단한 몸에 이마를 비빈 은재가 슬쩍 본심을 내비치며 태영을 조금 더 당겨 안았다. 엇비슷하게 둘의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이 이야기 들었지.”
“네.”
“어떻게 하고 싶어?”
점점 은재의 말이 느려졌다. 길었던 하루 동안 일도, 또 긴장도 가득 얹고 있던 몸이었다. 태영은 그 몸을 바로 눕혔다. 자꾸만 제 옆에 붙어 오는 그 몸을 안으며 저도 함께 그 옆에 누웠다.
“이사님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그래도 돼?”
“전 이사님만 있으면 돼요.”
“…….”
“걱정인 건 이사님 몸이 더 상할 수 있다는 건데…… 전 괜찮아요. 이사님이 페로몬이 없어도, 우리가 아이를 만들 수 없어도 괜찮아요.”
바르르 몸을 떨며 은재가 태영의 손을 제 배에 얹었다. 그 손에서부터 전해지는 열기에 배 안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나른함과 피로가 더욱 몰려왔다.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은데.
“널 닮은 아이가 있으면 좋을 텐데.”
“이사님은 나 하나 키우는 것도 힘들어 보이시는데.”
아닌 말은 아니라 은재가 침묵했다. 그러자 태영은 웃으며 은재의 뺨에 제 뺨을 비볐다.
“아가 태영이 낳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세요. 그럼 제가 키울게요. 이사님은 계속 멋있게 일하세요.”
아가 태영이……. 은재는 배 속에 생긴 것을 종종 아가 태영이라고 칭하곤 있었지만,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했다. 그러면 정말 그게 태아인 것 같았다. 제가 못내 마음이 힘들었던 시기를 보내는 동안 의지했던 그 세포를 이제 와서 가차 없이 버리는 것 같았다.
태영이를 데려와 제가 시간이 날 때만 들여다보았던 것처럼, 그리고 다시 곁을 비우게 했던 것을 되풀이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제 비겁하고 나약한 모습을 마주하곤 했었다.
“주무세요, 우선.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너 또 갈 거지?”
“저 좀 바쁜데.”
“……너무하네.”
일부러 태영의 말을 따라 하자, 태영이 짧게 웃으며 은재를 바싹 당겼다.
“일찍 올게요.”
“진짜 일찍 와.”
“네. 진짜 일찍 올게요.”
“진짜…….”
배가 따뜻해지자 이제 은재의 눈꺼풀은 쉽게 들리지도 않았다. 태영은 조명을 완전히 사라지게 한 뒤 이불을 더 끌어 올렸다.
가습기가 퍼지는 소리와 태영의 페로몬이 부드럽게 섞였다. 은재는 슬그머니 태영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겁 많은 성격을 보여 주듯 아주 조금씩 다가오는 은재의 얼굴에, 태영은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은재가 멈춘 후에야 다가가 끌어안아 몸을 겹쳤다. 제 품에서 나른한 숨을 토하는 것을 살피다 저도 눈을 감았다.
……사랑해. 태영아. 마저 잠이 들려던 찰나 은재가 잠꼬대를 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태영은 그의 눈가가 닿아 있는 제 가슴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그를 더 끌어안았다.
* * *
“거참, 왜 이리 늦는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던 신 의원은 곧 들린 노크 소리에 반색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요 근래 얼마나 정신이 없고 바빴는지……. 이렇게 식사 자리를 갖는 것도 도대체 얼마 만인지 몰랐다.
갑작스러운 불륜 보도에 당 내부가 시끄러웠다. 곧 중요한 시기에 돌입할 무렵이라 여러모로 당은 긴장 상태였다. 이번만큼은 정권을 쥐겠다는 일념하에 공격적으로 나서던 중이었다. 차기 대선 후보들을 매스컴에 부쩍 많이 내보냈고, 당 자체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나서기도 했다.
신 의원 역시 타 당 의원들의 약점을 바삐 캐냈고, 사람들의 관심이 모여 있는 법안을 밀어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별안간 과거의 실수였던 불륜 기사가 크게 도배되기 시작했다. 유력 대권 인사였던 신 의원은 한순간에 벼락을 맞은 기분으로 숨을 죽여야 했다.
만나지 않겠다는 미아 킴의 앞으로 억지로 돈을 찔러 주고 모든 것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부정 청탁에 대한 조사는 적당히 넘어가고 있었으나, 아직 완전히 정리된 건은 아니었기에 잠시 쉬어 가야만 했다.
처음엔 당연히 여권 쪽에서 터뜨린 줄로만 알았다. 그때까지 신 의원은 차기 대권 주자 1위로 뽑히고 있었으니 흔들려는 속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래 수소문하니 그건 다름 아닌 대경의 짓이었다.
……분명 그 파티 때의 일을 이렇게 과하게 되갚는 거겠지. 대경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신 의원도 작은 이벤트를 하나 준비했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기자에게 슬쩍 이야기를 흘렸다. 그날 보았던 태영과 은재의 모습이 영 심상치 않았고, 그날 이후 모두들 둘의 관계를 그렇게 의심했다. 파티에 참석한 이들의 화두가 그 둘일 정도였다.
오히려 민 회장 때보다 더 확실한 심증이었다. 민 회장과 은재는 꽤 가까운 사이인 듯 보였으나 늘 거리를 두고 걸었다. 둘 사이에는 친밀함과 분명한 예의 따위가 공존했다. 또한 민 회장은 생전 정기적으로 저택을 떠나 여행했다. 후에 그게 은재의 히트 사이클 때문이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민 회장은 흔한 사생아 하나 없었다. 한때 은재가 그 사생아가 아니냐는 소문도 있었으나, 누가 보아도 둘은 전혀 핏줄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민 회장이 때마다 떠나 있던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영 믿기지 않아 소문만 무성했는데, 태영과 있는 모습을 보니 이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이 보였다. 그 파티에 참여한 이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야릇했다. 남들 눈을 의식하면서도 의식하지 않는 듯, 저들만의 세계에 빠져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겨 댔다.
그래서 그에 대해 기자에게 넌지시 흘려주고, 또 뒤이어 들어온 사업 관련 이야기를 흘려 주었다. 설령 아니라 한들 신 의원 쪽에서 피해 볼 것은 없었다.
진정으로 대경을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한 번 받았으니 한 번 돌려준 것뿐이었다. 해코지를 할 것 같았으면 무뢰배들을 시켜 은재를 덮쳤을 것이었다. 오메가의 버릇을 고치는 덴 그게 제일인 것을 알았다. 그런 짓을 하지 않고 점잖게 반응한 것이었다.
원래 정치라는 것이 그랬다. 다른 당에 속한 이들과는 치열하게 싸웠다. 순간 감정이 격해져 멱살을 잡고 테이블을 넘어 의자를 던질 때도 있었으나 밖에 나오면 동문이고 동기였다. 고향 선후배거나, 학교 선후배였다. 허심탄회하게 술자리를 가지며 털곤 했다.
대경과도 한 방씩 사이좋게 주고받았으니 거리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 근래 들린 흉흉한 소문에 마음이 영 불편했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기자와의 연락이 뚝 끊겼다. 제법 오래 교류하며 지내 온 고향 후배인데 어딘가로 증발한 것처럼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선을 넘을 만한 녀석이긴 한데…….
신 의원은 서 기자가 폭로자를 매수해 어쭙잖은 협박까지 벌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쩐지 심상치 않아진 분위기에 긴장을 떨치지 못했다.
그 와중에 류 전무라는 인물이 별 좆같은 짓을 벌였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민 이사가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그 새끼가 별 볼 일 없는 반푼이라는 건 모두 알았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는 인물이었다. 남들 다 가는 대학도 가지 못해 도피 유학에, 그곳에서도 말썽으로 유명한 작자였다. 당연하게도 그의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들은 그저 그랬고, 그것에 구애받지 않고 작가를 탄생시키는 것은 도리어 민 이사의 역량이었다.
미술관의 규모, 대표의 입지와 상관없이 작은 전시회도 다니며 신인 작가를 발굴해 내는 게 은재였다. 그 덕분에 제일 이득을 본 것도 따지자면 류 전무였다.
근데 그 새끼가 이렇게 일을 치다니. 신 의원은 그게 제 작은 장난질에서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외면했다. 하여간 쓸데없이 모질지 못해서 그런 새끼를 받아 주더니.
이런저런 생각들을 밀어내고 오늘 만나기로 했던 검사를 맞으려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태영이라고 합니다.”
들어오는 건 다름 아닌 새파랗게 어린 대경의 알파였다.
무심한 얼굴의 태영은 문이 닫히기까지를 기다리며 잠시 그를 응시했다.
“손 검사님 소개로 대신 자리했습니다. 본인은 이런 자리에 올 처지가 아니라며 저에게 양보해 주셨거든요. 아직 청탁 건이 다 마무리되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덕분에 만나 뵙게 되었네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신 의원은 당황해 엉거주춤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태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앉으시죠.”
그가 비어 있는 신 의원의 잔에 술을 따르곤 제 잔에도 술을 따랐다. 건배 따위는 하지 않았다. 신 의원을 뚫어져라 보며 잔을 비우곤 이내 싱긋 웃었다.
“한번은 봬야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글쎄. 무슨 일인지.”
“정정 기사 난 건 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아, 그리고 서 기자님은 며칠 전에 출국하셨습니다. 모르고 계실 것 같아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요란한 상이 차려져 있었지만 그 누구도 먹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태영은 제 잔과 아직 채워져 있는 신 의원의 잔에 또 술을 따랐다.
“굳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신다고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뭐, 서로 돈독해질 기회가 아닙니까.”
“둘 다 사이좋게 주고받은 일인데.”
“예. 그렇죠.”
신 의원은 넘칠 지경이 된 제 잔을 쥐었다. 젊디젊은 알파의 기에 밀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연륜을 발휘하며 침착한 척 술을 삼켰다. 누가 들어도 서 기자는 강제로 떠밀려 출국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대도 이런 기 싸움에서 밀려서는 승산이 없었다.
“기자 하나야…… 큰 타격도 아니시고요.”
“……그렇지.”
“그래도 전 아직 이쪽의 생리를 몰라서요.”
태영은 또다시 잔을 비우곤 신 의원의 잔에 술을 따랐다. 왜인지 모르게 황급히 잔에서 손을 떼어낸 신 의원은 숨을 고르며 태영을 응시했다.
“대경에 타격은 없었지만 그래도 억울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얼굴 좀 뵈러 나왔습니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여태까지 정치판에서 구르는 동안 더 험한 꼴도 많이 보지 않았나. 피라미 같은 녀석이 제법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하더라도 저는 훨씬 더 경험이 많았다.
“이보게, 한 대표.”
돌연 바뀐 호칭에 태영이 신 의원을 응시하며 눈썹을 구겼다. 흘러넘친 술이 어느새 뚝뚝 상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쓰면 되나. 원래 이 판에서는 그렇다네. 그렇게 상대의 실력을 확인하고 오래갈 사이인지, 어떻게 머리가 잘 도는지 확인도 하고 그런 거지. 적이 되었다가 또 동지가 되고 하잖나. 한 대표도 알다시피 아직까지 영향을 받고 있는 건 내 쪽이기도 하고.”
태영은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속이 탔다. 예상 못 한 임신이 겹쳤다지만 그 일이 이렇게까지 상황이 꼬이게 만든 시발점이 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대경에서 사업에 손을 썼다는 말이 돌기 시작하며 은재가 단호한 태도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은재가 이렇게까지 마음고생하지 않았어도 될 텐데.
그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때만 생각하면…….
“미아 킴은 저희 재단과 친밀하신 분입니다. 아시겠지만…… 곧 저희 쪽과 연계하여 독주회를 준비 중이고요. 불륜 스캔들 덕분에 오히려 한국에서는 티켓 파워가 좋아졌습니다.”
“…….”
“그리고…… 저희 재단 이름을 처음 들어 보신 게 아니실 텐데요. 정말 기억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신 의원은 침착한 척 태영의 말을 되짚었다. 재원, 재원…….
별거 아닌 기 싸움이라고 생각했지만 상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술에 자꾸만 정신이 사나워졌다. 안 그래도 류 전무의 일을 찜찜하다고 생각하던 무렵이라 더욱 그랬다.
“대략 4년 전쯤에 그림을 구매한 적이 있으시던데요. 그리고 또 3년 전에 하나, 2년 전에 하나.”
“…….”
“모두 저희 쪽에서 진행한 기획입니다. 그리고 그림은 꽤 많이 팔렸었죠. 홍콩에서 진행한 건도 있었고요. 그때 구매자에 이름을 올리셨던데. 작가 이름을 말씀드려야 할까요.”
해외에서 열리는 전시회라 중간에 다른 사람을 끼워 그림을 들고 오게 했다. 그러면서 그 뒤에 다양한 것을 넣어 전달하곤 했다.
그걸 재단 대표인 태영이 모를 순 없었다.
신 의원은 제 비리의 한구석을 알고 있는 태영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 이렇게나 젊은 알파에게, 이제 막 세계에 뛰어든 알파에게 이런 우스운 꼴을 당하다니.
분명 저쪽에서는 제 약점을 더 많이 쥐고 있을 게 뻔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적당히 입을 다물고 물러나는 편이…….
“어차피 그 건은 써 봤자 오래 못 갈 텐데. 내가 정말 구속될 거라고 생각하나.”
신 의원은 크흠, 목을 가다듬으며 태연한 척 고개를 추켜올렸다.
“또 한 대표도 묵인한 죄를 벗을 수 없을 텐데.”
“그렇지만 지금은 시기가 안 좋지 않습니까? 곧 당에서 대권 주자 경선이 있는 걸로 아는데……. 저야 적당히 형을 조절할 수 있을 거고요.”
“지금 당장 터뜨릴 셈이야?”
이어진 말에 신 의원은 기어코 언성을 높였다.
“안 될 이유가 있습니까?”
그의 말마따나 신 의원을 오래 잡아 두지는 못할 것이었다. 어떻게든 모든 인력을 다해 풀려날 거고, 그때 다시 본격적으로 수를 쓸 수도 있었다.
그래도 대선에 나가지 못한다면 적잖은 파장이 일겠지. 이미 지난번 대선 경선에서 패배를 맛본 사람이니…… 치욕만큼은 확실히 줄 수 있었다.
태영은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젓가락을 들어 금가루가 뿌려져 있는 회를 입 안에 넣었다. 도톰하고 부드러운 살을 씹어 삼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작은아드님이 한때 영국에 계셨던데. 꽤 유명했고요. 부정 입학은 가볍고…… 더 큰 건도 있던데요.”
“너, 이……!”
“마침 제가 그쪽에서 유학을 해서요. 그때 자세하게 겪었던 이들을 잘 알기도 하고. 여전히 입이 막힌 채 입국하지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던데요.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태영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덧붙였다. 신 의원의 정치 생명을 완전히 끝낼 건이었다. 작은아들이 마약에 취하다 못해 갱단의 말단 패싸움까지 말려들어 갔다는 건…… 대통령 후보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결격 사유가 아닌가.
은재로 인한 우연들이 어느새 태영의 패가 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인연들이 현재의 증인이, 증거가 되어 주었다. 은재가 좋아해 관심을 갖게 된 일에 의도치 않게 여러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모두 은재가 쥐여 준 것들이었다.
“지금 협박하려고 나온 건가? 더 제대로 붙어 보겠다는 거야?”
“이렇게까지 흥분하실 일이 아니실 텐데…… 그냥 제가 갖고 있는 것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살며시 고개를 기울인 태영이 옅게 웃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작은아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예상대로 신 의원은 애써 개의치 않는 척 물러나려던 것도 잊고 크게 성을 냈다.
신 의원은 말 그대로 아득바득 이를 갈고 있었다. 그 일을 덮으려 그가 얼마나 갖은 노력을 다했는지 몰랐다. 한국 교민들 사이의 일이라면 어떻게든 덮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막무가내 망나니로 사는 녀석을 가까스로 예술가로 둔갑시켜 그 등신 같은 짓거리들을 숨겼다. 그러고도 그 자식은 마약을 끊지 못해 지금도 중독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신 의원 또한 그 방식으로 자금을 유통했다. 알음알음 그 방법을 사용하는 이들이 많아 전혀 문제의식 없이 이용한 것이었다.
신 의원은 흘러내린 술이 바지와 손을 적시는 것도 모른 채 분을 삭였다. 그사이 태영은 제 잔에 담긴 술을 신 의원의 잔에 쏟아부었다. 그러곤 몇 모금 삼키지 않은 담배를 그 잔에 던져 넣었다.
“오늘은 대화하기엔 그른 것 같네요.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담뱃재가 떠다니는 술잔을 넘겨 본 태영은 자리에서 일어서 재킷 단추를 채웠다.
“이런다고, 정말 내가 무너질 것 같은가?”
신 의원은 그 더러운 잔을 움켜쥐며 태영을 직시했다.
“대경은 영원할 것 같나 보지? 설마 내가 여기까지 아무것도 없이 올라왔을까.”
“…….”
“류 전무 그 새끼 입을 오래 막아 둘 수 있을 것 같은가? 대경은 도통 그 문제를 벗어나지를 못하잖나. 성추문.”
일어서 신 의원을 내려다보던 태영은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분히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제가 미아 킴이 갖고 있는 영상 이야기는 미처 하지 못한 것 같네요.”
“…….”
“그럼 식사 마저 하시죠.”
마지막 인사에 신 의원은 뒤늦게 짧은 숨을 터뜨렸다. 그런 그를 뒤로하며 태영은 생각했다.
이대로 조용히 사라져 주는 편이 본인을 위해서도 제일 낫겠지만…… 아마 어쭙잖은 시도는 하겠지. 상황 파악이 아직 되지 않은 이들이 몇 모여 갖가지 수를 써 볼 수는 있었다. 그러나 태영은 그런 것들이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아무렴. 대선을 노리고 있는 이의 망신보다야 더 흥분되는 일이 있을까.
그 무엇보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가장 치열하게 살피는 이들은 진작 신 의원에게 흘러가는 돈을 끊고, 새로 줄 댈 곳을 찾고 있었다.
굳이 대경과 손을 잡지는 않더라도, 심기를 건드릴 짓은 알아서 하지 않는 교활한 이들이었다. 신 의원은 자의식에 취해 모르는 듯했지만, 실지 명망 있는 자리에 올라갔더라도 잊히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그곳까지 올라가지도 못할 듯하지만.
바람을 맞으며 새 담배를 꺼내 문 태영은 곧장 테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나고 나왔어?
“어.”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 이거 생각보다 재밌네. 적성에 너무 맞아. 감시하는 것보다 백배는 재밌어.
오늘은 평소 강 비서를 쫓아다니던 윤 비서와 함께 나온 참이었다. 태영은 절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짧게 묵례하며 차에 올랐다. 윤 비서는 익숙하게 휴대용 재떨이를 챙겨 주었다.
“얼마나 샀는데.”
―꽤 했어. 근데 이거 돈 되기는 하냐.
“나중에 유상 증자 나올 때 살 정도는 되겠지. 우린 손해만 보지 않으면 돼. 그러려고 공매도 참여하는 거고.”
―또 유상 증자 발행하는 건 확실해?
“거긴 몇 년째 개발하는 게 없어. 근데 왜 자본을 끌어 모으겠어. 흔들린다는 뜻밖에 안 돼.”
테오는 작업에 몰두하는 에린의 곁에서 공매도에 참여하고 있었다. 신 의원이 이전 운영하던 회사의 공매도로, 테오의 외국 국적이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크게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공매도 차익으로 돈을 모으는 것이었고, 그것으로 주식을 사 모아 적당히 힘을 만들 생각이었다. 대주주까지 갈 일은 없겠으나 그래도 우호 지분을 쌓는 것은 막을 의향이었다.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그 회사를 두고 경영권 싸움을 벌인다는 소문은 파다했다. 그렇다면 방해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겠나.
또 중간중간 서 기자가 손을 덜덜 떨며 알려 주었던 신 의원의 비리를 터뜨려도 되었고.
태영은 큰 꿈을 꾸지 않았다. 신 의원을 완전히 끝장내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지긋지긋한 골머리 정도를 앓게 할 셈이었다. 이미 흔들리는 회사와 필요 없는 것들을 사용해 지끈지끈 머리가 아프게 할 의향이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묵은 통증처럼.
그게 더 신경을 갉아먹을 테니까.
피라미 같은 젊은 알파에게 속수무책으로 넘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그는 알아서 스스로를 무너뜨릴 것이었다. 늙은 알파에게 굴욕감은 떨치기 어려운 것일 테니.
피식 웃은 태영이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걘 출국했어? 서 기자한테 돈 받고 언론에 헛소리 지껄이던 열성 알파.”
―아, 어. 오늘 새벽에 출국했어. 내가 직접 배웅해 줬지.
“제대로 손을 봤어야 하는데…….”
―뭘 더 어떻게? 얼굴이 퉁퉁 부어서 입국 심사대에서 통과될지도 걱정되던데.
“펜싱은 너무 우아해.”
―그래. 넌 그래서 삐스트에 올려서 그 새끼 온몸을 멍투성이로 만들었지. 발목이며 손목이며 퉁퉁 부었고.
“정정당당한 한판이었어.”
―물론 그렇지. 펜싱의 피읖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얼마나 참은 건데.”
―그래도 사진은 다 넘겼잖아.
서 기자와 합세해 나서 헛소리를 퍼뜨렸으니 이 정도면 정말 참은 것이었다. 물론 앞으로의 일에서 번번이 실패를 겪겠지만…….
쯧쯧, 테오는 전화기 너머에서 혀를 차며 어쨌든 일은 다 마무리가 되었다 말했다. 묵묵히 전화를 끊은 태영은 담배를 물며 조금 더 속도를 높여 달라 했다.
“…….”
남아 있던 일들은 하나둘 다 정리가 되었지만……. 태영은 문득 침묵이 찾아올 때면, 은재가 제 품에서 쓰러지던 순간과 뒤늦게 그의 몸 상태를 통보받던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 각인에 대해 생각했으면서도, 한 번도 자신과 관련되었다곤 생각해 보지 않았다니. 그렇게 가슴이, 배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으면서.
태영은 묵묵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위한다고 했으면서 정작 그를 힘들게 하고 있던…….
한숨이 담배 필터를 통해 부옇게 번져 나갔다.
겨울 저녁은 이르게 어두워지곤 했다. 진짜 일찍 돌아오겠다는 말을 지키기엔 벌써 늦은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병원으로 돌아갔을 땐 다소 미묘한 분위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일찍 온다고 해 놓고 일찍 오지 않은 죄였다. 은재는 일이 있었을 테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괜찮다고 했지만 표정 한구석이 어두웠다. 마치…… 삐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제, 고백을 내어놓은 그 이후 은재는 부쩍 태영을 의식했다. 잠시라도 이제는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는 듯 품에 안겨 울었으면서, 막상 날이 밝으니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했다.
태영의 연인이고 싶었으나 아직 확답을 듣지 못했다. 다시 제대로 고백을 해야 했다. 그러나 보호자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내키지 않았다. 물론 은재는 평생 태영을 지키겠지만, 연인이라는 자리를 갖지 못한 채 예전 같은 자리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쉬웠다.
그래서인지 병실에는 아주 미묘한 공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어제 서로를 껴안았던 일은 먼 예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 공기를 의식한 태영도 이전처럼 제 몸을 들이밀어 은재를 끌어안지 않았다. 왠지 모를 거리를 둔 채 조심스레 어깨를 안고, 눈짓으로 허락을 구한 후에야 손을 붙잡아 입술을 내리며 사과했다.
그 몸짓에 금세 마음이 녹은 은재는 복잡하면서도 부끄럽고 반가워, 저도 허락을 구하고 태영을 끌어안았다.
조심스러운 포옹이 그들의 밤에 함께했다.
다음 날, 이른 새벽부터 병실을 나섰던 태영은 잠깐 테오의 얼굴만 본 뒤 부랴부랴 돌아왔다. 오늘은 절대 늦을 수 없는 은재의 퇴원일이기 때문이었다.
퇴원 직전 이어진 간략한 검사를 모두 가까이서 지켜보았고, 배 속에 있는 아가 태영이의 상태를 확인할 때는 은재에게 더욱더 다가가 손을 잡아 주기도 했다. 아가 태영이와 은재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며 차마 읽어 내기 어려운 눈빛을 드러내 보였다.
“병원에 좀 더 계셔도 돼요.”
“괜찮아. 집에서 쉬면 돼.”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어제와 달리 은재는 대낮에 만나는 태영이 반가운지 다소 부끄러워했다. 평소 같은 얼굴로 말하고 있었으나 귀를 붉히고 있었다. 손이라도 스치면 움찔하며 손을 뒤로 빼기도 했다.
그 모습이 말할 수 없을 만큼 귀여웠다. 생전 처음 만나는 사이도 아닌데. 이미 나신으로 몇 번이나 함께 뒹군 사이인데도 작은 몸짓에 긴장하고 있었다.
저를 잔뜩 의식하고 기다렸으면서 더 솔직하게 굴지는 못하고 시선으로만 좇았다. 이전 같았으면 진작 콧대가 짓눌리도록 다가가 끌어안으며 입술을 빨고, 눈물점을 빨았을 텐데.
“앉아 계세요. 속은 어때요.”
“……괜찮아.”
“감귤?”
“응.”
태영은 주스를 가득 담아 은재의 손에 쥐여 주며 남은 짐을 모두 챙겼다.
“오늘 일정 취소해야 할 것 같아요. 그건 내일 가는 게 좋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어디 가려고 했는데요?”
말하는 것을 보니 태영이 퇴원 길에 함께할 줄 몰랐던 눈치였다. 미리 강 비서에게 다른 행선지에 대해 언질까지 해 놓은 듯했다. 그래서 캐물으니 은재는 주스를 마시며 답을 삼켰다.
대신 눈이 이리저리 굴러갔다. 태영은 흐음…… 숨을 뱉으며 다가갔다. 강 비서는 윤 비서와 함께 눈치 좋게 짐을 챙겨 들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어디 가는데요.”
“……곧 말해 줄게.”
“그럼 언제 고백하시는데요?”
“……그것도 곧.”
“언제까지 기다려요?”
은재가 마시던 주스 향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다가가 물었다. 은재는 아직도 어색하고 쑥스러운 듯. 태영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며 모른 척해 달라 묵묵히 요청했다.
“담배 냄새나.”
“죄송해요. 일이 좀 있어서요. 그래서 언제까지 기다려요. 내일? 모레? 더는 어려워요.”
“……모레.”
“알았어요. 모레.”
그럼에도 태영이 끈질기게 묻자 은재는 결국 모레라 대답했다. 태영은 간지러운 그 음성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눈꼬리에 붙어 있는 점을 짧게 핥았다.
어쩐지 오랜만에 와닿은 듯한 야릇한 접촉에 은재는 컵 속으로 아예 얼굴을 박을 듯 푹 고개를 떨어뜨렸다. 혀와 숨결이 닿은 것은 찰나인데, 온 피부의 감각이 일어서는 것처럼 찌릿했다. 자꾸 고개가 숙여졌다. 그래서 태영은 조금 더 그 점을 핥을 수 있었다.
* * *
모레는 무섭도록 빠르게 다가왔다.
내내 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던 은재는 서둘러 차에 올랐다. 지금 막 태영이 나갔으니 저도 서둘러야 했다.
재단 일로 오늘 잠시 나간다고 해서 아침부터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태영이 나가는 것을 창문으로 지켜보며 은재도 황급히 옷을 걸쳤다. 제가 더 이르게 집에 돌아와야 했으니 마음이 급했다.
병원에서 다시 저택으로 돌아와 오늘이 될 때까지 얼마나 긴장의 연속이었는지 몰랐다. 태영은 2층의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은재는 1층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1층에서 함께 생활하던 이전처럼 들어오지 않고 미묘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태영은 물러나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되면 찾아와 문을 두드렸고, 조금도 힘들지 않도록 허리를 단단히 지탱해 에스코트를 해 주었다. 중간중간 필요한 게 있냐며 찾아올 때도 있었다.
은재도 나름대로 애를 썼다. 커피와 딸기 케이크를 챙겨 태영의 방을 찾아갔다. 그럴 때면 태영은 기쁜 얼굴로 나와 트레이를 챙겨 가고, 조심스레 키스를 해도 되는지 물었다. 그러나 키스는 아주 잠깐이었고, 아쉬운 마음으로 서로의 곁에서 시간을 보내기만 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태영의 방에 머무르다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 의식을 차리면 어느새 방으로 옮겨져 있기도 했다.
심지어 은재는 틈틈이 고백 준비를 해야 했다. 태영에게 가까이 가고 싶고, 만지고 싶고,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마음껏 드러내도 되는지, 어느 정도 숨겨야 할지 바삐 생각하며 고백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제대로 태영에게 고백을 하기로 한 날짜가 다가오고 있는데, 태영이 계속 집에 있어 홀로 나가지도 못한 채 내내 2층을 맴돌기만 했다. 이제 그의 곁에서 잠시라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고백에 필요한 것들을 사 올 수 있게 됐다. 은재는 소리 죽여 호흡하며 땀이 배어나는 손끝을 말아 쥐며 창밖을 응시했다.
그 마음을 아는 듯 윤 비서도 속도를 내 액셀을 밟았다. 정원을 빠르게 돌아 미리 예정되어 있던 목적지로 급히 향했다.
“민 이사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목적지는 고급 주얼리 샵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었다. 그래 봤자 은재의 백화점에서 몇 블록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차마 제 백화점에 향하는 것은 부끄러워 그쪽으로 가 곧장 반지부터 보았다.
차를 마실 정신도 없었다. 예의를 차린 대화도 하지 못하고, 그저 냉수 한 잔을 요청하고 앉아 그간 사용하지 않았던 집중력을 모두 반지에 쏟아부었다. 어떤 것이 태영에게 어울릴지 고심하며 여러 개를 꺼내 손에 대 보았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모두 태영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태영은 아름다웠다. 잘생긴 알파였고, 근사한 알파였다. 자신 있는 젊음과 활기가 가득해 무엇을 해도 시선을 당겼다.
정말 뭘 해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결국 한참이나 시간을 들여 겨우 하나를 골라낸 은재는 태영의 반지 사이즈를 모른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다. 요 며칠 허둥지둥 지냈던 것이 끝내 사달을 내는 듯했다.
도대체 태영의 일에서는 쉽게 흘러가는 게 하나도 없었다. 고백을 하려 했더니 그런 일이 생기고, 또 반지도 사지 않고, 이제는 사이즈도 모르고.
“손이 아주 크니까…….”
생전 처음 다른 이의 반지를 구매하게 된 은재는 나름대로 최대한 태영의 손가락에 대해 설명했다. 손가락이 길고, 특히나 마디가 조금 도드라져있고, 군데군데 굳은살이 약간 박여 있으며, 손바닥은 생각보다 부드럽다고. 발이 꽤 큰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정도면 손도 다른 이들보다 큰 편일 것 같다고. 키도 크고 손자체가 크니 반지 사이즈도 커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듣던 직원은 노련하게 꽤 큰 사이즈의 반지를 건넸다. 사이즈 수정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그것까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미 반지를 낀 태영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으로 감각이 마비가 된 후였다.
은재는 여차하면 아예 새 반지를 살 생각으로 그것을 구매했다. 그리고 예약했던 큰 꽃다발을 근처에서 찾은 뒤 차에서 뛰듯이 내렸다.
다행히 아직 태영이 들어오기 전이었다. 벌써부터 긴장감이 몰려왔지만 케이스와 꽃다발을 챙겨 태영의 방으로 향했다. 거울을 한번 보고 옷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침대에 걸터앉아 숨을 고르니 금세 기다리던 이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정 실장은 2층에 계신다며 은재의 행방을 말해 주었다. 태영은 평소와 같은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잠시 사진 앞에 멈춰 서 민 회장에게 인사를 하는 듯 시간을 보내고…….
“…….”
“…….”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은재는 꽃다발 속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절 빤히 보고 있는 어두운 색의 눈동자를 보자마자 역시 머리가 새하얘졌지만, 태영에게 다가갔다.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어 덜덜 떨며 반지 케이스를 열어 내밀었다.
“…….”
“…….”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태영에게까지 들릴 게 분명했다. 아가 태영이도 이 순간만큼은 같이 긴장을 하고 있는지 배가 조금 아렸다. 태영은 낮게 숨을 터뜨리며 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 반지를 끼워 주려 보니 남는 손이 없었다. 은재는 꽃다발을 어설프게 태영에게 안겨 주며 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이렇게 멋없는 프러포즈라니. 새로운 차라도, 아니면 말이라도 준비할걸……. 하다못해 별장이라도…….
자꾸만 한 박자 늦는 생각에 황망한 기분도 들었지만 은재는 태영의 뺨을 당겨 와 이마를 맞대고, 콧대를 맞추며 짧게 입술을 겹쳤다.
옅지만 숨 가쁜 숨소리가 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서 떠돌았다.
반지가 잘 맞는 것이 지금으로써는 천만다행이었다.
“……멋이 없어서 미안.”
“그런 말 말고요.”
“……여전해?”
“제가 여전한 게 중요해요?”
“부담스러울까 봐.”
“전혀요.”
“그러면…….”
은재는 이제 식은땀이 나는 손을 쥐었다 펴며 제 몫의 반지를 내밀었다.
“내가 잘할게. 잘해 줄게.”
“…….”
“네가 그만하고 싶어지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물러날게. 네가 부담스럽지 않게, 네가 원하는 만큼만 할게.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릴게.”
“…….”
“그러니까 그만큼이라도 기회를 줄래.”
끝이 살짝 떨리는 것이 누가 들어도 간절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태영은 고개를 기울이며 침묵을 지켰다. 아직까지 맞닿아 있던 이마와 코끝이 살짝 물러나 비껴갔다.
약한 한숨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은재는 조금 전 태영이 제 입맞춤을 거절하지 않았지만, 또 응해 주지도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태영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중간에 다른 사람 만나더라도, 이사님은 괜찮으시겠네요.”
“응.”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아팠지만 은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었으니까 주저할 필요도 없었다.
“제가 다른 사람 만나서 아이를 낳아도? 그래서 그 사람이랑 이사님한테 와도 반겨 주실 거고요?”
“……응. 그래야지.”
구체적으로 변해 가는 말에 은재는 슬그머니 배를 감쌌다. 점점 더 마음이 아팠으나…… 그 정도도 감수하지 않고 작정한 일은 아니었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제가 태영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태영은 그사이에 케이스에 들어 있는 반지를 꺼내며 짧게 미간을 구겼다. 제 손가락에 끼워진 것과 비슷한 반지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묘연한 표정을 떠올렸다.
“당연히 제 결혼식에도 오시고요.”
“그래. 그렇게 할게.”
은재는 엉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맺어지더라도 괜찮다고 내내 생각했지만, 마음과 달리 표정이 감추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도 괜찮아요?”
“……어쩔 수 없지.”
나직이 숨을 몰아쉰 태영은 꽃다발을 짓누르며 은재를 끌어당겼다. 그의 품 안에서 꽃다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리시안셔스의 향이 더 선명해졌다. 도륵도륵 눈동자가 굴러가는 소리가 날 것처럼 눈을 들어 태영을 올려다보던 은재는 욕심이 나는지 손을 뻗어 태영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키스해 주세요.”
태영의 요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재는 곧장 발뒤꿈치를 밀어 올리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태영은 그대로 은재를 끌어안아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눕히고 마른 몸 위를 타고 오르며 어느새 망가진 꽃다발을 옆에 내려 두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
발갛게 상기된 은재가 흐드러진 꽃잎을 옆에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 얼굴 주변에 감도는 꽃향기. 태영은 뻐근한 숨을 삼키며 물었다.
“원망하지 않으셨어요? 저 때문에 고생하셨잖아요.”
“그런 적 없어.”
“저 때문에 어디까지 감수하셨어요. 얼마나 감당하시려고 하는지 상상도 안 가요, 저는.”
은재는 입술을 달싹이다 그저 태영의 뺨을 만졌다. 고개를 느릿하게 저으며 목덜미를 끌어왔다.
이제 보니…… 태영의 얼굴에도 흐릿한 염려가 묻어 있었다. 병원에서, 그리고 저택에 돌아와 지내며 저만 긴장의 연속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저만큼이나 깊은 고뇌를 떠안았던 것 같은 얼굴이었다. 괴로움과 고통이 근사한 미간에, 턱에 묻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못 왔어요. 내가 이사님을 괴롭게 한 것 같아서.”
“…….”
“제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저 때문에 이사님이 각인을 했다는 걸, 그래서 아팠다는 걸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덤덤하지만 감정이 짙게 묻어나는 음성에 은재는 입술을 깊게 깨물었다.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요. 잘 생각하세요, 이사님. 전 이사님을 각인하게 만들었고, 알지도 못해서 괴롭게 한 알파예요. 이사님이 내 아이를 가졌는데도 알지 못하고 피까지 흘리게 만들었어요. 그런 사람을…… 정말 알파로 선택하셔도 되겠어요?”
그럼에도, 그럼에도 선택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태영은 은재가 쓰러지고 오늘이 될 때까지, 조금도 마음을, 그 애정을 내려놓지 않았다. 다만 제가 그에게 적절한 사람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이, 저보다 더 나은 사람이 이토록 다정하고 아름다운 사람의 곁에 서 있어야 하는 게 아닌지. 제가 정말 그 자격을 가진 게 맞기는 하는지.
산 채로 도륙을 당하는 심정이지만 은재를 위해 어쩌면 제가 놓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오늘이 되기까지, 은재가 그것을 고민하기를 태영을 바랐다.
“각인 때문에 그러신 거면…… 그것 때문에 내키지 않으시는데 하시는 거면, 그러지 마세요. 괴로우면 이제 그만 견디세요. 아픈 건 제발 그만하세요.”
하지만 은재는 고개를 저으며 태영의 뺨을 손에 쥐어 당겨 왔다. 언제나처럼 이마를 맞대고 코끝을 맞대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말하셔야, 보내 드릴 수 있어요. 지금 아니면, 저 절대 이사님 안 놓을 거예요. 저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고 해도 이제 못 놔요.”
“내가 물어보고 싶었는데. 영국으로 가야 했던 일…… 원망스럽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운 적 없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필요한 시간이었어요.”
“나도 그래. 각인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원망한 적도 없고.”
근사한 태영의 눈썹을 매만지며 곧 그의 손을 제 배에 얹었다.
“미안해. 숨겨서. 내가 다 숨겼는데 네가 어떻게 알았겠어.”
“…….”
“내가 널 사랑하고, 너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숨고 싶어졌어. 이미 아가 태영이가 여기 있잖아.”
참았던 숨을 터뜨린 태영은 은재의 목과 어깨, 배에 차례로 입 맞추었다.
“정말 시끄러울 거예요. 이사님이 두려워하던 대로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볼 거예요. 대놓고 그렇게 보겠죠.”
“…….”
“관련 없는 것도, 어쩌면 회장님도 그렇게 볼 수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생길 수도 있고요. 이사님이 노력해 오신 게 물거품이 될 거예요.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말할 거예요.”
은재는 큰 숨과 함께 마른침을 삼켰다.
“……괜찮아.”
“…….”
“그 시선들 때문에 널 놓치는 게 더 두려워.”
생각하지 않은 내용은 아니었다. 세간에선 분명 떠들 것이다. 그리고 아가 태영이를 낳게 된다면 더욱 그러겠지.
두렵지 않다고 한다면 분명 거짓말이었다. 분명한 이유 없이 받던 시선이 이제는 조금 더 분명해질 거고, 명백해진 증거에 절 수치 주려 할 수도 있었다. 그간 당당하게 해 왔던 것마저 의혹의 눈초리를 받을 것이었다.
그렇게 될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태영이에게 더 이상 상처 줄 수 없었다. 제 마음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태영을 놓치는 만큼은 아닐 것이었다. 태영이가 없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가장 뼈저리게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평생 지녀 온 양심을 몇 번이나 넘어설 만큼, 무엇보다 이 사랑이 간절했다.
“너랑…… 아가 태영이랑 살고 싶어.”
그래서 솔직히 고백했다. 제 동지였던 아가 태영이를 보낼 수도 없고, 제 알파인 태영이도 보낼 수 없다고.
“그럴 때, 네가 손만 내밀어 주면 될 것 같아.”
“…….”
“너만 괜찮으면 내가 지켜 줄게. 그런 소리 네 귀에 안 들리게 해 줄게.”
그렇게 모두가 저를 손가락질하는 상황이 오면 그냥 절 안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널 숨겨 줄 테니, 손만 빌려 달라고. 그런 소리는 나만 듣겠다고.
도덕이라는 무의미한 선을 넘어서는 순간은 의외로 떨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이들을 의식한 도덕보다, 규율보다 몇 배는 더 애타는 것이 존재했다. 아무리 애를 써 그들의 기준에 합당한 인품이 되어도 결코 인정받지 못하는 삶보다, 그 어떤 수치를 당하더라도 받고 싶은 감정으로 온몸이 전율했다.
“그런데 제가 다른 사람이 생기면 보내 주신다고요?”
목을 긁는 듯 거친 숨을 토해 낸 태영은 더 이상 참기가 어려운 듯 은재를 조여 안았다. 맞닿아 있는 피부가 아플 정도로 품이 겹쳐졌다. 그 힘에 은재도 눈을 질끈 감으며 태영을 껴안았다.
“정말요?”
“…….”
“정말 가라고 하실 거예요?”
파르르 심장이 떨렸다. 터놓지 못한 속내가 가슴 속에 고이기 시작했다. 쿵쿵 심장이 불안 속에서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것까지 제가 바라도 되는 걸까.
태영은 꼭 그 말까지 들어야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샌가 코앞까지 다가온 열기를 들이밀며, 당장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이마를 맞대고 살짝 비비기도 했다.
“이사님.”
“……안 그랬으면 좋겠어.”
“…….”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몸을 일으킨 은재는 태영을 마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랑 아가 태영이랑 살자.”
천천히 태영의 눈이 감겼다. 마치 이제야 구원을 받은 듯, 이제야 물 위로 올라와 숨을 마신 듯 온갖 감정이 스치는 얼굴로 뺨을 맞댔다. 은재는 다행히 태영이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을 알고 한 번 더 졸랐다.
“계속 내 아이 하면서, 내 옆에 있어.”
그리고 제 손을 내밀었다.
“가지 마.”
“…….”
“가지 말고 네 삶에 끼워 줘.”
“…….”
“그랬으면…… 좋겠어.”
더 이상은 표정을 감출 수 없는지 태영이 은재의 뺨에 제 입술을 짓눌렀다. 이가 흔들리는 착각이 일 정도로 입을 맞추며 은재를 조여 안았다. 안아도 안아도, 입을 맞대고 맞대도 부족한 듯 몸을 기울여 가며 끌어안았다.
태영은 붉어지는 은재의 뺨을 문질렀다. 잠깐이면 끝날 일이지만, 저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믿기지 않는지 반지를 손에 쥐었다가 이마를 맞대고, 또 조심스레 손가락을 어루만지다가 이내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러나 반지는 은재의 손가락에 너무나 헐렁하게 끼워졌다. 그 모습에 태영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고, 은재는 당황한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태영은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반지 안 껴 보셨어요?”
“……네 것만 봤어.”
“아무리 그래도 껴 보셨어야죠.”
“정신이 없어서. 꽃도 사 와야 했거든.”
우스운 일이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반지도 못 껴 보고 왔을까. 태영은 마른 손가락을 덮어 데워 주며 거듭 이마를 맞대 비볐다.
이 미약한 온기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퇴원하고 돌아와 계속 제 눈치를 살피며 갈 곳이 있는 것처럼 굴기에 잠시 외출을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틈을 타 바삐 움직인 듯했다. 저에게 이것을 주려고, 이렇게 제 어설픈 마음을 고백하려고 했다는 것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는 영원히 제 보호자이고, 제 유일한 어른일 테지만 동시에 유일한 연인이었다. 그의 사랑스러움을 알 수 있는 건 저뿐이었다. 저의 모든 세계를 이룩하고 밝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살찌우시면 되죠.”
“응. 맞아.”
“반지 예뻐요.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네.”
“근데 이건 사귀자는 프러포즈예요, 아니면 결혼?”
두 개 모두라고 하면 안 되나. 딱히 그런 것을 정하지 않았던 은재는 더욱 당황하여 옆에 있던 꽃잎을 쥐어뜯었다.
태영은 황당한 듯 웃으며 그 손을 털게 만들었다. 꽃잎이 그 손에서 우수수 떨어지며 은재의 뺨이 더 붉어졌다.
“결혼 프러포즈면 오늘 첫날밤 보내나 하고 기대했는데.”
아직 아가 태영이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작은 태영이를 만나기에는 위험했다. 그래서 은재가 슬그머니 배를 감싸자, 태영은 그 손을 붙잡아 밀어내며 제 손으로 배를 감쌌다.
“위험하게는 안 해요. 제 페로몬이 도움이 된다고 했으니까 핥게만 해 주세요.”
은재 또한 태영이 여러모로 그리운 건 마찬가지였다. 만지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안고 싶었다. 다시 만난 태영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둘 사이에서 낯설게 드리워졌던 어색함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이번 건 연애 프러포즈로 해요. 첫날밤도 그때 보내고 오늘은 그냥 만지기만 해요.”
꽃잎이 마구 떨어져 있는 곳에 다시 은재를 눕히고 옷을 밀어 올렸다. 은재는 벌써부터 뒤가 젖고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태영의 성난 듯한 어깨를 움켜쥐며 울대를 들썩였다.
그러자 태영은 은재의 목에 급히 달라붙어 울대를 핥았다.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아프게 빨아 흔적을 남겼다.
중간중간 꽃잎을 은재의 몸 위에 뿌리기도 했다. 은재는 애정으로 인한 긴장을 느끼면서도 때마다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첫날밤인 것 같았다. 꽃과 반지, 그리고 긴장과 설렘으로 눈시울이 뜨거웠다. 돌이켜 보면 제가 살아온 삶은 별거 아닌 날들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바쁘고 각박했는지.
한 번도 느슨해진 적 없던 심장이 이제야 팽팽하게 당겨졌던 실을 끊으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숨이 터지고 터져도 모자랐다. 오래 참아 왔던 숨이 벅차게 끓어올라 터졌다.
“저도 드릴 거 있어요.”
태영은 입술로 연신 은재의 살갗을 핥으며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고급스러운 박스에 담겨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커프 링크스였다. 두 쌍의 커프 링크스.
“이거…….”
그리고 보석 대신 그 안에 박혀 있는 것은…….
“해 드릴게요.”
은재는 떨리는 손을 말아 쥐며 팔을 내밀었다. 한동안 태영 대신 몸에 지니고 다니던 그 문진이, 파란 빛깔로 바다를 담은 듯, 태영을 닮은 듯했던 광물이 이제 금테를 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태영의 손가락에서 은재의 소매로 옮겨 왔다.
태영은 은재의 양쪽 소매에 새로운 커프 링크스를 달고 그 위에 입술을 묻었다. 제 혀로 그것을 세세하게 핥아 손목에까지 입술을 묻고 있었다.
“……나도, 해 줄게.”
여전히 떨림이 가시지 않았지만 힘겹게 태영의 소매를 붙잡았다. 하지만 커프 링크스를 손에 쥐기가 무섭게 다시 달려든 태영에게 조이듯 안겨 키스를 받았다. 숨조차 삼키기 어려울 만큼 거친 입맞춤을 받은 뒤, 서로의 목과 쇄골에 바삐 입술을 묻었다. 체향을 맡으며 온통 서로로 서로를 물들였다.
“그날…… 그리고 여태까지 정말 미안했어.”
왜 자꾸 말을 해도 해도 할 말이 많아지는 걸까. 애정이 어린 말만 해 주고 싶은데 자꾸 제 실수가 떠올랐다. 껴안고 있는 이 순간을 받아들이려면 계속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자 태영은 뜨거운 눈시울에 특히 오래오래 입을 맞췄다. 은재는 절 둘러싼 체온을 느끼며 힘주어 태영을 당겨 안았다. 제 알파를 꽉 끌어안았다. 다정한 페로몬에 절 맡겼다.
“저 꼭 지켜 주세요.”
“……응.”
“근데 그러다가 지치면, 팔이 아프면 저한테 오세요. 제가 할게요. 제가 이사님 안 넘어지게, 안 다치게 꼭 끌어안고 있을게요.”
“…….”
“제가 우리 이사님 아무도 못 건드리게 숨겨 놓을게요. 제 등에 기대세요.”
은재는 기어코 눈꼬리 끝의 점을 적시는 무언가의 액체를 느끼며 태영의 가슴에 얼굴을 더 파묻었다.
“아무도 이사님 못 보게 제가 막아 드릴게요. 그럼 이사님은 제 사랑만 받으시면 돼요.”
둘이 그리는 로망스의 첫 페이지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