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딱, 딱. 손톱이 물어뜯기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울렸다.
초췌한 얼굴의 남자, 서 기자는 불안한 듯 좁은 모텔 방 안을 오가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도대체 제가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이렇게 크게 번질 일이 아니었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일을 키운 건 자신이었다.
별거 아닌 일이었다. 어차피 대경이 제 상대가 되지 않으리란 건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상대할 생각도 없었다. 이미 신 의원을 비롯한 이들을 알고 지내는 것으로 제 분수에 넘친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돈을 조금 더 땡길 생각이었다. 대경은 점잖은 그룹이었고, 파렴치한 수준으로 저에게 보복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잘 알았다.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될 것을 알기에, 조금 더 장난을 쳐 돈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몸이 묶였다. 출국은 물론이고 과하게 구속 조사까지 이루어졌다. 신 의원을 만나러 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누군가 계속 저를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아 결국은 집을 떠나 허름한 모텔 방에 들어와야 했다.
심지어 며칠 전, 저와 협력했던 폭로자는 자취를 감추어 연락도 닿지를 않았다. 불길한 기분이 꽤 오래 이어지고 있었다.
딱딱. 씹을 것도 없는 손톱 끝을 물어뜯으며 주룩 흐르는 피를 입술로 눌렀다. 핏발 선 눈으로 주변을 살피다 다시 발걸음을 반대편 벽을 향해 옮겼다.
―!
그때 불쑥 벽에서 쿵, 하며 들려온 소리에 서 기자는 흠칫 놀라 굳어졌다. 파랗게 질려 저도 모르게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6시 16분.
처음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매일 같은 시간마다 벽이 울리는 통에, 이제 서 기자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계속해서 남루한 곳만을 찾아 몰래 이동하는데도 이렇게 벽이 쿵, 하며 울리는 일이 잦았다. 집을 떠나 모텔에 기어들어 온 후, 그곳이 어디든 늘 이렇게 같은 시간에 벽이 울렸다.
그걸 견디기가 어려워 큰 결심을 하고 방문을 열고 나가면 옆에서 꼭 누군가 동시에 나오곤 했다. 때마다 나오는 이는 달랐지만 문을 열 때마다 제 방에 귀를 대고 있었다는 듯 빙긋 웃으며 나오는 옆방 사람은 절 감시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젠장, 돈 좀 몇 푼 벌겠다고 하다가…….”
대경, 아니면 그 알파 놈. 그 알파 놈일 확률이 더 크지만…….
더 이상 뭘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제는 옆방에 있던 호리호리한 남자가 영국식 발음으로 누군가의 이름과 지역, 학교에 대해 괜히 이야기하는 게 들리는데…….
그것을 들은 순간, 서 기자는 제가 무사히 한국을 뜰 수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제 딸과 와이프가 있는 곳이었다. 딸이 유학하는 지역과 학교 이름이었다. 완곡한 협박이다. 불안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부재중 전화 3건 ― 신 의원]
서 기자는 환청처럼 들리던 진동에 뒤늦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신 의원에게서 또 전화가 걸려 온 모양이었다. 요즘엔 그의 전화마저 받지 않았다.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 기척만 들려도 옆방에서는 저도 함께 듣고 있다는 의미로 쿵, 벽을 때리곤 했다.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 선 넘고 들어갔다가는 곤란해. 장난 한 번 치고 손 턴다고 했잖아. 자네가 뭘 하든 말든 나는 이제 모르는 일일세.]
[그리고 류 전무 좀 알아보라니까. 그 추잡스런 새끼 영 불안한데 말이지. 괜히 설치면 우리마저 좆 되는 거야. 그 새끼가 사고 안 치게 적당히 치고 빠져.]
류 전무. 그 새끼가 대경 쪽에 무슨 일을 하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제 코가 석 자였다.
서 기자는 모텔에 비치된 싸구려 종이와 펜을 챙겨 들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정신없이 그 위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손이 덜덜 떨려 제대로 된 글씨조차 잘 써지지 않았지만 흩날리듯 적었다.
그러곤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고 나섰다.
역시 기다렸다는 듯, 옆방에서 문을 열고 나온 테오가 싱긋 웃으며 서 기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 * *
태영이 두 번째로 첼리스트를 만나는 날의 아침이었다.
이날이 될 때까지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은재는 기억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면 식탁 앞이거나 서재, 그리고 회사였다. 가끔 차 안이었고.
그래도 큰일 없이 시간이 흘렀다. 세헌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고, 폭로자에게도 그랬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걸 챙길 정신도 없었다. 세헌에게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래서 그 뒤로 폭로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강 비서가 그 일을 알아서 처리하고 있는 듯한데, 물을 수도 없었다.
태영에게 구애를 위한…… 무언가를 보내려고도 생각해 보았는데. 일단 붙잡아야 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침이 밝았다.
도저히 제대로 된 일정을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아 간략한 오전 일정만 잡았다. 오전 일정도 중요한 것은 없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업의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 곧장 나섰다.
손에는 한 장의 티켓이 쥐어져 있었다.
며칠 전 회사를 찾은 조한미에게 직접 받은 것이었다.
태영이 이 전시회의 티켓을 구해 놨다고 했는데. 태영과 함께하지 못하고 홀로 가는 걸음이 쓸쓸하긴 했지만 일의 연장선이었다. 간단한 미팅을 가진 작가의 현재 전시회였다. 얼굴을 비추고 작품을 봐야 했다. 구매도 한다면 좋고.
전시회장에는 사람들이 간간이 있겠지만 차라리 나았다. 복잡한 소리에, 또 인파에 휩쓸려 머리를 비우는 것이 지금은 필요했다.
이렇게나 머리가 복잡한 적은 별로 없었는데…….
지잉, 전시회장 쪽에 거의 다다른 은재는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매끄러운 물체를 만지다 이내 꺼내 들었다. 이전 태영에게 받은 문진이었다. 태영이 돌아오던 날 함께 도착했던 선물.
뭐라도…… 태영과 닿고 싶어 요즘 매일 갖고 다니는 것이었다. 이것을 들고 있으면 조금 진정이 되는 것도 같고, 그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묵직하게 가슴을 누르는 것이 꼭 태영과 닮아 있었다.
그것을 다시 원래 자리에 넣어 두고 가방 안에서 우는 진동에 고개를 숙여 살폈다. 류 전무의 연락이었다.
그렇게 긴밀한 사이가 아니건만, 요 근래 류 전무에게서 연락이 종종 왔다. 계속 만남을 거절했지만 요청이 끈질기게 이어져 몇 번 만나기도 했다. 유선상으로는 전시에 관련한 이야기만을 꺼내기에 당연히 사업상의 논의인 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본의 아니게 그의 손을 빌려 저택에 도착하고, 그 모습을 태영에게 보이기도 했지만…….
“네.”
―류 전무입니다, 이사님. 잘…… 지내시죠?
그를 이용한 적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비즈니스를 위해 만남을 요청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고도 태영의 마음을 정리하게 만들기 위해 그를 이용했다. 그렇게 멋쩍게 돌아가게 했음에도 전화 한 통화로만 그 날의 일을 정리했다.
그런데도 류 전무는 그 후로도 연락을 주고받고 싶어 했다. 조금 더 명백한 표현이었다.
“네. 요 며칠 안부를 못 여쭸네요.”
―아닙니다. 민 이사님 바쁘신 건 제가 잘 아는데요.
이사님, 그때 차가 전시회장에 멈추며 강 비서가 다가왔다. 다른 차로 함께 은재를 쫓아오던 윤 비서에게 무언가를 건네받고 조심스레 내밀었다.
―밖이신가 봅니다.
“……네, 누굴 좀 만날 일이 있어서.”
강 비서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꽃다발이었다. 익숙한 포장으로 감싸인 싱그러운 꽃.
―그러시군요. 저도 안 그래도 오늘은 전시회에 좀 나가 보려고 하거든요.
“…….”
―저희 쪽에서 이전에 전시회를 진행하셨던 조한미 작가분이 지금 Y동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어요. 이전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혹시 가능하실까 하고 급작스럽지만 연락드렸습니다.
“…….”
―마침 또 점심시간이기도 하고…….
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은재는 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꼿꼿이 제 자태를 자랑하는 꽃을 받아 들었다.
꽃 사이에 코를 대고 깊게 향을 마시며 울컥하는 감정을 눌렀다.
강 비서가 낮춘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도 보내온 곳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알 수 있었다. 이 꽃을 보낸 이를,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금낭화]
정갈한 글씨로 적힌 카드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은재는 모양새마저 아름답고 청초한 그 꽃을 응시하다, 그저 간결하게 적혀 있는 그 글씨를 더듬어 보았다.
은재는 다시 한번 8시, H호텔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제 옆자리에 꽃을 놔두었다.
매섭게 치솟는 감정이 아닌, 은근하고 묵직하게 퍼지는 감정이 선명했다.
―……이사님, 듣고 계십니까?
차 안에 퍼지는 듯한 향과 감정을 맡는 사이로 음성 하나가 끼어들었다. 은재는 다시 한번 향을 삼킨 뒤 목을 가다듬었다.
“……일이 생겨서요. 무슨 일이십니까?”
―아, 못 들으셨군요. 지금 전시회에 가는 중인데, 혹시 시간이 되시면 어떠신지 하고…….
전시회. 지금 열리고 있는 전시회는 많겠지만 은재는 어쩐지 그와 이곳에서 마주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와 유일한 접점은 이 작가였으니까.
―제가, 점심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 저희 쪽은 재단도 없으니 작가분과 연결도 가능할 것 같은데…….
은재는 그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굳이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낯선 알파의 목소리만 들어도 배가 아린 기분이었다. 며칠 전, 병원에서 수술 날짜를 잡고 온 뒤로는 더욱 알파들이 꺼려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은 일정이 있습니다.”
―아, 그렇죠……. 아무래도 당일은, 조금 어려우시겠죠? 네…….
“……다음에 연락 주시면 날 잡아 보겠습니다. 오늘은 어려울 것 같네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예의를 갖춰 거절했다. 혹시 그가 이곳에 와 마주치기 전에 서둘러 전시회를 보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차에서 내렸다.
생각보다 거센 찬 바람이 몰아쳤다. 은재는 마침 전시회장 입구에서 다가오는 윤 비서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관람하시는 동안은 입장을 막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전용 도슨트도 대기되어 있고요.”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하세요. 그러려고 이 시간에 온 거니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위험하실 수도 있는데요.”
“네. 괜찮습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은재 덕분에 전시회장에서는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뒤늦게 관장이 내려왔지만 은재는 괜찮다며 태연히 사람들 속에서 그림을 관람했다.
애써 내리누른 소란 속을 가까이하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몇몇은 소란을 이끌고 온 은재를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바라보았고, 몇몇은 대놓고 사진을 찍었다. 또 대다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다양한 소란은 며칠째 긴장하고 있는 은재를 단번에 삶의 경계 쪽으로 이끌었다.
역시 이 소란 속에 있는 것이 잘한 선택인 듯했다.
“…….”
전시를 거의 다 관람했을 때쯤, 은재는 커다란 그림 앞에서 멈춰 섰다. 제법 큰 크기의 그림이었다. 강하게 뿜어 나오는 색채로 가득 찬 액자. 일부러 그렇게 의도를 했는지, 붓의 거친 단면이 모두 드러나며 화폭을 가득 메운 색색의 기묘한 조화.
“조한미 작가도 꽤나 아끼는 작품이라고 이야기 전했던 그림입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과 섞여 뒤를 쫓던 관장이 다가와 말했다.
“전시회가 끝나는 대로 보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뒤엉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사로잡혔으나, 더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봤으면 하는 마음에 은재는 전시회가 끝나는 날 그림을 가져가기로 했다. 그러고도 한참 그 앞에서 생동감이 느껴지는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이곳에 더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는데, 관장과 마주친 이상 그대로 나갈 순 없었다. 그림도 구매했으니 더더욱 그랬다.
결국 자리를 옮겨 아늑하고 고요한 곳에서 그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다. 다행히 베타인 사람이라 역한 기분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은재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말을 들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도 8시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런 곳에서 일하시면 좋으시겠네요.”
“하하, 일하는 건 다 똑같지 않을까요.”
하얗게 센 머리를 곱게 틀어 올려 묶은 관장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은재도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입지가 꽤 좋은 듯해서요. 큰 호수도 이렇게 내려다보이고, 주변 경관도 탁월하고요.”
“네. 그렇죠. 나이가 들수록 보이는 건 저런 것뿐이라……. 가끔 아이들이 부모랑 나와 노는 소리가 들리곤 한답니다. 그럴 때면 역시 기분이 좋아지긴 하지요.”
전시회장이 있는 곳은 호수 공원과 맞닿아 있어 주말이 되면 관람객뿐만 아니라 근처를 찾은 이들도 볼 수 있었다. 오늘은 평일에, 겨울이라 주변을 보러 온 가족들은 없었지만 몇몇 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겨울에 호수가 언 걸 보면 괜한 기분도 들고요. 나이가 나이인데도 호수 위에서 걷고 싶어진답니다. 생각만 하는 건데도 무슨 추태인지 모릅니다. 가끔 혼자 얼굴도 붉어지니까요.”
은재는 달콤한 커피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 잔잔한 대화가 흐르던 방에 누군가 노크를 해 왔다. 관장의 비서가 무심한 표정으로 다가와 손님이 왔다 전해 주었다.
“차 관장…… 아, 민 이사님!”
모습을 드러낸 이는 류 전무였다. 마침 나서려고 했는데 딱 마주친 얼굴에 은재는 짧은 숨을 터뜨렸다.
그는 관장을 찾아온 듯하지만 은재를 발견하고 대놓고 반갑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착각인지, 평소보다 난폭하게 굳어졌던 얼굴에 급히 미소가 들어차고 있었다.
“여기 계신 줄 몰랐습니다. 외부 일정이 여기인 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요. 같이 와도 될 뻔했습니다.”
“전 나서려던 참이어서요.”
“아……. 그, 그러시면.”
묘하게 선을 긋는 태도에 류 전무는 약간 당황해했다. 관장 또한 차마 류 전무에게 무어라 말은 하지 못하고 누군가 이 난처한 침묵을 정리해 주기를 기다렸다.
하는 수 없이 은재가 입을 열었다.
“제가 시간이 많지는 않습니다. 두 분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실 테니…… 근처에 있겠습니다.”
“날이 추운데 여기 계시지요.”
“아닙니다. 사무실인걸요. 마침 좀 걷고 싶었으니 근처를 보고 있겠습니다. 차 한 잔 정도는 그때 할 수 있겠네요.”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저택에 돌아갈 수도 없었고, 아니면 다시 회사였다. 세헌과 종종 들르던 바에 갈 염치는 없었고.
류 전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대놓고 그렇게 제 앞에서 곤란하고 아쉬운 얼굴을 해 보이는데…… 그대로 넘어가기는 맘이 편치 못했다.
자신답지 않게 요즘 마음이 물렁했다. 이전이라면 어쨌든 알파와의 시간이니 단호하게 정리하고 나섰을 텐데.
알파들이 여전히 꺼려지지만…… 아무래도 아가 태영이의 성격을 미리 경험한 그런 기분이었다.
* * *
“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아닙니다. 저 위해서 내어 주신 건데 제가 대접을 하고 싶어서요.”
“그…….”
류 전무의 이야기가 끝나는 동안 은재는 오랜만에 밖을 걸었다. 갈대로 가득 찬 정원을 걷고 찬 바람을 맞으며 저택의 정원과 이곳을 비교해 보았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정원을 둘러봐야겠다 생각도 했다.
그리고 류 전무의 사무실에서 잠시 시간을 죽였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기억에 남는 건 없었다. 그저 앞으로 그가 담당하고 있는 곳에서 열릴 흥미로운 전시만 몇 개 기억해 두었다.
그쯤 되니 나설 수 있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류 전무는 꼭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며 간청했다. 아가 태영이는 이번에도 약하게 굴었다.
“사실 누굴 좀 봐야 해서요. 제가.”
“약속이 있으십니까?”
“그건 아니고…….”
“약속이 아니라면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어 주신 것 감사해서 그럽니다. 그 후에 가셔도 되는 거라면요.”
약속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있었다. H호텔에 가야 했다. 그런데 그곳에 이 남자를 끌고 가야 하나.
“오래 붙잡지 않겠습니다. 식사만 하고 가세요. 대접도 한 번 못 했는데 민망해서 또 다음에 이사님 얼굴을 어떻게 뵙겠습니까.”
……큰 태영이가 알면 싫어할 텐데. 은재는 차마 배에 손을 올리지도 못하고 홀로 생각했다. 그러자 아가 태영이는 그 생각에 반대라도 하는 듯 통증을 선물해 주었다.
“이사님.”
도저히 뭐라고 설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머리가 이렇게 잘 굴러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은재는 한숨을 뱉었다.
“오래는 안 됩니다. 제가 그 후로 약속이 있어서요. 식사도 간단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괜찮습니다.”
류 전무는 은재가 넘어오는 것 같자 화색을 띠며 몸을 당겨 앉았다.
“원하시는 장소가 특별히 있으십니까?”
“……네.”
자신은 어디든 괜찮다고 류 전무는 말했다.
“H호텔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호텔까지는 각자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류 전무는 함께 이동하기를 권했지만, 아가 태영이도 그것은 반대하고 나섰다. 뭐라 거절할지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입에서는 단호한 말이 튀어나왔다.
알 수 없는 녀석. 은재는 태영이 보내 준 꽃향기를 마시며 점점 조여 오는 긴장감을 다시금 느꼈다. 배를 쓰다듬으며 크게 심호흡을 해 봐도 그랬다.
어쩔 수 없었다. 태영이 선을 보는 자리에, 다른 이와 만나고 있는 자리에 가는 거니까.
그 자리에 기어코 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서 그 뒷일은 어떻게 할지 정하지 못했다. 머리가 하얬다. 그저 태영이를 데리고 나와야겠다는 생각만이 분명했다.
이왕 제가 태영이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고 인정한 이상…… 그리고, 이렇게 태영이의 꽃이 도착한 이상 자리에 가야만 했다. 태영이를 데리고 나와야 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제 마음을 표현해야 했다. 무슨 뜻으로 꽃을 보낸 것인지는 몰라도 이번만큼은 솔직하게 다가가고 싶었다.
저에게는 마지막 기회였고, 더 이상 태영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호텔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듯 서 있는 류 전무가 보였다. 그는 왜인지 은재만큼이나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은재는 그의 얼굴을 볼 새도 없이 차에서 내렸다. 밤이라 더욱 차가워진 기운에 코트를 여미며 아쉽지만 꽃을 내려놓았다.
그 꽃으로 류 전무의 시선이 짧게 향하는 듯해, 은재는 몸으로 그것을 가리며 내렸다.
“들어가시죠.”
호텔 주변에는 화사하고 노란 빛이 가득했다. 차가운 공기가 주변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분수와 조형물들에 조명이 달려 따뜻한 겨울의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나무들에도 각각 조명이 달려 있었고, 겨울 특유의 분위기를 가진 음악이 잔잔히 흘렀다.
그럼에도 은재는 얼어붙은 얼굴로 안으로 향했다. 8시 20분. 이미 태영은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혼자 오는 게 역시 나았을까. 그래도 혼자 식사를 하는 것보다는 누군가 있는 게 나을까. 차라리 세헌과 있는 게 나았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겼다. 긴장과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곳곳에 평화롭고 안락한 분위기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바삐 살피며 걸었다.
류 전무와 은재의 얼굴을 확인한 지배인은 굳이 묻지 않고 구분된 라운지로 이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
“…….”
중간쯤에 앉아 있는 태영을 마주쳤다. 그는 어쩐지 사람들의 시선이 차단된 곳에 있지 않고 레스토랑 중간쯤에 자리한 채였다. 피아노와 가까운 곳에서 연주를 들으며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한껏 제 쪽으로 몸을 기울인 상대가 말을 하는데도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다 넌지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은재는 순간 마주친 태영의 시선에 몸이 더욱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발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권태로움이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는 태영의 모습이 낯설었다. 이렇게 보니 날카로운 인상의 태영은 제 앞에 앉아 있는 이에게는 그다지 관심도 없어 보였다. 뒤로 몸을 젖혀 기댄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은재를 발견하곤 천천히 몸을 세웠다. 은재를 좇으며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원래 저렇게 생겼었나. 매번 몸을 접으며 다가와 안기고 애교를 부리던 태영인데. 큰 손과 단단한 몸을 가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곧잘 웃고 선한 얼굴로 눈을 접던 태영이가 원래 저렇게 생겼었나…….
하지만 태영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제 머리카락을 무심히 매만지며 질 낮은 알파가 하듯 은재를 서늘하게 훑었다. 먹잇감을 바라보는 육식동물처럼 조금 더 짙어진 눈빛으로 그렇게 눈을 마주쳐 왔다. 옷을 잘 차려입고는 있었지만 언제 야성적인 몸을 드러낼지 모를 분위기로 간신히 내딛는 은재의 걸음을 쫓았다.
그 시선에 오히려 은재는 발가벗겨진 기분을 느꼈다. 약간 휘청거리려는 걸음을 꾹 참아 견디며 혀를 씹었다.
안내받은 방으로 완전히 들어가기 전 은재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태영이 보이지 않는 깊은 복도였지만, 은재는 그 위험한 얼굴의 알파가 여전히 저를 돌아보고 있다고 느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는 더더욱 뒤죽박죽이었다. 수저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물 잔을 엎지르기도 했다. 주문을 하려고 할 무렵에는 입술이 달라붙어 입을 열기도 어려웠다. 오히려 느긋하게 웃은 류 전무는 알아서 주문을 마치고 은재의 앞에 새 수저와 잔을 놓아주었다.
그런데도 은재는 계속 태영을 의식했다. 은근하게 느껴지는 페로몬을 마시며 조여드는 뒤를 느꼈다. 불쑥 뜨거운 것이 치미는 것 같아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했다. 자꾸만 절 위아래로 훑던 어두운 눈동자가 떠올랐다.
당연하게도 술은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은재의 얼굴은 이미 취한 것처럼 살짝 붉어져 있었다. 열이 올라 뺨과 귀가 홧홧했다.
뭘 먹었는지도 모르게 디저트가 어느새 앞에 놓였다. 은재는 시간을 확인하곤 따뜻한 물을 머금었다.
지금 나가면 태영이도 아직 있을 것 같은데……. 지금 태영이에게 다가가면 되겠지. 이제 곧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되면 태영이의 상대도 민망하지 않겠지.
태영이가 절 따라오지 않지는…… 않겠지. 설마 거부하지는 않겠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함이 더해졌다. 은재는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찬물을 마셨다. 따뜻한 물을 마셨더니 초조함이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서둘러 태영이를 데리고 나서고 싶었다.
“좀 괜찮으십니까?”
“……네? 아, 네. 오늘 덕분에 식사 잘 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못 드신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속이 별로 좋지 못해서요.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그럼 이만 일어서실까요.”
류 전무는 마찬가지로 물을 비워 내더니 은재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은재는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류 전무는 다가와 은재의 곁에 가까이 섰다. 부축하듯 어깨를 대고 은근슬쩍 허리를 감으려 했다.
“술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류 전무는 은재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허리를 붙잡았다. 에스코트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시선과 손길로 다가와 은재를 껴안으려 했다.
“……왜 이러시는지.”
불쾌하게 허리를 움켜쥐는 손길에 은재는 차가운 물 밖으로 끌려나온 양 불현듯 정신을 차리며 걸음을 뒤로 물렸다.
“아, 아직은 안 되는군요. 오면서 방을 예약해 뒀습니다. 올라가서 마저 하시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의 체면이 있으니 여기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봤자 어차피 위로 올라갈 건데 끝까지 이러실 줄은 몰랐지만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류 전무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리를 하며 거칠게 은재의 허리를 더듬었다. 슬그머니 은재를 구석으로 몰아가며 더운 숨을 뱉었다.
어딘가 거북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얼굴에 급히 기묘한 홍조가 오르기 시작했다. 불쾌한 숨소리와 입김이 터져 나왔다.
“이런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제가 주관하는 전시회에 오셨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호감을 드러내실 줄도 몰랐고요. 그래도 놀랐습니다. 직접 호텔에 가자며 먼저 이야기할 줄은 몰랐는데. 워낙 고고하신 분이니까, 하아…….”
대놓고 류 전무의 페로몬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거부하는 은재의 손을 붙잡아 제 발정하는 페로몬을 묻혔다. 숨을 가쁘게 헐떡이며 은재를 제압하려 했다. 제 하체를 어떻게든 대고 비비려 했다.
“페로몬이 나오지 않는데도…… 하, 냄새가 너무 좋습니다. 얼마나 이렇게, 이렇게 하고 싶었는지…….”
“……놓으세요.”
“이렇게 이사님과 호텔에 와 식사를 한 알파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매번 선을 그으시는 분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하아…… 선택을 받은 거죠. 이 달콤한 페로몬을. 오메가를……. 아…….”
도대체 어떻게 이런 얼굴을 숨기고 살았는지 믿기지 않을 만큼, 류 전무는 기이한 속내를 드러내며 열을 뿜었다. 한 번도 숨을 삼킨 적 없는 사람처럼 다급히 은재의 목에 코를 박고 들이마셨다. 마구잡이로 페로몬을 쏟으며 종내에는 은재의 손을 제 바지춤에 올리기까지 했다.
은재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내며 몸을 한껏 물렸다. 류 전무가 구석에서 절 붙잡고 있어 나가기는 쉽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나서야 했다. 우선 이곳을 나가야 했다.
“여기서는 참아야 하는데…… 후, 쉽지 않네요. 너무 달콤한 향이 나서……. 근데 왜 페로몬이 나오질 않는 겁니까? 식사도 못하시고 발정이 나셔서 그렇게……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시더니. 빨리 제가 어떻게 해 주시기를 기다리신 거겠지요?”
“……류 전무님은 머릿속에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이렇게 예쁜 오메가가…… 아…… 호텔에 가자고, 후, 미치겠네요. 나가죠. 올라가요. 제가 박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절절 매시며 식사도 못 하셨는데, 으응…… 제가 넣어 드리겠습니다. 아까부터 서서, 저도 도통 뭘 먹었는지…….”
“놓으세요!”
그는 거듭 은재의 목덜미에 코를 대어 숨을 삼켰다. 은재는 소름이 돋아 오르는 목을 감싸며 류 전무를 밀어냈다. 바삐 입구 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려 했다.
“……아.”
하지만 싸구려 같은 열성 알파의 페로몬 때문인지 배가 아려 왔다. 전에 없이 배 속에 든 것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은재는 배를 감싸며 조금 더 걸었다. 볼 것 없이 크기만 한 방을 나서려 문고리를 붙잡았다.
“아!”
그러나 류 전무가 다가와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이런 곳에서 마치 당장 은재를 패대기쳐 벗길 것처럼 위협적으로 다가와 강제로 은재를 끌어안았다.
은재는 크게 발버둥을 쳤다. 발로 류 전무의 정강이를 까 바닥으로 쓰러뜨리곤 문을 향해 기었다. 그 와중에도 방 안에 가득 찬 페로몬에 숨이 막히고 욕지기가 치솟았다. 머리가 띵해지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현기증이 일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굳이 이렇게, 앙탈을 부리지 않으셔도…… 후, 비싼 값을 냈다는 건 제가 꼭 붙여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어차피 뒤는 다 젖으셨을 텐데…… 아, 상상만 해도 좋네요.”
“……노, 놔!”
“이렇게, 좋아하실 줄 알았다면 일찍 올 걸……. 빨리 페로몬을 풀어 보세요. 이 귀한 우성 오메가를, 민 회장만 맛봤다는 그 오메가를 좀, 저도 먹어 보게……. 하아…….”
누가 좀, 밖에 누가 좀……. 이 정도로 페로몬이 나왔으면 밖에서도 느꼈을 법한데,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듯 보였다. 보통 돈 많은 알파들은 그렇게 제 힘을 쓰곤 하니까. 그저 그런 일 중에 하나라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이제 류 전무는 완전히 맛이 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볼품없이 넘어져 부딪친 턱이 아프지도 않은지 실실 웃으며 다가와 은재의 허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재킷을 뜯어 버리고 벨트를 강제로 풀며 옷 사이에 손을 넣으려 했다.
은재가 희게 질려 경련하며 류 전무를 발로 찼다. 있는 힘을 다해 공격을 하려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류 전무는 밀려났다가도 실실 웃으며 다가와 은재의 손을 붙잡아 쥐었다. 옷을 찢어 내고 더한 페로몬을 풀며 제 발기한 것을 가져다 대고 비비려 했다. 닿는 대로 은재를 바닥에 짓누르며 그 위를 타고 올랐다. 더러운 타액을 줄줄 흘리며 제 뺨을 비벼 왔다.
그 요란한 몸싸움 때문에 은재의 가슴 속에 들어 있던 물체도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은재는 가까스로 류 전무를 밀쳐 내고 그것을 손에 쥐어 내리쳤다.
“아악!”
문진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류 전무가 이마를 붙잡으며 욕을 거칠게 씹었다. 피가 한쪽 얼굴에 흘러내려 더 기이해진 얼굴로 다가와 억세게 은재의 목을 움켜쥐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목이 조여졌다.
“이 씨발 새끼가.”
그때 문이 쾅! 굉음과 함께 열렸다. 반쯤 부서지는 듯한 소리, 차가운 공기와 함께 들어선 커다란 인영이 류 전무를 밀어냈다. 그의 목덜미를 쥐고 벽으로 몰아붙이며 곧장 주먹을 날렸다.
듣기 버거운 소리와 뒤엉키는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무언가가 격하게 터지는 소리와 억눌린 비명이 불협화음을 이루어다.
뒤늦게야 숨죽인 직원들과 지배인이 다가와 방 안의 상황을 파악하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절제된 소란과 혼란이 공간에 불쑥 끼얹어졌다.
“지금, 누구를……!”
이사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 비서가 놀라 들어와 은재를 일으켜 세웠다. 재킷을 벗어 흐트러진 차림을 가려 주곤 애써 정신을 차리려는 은재를 보호하려 했다.
“……태영아.”
다가오는 그림자에 놀랐던 은재는 강 비서의 얼굴을 한번 확인하고는, 그의 팔을 붙잡으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한숨처럼 입에 가득 고인 태영의 이름을 불렀다.
“……태영아, 그만.”
그럼에도 태영은 은재의 말을 듣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다. 이미 얼굴이 퉁퉁 부어 피투성이가 된 류 전무의 얼굴을 때리고 또 때렸다.
이제 류 전무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바닥으로 주르륵 흘러내리는데도, 멱살을 잡고 놓지 않으며 더욱 거세게 주먹을 휘둘렀다.
가시지 않은 페로몬 위에 비릿한 피 냄새가 겹쳤다. 널따란 공간에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붉은 액체가 퍼억! 튀었다. 은재는 강 비서의 팔을 조금 더 세게 쥐며 있는 힘을 모두 짜내어 태영을 불렀다.
“태영아……!”
그 소리에 태영이 멈칫, 은재를 돌아보았다.
“……그만해, 태영아.”
“…….”
“나 괜찮아. 이제 가자.”
“…….”
“그냥, 가자…… 태영아.”
은재는 어지러움을 참으며 태영에게 몸을 돌렸다. 강 비서도, 태영도 놀라 손을 뻗었으나 은재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발을 움직였다.
“너랑 같이 있던 사람은?”
한 발, 겨우 한 발을 움직이자 태영이 성큼 다가와 은재를 끌어안았다. 제 코트를 은재의 어깨에 걸쳐 주고 여미며 재차 은재를 강하게 조여 안았다.
사납게 달아올랐던 숨을 억누르며 평소와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갔어요.”
“……그래? 잘 보냈어?”
“……네. 잘 보냈어요.”
그렇지만 자꾸만 거친 숨이 토해졌다. 태영은 제 품에 안겨 있는 은재를 계속해서 당겨 안았다. 은재는 불안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태영의 등을 쓸어내렸다. 잔뜩 나른한 숨을 뱉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손 다치면 어쩌려고……. 은재가 나직이 말하자 태영은 다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고개를 저으며 떨리는 은재의 등을 고쳐 안았다.
“내가…….”
“…….”
“여기에…… 온 이유가 있었는데.”
주변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보지도 못하고 은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쩐지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남은 페로몬 때문인지, 아니면 태영의 손에 묻은 피 냄새 때문인지…….
그래서 크게 숨을 삼키자 태영이 조바심이 나는 듯한 몸짓으로 은재에게 안겼다. 은재는 옅게 웃으며 태영을 더욱 끌어안았다. 이제 정말 남은 모든 힘을 짜내어 태영을 안았다.
제 소년을, 제 알파를 제 품에 숨기듯 안아 주었다.
“너를 보려고 왔는데…….”
태영은 흔들리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은재의 얼굴을 마주하며 눈썹을 구기곤 마른침을 삼켰다.
“너를 데리러……. 아…….”
은재는 무언가가 싸늘하게 다리 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저 열성 알파의 페로몬에 못 이긴 뒤가 음란한 물을 흘리는 걸까. 그렇게 구역질이 나고 끔찍했어도 오메가의 몸은…….
저도 모르게 은재가 고개를 떨어뜨리자 강 비서와 태영의 시선이 동시에 아래를 향했다.
몸에서 나오는 액체라곤 그것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강 비서님.”
“…….”
“차 가져와요. 빨리!”
태영은 다급히 은재의 떨어지는 시선을 붙잡아 제 가슴에 파묻었다.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하며 거세게 끌어안아 사나운 음성을 뱉었다. 혹여나 껴안은 틈새로 은재가 빠져나갈까 움켜쥐며 온몸으로 붙잡았다.
강 비서가 다급히 달려 나갔다. 하지만 은재는 이미 본 후였다.
제가 선 곳 주변으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불길한 색의 피 웅덩이였다.
* * *
제한된 몇 명의 인원으로만 구성된 의료진은 모두가 정신없고 바빴다. 미리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최 박사가 급히 수술실로 향했고, 태영은 피투성이가 된 손을 한 채 허망하게 수술실 문 앞에 멈춰 섰다.
“…….”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머리가 새하얗게 굳었다. 오늘, 은재가 절 데리러 올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이 되기 전까지 내내 조바심을 내며 은근슬쩍 제 주변을 맴돌던 은재를, 그가 다가와 제 손을 잡고 그 자리에서 일으켜 주기를 기다렸는데.
“……도련님.”
비슷한 몰골의 강 비서가 태영의 뒤에서 한숨처럼 그를 불렀다. 그런데도 태영은 한참이나 불 켜진 수술실 글자만 바라보았다.
“……기사 막으세요.”
“…….”
“오늘 일…… 새어 나가지 않게. 그리고 그 개새끼는 연락 오면 저한테 알려 주시고요.”
“……못 할 겁니다.”
“그래도 모르니까요. 애초부터 염치를 아는 새끼라면 그런 짓은 안 했을 테니까.”
태영은 손에 들린 문진을 문지르다 짙게 묻어나는 피 냄새에 짧은 숨을 토해냈다. 뭐부터 확인해야 할지, 무슨 일부터 해야 할지…….
“……알고 계셨죠.”
“…….”
“얼마나 됐습니까?”
“확인하신 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으셨습니다.”
“…….”
최 박사는 은재를 보자마자 경악하며 횡설수설 말했다. 아이와 은재. 둘 중 하나를 살려야 할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태영은 정신없이 은재의 이름을 말했다. 그를 살려야 한다고 했다.
그 폭풍이 지나고 나서야 은재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재를 홀로 수술대 위로 보내고 난 후에야.
아이를…… 가졌다고.
“……뭘 어디까지 그렇게 혼자 하시려고.”
나한테, 각인을 하셨다고.
나 때문에. 내가 발현하던 날, 그 발현열 때문에.
은재가 쏟아낸 피가 아직도 가득히 손에 묻어 있었다. 이미 말라붙었는데도,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이 손에 선연히 남은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미친 새끼. 그것도 모르고. 그래서 더…… 더 무서워하는 줄도 모르고.
나 때문에, 나한테 한 각인으로 그렇게 고생을 하신 건데 난 그렇게…….
“가서…… 씻고 일 보세요.”
“여기 계시려고 그러십니까?”
“있어야죠. 일도 누군가는 해야 하고.”
강 비서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태영은 그제야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가세요. 기사 터지기 시작하면 곤란해요.”
“……금방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네.”
“윤 비서를 대신 두고 가겠습니다. 이곳은 맡기시고 도련님도 씻고 오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어서 가세요.”
점잖은 척 걷던 강 비서는 결국 뛰듯이 병원을 나섰다. 그 자리를 교대하며 다가온 윤 비서는 묵묵히 태영의 곁을 지켰다.
태영은 한참 수술실 밖 간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실내와 달리, 앰뷸런스의 붉은 조명과 사이렌 소리가 섞인 밖은 믿을 수 없이 요란했다.
로망스(Romance)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