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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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며칠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스포츠 소식 대신 새로운 연예계 소식으로 덮여 있었다. 잠잠할 일 없이 요란한 소식들로 하루하루가 부쩍 떠들썩했다. 은재가 조사를 받았던 것도 아무렇지 않은 그 어느 날의 일과로 저물었다.

검찰 조사를 다녀온 후로 며칠이 더 흘렀지만 은재는 아직도 병원을 찾지 않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설득력 없는 이유로 병원을 미루고 태영의 선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를 마음에 일주일 후로 길게 시일을 잡았는데…….

“…….”

잘하고 오겠지. 영리한 아이니까. 은재는 잠시 서재 책상에 앉아 일정이 적힌 달력을 확인했다. 아직도 수기로 직접 일정을 기록하는 편인 은재는 붉은 동그라미와 함께 남겨진 ‘태영’이라는 간단한 글씨를 평소보다 오래 보았다.

벌써 오늘이었다. 태영이 제가 등 떠민 자리에 나가는 날.

태영을 제대로 보지 못한 지도 일주일이 지난 셈이었다.

은재는 태영의 품이 문득 그립다는 생각을 흘려보내며, 어제 받았던 서류를 공연히 한번 열어 보았다. 며칠 전 받은 것이었다. 언론에 재원이 특혜를 받고 있다며 폭로 인터뷰를 한 A씨로부터.

서류 안에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저와 태영이 함께 찍혀 있는 사진. 누가 보아도 애정 행각을 하고 있는 걸 알 수 있는 사진.

그가 태영을 졸졸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면 다른 이가 건넨 게 분명한 사진이었다. 아마, 처음 대경의 건을 터뜨리고 나선 이가 건네준 거겠지. 대경 쪽에서 법적인 조치를 시작한 통에 본인은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

폭로자는 회사로 찾아와 덜덜 떨며 서류를 넘겼다. 이건 터뜨리지 않을 테니 돈을 달라고, 곧 돈을 받으러 오겠다며 말하곤 부리나케 사라졌다.

돈이야 줄 순 있으나…….

……태영이가 이런 눈으로 날 보고 있었나.

“이사님. 이제 나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그 시간이 길어지자 강 비서가 조용히 다가와 노크하며 말했다. 은재는 그때서야 알 수 없는 상념에서 깨어난 듯 몸을 일으켰다.

“오늘 회의가 있었죠.”

“네. 전략부에서 주관하는 회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몇 시?”

“14시경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재단 쪽의 보고도 있을 예정이고요.”

은재는 오늘의 일정을 머릿속에 그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하나하나 느리게 뻗는 걸음마다 추위가 끼어들었다. 어느새 추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저택 안에도 찾아와 있었다.

“옷을 조금 더 두꺼운 걸 걸치시는 편이 어떨까요.”

강 비서는 부쩍 두꺼워진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은재는 1층에 다다라 강 비서를 돌아보았다.

“그렇네요.”

아직도 은재는 가을 옷을 입고 있었다. 언제나 은재에겐 가을이 긴 편이었다.

점점 사계절 중에서 가을은 짧아지고 있다는데, 왜인지 모르게 은재는 이르게 추위를 느꼈다. 그러면서 또 겨울 코트를 찾아 입는 것은 남들보다 더뎠다.

추워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추워졌다는 것을 이제 인사처럼 주고받으면서도 딱히 겨울 코트를 걸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언제나 추운 게 당연했으니까.

“얼마 전이 회장님 기일이었는데.”

“지금은 겨울이에요.”

문득 낮은 음성이 귀 옆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어깨에 얹힌 코트에 은재는 굳어져 잠시 뒤에야 그를 돌아볼 수 있었다.

“몸 챙기시라고 했잖아요.”

태영은 평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저도 모르게 태영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던 은재는 조금씩 달아오르는 귓불을 숨기며 코트를 당겼다.

“일찍 나가네.”

“일이 있어서 처리하고 가 보려고요.”

“오늘 일정 몇 시인지 알지.”

태영이 언뜻 미소 같은 것을 내보였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나 웃음소리는 나지 않았다. 은재는 그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잘 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언뜻 보면 이전과 다를 바가 없지만…….

모든 것이 엇비슷했다. 그저 어둠 속에서, 일주일 전 그 어둠 속에서 느꼈던 기이한 열망과 열기는 존재한 적도 없다는 듯 사라져 있었다. 다시 날이 개자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흔적도 없이 산화했다.

태영이 지녔던 열기 또한 그랬다.

손등에 입술을 내리는 그 행동. 언젠가와 비슷한 행동이지만 태영의 몸짓에서, 그의 시선과 손에 닿는 접촉에서 알 수 있었다.

차츰 관계가 변해 간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제가 원했던 방식으로, 이상적으로 여긴 그 모습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닿았던 곳에서도 열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이게 올바른 상황이 아닌가.

은재는 잠시 선 채로 태영이 먼저 나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른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짧게 묵례를 하고, 긴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차에 오르는 모습. 매끄럽게 정원을 돌아 나서는 덩치 큰 검은 SUV까지.

“잘 컸네요.”

키운 게 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은재는 태영을 보면 뿌듯했다. 언제나 태영에게 해 주지 못한 것이 떠올랐고, 그를 영국에 보냈던 때, 민 회장과 자신…….

“출발하죠.”

복잡하게 뒤엉키는 머리에 은재가 코트를 더 당기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사용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차에 올랐다.

조금 전 지나간 차보다 비교적 느릿하게 움직인 차가 정원을 돌아 빠져나갔다.

“…….”

이사실에 들어선 은재는 평소보다 더 묵직하게 느껴지는 코트를 걸어 두고 커피를 마시며 화면을 뚫어져라 보았다. 오늘 할 일이, 오전 중에 결재하고 확인해야 할 것들이 한편에 쌓여가는 데도 손은 그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음. 은재는 커피 잔의 테두리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화면 속 기사를 읽었다.

[재원 문화 재단]

기사 맨 앞머리에 적혀 있는 글씨는 그것이었다. 태영이 맡고 있는 그 일.

분명 자리에 앉고 서류를 잠시간 보았던 것 같은데 문득 태영의 일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느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태영과 관련한 것에서 자꾸만 그 더딘 속도를 발견할 때마다 은재는 멀미 같은 것을 느꼈다.

우스운 부채감이었다.

그래도…….

은재는 하염없이 태영의 기사를 읽었다. 꽤 이전부터 화제였던 재단의 소식을 접하고 그간 재단에서 주관했던 사업을 확인했다. 제법 튼실하게 규모를 키워 나간 재단의 연혁을 역순으로 확인하며 입술을 문질렀다.

이제야 모든 것이 원래대로, 그렇게 바라던 대로 되어 가고 있는데. 느껴지는 이 기분의 정체는 아직도 모호했다.

은재는 애써 그 기분에 깊게 빠지지 않으려 하며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서류를 몇 번이고 되짚어 읽었다. 이런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종내에는 손가락으로 줄 하나하나를 따라 그어 가며 읽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버티던 은재는 결국 한 시간쯤이 지났을 무렵, 자리에서 일어섰다. 습관처럼 창가로 다가가 담배를 물다 그마저도 하지 못하고 부러뜨려버렸다.

흐린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이른 첫눈이었다.

“신화역은 규모가 크고 지하로도 깊어 충분히 설계하기가 괜찮습니다. 시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12, 14번 통로를 열어 놓고 1번과 3번, 5번을 연결하는 공사를 먼저 진행할 계획입니다. 인허가 작업이 진행 중이고, 외부 디자인은 싱가포르 지점을 설계했던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준비 중입니다.”

“…….”

“……그, 지하 3층까지 모두 트는 방향으로 생각 중입니다. 지하철과 바로 맞닿아 이용할 수 있고, 또 인근 인프라도…….”

자신 있게 내후년 상반기 기획에 대해 브리핑하던 남자가 아무런 반응이 없는 은재를 보며 목을 가다듬었다.

은재는 좋은 상사였다. 기획의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해 부담스럽지 않게 의견을 전했다. 평사원의 의견 또한 잘 수렴했고, 권위 의식 또한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민 회장과 은재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던 직원들은 자연스레 시간이 지나며 그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외부에서 받는 시선과 달리 내부에서는 그를 모두가 신뢰하고 존경했다.

당연히 회의 때도 무시를 하거나 무례하게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행여나 자신도 모르는 몰상식한 의견이 튀어나와도 적절하게 반응하는 상사였다.

그래서…… 이 낯선 반응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제 직속 상사와 강 비서의 눈치를 살폈다.

“현재 입점 예정된 매장들의 목록입니다. 신화역 백화점은 본격적인 명품 프리미어 관은 아니지만 이동이 많고,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역이라 괜찮을 거라고 이사님의 말씀 전하면서 계약한 것들입니다.”

눈치 좋게 이 부장이 말을 붙이자 은재가 고개를 들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제야 제가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고 허튼 생각에 빠져 있었음을 알았다.

“……아, 죄송합니다. 오늘 컨디션이 별로 좋지가 않네요.”

뒤늦게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서류를 대강 넘겨 확인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인허가를 기다리면서 기초 작업하면 되겠네요. 시공사는?”

“이전처럼…….”

은재의 시선을 받은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소리가 들어온 그대로 다시 빠져나가는 것 같았지만, 은재는 그 흩어지는 모래알들을 어떻게든 붙잡으며 문장을 만들었다. 평소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대답하고, 물으며 간신히 회의를 마무리했다.

덕분에 회의 하나를 끝냈을 뿐인데 꽤 많은 기력이 소진되어 있었다. 숨을 삼키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사님. 차라리 일찍 들어가시는 편이 어떠실까요.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저 꽃, 이제 치워야겠네요.”

회의를 끝내고, 사람들을 내보낸 은재는 말라붙은 화병 속 꽃을 발견했다. 강 비서도 그 화병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안 올 테니까, 그냥 버리면 됩니다.”

“…….”

“그간 애쓰셨어요.”

말라붙은 꽃을 보고 나서야 은재는 미미하던 확신을 굳혔다. 이건 태영이 보내는 꽃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어디서 오는지 몰랐는데, 태영이 다시 한국에 들어온 순간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그냥…… 정확한 근거 없이 느껴지는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사소한 제 꽃 취향을 알고 보낼 수 있는 사람은 태영밖에 없었다.

“……저, 이사님.”

은재는 그제야 꽃에서 시선을 떼고 강 비서를 돌아보았다. 그는 다분히 면구스러움이 묻은 얼굴로 테이블 위에 있던 서류 봉투를 챙겨 들었다. 평범한 봉투였지만 은재는 뒷덜미를 조이는 듯한 기분에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사진. 자신과 태영의…… 사진.

또 사진이 배달된 건가.

“서 기자는 오늘 오전 구속되었습니다. 폭로자의 거취는 완전히 확보했고요. 바로 정리할까요.”

“뭐라고 합니까? 그 폭로자.”

“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뵈었으면 한다고요.”

“강 비서가 나가 봐요. 뭐라고 하는지 궁금하네.”

“……이사님. 위험한 인물입니다. 굳이 그렇게 여지를 주실 필요 없습니다.”

“정신을 팔 게 좀 필요해서.”

“…….”

“태영이 사진이…… 더 있으면 안 되기도 하고.”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로 받는 사진에 이전보다 조금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은재는 모험을 택했다. 요즘 왜인지 생각이 매끄럽게 굴러가지 않으니 이런 문제에서도 더 신중하게 굴어야겠다는 어쭙잖은 결론이었다. 신중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강 비서는 더 이상 그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태영이 지난번에 했던 말이 불쑥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했고…… 그저 조용히 당분간 경호를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저택으로 모실까요.”

“네, 그러죠. 아무래도 일찍 들어가 봐야겠네요.”

다행히 오늘 잡혔던 회의들은 조금 전의 것으로 끝이었다. 은재는 그 점에 안도하듯 숨을 고르며 코트를 챙겼다.

하루 새에 더욱 건조해진 공기는 깊게 삼킬 때면 폐를 얼릴 듯 차갑게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은재는 제가 원래 이렇게나 생각이 많았나, 생각하며 차에 올랐다.

저택은 고요했다. 정 실장은 평소처럼 저택에서의 은재의 일을 도왔고, 저택을 나설 때와 달리 곳곳에 가득 훈기를 넣어 놓았다.

두꺼운 코트를 입지 않아도 따듯했다. 그 따듯함에 기대어 은재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요 근래 여러모로 속이 좋지 않았는데, 오늘은 평소의 절반 이상을 먹었다.

식후엔 언제나 그랬듯이 커피가 놓였지만, 그것은 사양했다.

담배도 하지 못했다.

그냥 서재에 앉아 책을 읽고 못 본 서류를 보았다. 본능처럼 태영의 기사를 보았다가 달력을 보고 최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료 예약을 이틀 후로 잡았다. 그러고도 일정을 확인했다. 수술을 하면, 그래도 하루 정도는 쉬어야 할 테니까…….

어딘가에서 버석버석 굴러다니는 낙엽 소리 같은 것이 들렸지만 은재는 꿋꿋이 앉아 책을 넘겼다. 이제는 익숙해진 복통에 습관처럼 손을 올리고 문지르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차량의 그르렁거리는 숨소리가 불쑥 가까워졌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지 차를 안쪽에 대놓고도 한참 서 있던 태영이 느릿하게 전실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한 발, 한 발……. 느린 걸음이 이어졌다. 은재는 책을 소리 없이 덮고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조명을 조절해 사위를 조금 더 어둡게 만들었다.

계단을 오르는 걸음은 주저도 없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서야 은재는 눅진해진 어둠 속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1시 38분. 약속은 7시였으니…….

……잘하고 왔나 보네. 은재는 그럼에도 잠시간 소파에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

“……아.”

소리를 죽여 가며 계단을 내려왔는데, 보람도 없이 방에서 나오던 태영과 마주쳤다.

무심한 얼굴로 머리칼을 넘기던 태영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거리도 좁히지 않고 인사하곤 그대로 멈춰 섰다.

“……오늘 어땠어.”

은재는 순간 손을 말아 쥐며 태영을 올려다보았다. 제 도리를 해야 했다.

“괜찮았어요. 상대도 점잖고요.”

“첼리스트라고 들었어.”

“네. 그래서 그런지 손이 예쁘더라고요.”

“…….”

“다음에 한 번 더 보기로 했어요.”

권태로운 기운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풀어헤친 태영은 당장 달려들어 은재의 입술을 물어뜯고, 옷을 들어 올리며 척추를 만질 것같이 아슬아슬해 보였으나……. 얼마간의 거리를 둔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태영에게서 달콤한 오메가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 가깝게 있었는지 자연스러운 페로몬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제 품에 딱 맞는 오메가와 다정한 일상을 보내는 태영. 특유의 세심함으로 제 사람을 돌보는 태영.

“……그래. 잘 맞는 것 같아 다행이네.”

“네. 그러고 난 뒤에 같이 봬요. 약혼식은 천천히 해도 되니까요.”

태영은 평소 은재에게 내보이던 눈빛이 아닌 무감한 눈빛으로 짧게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먼저 내려가세요.”

은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넓은 계단은 굳이 한 사람만 내려갈 필요가 없는데도 홀로 내려와 복도를 걸었다.

적요한 바람 소리와 함께 방에 들어설 때까지 그렇게 은재는 계속 혼자였다.

* * *

다음 날은 태영을 볼 수 없었다. 그다음 날도 그랬다.

예전 그 언젠가가 떠오를 정도였다. 은재가 아무리 애를 써 봤자 태영을 볼 수 없던 그때.

그래도 그때보다 은재는 초연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니 태영의 반응이야 무엇이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쉽게 적응되지 않는 간극이었지만 어쨌든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때로 보호자와 연인의 경계가 어디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었다. 단 한 번도 태영의 연인인 적은 없었지만, 돌아보니 그와 비슷한 시절을 보냈던 것도 같았다.

보호자도…… 제 아이가 언제 들어오고 언제 나가는지는 알겠지. 아닌가. 난 그걸 물을 자격이 없나. 허탈하게 웃은 은재는 정 실장에게 당분간 태영이 들어오지 못한다 말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고 조금 더 웃었다.

어쩔 수 없겠지. 이러한 상황을 만든 건 저였으니까. 이 정도면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 수도 있었다.

“병원에 들렀다가 회사로 가도록 하죠.”

“네. 이사님.”

최 박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이제 거리를 두고 은재를 쫓아다니던 이들도 사라졌다. 대경 건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태영과 저의 사이를 두고 쉽게 떨어져 나갈 것 같지는 않았는데.

어제 손의형 검사에게도 연락을 받았다. 더 이상 오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이 건은 정리하겠다고. 이전 인터뷰를 냈던 폭로자와도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혐의가 없음에 도달했다고. 오늘 중으로 정정 기사가 나갈 거라 대신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했다.

고맙다고 인사는 했지만 약간은 찝찝했다.

어제, 언론에 거짓 인터뷰를 했던 사람이 만나기를 원했던 약속 당일이었다. 강 비서가 대신 그 자리에 나섰으나 그의 머리카락도 볼 수 없었다.

제일 처음 기사를 터뜨렸던 기자는 얼마 전까지 구속되어 있던 상태로 모든 팔다리가 잘린 상태나 다름없었다. 출국도 불가능했고, 다시 일을 얻어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지극히 낮았다.

그런데 이렇게 일이 다 정리가 된다…….

기자는 분명 몸을 사리는 이가 아니었다. 폭로자를 시켜 사진을 보내고, 장난질을 시도했던 사람이었다. 검찰 조사를 받는다고 해서 물러날 사람이 아닐 텐데.

강 비서가 알아서 처리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혹시…… 정말 태영이가.

태영이 곁에 없어서인지 오히려 문득 태영의 흔적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꽃에서 느꼈던 것처럼 어렴풋이 느껴지는 확신들.

이 일 역시…….

핸드폰으로 익숙한 번호가 떴다. 여러 생각에 잠겨 있던 은재는 잠시 꽉 막힌 도로 상황을 확인하며 전화에 응답했다.

“네.”

―이사님. 여기 영주 보육원입니다.

원장은 꽤나 달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 새로 보내 주신 물건들 잘 받았다고 연락드리려고요. 한 대표님이 직접 주고 가셨지만, 그래도 이사님께 말씀드리는 게 예의인 것 같아서요.

“……물건이요?”

―네. 아, 모르셨나요? 겨울 되면서 아이들 옷이 조금 부족했거든요. 늘 잘 보관해도 애들 옷은 금방 해져서요. 그런데 이번에 한 대표님이 옷하고 아이들 먹을 걸 잔뜩 가지고 오셨어요. 이사님이 보내신 거라고 해서 당연히 알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

보육원에 필요한 것들을 보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요즘엔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실천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 대표가 알아서 일을 처리했나 보네요. 전 생각만 하고 있었는걸요.”

―어쨌든요. 또 들러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 주셔서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어요. 또 이사님을 찾기도 했고요.

정돈되어 있는 손톱 끝을 괜히 차체에 문질렀다. 절로 눈앞에 장면이 그려지는 듯했다. 아이들과 무람없이 잘 지내는 태영. 저 대신 일을 처리하며 제가 보냈다고 말하는 태영. 절 찾는 아이들의 물음에 아무렇지 않게 둘러대는 태영.

원장은 간단하게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늘어놓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어느새 차도 멈춰 있었다. 은재는 다정했던 그 날의 광경을 떠올리며 불쑥 뜨거워지는 가슴 한편을 지그시 눌렀다.

그 열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으슥한 병원의 통로가 눈앞에 서 있었다.

“……네, 이제 가능하시겠네요. 안정적으로 수술을 할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언제 들러도 이 목적을 위해 병원을 찾는 일은 유쾌하지 않았다. 은재는 자리에 앉으며 초음파 사진을 화면에 띄우는 듯한 최 박사를 남의 일처럼 넘겨 보았다. 최 박사도 굳이 사진을 보여 주지 않았다.

“수술하는 것으로 확정하시는 건가요?”

“해야죠. 낳을 순 없으니.”

그럼에도 그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페로몬 이상을 오래 겪으셨고…… 그로 인해 배아가 초기에 성장이 느린 건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무사히 자라 이정도 크기라는 건 아마 알파가 되겠네요.”

“태어난다면 말이죠.”

“……네. 그렇죠.”

떨떠름하게 목을 가다듬은 최 박사는 일정을 확인하는 척 마우스를 움직였다. 휠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창밖에서 덜컹, 거친 바람이 짧게 불어왔다.

“수술하실 경우에 감당하셔야 할 것들은 기억하고 계십니까?”

“쉽게 잊기 힘든 부작용인 걸로 기억하는데요. 페로몬을 잃을 수 있고, 다시 아이를 갖지 못할 수 있고……. 또 있습니까?”

“히트 사이클 증상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겁니다. 수술 전에는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으로 진정하실 수 있었겠지만, 후에는 그러지도 못하실 거고요.”

히트 사이클이 이어지는 일주일 동안 괴로움과 좀처럼 해소되지 않은 고통 같은 열기를 오롯이 느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죠.”

그렇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럼 날짜를 잡겠습니다. 언제가 편하신가요.”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수술 자체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2, 3일 정도는 휴식을 취하시는 편이 좋고요. 수술 후에 무리하시면 회복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다음 주로 하죠.”

은재는 고민 없이 미리 생각해 온 날짜를 말했다.

“조금 더 이르게는 어려우십니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는 듯 최 박사가 뜸을 들였다.

“사실…… 이대로 가다간 유산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태아가 제법 큰데 페로몬 불균형이 심한 상태라서요. 알파의 페로몬이 없으면 임신 지속이 어렵습니다. 지금은 몸에 문제가 있는 열성 오메가가 임신한 상태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어차피 수술을 할 건데요.”

“결과는 같더라도 몸이 더 상하게 됩니다. 후유증도 크고요. 안정기에 들어섰으니 바로 수술 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하지만 앞당기기엔 애매했다. 여러 일정이 꽉 차 있었다.

차라리 알파 페로몬이라도 충분히 공급되면 나을 텐데……. 최 박사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황에 그저 초음파 사진을 보기만 했다.

“그럼 그 전까지 최대한 무리하지 마시고 쉬셔야 합니다. 수술 자체는 어려울 거 없으니 편하게 오시면 되고요.”

“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왜 그렇게 오래 품고 있었나. 굳이 담배를 참지 않아도 되었는데. 작게 실소하듯 웃으며 은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건강하긴 한가요.”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제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을 막지 못했다. 말을 토하듯 뱉고 나서도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셨는데.”

최 박사는 잠시 고심했다.

“페로몬 상태가 불안정한 거에 비하면 태아는 건강합니다.”

“…….”

“많이 힘드실 것 같은데…… 태아에 비해 아기집이 약한 편입니다. 페로몬이 오래 공급되지 않아서 더 작은 것도 있고요. 그래도 모든 것이 정상입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입덧 증상도 있으실 텐데요.”

입덧이었구나. 다른 알파들의 페로몬이 여전히 버겁고 오심이 치미는 것이, 각인과 더불어 일어난 증상이었구나.

“오히려 이사님의 건강을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말씀 드렸지만 수술 날까지 건강을 유지하셔야 감당하실 수 있습니다. 유산까지 가는 경우는 어떻게든 피하셔야 합니다.”

“그럼 그날 뵙죠.”

은재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 박사는 주저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수술 날짜를 잡고 이런 말씀 드리기는 그렇지만, 태아는 자신의 존재를 알기 전 그런 실수도 넘어가 줍니다. 이상한 일이죠.”

“…….”

“그것 때문에 유산의 위험성이 생긴 건 아닙니다. 이사님의 잘못도 아니고요.”

은재는 뒤를 돌다 말고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최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서 복도 끝까지 나가 은재를 배웅했다. 마지막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가진 채,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병원에서 회사까지는 멀지 않았다. 어중간한 시간이라 은재는 더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제대로 수술 날짜를 잡고 나왔음에도 별다른 기분이 들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하다 보니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1층 로비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보안을 위해 서 있는 경호원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고 그를 유심히 주시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데스크에 서 있는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며 차분히 기다렸다.

“저, 민은재 이사님을 찾아왔습니다만.”

“미리 약속되어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재원 문화 재단 한 대표님 소개로 온 거라서요. 그렇게 말하면 아실 거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우연찮게 그 시간 로비를 지나던 은재는 태영의 이름에 여자를 돌아보았다. 말을 듣고 보니 얼핏 안면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시죠?”

은재는 직접 다가가 물었다. 동시에 강 비서를 비롯한 가드들이 조금 더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안 그래도 이제 겨우 소문들과 기자들이 가신 무렵이었다. 지독한 이들은 언제든 위장하여 다가올 수 있었다. 심지어 폭로자가 회사를 드나들었으니…….

“조한미라고 합니다. 한태영 대표님 소개로 왔습니다만……. 혹시 이사님이신가요?”

“네. 제가 민은재입니다.”

“한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하시면 아실 거라고 하셨거든요.”

조한미. 은재가 현재로서는 제일 관심 갖고 있는 작가였다. 그의 초기작을 구매해 선물했고, 또 소장하고 있으며 지금 열리고 있는 전시회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누가 보아도 귀티가 나는 얼굴과 우아한 분위기에 곧장 은재를 알아보고 작게 미소를 걸쳤다.

“이전에 제 작품 사 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제가 꾸준히 작업을 할 수 있었고요. 우연찮게 한 대표님과 연이 닿아서 이렇게 뵙게 되었네요.”

언젠가 얼핏 기사로 접했던 그의 사진이 눈앞의 얼굴과 겹쳤다. 은재는 강 비서에게 가볍게 눈짓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짧게 악수가 이어졌다.

“올라가시죠. 긴 이야기는 올라가서 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조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재는 조한미와 함께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 조용히 숨을 골랐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혹시 한 대표에게는 언제 이런 연락을 받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네. 지난주였어요. 전시회가 곧 마무리가 되어서요. 조금씩 작업도 하면서 여러 연락을 받고 있었는데 한 대표님이 직접 연락을 주셨더라고요. 어떻게 제 연락처를 아셨는지…… 꽤 오래 찾으셨다고 하셨어요.”

“지난주…….”

이미 선을 보기로 확정한 날이었다. 선 자리를 고작 며칠 앞두고 조한미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둘의 관계는 이미 어떤 지점을 지나 더한 추위를 느끼고 있던 때였는데도. 은재는 배인지 심장인지, 아니면 동시에 이는지 구분할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

애써 메마른 척 유지해 왔던 것에 금이 가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내는 미세한 기계음 사이로 쩍, 하며 갈라지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조한미는 꽤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했다. 굳이 대경 문화 재단과의 연을 잇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쪽에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더군다나 이렇게 직접적인 인연이라니.

덕분에 은재도 시시각각 나빠지는 컨디션과 달리 기분 좋은 미팅을 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것이었지만 긍정적인 내용으로 대화를 나눴다.

더 자세한 건 후일 또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적당히 대화를 마친 뒤, 둘 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실 이전에 한 대표님께서 민 이사님하고 함께 전시회에 오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일정이 바뀌셨는지 어렵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네.”

“그래서 오늘 자리 마련해 주신 것 같은데, 언제라도 괜찮으니 시간 되시면 와 주세요. 두 분 함께 오시는 거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조한미는 인사한 뒤 강 비서의 안내를 받아 나갔다.

널찍한 이사실에 언제나처럼 홀로 남은 순간, 은재는 다시 메아리가 되어 들리는 음성을 되새겼다.

‘저 전시회 티켓 생겼는데, 같이 가 주시면 저도 갈게요. 조한미 작가라고 아주 유명해진 작가예요, 최근에. 그 대경인가……? 민은재 이사라고 했나? 그 사람이 그림을 샀다는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 사람 안목이 그렇게 좋다던데. 제가 그 사람 꽤 좋아하거든요. 이사님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

‘보고 싶어요, 이사님.’

저에게만 들리는 그 소리가 가슴을 쓸고 지나가는 이 통증을 불러일으킨 것인지, 아니면…….

은재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가슴을 문질렀다. 숨이 가쁜 것 같아 다짜고짜 문을 열고 나서니 강 비서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재는 몸이 좋지 않아 일찍 들어가야겠다 말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럼에도 영 안색이 좋지 못했는지 비서실의 직원들이 모두 염려하며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묵묵히 눈을 감고 있던 은재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서재에 올라갔다. 아니…… 올라가려 했다.

걸음은 인식할 새도 없이 2층에 있는 곳으로 향했다. 태영의 방 옆, 태영이 은재를 위해 사들인 화구들이 있는 방.

“…….”

그곳에 묵묵히 앉은 은재는 드문드문 채워진 태영의 그림들을 보며 깊은 숨을 터뜨렸다.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이 종이 위에 새겨져 있었다.

그림이 아니라 글씨들이 태영의 종이 위에 남아 있었다. 제 이름. 그리고 늦게 들어오던 저를 기다리며 채워 넣은 보고 싶다는 글씨들.

차마 터놓지 못한 감정들이 여러 장의 종이 위에 적혀 있었다. 애정이 절로 묻어나는 글자들이 종이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절 위해 산 물건들 사이에서 절 기다리며 꾹꾹 눌러 삼킨 감정들이었다. 지난 7년을 생각할 게 아니라, 태영을 데려와 제대로 봐 주지 못한 어린 시절을 품에 안고 있을 게 아니라, 지금 저로 인해 외로워하는 아이를…….

은재는 다시 통증이 뜨거운 감정과 함께 치미는 것을 느끼며 방을 나섰다. 지금은 비어 있는 사진 앞에서 차마 걷지 못하고 주저앉아 손에 얼굴을 묻었다.

태영의 빈자리가 너무나 컸다. 제가 돌아보지 않아도 곁을 채우고 있던 태영의 빈자리가 여러 감정으로 밀려왔다.

문득 자신이 없어졌다. 태영의 앞날을 위해 제가 물러나야 하는데, 사실 제 버팀목이 되고 있던 이를 이렇게 놓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태영에게 무척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태영과 보내는 시간에 겨우 저를 드러낼 수 있었다는 것을, 그 순간에만 제가 긴장을 풀고 맘 편히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태영이 없는 시간을 도저히…….

* * *

문이 벌컥 열렸다. 밖에서 흐르고 있는 잔잔한 음악과 함께 차가운 공기가 물씬 밀려들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온 세헌은 보고 있어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 광경에 짧게 숨을 터뜨렸다.

“……너.”

은재는 술상 앞에 앉아 있었다. 여러 종류의 술을 온갖 잔에 따라 놓고 그 향에 취하려는 듯 그 가운데 묵묵히 앉아 있었다.

술잔을 함께 기울여 줄 사람 하나 없이, 고독을 씹어 먹는 듯 그저 술잔을 쥐고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 건조한 시선이 천천히 세헌을 향했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모르겠어.”

“…….”

“무슨 일인데.”

뒤늦게 달려온 세헌은 빈속을 채울 수 있는 음식들을 준비해 달라 요청하고 은재의 맞은편에 앉았다.

종종 세헌과 은재가 술을 마셨던 그 바였다. 이른 시간부터 홀로 바를 찾은 은재의 모습에 세헌의 사촌 형은 곧장 그에게 연락을 넣었다. 그 전화를 받자마자 세헌은 다급히 회사를 뛰쳐나와야 했다.

여러 종류의 음식이 나올 때까지 둘은 침묵을 지켰다. 은재는 뭘 먹어 보려는 듯 포크를 들고 음식을 뒤적이다가도, 끝내는 뭘 먹지 못하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세헌은 제가 대신 잔 하나를 들어 술을 비웠다.

“주스 없어?”

은재는 취하고 싶어 하는 얼굴과 달리 주스를 찾았다. 세헌은 담배를 입에 물다 말고 밖을 나섰다. 그리고 지금 막 짠 듯한 주스를 내려놓으며 얼어붙었다.

“……너, 설마.”

잔을 받은 은재는 술처럼 주스를 들이켰다. 순간 속이 울렁거리는 듯 느껴졌지만 가슴을 두드리며 마셨다.

차갑고 시큼한 것이 식도를 지나가고 나서야 은재가 숨을 터뜨렸다.

“무슨 일이야, 너. 빨리 말해.”

몸을 옭아매는 차가운 기운에 모든 것이 이전처럼 가라앉았다. 복잡했던 심정과 그 위로 겹쳐진 애정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던 마음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침착해졌다.

“태영이 선 봤어.”

“그래, 알아. 들었어. 그쪽에서도 마음에 들어 한다며.”

“그래? 그렇대?”

“은재야.”

“……하긴, 왜 싫어하겠어.”

시간이 지날수록 세헌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은재는 묵묵히 주스만 마셨다. 술도 마시지 못하고 이러고 청승을 떠는 제가 우스워, 살며시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피워도 되는 거야?”

“눈치가 너무 빠르네.”

“불 안 줄 거야. 피우지 마.”

담배를 문 은재가 대답 없이 빤히 세헌을 응시했다. 세헌은 담뱃갑과 라이터를 깊은 안쪽 주머니에 넣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보니까 네 페로몬도 거의 안 느껴지네. 왜 이제 알았지.”

“불 줘.”

“걘 알아?”

“몰라. 평생 모를 거야.”

“어떻게 몰라.”

“곧 수술할 거니까.”

은재는 무감한 얼굴로 세헌의 재킷을 풀었다. 가슴과 완전히 맞닿아 있는 주머니로 주저 없이 손을 뻗어 라이터를 꺼냈다.

“은재야.”

그리고 불을 당겼다. 그러나 담배에 닿지 못하고 세헌의 손에 밀려났다.

별 말 없이 은재는 다시 라이터를 열었다. 흐릿하게 올라오는 불에 담배를 대려고 할 무렵, 또다시 밀려났다.

세 번째까지 시도했던 은재는 기어코 세헌에게 손목이 잡히고 나서야 고개를 떨어뜨렸다.

“……세헌아.”

“…….”

세헌은 은재의 손목을 거세게 쥐었다. 은재는 그 악력에 신음하며 더 고개를 숙였다.

“나 태영이 좋아하는 것 같다.”

손목이 아팠다.

“……어떡하지, 나 그 아이 좋아하는 것 같아.”

그 고통에 못 이기는 척 입술에서 굴러다니는 이야기를 뱉었다. 그런데 그 말을 뱉었는데도 통증이 가시지를 않았다.

“태영이를, 남자로 좋아하는 것 같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서 눈물이 조금 새어 나왔다. 손목이 아파서. 세헌에게 붙잡힌 손목이 아파서. 말을 했는데도 고통이 가시지를 않아서.

“태영이 못 보내겠어. 못 놓겠어…….” 

“…….”

“내가 놔야…… 태영이가, 태영이가 한 노력들이 제대로 빛을 보는 걸 알면서도 못 하겠어.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자꾸 가.”

세헌은 참지 못하고 긴 한숨을 뱉었다. 은재는 열이 오르는 눈시울을 문지르려 했지만 세헌은 손목을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은재를 당겨 와 품에 안았다.

“……큰일 났네.”

그 품이 조금도 익숙하지 않았다. 여전히 손목이 아팠다.

울음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한 번도 소리 내어 운 적은 없었지만 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억누르려 해 봐도 잇새로, 꽉 다문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도저히 누를 수가 없는 감정이었다.

안타깝게 새어 나오는 소리에 세헌은 제가 대신 한숨을 뱉었다.

은재는 세헌의 옷깃을 붙잡은 채 가득 고였던 울음을 한참이나 토해 냈다.

정신을 차리니 보이는 건 천장이었다.

“일어났어?”

곁에 앉아 담배도, 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던 세헌이 다소 까칠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 그렇게 기절한 거 모르지.”

“……아.”

“울다가 갑자기 뒤로 넘어가는데…… 내가 다 기절하는 줄 알았다.”

문득 불편한 감각에 손을 들어보니 이유 모를 패치가 붙어 있었다. 은재는 붉지만 건조해진 눈으로 그것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 하자 급히 다가온 세헌이 어깨를 감싸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에 링거 뺐어. 맞고 누워 있으래. 바로 움직이면 어지럽다고.”

“…….”

“강 비서 시켜서 최 박사 불렀어. 말 새어 나갈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고마워.”

“수술 별거 아니라도 몸 상해. 그전까지 제대로 지내야 한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

“그래. 알아. 고마워.”

은재는 손등으로 이마를 덮었다. 더 이상 대화를 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침묵이 그 공간 위에 잘 짜인 이불처럼 덮였다.

“안 되겠지.”

“…….”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대화는 두서없이 시작되었다. 바로 본론이었다.

세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야 잔에 얼음과 술을 담을 뿐이었다.

“근데도 마음이 가더라.”

“…….”

“내가 태영이한테 한 짓, 다 알고 있는데 염치도 없이 태영이가 보고 싶어.”

“…….”

“등 떠밀어 유학 보내고, 알아서 들어왔는데도 중심도 못 잡아 줬어. 내 아이라곤 하지만 한 번도 키운 적 없어. 혼자 컸어. 그래서 더…… 내 아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야 죄책감 덜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은재는 세헌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손을 들어 손가락 사이로 스미는 빛을 조금 더 가렸다.

“내가 진 것들 다 주려고 했어. 민 회장님께 보답할 길은 없고, 나 때문에 생긴 소문들…… 베타 아이를 데려와서 없애고도 싶었어.”

“…….”

“어쨌든 베타니까 나보다 더 대경에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태영이가 그 자리를 잇기를 바랐어. 태영이한테 줄 때까지 버티고 있다가 줄 생각만 했어.”

“…….”

“한 번도…… 태영이의 제대로 된 보호자인 적 없었어. 필요한 역할 해 주지 못한 것도 알아. 그래 놓고 태영이가 그렇게 말할 때, 날 좋아한다고 할 때 자격이 없어서 제대로 자르지도 못했어.”

묵묵히 잔을 비운 세헌이 벽에 기대어 은재를 내려다보았다.

“선 보라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한 것도 나야. 다 알아. 이러고 있을 자격도 없어. 제대로 감정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해. 싫다는 애 등을 떠밀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 이제 그것도 못 하네. 도대체 세상 어떤 보호자가 선을 넘고 이렇게 비겁하게…….”

허탈한 숨을 터뜨린 은재가 눈꼬리를 문질렀다. 그를 주시하던 세헌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 한 번도 그런 생각 한 적 없잖아.”

“…….”

“일 부담스러워 해도, 그 자리 부담스러워해도 열심히 했어. 민 회장님 이름에 누 안 끼치려고 열심히 했고, 나중에는 꽤 잘 맞아 했어. 그 자리, 그 무게 떠넘기려고 데려온 거 아니잖아.”

옅게 배어난 물기를 닦으며 은재는 고개를 돌려 세헌을 응시했다.

“처음엔 너랑 민 회장님 소문을 생각해서 데려온 건지는 몰라도 너 최선 다했어. 너 걔 볼 때마다 보육원 시절 생각나서 끔찍해했고 괴로워했어. 근데도 꾸준히 시간 내서 태영이 돌봤다고. 네 아이라고, 민 회장님 후계라고 소개했고, 히트 사이클 보낸 후에도 그 몸으로 걔 챙겼어.”

“…….”

“걔 때문에, 걔가 발현하던 그 순간에 네가 계속 그 옆을 지키고 있어서 네 페로몬이 망가졌어.”

“…….”

“알파라면 치를 떨면서도……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이런 상황에서는 그 누구라도 너처럼 결정했을 거야. 그렇다고 받아 줄 순 없으니까.”

세헌은 오히려 은재보다 더 은재를 두둔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럴 자격이 없는 건 맞아. 내가 지금 괴로운 건 태영이를 사랑해서 그런 거니까.”

말로 뱉고 나니 차라리 나은 듯 은재가 덤덤히 고백했다.

“싫다는 애를 억지로 그 자리에 보냈잖아.”

“…….”

“태영이 감정 거부한 건 나야. 알면서도 억지로 잘라 냈어. 그러면서 뒤늦게 이러고 있고.”

은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링거를 맞으니 조금 낫다는 그런 말을 하며 미지근한 물로 목을 적셨다. 세헌은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착각인 건 아니고?”

“…….”

“네가 태영이 의지하는 거 알아. 그럴 만한 애인 것도 알고. 아닌 척하지만 섬세하고 의지할 만한 성격이라 그럴 수도 있어.”

그러나 은재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익숙한 말이네. 근데 아냐, 그거.”

“…….”

“내가 다른 사람한테 각인할 줄 알더라. 그럴 수밖에 없지. 근데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팠어. 너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모를 수가 없었어.

제가 이전에 태영에게 했던 말들을 되새기는 듯 허탈하게 웃다가도, 손으로 뺨을 문지르며 입술을 씹었다.

“순순히 인정하고,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닿았으니 인정하고 손잡았으면 태영이가 상처받지 않았을 텐데. 두렵지만 같이 해 보자고 했으면 해 줬을 텐데. 그때 잠깐의 오해가 아파서 일을 키운 거나 마찬가지야.”

“…….”

“말로 하니까 더 비겁하네.”

원하는 만큼 울지도 못해 놓고 은재는 정말 평소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아슬아슬한 구석이 있었지만, 제가 보인 비겁함과 회피를 더욱 잘 직면한 얼굴이었다.

그 눈동자가 이내 세헌을 향했다.

“도대체 너랑 태영이는 왜 그래.”

“또 뭐가.”

“나 같은 성격은 곁에 두면 피곤해. 나만 제일 힘든 줄 알아서. 나밖에 몰라. 겁도 많고.”

세헌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약 기운 때문인지 조금 취한 듯 보이는 얼굴을 세세하게 훑었다.

“지금도 내가 저질러 놓고 이러고 있잖아.”

“그래서 너 그만 좋아하라고?”

“오래됐잖아. 너도 그만해.”

“…….”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잖아. 너까지 그러지 마. 나 너랑 좋은 친구 하고 싶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은재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나한테 하는 것처럼 태영이한테 좀 해 보지 그래.”

“……그건 못하겠어.”

술 대신 주스를 따라 주며 세헌과 은재 모두 희미하게 숨을 뱉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추태인지. 정말 공중에 퍼진 술 냄새에 취하기라도 한 건지.

“그러다가 태영이가 정말 날 떠나면 어떡해.”

“…….”

“나 걔 하나 남았어. 회장님 보내고 걔 하나야. 그래서 더 무서워. 사랑이 아니었다고 언젠가 그럴까 봐. 내가 태영이 기회를 없앤 거면 안 되잖아.”

“…….”

“그래서 오해일 거라고…… 내가 계속 말했는데 막상 나는 맞는 것 같아서 무서워.”

진심이 묻어나는 고백이었다. 세헌은 몇 년 만에 처음 접한 은재의 진심에 막막함과 답답함, 그리고 약간의 서운함을 모두 느꼈다.

이 진심을 듣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 진심에 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그렇게 바랐는데. 태영이 요 근래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는지, 제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이들과 만남을 갖고 일을 하는지를 언질해 주려 했으나 세헌은 왜인지 모르게 말을 삼켰다.

도저히 이 순간만큼은,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잔인하네, 민은재. 내 앞에서 별소리 다 하고.”

“……미안.”

그래도 은재는 주스 한 잔을 꾸역꾸역 비웠다. 술 냄새 대신 상큼한 오렌지 향을 풍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하려고.”

“글쎄……. 일단 나도 한 7년 동안 있어 볼까 싶기도 하고.”

“…….”

“그냥 무릅쓰고 붙잡을지, 제대로 태영이의 행복을 빌어주는 게 나을지……. 좋아하는 건 이제 인정해야지. 겁도 좀 줄이고.”

세헌이 다가와 은재의 어깨를 붙잡았다. 은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뿌리치고 싶어 배에 손을 올려야 했다. 좀 참아 봐. 그렇게…… 속으로 말을 전했다.

동시에 세헌의 시선이 은재의 배 위로 향했다.

“수술할 거야. 걱정하지 마.”

대신 세헌이 한숨을 뱉었다.

“수술해도 넌 괜찮은 거래?”

“감수해야지.”

“나중에 태영이 알면 어쩌려고. 화낼 거야. 기분 좋을 리가 없잖아.”

“…….”

“돌아가지 마라, 은재야. 너 몸 상하면 걔가 화 안 내고 배기겠어?”

막상 일어서서 걸으니 조금 어지러워 은재는 세헌에게 더 몸을 기댔다. 차까지 세헌의 도움을 받아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오늘 일 비밀로 해.”

“누구한테 말하겠어.”

마음속에 품은 사랑을 고백하고 나니 주변에 가득한 태영의 애정이 느껴졌다. 그렇게 자주 보내던 꽃도, 제 안부를 알리던 소포들도, 제 두려움을 감당하던 포용력 있던 애정도…….

심지어 오늘까지 닿아 왔던 애정.

비로소 감정을 깨닫게 해 주던 변함없는 애정.

“혼자 갈 수 있겠어?”

“혼자 아냐. 강 비서 있어.”

“같이 가는 게 더 낫잖아.”

“싫어.”

너무 단호한 대답에 세헌이 눈가를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은재는 흐릿하게 웃으며 머리를 시트에 기댔다.

“고마웠어.”

“…….”

“그동안 항상 고마웠어. 도움 많이 받은 거 알아.”

“……갑자기 무슨.”

“누굴 좋아한다고 생각이 들고 나니까 좀 감성적이 되네. 내가 너한테 못할 짓 한 것도 생각나고.”

세헌의 표정이 조금 더 구겨졌다. 그는 몸을 숙여 은재의 눈앞으로 다가오더니 곧 은재를 끌어안았다. 느슨하게 껴안던 품이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숨도 잇따라 터져 나왔다.

“진짜 잔인하네.”

“미안. 나 친구 너밖에 없어서.”

“……도대체 뭘 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뭐 안 해. 근데 넌 끊어 내려고.”

“…….”

“정말 친구 할 수 있을 때 연락해 줘. 기다릴게.”

은재도 양손으로 세헌을 끌어안았다. 자꾸만 단단해지는 그 손길을 오늘만큼은 용서해 주기로 하며 등을 도닥였다. 고개를 한껏 들어 세헌을 더 깊게 안아 주었다.

별다른 인사 없이 세헌을 보냈다. 그렇지만 은재는 뒤에서 절 지켜보고 있을 시선을 느끼며 배를 문질렀다.

강 비서는 차를 멈춘 후에도 잠시간 숨을 골랐다. 정원에 머무르는 인영이 보였다. 늦은 시간이라 꽤 쌀쌀할 텐데도 정원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양이었다.

그사이 먼저 은재가 차에서 내렸다. 강 비서가 서둘러 다가왔지만 은재는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 보세요.”

“괜찮으십니까?”

“네.”

요즘 부쩍 자주 듣는 그 질문에 대답하며 홀린 듯 정원으로 향했다. 태영과 마주 앉지도, 그렇다고 나란히 앉지도 않았다. 엉성하게 거리를 벌려 두고 앉았다.

서로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들은 묵묵하게 겨울바람을 맞았다. 호젓한 정원이 침묵을 함께 지켰다.

“시간이 늦었어요.”

한참 뒤 태영이 여전한 어둠 속에서 말했다.

“그리고…… 알파 페로몬이 느껴지고요.”

그래서 은재도 어둠 속에서 말했다.

“오랜만이네.”

“네.”

“한동안 집에 없더니.”

“그게 나을 것 같아서요.”

누군가의 옅은 숨소리가 희미한 입김과 함께 공중으로 사라졌다. 잠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는 것을 느끼며 은재가 물었다.

“언제 또 만나. 그 사람.”

“첼리스트요?”

“……그래. 그 사람.”

“모레요.”

술 드셨어요? 태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은재는 앉은 그 자리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그 몸짓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아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니.”

“근데 왜 그래요.”

머리가 아픈 듯 태영이 제 이마를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비틀거리시던데.”

“보였나.”

“다 보여요. 여기 오래 있으면.”

“…….”

“이사님이 날 보고 있는 것도 보이고.”

그제야 은재는 빈 허공에 놔두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태영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본능처럼 몸 안이 움찔, 조여들었다.

“모레…… H호텔에서 만나요. 저녁 8시.”

고개를 끄덕이며 점점 더 선명해지는 시선을 응시했다. 맹수의 눈동자처럼 그 안에 든 빛이 또렷이 보였다. 모레, 8시…….

“오늘 조한미 작가 만났어.”

“이야기 들었어요.”

“바빴을 텐데 언제 그것까지 챙겼어.”

“그래도요.”

이렇게 대화를 한 적은 많은데…… 숨이 전에 없이 부족했다. 충분치 않게 가슴이 부풀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거추장스럽고 구차해 은재가 손을 모았다.

“들어가세요. 추우시면.”

“……그래.”

덤덤히 대답하며 숨만 크게 삼켰다. 이제 공중에 묻어 있는 황량한 향을 맡으며, 이파리도 없어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그대로 드러내며 대답했다. 울긋불긋 아름답게도 물들었던 잎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그렇게 앉아 태영을 응시했다.

“……정말.”

결국 태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은재의 어깨에 둘러주며 손을 잡고 일으켰다.

“바로 앞인데.”

“덜덜 떨고 계셨잖아요.”

“…….”

“이 정도는 제가 이사님 알파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거니까 거부하지 마세요.”

그 정도는 아니었다는 말이 입술 위까지 올라왔지만 삼켰다. 묵묵히 절 지탱한 품과 손을 느끼며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점차 밝은 곳으로 향하니 저도 모르게 은재는 목을 붉혔다. 괜한 기분이 자꾸만 부피를 넓혔다.

“이렇게 귀가 빨개졌는데…….”

하지만 태영은 추위 때문에 그런 줄 알고 낮은 음성을 냈다. 은재는 민망해 절 붙잡은 태영의 손을 지그시 놓았다.

“손이 왜 이래요.”

그러나 태영은 눈썹을 찌푸리며 멀어지는 은재의 손을 당겨 왔다. 벌겋게 자국이 난 손목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임세헌이 이랬어요?”

“……아니야.”

세헌이 그런 게 맞기는 하지만, 그럴 의도가 있던 건 아니었다. 이런 변명도 어쭙잖은 것이지만 사정이 있었다. 놀라 절 붙잡으려다 이렇게 된 것이었다.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에 태영의 눈썹이 더욱 날 선 모양으로 구겨졌다.

“그런 거 아니야, 태영아.”

“그럼 뭔데요.”

“……그게.”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건데요. 제가 이해할 수 있어요?”

“…….”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은재가 초조해하며 입을 다물자, 태영이 끝내 숨을 터뜨렸다.

은재가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는 것과 상관없이 둘의 관계는 언제나처럼 이상한 모양으로 꼬여 갔다. 좀처럼 좁혀지지가 않았다.

“치료하세요.”

“……그래. 그래야지.”

“다른 사람이 이런 거 남기게 하지 마세요. 이사님은 피부도 약해서 자국도 오래가는데…….”

속이 상한 듯 태영이 몇 번이나 은재의 손목을 어루만지다 조심스레 놓았다.

“…….”

“…….” 

어쩌다 보니 멈춘 곳이 계단 앞이었다. 태영은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을 아픈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이제 이사님 몸 책임 좀 지세요. 다치고, 아픈 거 신경 쓰여요.”

“안 아파.”

이렇게 말을 하는 걸 보니 어린 태영이 생각나 은재가 옅게 입꼬리를 당겼다. 태영은 그럼에도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다 제 가슴께를 문질렀다.

“아파요.”

“…….”

“……아파요.”

어디가……. 혹시 어디 몸이 안 좋아진 걸까 은재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때문인지 배가 뻐근히 벌어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사이에 태영은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자리에 남은 은재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크게 숨을 골랐다. 모레 8시, H 호텔.

모레 저녁 8시, H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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