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19)

10

기사는 실리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은재가 제대로 손을 쓰기도 전에 알아서 대경의 눈치를 살피며 잘려 나간 기사였다.

그럼에도 그것은 찌라시가 되어 곳곳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하필 후원사에 대경이 있었고, 또 재원 문화 재단이 소속된 사업이었다. 정당한 과정을 거쳐 진행되고 있는 것이지만, 의심쩍은 시선이 많아진다면 사업이 파투가 나거나 법적인 절차까지 넘어갈 수 있었다.

그대로 묵과할 사안이 아니었다.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대경 측에서는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소송을 걸었다. 그리고 황급히 전화를 걸어온 김 교수의 넋두리를 들어주었다. 세헌과 류 전무, 임 대표를 비롯한 다른 후원사들에게도 연락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덤덤한 음성으로 김 교수에게 그간 진행했던 절차를 빼놓지 않고 정리해 놓으라 말했다.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대경 쪽에서는 태영을 위한 압력을 넣지 않았으니 조사가 들어와도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은재의 소문과 이 일을 엮어 생각했다. 은재와 태영이 본격적으로 화두에 올랐다.

안 그래도 이들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와중에 터진 이런 일은 소문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대경이 뒤를 봐줬다는 말은 사라져도 은재와 태영의 모호한 사이를 기이하게 보는 시선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게 사람들이 바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사업의 문제를 핑계로 태영과 은재의 묘한 관계를 수면 위로 올리는 것.

그 잿더미를 남기기 위해 괜한 것에 불이 옮겨붙은 셈이었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게 해 주네.”

임신일 거라고 진단을 받은 게 바로 어제였다. 그런데도 은재는 태영을 정리하지 못했다. 이제 태영과 잠자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이전의 보호자 관계로 돌아가자고 생각을 하면서도 눈앞의 알파에게 넘어갔다.

정답을 알고 있는 이성과 달리 마음이 앞서 움직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넘어가는 일 또한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둘러싼 모든 것이 말하고 있었다. 그 지지부진한 결정으로, 마음에 지고 만 행위로 인한 결과가 지금 눈앞에 펼쳐졌다고 말하는 듯했다.

은재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일정을 정리했다. 태영의 재단에 변호사를 대신 선임해 주도록 하며 남은 일들을 처리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앞다투어 기사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확실한 증거를 잡은 것처럼 ‘단독’이라는 글자를 달고, 또 ‘속보’라는 기사를 달고 물밀듯이 쏟아졌다.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이의 인터뷰에서 시작된 보도였다. 인터뷰 단계에서부터 이상함을 느꼈다는 고발자 A는 첫 미팅 자리에 참여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거라며 입을 열었다. 현재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재원 문화 재단 측에 소속된 작가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양해해 주고 있다며 양심선언 따위를 했다.

그러자 언론에서는 세세하게 재원 문화 재단에 대해 파헤치기 시작했다. 재단 대표로 자리하고 있는 태영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태영이 어떤 보육원을 전전했는지, 언제 저택으로 오게 되었는지, 또 어떤 학교를 졸업한 뒤 유학 생활을 했는지까지 지독하게 찾아냈다.

당연하게 영국에서의 일 또한 보도되었다. 어떤 것을 시작으로 재단이 구성되었는지, 또 최근 재단의 재무제표까지 확인하려 들었다.

김 교수는 기다렸다는 듯 반박 기사를 내보냈다. 오전 중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자료들과 정당하게 여러 군데에서 의견을 받아 검토한 의견서 또한 공개되었다.

그럼에도 인터뷰의 파장은 지속되었다.

설령 사람을 뽑는 절차가 정당했더라도 지금은 분명 이득을 보고 있을 거라고. 결국 작업에서 이득을 보는 것이 더 분명한 압력이라며 떠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온종일 기사의 뒤처리를 해야 했던 은재는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정리하자마자 이르게 저택으로 돌아왔다.

대경이 흔들리는 것은…… 은재에겐 그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대경은 곧 민 회장이었다. 지금은 제가 맡고 있었으나 민 회장의 그림자였다. 세상을 떠난 지 벌써 몇 년이 되었건만 은재는 그의 그림자를 떨치지 못했다. 이런 추문은 민 회장을 망치는 것 같았다.

저를 향한 가십은 익숙했다. 불쾌한 감상과 달리 익숙한 건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경으로 그 화살이 향하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애꿎은 민 회장의 것이 흔들리는 듯해 더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지만…… 그 불안은 의외로 오래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을 처리하고, 통화를 했으나 먼 곳에서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어 온 탓일까. 아니면 저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작은 세포의 영향일까.

금방 사라질 말도 안 되는 루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에 압도된 듯했다. 제가 정말 태영에게 감정을 품었다는 것, 그로 인한 결과들이 아직 엉성하게 남았다는 것이 더 먼저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이사님. 저 왔어요.”

애써서 고요함을 유지하려는 것이 아닌데도 그랬다. 그에 비해 조금 바쁜 하루를 보낸 듯한 태영은 예민하게 날이 선 얼굴로 돌아왔다.

1층에서 은재를 찾아 헤매다 3층까지 급박하게 올라온 듯했다. 은재는 테이블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괜찮으셨어요? 회사에 찾아가 보려고 했는데 여의치가 않아서요.”

“괜찮아. 어땠어, 오늘.”

“난리였죠. 분위기도 그렇고…… 식사는 하셨고요?”

조금씩 둘의 관계를 두고 소문이 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바쁨이었다. 아예 터져 버린 기사에 기자들이 작업실과 회사 근처에 진을 치고 있었고, 다른 연락이 되지 않도록 전화를 해댔다. 쏟아지는 연락으로 재단의 다른 업무마저 마비되었다.

이제는 개별 작업이 진행되어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느껴지는 분위기에 태영은 계속해서 주변을 살펴야 했다.덩달아 피해를 입을 재단 소속의 이들을 보호하며 기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파헤쳤다.

“곧 추모 미사야.”

은재는 차분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괜찮겠어?”

“제가 물을 말인데요.”

곧바로 이어지는 대답에 은재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정신없었을 텐데. 앞으로도 그럴 거고.”

“괜찮아요. 이사님은 앞으로 계속 출근하세요? 저택에서 하시는 건 어떠세요.”

“……음, 그럴까 해.”

“그렇게 하세요.”

원래라면 그냥 출근을 했겠지만…… 이 순간 은재는 아가 태영이를 생각했다. 곧 제 몸에서 떨어져 나갈 아가 태영이.

“이 일은 제가 처리할게요.”

“할 수 있겠어?”

“네.”

“그래, 그럼.”

왠지 모르게 배를 짚으려 했던 은재는 손을 말아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단에 소속된 사람들한테 피해 보상 잘 해 주고. 괜히 피해 입어서 걱정이네. 별 일은 없을 거야. 잘 안심시켜 줘.”

“그럴게요.”

“오늘 연락했던 변호사 일 잘해. 이전에 대경 법무팀에 있다가 독립한 사람이야. 부족한 거 없이 잘 처리할 거고.”

“네. 감사해요.”

“그리고…… 어제 했던 말 다시 해야 할 것 같아.”

천천히 은재가 찻잔에 차를 새로 옮겨 따랐다. 주전자에서 흘러나온 차가 어딘가 어울리지 않게 매끄러운 소리를 내며 찻잔에 옮겨졌다.

밖에서는 점점 더 차가워지는 바람이 창틀에 쌓이며 무르익은 가을을 증명했다. 이맘때쯤, 이들의 곁을 떠났던 민 회장을 떠올리게 했고 또 다가올 겨울과 몰아치는 소문들을 떠올리게 했다.

“이제 정리하자.”

“…….”

“언제까지 이럴 수 없잖아. 이런 기사들 나는 거 보면서 떳떳하지 못한 기분이 들어.”

태영은 묵묵히 은재가 하는 말을 지켜보았다. 스스로도 내키지 않는다는 소리를 한다는 어제보다 조금 더 표정이 사라진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당분간 그 내용만 물고 뜯겠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거야. 내가 널 데려오고, 알파로 키우고, 곁에 두고 사는 걸.”

“…….”

“그 사람들이 너랑 나를,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걸 알잖아.”

“…….”

“그래서 이런 기사도 나오는 거고. 우리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것도 맞고. 이제 그만해야지.”

숨소리도 없이 서 있던 태영은 덤덤하게 물었다.

“어떻게 하길 원하시는데요.”

“…….”

“섹스만 안 하면 되는 건가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서 있던 태영의 얼굴이 끝내 견딜 수 없다는 듯 일그러졌다.

“침대에 안 올라가면, 되나요.”

“…….”

“그럼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

그러곤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다가와 은재를 끌어안았다. 덤덤하게 내뱉던 말과 달리 열기로 가득 찬 품이 조심스럽게 은재를 조여 안았다.

약한 숨소리가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안 믿어요.”

“…….”

“저도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그런 눈으로 말하면 안 믿는다고. 이사님보다 제가 더 이사님을 잘 안다고 했잖아요.”

“……태영아.”

“분명 저랑 같은 얼굴 하고 계셨어요. 이런 일 때문에 저한테 이러실 분 아닌 거 알아요. 일부러 그렇게 안 하셔도 돼요.”

이미 가득 안겨 있는데도, 그는 조금씩 은재를 당기며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가 여기서 알겠다고 하면, 다시 이사님 침대에 안 올라가겠다고 하면 상처받는 건 이사님이에요. 이사님 상처받는 꼴 저 더 못 봐요.”

뜨거운 입술이 느릿하게 은재의 관자놀이를 누르고 뺨을 눌렀다. 은재는 본능적으로 조여드는 배와 뒤를 느끼며 입술을 씹었다. 태영의 어깨를 붙잡아 밀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어요. 제가 이사님의 곁에 서려면 이런 진통은 겪어야 해요.”

“…….”

“애초에 생각 못 하고 덤빈 거 아니에요. 그래도 이사님을 지킬 자신 있어서 덤빈 거예요. 우리가 설령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해도, 사라지는 소문 아닌 거 아시잖아요.”

은재의 얼굴 앞으로 다가온 태영은 절 피해 돌아가는 뺨을 쫓으며 닿는 곳마다 입술을 내렸다. 계속 절 거부하는 몸짓에도 그를 붙잡아 눈썹 뼈와 턱 끝, 콧대 같은 곳에 입술을 붙였다. 조금 더 끓는 숨소리를 억눌러 삼키며 다가와 이마를 맞댔다.

“한번에 그 마음 내려놓지 못하시는 거 이해해요. 이사님이 완전히 절 믿으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제 뒤에 숨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

거부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는 마음마저 절절하게 끓을 정도로 완전한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그저 몸만 몇 번 내어주면 될 거라 생각했던 마음마저 흔들린 것이겠지. 태영의 감정이 순간일 뿐이라, 착각한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바로잡지 못하고 덩달아 그 감정을 품게 되었으니까…….

“섹스가, 아직 모자랐나.”

은재는 결국 번지는 통증을 느끼며 말을 토해냈다.

“시간 더 주면…… 그럼 정리할 수 있겠어?”

그런 게 아님을 알면서도 이런 방법밖에는 알지 못했다. 태영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렇게 해야 했다. 차라리 모질게라도 굴어서 태영이 그렇게 열심히 만들어 일군 사업을, 태영의 삶을 지켜야 했다.

이 문제가 커지면, 대경보다 태영이 더 큰 위협에 휩싸이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든 태영을 지켜야…….

“……하.”

황당한 듯 숨을 뱉은 태영은 표정을 구겼다가도 풀어 내며 은재를 똑바로 직시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제가 아니라 이사님이 상처받잖아요.”

나직이 읊조리듯 말한 태영은 몸을 숙여 은재의 콧방울과 인중, 입술 위에 아예 제 입술을 짓눌렀다. 손으로 절 피하는 턱을 전보다 더 강한 힘으로 잡아 고정하며, 온 얼굴에 제 흔적을 남기려 했다.

읏, 은재는 조금 더 세게 태영을 밀어냈지만, 태영은 더욱 은재를 밀어붙였다. 잠깐이라도 절 거부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숨소리에서, 닿은 손과 열기에서 피어나는 강압을 억누르며 은재와 마주하려 했다. 코앞에서 느껴지는 떨리는 숨에 은재는 저도 모르게 다가온 입술을 씹어 버렸다. 비릿한 향이 그 입술 위로 빠르게 퍼졌다.

작게 눈썹을 구긴 태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

은재가 놀라 태영을 올려다보았다. 제법 크게 상처가 난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입술을 슬쩍 만져 본 태영의 손끝에서 붉은 피가 선연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괜찮.”

은재는 괜찮으냐고 채 묻지도 못하고 절 향한 시선에 입을 닫았다.

“원하시면 계속 밀어내세요. 전 안 물러나니까.”

“…….”

“미사 때까지 준비 잘 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태영은 서재를 벗어났다. 피를 제대로 닦아 주지도 못한 은재는 가슴이 싸하게 밀려 나가는 통증을 느끼며 그렇게 한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역시 전 비겁했다.

* * *

대경과 재원 문화 재단에 관련한 기사가 나고 대략 일주일 뒤, 민 회장의 추모 미사가 열렸다.

미사 자리엔 민 회장이 생전에 가깝게 지내던 이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매년 드리는 추모 미사인데도 올해는 조금 번잡한 기운과 함께 진행되었다. 성당이 위치한 외곽 지역의 주변 도로가 꽉 찰 정도였다.

은재는 태영과 함께 맨 앞자리에 서서 미사를 드렸다. 태영과는 처음 함께하는 미사였다. 태영이 돌아온 것은 올해의 일이니 당연한 일인데…… 민 회장을 위해 모인 이들은 그들이 나란히 선 모습을 바삐 눈으로 좇았다. 정적 속에서 미사가 진행되었음에도 미약한 어수선함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미사가 끝난 후에는 매년 일을 맡아 주는 신부님과 인사를 마치고, 또 민 회장의 손님들과도 인사를 마쳤다.

아직도 기자들은 주변에 머무르고 있었다. 무엇이라도 하나 더 부정한 증거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대경과 신사업을 엮는 기사는 나오지 못했다. 태영과 은재가 함께 외출했던 기록들만이 주요 기삿거리가 되었다.

당연한 일이었고, 또 시시한 결론이지만 피로한 일이었다. 모든 행동을 주목하며 주변을 떠도는 이들이 귀찮았다.

“민 이사.”

마지막이 되어서야 성당을 나선 임 대표는 은밀하게 은재에게 서류 하나를 넘겼다.

“늦었네. 지난번에 민 이사가 부탁한 건데 이제야 전달하네.”

“…….”

“이제는 때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서류를 열어 본 은재는 내용을 빠르게 훑고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도움이 될 거야. 아무래도 다 큰 알파를 데리고 있어서 그런 걸 테니까.”

“감사합니다.”

“첼리스트라고 들었네. 한 대표가 하는 일과도 잘 어울리고 하니 이참에 약혼을 진행하는 것도 괜찮아 보이는데.”

태영과 관련한 자리였다. 은재는 서류 속 얼굴과 태영을 함께 떠올려 보았다. 꽤 잘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아직도 기자들이 극성인가 보군.”

“서서히 줄고 있습니다.”

“처음 기사 낸 기자는.”

“처리 중입니다.”

“그래. 괜히 허튼소리 못 하게 잘하고……. 아무래도 민 이사가 누굴 좀 만나야 되지 않겠나. 평생 이렇게 살 순 없는데.”

임 대표는 대경을 향한 이런 일들이 과하다고 느꼈다. 정말 대경과 신사업 사이에 연관이 있다면 그것을 캐면 되는 일이지만, 몇몇은 그게 아니라 은재를 정조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몇 없는 오메가 총수, 그것도 눈에 띄는 오메가 대표에 관한 관심인 셈이었다. 정말 그가 제 입양아를 침대로 끌어들인 것인가, 하는 잔인한 호기심이 덧입혀지고 있었다.

은재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멀리서 태영이 다가왔다. 그는 자연스레 옆에 서 은재를 에스코트했다. 대놓고 어깨를 감싸지는 못했지만 누가 보아도 보호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원래도 날카로웠던 이목구비에 묘한 기운이 서렸고, 알파 특유의 위압감을 감추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기사가 나기 시작한 이후 부쩍 관계가 멀어진 듯 보이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임 대표는 속으로 한숨을 눌러 삼켰다.

소문이 가실 날이 아직도 멀어 보이는, 그런 그림이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은재는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계단을 올랐다. 자연스레 서재로 향하던 걸음이, 불현듯 마주한 민 회장의 사진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그 몇 걸음 뒤로 태영이 서 있었다.

“…….”

“…….”

대놓고 뒤를 쫓는 것을 은재라고 모르지 않았다.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말한 이후, 태영은 저택에서도 그를 쫓아 걸었고, 또 가끔은 바로 옆에서 걷거나 불쑥 다가와 거리를 좁히고 머리를 정리해 주며 뒤로 빠지기도 했다.

제가 곁에 항상 있다는 것을 알리는 의식적인 표현이었다.

처음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은재가 식사를 하고 있으면 다가와 자리에 앉았고, 은재의 방과 서재를 찾았다. 손을 붙잡으며 말을 붙이려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은재가 그 자리를 대놓고 불편해하며 피하자 한 걸음 물러났다. 겨우 한 걸음 물러난 곳에서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음에도 절 돌아봐 달라는 말도 하지 않고, 뒤를 책임지겠다 표현하듯 그곳에 서 있었다. 언제든 손을 뻗으면, 뒤를 돌면 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듯.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뒤를 살핀 은재는 묵묵히 걸어 사진 앞으로 다가갔다.

태영은 한 발짝 늦게 다가와 은재의 옆에 섰다.

“…….”

“…….”

……이렇게나 빈자리가 컸었나. 옆자리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단단함에 은재는 작게 숨을 삼켰다.

“무슨 생각 하세요.”

곧장 미사를 마치고 온 것이라 은재와 태영 모두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셔츠까지 검은색으로 맞춰 입은 태영은 평소보다 훨씬 더 서늘해 보였다. 얼굴에 드리워진 어둠이 더욱 짙었다. 단단한 골격 위로 어우러진 어둠이 꽤나 접근하기 어려운 인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회장님이 몇 년 더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 어둠과 잘 어울리는 낮은 음성으로 태영이 말을 덧붙였다.

태영은 민 회장과 처음 만난 뒤 종종 그의 병원을 찾곤 했다. 은재는 회사 일로 참여할 수 없었으나, 둘 모두에게 제법 괜찮은 시간이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은재가 채워 주지 못했던 역할을 하는 아이였다. 민 회장에게도, 그리고 은재 자신에게도.

“그럼 우리 이렇게 되는 일은 없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세요?”

“…….”

“전 회장님도 찬성하셨을 거라 생각해요.”

둘은 그저 사진 속 민 회장과 앳된 얼굴의 은재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아주 흐릿하게 비치는 자신들의 인영 또한.

“회장님은 이사님을 많이 걱정하세요. 이사님을 많이 생각하시고요.”

“…….”

“이사님의 행복을 누구보다 바라셨어요.”

“…….”

“이사님이 원하는 걸 마음껏 하기를 바라셨어요. 당신이 그 배경이 되어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셨고요.”

은재는 소리 없이 손을 말아 쥐었다. 식은땀이 나는 손을 애써 감추며 질끈 눈을 감고 싶은 것을 참았다.

“자.”

그렇게 호흡을 고른 후에야 은재가 태영에게 서류를 넘겼다. 태영은 관심 없는 듯한 눈초리로 그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임 대표님이 알아봐 주셨어.”

그제야 태영은 서류를 가져갔다. 흥미 없는 눈길로 그것을 대충 살피더니, 소리 나게 덮고 다시 사진 속 은재를 응시했다.

하도 많이 봐서 이제 사진 속 은재의 뺨이 뚫릴 것 같은데.

“선봐.”

사진은, 그리고 그 위를 덮고 있는 얇은 유리는 의외로 단단한지 태영의 끈덕진 시선에도 은재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래서 태영은 직접 손을 뻗었다.

그 얇은 유리 너머 은재의 뺨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차가운 감촉. 온기가 도는 창백한 뺨이 아닌 차갑고 경직된 감각.

“어차피 이사님이 용기 내시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급하게 선 자리를 주실 줄은 몰랐지만.”

“……태영아.”

“선 안 봐요.”

은재는 태영과 달리 늘 사진 속 민 회장을 보았다. 사진만 보아도 느껴지는 민 회장의 무뚝뚝한 다정함과 든든한 어깨를 사진 속에서 찾으며, 이제 만성이 되어 버린 외로움을 달랬다.

그러나 태영은 여전히 사진 속 은재의 뺨을 만지며 대답하고 있었다. 은재는 천천히 태영의 손가락이 향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선 안 봐요.”

“…….”

태영은 손을 말아 쥐며 사진 속 은재를 만졌던 감촉을 잊지 않으려는 듯 더 세게 손을 움켜쥐었다.

“제가 그 자리 나가면…….”

이윽고 몸을 돌려 제 눈앞에 서 있는 은재를 내려다보았다.

“이사님 상처받아서 안 돼요.”

“…….”

“저는 절대 안 되거든요. 이사님이 그런 자리에 나가는 거.”

짙은 눈동자가 조금씩 떨리는 은재의 속눈썹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도 돌아보지 않은 은재는 꿋꿋이 사진 속 저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랑 만나서 식사하고, 차 마시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그리고…… 옅게 보이는 유리 너머의 태영의 잔상을 보았다.

“약혼 이야기를 하고, 결혼 이야기를 하고, 또 먼 미래를 함께 이야기하고 그런 거 저는 못 봐요.”

살이 조금 빠졌나. 피부가…… 거칠어진 건가. 그때 다친 입술은 다 아문 걸까.

“그래서 저도 안 해요.”

“…….”

“이사님 상처받을 거 알면서 어떻게 그래요.”

은재는 저도 모르게 태영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유리 너머의 태영이 아닌, 있는 모습 그대로의 태영.

시선이 마주치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태영을 응시했다.

“모질게 구시려면 몸 챙기세요.”

“…….”

“이사님은 마음고생하면 살부터 빠져요. 더 빠질 데도 없는데.”

그제야 태영의 눈에 희미한 생기가 어렸다. 무생물의 것처럼 단조롭기만 하던 눈에 약간의 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장면이라 은재는 금세 시선을 피해 버렸다. 태영은 개의치 않고 은재에게 손을 뻗었다. 저도 모르게 제 손을 향해 기울여 오는 뺨을 깊게 감싸 부드럽게 매만졌다.

“…….”

찰나였지만 온몸에 퍼지는 열기에 은재가 뒤늦게 손을 피해 물러났다. 허탈한 듯 웃은 태영은 손을 다시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나가 볼게요.”

“……오늘? 지금?”

“나가 볼 테니까 편하게 계세요. 식사 챙기시고요.”

“…….”

“늦을 수도 있어요.”

그 말을 끝으로 태영은 방으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으려는 듯 사라진 모습에, 은재는 그대로 머물러 있다 바삐 계단을 올랐다. 3층 서재로 향해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며 왠지 모르게 아래에서 들릴 소리를 기다렸다.

잠시 뒤, 인기척과 함께 계단이 묵직하게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1층으로 향한 걸음은 짧게 멈춘 뒤 다시 현관 쪽을 향해 움직였다.

정 실장의 희미한 배웅 인사를 메아리로나마 혹은, 상상으로나마 들은 듯했다. 은재는 태영이 터뜨렸던 그 허탈한 숨소리를 되새기며 배를 감쌌다.

* * *

―불가피할 것 같아. 많이들 잠잠해지긴 했는데…… 아무래도 증언이 있어서 그냥 넘어가기는 쉽지 않네.

“그렇게 말씀하시면 영 능력 없는 검사이신 것 같은데요.”

―인마. 일부러 내 쪽으로 끌어온 거야. 작년이었으면 이렇게도 못 해 줘. 올해 형사부에서 넘어와서 기껏 해 줬더니.

“검찰에서 알아서 대경 심기 상하게 안 하려는 것 같은데. 어차피 큰일도 아니고.”

―어휴, 이 새끼가.

태영은 숨을 터뜨리며 차에서 내려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알아요. 형이 고생해 주는 거 알죠.”

―그래서 아직 기자는 안 만나 봤고? 

“딱히 연결 고리가 눈에 띄게는 안 나오네요. 여기저기 발을 걸친 데가 많아서. 찾으신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어떤 검사가 수사 자료를 흘리냐?

“형이 절 도와주죠. 흘리는 게 아니고.”

아직 건물에 불이 꺼질 시간이 아니지만, 도착한 건물은 이미 모두가 자취를 감춘 듯 고요했다. 불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1층도 잠겨 있었다. 태영은 익숙하게 잠금을 해제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미사는 잘 다녀왔고?

“네. 의준이도 왔고, 전무님도 뵙고요.”

―미안하다. 나도 웬만하면 가고 싶었는데 상황이 어려웠어. 민 이사 담당 검사가 나라는 거 알려지면 또 곤란해.

“그렇게 말하시면서 도와주시는 거 잘 알아요.”

어둡고 텅 빈 복도에는 태영의 구둣발 소리만이 울렸다. 태영은 날연한 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올리며 층계참으로 향했다.

안쪽까지 쫓아 들어오는 기자들은 없겠지만…… 그냥 좀 걷고 싶었다. 계단을 몇 개 오르는 정도는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했으나 뭐라도 해야 했다. 안 그러면 왠지 모를 지끈거림이 자꾸만 깊은 가슴속에서 느껴지곤 했다.

―어쩌다 우리 막내는 이런 놈을 친구라고 사귀어서는.

전화기 너머의 의형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태영은 피식 웃으며 어느새 도착한 곳의 층수를 확인했다.

“못 믿으시겠지만 의준이가 절 친구로 골랐어요.”

―그래. 아직도 안 믿긴다.

“의준이도 별로 깨끗한 놈은 아닐 텐데.”

―그래도 너보다는 깨끗할 거다, 인마. 해 봤자 그 녀석은 돈 부풀리기밖에 더 하나. 어쨌든…… 이왕 이렇게 됐으니 좀 더 털어 보지 그래. 깔끔하게 법으로 복수해야지.

굳게 닫힌 철문을 밀고 들어가니 안에서는 희미한 인기척과 말소리들이 들렸다. 사람들이 빚어내는 온기가 느껴졌고 옅게 만들어 놓은 조명과 음악 소리도 들렸다.

“곧 드릴게요. 우리 이사님 건드린 기자 털면 구린 게 나오겠죠.”

―기대한다.

곧 은재에게 가벼운 검찰 조사가 있을 예정이었다. 직접 사건을 담당하게 된 의형은 그 사실을 태영에게 먼저 일러 주었다.

의형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의형의 아버지, 손 전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은 대표가 된 손 전무를 배경으로 두고 있는 재벌 검사가 또 다른 재벌을 조사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의형이 위험을 무릅쓴 것임을 알았다. 은재에게 이미 죄가 없음을 알기에 검찰 쪽에서 내보일 수 있는 처세기도 했다.

그의 말마따나 엄격한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어? 한 대표네.”

“뭐야. 어떻게 왔어? 오늘 미사라며.”

“갔다가 왔지.”

태영은 테오와 에린, 그리고 다른 이들이 모여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한데 모여 작품에 대해 의논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꼭 영국에 있을 때를 보는 것 같았다. 일부러 낮게 켜 둔 조명,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흐르는 음악, 은근한 커피 냄새까지.

“굳이 안 와도 되는데.”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마치 방해꾼인 것처럼 말들 하네. 분위기 좋았는데 내가 방해했나?”

부드럽게 웃은 에린은 끓는 물을 받아 믹스 커피를 녹이며 태영에게 내밀었다.

“한국식이라는데. 꽤 맛있어. 달고.”

“고마워요.”

태영은 커피를 받아 들며, 에린의 작업물로 보이는 것 옆에 바짝 붙어 앉은 테오를 응시했다.

“이사님은 좀 어떠셔.”

테오는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비슷해.”

“계속 기사 나던데.”

“그래도 많이 잠잠해졌어. 곧 조용해지겠지.”

“다른 기사 뭐 터질 건 없대? 시선 좀 돌리지 그래. 너무 요란하다.”

“그래야지. 고르는 중이야.”

작업은 좀 어때요. 태영은 혀 위에 길게 남는 커피맛을 덧그리며 물었다. 에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새로워. 여러모로.”

“이사님이 이번 일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셨는데.”

“이미 했잖아.”

“그런가요.”

“한 대표답지 않게 정신이 없어 보이네.”

“…….”

“요즘 어디 불편해? 안색이 별로야.”

태영은 달큼하니 끈적하게 느껴지는 커피를 단번에 들이켜며 고개를 크게 돌렸다.

“왜 나왔어. 이런 날 이사님 옆에 있어 드리지.”

“그러고 싶었는데, 내가 있으면 더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서.”

“…….”

“쉽지 않네. 이사님이 겁 많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괴로워.”

“그래서 일부러 나왔어?”

“내가 없어야 잠깐이라도 잊으시니까.”

예전에는 몰랐던 것들이 성인이 된 이후에 보이기 시작했다. 변함없이 은재는 우아하고 고상한 사람이었으나 사실 그 아래에서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배우고 노력해야 했다는 것. 그래서 일부러 저를 더 혹독히 가르친 것.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남들 시선을 의식해 가르쳤던 것.

그리고 그 혹독함이 여전히 자신에게는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어쨌든 내가 없어야 조바심을 내든, 아예 도망치시든 하시겠지. 그래야 스스로 상처도 안 내실 거고. 좀 쉬시기도 하시겠고.”

의외로 많은 것을 두려워한다는 사실도.

언젠가는 그 모든 것들을 깨부수어야 은재가 편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가 은재의 곁에 알파로 서기 위해서는 그 과정이 필수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는 그 얼굴을 보니 제 가슴이 뭉그러졌다. 저에게는 유독 거리를 두는 걸 어려워하면서도, 혼란을 감추면서도 이게 옳다고 생각하는 그 여린 모습에 차라리 제가 이쯤에서 물러날까 싶기도 했다.

그가 괴롭다면 제 사랑을 접는 것쯤이야, 죽을 것처럼 아파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삶의 수명은 길지 못했다. 저와 은재의 관계는 언제든 도마 위에 오를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은재를 끌어내리려 할 터였다.

은재가…… 저를 결국 선택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더 이상의 외로움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주변에 단단히 두르고 있는 무거운 것을 벗어야만 했다. 그 무게에 못 이겨 자신을 괴롭게 할 성격이었다. 민 회장과 저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억누를 사람이었다. 다른 일에서도 자연스레 절 희생시킬 이였다.

그렇기에 태영은 은재와 함께 시간을 견뎠다.

은재를 위해서라도. 설령 제가 그의 곁에 알파로 서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복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저를 위해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은재 자신을 위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를. 제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은재의 행복과 평안이라고.

테오는 털썩 주저앉아 태블릿 PC를 꺼내 들었다. 눅눅한 어둠 사이에서 발하는 PC의 불빛이 오묘하게 테오의 얼굴을 비췄다.

“말은 꼭 버팅길 것처럼 해 놓고.”

“이사님이 힘들어하는데 어떻게 맘이 편하겠어? 그렇게 이사님한테 목매고 있는데.”

꽤나 닭살 돋는 말을 한 것 치고 태영은 담백한 얼굴이었다. 정말 어딘가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처럼 손가락뼈로 단단한 가슴을 문질렀다.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에린은 낡은 서랍장 속에 넣어 두었던 위스키 한 병을 꺼내 오며 물었다. 태영은 차 키를 꺼내 보이며 술을 거절했다.

“요즘 좀 그러네요. 이전부터 증상이 있기는 했는데…… 가슴이 지끈거리면서 아파요.”

“어디 문제 생긴 거 아냐? 담배를 그렇게 줄창 피울 때부터 알아봤어.”

“이사님 생각할 때면 그래.”

상사병인가. 테오는 역시 간지러운 말을 떠올렸지만 태영의 표정은 진지했다.

“어떻게 아픈데.”

제대로 된 컵이 아닌 불투명한 재질의 일회용 컵에 위스키를 따른 에린은 테오와 둘이서만 잔을 나누며 의자를 가져와 근처에 앉았다.

“지끈거려요. 누가 손에 심장을 넣고 쥐는 것 같아요. 그러면 온몸에 열이 오르기도 하고, 핏줄이 끊기는 것처럼 아파요. 살갗을 다 도려내고 싶어요.”

빈 잔을 돌려 보며 태영이 덤덤하게 말했다.

“꼭 이사님을 생각할 때면 그래요.”

“하루 종일 그런다는 거네.”

“…….”

덧붙은 말에 태영이 실소 같은 것을 터뜨렸다. 그렇네, 하는 자조적인 소리도 뒤따랐다.

“내가 아픈 건 괜찮은데, 근데 이사님이 이렇게 아플까 봐 걱정이 되네요.”

“…….”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사님이 꼭 이렇게 아픈 것 같다는 생각. 그 생각이 들면 꼭 배가 아프고…….”

지금도 그 통증이 느껴지는 듯 제 배를 매만지며 태영이 천천히 표정을 지웠다.

“괜히 이사님 기분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지금 뭘 하고 계시는구나, 어렴풋이 그런 것도 느껴지고.”

“…….”

“어디가 안 좋은지 느껴지는 것도 같아요.”

한참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에린이 혼잣말처럼 말을 뱉었다.

“말로만 들으면 꼭 각인 증상 같네.”

“각인이요?”

“알파들은 각인하면 그렇게 되던데.”

“…….”

“자기가 각인한 오메가의 기분이나 감정 같은 걸 느끼는 경우가 있더라고. 딱 한 대표처럼.”

각인이라…… 그 단어를 요즘 부쩍 자주 듣는 기분이었다.

“특별히 그런 시도는 없었는데.”

“알파들의 각인은 시도한다고 되는 게 아냐. 어느 순간 되어 있지.”

그래서 이사님이 각인한 알파는 자유롭게 곁을 떠난 걸까.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끼며 태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게?”

“땀 좀 빼려고요. 지금부터 운동하면 새벽에는 들어갈 수 있겠죠.”

“새벽까지?”

“그 정도로 몸을 굴려야 정신이 날 것 같아서요.”

빠르게 잔을 비운 테오는 태영을 배웅한답시고 1층까지 함께 내려왔다.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태영은 1층에 발을 딛고 나서야 테오를 돌아보았다.

“알아봤어?”

“조용해. 안 움직여.”

“아예?”

“어. 제대로 그 신문사에 소속된 기자도 아니고 명예 기자 신분이야. 재작년까지는 소속이었는데, 그때 정치부 기사를 담당하다가 프리랜서로 살겠다며 퇴직했어.”

“냄새가 나네.”

“지금 대경 기사 터뜨린 이후로도 조용하고. 그 전에도 반년 동안 낸 기사는 없었어.”

태영은 묵묵히 때를 기다리며, 제일 먼저 대경을 두고 말도 안 되는 기사를 터뜨린 기자를 추적했다. 제법 혼란스럽게 여기저기 씨를 뿌리고 돌아다녀 쫓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 봤자 고작 기자였다. 꼬리가 밟힐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기자 주제에 그렇게 제 뒤를 지우려는 것도 이상했고…….

“민 이사님 뭐, 원수 진 거 있으시냐.”

“그런 건 없겠지만 대경을 어떻게 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겠지.”

아니면 민은재 그 자체를 쥐고 싶던가. 태영은 수많은 얼굴들을 떠올렸다. 불쾌한 시선으로 은재의 몸을 훑던 시선들.

“신 의원 요즘은 조용한가.”

“뭐야, 또?”

“그냥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

“……그래 뭐. 그 이후로 조용하긴 한데.”

그때 신 의원과 불륜으로 시끄러웠던 피아니스트는 아직 한국에 있었다. 그 파장은 제대로 마무리된 것 하나 없이 이제 대경 쪽으로 넘어왔지만…….

“타이밍이 잘 맞네.”

태영은 눈썹을 구기는 테오와 짧게 눈을 맞추곤 층계참을 내려갔다.

“아직 안 썼어. 그림 뒤의 봉투.”

테오는 사라지는 태영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네 장부 말이야!”

구둣발이 계단을 울리는 소리가 이전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건물을 울렸다.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싶은 기분을 외면하며 태영이 차의 시동을 껐다. 안 좋은 냄새가 날까봐 씻고 왔는데도 몸이 조금 무거웠다. 이 정도로 운동을 하면 이렇게까지 몸이 무겁지는 않은데.

이제는 꽤나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차에서 내렸다. 그와 동시에 다른 차 한 대가 정원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태영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고 차에 기대어 담배를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태영의 앞으로 차 한 대가 매끄럽게 들어왔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는 바삐 내려 조수석으로 향했다. 그러나 남자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은 은재는 내리자마자 눈이 마주친 태영을 보고도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날이 춥네요.”

“네.”

“이제 곧 겨울이 될 것 같습니다.”

남자는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며 은재의 곁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에스코트를 한다고 하는데도 어느새 근처에 선 강 비서마저 조마조마한 심정을 느낄 정도였다.

“퇴근이 늦으시네요.”

“들어가라고 하셨는데…….”

태영이 담배를 지져 끄며 강 비서에게 말했다. 강 비서는 은재를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요즘 기자 찾고 계시죠.”

“…….”

“그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사님한테는 적당히 둘러대 주세요. 신경 안 쓰이시게요. 혹시나 연락 오면 저한테 말해 주시고요.” 

제 몸에서 땀 냄새가 나는지 확인한 태영은 강 비서를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은재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제 제가 모시겠습니다.”

“……누구, 아.”

“…….”

“……저, 저기. 제가.”

“이만 들어가 보세요.”

은재의 곁에 있던 남자, 류 전무는 그대로 태영에게 은재를 빼앗겨 버렸다.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정말 빼앗겼다는 듯 허망한 얼굴로 자리에 서 있었다.

은재는 묵묵히 태영을 뿌리치고 류 전무에게 다가갔다. 또 뵙죠. 간단한 인사였지만 류 전무는 미소를 머금으며 차에 올랐다. 태영을 흘긋 보고는 마치 제가 승리자라는 듯한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뭐 하다 지금 오세요.”

“…….”

“새벽인데…… 뭐 하고 오셨는지 제가 혼자 상상하게 만드실 건가.”

그럼에도 태영은 꿋꿋이 다시 다가와 은재를 붙잡았다. 왜인지 약간 비틀거리는 몸을 붙잡아 제게 기대게 하며 은재의 손을 감싸 문질렀다.

“손도 차고.”

“…….”

“이제 대답도 안 해 주시려고요?”

“넌 뭐 하다가 지금 와.”

순식간에 태영이 지닌 열기가 은재의 손으로 옮겨 갔다. 조금 쌀쌀한 기운을 느끼고 있던 은재는 터지려는 숨을 삼키며 물었다.

“……씻고 왔나 보네.”

청량한 향이 태영에게서 느껴졌다. 은재는 공연히 하얘지는 머릿속에 태영을 올려다보았다.

“운동하고 왔어요.”

“…….”

“이사님 아니면 어디 가서 뭘 할 수도 없으니까.”

은재는 그 말에 문득 제가 두르고 있는 열기를 깨닫고 몸을 바로 세웠다. 보란 듯이 태영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이사님은…… 조금 전에 그 알파랑 계셨어요?”

“…….”

“그래서 그런가 별로 좋지 않은 냄새가 나네.”

태영은 벌어진 거리를 잠시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그때 같아요. 새벽에, 이사님이 히트 사이클 보내고 들어오셨을 때.”

그 자리에서, 태영은 더디게 가슴을 부풀리며 숨을 마셨다. 그런데도 마치 은재는 제 목덜미 근처의 숨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움츠리지 않으려 해도 대신 등줄기의 솜털들이 빼곡히 일어섰다.

그 점을 눈치챈 듯 태영의 시선이 은재의 목덜미에 고정되었다.

“키스하고 싶어요.”

“…….”

“이런 냄새…… 다 지우고 싶어. 이사님하고 안 어울리는 이런 싸구려 냄새……. 제가 지워도 돼요?”

은재는 거부하며 태영을 밀어냈다. 태영도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얼굴로 쉽게 밀려나 그를 응시했다.

말로는, 온몸으로 뿜는 열기로는 마치 당장 손목을 틀어쥐고 강제로 입술을 맞출 것처럼 굴어 놓고 밀려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표정에는 아직도 갈망이 어린 표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저 때문에 굳이 그러지 마세요.”

“…….”

“제가 그 위에 입 맞추게 하시는 거 아니면, 하지 마세요. 어차피 다른 알파들 페로몬 힘들어하시잖아요.”

“……또 너 같은 알파가 어디 있겠지.”

“…….”

“너처럼 우연히 상성이 맞는 알파.”

가늘게 웃은 태영은 은재가 선 곳에서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그런 알파가 또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제대로 된 알파로 만나세요. 이사님 곁에 섰을 때 저렇게 덜덜 떠는 별 볼 일 없는 놈 말고.”

“……태영아.”

“굳이 저 때문에 만나시는 것 같아 하는 소리예요.”

“…….”

“잠깐이라도 천박한 알파 곁에 두시는 거, 제가 용납 못 해요.”

그러곤 은재의 방문을 살피며 고개를 흔들었다.

“쉬세요.”

은재는 대답도 없이 방에 들어섰다. 자리에 홀로 남은 태영은 이제야 거친 숨을 내쉬며 이를 악다물었다.

은재의 속내가 무엇인지 훤히 보임에도 다른 알파 곁에 선 그를 본 순간 욕이 치밀었다. 그대로 달려가 볼품없어 보이는 알파의 턱을 갈기고 싶을 만큼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은근하게 지끈거리던 통증이 불쑥 커졌고, 속이 뜨거워 참으려는 이마에 핏줄이 설 정도였다.

일부러 보이기 위해서, 저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무리수를 두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그래서 하필 고른 게 저런 새끼라니.

태영은 소리 죽여 방으로 향했다. 여러 감정으로 펄펄 끓는 몸을 재차 씻어 버리고 지끈거리는 가슴 위를 거칠게 두드렸다. 그러고 몇 번이나 방을 돌아다녀 호흡을 고른 후에야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그사이 시간은 꽤 흐른 뒤였다. 어슴푸레한 새벽이던 시간이 어느새 동이 틀 시간이 되어 기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아직도 태영은 긴 밤을 붙잡고 있었지만, 날은 홀로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소리를 죽인 걸음이 은재의 방으로 향했다. 태영은 걸쇠가 부드럽게 돌아가며 내보이는 은밀한 어둠과 약한 온기에 표정을 가다듬었다.

희미했던 숨소리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곧장 보이는 것은 역시 은재였다. 큰 공간이었지만 태영은 침구에 파묻혀 있는 은재 쪽으로 다가갔다.

“…….”

“…….”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꿋꿋이 삼키며 은재의 얼굴이 보이도록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함께 들어왔던 싸구려 알파의 페로몬 때문인지, 잔뜩 찡그려진 고운 얼굴이 보였다. 태영은 천천히 그 얼굴을 눌러 펴 주며 은재의 귓불에 입을 맞췄다.

깨어 있었으면 이러면 안 된다고 말했겠지. 여전히 보호자를 자청하는 그 여리고 부드러운 얼굴로, 눈꼬리 끝에 언제나 핥고 싶은 점을 달고 그렇게 말했겠지. 힘도 들어가지 않은 손길로 제 가슴을 밀어냈겠지.

태영은 이불 속에 묻힌 은재의 손을 쥐고 싶었지만, 혹시 그가 잠에서 깰까 두려워 뺨에만 입술을 다시 내렸다.

잠결임에도 피로했는지 희게 질린 뺨을 조심스레 매만지며 페로몬을 쏟아 주었다. 그러자 은재는 저도 모르게 연약한 숨을 터뜨리며 이불을 쥐었다.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느낀 뒤 접하는 태영의 페로몬이 자극적인 모양이었다.

태영이 서둘러 몸을 숙여 그 손에 입을 맞췄다.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마디마다 입을 맞추며 움찔거리는 등을 도닥였다. 아프지 않게 끌어안아 어깨를 씹었다.

한참 후에야 은재는 파르르 떨며 몸에 힘을 풀었다. 숨을 삼키고 뱉는 그 모습을 보며 태영은 조금 더 페로몬을 풀어주었다.

“또 올게요.”

그 움직임이 잠잠해진 후에야 태영이 속삭이듯 내뱉고 자리를 떴다. 그의 마지막 시선은 창가 쪽에 서 있는 장식장에 머물렀다. 제가 저택을 떠나 지내며 보내온 선물들을 모아 놓은 장식장.

한참 그것을 보며 서 있던 태영은 재차 은재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완전히 방을 떠났다.

문이 고요히 닫히고, 소리도 거의 없는 걸음이 멀어진 후에야 은재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태영이 세심하게 커튼을 쳐 이른 볕이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지만, 이미 수마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은재는 그저, 태영의 페로몬이 남은 이불 속에서 배를 감싸 쥐고 있었다.

다음 날, 은재는 의형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제 태영이 앞서 들은 내용과 동일했다. 은재는 덤덤하게 알았다고 대답하곤 조사 날짜를 잡았다.

사흘 후였다. 그렇게 급한 일정은 아니었다. 사안이 급박하다면 당장이라도 가야 했을 텐데.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 사흘 동안 은재는 부지런히 다른 알파를 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새벽마다 늦게 귀가했고, 그때마다 태영은 잠들지 않고 은재를 기다렸다. 점점 더 굳어 가는 얼굴로 알파들에게서 은재를 빼앗아 직접 침실로 향했다.

알파들의 몸이 닿았던 곳은 제가 다 씻기고 싶다고, 다 씻어 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은재는 끝까지 그런 태영을 외면했다.

태영이 짐작하다시피 일부러 이런 짓까지 하는 것이었으니까. 혹여나 저에게 다리를 벌려 줄까 기대하는 이들과 기억에도 남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시간을 죽이며, 페로몬을 묻혀 오는 건 태영을 밀어내려 하는 일이었으니까. 제 소문을 만들면 태영과 관련된 소문은 덮일 거라고도 믿었으니까.

별로 의미가 있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한구석으로는 알면서도 은재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비록 이 일로 다른 알파들이 저를 더 가벼운 오메가로 여긴다고 하더라도, 태영을 지켜야 하기에 감당할 수 있었다.

틈새로, 어차피 태영은 저를 이렇게 여겼으니 어쩌면 개의치 않을 거라고도…….

후유증은 오로지 은재의 몫이었다. 미약한 페로몬에도 이제 몸에서는 거센 반응이 일었다. 새벽녘에는 태영의 페로몬, 날이 밝으면 또다시 닿아 오는 낯선 알파의 페로몬에 몸은 온갖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고작 며칠의 유흥이었음에도 구역질이 잇따랐고, 피로감이 심해졌다. 오한 같은 것이 들었다가 몸이 덜덜 떨리기도 했다. 그나마 다정하게 시간을 보내던 태영과 이제 그런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는 것 또한 은재의 정신을 뒤흔들어 놓았다.

결국 조사를 받기로 한 날은 안색이 꽤나 안 좋아진 게 보일 정도였다.

“가실 수 있겠어요?”

태영은 이른 시간부터 나와 은재의 곁에 서 물었다. 은재는 억지로 몇 술을 떴던 수저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야지.”

“모셔다드릴게요.”

“아냐. 보는 눈 많아.”

어쩐지 아슬아슬한 모습에 태영은 계속해서 은재의 뒤를 쫓았다. 은재는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일어나는 현기증에 평소보다 더 느린 걸음으로 나섰다.

“기다릴게요. 끝나는 거.”

“별거 아냐.”

“네. 아는데…… 그래도요. 근처에서 기다릴 테니까 연락 주세요.”

태영의 표정은 평소와 비슷했지만 어딘가 달랐다. 늘 은재가 태영을 돌보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 그렇지 않았다고, 조금씩 부족한 이들이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알파가 그야말로 제 연인을 보는 얼굴로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은재는 혹시 제 생각이 얼굴에 드러날까 싶어 급히 차에 올랐다. 제가 탄 차가 빠져나가고, 태영의 시선이 뒤로 익숙하게 따라붙는 것을 느끼며 습관처럼 배를 감쌌다.

이제는 조금 더 자랐겠지. 이제는…… 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겠지.

최 박사가 이야기했던 2주가 이미 지났음을 알았다. 가을이던 계절이 어느덧 겨울에 들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의 흐름이 피부로 느껴졌다.

강 비서도 은근히 병원에 가 보기를 권하고, 최 박사 또한 왔으면 하는 눈치였으나 왜인지 은재는 쉽게 병원으로 향할 수 없었다. 배에 태영의 흔적이 생긴 것을 안 순간부터 생각에 변함은 없었다. 제 배에 생겨서는 안 될 것이 생겼다. 수술을 받고, 그 후의 건강 관리를 조금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만…….

“이사님. 도착했습니다.”

별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검찰청 앞이었다. 은재는 미리 검찰 쪽에서 준비해 준 가드들의 보호를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1층까지 나와 있는 의형과 얼굴이 익숙한 부장 검사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들어가던 때가 대략 1시경이었다. 형식적인 절차기는 하지만, 이르게 나올 수가 없어 은재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야 건물을 나설 수 있었다.

아직도 건물 앞에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은재는 유유히 그것을 피해 빠져나갔다. 태영이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한 것이 잊히진 않았지만……. 뒷문으로 빠져나와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정원에 서 있는 인영을 발견하곤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커다란 인영이 불안한 듯 정원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 인영을 발견하자마자 마음이 급해져 그 자리에서 차를 세우게 했다.

은재는 제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차에서 내려 그 사이로 뛰어들었다. 앙상해진 나뭇가지들을 가르고 정원으로 들어가 덜컥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쿵쿵,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누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

그 손목의 주인은 세헌이었다. 세헌이 놀라 은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을 발견하고 숨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사실 그 자리에 태영이 있었으면 하고 바란 것이었다.

태영이 제 곁에 있기를. 그러면서도 태영이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기를. 제가 또다시 태영에게 상처를 남긴 게 아니기를.

뒤로 주춤 걸음을 물린 은재는 붙잡았던 손목을 놓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급격히 허탈해진 표정이 은재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동시에 닿았던 손을 황망하게 뒤로 숨기며 세헌의 시선을 외면했다.

“괜찮아? 왜 그래.”

“……언제 왔어.”

“저녁쯤. 걱정돼서 안 올 수가 있어야지.”

“굳이. 안 와도 되는데.”

“요즘 전화도 안 받고, 그렇다고 뒤늦게 연락을 해 주는 것도 아니고. 너 이렇게 굴까 봐 왔어.”

세헌은 익숙하게 다가와 은재의 곁에 섰다. 눈에 띄게 질려 가는 은재의 안색을 살피고 미간을 찌푸렸다.

“밥은. 먹었어?”

“……대충.”

“제대로 먹어야지.”

“요즘 입맛이 없어.”

“그럴 때일수록 챙겨야지. 이번 일 그렇게 심각한 사안은 아니잖아.”

그랬다. 은재도 알고 세헌도 알고 또 태영도 알았다. 기자들도 알고, 검사들 또한 알았다.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정신도 없고 바쁜 듯했지만 이제 사람들의 관심도는 떨어져 있었다. 한 달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진 보도에 사람들은 흥미를 떼기 시작했고, 조금 더 가벼운 가십들로 시선을 돌렸다. 이틀 전 터진 스포츠계의 스캔들이 지금은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래서 대경 또한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기억에도 남지 않을 일이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그런데도 은재는 초반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힘겨웠다. 민 회장을 염려하던 때보다 지금이 더욱 힘들고 또 괴로웠다.

그런데 방법을 알지 못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뭘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괴로운 것인지도.

“정 실장님. 민 이사 간단히 뭘 좀 먹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 별로 안 먹고 싶어.”

“먹어. 안 그러면 너 쓰러질 것 같아.”

부탁드려요. 세헌은 휘청이며 걷는 은재를 훑으며 한숨을 뱉었다. 꾸역꾸역 안 먹겠다는 은재를 끌고 다이닝 룸에는 앉았는데…… 속이 좋지 못한 것인지 은재는 도무지 뭘 제대로 먹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로 겨우 앉아 있었다.

“주스 있나요.”

“네, 이사님. 드릴까요.”

“차라리 그게 낫겠네요.”

결국 금세 수저를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 전혀 줄어들지 않은 듯한 내용물에 세헌은 조금 더 표정을 구겼다.

“오늘 힘들었어?”

“아니. 그랬겠어.”

“근데 왜 이렇게 못 먹어. 너무 안 먹었잖아.”

은재는 뇌가 찌릿할 정도로 시큼한 착즙 주스가 나오고서야 컵을 비웠다. 그제야 은재는 비어 있는 세헌의 앞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 줄까. 차도 한 잔 안 줬네.”

“됐어.”

“정신이 없다. 이해해 줘.”

“그래. 그런 건 상관없는데…… 무슨 일 있어?”

“알잖아.”

“이 일 묻는 거 아닌 거 알잖아.”

“…….”

“얼굴 안 좋아. 무슨 일 있는 것처럼 보여.”

습관처럼 시간을 확인한 은재는 꽤 깊은 새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숨을 뱉었다.

“정 실장님, 아직 태영이 안 왔나요?”

“네. 아직 안 들어오셨습니다.”

태영이 오지 않았다는 소식에 거듭 한숨이 나왔다. 세헌과 이야기를 별로 나누지 못한 것을 알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오전부터 새벽까지…….

“알아서 들어오겠지. 그런 것까지 신경 써?”

“…….”

“은재야.”

세헌은 은재의 곁에 다가가 제 재킷을 벗어 얹어 주었다. 걱정 어린 한숨이 함께 어깨에 얹혔다.

“요즘 약 안 먹은 지 좀 됐지, 너. 이러다가 쓰러질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 거 아냐.”

“괜찮아. 요즘은 페로몬 문제 없어.”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태영이랑 계속 이렇게 지낼 거야?”

“…….”

“태영이한테 이야기했어? 각인했다고.”

“말할 생각 없어.”

“그럼 선 보게 해. 완전히 내보내.”

“…….”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건데.”

주변을 배회하는 듯한 싸늘한 공기에 은재는 재킷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몸을 말았다. 그때 차가 뿜는 헤드라이트 빛이 정원 쪽에서 보였다.

누구인지 알지만 확신할 수 없는 걸음이 문으로 이어지고, 전실을 지나쳐 곧장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은재는 세헌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초조하게 이어지는 그 기척에 신경을 집중했다.

“감출 거면 제대로 감춰.”

“…….”

“이전부터 말했잖아. 곁에 둬서 어쩌려고. 네 몸만 이러다가 더 망가져. 계속 이렇게 태영이랑 지내면 너만…….”

세헌은 은재의 목에 손을 올려 열감을 확인했다. 당황한 은재가 목을 움츠렸지만 이미 태영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몸이 왜 망가져요.”

태영은 은재의 어깨에 얹혀 있는 세헌의 재킷을 발견하고는 헛숨을 터뜨리며 입술을 씹었다. 친밀한 듯 보이는 스킨십에 눈에 띄게 표정이 사라졌다.

낯선 얼굴이었다. 상처를 받은 것 같기도 하고, 허탈한 것 같기도 했다. 애써 숨기려 하지만 끝내는 좌절하는 얼굴.

“제가…… 이사님을 망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은재는 나서려는 세헌의 손을 꽉 잡아 뒤로 물렸다. 태영은 그 손을 뚫어져라 직시하며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상하네. 원래 그 자리가 내 자리인 것 같은데.”

더 낮게 침잠하여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은재는 그 음성이 제 심장을 겨누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심장이 떨리며 반으로 쪼개진 듯 통증이 일었다.

태영의 고통은, 곧 저의 고통이었다.

“언제 오셨어요? 한참 기다렸는데 연락도 안 하시고.”

은재는 세헌을 붙잡았던 손을 털어내듯 놓았다. 하지만 세헌은 그 손을 깍지 껴잡으며 태영을 노려보았다.

“뭐 하는 태도야, 너.”

“…….”

“오늘 은재 어디 갔다 왔는지 몰라서 이래? 아니면 원래 이따위야?”

“그래서 끝까지 왜 몸이 망가지는지는 말 안 해 주시려나 보네요.”

“…….”

“한참 기다렸는데…… 그냥 말해 주지 그러셨어요. 들어왔다고. 그거면 충분했는데.”

태영은 거리를 좁히지도 않고 선 채 계속해서 그 손을 직시했다. 그 시선만으로 은재는 손안에 땀이 고이는 걸 느꼈지만 세헌은 꿋꿋했다. 그의 눈엔 상처받은 태영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금 더 애가 탔다.

“세헌아, 가.”

“이 꼴을 보고 가라고?”

“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두 손으로 세헌의 손을 풀어 낸 은재가 그를 떠밀며 고개를 흔들었다.

“피곤해. 오늘은 이야기 더 못 할 것 같다. 나중에 연락할게.”

“은재야.”

“와 줘서 고마워. 근데 오늘은 들어가. 부탁이야.”

여전히 태영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입에 추라도 달린 듯 침묵을 지켰다. 세헌은 제가 이대로 떠나면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도 할 수 없었다. 태영은 어찌 되었든 우성 알파였다. 체력적으로든, 페로몬으로든 은재를 굴복시키는 것쯤은 우스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이만 가세요.”

“……불안해서 갈 수가 있나.”

“전 그 불안을 지니고 사니까, 그렇게 해 보세요. 의외로 할 만하니까.”

그 말을 끝으로 태영은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은재를 붙잡고 끌고 들어갈 거라는 예상과 달리 너무나 무심하게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본 후에야 세헌이 저택을 떠났다. 은재는 세헌의 차가 아슬아슬하게 태영의 차를 피해 나서는 것을 보며 잠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침실, 혹은 서재.

어차피 이곳은 저의 저택이고 어디에 있든 상관없는 일인데도 갈 곳이 없는 기분을 느꼈다. 어깨에 아직까지 세헌의 재킷이 얹혀 있는 줄도 모르고, 선 그대로 찬 바람을 맞았다.

이제는 낮에 떠오르는 태양보다 새벽녘의 달이 더 익숙한 듯했다. 은재는 구름 뒤에 숨어 보이지도 않는 달을 찾는 척 서 있다 저택으로 들어왔다.

공연히 배회하던 걸음은 거실로 향했다. 차도 없이 가만히 앉아 어둠을 관망하던 은재는 어느 순간 그 어둠 속에 나타난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오래 기다렸니.”

“기다리는 건 익숙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

“기다리는 건 괜찮아요.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어둠 속에 기대어 있던 태영이 성큼 거리를 좁혔다. 마실 것도, 볼 것도 하나 없이 앉아 있는 은재의 곁으로 다가와 허리를 급하게 끌어안으며 입을 맞췄다. 오랜 기근 속에 만난 물처럼 황급히 은재의 입술을 핥고 혀를 찾아 빨았다. 놀라 터져 나온 숨마저 삼키며 입 안을 정복했다.

“읏, 태영아.”

어느새 손목까지 붙잡혀 있었다. 온몸이 뜨거운 열기에 잡아먹혔고, 입 안은 그야말로 짓뭉개지고 있었다. 놀라 움찔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고스란히 태영에게 집어삼켜졌다.

“……아읏.”

은재는 바르작거리며 태영을 피했다. 그럼에도 태영은 지독하게 은재를 쫓아 입을 맞추었다. 허리를 더욱 조여 작게 생겨난 틈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은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약하게 떨리는 숨을 삼킬 때까지 끈질기게 쫓았다. 태영은 잠잠해진 은재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입술을 떼어 냈다. 솜털이 솟은 귓불과 목덜미에도 입을 맞춘 후 물러섰다.

서로에게서 터져 나오는 거친 숨을 느끼며 이마를 맞대고 숨을 골랐다. 차가운 새벽 공기와 달리 아찔한 숨이 터지고 또 터졌다.

“…….”

“…….”

가시지 않은 열기가 어둠 속에서 이글거렸다. 조명도 하나 없어 가물가물한 형태만을 그리는 모습이었지만, 은재는 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과 어쩐지 아파 보이는 얼굴을 보며 제 가슴이 더 짓무르는 것을 느꼈다.

“……임세헌한테 각인했어요?”

“……그게 무슨.”

갑작스럽게 들린 각인이라는 단어에 은재가 크게 움찔했다. 그 반응이 꼭 그 말이 사실이라고 증명하는 것 같았다.

“아냐…… 아니에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내가 이사님 책임질 거니까.”

태영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가라앉아 갈라졌다.

“그래도 이건 잔인해요.”

“…….”

“기다리는 거 알면서…… 제가 이사님만 기다리고 있는 걸 알면서 임세헌 손 잡으신 건, 잔인하세요.”

차마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아파 보이는 얼굴을 만져 줄 수도 없었다.

“제가 기다리는 것도 싫으세요?”

“…….”

“……그것도 하지 말까요, 이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뜨거웠던 입맞춤을 다시 해 달라 조를 수도 없었다.

“선볼게요.”

조금 전에 거친 숨결이 저를 훑고 지나갔는데도, 아직도 영혼 한구석에는 사나운 입맞춤의 흔적이 남았는데도 눈앞의 알파는 싸늘하기만 했다.

“그걸 그렇게 원하시면, 그래서 자꾸 제 눈앞에 이런 모습 보이시는 거면…… 제가 나갈게요.”

“…….”

“죄송해요. 오늘 이렇게…….”

태영은 은재의 입술을 손으로 훔치고 지나갔다. 그러곤 눈도 맞추지 않고 은재의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이번에도…… 태영이 먼저 자리를 떴다.

그렇게 은재는 요 며칠 누릴 수 있었던 제 알파의 페로몬도, 다정한 입맞춤과 음성도 듣지 못한 채 아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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