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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이렇게 안 와도 돼, 한 대표.”
“아직은 초반이니까요. 작가님이 여러모로 적응하시는 것까지는 봐야 제 맘이 편하고요.”
주변이 시끌벅적했다. 태영은 핸드폰을 연신 살피며 새로 맥주를 주문했다.
커다란 크기의 잔 가득 나온 맥주는 보기만 해도 시원해 보였다. 잔 표면에 서려 있는 한기가 절로 몸을 부르르 떨리게 만들었고, 함께 테이블 가득 놓인 치킨과 그 외의 음식들이 상다리를 부러뜨릴 것처럼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그 외에도 가게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점차 요란해졌다.
“자, 건배하죠!”
“건배사 할까요?”
“와. 아직도 그런 거 해요?”
“예술가들은 그런 거 안 합니까?”
“죽자고 하죠.”
“전 안 하거든요!”
“교수님도 예술가 아니십니까?”
“전 이제 공직자입니다. 예술하고는 거리가 멀죠.”
회식 자리였다. 지난주 참여하는 멤버가 완전히 확정이 되었고, 서서히 기획 회의가 시작되었다. 개개인의 아이디어를 각출하고 또 큰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또 실현 가능한 범위와 액수 내에서 진행하도록 했다.
태영은 에린 조를 비롯하여 두 명의 예술가들을 더 지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오랜만에 발을 들인 한국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더해서 이런 딱딱한 규율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생각보다 언어는 곧잘 통하는 편이었다. 의외의 문화 차이가 발생하곤 했지만 예술이란 공통분모 안에서 서로를 제법 잘 받아들였다.
결국 진부한 건배사와 함께 잔들이 곳곳에서 부딪쳤다. 꽤 많은 인원인데도, 사업의 중대함 때문인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여 회식 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잔이 부딪치며 이어지는 잠깐의 침묵 후 다시 여기저기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태영은 지잉, 손에 전해지는 진동에 반가운 얼굴로 핸드폰을 살폈다가 곧 표정을 굳혔다.
“한 대표, 누구 기다리는 연락 있어?”
“아, 네.”
“애인?”
“애인은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이요.”
숨길 기색이라곤 없어 보이는 이야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흘긋 태영에게 향했다.
이제 태영이 대경의 후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제 하고 싶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라도 그랬다. 그날, 태영과 후원사로 참여했던 대경의 민 이사 사이의 그 묘한 기류를 읽지 못한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었다.
김 교수의 입을 통해 소개되던 태영. 그 모습에 놀라 애써 표정을 감추던 은재.
오메가인 기업의 총수는 거의 없기에 그전부터 은재에게 은근한 시선이 쏠려 있었다. 소문이 무성한 그 오메가 대표. 눈에 띄는 외모와 분위기, 그리고 오메가라는 형질 때문에 늘 여기저기서 기삿거리가 되곤 하는 그 사람.
막상 마주하니 화면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차분하고 침착한 분위기에, 자연스레 주변을 제 분위기로 물들이는 그 고매한 시선까지. 사람들은 김 교수보다 은재를 더 의식했다. 몇몇 열성 알파는 은재의 몸짓 하나에도 움찔 놀랄 정도였다.
그런데 태영이 나타나자 무심하던 시선에 묘한 열기가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감정이 눈에 보일까 싶을 정도로 반가움과 놀라움이 선명하게 눈에 보였다.
끝내 아릿한 분위기로 둘이 함께 사라지던 마지막 모습까지.
그날의 일 때문인지, 혹은 그전에 또 뭔가가 있었는지 둘을 엮은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보호자와 피보호자. 그런 사이라고는 했지만…….
누군가 태영에게 용기를 내어 물으니 그는 자신이 은재의 소년은 맞지만 대경의 후계는 아니라 말했다고 했다. 그 의미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태영의 이름 앞에 대경, 민은재가 따라붙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왜, 연락이 안 되나 보군.”
김 교수가 넌지시 모른 척 물었다. 태영은 저를 향한 분위기를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그저 핸드폰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비교적 자연스러워진 태영과 은재였다. 여전히 은재는 태영의 연락을 받아 주는 축이었고, 먼저 전화를 거는 경우는 적었으나 그래도 어디에 간다거나,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된다거나 하는 연락은 하는 편이었다.
“바쁜가 보네요.”
그런데 오늘은 정말 바쁜가. 한참 핸드폰을 살피던 태영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합니다. 잠깐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드시고들 계시죠.”
네, 최 변호사님. 태영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크흠, 김 교수는 별 말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다들 알아서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은 눈치들이었지만 태영은 대경의 사람이었다. 그들을 후원해 주는 기업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이들이었다. 사회의 쓴맛은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때 은재의 모습을 잊지 못한 열성 알파 몇은 태영이 나간 곳을 흘끔거리며 살폈다. 보다 못한 테오가 실실 웃으며 ‘알파에 관심 있나 봐요?’ 하며 어깨동무를 해 왔고, 그제야 남은 시선들이 사라졌다.
다른 이야기로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 음성이 높아질 즈음에야 태영이 돌아왔다. 그러나 표정만 보아도 원하는 사람과 전화를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전화 아직도 안 돼?”
“그러네요. 애꿎은 전화만 오고.”
“최 변호사?”
“어.”
“변호사는 또 왜.”
“다른 일이 좀 있어서요.”
“바쁘네, 한 대표.”
“아닙니다.”
속이 타는지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 태영은, 팔을 의자에 올려 몸을 뒤로 젖히며 넓은 어깨를 활짝 열었다.
상 위의 주제는 누가 누가 더 힘겨운 시간을 보냈느냐였다. 각자가 지내던 곳에서 고생하며 예술하던 때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쪽으로 순식간에 집중했다. 다들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고,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흥미로워했다.
하나둘 취하는 이들이 나오기도 했다. 퍽, 퍽. 소리를 내며 사람들이 테이블에 이마를 박으며 쓰러졌다. 신파 같은 이야기와 눈물, 웃음이 만취를 이끌어 내고 있었다.
테이블 중간이 쓰러진 사람들로 빼곡해졌을 무렵, 태영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곧장 화면을 확인한 태영은 그제야 굳어졌던 표정을 풀고 제 앞에 놓였던 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굳이 묻지 않아도 얼굴이 활짝 편 것이 어떤 연락인지 알 수 있었다.
“건배?”
꼭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태영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새로운 잔을 쥐며 물었다. 테오, 그리고 에린은 기다렸다는 듯 잔을 부딪쳐 주었다. 별다른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몇 번 더 잔을 비우고 채우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테이블은 완전히 잠잠해졌다. 이제 테이블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이들은 셋밖에 없었다.
“요즘 기분 좋나 봐.”
테오는 잔을 내려놓으며 넌지시 물었다. 태영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사님 옆에 있는데 안 좋을 수가 있나.”
“너 없으면 다들 그 얘기 하는 거 알지? 이사님이 어쩌고, 대경이 어쩌고…….”
테오는 태영이 다른 일을 보러 갈 때면 대신 에린 옆을 지키곤 했다. 테오가 태영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지만, 그들은 태영이 없을 때면 종종 은재와 태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이 자리에서도 아마 그랬을 것이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태영은 정작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지만.
“요즘 기자 같은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
“…….”
“이상한 걸 캐묻고 다닌다는 소식도 있어. 알지?”
영국에서도 늘 염문을 뿌리던 알파여서 익숙한 것인지, 아니면 이럴 각오를 다 하고 들어온 것인지…….
약간의 염려가 묻은 말임을 알지만 태영은 다른 것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전에 시킨 거 알아봤어?”
“뭐.”
“페로몬 관련.”
[무슨 일 있어? 갑자기 그건 왜.]
테오와 태영의 대화를 듣던 에린이 슬쩍 옆을 살피곤 영어로 언어를 바꾸며 물었다.
“제 아는 분이 문제가 좀 있어서요.”
[요즘에는 흔치 않은데. 약도 잘 나오고.]
“그렇다고는 하는데…… 이전에 억제제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증상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약도 잘 안 듣는 것 같고.”
[그럼 지금 어떻게 지내는데.]
오메가인 에린은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다행히 페로몬 상성 맞는 사람을 찾았다고 했어요. 그 알파하고 지내는 것 같더라고요.”
[……페로몬 상성?]
“네.”
[그런 말은 또 처음 들어 보는데.]
몇 년 전 사별을 한 에린은 단번에 맥주를 절반 이상 들이켰다.
[이유가 억제제 때문인 건 확실해?]
“그 사람 주치의가 그렇게 말하던데요.”
[…….]
“왜 그러세요.”
“보통 페로몬 이상은 태생부터 그런 게 아니면 각인 때문에 그러는 걸로 알고 있어.”
페로몬 이상에 관련한 정보를 여러 방면으로 찾아보았던 테오가 이때다 싶어 말을 얹었다. 에린도 이 말이 하고 싶었는지 지그시 태영을 응시했다.
“그래. 대부분은 그렇다고 들었어, 나도.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아. 각인을 할 사람도 없고, 한 것 같지도 않고.”
“확실해? 각인 상대가 없는 거.”
테오가 다시 한번 묻자 소리 없이 태영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각인이라…….
“그런 건 아냐.”
하, 태영은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각인이라니.
제 페로몬이 지금은 그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불안정한 일이었다. 그래서 도움되는 약이나, 주치의가 알려 주지 않는 정보를 찾아내 도우려 한 것인데. 각인이라고?
은재가 제대로 사람들을 원 없이 만나고 다니지 않은 것은 제가 제일 잘 알았다. 그렇지만 혹시 히트 사이클을 달래 주었던 알파에게 각인을 한 걸까, 아니면 제가 어릴 적 보았던 그 애인에게 각인을 한 것일 수도 있지 않나.
심지어 그때 그 사람을 얼마 전 만났다고 했는데. 가정을 이룬 모습을 보고 저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각인은 아니겠지. 설마. 알면서도 보내 준 건 아니겠지.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그를 두고 떠날 생각은 못 할 테니까. 그런 사람을 보고 떠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만약 정말 각인을 했다면 최 박사님한테도 말을 안 했다는 건데, 설마 그랬을까.
“요즘엔…… 잘 안 하지 않나. 각인.”
“그렇기는 하지. 그래도 하는 사람도 있어. 우리 할아버지도 있고, 에린도 있잖아.”
그래서 에린이 사별 이후 더욱 힘들어했던 것을 태영도 알았다. 심적으로 반려를 잃어 슬픈 것과 함께 각인을 한 상대의 죽음에 육체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때 입은 큰 상처로 이제 에린은 오메가지만 페로몬을 내지 못했다.
[눈앞에 그런 사람을 두고 모른 척하는 건 무슨 매너야.]
“죄송해요.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태영은 사과를 하면서도 펄펄 끓는 속에 어쩔 줄을 몰랐다. 정말 은재가 각인을 했다면 어쩌지. 그래도 제가 페로몬 상성이 맞으니, 그가 에린처럼 페로몬을 잃거나 몸이 크게 상할 일은 없겠지만…….
“어떤 경우에 보통 각인을 합니까?”
“뭐, 예상한 대로일걸. 너무 사랑하는 경우. 자신도 모르게 의지하고 마음이 깊어져서 각인이 된다고 하던데.”
테오는 대신 대답하며 에린과 태영을 번갈아 살폈다. 에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다른 경우도 있다고는 들었어. 정확히 어떤 경우였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거의 없는 경우였던 것 같아.]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는 뜻이네요.”
[사실 그런 셈이지.]
“어쨌든…… 아닐 겁니다.”
아니어야지. 그렇게나 누구를 간절히 의지했을 리가 없었다. 은재가 그나마 의지한 것은 민 회장이 유일했다. 그 외에는 쉽게 제 곁에 사람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있었다면 어떡하지. 아직 살아 있을까. 그렇겠지. 하지만 그가 은재보다 먼저 죽으면 어떡하지. 아냐, 상성은 나도 맞으니까…….
만약 그가 아직도 마음에 있다면. 그래서 절 받아 주지 않는 거라면.
잔을 쥔 태영의 손등에 파란 핏줄이 매섭게 떠올랐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경우였다. 제가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에 만족하여 다른 경우는 상상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 마음속에 다른 이가 있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분이 솟았다. 그를 어떻게든 하고 싶었다. 그랬으면 왜 은재를 홀로 놔뒀느냐고. 왜 책임을 끝까지 지지 못했냐며 드잡이를 하고 싶었다.
영영 제가 그 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억울함이 뼈에까지 스몄다. 이런 가능성을 이제야 알게 된 저에게도 화가 치솟았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진작 처리했어야 하는데.
“아닐 거야. 일단 주치의가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래. 주치의가 아니라는데.”
[우린 이쯤에서 자리 옮길까.]
에린은 서늘해진 옆자리를 보며 말했다. 태영은 고개를 흔들며 일어섰다. 계산을 마치고, 그나마 정신이 남아 있는 듯한 이들의 손에 뒤처리를 맡겼다.
담배를 한 대 피운 후 멀지 않은 조용한 바로 자리를 옮겼다. 이전과 달리 몇 마디의 대화도 이어지지 않았다.
먼저 자리를 뜬 것은 테오와 에린이었다. 태영은 들어가서 연락을 하겠다 하곤, 몸에 도는 피 대신 알코올이 흐른다고 느낄 정도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택은 몇 개의 조명만 켜 둔 채 반쯤 어둠에 잠겨 있었다.
이때의 저택을 태영은 좋아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접할 수 있는 오묘한 분위기였다. 이 커다란 공간 안에, 높은 담과 커다란 정원으로 싸인 저택 안에 그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 유독 생생하게 와닿았다.
높은 담장 사이에 있는 문을 지나, 정원을 지나…… 태영은 이르게 차에서 내렸다. 낙엽이 바람에 나뒹굴고, 잎사귀들을 지나치고, 잔디를 흔드는 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적적한 공간을 지나 그리운 사람을 찾으며 저택 안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많이 마셨네.”
“네.”
살짝 비틀거리며 전실을 지난 태영은 멀거니 서 있는 은재를 발견했다. 느릿느릿 다가가 품 안 가득히 그를 끌어안았다.
그는 진작 돌아온 듯 편안한 차림이었다. 책을 읽고 있었는지 서재에서 느낄 수 있는 오래된 종이 냄새 같은 것을 묻히고 품을 내어주고 있었다. 태영은 그 품에 고개를 깊게 박아 몇 번이나 숨을 마셨다.
“술 냄새.”
“회식이 있었어요.”
“너무 많이 마셨다.”
“……죄송해요.”
“무슨 일 있었어?”
은재는 너무나 진하고 독한 술 냄새에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참고 태영을 안아 주었다. 하아…… 숨을 토한 태영은 짧게 안겨 있다, 곧 은재의 손을 잡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이윽고 은재를 침대에 앉히곤 그 품에 파고들어 안겼다. 이미 깊숙이 안겼음에도 단정하고 따뜻한 체향이 풍기는 몸에 더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요. 계속 연락 기다렸는데.”
“……아, 미안. 나중에 봤어. 오늘 세헌이랑 일이 있어서.”
다른 알파의 이름에 태영이 고개를 들어 은재를 마주 보았다. 각인……. 도통 머리를 떠나지 않는 그 단어가 불쑥 세헌의 이름과 뒤엉켜 떠올랐다.
그대로, 그냥 묻어 두려고 했는데.
“…….”
은재는 가만가만 태영을 내려다보다 곧 그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평소답지 않게 말을 삼키는 태영이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일이 많나.”
처음에는 머리카락을 만져 주는 것도, 체온이 닿는 것도 영 어색해했는데. 은재는 이제 자연스럽게 태영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었다. 점점 더 세게 끌어안는 손길에도 그저 제 품을 내어주고 있었다.
“일이 많아요.”
“…….”
“듬직한 알파 되기 힘드네…….”
옅게 웃은 은재는 태영이 제 배에 머리를 비비는 것을 잠잠히 지켜보았다.
“키스해 주실래요?”
평소보다 더 느리게 태영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흐릿하게 웃고는 있었지만 나른함이 가득해 보여 은재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인중에 가볍게 입술을 내렸다.
“……매일 이렇게 살면 좋겠어요.”
키스를 기대했는지 태영의 입술이 조금 벌어진 채 달싹였다. 그런데도 은재의 입술이 닿지 않자 직접 몸을 들어 입술에 매달렸다. 물기 어린 점막이 닿고, 아랫입술이 당겨지는 소리와 함께 짧게 입술이 닿았다.
“…….”
“…….”
술기운으로 인해 살짝 풀린 시선이 평소보다 더 짙었다. 감추어져 있던 정염이 이 순간 노골적으로 흘러나오는 듯했다. 태영은 대놓고 은재를 먹잇감처럼 훑으며, 열기가 차오른 듯한 시선을 던져 왔다.
나직한 숨이 목 아래로 넘어갔다.
그것을 꼭 아는 것처럼, 태영이 은재의 눈두덩이 위에 길게 입술을 내렸다.
“너무 예쁘다, 당신.”
“…….”
“정말 너무 예뻐서…….”
지나간 7년이 너무 아까워……. 태영은 설핏 눈썹을 구기며 은재를 향해 손을 뻗었다.
7년……. 그 말에 은재는 저도 모르게 목을 뻣뻣이 굳혔다. 둘을 갈라놓았고, 각자의 시간 동안 변화를 겪게 만들었지만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묻어 두었던 때였다.
특히나 요즘 같은 때에는 떠올리지 않던 시기인데. 갑자기 그 일을 왜…….
“너 정말 무슨 일…….”
“사랑해요.”
태영은 아픈 얼굴로 고백하며 기어코 은재의 얼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느리게, 너무나 느리게. 다가오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알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다가왔다.
아릿하게 열기가 전해졌다. 동시에 은근한 떨림이 은재의 뺨과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그 후에야 손이 다가왔다.
혹여나 제가 깨트릴까 봐, 상처를 입힐까 봐 느릿하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뺨을 건드렸다. 사랑해요……. 숨소리 같은 고백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
“…….”
그래서인지, 은재는 태영의 손이 제 뺨을 감싼 순간 터지려는 호흡을 참아야 했다. 그럼에도 태영은 기민하게 그 호흡에 반응했다. 뒤로 크게 물러났다가, 다시 조심스레 다가와 양손으로 은재의 뺨을 감쌌다.
각인. 그런 게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은재가 아팠을까 마음이 쓰였다. 그를 사랑했을지, 그런 상대가 있기는 한 건지, 있다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 시간 동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얼마나 아팠을지.
“아파요……?”
“……아니.”
은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뒤늦게 대답했다. 그 늦은 대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 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무런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손끝을 세워 은재의 이마와 콧대, 인중과 입술을 더듬어 확인했다.
페로몬 이상이라는 것만 밝혔으니 각인은 정말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자꾸만 마음이 뒤죽박죽 섞였다. 은재를 보기만 해도 치솟는 감정과 안타까움, 분노가 억눌러도 계속 고개를 쳐들었다. 이미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유치한 질투가 속을 태웠다.
이렇게 생겼구나……. 태영은 새삼스럽게 은재의 얼굴을 손끝으로 확인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왜인지 모르게 태영의 도드라진 울대가 더 크게 들썩이고, 고르지 못한 호흡이 그 끝에 걸려 거칠게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그 정제되지 않은 숨결에 은재는 작게 숨을 삼켰다.
“괜찮아요…….”
“…….”
“아프게 안 할게요.”
“…….”
“그냥…… 만져 보고 싶어서요.”
태영은 은재의 감정을 읽는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은재가 약간의 불편함이라도 느낄까, 조금의 고통이라도 느낄까 그답지 않은 연약한 소리로, 그렇게.
그런데 은재는 어쩐지 가슴이 저며지는 기분을 느꼈다. 자꾸만 무언가가 뭉근하게 가슴속을 헤집는 듯했다. 태영의 손은 단 한 번도 저에게 상처를 남긴 적이 없었다. 태영의 손이 아플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상처를 입히는 쪽은 주로 저였다.
그걸 아는데도 느껴지는 낯선 분위기에 불안이 슬며시 손끝에서부터 퍼졌다.
괜찮아요……. 태영은 한 번 더 말하며 은재의 눈꺼풀을 만져 보았다. 긴 속눈썹을 만져 보고 탄성을 뱉었다. 입술을 약하게 떨며 희미하게 닿는 은재의 육체에 감탄했다.
은재는 눈을 감은 채 그렇게 태영이 저를 만지게 놔 두었다. 신중하게 얼굴을 만지던 태영은 이내 은재의 손을 겹쳐 잡았다. 커다란 손이 깊숙이 깍지를 껴 오며 손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이제는 태영의 몸에 밴 독한 술 냄새가 몸으로까지 번지는 듯했다. 태영의 손이 닿았던 얼굴이 화끈거렸고, 또 숨을 쉴 때마다 술 냄새가 전해져 취기가 옮는 것만 같았다.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잡혀 있는 손에 시선이 향했다. 무형의 껄끄러움이 점차 몸 안에 번져 갔다.
“어땠어요? 7년 동안.”
“…….”
“저 없는 시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싶어요.”
7년 동안, 묻어두었던 상처 같은 게 떠올랐을까. 한국에 돌아와 생활해 보니 그때의 제가 미워진 걸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그런데도 태영은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은재는 더더욱 긴장하며 다음 말을 기다려야 했다. 그 떨어져 있던 7년을 원망할지, 떠나보내던 그 순간을 억울해할지 몰라 그저 기다렸다. 태영이 그 시기에 대해 입을 연 것은 지금이 처음이니까.
그 시간에 대해 이렇게 영영 덮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돌아올 이야기였다. 다시 그때의 이야기를 할 날이 다가온다면, 사과와 그 외 모든 것을 기꺼이 할 거라고. 원망을 해도 다 받아들일 거라고, 늘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게 지금 같은 때일 거라고는…….
“이제 페로몬 문제는 괜찮아지는 거죠.”
“…….”
“혹시 그때…… 누구 만났어요?”
“…….”
“그래서 당신이 아픈 건 아니죠?”
……아. 은재는 태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언젠가 그려 본 적 있는 장면이었다. 제가 각인한 상대가 각인에 대해 물어 오는 것. 너무나 당연히 제가 그 당사자가 아니라 생각하는 것.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지나간 연인들을 만드는 것.
진심을 슬쩍 내비친 태영은 조금 불안함을 드러내며 은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나 은재는 침묵했다. 그사이에 그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고. 내가 각인한 상대는 다른 이가 아니라 너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랬어도…….”
괜찮다고. 괜찮다고 태영은 말했다.
너무나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그러나 은재는 그 품에 안겨 숨을 골라야 했다. 자꾸만 둔탁한 통증이 느껴지는 가슴을 억누르려 애를 써야 했다.
당연한 일임에도. 발현열로 인해 발생한 예상치 못한 각인이었으니, 태영이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은재는 묘하게 지끈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태영이 다시 돌아온 이래, 이렇게 평온할 수가 없던 요즘이었다. 이렇게 지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흐려져 가는 금을 슬그머니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결국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처럼, 얇게 드리워진 평온의 커튼이 걷히고 있었다.
외면하던 현실의 서막이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제 제가 할게요.”
“…….”
“당신과 그 사람이 이루어지지 못했어도, 그래서 그걸 가지고 사는 것이어도 전 괜찮아요.”
……그래, 이렇게 모든 것이 아찔할 정도로 행복한 나날과 자신은 어울리지 않았다. 제가 언제부터 그랬다고. 결국은 이런 결말일 걸 알지 않았나. 놀랄 일도 아닌 것을.
다만 놀라운 것은, 치미는 배덕감에, 도덕심과 양심으로 인한 결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결국 달라붙어 있던 소문들이 이런 순간에도 영향을 미치는구나. 난 끝내 그 소문에서 벗어날 수가 없구나.
“다른 많은 알파들을 만났어도…… 괜찮아?”
사실은 알파들 사이에서 버티며 일을 하는 것이, 온갖 더러운 시선을 받으며 민 회장의 뒤를 잇는 것이 너무나 버거웠다. 오메가라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검증들과 눈빛들이 치가 떨리게 싫었다.
지금의 사업을 유지하고 키우는 것에 실력이 아닌 다른 것이 더해졌다는 눈총, 당연한 듯 제 옆자리를 상상하는 시선들…….
“네.”
태영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굳건하게 대답했다. 은재의 뺨에, 목에 존경과 애정이 모두 담긴 입맞춤을 내리며 대답했다.
그 대답이 누군가에게는 단단한 믿음의 기반이 되어 주겠지만 지금 은재에게는 아니었다. 외려 그 굳은 믿음의 대답이 은재를 그 소문 속 오메가로 만드는 것 같았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단 한 사람, 은재가 유일하게 품고, 애정을 나누어 준 알파에게는. 아직도, 영원히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하는 알파에게만큼은 그런 오메가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랬어도…… 괜찮아요.”
설령 그랬어도 괜찮다는 대답은 충분하지 않았다. 비겁한 생각인 것을 잘 알지만 은재는 조금 상처를 입었다. 스스로의 양심을 넘어서던 마음이, 왠지 모르게 태영의 앞에서는 허울을 벗는 그 마음이 수치를 당하는 것만 같았다.
태영에게만큼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그 대답을 원했던 모양이었다.
말한 적도 없으면서.
그런 마음을 알 수가 없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내가 널 영국에 보냈는데.”
“제가 간 거예요.”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잖아.”
“…….”
“7년 동안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했잖아.”
“돌아오지 못한 건…….”
얼핏 웃은 태영은 은재가 제 셔츠 단추를 푸는 것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건 당신 때문이네요.”
“…….”
“당신처럼…… 이사님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려고 버틴 거니까. 당신이 너무 멋있는 탓이야.”
“…….”
“걸맞은 알파가 되려고 보낸 시간이니까…….”
그렇게 대답하며 태영은 제 옷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손을 느꼈다. 그 역시 깊게 은재를 끌어안았다. 험악하게 갈라진 제 배와 등을 매만지도록 하며 은재의 옷을 벗겨 냈다. 다치지 않도록 허리를 꽉 끌어안고 눕혔다.
태영은 마치 숭배하는 것처럼 은재의 온몸에 흔적을 남겼다.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쓰다듬고 입술을 내리며, 그의 앞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제 발정이 욕된 것인 듯 굴었다. 처음 관계를 맺는 것처럼 거친 숨을 터뜨리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래서 은재가 먼저 태영에게 손을 뻗었다. 절 사랑한다는, 제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황홀한 생각의 알파를 끌어안으며 다리를 벌렸다.
정말…… 다시는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 정도의 아찔한 정사였다. 시선에도, 손길에도 절절한 감정이 묻어날 정도로 넋을 빼놓는 그런 정사였다.
애정이라는 것을 사람으로 빚어 놓으면 이 남자가 되지 않을까. 곳곳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부산물들을 사랑이 아니라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연정의 집약체인 순간이었다.
그래서 더 눈꼬리가 뜨거워졌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태영은 은재의 눈시울이 조금씩 젖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절정으로 인해 흘리는 눈물인 척 굴어도 그랬다.
은재는 계속해서 제가 비겁하다고 느꼈다. 상처받을 위치가 아니었다. 이것이 순리이고, 정해진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저를 사랑한다 말하는 태영의 애정이, 제가 애써 규정하려고 한 그런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확실해질 정도로 깊고 곧아서 아득할 정도였다.
그 분명한 애정과 공연히 쓸쓸해지는 마음이 더욱 괴리를 일으키며 눈을 적셨다. 올곧게 마음을 받지 못하고 비틀어 생각하는 제가 싫어 더 괴로웠다.
아무도 없었다고 말하면 될 것을, 뭐가 어려워 말을 하지 못하는 걸까.
그것을 알면서도 연신 가슴을 베는 둔탁한 날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 감정 때문이었다.
별 볼 일 없는 몇 마디로 상처받은 마음이 감정을 깨닫게 만들었다. 조금씩 태영을 떼어 낼 수 없다고 받아들이던 만큼, 어쩌면 감정이 도덕 따위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받아들이던 때이던 만큼…….
태영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태영과 다정한 밀어를 속삭이고만 싶었다. 감히 그런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되는 제가 약한 모습을 보여 주며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모두가 저를 그렇게 본다 하더라도 태영만은 예외였으면 했다.
왜냐하면…….
……저 또한 태영을 마음에 품고 있었으니까. 그와 비슷한 감정으로.
* * *
은재는 이른 시간 일어났다. 절 꽉 끌어안고 도통 놓지 않는 그 손을 힘겹게 풀며 침대를 벗어났다.
“……읏.”
미처 두 걸음도 걷기 전에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지만.
원래 태영과 정사를 치르고 나면 늘 있던 일이기에 개의치 않고 숨을 고르며 일어섰다. 지끈거리며 온몸의 살갗이 저린 통증을 외면하며 욕실로 향했다.
기대와 달리 씻는 동안 컨디션은 더욱 나빠졌다. 아무리 씻어도 몸에 달라붙은 다른 알파들의 페로몬이 씻기지 않는 듯했다.
막상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태영의 몸에 여러 페로몬이 묻어 있는 줄도 몰랐는데.
한동안은 다른 알파들의 페로몬을 가까이해도 이전처럼 발작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태영의 페로몬으로 인한 영향이라 생각했는데, 오늘은 이전처럼 힘든 기분이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났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오랜 시간을 들여 겨우 씻고 나온 은재는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잠든 태영의 이마를 잠시 문질렀다. 온기가 서린 손가락을 한번 말아 쥐었다가 방을 나섰다.
“태영이 일어나면 해장국 좀 챙겨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 식사는 어떻게 준비할까요?”
“전 속이 안 좋아서 식사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요즘 계속 그러신 것 같은데. 죽으로 올릴까요.”
“괜찮습니다. 일찍 나가 보려고요.”
방을 나서자 온몸의 뻐근한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은재는 손바닥을 아프게 눌러 버티며 서둘러 차에 올랐다. 그러나 통증은 심해지기만 했다.
“……아.”
“괜찮으십니까?”
조수석에 타 있던 강 비서가 뒤를 살피며 물었다. 은재는 가시지 않는 두통과 왠지 모를 복통에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차는 이제 겨우 정원을 벗어나 도로에 올랐는데 은재의 컨디션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제 태영의 몸에 묻어 있던 그 페로몬들이 별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식은땀마저 맺히기 시작했다.
“이사님.”
“……최 박사 연락 좀 해 보세요.”
“네.”
그대로 차는 급히 회사가 아닌 병원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병원 입구엔 연락을 받은 최 박사가 나와 있었다. 은재는 강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VIP 통로로 모습을 감췄다.
간단한 검사를 받는 동안 품 안의 핸드폰이 연거푸 우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은재는 핸드폰을 꺼내 보지도 않았다. 벽에 기대어 심호흡을 하며, 아직 남아 있는 통증을 잊어 보려 했다.
“이사님.”
검사가 끝나자마자 최 박사가 제 방으로 은재를 안내했다. 은재는 고요한 복도에서 벗어나 그의 방으로 향했다.
최 박사는 따뜻한 차를 먼저 내어 주었다. 도통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없이 불편한 속이지만, 은재는 컵을 손에 쥐고 몸을 데웠다.
그렇게 이유 없는 떨림이 가신 후에야 최 박사가 입을 열었다.
“일단 크게 증상의 원인으로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페로몬 상태도 원활하고 괜찮습니다.”
“페로몬 이상으로 인한 증상이 아니란 말씀이시네요.”
“네. 페로몬 샘을 찍어 보았는데 그것도 정상으로 관찰됩니다.”
“그럼 왜 컨디션이 이렇게 나쁜 건가요.”
다른 곳에 또 이상이 생긴 건가. 은재는 덤덤히 생각했지만 최 박사는 숨을 몰아쉬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명확한 원인은 현재로서는 찾기가 어렵지만, 정확한 검사를 위해 2주 정도 뒤에 다시 확인하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지금은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뜻인가요.”
“그게……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이는 게 있습니다.”
최 박사가 초음파 화면을 보여 주며 한 곳을 가리켰다.
“이렇게 하얗게 보이는 것이 있는데, 아직은 무엇인지 확신하기가 어렵습니다. 별거 아닌 것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조금 더 추적을 해 보는 편을 권해 드립니다.”
은재는 잘 보이지도 않는 아주 작은 점을 응시했다.
“위치가…….”
어쩐지 최 박사는 난처한 얼굴로 이리저리 말을 돌렸다. 은재는 외려 침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확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최 박사는 여전히 주저했다. 그러다 은재의 손에서 식은 차를 가져가 다시 따뜻한 차를 한 잔 놓아준 후에야 말을 꺼냈다.
“이사님, 이사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정신을 차리니 저택이었다. 은재는 제 손목을 거세게 붙잡아 오는 손길에 시선을 돌렸다.
“괜찮으세요?”
태영이 차가 멈춘 지는 한참이 되었는데도 도통 내리지 못하는 은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 진한 걱정이 서려 있었다.
“……응, 괜찮지.”
“불러도 못 들으시고. 오늘도 계속 전화도 안 되고.”
“좀 바빴어.”
“…….”
“나갔다 왔나 보네.”
은재는 태영의 손을 지그시 놓으며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딘가 멍해 보이는 얼굴에 살짝 신경이 곤두서 있던 태영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전화를 내내 받지 않았던 것부터 지금의 모습까지……. 마치 그는 저를 피하려는 듯 굴고 있었다.
“일하는 건 어때. 김 교수 꽤 까탈스러운데. 그래도 벌써 한 달 가까이 된 것 같다.”
“그럭저럭 적응했어요. 지금은 각자 구상하는 단계기도 하고……. 이사님 안색이 별로 안 좋아요.”
“밥은.”
“아직요. 이사님은요.”
“난 먹었어.”
이사님. 태영은 어딘가 다급하게 은재의 손목을 붙잡아 왔다.
“저 어제…… 뭐 실수했어요?”
드문드문 기억이 남아 있었다. 제가 간절하게 애정을 고백하던 모습. 그리고 왠지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던 은재.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지만, 은재의 눈꼬리가 붉어지던 모습이 생각나 견디기가 어려웠다. 좀처럼 크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라 그 붉어진 눈꼬리가 정말 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속해서 마음에 그 잔상이 남아 펴기 어려운 흔적을 남긴 채 구겨지고 있었다.
“아냐.”
하지만 은재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곧 김 교수랑 후원사들 자리가 있는데 너무 사업을 못 챙긴 것 같네, 요즘에.”
“이사님.”
“네 보호자로서도…… 별로 못 챙겼고.”
일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닌데도 애꿎은 일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방점을 찍어 강조하는 듯한 보호자라는 글자에 태영은 이를 악물었다.
“제가 어제 무슨 말 했는지 말해 주세요.”
“별 말 안 했어. 그냥 주정.”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저 불안해요.”
하필…… 하필 어제 이야기했던 것이 각인에 대한 것이었다. 태영은 존재하지도 않는 은재의 각인 상대에 대해 아직까지 펄펄 끓는 질투를 갖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은재의 건강을 상하게 한 원망과 분노가 파랗게 끓고 있었다.
“정말 별 말 안 했어. 그래서 기억 안 나.”
은재는 어색하게 태영에게 손을 뻗었다. 머리를 만져 주려 했다. 하지만 태영은 그 손을 붙잡아 당기며 와락 껴안았다. 그러자 은재는 움찔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그게 어쩐지 저에 대한 거절인 것 같아 태영이 더욱 힘주어 껴안자 은재가 곧 숨을 내쉬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곤…… 그저 가만히 안겨 있었다.
“아파, 태영아.”
“…….”
“그렇게 안으면…… 몸이 아파.”
그게 너무 낯설고 어색해 은재의 말에도 태영은 더더욱 힘을 주어 안았다. 힘없이 떨어져 있는 은재의 손을 들어 올려 제 어깨에 얹고, 허리에 얹어 보았지만……. 그렇게 얹고만 있을 뿐 은재는 마주 안아 주지 않았다.
“멀어지지 마세요, 이사님.”
“…….”
“저 이제 이사님 곁에서, 절대 안 떨어져요. 그러니까 밀어내지도 마세요.”
은재는 아직까지 뿌연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갈 방향을 알면서도 발을 내딛기 힘들었다.
“……안 멀어져. 너 안 밀어내.”
“…….”
“그냥 좀, 피곤해서.”
제가 발을 옮겨야…… 태영이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텐데. 그러나 그보다 앞선 태영이 이제 막 벌어지려고 하는 거리를 단번에 좁혔다. 발이 향하는 방향을 바꾸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씻겨 드릴까요?”
“아직 아래가 아파.”
“하려는 게 아니고…… 근데 아직도 아파요?”
인정하고 나니 그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크기를 키웠다. 은재는 태영의 애가 타는 얼굴에 덩달아 속이 쓰린 것을 느끼며 손을 마주 잡았다. 제 방으로 당연한 듯 들어서는 제 소년을 쫓아 걸으며 불안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제가 봐도 돼요?”
“……그러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상처 난 건 아니고요? 이런 경우 잘 없잖아요. 많이 아프세요?”
“할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었어.”
태영은 눈썹을 크게 구겼다.
“제가 이사님만 보면 발정하는 건 맞지만 참을 수 있어요. 그것 때문에 여쭤본 거 아니었어요.”
그러곤 손으로 굳어진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곧 몸을 숙여 은재의 눈썹 위에 입을 맞췄다.
그 한 번으로는 떨어질 수가 없는지 은재의 양쪽 눈두덩이에 오래 입술을 내린 뒤에야 태영이 몸을 일으켰다.
“컨디션 많이 안 좋으세요?”
“조금.”
“물 받고 나올게요. 목욕하고 일찍 쉬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은재는 태영의 귓바퀴를 짧게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손길을 느끼던 태영은 타이와 셔츠를 약간 느슨하게 만든 뒤 욕실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 위에 최 박사의 음성이 겹쳐졌다.
‘아직은 세포로 볼 수 있는 단계입니다. 원래라면 조금 더 커서 제대로 된 형태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 단계지만…… 페로몬에 오랫동안 이상이 있었던 것 때문에 성장이 더딘 듯합니다. 그리고…… 모체가 거부하는 경우에도 이런 형태를 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전처럼 반응을 보이는 겁니다. 페로몬 이상이 심할 때처럼요. 다른 알파들의 페로몬이 역하고 견디기가 힘드실 겁니다.’
‘아직은 수술이 적절하지 않습니다. 배아를 담고 있는 장기가 연약해서요. 조금 더 세포가 자라 장기가 안정되기를 기다리신 후에 수술을 하시는 편이 낫습니다. 수술은 간단합니다. 다만…… 페로몬 이상을 5년 이상 겪으셨기 때문에 중절 수술 후에는 페로몬에 더 큰 영향이 미치실 수도 있습니다. 다시 아이를 갖지 못하시거나,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으로도 몸이 돌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방적 각인의 위험성, 그에 따른 페로몬 이상이 미칠 영향에 대해 여러 번 경고를 들었지만 이런 방식으로 뻗어 나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태영의 아이. 정말 그게 배 속에 움튼 걸까.
제가…… 데려온 소년의 아이. 서둘러 관계를 바로잡으라 의미하는 것이 배 속에.
거슬리는 진동 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울었다. 은재는 복잡한 마음에 전화가 울자마자 발신인을 보지도 않고 응답했다.
“……네.”
―이사님. 저 류 전무입니다. 지난번에 연락 드렸는데 회신이 없으셔서…….
누군가 했더니. 은재가 뚜렷하게 반응하지 않는데도 전화 너머에서 류 전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조한미 작가 관련으로 연락드렸습니다. 반가워하실 것 같아서요. 작가들에게도 도움이었지만, 저희 미술관에도 큰 도움이시니까요. 제가 제대로 대접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
―괜찮으시면…… 자리를 한번 가지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별거 아닌 제안이니까 그냥 편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너무 늦게 자리를 만드는 것 같네요. 진작부터 저희 미술관을…….
그때 욕실에서 나온 태영이 은재의 앞에 무릎 한쪽을 꿇고 앉았다. 핸드폰 너머로 전해지는 남자의 음성에 불쾌한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가, 자연스레 핸드폰을 앗아 갔다.
“끊을게요.”
류 전무는 연신 ‘이사님, 이사님……?’ 하며 대답 없는 은재를 찾았다. 태영은 은재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왜 아직 옷도 안 벗고 계세요.”
은재는 묵묵히 일어섰다. 태영의 앞에서 재킷을 벗고, 셔츠를 벗으며 나신이 되어 갔다.
태영은 숨을 고르며 은재를 도왔다. 사용인이 된 것처럼, 가까이에서 시중을 들며 드러나는 나신을 샅샅이 눈으로 훑었다. 아이가 생겼다고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판판한 배와 아직까지 온 흔적이 울긋불긋하게 남아 있는 몸을 집요하게 살폈다.
이 배 속에 새 생명이 움텄다는 것을 들킬 리도 없는데, 은재는 절 훑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태영아.”
“네. 이사님.”
“아직도 누구 없니.”
“…….”
“이제……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
“때가 된 것 같아. 더 가면, 우리 안 될 것 같아.”
은재는 옷가지에서 담배를 찾아 물며 말했다. 태영은 묵묵히 은재의 발을 쥐었다.
“도대체 어제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네요. 왜 갑자기 이러시지.”
“…….”
“너무 절절하게 고백했나…….”
“…….”
“아직 제가 품은 감정 중에 채 절반도 안 보여 드린 것 같은데.”
피식 웃은 태영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몸을 숙였다. 은재의 흰 발등에 입술을 내리며 길게 탄식했다.
“이사님은 아직이신가 봐요.”
“……뭐가.”
“아직 절 사랑하지 않으세요?”
“…….”
“제가 생각할 땐 이사님도 저랑 비슷하신 것 같은데, 아직 아닌 것 같으세요?”
그러곤 종아리를 타고 올라와 무릎에 다시 길게 입술을 찍었다.
파르르…… 배 속이 떨렸다. 태영의 입술이 지나간 곳의 솜털이 일어서 살갗을 찌르기 시작했다. 불도 붙이지 못한 담배가 폐를 긁어내리는 것 같았다.
“할까.”
“아프시다면서요.”
“…….”
“이사님은 자기 몸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 안 돼요. 그렇게 아프다고 말하는 건 정말 많이 아프다는 거니까.”
태영이 고개를 들어 가까운 곳에서 은재와 눈을 맞췄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다가와 아주 희미한 웃음을 남기며 경직된 어깨를 문질렀다. 은재의 입가에서 담배를 빼내어 부러뜨리며 부드럽게 등을 타고 내려왔다.
“제가 다 할게요.”
“…….”
“제가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짐 제가 진다고.”
“뭘.”
“뭐든요. 그러려고 준비했어요, 계속.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요.”
어제도 그랬다. 은재는 어제 태영이 잠에 빠지기 전까지 제가 할 거라고, 제가 다 처리하겠다고 하던 말을 기억했다. 뭐든 제가 다 하겠다고. 무엇이든. 다 책임질 거라고.
아마 요즘 계속 퍼지고 있는 둘의 스캔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겠지.
참지 못한 은재가 끝내 손을 뻗어 태영의 뺨을 감싸 쥐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매만지고 쓸어내리며, 원 없이 뜨거운 체온을 더듬었다.
“전 이사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사실 잘 도망가고, 잘 숨는 사람인 것도 알고. 조금 늦게 깨닫는 사람인 것도 알고.”
“…….”
“그리고 이사님이 절 어떤 눈으로 보는지도 알아요. 그러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세요.”
제 뺨을 무릎에 비빈 태영이 은재를 안아 올렸다. 그런 다음 뜨끈한 훈기와 좋은 향으로 가득 차 있는 욕조에 그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몸을 감싸는 물과 함께, 은재는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 갇혀 허우적거렸다. 숨통을 조여 오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손을 뻗어 늘 뜨겁게 젖어 있는 입술을 물며 뒤통수를 당겨 깊게 혀를 섞었다.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이제, 이러면 안 되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태영은 은재가 다시 저에게 손을 뻗은 것이 몹시 기쁜 것처럼 그를 꽉 안아 주었다. 정성스레 온몸을 어루만지며 빈틈이 느껴지지 않도록 전심을 다해 안았다. 은재도 태영의 어깨를 붙잡아 눈을 내리감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그대로 꺼트렸다.
그리고 그 비겁함을 책망하기라도 하듯, 바로 다음 날 강 비서가 다급히 방문을 두드렸다. 그의 손엔 급하게 막은 기사가 들려 있었다.
아직 실리지 못한 기사의 내용은 태영에 관한 것이었다.
대경 그룹에서 후원하고 있는 신사업에 재원 문화 재단, 그러니까 태영이 이끌고 있는 문화 재단 소속의 예술가들이 여러 명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집중 보도였다.
누가 보아도 태영과 은재를 이상한 그림으로 엮고 있었다. 은재의 쪽에서 태영의 편의를 봐주며 사업을 키울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었다. 대경이 그 문화 재단의 실질적 대표이자, 뒷배라는 주장이기도 했다.
태영의 사업이, 태영의 노력들이 난도질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은재는 급히 출근길에 올랐다. 조금 더 아린 듯한 배는 익숙하게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