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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전화를 얼마나 했는데 이제 와! 지난번에 우리가 사람 찾는 공고 낸 거 적당한 사람이 구해져서…….”
태영의 자리 쪽에 다리를 뻗고 앉아 발을 까딱이던 테오는 자리 주인이 등장하자 벌떡 일어섰다. 들으면 분명 반가워할 소식을 전하려 했는데…….
“누구 죽이고 왔냐?”
들어선 태영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눈썹을 긁으며 표정을 가다듬고는 있었지만, 턱이 딱딱하게 굳은 것이 딱 보아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아, 날 죽이러 왔나?”
테오는 그 날카로운 시선 끝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알고 뒤늦게 약간 주춤거렸다. 뜨끈한 김을 내는 커피를 향해 뻗으려던 손도 공중에서 멈추어 버렸다.
“말해. 빨리 듣고 가게.”
“…….”
“빨리.”
제대로 된 차림을 갖추고 있었지만 어딘가 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무언가 다급한 일이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눈빛도 맛이 간 것 같았고, 분위기도 평소보다 더 야릇했다. 펜싱 경기를 온종일 하고 나온 직후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마치 러트 직전의 알파 같은 눈동자였다. 테오는 최대한 그 눈동자를 피하며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공고 낸 거 대충 다 추렸는데 라인업이 괜찮아. 네가 원했던 사람들도 있고. 한번 확인해서 이제 마무리하면 되겠어.”
“아, 그래. 그래야지.”
태영은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오는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고개를 꺾으며 우두둑 소리를 내더니 하…… 하며 낮은 숨을 터뜨렸다.
“줘 봐.”
당장이라도 돌아갈 것처럼 굴더니. 무심한 생김새와 달리 꼼꼼한 구석이 있는 태영은 손을 뻗어 정리된 명단을 한 차례 확인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네.”
“어. 이전에 김 교수랑 작업했던 작가도 있고.”
그는 곧장 명단 위에 체크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무서운 속도로 작업물과 이름을 번갈아 확인한 태영이 금세 필요 없는 인원을 정리한 명단을 다시 넘겨주었다.
“이렇게만.”
“……작업물 이름만 보고 뭔지 다 기억해?”
“그거 기억 못 하면 재단 대표라고 하겠어?”
“…….”
테오는 조금 질린다는 얼굴로 체크된 명단을 빠르게 확인했다. 태영은 크게 가슴을 부풀려 숨을 마시더니, 곧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물병을 쥐었다.
“다들 어디 있는지 소재 파악했지?”
“응. 한국에 들어온 사람도 있고, 외국에 있는 사람도 있고.”
“들어오라 그래.”
“그러다가 안 되면 어쩌려고?”
“될 거야. 들어오라고 해. 내가 책임진다고.”
울대가 몇 번 들썩이는 것으로 병은 비워졌다. 빈 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그는 발끝으로 테이블을 한번 툭 치며 넌지시 말했다.
“신 의원 알지?”
“신주평?”
“어, 예전에 미아 킴하고 뭐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 응. 있었지. 지독한 불륜.”
“미아 킴은 지금 뭐 하고 있지?”
“그때 파문이 좀 컸어. 한국에서는 찌라시 정도로 그친 것 같은데, 뒤에선 난리도 아니었거든. 교수로 일하던 학교에서도 잘리고 그해 말에 잡혀 있던 독주회도 취소되고. 독일 심포니랑 협연 공연도 있었는데 그것도 당연히 취소됐어. 지금은 음반만 내는 것 같던데. 주로 OST 쪽에서 일하는 것 같고.”
“프랑스 국적이잖아. 우리나라보다는 불륜에 열려 있는 나라들 아닌가?”
“직전에 미아 킴이 학장하고 결혼을 발표했거든. 그 학장이 불륜으로 전처와 이혼한 상태여서 반응이 거셌어. 전처가 학장한테 각인을 했다는 소문이 있기도 했고. 그리고 사적인 영상이 있니 마니 해서 더 요란했을 거야. 왜, 신 의원 한동안 그래서 이미지가 그랬잖아.”
굳이 더 많은 일을 파지 않아도 자기가 과거에 뿌려 놓은 일로 자연스레 구덩이에 묻히겠는데. 태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아 킴 컨택해 봐. 좋은 소식 있는데 같이 할 거냐고.”
“무슨 소식.”
테오는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피아니스트 미아 킴의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신 의원이 자꾸 건드리네.”
“누굴. 널?”
“어. 안 그래도 정리하려 했는데 당장 해야겠어. 더 놔두면 안 되겠어.”
파티에서 무슨 일이 있었구만. 테오는 상황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정보를 찾기만 했다.
한국에서 태영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들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는 게 제 안위에 좋았다. 그저 가십을 열심히 듣고 캐 모으며 시키는 일만 하는 게 편했다. 언제나처럼 재단 운영은 그가, 그의 뒤처리와 재미난 일은 제가.
“그리고 아직 그 장부 갖고 있지? 그림 뒤의 봉투.”
“당연하지. 내가 매일 확인하는데.”
“그래.”
“그것까지 터트리려고?”
“준비는 해 놓자고.”
태영의 문화 재단은 신인들의 자립을 주로 돕는 단체였지만, 꽤 실력 있는 작가들의 개인전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얻게 되는 정보들이 있었다.
돈이나 명예, 혹은 권력 따위가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은 여러 가지 은밀한 방법으로 자신들끼리 거래를 하곤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림이었다. 작가들의 그림을 사고팔며 그 뒤에 비밀스러운 것들을 함께 주고받았다. 가볍게는 돈부터 정보, 하얀 가루 같은 것들이 있었고, 그림 자체를 탈세와 같은 적절하지 못한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그런 일을 눈감아 주며 사이에서 돈을 챙기는 작가와 매니지먼트들도 있었으나, 태영의 재단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은재에게 인정받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니 구린 냄새가 나는 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문화 재단이 커질수록 재단 쪽으로도 은밀한 제안은 물밀듯이 밀려왔다. 제안을 받아들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 내역은 장부 한구석에 정리되고 있었다. 의도치 않은 비리 장부인 셈이었다.
역시 신 의원은 이런 자리에 빠질 위인이 아니었고.
어느새 태영은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묘하게 상기되어 있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신 의원의 몰락을 구상하고 있었다.
“파티가 아주 재밌었나 봐.”
테오는 이때다 싶어 슬그머니 말을 얹었다. 태영은 테오를 바라보며 피식 헛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넘어가는 거야.”
“……뭘.”
“고작 이딴 소식으로 그렇게 전화를 해댄 거.”
“너 이 사업 따내라고 개지랄을 했거든? 나를 그렇게 들들 볶아 놓고는 이제 와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생했어. 아직 사업 참여 확정 난 건 아니니까 조금 더 고생하고.”
턱을 매만지던 태영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커피를 내려다보며 쯧, 혀를 찼다.
“일단 찌라시부터 만들게. 미아 킴하고 연락되면 그 뒤에 본격적으로 작업하면 돼.”
“그래. 그리고…… 페로몬 문제에 대해 좀 잘 아는 의사 있나?”
제 품을 뒤적거린 태영은 지갑을 꺼내 들었다. 테오의 시선이 당연한 듯 그 지갑을 향해 고정되었다.
“좀 알아봐. 페로몬 이상이라는 증상에 대해서.”
“페로몬 이상? 왜 미아 킴 때문에? 흔치 않은 증상인데 요즘엔.”
“들어 봤어?”
“미아 킴이 결혼을 발표했던 학장 전처가 그 증상으로 고생했다는 소문도 잠깐 있었어. 그거 아니면…… 아주 예전에 들어 본 것 같아. 우리 할아버지가 그런 증상이 있으셨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할머니한테 각인을 하셨는데 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셨거든. 그 뒤로 그러셨던 것 같아.”
“어쨌든 알아봐. 자세하게.”
자. 태영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검은색 카드를 손가락 끝에 걸쳤다. 테오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대표님.”
“전화는 작작해. 눈치를 좀 키우든가. 연락 안 받을 땐 이사님이랑 있는 거 몰라?”
“넵. 시정하겠습니다.”
그래도 커피는 제일 크고 비싼 거 사 먹겠습니다. 테오는 카드를 잘 챙기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이사님 뵐 수 있겠네.”
“응. 제발 나도 소개 좀 시켜 줘라. 도대체 이사님 얼굴 언제 보는 거야. 맨날 기사로만 보고! 너무 궁금해.”
“사업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간다.”
테오의 어깨를 세게 한번 쥐었다가 놓은 태영은 낮게 숨을 뱉었다. 그대로 뚜벅뚜벅 사무실을 걸어 나가더니, 문을 열기 전 다시 돌아보았다.
검고 날렵한 카드를 이리저리 만지며 감탄하던 테오는 서둘러 카드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통 큰 그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나 카드를 뺏어 갈까 가슴 앞주머니에 넣고 어색할 정도로 활짝 미소를 지었다.
“조한미 작가 전시회 소식 없나?”
“조한미? 조한미……. 아, 누굴 말하나 했네. 얼마 전에 공모전 수상한 작가 말하는 거지?”
“그건 모르겠고.”
“맞을 거야. 그래서 그때 수상한 작가들 그림을 얼마 전에 일성 산하 미술관에서 전시했거든. 그때 대경이랑 WB에서 그림 사 갔다고 들었는데. 덕분에 엄청 유명해졌어.”
태영의 머릿속에서 은재가 그림을 바라보던 장면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그 그림을 임 대표에게 선물하며 자신 있어 하던 그 얼굴도.
“꽤 오래 무명이었나 봐. 이번 공모전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는 모양인데 잘됐지. 곧 개인전 준비한다는 소식도 있고. 컨택해 봐?”
“적당히 부담 안 느낄 정도로. 이왕이면 전시회 티켓도.”
“이사님이랑 가려고?”
“설마 너랑 가진 않겠지.”
테오는 세 번째 손가락이 꿈틀거리는 것을 참으며 제 주머니 안에 든 검은색 카드를 떠올렸다. 그것으로 모욕을 참을 이유는 충분했다.
태영은 차로 돌아와 곧장 은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은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자는 건가. 피곤하긴 하겠지.
어제 파티가 끝난 이후, 그들은 꽤나 끈질긴 밤을 보냈다. 하루가 얼마나 길었는지. 밤이 지나고 새벽이 열리고, 또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태영은 은재를 놓아주지 않았다. 은재의 아슬아슬한 섹스 강습을 들어 가며 정성스레 그 몸을 애무했다. 그 몸의 조임을 만끽하며 한참이나 몸속에 머물렀다. 끊이지 않는 쾌락과 환희를 느끼고 또 느꼈다.
“……아.”
“깼어요?”
그러고도 아쉬워 그 몸에 머물러 있었는데.
기절한 듯 잠들어 있던 은재가 문득 앓는 소리를 내며 눈꺼풀을 떨었다. 짧게 눈을 붙이고 일어나 은재의 잠든 얼굴을 지켜보던 태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흐읏…….”
그러자 은재가 배를 말아 쥐며 속눈썹을 더욱 크게 떨었다.
“왜요. 어디 아파요?”
태영은 몸을 기울이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 몸짓에 은재는 가쁘게 숨을 뱉으며 태영의 허벅지를 간신히 붙잡았다.
“왜, 아직도 안 빼고…….”
“너무 좋아서요. 해도 해도 좋아서 못 뺐어요.”
“읏…… 빼. 불편해.”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게요. 너무 아쉬워요.”
하지만 태영의 것은 은재가 버둥거리기 시작하자 다시금 커지기 시작했다. 은재는 그 세밀한 감각을 모두 느끼며 숨을 삼켰다. 어느새 깨끗하게 바뀐 침대 시트를 꾹 말아 쥐며 붉어지는 얼굴을 이불 속으로 숨겼다.
“작은 태영이가 나가기 싫다는데.”
“……정말 변태 같다.”
절 끌어안고 있는 이의 쪽을 돌아보려던 은재가 애꿎은 제 뺨을 붉히며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했다. 태영은 그 대신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누르며 은재를 꽉 끌어당겨 안았다.
자연스레 삽입이 깊어졌다. 점점 더 태영의 것이 힘을 받아 제대로 일어서기 시작했고, 은재의 퉁퉁 부은 내벽 안을 뭉근하게 누르며 자극했다. 가시지 않았던 성감을 불러일으키며 역시 퉁퉁 부은 젖꼭지를 건드렸다.
“이것 봐요. 작은 태영이가 자꾸 커지는데.”
“그만 커지라고 해.”
“제 맘대로 안 돼요. 원래 꼬마들은 말을 안 듣잖아요.”
슬쩍 태영이 허리를 뒤로 빼냈다가 깊게 찔러 왔다. 아……. 장탄식과 함께 은재가 고개를 젖혔다. 절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몸에 젖힌 고개를 기대며 다리를 슬그머니 벌렸다.
태영의 손이 은재의 성기를 스쳐 회음부를 만지작거렸다.
“세울까요?”
“……아냐, 괜찮아.”
은재의 성기는 고작 반밖에 서지 않았다. 어제 사정을 몇 번이나 한 덕에 아직 이른 시간인 지금은 만들어질 정액도 없었다. 반이나 일어선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안 싸도 되겠어요?”
“괜찮아.”
그렇지만 태영은 영 아쉬운지 천천히 성기를 빼내고 넣기를 반복했다.
아직도 내벽은 물기에 젖어 있었다. 빼내지 않은 제 흔적이 남아 축축하고 따뜻했다. 넣으면 제 것을 야무지게 조여 물었고, 볼록 튀어나온 곳을 긁으며 빠져나가면 끝까지 물며 태영을 자극했다. 두꺼운 성기가 오갈 때마다 백색의 액체가 삐져나와 툭툭 떨어졌다.
“……하아. 너무 커, 태영아.”
은재의 입에서 더 나른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반 정도 일어섰던 성기가 꺼덕이며 힘을 얻기 시작했고, 창백했던 뺨에도 열기가 감돌았다. 태영이 조금 더 본격적인 자세를 잡으며 다리 한쪽을 붙잡았다.
“너무, 커요?”
“……응. 배가 나오는 것 같아.”
서서히 태영의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꼭 닫혀 있는 내벽 안 장기의 입구를 건드려 가며 깊게 넣었다가 빼고, 또 깊게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작은 태영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 몸을 부풀렸다. 어제 노팅한 몸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노팅을 원하는 것처럼 부어오른 내벽을 선단으로 찔러 댔다.
점차 속도가 빨라졌다. 아예 삽입하기 편하게 자리를 잡으며 성기를 끝까지 욱여넣었다.
삽입이 더 깊어지고 진득해지자 은재는 버티지 못하고 흐윽, 소리를 뱉었다. 쾌감과 찾아오는 통증이 지금은 더 선명한 듯했다. 이불을 붙잡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빼……. 태영아. 아파.”
어제 노팅을 했던 내벽이라 약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그 큰 흉기를 머금고 있었으니.
태영은 제 모양대로 완만하게 솟은 배를 지그시 누르며 드러난 어깨와 목에 입술을 내렸다. 제 흔적을 매달고 있는 흰 피부 위에 입을 맞추며 혀로 그 위를 문질렀다.
은재는 창살에 꽂힌 듯 움직이지도 못했다. 몸에선 떨림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이불을 붙잡은 손을 덮어 도닥여도 가쁜 숨이 가늘게 흘렀다. 태영은 이런 때에 그를 더 많이 만지고 입을 맞추어야 하는 걸 알았지만, 마음이 약해져 허리를 뒤로 물렸다.
“……아.”
조금 더 쉬어 갈라진 소리가 말라붙은 입술을 가르며 흘러나왔다. 태영은 부러 느릿하게 허리를 빼내며 바르르 몸을 떠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랫동안 길을 내고 몸을 가르고 있던 성기가 빠져나오자, 그 사이로 정액이 흘러내렸다. 태영은 근처에 놔두었던 수건으로 은재의 다리 사이를 닦아 주며, 힘 빠진 허벅지 사이와 회음부에 입술을 내렸다.
은재는 그런 태영을 밀어내고 싶었으나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채 몇 시간 눈을 붙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어제는 파티에 노팅까지. 기운이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너 좀 잤어?”
은재는 발끝을 둥그렇게 말며 애써 터지는 신음을 삼켰다. 아직도 태영은 정성스레 은재의 몸을 닦고 있었다. 아직도 안에서 새어 나오는 정액을 발견하고는 다시 다리를 들어 제 어깨에 걸치곤 두 손가락을 그 안에 찔러 넣었다. 읏, 은재가 눈을 구겼다.
“안에 있는 것만 뺄게요. 자꾸 새어 나와서요.”
“……내가 해도 되는데.”
“제가 할게요. 제가 싼 건데.”
태영은 여전히 무섭도록 발기한 것을 드러낸 채 내벽 안을 긁어냈다. 생각보다 상당한 양의 정액이 그 손가락을 타고 한참이나 흘러나왔다.
새삼스럽게 태영은 제 손가락에 묻은 정액과, 은재의 그 좁은 비부를 타고 흐르는 정액을 보며 낮은 숨을 토했다.
“키스해 주세요.”
이미 잔뜩 발기해 있던 것이 또 선단을 부풀리려 했다. 오메가의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데도 노팅을 하고자 더한 흥분 상태에 들어섰다.
“…….”
“네? 이사님……. 키스해 주세요.”
태영은 제 손을 닦지도 못하고 은재의 품 안에 안겨 들었다. 은재는 잠시 애타게 절 응시하는 태영을 마주 보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어리광을 피우듯 태영이 그 손에 뺨을 비비며 두툼한 흉기를 은재의 몸에 문질렀다. 애교를 피우는 상반신과 달리, 노골적인 하반신은 희고 늘씬한 몸에 핏줄 선 것을 문지르며 제 정액을 싸지를 곳을 찾고 있었다.
은재는 묵묵히 다리를 벌려 주었다. 태영은 숨을 터뜨리며 그 다리 사이에 제 것을 끼워 넣고, 회음부와 보드라워 보이는 성기 아래를 찔렀다.
“……아, 좋아요…….”
절 바라보는 밝은 눈동자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허리를 퍽, 퍼억! 쳐올렸다. 은재가 절 응시하고 있었다. 제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며 양손으로 제 머리카락과 어깨 같은 곳을 만지작거렸다.
아……. 은재는 점점 더 차오르는 성감에 끝내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지그시 입을 벌려 페로몬에 젖어 있는 공기를 호흡했다.
다리 사이가 다시금 뜨겁고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며 느리게 눈을 떴다. 언제 찾아왔는지 모를 떨림이 세차게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너무 야하네요. 이사님 느끼는 얼굴은.”
태영은 성급히 은재에게 달려들었다. 제 정액으로 인해 질척해진 은재의 성기와 다리 사이를 만지작거리며 깊게 키스했다. 껴안은 허리가 뒤로 하염없이 꺾일 정도로 붙잡으며 입술을 침범했다.
그야말로 침범이었다. 강제로 타인의 영역을 침투하고 침범하는 것처럼, 사납게 밀고 들어가 곳곳을 헤집었다. 은재의 몸인데도 은재의 것이 아닌 태영의 것이라 느껴질 정도로, 온갖 곳을 짓뭉개며 제 흔적을 남겨놓았다.
“……너 전화 와.”
그 난폭한 입맞춤을 방해한 것이 바로 테오의 전화였다. 이전부터 계속 울고 있었는데, 은재는 그 전화를 핑계로 태영을 밀어냈다.
“끊어졌네요.”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태영은 다시 키스했다. 은재는 곧장 일어서는 태영의 성기에 짓눌려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 그렇게 하고도 또 서는구나.”
“……음. 그렇게 말하니까 예전 이사님 같네요.”
“……응?”
“제가 더 어린 아이였을 때는 그렇게 말하셨잖아요.”
“그랬나.”
지잉, 전화가 끈질기게 다시 울기 시작했다. 태영은 태연히 그것을 무시하며 제 뺨으로 은재의 뺨을 간질였다.
“이제는 제가 평범한 성인 남자로 보인다는 뜻인 거죠.”
“……전화나 받아. 급한 일인 것 같은데.”
“아니에요. 제가 이사님 말고 급한 일이 어딨어요.”
아래를 세우고도 멀쩡해 보이는 태영은 은재의 목선과 쇄골을 손으로 그리다, 이내 유두를 콱 씹었다. 은재는 어린아이처럼 제 가슴에 매달려 혀를 할짝대는 커다란 남자를 그저 꽉 안아 주었다.
“태영아.”
“네.”
태영은 고개를 들어 은재를 올려다보았다. 나름대로 순수한 표정을 지으며 어릴 적 모습을 재현하려 했지만…….
그 거짓된 순수한 얼굴에 은재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 수염 났다.”
“아.”
목이 붉어진 태영이 이불을 젖히며 몸을 일으켰다. 제 목덜미와 뺨,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뒤늦게 황당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네요.”
은재는 누워 그 얼굴을 살폈다. 이제는 몸의 모든 선이 단단해진 태영. 저와 달리 아침이 되면 수염이 나는 태영. 그 아래로 드리워지는 그림자마저 커다란 태영.
“저 면도하는 법 좀 알려 주세요.”
“…….”
“면도할 줄 몰라서요.”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리는 태영. 은재는 손을 뻗어 태영의 거칠거칠해진 뺨을 문질렀다.
“난 따가운 거 싫어. 키스할 때 아파.”
“…….”
“예쁘게 하고 와.”
태영은 은재의 길쭉한 손가락이 닿자마자 그 손을 겹쳐 잡으며 입술을 내렸다. 이어진 말에는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으나, 쭉 손가락을 빨며 일부러 거뭇거뭇해진 턱으로 손등을 긁었다. 이로 은재의 손톱을 씹으며 입술로 그 위를 지분거렸다.
“그리고 또 전화 와. 이 정도면 급한 일이야. 받아 봐.”
은재의 안에 작은 태영이 머무르던 순간부터 울던 전화였다. 결국 태영은 침대에서 일어서 핸드폰을 확인하곤 숨을 크게 뱉었다.
“우선 씻고 올게요.”
“그래.”
“뭐 갖다드릴까요?”
“괜찮아.”
완전한 나신으로도 태영은 아무렇지 않게 침대를 벗어났다. 물을 따라 순식간에 비우곤 은재에게도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은재는 가까워지는 그 몸에서 애써 시선을 떼어 내며 잔을 받았다.
“진짜 씻고 올게요.”
“……응.”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은 더욱 탄탄했다. 긴 다리에 잡힌 근육이 더욱 선명했고, 너른 등짝에 붙어 물결치듯 움직이는 근육과 제가 남긴 흔적들, 떡 벌어진 어깨가 너무나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아직도 서 있는 음모 사이의 것은…….
“음. 기분 괜찮네요.”
뒷모습을 내보이며 가면서도 은재가 저를 훑고 있는 것은 알았던 모양이었다. 가운을 챙기던 태영이 벽에 기대어 은재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손은 자연스레 제 것을 쥐고 있었다. 핏줄과 근육이 곤두선 팔로 붙잡은 것을 당장이라도 흔들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게 보면 작은 태영이만 기분 좋아요.”
“……넌?”
“큰 태영이도 좋죠. 그렇게 봐 주는데.”
정작 은재 자신은 흰 나신 곳곳에 붉은 울혈들을 새긴 채 이불 사이에서 어떤 그림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지 조금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태영은 다시금 그에게 달려들고 싶은 것을 참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지나칠 정도로 시달린 은재가 이번엔 자리를 뜰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란 듯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남은 욕구를 터뜨렸다.
그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은재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웅크려 있었다. 태영은 그대로 커다란 이불 더미를 끌어안았다.
“저 잠깐 볼일 좀 보고 올게요. 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
“주무시고 계세요. 금방 올게요.”
은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태영은 그 위에 쪽쪽 입술을 내린 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그게 나오기 직전까지의 일이었다. 그 일을 생각하니 절로 속도가 빨라졌다. 도로를 가르는 차가 적정 속도를 넘겨 가며 주행했다.
그런 은재를 놓고 나왔다니. 다시 생각해도 몇 시간 전 제 모습이 대단했다. 태영은 이가 조금 더 갈리는 기분을 높이며 액셀을 더 밟았다. 육중해 보이는 SUV는 꽤나 날렵하게 도로를 달렸다.
“이사님은요?”
무서운 속도로 달려 저택에 도착한 태영은 뛰다시피 들어와 정 실장에게 물었다.
“3층에 계십니다.”
“3층이요? 왜 더 안 주무시고.”
“원래도 늦게 일어나는 건 질색하시는 분이신데요.”
“그래도요. 너무 못 주무셨는데.”
“안 그래도 커피 부탁하셨어요.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제가 가지고 올라갈게요. 주세요.”
정 실장은 오랜만에 지금의 그와 어릴 적 태영의 모습을 겹쳐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이라도 박차고 올라가고 싶었으나, 태영은 조금씩 퍼지는 커피 향을 맡으며 인내했다. 이것을 기다리고 있을 은재를 상상하며 다리를 꼬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때보다 더 많아진 디저트와 커피를 가득 담은 주전자가 트레이에 올라왔다. 이번에는 잔도 두 개였다. 예전과 달리 태영은 너무나 쉽게 트레이를 들어 올렸다.
“이건 좀 낯서네요.”
“네. 그렇네요.”
태영은 씨익 웃으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 실장은 점차 멀어지는 듬직한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다 곧 안쪽으로 사라졌다.
“잘 지내시죠?”
계단을 성큼 걸어 올라온 태영은 빼놓지 않고 복도 끝에 있는 민 회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곧 뵈러 갈게요. 이사님은 저한테 맡기고 편히 쉬세요.”
가볍게 묵례한 태영은 한 층을 더 올라갔다. 트레이 위에 올라온 것들을 바라보며 조심조심 걷던 때와 달리, 여러 개의 계단을 한 번에 밟았다.
3층. 책과 테이블로 꽉 찬 공간이었다. 그래서 3층 계단을 밟을 때면 오래된 종이 냄새 같은 것이 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끝에 옅은 꽃향이 배어 있었다. 절로 숨을 크게 삼키게 되는 은재의 향.
원래는 민 회장이 쓰던 집무실이었다. 태영이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제 방을 내어준 은재는 그때부터 이 공간을 이어받아 집무실과 서재를 겸한 용도로 사용 중이었다. 딱히 벽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 큰 공간에는 책이 가득했다. 안쪽의 커다란 테이블을 돌아가면…….
그 깊은 안쪽에 은재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볕을 받으며, 무수하게 쌓인 책과 공중을 떠다니는 먼지 사이에서 오도카니 서 있었다.
혼자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듯, 주변에 흘러가는 적요를 배경을 삼아 천천히 책장을 훑으며 책을 고르는 중이었다. 잠이 부족해 나른한 얼굴을 하면서도 늘어지고 싶지는 않은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책등을 만져 보았다.
입술을 씹고 쾌감을 느끼며 노팅에 괴로워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손에 영영 잡힐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왠지 모르게 다가가서는 안 될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창을 통해 볕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그가 원래 지니고 있는 빛이 넓게 퍼져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처럼 보였다.
아스라이 내리쬐는 빛 사이로 그가 산화되어 없어질 것만 같았다.
“…….”
태영은 소리 없이 걸어 은재에게 다가갔다. 제 눈앞에서 그가 사라지기 전에,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그를 놓치기 전에 소리를 죽인 채 서둘러 다가갔다.
“이거요?”
“아, 깜짝이야……. 언제 왔어?”
“지금요.”
조용히 트레이를 책상에 올려놓은 태영이 은재의 손이 닿을락 말락 하는 곳에 손을 뻗어 대신 책을 꺼내 주었다. 자연스럽게 태영의 품에 갇힌 은재가 그 책을 손에 쥐며, 가까운 곳에 있는 얼굴을 살폈다.
핏기 없이 눈동자만 천천히 움직이던 은재의 얼굴에 조금씩 표정이 감돌기 시작했다.
“금방 왔네.”
“네. 이사님 계시는데 어떻게 늦어요.”
다녀왔습니다. 그 표정을 가까이서 들여다본 태영은 웃으며 인사한 뒤 은재의 뺨에 키스했다.
“더 안 주무셔도 돼요?”
“피곤하긴 하네.”
“몇 시간 못 주무셨잖아요.”
“이따가 눈 좀 붙이려고. 지금은 막상 잠이 안 와서.”
깊게 숨을 마시며 커피 향을 삼킨 은재가 책을 내려놓고 주전자를 쥐었다. 두 잔에 동일한 양을 따르며 잔 하나를 태영에게 쥐어주었다.
“이제 커서 커피도 마셔.”
“이사님하고 섹스도 하고요.”
“……지나치게 노골적이야.”
“죄송해요.”
태영은 짓궂은 얼굴로 웃으며 짠, 소리 내어 은재의 잔에 제 잔을 부딪쳤다.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도 하는 행동에 은재가 슬쩍 눈썹을 기울였다.
“일은 다 했고?”
“네.”
“사업 관련된 거지?”
“네.”
커피는 진하고 따뜻했다. 밖은 어느새 가을에 가까워져 있었고, 공기에서는 여름과 가을의 냄새가 모두 느껴졌다. 바람은 차갑지만 볕은 따가웠다. 이제 뜨거운 커피와 책 한 권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계절이었다. 먼 곳에서 흔들리는 노란 들판의 행렬이 보이는 것만 같은 공기였다.
“좋은 기회가 있어서요.”
태영은 커피 한 모금을 더 머금으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은재의 손을 당연한 듯 잡아 깍지 끼며 제 허벅지 위에 올려 두었다.
“그 관련으로 이야기하고 왔어요.”
“응.”
“잡아야겠죠?”
“자신 있어 보이네.”
“네. 저한테 유리한 기회예요. 아무래도 영국에서 시작한 사업이니까, 이번 건을 잘 하면 한국에서도 자리 잡을 수 있고요.”
“너도 하고 싶고?”
은재는 제 배에 이마를 가져다 대는 태영을 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태영은 고개를 들어 은재의 울대와 부드러운 얼굴선을 훑었다.
그가 편안한 차림으로 일어나 책을 고르는 것도, 커피를 마시는 것도 이유 없이 아찔했다. 제 마음을 표현했음에도, 그래서 절 이렇게나마 받아 주고 있음에도 그는 여전히 멀어 보여서일까. 매번 닿아도 더 닿고 싶었다.
“네. 하고 싶어요.”
“그럼 해 봐. 좋은 기회라며. 안 할 이유 없어 보여.”
머리카락을 만져 준 은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영은 은재가 커피 잔을 내려놓는 것을 보자마자 그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포옹이 순식간에 깊어졌다. 태영은 조금의 틈도 없이 힘주어 은재를 끌어안으며 책장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이어 쏟아지는 페로몬에 은재가 놀라 몸을 뒤틀자 태영은 더 세게 손목을 구속하며 책장 쪽으로 그를 떠밀었다.
황급히 입술이 맞붙었다. 책장과 단단한 몸 사이에 갇힌 은재는 태영의 뺨을 쓸어내리며 진정시키려 했다. 왠지 모르게 흥분한 듯 보이는 아이를 진정시키려 제 호흡을 나눠 주었다. 살짝살짝 뺨과 턱을 만져 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수록 태영은 흥분했다. 이미 은재는 저에게 붙잡혀 갈 곳이 없음에도 연신 밀어붙이며 더 닿으려 했다. 그 움직임에 책장이 덜컹이며 책을 쏟아내려는 듯한 위협적인 소리를 터뜨렸는데도 그랬다.
결국 태영은 참지 못하고 은재를 들어 올렸다. 책상 위에 은재를 눕히며 페로몬을 풀고 입술에 매달렸다. 저의 감정과 무게를 쏟아 내며 가는 몸을 붙잡고 애타는 것처럼 사납게 키스했다.
“페로몬, 왜…….”
가까스로 은재는 태영을 피해 입술을 떼어 내며 물었다.
“제어가 안 돼요.”
“……제어가 안 된다고?”
“이사님만 보면, 자꾸 나와요. 자꾸 제 페로몬을 묻히고 싶어요. 제 거라고 소문내고 싶어요.”
짙어지는 페로몬에 은재는 금세 헐떡였다. 그 가쁜 숨을 토하는 목덜미에 태영은 입술을 내렸다. 뜨거운 숨과 함께 목을 핥으며 제 무게로 더더욱 은재를 짓눌렀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은재는 태영을 끌어안았다. 몸이 어디 안 좋은 거냐고, 혹시 페로몬에 문제가 생긴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진해지는 페로몬에 말이 막혔다. 부서진 소리만이 혀 위에 맴돌았다가 숨소리와 함께 흘러내렸다.
……사랑해요.
쿵쿵, 심장 박동 소리가 불쑥 큰 소리로 울리기 시작했다. 은재는 태영의 그 말이, 페로몬이 조절이 잘 안 된다는 그 말이 저를 향한 감정 때문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과하게 빨리 뛰는 심장 소리에 숨이 멎었다.
사랑해요, 이사님.
그 말에 은재의 심장 또한 경련하듯 떨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은재는 절 꽉 끌어안고 있는 태영에게도 전달될 제 박동에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저…… 각인을 한 알파의 고백이기에 심장이 뛰는 것이라 생각했다.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고 카페인을 부었으니, 이 박동은 감정으로 인한 것이 아닐 지도 몰랐다.
태영은 눈을 감으려는 은재의 눈꺼풀을 만지작거렸다. 눈물점이 찍혀 있는 곳을 한참 응시하다 다시 급하게 입술로 달려들었다.
그런데 왜 심장 박동은 더 거세지는 걸까.
은재는 마치 제 심장을 떼어 가 핥는 듯한 입맞춤을 받으며 태영의 등에 손톱을 세웠다. 울컥하며 느껴지는 무언가를 돌아보지 않으려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지난밤처럼 사납게 일어선 등 근육을 끌어안으며 제 안에 깊숙이 찾아드는 페로몬을 마셨다. 그것으로 깊게 호흡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지난번 세헌에게 받은 사진이 있었다.
어린 태영이, 펜싱을 마치고 나와 은재와 함께 트로피를 들고 찍은 사진.
은재는 떨리는 눈동자로 그 사진 속 태영을 보다, 곧 턱이 강제로 붙잡혀 제 눈앞의 태영을 마주 보게 됐다.
“…….”
“…….”
액자 속 사진과 너무나 달라진 얼굴. 이제 제 안에…….
왠지 모를 기분에 절 꽉 껴안고 있는 태영에게 달려들어 입 맞추었다. 언제나처럼 절 받아 주는 그 입술을 느끼며 더듬더듬 손을 뻗어 액자를 밀었다.
탁―! 소리가 나게 액자가 추락했다.
더 이상 그 사진 속 얼굴을 보지 않으려 외면하며 단단한 어깨를 붙잡았다.
“태영아…….”
이래도 되는 걸까.
이렇게나…… 어설픈 입맞춤과 감정에 정신을 빼놓아도 되는 걸까. 제 소년을 보며 혼란에 발을 디뎌도 되는 걸까.
불쑥불쑥 저와 태영의 위치를 되새기게 될 때가 있었다. 태영의 감정을 받아 준 적 없고, 받으려 한 적도 없었지만……. 무얼 하고 있냐는 책망 같은 것이 이렇게 간접적으로 전해지곤 했다.
나는 이 알파의 보호자인데.
“네, 이사님.”
입술을 떼어 내고 대답한 태영이 은재의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 가쁘게 숨을 마셨다. 고개를 들어 겨우 지어 보인 웃음과 함께 눈을 맞추며 제 얼굴을 보여 주었다. 열기를 억누른 얼굴이…….
가슴속의 떨림이 너무나 선명해 일어나는 불안은 은재에게 아직 낯설기만 했다.
* * *
“뛰어난 아티스트들이 워낙 많아서…… 고르는 게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꽤나 다양한 분야에서 지원들을 했더군요.”
“아무래도 큰 행사니까요. 덕분에 교수님만 머리가 아프시겠네요.”
“그래도 이전에 대강 원하는 그림은 받았으니까요. 위에서 전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분명해서 오히려 골라내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전 사실 호강하는 셈하며 봤습니다. 하하, 돈 쓰는 게 어렵지요.”
김 교수는 호탕하게 웃으며 회의실의 조명을 낮췄다.
“이럴 때는 뭐, 나라님께서 돈 쓰라고 부르신 건데 열심히 말 들어야지요.”
“네. 지원만 많이 해 주시면 더 확실하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더 규모도 커지고요.”
“당연한 말을 굳이 하시네요. 김 교수.”
“하하, 그런가요. 일단 참여가 확실시된 이들의 관련 자료입니다. 간략하게 준비했고, 곧이어 대강 진행될 내용 관련 설명드리겠습니다.”
대신 또렷해진 화면에 다양한 영상이 떠올랐다. 무용수부터 전통 예술, 현대 미술과 행위 예술, 성악과 스트리트 댄스 등 온갖 종류의 화려한 것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은재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천천히 바뀌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런 분위기로 가고자 합니다. 이번 행사는 온 국민이 열광하고 참여할 수 있는 행사다 보니…….”
대경을 비롯한 후원사들이 모여 김 교수의 브리핑을 듣는 자리였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간략하게 규모와 그림을 파악해야 했다. 김 교수의 취향과 위에서 내려온 메시지를 바탕으로 하여 공연팀이 만들어지겠지만, 후원하는 기업들에게 미리 브리핑을 해야 했다.
그래야 대강 필요로 하는 지원금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직접 위에서 내려와 세세한 것까지 확인할 수 없으니, 교차로 서로의 일을 확인하도록 만든 구조였다.
또 뭐, 개인적으로 추가하고 싶거나 빼고 싶은 이들을 조정할 수도 있었고.
후원사 자격으로 회의에 참여한 이들은 은재를 제외하면 대부분 실무진이었다. 그게 일반적인 경우였다. 하지만 은재는 직접 회의에 참석해 앞으로 그려질 그림과 그에 따라서 들어갈 비용 등을 직접 파악하기를 원했다.
어찌 되었든 제가 맡은 일이었다. 대경을 선택하여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은재는 전혀 흥미가 없는 일이라면 좋은 기회라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골라 맡은 일엔 이왕이면 최선을 다하기를 원했다.
대경을 선택했을 때는 민 회장의 영향이 큰 것이고, 또 저도 원해서 하기로 한 사업이니까.
그렇지만 오늘은 평소답지 않게 집중력이 흐려지고 날연함이 문득 치솟았다. 요즘 부쩍 그랬다. 괜찮다가도 가끔 멍해지곤 했다.
그날 이후 계속 그렇다는 걸 은재는 알고 있었다. 노팅을 하고 또 다음 날 오전에 다시 노팅이 이루어져 몸이 더욱 혹사를 당했다. 태영이 없는데도 가끔 몸 안에서 그 날카로운 페로몬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힘들다니. 며칠 전까지는 심지어 팔다리가 저릴 정도였다. 한동안 페로몬을 받지도 못하다가 너무 오랜만에 쏟아부어서 그런가…….
은재는 커피를 마시며 애써 눈앞의 일에 집중했다. 혹여나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하며 제 눈치를 살피는 김 교수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손에 닿는 파일을 넘겨 보았다.
요란하게 바뀌는 화면으로 다행히 금세 정신이 쏟아졌다.
“매번 이렇게 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뭘요. 다른 기업들도 모두 참여하셨는데요.”
“항상 대경에서는 직접 오시니까요.”
“저도 실무진입니다.”
간략했던 후원사 미팅은 예상한 시각에 정확히 끝이 났다. 앞서 다른 후원사들이 먼저 자리를 떴고, 김 교수와 약간의 친분이 있는 은재는 끝까지 남아 대화를 나누던 참이었다.
“하하. 그러게요. 이제 대표 자리에 올라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김 교수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은재 또한 옅게 웃어 보였다.
어쨌든 은재는 이사였다. 실질적으로 대표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아직 대표 자리에 앉지는 않은 상태였다.
“아직은 좀 이른 것 같네요.”
“그런가요? 아, 이사님. 혹시 괜찮으시면 오후 미팅에 참여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오후 미팅…… 딱히 관련해서 전해 들은 것 없었던 것 같은데요.”
“네. 오늘 확정된 인원들하고 먼저 가볍게 미팅을 갖기로 했거든요. 깊은 자리는 아니고 간단하게 서로를 파악하고 인사 정도 나누는 자리입니다. 안 그래도 후원사 측에 제안을 드리려고 했는데, 마침 이사님께서 오셔서요. 오늘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 보이시기는 한데……. 편하게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시선을 받은 강 비서가 다가와 오후 일정으로 잡힌 것들을 말해 주었다. 회의 하나가 있기는 했지만 급한 건은 아니었다. 싱가포르에서 진행되고 있는 백화점의 후속 보고라 미리 내용은 확인한 후였다. 세세하게 확인할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컨디션은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제가 참여해도 되는 자리입니까? 너무 부담스럽거나 방해가 되신다면 편하게 말해 주세요.”
“아닙니다. 저희 쪽에서도 후원사들이 참여하시면 더 좋습니다. 확정된 인원이니 어떠신지 의견도 편하게 주시고요. 아무래도 다양한 연령대의 시선이 필요해서요. 괜찮으시면 참여해 주시죠.”
다행히 대경 외에도 두 기업 정도가 이어지는 미팅에 참여하기로 했다. 은재는 그들과 함께 점심 식사 자리를 가진 뒤 잠시 나와 담배를 피웠다.
“이사님.”
그리고 제법 높아진 하늘을 보며 옷을 털고 나오는데, 강 비서가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은재는 그것을 받아 읽으며 눈썹을 구겼다.
“……그렇군요.”
신 의원에 관련된 기사였다. 알음알음 정재계 쪽에서 퍼졌던 찌라시에 더욱 살이 붙어 터진 기사였다. 한 여성이 자신이 그 신 의원과 관련된 불륜 당사자라며 인터뷰를 한 모양이었다. 프랑스에서 막 입국한 그의 모자이크된 사진과 내용이 급하게 사회면을 장악하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라고 그랬나. 은재는 태영이 지난번에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외엔 별다른 감상은 없었다.
벌써 미팅에 참여해야 할 시간이었다. 은재는 습관처럼 품에 들어 있는 페로몬 관련 약을 확인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정말 필요가 없어진 약이라는 게 몸소 느껴졌지만 그래도.
“민 이사님!”
김 교수도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지, 옷을 털며 건물 입구를 지나치고 있었다. 은재는 짧게 묵례하며 걸음을 멈춰 그를 기다렸다.
[지난번에 그림 사 가셨던 조한미 작가의 전시회가 곧 열릴 예정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함께 가시는 게 어떨지요.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지잉, 품 안에 있는 핸드폰이 희미하게 울었다. 은재는 안내받은 자리에 앉은 후에야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류 전무였다. 이전 조한미 작가의 그림을 처음 팔았던 그 미술관의 대표. 페로몬 이상으로 생긴 히트 사이클 이후, 상념을 위해 잠시간 미술관을 빌려주었던 그 사람.
별다르게 그와 연락하는 사이가 아닌데……. 은재는 약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자리에 놓인 참여 아티스트의 활동 분야와 이력이 적힌 글을 읽었다.
“시작해도 될까요?”
“그러시죠.”
오후 미팅에 참여한 이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넨 김 교수는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뒤로 낯선 얼굴들이 속속 등장했다. 김 교수는 그럴 때마다 소개를 해 주었고, 서로간의 인사가 이어졌다.
다양한 분야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은재는 꽤나 반가운 얼굴로 그들을 마주했다. 개인적으로 눈여겨보았던 이들의 등장에는 조금 더 반가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경에 속한 문화 재단과 함께 일하면 좋을 것 같은 이들을 작게 체크해 두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행위 예술가네요. 개인적으로 제가 모시고 싶어서 정말 공을 들인 분입니다. 영국에서 주로 활동을 했고요. 현재는 재원 문화 재단에서 소속되어서 일하고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에린 조입니다.”
에린은 약간 어설픈 한국말로 간단하게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그 뒤로 꽤 장신의 남자가 등장했다. 은재는 왠지 모를 기분에 그가 완전히 들어서기 전부터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재원 문화 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한태영이라고 합니다. 에린 조 작가님의 매니지먼트 관련 일을 잠시 돕고 있습니다. 언어와 관련한 도움이 필요하셔서 이번 일정에 당분간 동행할 예정입니다.”
나름대로 예술가들 사이에선 유명한 재단인지 약간의 술렁이는 반응이 있었다.
후원사로 참여한 이들 쪽에서도 희미한 소란과 함께 시선이 하나둘 은재에게 향했다. 강 비서 또한 놀란 눈치였다. 은재 역시 놀라 숨을 삼켰으나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떠한 표정이 떠오르지 않도록 만든 뒤, 태영과 그 주변에 서 있는 이들을 살폈다.
재원 문화 재단. 그게 태영의 사업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의 태영은 말을 마무리한 뒤,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 사이로 섞였다. 양쪽에서 모두 소란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관심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눈에 자꾸 밟혀 은재는 계속해서 태영을 좇았다.
그러나 태영은 아주 잠깐, 그것도 스치듯 바라보기만 할 뿐 이쪽으로는 시선을 던지지 않았다. 은재가 저를 애타게 보는 것을 알면서도 태연히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점점 더 몰리는 시선에도 점잖게 앉아 명함을 주고 다시 옷을 정리하곤 했다.
“…….”
그 뒤로도 다른 이들의 소개가 이어졌지만 은재는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다.
눈에 온통 보이는 것은 태영뿐이었다. 태영만 보였다. 태영이 옆에 앉은 다른 남자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다리를 꼬고 앉아 김 교수의 말을 듣는 것을, 또 고개를 기울이며 무심한 낯으로 짧게 턱을 만지는 것을 그저 보기만 했다.
그러면서 단 한 번도 다시 눈을 맞춰 주지 않은 태영을.
왠지 모르게 은재는 제 바짓단을 꽉 움켜쥐며 그 시간이 끝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이사님.”
은재는 회의실을 나선 후에야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함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이들이 축하드린다며 말을 전해 오기도 했으나,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하고 얼버무렸다. 회의에 참여했던 이들이 이쪽을 흘끗거리며 빠져나가는데도 은재는 잠시간 서 있기만 했다.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서 있어요.”
잠시 뒤, 태영이 다가와 은재의 어깨를 감싸며 조금 불쾌감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은재에게 몰려 있던 눈동자들이 바삐 제자리로 돌아갔다.
입을 닫고 평소처럼 서 있어도 시선을 당기는 사람인데, 무언가 홀린 얼굴을 하며 약간 풀어진 얼굴을 하니 대놓고 시선들이 몰려 있었다.
“나 말고 누구 보여 주려고.”
태영은 그런 주변을 노골적으로 경계하며 은재를 감싸 복도를 걸어 나갔다. 은재는 엘리베이터에 오를 즈음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제 어깨를 감싼 태영의 손을 내렸다.
“……이게 네가 말한 그 사업이야?”
“네.”
“몰랐어.”
“모르시게 하려고 애 좀 썼어요.”
1층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태영은 군데군데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다시금 은재의 어깨를 감싸 안고 싶어 했으나, 은재는 그러지 못하게 했다.
태영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1층에 있던 이들 몇몇이 다가와 아는 척 말을 붙였다. 다 다른 이들이었지만 내용은 비슷했다. 지난번에 도와주셔서 무사히 자리를 잡았다고. 곧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으니, 어딘가와 협력하여 공연을 준비하고 있으니 와 달라고.
그 옆에 서 있던 은재는 저에게도 덩달아 인사하는 이들의 얼굴을 살피며 때마다 짧게 묵례했다. 정말 대표처럼 대화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태영의 낯선 음성을 들으며, 자꾸만 그쪽을 향해 돌아가려는 시선을 꾹 참기도 했다.
“한 대표님.”
“아, 어.”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볼게요.”
“그래. 알았어. 연락할게.”
“…….”
그리고…… 사람들이 좀 가시자 회의실에서 태영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묘한 생김새의 남자가 다가와 어깨를 으쓱였다. 뒤이어 절 바라보는 은재에게도 찡긋 눈썹을 들어 올리며 눈짓을 해 왔다.
“소개 안 해 줘?”
이전 태영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고 말을 붙이는 사람들은 모두 한때 재단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인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태영과 가까운 곳에 앉았던 사람이었다. 간단한 미팅이 진행되는 동안 태영의 옆에서 이런저런 것을 함께 논의하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은재가 묻자 태영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저랑 같이 일하고 있어요. 장테오.”
“안녕하세요, 이사님. 장테오라고 합니다.”
은재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태영과 나이는 비슷해 보이는데도 이렇게 보니 어딘가 앳돼 보여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테오는 그 손에 활짝 웃으며 두 손을 내밀었다. 나 이사님하고 악수했다! 하는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태영과는 꽤 다른 성격인 게 귀여워 은재가 조금 더 미소를 지었다.
“태영이랑 친구인가 보네요.”
“네. 고등학교요. 대학도 같이 다니면서 고생했어요.”
“어린 나이에 하기엔 쉽지 않은 사업이었을 텐데.”
처음 태영이 사업을 하고 있다 말을 했을 땐, 요즘 어린 사람들이 시작하는 그런 스타트업 기업을 만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문화 재단이라니. 거기다 고작 몇 년 만에 제법 괜찮은 규모로까지 이뤄 내고.
“이제 저랑 이야기하세요.”
태영은 이렇게 잠깐 테오와 이야기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은재의 손을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겨 왔다. 제대로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멀어지는 테오를 보며 은재는 다음에 저택으로 초대하겠다 말했다. 테오는 멀어지면서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사님 제가 모실게요. 강 비서님은 먼저 들어가세요.”
근처에 서 있던 강 비서는 주춤하며 은재와 태영을 번갈아 응시했다. 은재는 여전히 저들에게 모인 시선들을 의식하며 태영의 손을 다시금 떼어 냈다.
“어디 가려고?”
“네. 저한테 시간 좀 내주세요.”
“…….”
“오붓하게 이야기 좀 해요. 저한테 물을 거 많으시잖아요.”
주변의 시선에 고민하던 뒤늦게 은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 비서에게 들어가도 된다 말한 뒤, 오랜만에 태영의 차에 올랐다.
“이 차 오랜만이네.”
막상 덩치 큰 검은 SUV 앞에 서니 다시 고민이 되었지만 조수석에 올랐다. 그 모습에 태영은 흐릿하게 웃으며 운전석에 올랐다. 이전처럼 은재의 귓불을 두어 번 건드리더니 다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차는 오래가지 못하고 급히 갓길에 멈춰 섰다. 벨트를 풀고 다가온 태영은 정욕이 훤히 드러나는 표정으로 은재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은재의 아랫입술을 빨아 당기고 드러난 점막을 혀끝으로 긁으며, 키스를 해 달라 말없이 애원했다.
희미하게 웃은 은재는 묵묵히 태영의 등을 도닥였다. 그럼에도 떨어지지 않아 결국 태영의 뒷머리를 붙잡고 꺾으며 짧게 입을 맞춰 주었다.
오히려 더 감질나게 되어 버린 입맞춤에, 태영은 은재의 빗장뼈를 몇 번 문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몇 번이나 차는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은밀해 보이는 바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제법 시간이 지난 후였다.
호텔 지하 바에 도착한 두 사람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제일 안쪽으로 향했다. 미리 예약을 해 둔 모양이었다. 태영은 알아서 주문을 했고, 은재는 제법 괜찮은 분위기에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재즈 음악이 적당한 음량으로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그 소리들은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오묘한 조화를 이루어 배경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 가벼운 이야기부터 의외로 진지한 이야기까지 모두 끄집어낼 수 있는 그런 곳.
문 밖에 고여 있는 한기 대신 기묘한 온기가 퍼져 나오며 온화하고도 내밀한 분위기를 내는 곳.
“여기 괜찮죠? 제일 안쪽이라 소리도 안 들리고 보이지도 않아요.”
“되게 위험하게 들리네.”
“그래요? 이사님이 날 두고 위험한 생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그러나 얼핏 보아도 위험한 생각을 하는 쪽은 태영이었다. 그는 차려입은 정장이 불편한지 타이를 조금 풀어 느슨하게 만들며, 은재의 시선이 닿는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형질을 가진 이들이 많아 보이는데도 뚜렷한 페로몬은 다행히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간지러운 향 같은 것이 흘렀다. 중간중간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고, 또 베이스의 소리가 불쑥 커졌다가도 매끄럽게 금관악기가 멜로디를 이어 가며 대화 소리로 연결되었다. 부드럽게 감각들이 채워지며 눈앞을 차지한 사람에게 시선이 향했다.
완전히 구분된 방은 아니었지만, 파티션으로 나뉜 공간이었다. 늦지 않게 술과 안주를 가져온 직원은 파티션을 두드리며 인기척을 냈다.
여러 가지 과일 안주와 술이 테이블에 놓였다. 은재는 습관처럼 잔에 얼음을 옮기다 문득 태영을 돌아보았다.
“술 마시지?”
“그동안 마시는 거 보셨으면서.”
얼음은 안 주셔도 돼요. 태영은 제 잔과 은재의 잔에 나눠 술을 따랐다. 그러곤 두 잔을 알아서 부딪치곤 익숙한 듯 술을 삼켰다.
“천천히 마셔.”
은재가 테이블에 놓인 과일 하나를 들어 태영의 입가에 대 주었다. 고작 한 잔에 나른해질 일이 없는데도, 태영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숙여 과일을 받아 갔다.
“그래서…… 무슨 말부터 해 줄래?”
일부러 태영은 제 입술이 은재의 손가락에 닿도록 하며 과일을 삼켰다. 은재는 작게 눈썹을 구기곤 잔을 쥐었다. 얼음과 술이 달그락거리며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처음엔 별거 아니었어요.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뭘 할지 확신도 안 서는 상황이었고요. 그러다가 이사님이 좋아하실 것 같은 작가 전시회가 런던에서 열리는 걸 봤어요. 그래서 가서 봤는데…….”
태영은 이제 겨우 입을 열었으면서 다시 말끝을 길게 늘였다.
“다음은 뭘까요?”
“……뭐야.”
“또 먹여 주시면 말할게요.”
은재는 옅게 웃으며 다른 과일을 포크로 집었다. 태영은 기다렸다는 듯 은재의 손을 꽉 움켜쥐며 과일을 받아 갔다. 과육이 입 안에서 뭉개져 달콤한 과즙으로 혀를 적시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은재의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파란 핏줄이 보이는 손목 위에 입술을 대며 크게 숨을 삼켰다.
“그렇게 전시회를 좀 다니다보니까 연이 닿았어요. 신인 작가들하고요. 신인 작가들의 고충을 들을 수 있었고……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저에겐 이사님이 나눠 주신 것들이 많았으니까요. 그게 계속해서 연결되더라고요. 일과 관련해서 배울 만한 선배들도 많았고, 또 새로운 기회들이 생겼고요.”
희고 부드러운 손목에서 머물던 태영이 고개를 들어 은재와 눈을 맞췄다.
서로의 눈에 담기는 서로가 잘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래서 아예 재단을 만든 거구나.”
“재단이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작년부터 조금 더 규모 있는 작업이 이어지긴 했어요.”
태영은 코끝을 맞대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재는 꽤 독한 술 냄새가 나는 태영의 호흡을 느끼며 깊게 숨을 삼켰다.
“저녁 먹었어?”
“지금 먹고 있어요.”
“이걸로 될까. 술이 독한 것 같은데.”
“의외로 이사님은 술도 잘 못하고, 담배도 그렇고.”
쪽. 은재의 뺨을 물어뜯듯 입 맞춘 태영이 제 입에도 과일을 집어넣고, 또 은재의 입에도 과일을 넣었다. 예뻐서 그런가, 하는 혼잣말도 따라 나왔다.
“다른 거 좀 더 시킬까요.”
“너 먹고 싶으면 더 시켜.”
“이사님은요. 술도 안 드시고.”
“오늘은 별로 술이 안 당기네.”
그러면서 새콤한 청포도를 쏙 입에 넣자 태영이 느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임신했나.”
크흠, 은재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뱉었다. 이제 막 씹어 삼킨 청포도가 목에 턱 걸린 것 같았다.
“우리 그날 노팅했잖아요. 둘 다 우성이고.”
“……그리고 난 페로몬 문제가 있지.”
“그게 임신에도 영향을 끼쳐요?”
“그렇다고 들었어.”
다소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괸 채 바라보던 태영이 멈칫하며 미간을 구겼다.
“치료는요. 가능하대요?”
“……아마도.”
“자세히 말해 주세요. 약은 복용하지 않아도 돼요? 다른 증상은 없고요?”
걱정이 잔뜩 담긴 표정에, 은재는 작게 숨을 몰아쉬며 태영의 손을 쥐었다.
“괜찮아. 어차피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건 이사님 건강 문제예요.”
“너처럼…… 이렇게 상성이 맞는 페로몬에 꾸준히 노출되면, 그것도 괜찮아진대.”
“확실해요?”
“왜. 넌 아이 갖고 싶어?”
순간 태영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근사한 눈썹이 꿈틀, 구겨졌다.
“내가 아이를 원하면 이사님이 낳아 주는 건가?”
“……잘못 말했어.”
“상상해 본 적 없는데…… 좋네요. 이사님이 내 아이 품고 배불러서 나한테 안겨 다니면…….”
“그런 뜻, 아니야.”
그러나 은재는 절 뚫어져라 보는 묵직한 시선에 더 눈을 맞추지 못하고 피해 버렸다.
“갑자기 새로운 꿈이 생겼어요.”
“…….”
“지금 이사님이 작은 아가 손 붙잡고 동그란 배를 문지르는 장면까지 왔어요.”
찬물로 입 안을 적시며 목 안쪽까지 홧홧해진 기운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도무지 맞춰 주지 않는 태영은 외려 페로몬을 흘리며 은재를 감싸 안았다.
“저 완전히 섰는데 어떡하죠.”
“……다시 돌아와. 네 재단 이야기로.”
“별로 안 내키는데. 이 상상이 꽤 마음에 들어요. 지금 상상 속에서 이사님이 배 안고 제 위에서…….”
견디다 못한 은재가 손으로 태영의 입을 막자 태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은재의 손을 깍지 껴 잡으며 내렸다.
“그 전에 한 가지 더 확인하고요. 그래서 페로몬에 노출되면 괜찮아지는 거 맞아요?”
“……맞아.”
사실이었다. 각인을 한 알파가 오래 곁에 없어 망가진 페로몬이지만, 다시 그 알파가 돌아왔으니, 또 그 알파와 몸을 섞고 있으니 이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 사실을 이렇게나 또 말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요즘 그럼 페로몬 문제는 없고요?”
“……어.”
태영은 은재의 표정을 샅샅이 훑어본 후에야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은재의 얼굴과 목을 먹잇감 뜯어보듯 관찰하며 낮은 숨을 뱉었다.
그 익숙한 몸짓에 은재는 숨을 정돈해야 했다. 조금 전 회의실에서 보았던 태영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누구보다 잘 아는 이지만 모르는 남성처럼 보이던 태영. 다른 이들의 미묘한 시선을 받으며 무감한 얼굴로 앉아 있던 태영.
공연히 그의 긴 팔다리와 무심한 시선이 닿는 곳을 보게 만들던 태영.
“이사님 얼굴 빨개졌어요.”
“……아.”
“갑자기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한 곳 있으세요?”
태영은 은재의 붉어진 뺨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조금 전 단단한 제 턱을 만지던 손이었다. 그 때문인지 커다란 손 사이에서 은근한 그의 체향이 묻어났다.
페로몬 향이 아닌 체향. 아마도 이른 아침 태영이 사용했을 쉐이빙 크림과 스킨, 향수 따위가 한데 어린 듯한 향. 상쾌하기도 하고 아릿하기도 한 향.
“페로몬…… 때문인가.”
그 향을 맡자 은재는 조금 더 목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목 안이 따끔따끔하기까지 한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아도 자꾸만 눈앞에 다른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무심하게 앉아 있던 태영의 모습이 보였다. 제 보호를 받는 소년이 아니라, 정말 다른 이들의 시선을 당기는 알파라는 것을 증명하던 그 모습이 계속해서 눈앞에 그려졌다.
“이사님, 괜찮으세요?”
걱정 어린 음성의 태영이 다가와 목에 손을 대며 물었다. 조용히 직원을 부르더니 차가운 물과 주스 한 잔을 요청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몸이 안 좋다고 여기는 듯했다. 오늘 보았던 제 모습에 괜히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그 모습을 지금 태영에게 겹쳐 보고 있다는 것을 들켜서 좋을 건 없었다.
계속 이렇게 태영을 볼 때마다 몸 어딘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들켰다가는…….
“요즘도 계속 몸이 안 좋으세요?”
“아니야. 괜찮아. 정말…… 괜찮아졌어.”
“검사를 따로 받아 보셔야 하는 건 아니고요? 이렇게 목이 붉어져서…….”
그때, 끝내 참지 못한 은재의 페로몬이 약하게 흘러나왔다. 정말 아주 잠깐, 그것도 몹시 미약한 양이었지만…… 태영은 예민하게 그것을 알아채곤 다급히 은재를 끌어안았다.
거부 의사를 표할 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입술이 겹쳐졌다. 순식간에 입 안이 점령당하여 곳곳이 빨리고 핥아졌다. 마치 짧게 흘러나왔던 그 페로몬을 모두 제 몸 속에 집어넣으려는 듯, 태영은 빠듯하게 숨을 삼키며 은재를 끌어당겨 안았다.
“읏, 응.”
온몸이 아플 정도로 태영에게 붙잡혀 입맞춤을 받았다. 그야말로 입술이 찢어질 것 같은 강한 입맞춤이었다. 페로몬이 쏟아지는 것이 아닌데도 그러기라도 하는 양 모든 것이 집어삼켜졌다.
“나보고…… 흥분했어요?”
태영은 은재에게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순식간에 자라난 열기가 고인 눈으로 코끝을 비벼 오며 연신 같은 것을 묻고 또 물었다.
거칠어진 숨소리가 코앞에서 터졌다. 그 숨소리에 덩달아 솜털이 자르르 일어설 만큼 아찔한 소리였다.
“나 때문에 그런 거 맞아요?”
“…….”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어디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라…… 나 보고 그런 거죠. 응?”
열이 오른 뜨거운 손이 은재의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은재는 흣, 하며 터지는 소리를 참지 못하고 뱉었다. 그러자 태영은 곧장 옷 사이를 파고들었다. 은재가 몸을 비틀며 거부하는데도 잠깐만, 잠깐만요…… 하며 애원하며 늘씬한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우리, 대화하려고 왔어.”
“네. 대화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고……. 제대로 얼굴 보면서 해.”
하지만 태영은 이마를 비비고 코끝을 비비며 연신 숨을 토했다. 입술을 그저 꾹 누르고 또 윗입술을 긁으며 더더욱 뜨거워지는 숨을 뱉었다. 은재의 속눈썹이 제 눈꺼풀을 문지르는 감각에 조금 더 셔츠 단추를 풀었다.
“태영아.”
안 되겠다 싶어 은재가 태영의 등을 당겨 안았다. 순순히 딸려와 은재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태영은 벅찬 숨을 토하며 말했다.
“하……. 이사님 앞에서는 자제가 안 돼요.”
“…….”
“조금 더 토닥여 주세요. 참아 볼게요.”
영 참기가 어려워 보이지만…… 태영은 제 뺨을 은재의 가슴에 비비고, 혀로 단추를 풀 것처럼 굴다가도 가까스로 숨을 삼켰다. 손으로 은재의 유두를 찾아 만지작거리며 고간을 만지고 싶어 했지만, 허리를 끌어안으며 견뎠다.
“밖이잖아. 대화하려고 나왔고.”
“그럼 이사님도 절 보면서 흥분하지 마셨어야 해요.”
“……너처럼 그렇게 흥분하진 않았어.”
한참 그렇게 안겨 있던 태영이 느릿하게 몸을 떼어 냈다. 길게 숨을 뱉으며 약간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눈을 맞췄다. 흥분 때문인지 태영의 눈이 평소보다 조금 풀려 있었다.
은재는 떨리는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며,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흔들었다.
“이사님이 어떤 모습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은데…… 어렵네요.”
“…….”
“성숙한 사람을 좋아하시나 봐요.”
“…….”
“이전에도 연상을 만나신 것 같고…… 난 이사님보다 아홉 살 연한데 어떡하지.”
그러나 은재를 바라보는 태영의 눈빛은 아홉 살 연하라고 하기엔 과하게 짙었다. 눈에 담긴 온갖 정염과 욕정이 숨쉬기 버거울 정도로 밀려들고 있었다. 은재는 식은땀이 고이고 뻐근해진 손을 뻗어, 종업원이 언제 놓고 사라졌는지 모를 주스 잔을 찾아 손을 뻗었다.
“여기요.”
그보다 앞서 태영이 손을 뻗어 은재의 얼굴 쪽으로 대 주었다. 그리고 은재가 목을 축이자 또 잔을 받아 가 대신 놓아주었다.
“다른 건 또 뭐가 있어요?”
“펜싱 그만둔 건 안 아쉬워?”
“……음. 네. 괜찮아요. 아직도 펜싱 이야기 하실 줄 몰랐는데.”
“계속 신경 쓰였어.”
“괜히 관둔 걸까 봐요?”
“…….”
“이전에도 말씀 드렸잖아요. 더 중요한 게 생겼다고요. 그쪽을 고른 것뿐이에요. 괴롭게 포기한 거 아니에요.”
태영도 목이 타는지 은재가 마셨던 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니까 고민하지 마세요.”
“…….”
“이사님도 저한테 끌리시잖아요.”
“…….”
“제가 펜싱을 그만둔 게 신경 쓰이시면…… 절 선택하세요. 이사님을 주세요. 전 그거면 돼요.”
어느샌가 태영을 끌어안은 채 벽에 기대어 있던 은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태영은 은재의 허리를 놓아주며 턱을 괴었다. 잠시도 놓치지 않고 숨을 고르는 그 모습을 좇았다.
“제가 뭐든 할게요. 이사님이 원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요.”
“아직도 날 좋아한다고 생각하는구나.”
여전히 턱을 괴고 있는 태영이 느릿하게 표정을 굳히며 술이 담긴 잔을 쥐었다. 둘 사이에 계속해서 떠다니던 미묘한 공기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아직도 이사님께서는 그 마음이 착각일 거라고 믿고 계시는군요.”
찰나의 정적이 공간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직도 제가 이사님 몸만 원하는 것 같으세요?”
“…….”
“제가…… 지금도 헷갈리는 것 같으세요? 아니면 정말 제 말을 믿고 싶지 않으신 건가요.”
“태영아.”
이전과 비슷한 말투지만 불현듯 선명하게 느껴지는 거리감에 은재는 순간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요, 그럼.”
“…….”
“그렇게 제가 싫으시면 이제 그만할게요.”
“……네가 싫다는 게 아니라.”
완전히 무감하게 바뀐 태영의 표정에 은재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런 태영의 모습은 낯설었다.
작은 소년이었던 태영은 은재에게 늘 우호적인 모습만 보였다. 돌아온 후엔 성격이 조금 달라지긴 했으나, 그럼에도 은재의 곁을 항상 맴돌았다. 태영에게서 이렇게나 차가운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는데.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하신 적은 있으세요?”
“…….”
은재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이러다 태영이 자리에서 일어서 가 버릴까 봐 두려웠다.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태영의 손목을 붙잡고 싶었다.
“제 말, 진지하게 들어 보신 적은 있으신지 해서요. 아무래도 안 믿으려고 하시는 것만 같아서.”
“…….”
“그렇게 제가 귀찮기만 하셨어요?”
……쿵, 쿵. 점점 더 심장이 불안하게 날뛰었다. 은재는 이런 와중에도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태영을 올곧게 응시했다.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또 돌리고 싶지 않아 입술을 달싹이며 어두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담담하게 어른처럼 사과를 하고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과 어쩐지 모르게 당황스럽고 놀란 마음이 충돌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아니면 우선 태영을 붙잡아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잠시지만 태영이 곁에 없는 것처럼 뼛속까지 냉기가 치민 것 같았다.
천천히 태영이 손을 뻗었다. 평소처럼 은재의 손을 붙잡아 손등을 두어 번 쓸어 올리더니, 홱 당겨 와 제 다리 위에 앉혔다.
얼결에 은재는 단단한 태영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입을 열었다.
“이렇게, 굴지 마.”
“…….”
“이렇게 굴지 않을 거잖아. 결국 우리 관계가 끝이 나도 너 이렇게 안 할 거잖아.”
은재는 태영의 뺨을 아플 정도로 쥐었다. 제가 키웠던, 제 보호 아래 있는 남자에게 이런 자세로 말을 하는 건…… 다소 우스울 테지만 절 옭아매는 듯한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이대로 절 당장이라도 어떻게 해 버리고 싶다는 그 눈을 보며, 도대체 몇 번이나 제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지 모를 이 알파의 뺨을 쥐며 쏘아보았다.
순간이지만 치솟은 외로움을 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지 마.”
그제야 태영은 표정을 풀었다.
“괜히, 이렇게 굴지 마.”
무표정하게 굳어 있던 이목구비 위에 점차 묘연한 미소가 올라왔다.
“들켰어요?”
“……너.”
“이렇게 하면 혹시 이사님이 아차 하실까 했죠.”
순순히 그 손에 얼굴을 맡긴 채, 태영은 고개를 들어 은재를 훑어보았다. 은재는 소리 없이 안도의 숨을 뱉었다.
“……놀랐잖아.”
“놀라셨어요?”
옅게 웃은 태영이 고개를 숙여 은재의 가슴에 이마를 가져다 대고 비볐다. 쿵, 쿵……. 놀란 것을 증명하듯 판판한 가슴 속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태영은 조금 더 웃으며 그 가슴 위에 입술을 눌렀다. 저보다 아홉 살이나 많은 이 남자는 이렇게나 귀엽게 굴곤 했다. 세상사에 다 통달한 것처럼 굴다가도, 모든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척, 크게 구미를 당기는 게 없는 것 같이 행동하다가도 이렇게 속내를 들려준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거리를 좁혀 다가와 안아 주었다.
“제가 어떻게 이사님한테 그래요.”
“……조금 전엔 잘하던데.”
“죄송해요. 이사님 얼굴 하얘지는 거 보고 정말…… 제 혈관이 다 끊어지는 줄 알았어요. 절대 두 번은 못할 것 같네요.”
몇 번이나 판판한 가슴 위에 입맞춤이 이어졌다. 이제 옷을 들추지 않고도 은재의 유두를 찾아낼 수 있는 태영은 이로 옷과 유두를 한 번에 씹으며 입을 맞췄다.
“슬슬 이야기 나오는 거 아시죠.”
익숙한 애무에 파르르 불안에 떨던 심장이 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불규칙한 박자로 뛰며 경련하듯 울던 심장이, 이제는 다른 감정에 젖어 가슴을 두드렸다.
은재는 크게 숨을 삼키며 끝내 태영을 끌어안았다.
“……네가 얼굴을 보여 줬으니까.”
희미하게 웃은 태영은 은재를 마주 안았다. 그러자 절 끌어안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깊은 곳에서 숨이 터져 나왔다.
“어차피 피해 갈 수 없고요.”
지난번 미술관 개관 파티를 다녀온 이후, 태영과 은재에 대해 조금씩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민 회장과 은재보다 훨씬 더 나이 차가 적은 두 사람. 보호자와 피보호자라고 하기에는 다른 방식으로 가까운 듯 보이고, 또 함께 서 있는 것 자체가 그림이 되는 한 쌍. 알파와 오메가.
“그래.”
아직 대놓고 많은 소문들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럴 일만 남아 있었다.
각자의 머리에서, 상상의 나래 속 주인공이 될 일. 어쩌면 사실이고, 어쩌면 거짓인 음란한 상상 속의 두 사람.
“기다릴게요.”
“…….”
“전 변하지 않아요. 제 마음도 흔들리지 않아요. 전 더 이사님께 닿고 싶어요.”
왜인지 모를 마음에 은재는 태영을 계속해서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래서 사업도 시작했어요. 이사님 옆에 당당히 서려고요. 이사님 알파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려고요.”
그러면 태영도 더더욱 힘을 주어 은재를 껴안았다. 은재보다 훨씬 더 든든하게 품을 내어 주고 껴안아 주었다. 힘을 빼도 안심하고 안을 수 있도록 더 깊숙이.
“그렇게 오래 품어 온 감정이…… 계속해서 더 커지고, 이사님 침대 위에 올라가고 나서도 더 입이 마르는 이 감정이 그냥 존경심일 리 없어요.”
팔이, 온몸이 아픈 것 같았지만 은재는 묵묵히 안겨 있었다. 태영을 끌어안았다.
“기다릴게요. 계속 기다릴게요.”
“…….”
“제가 민 회장님을, 이사님을 망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기다릴게요. 이사님이 뒤로 물러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이 드시면 그때 말해 주세요.”
태영이 고개를 들어 은재와 눈을 맞췄다.
“거기 계세요. 그럼 제가 갈게요.”
“…….”
“이사님은 안 오셔도 돼요. 제가 갈게요. 그러니까…… 도망가지만 마세요.”
이제 와서 도망갈 수 있을까. 어쩐지 이미 틀린 일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도망가고 싶어져도 두 걸음만 가세요. 전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갈 수 있지만, 너무 멀리 가시면 이사님 발이 아파서 안 돼요.”
또…… 이렇게 영영 태영이를 안고 있고 싶었다.
뭘 하고 있는 걸까. 태영의 마음을 접게 하기 위한다고 했지만, 정말 그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을 핑계 삼아 태영에게 조금씩 기대고 있지 않나. 언젠가부터 피어나던 양심을 외면하고 있지 않았나.
사실 늘 흔들리던 은재에게 필요한 건 이렇게 강하게 붙잡아 주는 누군가였다.
그런데 그게 태영이어도, 제 소년이어도 될까.
* * *
“신관과 별관을 잇는 곳입니다. 원래는 밖으로 나와서 이동을 하는 공간이었는데, 새로 작년에 공사를 진행하면서 이곳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어 놓고 나니 제법 이 길의 수요가 많다는 것이 파악되었고요.”
“좋은 자리네요.”
“네, 그렇습니다. 야외 정원으로 곧장 연결되어서 아이와 동반하거나 평일 오전에 백화점을 찾으시는 고객님들도 많이 이용하시는 듯하고요. 그래서 그 고객층을 타깃으로 한 상가를 기획 중입니다.”
어제 갑작스럽게 미팅이 생겨 미루었던 회의를 다음 날 오전에 진행했다. 그런 다음 새로 공사를 마무리한 백화점에 내려와 안을 살폈다. 오늘 일정에 동행한 김 과장은 미리 전산에 올렸던 기획서의 내용에 조금 더 살을 붙여 설명했다.
막상 현장에 나와 분위기를 살피며 구조를 확인하면 통과시켰던 기획도 다시 재검토를 필요로 할 때가 있었다. 지금 이곳도 그랬다.
정원과 연결되어 투명한 창으로 벽 일부를 구성한 이곳은 아름답고 채광이 좋아 이대로 그냥 두기에는 아까웠다. 미리 보고를 받았던 것처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공간이니, 근처에 있는 카페와 간단한 간식을 파는 좌판 이외에도 다른 것을 판매해도 괜찮을 듯 보였다.
“야외 정원에서 신관으로 연결되는 다른 길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네. 서쪽으로 길이 있습니다.”
“거기서 내려가면 뭐가 나왔죠?”
“영 캐주얼로 알고 있습니다.”
은재는 천천히 그 공간을 둘러보고 또 정원까지 나와 살피며 고민했다.
마침 가을볕이 쏟아지는 창 너머로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는 이들이 보였다. 꽤 다정하고 보기 좋은 그림들이었다. 그 모습에 은재는 이전에 올라왔던 리스트를 확인하며 조금 더 고민했다.
“……아야!”
그때, 정원으로 뛰어가던 어린아이 하나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가다 은재의 다리에 부딪쳐 넘어지고 말았다. 얼마나 세게 뛰어오던 것인지, 은재는 생각보다 큰 충격에 놀라면서도 넘어지는 아이를 붙잡아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전 괜찮습니다. 괜찮니?”
다리에 부딪치고도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넘어진 아이는 은재의 손길에 의지해 일어서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넘어진 곳이 아프고,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려 서러운 얼굴이었다. 얼굴이 빨개진 것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안 다쳤어?”
“……네에, 안 다쳤어요. 근데 무릎이 아파요…….”
꽤 어린 나이인 것 같은데도 아이는 말을 곧잘 했다. 이미 먹을 수 없게 되어 버린 아이스크림을 보며 벅벅 눈가를 비볐다.
은재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손을 닦아 주었다. 아이의 바지를 걷어 발갛게 부은 무릎을 확인하고, 지저분해진 손을 털어 주기도 했다.
“다른 데는 아픈데 없니? 얼굴로 넘어졌는데.”
“죄송합니다아……. 얼굴은 안 아파요.”
“괜찮아. 그런데 사람이 많으니까 다음부터는 뛰지 말자. 다치면 안 되잖아.”
“네에…….”
아이스크림 하나만 사다 주세요. 은재는 강 비서가 건네는 손수건을 받으며 부탁했다.
“몇 살?”
“네 살이요.”
“근데 말을 잘하는구나.”
“저 애기 때도 말 잘했대요.”
“그랬어?”
이건 아저씨가 가져갈게. 작게 웃은 은재는 아이의 손에 들린 콘을 가져가며 말했다. 아이는 순순히 내어 주면서도 아쉬운 얼굴로 아이스크림과 은재를 번갈아 살폈다. 당장 울 것처럼 숨이 거칠어지는 것이 역시 아이스크림을 버린 게 서운한 눈치였다.
“그거 먹으면 안 돼요. 배 아야 해요.”
“응. 아저씨가 버려 줄게.”
“쓰레기통 저기요.”
“그래.”
그사이에 강 비서가 새 아이스크림을 들고 왔다. 은재는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는 아이의 손에 그것을 넘겨주었다.
“……얼마예요?”
“글쎄.”
딱 이만한 아이가 있는 강 비서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저 용돈 받은 거 있어요. 잠시만요.”
하지만 아이는 꼬물거리며 메고 있던 조그만 가방을 열었다. 꼬깃꼬깃하게 접힌 천 원짜리를 꺼내더니 강 비서에게 내밀었다.
“아까 저 아저씨한테 세 개 줬는데 지금 두 개밖에 없어요. 죄송해요.”
“안 줘도 되는데.”
“아니에요. 아니면 아저씨 거슬러 주실래요? 다른 것도 있어요.”
네 살 치고 제법 똑똑해 보이는 아이가 오천 원짜리를 내밀며 물었다. 이것도 있다며 또 만 원짜리를 내밀기도 했다. 그러곤 천원과 만 원짜리 두 장을 내밀면서 얼마인지 묻기도 했다.
결국 강 비서는 아이가 내민 이천 원을 챙겨야 했다. 아이는 야무지게 강 비서와 김 과장, 그리고 은재에게 한 번씩 인사한 뒤 정원으로 뛰어 나갔다.
“옷 새로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닦으면 지워지겠죠.”
은재는 이제야 아이스크림을 버리고 손과 바지를 닦았다. 끈적거리는 것이라 완전히 깨끗하게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적당히 흔적은 사라졌다. 하필 이런 날 직접 매장들을 둘러봐야 하는 것이 흠이지만.
“손수건은 사셔야겠네요. 마침 나와 있으니 제가 고르는 것보다 강 비서가 원하는 걸로 고르는 게…….”
“아저씨.”
어쨌든 빈 공간의 사용을 위해 논의 중이던 건은 시간을 두고 결정하기로 한 뒤, 얼마 전 새로 계약이 연장된 지하층의 가게들을 살피러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누가 톡톡 다리를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 그 아이였다.
“이거요.”
입가에 초코를 가득히 묻힌 아이가 물티슈와 손수건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더니 이제 와서 부끄러운지 어딘가로 후다닥 뛰어갔다. 자연스레 아이를 따라 시선이 움직였다. 그곳엔 아이의 보호자인 듯한 여성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은재는 그와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곤 그 뒤에 숨어 있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 지하로 내려가며 은재는 받은 물티슈로 조금 더 바지를 닦았다.
“이제 아이들이 익숙해지신 모양입니다.”
“……그런가요.”
“네.”
강 비서는 웃으며 말했다. 은재는 제 아이인 태영을 생각하며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막상 태영이 어릴 때에는 이런 대화도 잘 해 주지 못했던 것 같은데, 언제 그렇게 커서는.
지하로 가서는 얼마 전 새로 계약을 연장한 매장을 살폈다. 또 새로 입점한 매장과 공사가 마무리되며 바뀐 곳을 다시 살피며 예정되었던 일정을 마무리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나와 직접 둘러보는 게 어색하고 불편했는데,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서류를 보고 책상에 앉아 회의를 하는 것 말고 직접 나와 사람들을 보고 인사를 받는 게 정말 어려웠는데.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들이 의외로 많았다. 민 회장의 빈자리 또한 그랬고, 어색한 일도 그랬다. 강 비서와 정 실장 같은, 또 세헌이처럼 도와주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난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지.
민 회장의 선의에 은혜를 입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리고 있는 것도 분명히 맞았고.
역겨운 일도 물론 많았지만 그보다도 누리고 있는 게 많음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것들을 누리기 위해서 견뎌야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알았고.
당장 오늘 아침만 해도 더 커진 신 의원의 파문이 일지 않았나.
그 피아니스트는 여러 가지 증거를 가지고 와 기자 회견을 열었고, 불륜 사실 외에도 신 의원 아들의 부정 청탁 문제를 거론했다. 그 일이 사실이라면, 조금 더 신빙성 있는 증거가 나온다면 신 의원은 아마 검찰 조사를 받을 듯 보였다.
세상은 의외로 권선징악 따위가 분명하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끔 이런 것들이 있어 살 만해지곤 했다. 저도 태영에게 그런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지금도 그 열망은 변함이 없었으나,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둘의 관계가 흐르고 있었다.
은재는 마침 제 아빠와 손을 꼭 잡고 지나가는 또 다른 아이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보육원 봉사 날짜가 근처였던 것 같은데.”
강 비서는 핸드폰을 꺼내 캘린더를 확인했다.
“네. 차주 토요일로 잡혀 있습니다.”
차주 토요일……. 걷다보니 어느새 남성복 위주의 층이었다. 은재는 인사를 건네는 직원들에게 인사를 마주 돌려주며 짧게 숨을 뱉었다.
“보통 회사에 입사하게 되면 뭘 선물해 줍니까?”
“글쎄요. 사람마다 다르지만 정장을 맞춰 주기도 하고요.”
“정장은 많아서.”
“도련님께 드릴 것을 고르십니까?”
“네. 그런데 신입사원이 아니라 대표가 되었네요.”
강 비서는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께서는 이사님이 뭘 주셔도 좋아하실 겁니다.”
맞는 말인 것을 알지만 은재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뭘 선물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 적이 별로 없는데.
구두를 사 줄까 하다가도 정확한 발 사이즈를 몰랐다. 나중에 바꿀 수 있다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바로 신을 수 있는 것을 주고 싶었다. 옷은 많았고, 가방도…….
시계 아니면 커프 링크스. 그 두 개를 놓고 고민하던 은재는 결국 빙빙 주변을 돌며 한참 고민하다 겨우 하나를 골랐다.
[죄송해요, 이사님. 오늘 식사 같이 못 할 것 같아요. 김 교수님 너무 깐깐하시네요.]
웬만하면 저녁 식사만큼은 함께하려 하는 둘이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태영에게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정부 사업 때문에 바쁜 듯했다. 그것 말고도 또 재단의 일이 많을 테니까.
어제 바에서, 그리고 또 저택으로 돌아와서 재단에 대한 긴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사업들을 했고, 지금은 뭘 하고 있고, 그래서 어떻게 살았고…….
한순간도 태영은 쉬지 않았다. 다시 저택에 자신 있는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태영의 말처럼 지난 7년간의 그 열정이, 그 노력들이 모두 저를 향한 감정으로 인한 것 또한 느낄 수 있었고.
“식사 준비할까요?”
“네. 부탁합니다.”
은재는 씻고 나와 홀로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너무나 익숙한 곳인데. 이렇게 고요하고 적적한 것이 당연한 곳인데. 괜히 제가 혼자 있다는 것조차 이상하게 느껴졌다. 식사를 하는 것도 그랬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적은 양으로 식사를 마치자, 정 실장이 컨디션이 좋지 않으시냐며 물어왔다. 은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신 차를 마신 뒤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유 없이 방을 배회하던 걸음은 끝내 태영의 방으로 향했다.
천천히 계단을 밟아 가며 올라가 그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책상에 포장한 박스를 놓고 옆방으로 향했다. 진도도 별로 나가지 못한 이젤 앞에 앉아 연필을 쥐어 보았다.
지잉, 때마침 핸드폰이 길게 울었다.
―이사님. 식사하셨어요?
태영의 전화였다.
“조금 전에.”
―아쉽다. 저녁은 꼭 같이 먹고 싶었는데. 죄송해요.
“내일도 있잖아.”
―네. 내일 꼭 같이 식사해 주세요.
매일 보는 얼굴이고, 매일 듣는 목소리임에도 가라앉은 것이 느껴졌다. 일로 인해 평소보다 더 낮아진 음성이었다. 은재는 어쩐지 척추가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일 많아?”
―조금요. 그래도 괜찮아요.
“네 책상에…… 뭐 하나 가져다 놨어.”
―뭐요?
“선물.”
―선물?
태영은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는 듯했다. 은재도 담배를 찾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어제 이사님 놀려서 벌주실 줄 알고 기대했는데.
“……끊자.”
―장난이에요. 끊지 마세요. 이사님하고 통화하니까 좋은데요.
“…….”
―같은 집에서 살아도 또 이렇게 목소리 들으니까 새로워요. 이사님은 전화 목소리도 좋아요.
낮은 웃음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숨소리와 함께 넘어왔다. 은재도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대로 침대에 눕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낮은 음성은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그런 구석이 있는 목소리였다.
“너 발 사이즈 몇이야?”
―발이요? 갑자기?
“……네 발 사이즈를 모르더라고.”
선물을 고민하며 은재는 제가 생각보다 태영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알지 못하는 사항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사소한 곳에서 제 부족함을 또다시 발견하곤 했다.
―구두요, 아니면 운동화요?
“두 개가 달라?”
―네. 구두는 조금 더 크게 신는 편이에요. 한국 사이즈로 뭐였지…… 290이었나.
그것이 제 직무 유기인 것도 같았고, 또 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제 태영이 가볍게 흘린 말처럼 진지하게 그 감정을 돌아봐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태영은 돌아온 이래 계속해서 감정을 표현했다. 여름에서 가을이 될 때까지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진심일 수가…… 있나. 보호자인 사람에게 그런 성애의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걸까.
보호자의 자격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외면일 뿐이었나. 한 번 귀 기울이지도 않고 스스로가 가진 감정에만 갇혀 그저 모른 척 버티고만 있었나. 위한다고 했던 것이 사실은 아닐지도…….
그럼 어떤 의미로 잠자리를 갖는 걸까.
희뿌연 연기가 느릿느릿 퍼져 나갔다.
“엄청 크구나.”
―보통 발이 크면 거기가 크다고 하던데. 그래서 저도 큰가 봐요.
“……그래. 좋겠네.”
―전 별로 안 좋아요. 불편해요. 옷 입을 때도 그렇고. 걸을 때도 그렇고. 누워 있어도 흘러서 불편해요. 그래도 이사님이 좋아하니까 괜찮아요. 전 이사님이 좋은 게 좋거든요.
“이제 끊자.”
태영은 은재의 단호한 말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곧 갈게요.
“잘 마무리하고 와.”
―네.
“아, 그리고…… 혹시 다음 주 토요일에 일정 있어?”
―있어도 없어요. 무슨 일이신데요?
“보육원 봉사를 가는데, 시간 되나 해서.”
―당연히 되죠. 이사님이 말하시는 건데.
누군가 멀리서 태영을 부르는 듯했다. 지금 가. 태영은 훨씬 서늘하고 낮은 음성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같이 가요. 저도 가고 싶어요.
그러곤 순식간에 열기가 서린 음성으로 말했다. 은재는 창가로 다가가 담뱃재를 털었다.
서서히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어릴 적 제 소년이 했던 것처럼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온갖 색으로 물든 정원이 바람이 불때마다 단풍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군데군데 어여쁜 색을 묻히고 오가는 이 없는 정원을 데우면서.
어린 태영이도 이 광경을 수십 번 보았겠지.
―아, 조건이 생겼어요.
“……갑자기?”
―저 전시회 티켓 생겼는데, 같이 가 주시면 저도 갈게요. 조한미 작가라고 아주 유명해진 작가예요, 최근에. 그 대경인가……? 민은재 이사라고 했나? 그 사람이 그림을 샀다는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
―그 사람 안목이 그렇게 좋다던데. 제가 그 사람 꽤 좋아하거든요. 이사님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
희미하게 웃은 은재는 그래, 하며 대답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어요, 이사님.
오늘 아침에도 봤으면서……. 은재는 담배 필터를 씹으며 홀로 생각했다.
―정말 금방 갈게요. 곧 봬요.
“응.”
그리고 끊어진 전화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질리도록 놀아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옅은 웃음이 은재의 입꼬리 끝에 걸려 있었다. 간당간당하게 매달려 있던 그것은 곧 불어온 바람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 * *
주말이지만 은재는 이른 시간에 일어났다. 뜨겁게 김이 올라오는 커피 한 잔을 두고 강 비서의 보고를 들었고, 신문을 확인했다.
이제 신문에는 대놓고 신 의원의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양쪽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탓에, 그다지 건전하지 못한 내용들이 순화되어 지면을 가득 채웠다. 곧 이어질 대선 후보 결정전에 불리하게 작용할 내용들이 여기저기서 떠오르고 있었다.
이미 신 의원의 실상을 파악하고 있는 은재는 그렇게 유쾌하지도, 그렇다고 또 크게 불쾌하지도 않은 표정으로 신문을 읽었다.
[소문 많아져.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세헌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자세히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저와 태영을 엮는 이야기들이겠지.
[그래. 알아 둘게.]
은재는 몸을 데우는 커피를 머금으며 간략하게 답장을 보냈다.
“이사님.”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쯤, 태영이 다가왔다. 벌써 씻었는지 촉촉한 물기를 지닌 채 내려온 태영은 자연스럽게 은재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 옆자리에 앉았다.
“저도 커피 한 잔 주세요.”
“네, 도련님.”
태영 몫의 커피가 나오는 동안 은재는 보고 있던 신문을 접어 강 비서에게 넘겨주었다. 태영은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넘기며 은재의 잔을 넘겨 보았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조금 전에.”
“빨리 방을 합쳐야겠네요. 이사님이 언제 일어나시는지도 모르고.”
감사합니다. 태영은 제 앞에 놓이는 커피를 내려다보며 정 실장에게 짧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피곤하진 않으시고요.”
“괜찮아.”
요즘 은재보다 더 바빠 보이는 것은 태영이었다. 그럼에도 태영은 별로 피로가 묻지 않은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괜히 바쁜데 가자고 말한 건 아닌가 모르겠다.”
“아니에요. 전 좋아요.”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하겠냐는 물음이 이어졌다. 은재는 간단하게 먹겠다고 했고, 태영도 그 뜻을 따랐다.
과일과 빵으로 주로 이루어진 식사가 곧 상 위에 차려졌다. 갓 구운 빵 냄새가 고소하게 공간을 채웠지만, 은재는 그마저도 손을 대지 않고 과일로만 끼니를 때웠다.
“너무 못 드시는 거 아니에요?”
태영은 간단하게 먹겠다고 한 것치고는 꽤 근사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넉넉하게 차려졌던 상차림을 깨끗하게 비워 갔다. 나직이 웃은 은재는 제 몫의 음식을 태영에게 밀어주었다.
“아침이라 별로 입맛이 없네.”
은재는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태영은 은재의 잔에 주스를 따라 주며 그 얼굴을 세세하게 살폈다.
평소 태영과 밤을 보내고 나면 아침을 먹는 것이 시원치 않았다.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크기의 그것이 여전히 배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육중하게 들어차 지그시 배를 누르는 것 같아 커피 한 잔을 넘기는 것도 버거웠다.
지금도 약간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제는 하지도 않았는데.”
마찬가지로 태영도 그 생각을 했는지 은재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은재는 제 손을 덮은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식사 자리에서.”
“네. 알아요. 그런데 전 이제 이사님 건강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요. 봐주세요.”
그러더니 아예 은재의 손에 제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아니면 정말 아가 태영이 생겼어요?”
아가 태영이……. 황당한 소리지만 단어의 조합이 귀여워 은재는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니야.”
“정말 아니에요?”
“그럼 어제 내가 이사님 침대에 못 가서 외로워서 그랬나?”
이제 태영에게 붙잡힌 손은 그의 뺨에 올라가 있었다. 만져 달라는 듯 뺨 위에 손을 올리고 눈을 반짝였다. 은재는 순순히 태영의 뺨을 만져 주며 조금 더 웃었다.
“덕분에 넓게 잤어.”
“음, 아쉽다고 해 주셔야죠. 작은 태영이랑 만난 지 좀 된 것 같은데.”
이번에는 또 작은 태영이. 은재는 꽤나 뻔뻔하고 귀여운 태영의 태도에 대놓고 그 얼굴을 관찰했다. 어릴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물론 지금도 알파답지 않게 귀엽고 애교가 많아 순한 녀석이기는 하지만……. 제 눈에는 하염없이 멋있는 녀석이지만, 성격이 너무 물러 다른 이들에게 당하지는 않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착해서 욕심도 없이 내어 주기만 하려나. 사업을 하는 아이니 모진 면도 있어야 하는데.
“더 일찍 일어날걸.”
“왜.”
“저 붓지 않았어요? 이렇게 이사님이 봐주실 때 예쁘게 있어야 하는데.”
태영은 평소와 다름없이 근사한 제 뺨을 가볍게 만지며 은재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은재는 더 길게 태영의 뺨을 만져 주었다.
“가서 준비해. 이제 나가자.”
“네.”
쪽. 태영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은재의 뺨에 입 맞추었다. 이제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두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은재는 굳이 사용인들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약간의 희망을 갖고 있었다. 언젠가 태영이 곧 다른 오메가를 찾아 저에게서 흥미를 뗄 거라는 그런 희망. 어엿한 관계가 될 수 있다는 희망.
그렇기에 괜히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은재는 씁쓸함과 간지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뒤이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읏, 태영아.”
그리고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커다란 손아귀에 붙잡혀 으슥한 복도 안쪽으로 끌려갔다.
“그런 표정 짓고 계시면 제가 어떻게 가요.”
태영은 지금이 꽤 이른 시간이라는 것도 개의치 않는지, 언제나처럼 열기를 뿜으며 은재를 끌어안았다. 은재가 버둥거리지 못하게 손목을 벽에 붙이며 하체를 바싹 가져다 댔다.
“아침이라 참은 거예요. 다른 사람들, 있으니까.”
읊조리듯 말한 태영은 은재의 목덜미에 입술을 붙여 왔다. 널따란 어깨를 밀어 보려 하던 은재는 그럴수록 제 맨허리를 타고 오르는 손길에 숨을 터뜨렸다.
“……그러면 조금 더 참지 그랬어.”
순식간에 탁해진 음성이 된 은재가 태영의 단단한 어깨에 기대어 말했다.
“키스해 주세요.”
“…….”
“지금 안 해 주시면, 차 타고 갈 때 곤란하실 것 같아요.”
“경고하는 거야?”
“예고하는 거죠. 음, 경고인가.”
은재는 제 옷 사이에 들어갔던 손을 빼내어 차분히 제 허리를 감도록 만들었다. 다급히 달려들었던 것치고 금세 온순해진 태영은 대신 시선으로 가느다란 목덜미를 핥으며 일단 복종했다.
“이사님 그런 얼굴 보고 그냥 가는 정신 빠진 알파가 어딨어요.”
태영은 다시금 은재의 허리를 꽉 움켜쥐려 손을 움찔거렸다. 은재는 그 손을 가볍게 쥔 채 고개를 저었다.
“보육원 갈 거야. 어린아이들 보러 가는데…… 이런 얼굴로 가면 안 돼.”
“그러니까 지금 해 주세요. 그럼 가는 동안 참을게요.”
은재는 하는 수 없이 태영의 콧대 위에 입술을 내렸다. 태영은 그 입맞춤에 오히려 더 욕구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참았다. 7년을 참았는데, 몇 시간 못 참을까.
대신 몸을 숙여 은재의 품에 안기며 숨을 길게 뱉었다.
“어떤 옷 입으실 거예요.”
“모르겠는데.”
“색만 알려 주세요. 따라 입게요.”
“……하얀색 입을게.”
“네. 이사님은 하얀색이 잘 어울리세요.”
그렇게 은재의 품에 기대어 있은 후에야 태영이 몸을 일으켰다. 평소와 같은 애정 고백이 이어졌다. 은재는 대답 대신 태영의 손을 한번 쥐었다가 놓아주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비슷했지만…… 이유 없이 닿았던 손이 유독 저릿저릿했다. 홧홧한 숨을 가라앉히는 것이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오래 걸렸다.
“아저씨 왔다!”
“안녕하세요!”
“와아! 예쁜 아저씨야!”
“아저씨! 보고 싶었어요!”
오늘 은재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는지, 운동장에 모여 있던 아이들은 차가 보이자마자 달려들었다.
오늘 찾은 보육원은 대경에서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보육원이었다. 대경은 꽤 여러 곳의 보육원을 후원했다. 몇몇 곳은 이렇게 꾸준히 방문하기도 했다.
덕분에 은재를 제법 반갑고 익숙하게 여기는 아이들은 벌써부터 옹기종기 모여 은재와 그 옆에 선 태영을 올려다보았다. 호기심이 깃든 눈동자가 코앞에서 반짝거렸다.
“근데 옆의 아저씨는 누구예요?”
“음…….”
“예쁜 아저씨 애인.”
“우와.”
“우와!”
이렇게 방문하기까지…… 사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민 회장이 여러 곳을 후원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있는 아이들은 그 누구보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한 번쯤은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저와 비슷한 아이들이니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내키지 않았다.
이제 대경의 민은재가 되었는데도, 어릴 때의 외로웠던 기억이 불쑥 발목을 잡을까 두려웠다. 또 저와 비슷한 얼굴들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만나게 될까 봐 경계하게 되었다.
하지만 태영이 곁을 떠나고 큰 저택에 홀로 남은 순간. 은재는 더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태영이 지녔던 그 작은 온기에 제가 과하게 기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조금씩 보육원을 찾게 되었다.
생각보다 아이들을 보는 건 괜찮았다. 저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태영이와 비슷한 아이들도 많았다. 아이들의 모습에서 태영이를 찾아 헤매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 일인 것을 알면서도, 종종 이곳에 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직도 아이들을 대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래도 어색하고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저택에 저 홀로 있다는 생각이 한동안 들지 않았다. 그렇게 자리 잡은 습관이었다.
“애인 아니야.”
은재는 저에게 다가와 손을 흔드는 아이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며 말했다. 하지만 태영은 꿋꿋이 고집했다. 보란 듯이 은재의 바로 옆에 다가가 찰싹 붙어 서기도 했다.
“애인 맞아.”
“싸웠어요?”
“안 싸웠어. 근데 여기 예쁜 아저씨가 튕기는 중이야.”
“튕기는 게 뭐예요?”
“자자, 들어가서 하자. 얘들아, 들어가서 인사해요.”
“네에!”
태영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붙잡으며 뒤늦게 뛰어나온 선생님들에게 같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네요.”
“안녕하세요, 이사님. 그간 잘 지내셨죠?”
“예. 아이들도 더 많이 큰 것 같네요.”
“금방금방 크죠. 한 대표님 맞으신가요? 미리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죠. 아이들이 여자 선생님들하고 주로 지내서 남자 선생님들이 오시면 더 흥분하는 경향이 있어요.”
“괜찮습니다. 요즘 제가 힘이 남아돌거든요.”
태영은 은근한 말투로 말하며 은재를 응시했다. 은재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 줄 알면서도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지난번 회계 자료 준비해 놨습니다. 먼저 확인하시는 편이 나으시겠죠?”
“네. 그러시죠.”
“전 밖에 있을게요. 하고 나오세요.”
“응.”
후원금 사용 내역을 먼저 확인하기 위해 은재가 원장을 따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착실하고 깔끔하게 지원금을 쓰는 곳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세세하게 확인했다. 어떤 쪽에 기금이 부족한지도 체크하며 내년 후원금에 대한 건을 논의했다. 그런 다음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차 한 잔을 마셨다.
선 넘으면 안 돼요! 뛰어 놀기 좋은 운동장에서는 기분 좋은 선선한 바람과 따가운 가을 햇살이 뒤엉켜 있었다. 한 아이의 기운찬 목소리도 함께였다. 뒤이어 우와아! 하는 여러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한 대표가 아이들하고 잘 놀아 주나 보네요.”
“그러게요.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네요.”
원장은 자리에서 일어서 밖을 확인하고는 크게 미소를 머금었다. 은재도 밖을 살폈다. 일어서서 보는 것만큼 자세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잡기 놀이를 하며 태영이 양쪽에 아이들을 끼고 달리는 것이 보였다.
점점 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비명 소리가 높아졌다. 듣기만 해도 절로 기분 좋아지는 소리들이 쌓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이들의 입가에도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더 필요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아이들이 이제 학교 갈 때가 또 된 것 같던데.”
“지금도 저희는 다른 곳에 비해서 넉넉한 편인데요.”
“그래도요. 아이들이 자라면 돈 들어갈 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또 학교 가면 더 들고요.”
“그렇기는 하죠.”
태영은 양쪽에 끼고 있던 아이들을 내려 둔 채 그 속에 섞여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은재는 원장과 이런저런 조금 더 대화를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장실을 벗어나 운동장 쪽으로 향하니 키가 큰 여자아이가 씩씩하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은재는 소리를 죽인 채 운동장 쪽으로 다가갔다. 모래와 돌 따위가 밟히는 소리도 내지 않으려 했다.
아이들은 가을볕에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놀이에 몰두하고 있었다. 태영은 은재를 발견하고 가볍게 윙크하며 술래 쪽으로 성큼 다가갔다.
은재는 가까운 곳에 앉아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때…….
“…….”
“…….”
작은 손 하나가 슬그머니 은재 쪽으로 다가왔다. 뛰어노는 아이들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모른 척 다가와, 은재의 손을 붙잡고 쪼그리고 앉았다.
“왜 형 누나랑 같이 안 놀고.”
은재가 아이의 작은 손을 잡아 주며 물었다. 오동통한 볼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코를 훌쩍이며 웅얼거렸다.
“깍두기…….”
“아, 깍두기구나.”
아이는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와아아! 그 사이에 태영이 술래를 잡아 아이들이 소리를 내지르며 다시 선 뒤로 달려갔다. 은재의 손을 꽉 잡고 있던 아이도 그 순간만큼은 일원이 되어 선을 향해 열심히 달렸다.
술래인 아이는 깍두기인 아이의 등을 밀어주며 함께 달렸다. 다른 아이들 사이에 더 작은 아이를 숨겨 주며 다시 커다란 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이번엔 진짜 안 봐준다!”
꼬물거리며 형 뒤에 숨었던 아이는 다시 놀이가 시작되고 숨을 곳이 없어지자 은재의 쪽으로 다가왔다. 당연한 듯 은재의 손을 꼬옥 잡으며 형 누나들의 놀이를 관찰했다.
아직은 형 누나들만큼 빨리 달릴 수 없지만 그래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누군가 잡히면 같이 숨을 터뜨리고, 또 술래의 눈을 피해 움직이면 긴장 어린 눈으로 놀이를 지켜보았다. 어깨를 움츠리고 긴장을 했다가, 작은 입술에서 혹여나 소리가 날까 다른 손으로 입술을 꾹 누르기도 했다.
“아저씨가 같이 해 줄까.”
작은 아이의 눈에 초롱초롱한 열망이 깃들었다. 은재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서 아이의 손을 움켜쥐었다.
“아가라도 우리 이사님 손 함부로 잡으면 안 되는데.”
그때, 낮은 음성과 함께 태영이 불쑥 다가와 은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느새 깍두기 아이를 들어 올려 제 품에 안고는 자연스레 놀이에 동참했다.
“멈춰야죠. 술래가 이사님 쳐다보는데.”
깍두기는 단번에 높아진 시야에 감탄하면서도 신이 나는지 더 큰 미소를 지었다. 태영 근처에 서 있는 누나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곤 저도 이내 동작을 멈추었다.
“아저씨 움직이면 안 돼요!”
술래도 덩달아 은재에게 경고를 주었다.
“예쁜 아저씨도 깍두기야. 한 번만 봐줘.”
“……응, 한 번만 봐줘.”
아이들의 놀이에 동참하는 건 조금 쑥스러웠지만……. 은재는 어색해하며 태영의 말을 따라 했다. 그럼에도 도통 멈추지 못해 태영이 은재의 허리를 더 확 당겨왔다.
“놀아 본 적이 없어서 못 노나 봐. 어렸을 때도 공부만 했을 것 같은데. 맞죠?”
“……그런 거 아냐.”
“그럼 잘 해 봐요. 감히 우리 이사님 손을 잡았던 아가한테는 같이 해 준다고 하셨잖아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마음씨 좋게 한번 봐준 술래가 다시 목청껏 외쳤다. 은재는 태영의 듬직한 등 뒤에 숨어 어색한 얼굴을 숨겼다.
키득키득. 태영의 주변으로 다가오던 아이들이 슬며시 숨은 은재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은재는 더욱 민망해져 목을 붉혔다. 하지만 아무리 얼굴을 피해 봐도, 태영의 등에 등을 대고 숨은 이상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기 마련이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재차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태영은 쓰읍, 소리를 내며 자꾸만 다가오는 아이들을 향해 장난스럽게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놓고 제 뒤에 숨은 은재를 당겨와 가슴에 숨기며 씨익 웃었다.
꺄아! 묘한 포옹에 아이들이 제 눈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큰 수확을 이룬 술래는 아이들을 줄줄이 엮어 잡아갔다.
정작 태영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은재를 안고 있었다. 태영의 다른 팔에 안겨 있던 깍두기도 슬쩍 팔을 뻗어 은재를 끌어안았다. 제 작은 품에 또 다른 어른 깍두기를 숨겨 주려 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은재는 홧홧한 뺨을 들어 올려 옹기종기 저와 태영의 뒤에 숨은 아이들을 살폈다.
“이사님.”
태영은 새삼스레 제가 아직까지 끌어안고 있는 은재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듯 만졌다. 그러곤 술래가 다시 우렁차게 외치는 순간을 이용해 입술을 맞부딪쳤다.
……우아아아아! 뽀뽀한다! 별안간 일어난 태영과 은재의 키스에 아이들이 방방 뛰며 눈을 가렸다. 높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아이들 앞인데. 안 좋은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아 은재가 태영을 밀어내려고 해 봤지만, 태영은 도리어 입을 열기까지 했다. 입술만 맞대고 있던 것에서 이제 조금씩 혀와 숨이 섞이기 시작했다.
주저하는 손목을 지그시 붙잡은 태영이 높아지는 아이들의 환호를 들으며 술래에게 눈짓했다. 야무진 술래는 발끝을 세워 요리조리 몸을 흔들며 은재와 태영의 입맞춤을 구경했다. 그러곤 영리하게 외쳤다.
무궁화…… 꽃이…… 피었…… 습……. 30초보다 훨씬 더 길게 이어지는 소리였다. 아이들은 태영과 은재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며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움직였다. 미적지근한 발걸음 소리에 차츰 속도가 붙으며 여기저기 시선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태영이 제대로 은재의 입 안으로 침투해 왔다. 혀끝을 부드럽게 문지르고 간질이며 낮은 웃음소리를 혀에서 혀로 전해 주었다.
은재는 눈을 질끈 감으며 태영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와아아! 그 사이에 술래가 뛰어나와 다른 아이를 붙잡았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그 사이에서 주고받은 묘하게 쌉싸름한 입맞춤이었다.
그 뒤로 아이들은 신나게 점심을 먹었다. 몇몇 아이들은 태영과 또 축구를 신나게 즐겼고, 깍두기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은 은재에게 책을 읽어 달라며 가져오기도 했다. 그렇게 간식까지 먹으니 아이들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이제 보육원을 떠날 시간이었다.
“오늘 너무 고생하신 것 같아서 죄송스럽네요. 아이들이 이렇게나 활발한 줄 저희도 몰랐습니다.”
“아니에요. 밝고 좋은데요. 그래도 아이들 사이도 좋고, 선생님들하고 관계도 좋은 것 같네요. 저도 재밌었어요.”
그렇게 온종일 뛰어 놓고 지치지도 않는지, 산뜻한 얼굴의 태영이 웃으며 말했다. 보육원 원장 또한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지치셔서 다음에 또 안 오시면 안 되는데요.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어요. 기다릴 겁니다.”
“최대한 금방 올 수 있도록 할게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정말로요.”
“다음에는 더 길게 시간 내서 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와 주시는 것만으로도 저희는 기쁩니다. 부담 갖지 마세요.”
뒤늦게 도착한 아이들의 간식과 선물들이 커다란 트럭에서부터 보육원 안쪽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매번 이런 것도 가져다주시고요. 정말 여러모로 큰 도움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 인사를 받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은재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들이 일어나고 나면 아쉬워하겠어요.”
“어쩔 수 없지요. 매번 도우미 선생님들이 왔다 가시면 늘 그렇죠.”
이미 여러 번 이런 일을 겪은 터라 아이들 대다수는 낮잠을 자기 전 은재와 태영의 곁에 더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 번이라도 시선을, 그리고 손길을 받아 보려 하는 것이었다. 은재와 태영은 그 마음을 아주 잘 알기에 골고루 시선과 손길을 나눠 주었다. 한 명 한 명 눈을 맞춰 주며 인사를 해 주었다.
“어, 깍두기다.”
그런데 누군가 졸린 눈을 하고 창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깍두기였다. 태영은 성큼 그곳으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 아이를 꺼내 안았다. 방 안에 함께 계시던 선생님이 놀라 일어섰으나, 태영은 괜찮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왜 안 자.”
“……안녕.”
“인사하려고?”
“네…….”
깍두기는 너무 졸린지 하품을 하고 눈을 비비면서도 은재에게 손을 흔들었다.
“얘 알파죠?”
그 모습에 태영은 황당해하며 물었다. 태영의 품을 너무 편안하고 익숙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은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나 작은 꼬마 알파였다.
원장은 작게 웃으며 그렇다 대답했다.
“거봐. 어린아이들도 다 안다니까.”
은재는 그저 서서히 잠에 빠지는 아이의 뺨을 콕, 찔러 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더 해사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아주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가 또 감고, 한참 뒤에야 눈을 뜨기를 반복했다.
원장은 태영의 품에서 깍두기 꼬마 알파를 데려가며 꾸벅 인사했다.
“잘 커라, 꼬마 알파.”
“…….”
“네 취향이 고급인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이사님은 내 거야.”
깍두기 꼬마 알파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오물거리다 곧 깊은 잠에 빠졌다. 은재는 덕분에 눌린 뺨을 살피며 뒤를 돌았다. 몇 시간 전까지 아이들의 소리로 가득 찼던 운동장을 빠져나가며, 당연한 듯 다가온 태영의 손을 붙잡았다.
“내 연적이 저렇게나 어린 녀석일 줄 몰랐는데.”
이곳에 올 때처럼 한 차에 올랐다. 언제나처럼 운전석과 뒷자리를 나누는 칸막이가 올라가고, 곧장 뺨이 맞대어지고 입술이 겹쳐졌다.
“연하한테 먹히는 타입인가 봐요. 나도 한 스무 살 어리게 태어날 걸 그랬나.”
은재는 태영의 구레나룻을 만지며 어깨를 으쓱였다.
“연상한테도 먹히는 것 같던데.”
“그래요?”
“응.”
“하긴. 난 늘 연적이 너무 많지. 이렇게 생겼는데 누가 놔두겠어.”
이윽고 은재의 손가락이 태영의 목선과 어깨를 타고 내려와 소매 끝으로 향했다.
“예쁘다.”
“하고 와도 될지 고민을 좀 했는데…… 워낙 꼬마들이 기운이 넘칠 테니까요. 그래도 왠지 오늘 한 걸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지난번 태영에게 선물한 커프 링크스가 달려있었다. 사실…… 선물한 지 2주가 다 되어 가도록 고맙다는 말만 하고 착용한 걸 볼 수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괜히 취향이 아닌 것을 선물했던 건가 하는 걱정을 아닌 척 눌러야 했다. 이렇게 잘 어울리는 것을.
“잘 어울려.”
“다행이에요. 사실 계속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정말?”
“네. 이사님한테 전 아직도 예뻐 보이고 싶고, 잘 보이고 싶거든요.”
은재가 태영의 눈을 가만가만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태영은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렇게 보면 부끄러워요.”
“그런 줄 몰랐어.”
“원래 유혹할 때는 참아야 하는 거고요. 오늘은 장소가 장소다 보니 더 부끄러운 것도 같고.”
정말 그런가……. 그 말을 듣고 보니 태영의 뺨이 붉어진 것도 같았다. 따가운 가을볕에 익은 것이지만 태영은 부끄러운 척 내숭을 조금 더 떨었다. 귓불을 은재의 빗장뼈에 대고 비비며 애교를 떨었다.
“오늘 작은 태영이가 이사님 만나고 싶다는데.”
“……부끄럽다며.”
“이제 보육원 근처 벗어나서 괜찮아졌어요.”
태영은 아직 홧홧함이 남은 얼굴로 말했다.
“내일 나간다고 했잖아. 괜찮겠어?”
“물론 전 괜찮죠. 주말에 일하는 건 별로지만.”
살살 할게요. 태영은 은재의 가슴에 뺨을 대고 기대어 숨을 고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와 더 가까이 닿자 은재의 심장 박동이 슬그머니 커지는 것을 느끼며 늘씬한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은재가 팔을 뻗어 태영의 코끝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테오라는 그 사람 시간 될 때 데려와. 같이 식사하자.”
“…….”
“테오 씨가 많이 도와줬다면서.”
“테오 씨?”
낯선 호칭에 태영은 잘생긴 눈썹을 꿈틀거리고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묘하게 골이 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전 이사님의 소년이었던 걸 아쉬워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지금은 좀 아쉽네요.”
“…….”
“나도 이사님한테 은재 씨, 하고 부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직 어려서 그런가, 태영은 작은 것에도 질투를 했다.
“응? 은재 씨.”
그리고 은재는 이제 그 반응이 생각보다 귀엽게 느껴졌다.
정작 어릴 때는 그렇게 귀엽게 봐 주지 못했던 것 같은데.
“오늘 보니까 은재 씨가 아이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러신가요?”
“잘 모르겠어.”
“잘 보시던데요? 깍두기 알파랑도 잘 놀아 주시고.”
“네가 놀아 줬잖아.”
“그렇게 아이까지 홀릴 줄 몰랐어요. 나중에 우리 아가 태영이도 아빠 얼굴에 홀리는 거 아닌가 싶네요.”
결국 은재는 피식 웃으며 품에서 담배를 찾아 물었다. 태영은 그 끝에 불을 붙이면서도 아가 태영이…… 하며 웅얼거렸다.
“아가 태영이 없어.”
“오늘 만들죠, 뭐.”
태영은 진짜 아이가 있기라도 한 듯 판판한 은재의 배를 만지작거렸다. 절 밀어내지 않고 익숙하게 여기는 그 얼굴을 훑으며 배와 옆구리 곳곳을 더듬어 보았다.
“아침부터 사실 테오한테 연락이 왔어요.”
“일 때문에?”
“그건 아니고.”
창문을 열어 담배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며 태영이 말을 삼켰다. 그 반응에 은재도 짧게 고개를 흔들었다.
서서히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알고 있었잖아.”
“네. 전 괜찮아요. 근데 좀 마음이 아파서.”
태영은 어느새 평소와 같아진 얼굴의 은재를 들여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아이들과 함께 동화책을 읽으며 곤란해하던 얼굴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종종 보육원을 찾았다고 했으면서, 그간은 어떻게 아이들과 지냈는지 영 어설픈 분위기였다.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하자는 대로 다녔을 게 뻔했다. 난처한 얼굴로 거리를 두고 지켜보다가 겨우 인사를 했을 수도 있었고.
그럼에도 아이들을 양옆에 앉히고 멀어지지 않으려 살폈다. 악의를 지니지 않은 이들 틈에서 서로가 서로를 조심스러워하는 그 유순한 분위기는 그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막상 그가 지내고 있는 곳은 언제나 그에게 안 좋은 소문을 달아 주려 애를 쓰는 곳이었지만.
“너무 익숙해 보여서 마음이 아파요.”
은재는 신 의원이 거꾸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덤덤했다. 그가 우려했던 민 회장과 그와의 관계, 그리고 제가 데려온 아이와의 관계가 서서히 화두가 되어 가는 것을 익히 알면서도 무심했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보다 그 일을 대하는 은재의 태도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을 겁냈으면서도 막상 벌어지니 묵묵히 곁을 내어 주는 속내는 도대체 어떤 깊이를 가지고 있는 걸까.
그가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스스로의 힘을 키우려 한 것이었다. 은재의 어깨에 얹혀 있는 것들을 저에게 옮겨 오기 위해서.
자신이 은재의 등에 칼을 꽂기 위한 알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타당하고 합리적으로 그의 알파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하지만 아직도 은재를 짓누르는 여러 가지 무게들을 발견할 때마다 속이 쓰렸다. 제가 그에게 반해 이런저런 예의를 배울 때도, 알파로 변이한 것을 인생 최대의 괴로움으로 여기며 좌절하던 순간에도, 또 드디어 그의 곁에 설 수 있다고 느끼던 순간에도…… 은재가 갖고 있던 것은 저의 것보다 몇 배는 더 무거웠다.
“나눠 들 준비 다 했어요, 저는.”
그러나 은재는 옅게 웃기만 했다. 이런 태영의 말을 고맙고 기쁘게 여기면서도 보호자인 저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그런 점을 감내했다.
어떻게 해야 그에게 가장 절실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조금씩 피어나는 소문마저 없애야할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는데,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이야기일 텐데. 그것을 저도 알고 그도 알고 있는데, 그래도 그에게 닿지 않도록 해야 할까. 아니면 제 어깨가 그의 곁에 있다는 것을 더 자주 알려야 할까.
“그래서 제가 당신의 알파가 되고 싶다고 한 거예요.”
은재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태영의 뺨을 감쌌다. 어울리지 않게 담배 냄새가 묻은 손이었다.
“어깨가 가벼워지실 때까지 항상 고백할게요. 사랑한다고.”
찰나 움찔했던 은재는 금세 표정을 풀며 태영의 뺨을 만졌던 손으로 담배를 물었다.
이제 담배는 얼마간의 효능 또한 잃은 듯했다. 이런 순간에 담배를 피우면 심장이 조금 느려지며 평소의 속도로 돌아왔는데. 이제는 그러지도 않았다. 박동이 오히려 분명해지고 있었다. 더 강한 세기로 가슴을 두드렸다.
그럼에도 은재는 담배를 물었다. 제 손을 붙잡는 완력을 느끼며 담배를 깊게 삼켰다. 내장을 찌르는 듯한 매캐한 연기도 이 순간엔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양심…… 그것을 무너뜨리며 거세진 박동이 심장을 두드리고, 또 두드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