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19)

7

“와, 이게 얼마 만이야. 일주일 만에 보는 것 같다?”

“며칠 전에도 나왔어. 네가 없던 거지.”

“한국에 들어온 뒤로 그렇게 두문분출한다며.”

“좀, 바빴어.”

“네 일은 내가 다 하고 있는데?”

챙―! 유독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태영은 말을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에게 시선 하나 주지도 않고 대꾸하며 상대를 몰아붙였다.

버저가 울리고, 불이 들어와 연신 태영의 득점을 알리고 있었지만, 태영은 성에 차지 않는 것처럼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다. 너무나 잘 보이는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때리며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계속해서 일방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태영의 상대로 나선 사람은 이쯤에서 항복을 외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스코어를 확인했다. 어차피 스코어는 압도적이었다. 이렇게 몇 번 강한 힘과 기운에 밀리고 나면 이번 판도 끝날 것이었다.

“살살 해. 선수냐?”

“한때 그럴 뻔했지.”

챙! 한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 점수가 올라갔다. 하지만 아직도 태영은 부족함을 느꼈다. 몇 년 전, 펜싱 국가 대표로 나간 선수라고 해서 기대를 하고 나왔는데. 발을 두 번도 움직이기 전에 점수가 올라갔다.

땀을 더 흠뻑 내고, 힘을 더 쓰고 싶은데. 등근육과 팔이 당겨올 정도로 움직이고 싶은데 그럴 필요도 없이 승패가 명확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채 10분이 지나기도 전에 종료 벨이 울렸다. 태영은 마스크를 거칠게 벗어 버리고 상대와 악수를 나눴다.

단 아래에서 팔짱을 끼고 경기를 지켜보던 남자는 쯧쯧 혀를 차며 물을 내밀었다.

“재미 좋아?”

“무슨 재미.”

태영은 순식간에 물을 비워 내곤 병을 종잇조각처럼 구겼다. 대충 입고 있던 바디 수트를 벗어던지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뚝, 그의 턱 아래에서 미처 닦지 못한 땀이 떨어졌다.

“그렇게 한국 오고 싶어 했잖아. 보고 싶어 죽겠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그 소리 하려고 온 거야?”

“그건 아니고.”

남자는 태영을 찌푸려진 눈썹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너랑 대결할 상대도 없어. 다들 나가떨어졌다고.”

“선출이라면서 다들 한심하네.”

유독 태영은 타인을 대할 때면 무심하고 무감해졌다. 원래도 정적인 성격이기는 했지만, 어느 순간 더욱 단조롭고 서늘해졌다. 능글거리는 척 굴며 애교 아닌 애교를 피우는 것은 오로지 은재 앞에서만이었다.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무관심했다. 필요하다면 위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테오는 그 모습을 너무나 잘 아는 인간이었지만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왜 왔어.”

“네가 반가워할 소식 가지고 왔는데.”

소식? 태영은 짙은 눈으로 테오를 직시하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공지가 내려왔어. 본격적으로 사람을 찾는 모양이야.”

“개인으로 모집한대? 아니면 재단으로?”

“딱히 가리지는 않나 봐. 재단에 소속된 아티스트면 재단하고 자리를 갖는다고 하는 눈치야. 재단 자체에서 열고 있는 사업을 그대로 흡수할 생각도 있어 보이고.”

“그렇군.”

“근데 나, 이쯤에서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굳이 문화 재단을 만든 이유가 뭐야?”

아무래도 운동량이 부족한 것 같아 태영은 다시 잠시 검을 내려다보았다. 혼자라도 조금 더 움직일 요량이었다.

“이사님이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으셔.”

“……와.”

“미술도 좋아하시고. 대경 산하에 문화 재단도 꽤 흥미롭게 보시는 것 같고. 그래서.”

“근데 대경 산하 문화 재단하고 겹치지 않아?”

“우리랑 분위기는 다르니까 상관없어. 거긴 정통파야. 나는 모던파고.”

“혹시…… 여차저차하면 대경 산하로 넘길 계획인가?”

“이사님이 갖고 싶다고 하면 넘겨드려야지.”

“네가 그 고생을 하면서 만든 재단인데?”

“이사님 옆에 서려고 만든 거야.”

거듭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테오는 들고 있던 태블릿 PC를 넘기며 이내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대경으로 합병되면 나도 옮겨 줘. 나도 대기업 좀 다녀 보자.”

하지만 태영은 대답도 없이 잠시 화면에 집중했다. 대략의 일정과 필요 자격들이 잘 정리된 서류를 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어떤 분위기를 찾는 건데.”

“우리한테 유리할 것 같아. 여러 기업들이 주최사로 껴 있기는 하지만, 결국 행사를 제대로 주관하는 건 MI 재단이야. 지난번 방미 행사 때 어떻게 준비했는지 기억하지? 김 교수가 은근히 열려 있는 사람이잖아. 전위 예술 좋아하고.”

이미 테오는 재단 쪽에서 내보낼 만한 아티스트의 라인업을 정리해 둔 상태였다. 태영은 그 라인업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어두운 색의 눈동자가 빠르게 활자를 읽어 내렸다.

“결과 발표는 언제야.”

“유치? 그건 이미 확정된 것 같아. 발표는 이번 달이기는 한데 미례시에서 열게 될 것 같은 눈치야. 다들 로비를 열심히 했나 보더라고.”

아직 8년 정도가 남은 일정이지만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차근차근 행사를 준비하면 그 전에 열릴 경기나 공식적인 국가 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건설사를 할 걸 그랬네.”

“왜. 설마 경기장을 지어 보려고?”

“대경에는 건설사가 없거든.”

“…….”

“대경이 아예 공연 쪽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이럴 때 경기장이라도 지으면 돈 될 거 아냐? 이사님 재산도 더 불고.”

뻔뻔한 대답에 테오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태영은 그 와중에도 리스트를 마저 확인한 뒤에 다시 검을 챙겼다.

“리스트 업 다시 해 봐야 될 것 같다. 내가 검토하고 오늘 밤에 메일 보낼게.”

“별로야?”

“괜찮기는 한데, 아무래도 후원사들이 보수적인 그룹이야. MI재단에서도 이전처럼 하긴 어려울 거야. 중간 단계가 필요해.”

“그래서 아예 클래식은 뺐는데.”

“너무 뺀 것 같다는 소리야. 차라리 공고를 내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태영이 이끌고 있는 문화 재단은 민간사업과 청년 프로젝트 같은 것을 주로 지원하는 재단이었다. 소속된 신인 예술가들의 자립을 지원했고, 지자체와 협의하여 지역 활성화 프로젝트를 열기도 했다.

영국에 있을 때부터 시작했던 재단 사업이었다. 이전 은재가 눈여겨봤던 아티스트의 전시회를 우연찮게 방문했던 태영은 그때의 일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업을 꾸렸다. 아티스트의 개별 후원을 시작으로 하여 필요한 경우엔 매니지먼트 역할을 겸했다.

영국에서 시작된 한국계 재단. 때문인지 유독 아시아계 아티스트들이 재단을 많이 거쳐 가곤 했다. 타지에서 느끼는 소수자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연주와 그림, 문학 등이 탄생했고 태영은 제 눈에 들어온 예술가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들이 성공을 거두어 재단은 빠르게 몸집을 부풀렸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한국으로 옮겨 와 사업을 꾸릴 셈이었다. 재단의, 태영의 이번 목표는 대경이 후원사로 참여하고 있는 정부 사업이었다.

사업 자체도 탐이 나긴 했다. 재단이 성공적으로 한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기회였고, 한국계 아티스트들의 입지를 넓힐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은재에게 인정받을 만한 사업이고.

꽤 자신도 있었다. 사업가의 기질을 타고난 태영은 눈이 좋았다. 이번 사업이 그간 제가 해 오던 재단의 색과 제법 잘 맞을 거라는 것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공고 준비해. 기간은 짧게 해서. 그리고 한국계 예술가 중에 혹시 관심 있는 사람 있는지 알아보고.”

테오는 영국에서 만난 인연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만나 친구가 되어 사업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이 건은 우리 재단이 유리해.”

“그래. 무조건 따라는 뜻인 거 안다, 새끼야.”

그는 태영과 마찬가지로 한국계였다. 급작스럽게 고등학교 시절 크게 가세가 기울어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가야 했지만, 태영의 도움으로 영국에 남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자연스레 둘은 긴밀한 사이가 되었고, 사업에까지 동참하게 되었다.

“근데…… 아직 네 이사님은 모르시지? 네가 문화 재단 사업 하고 있다는 거.”

“아직 말씀 안 드렸으니까.”

“언제 말씀드릴 건데?”

“확정되고 나면.”

“우리가 참여하는 걸로?”

“어. 그 다음에 말할 거야. 괜히 그 전에 알면 신경 쓰이실 거야.”

태영이 사업을 시작한 목표는 다름 아닌 은재였다. 고등학교 시절, 태영은 내내 은재를 생각했다. 한순간도 은재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길을 가다 은재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지나가면 뒤를 쫓아 기어코 얼굴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매일 은재를 생각하다 입에서 절로 그의 이름이 튀어나온 적도 부지기수였다.

언제나 그를 향했던 감정이 색을 바꾸었다는 건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존경을 기반으로 애정이 덧입혀졌다. 도색적인 꿈의 주인공이 그라는 것을 알기도 전에 자각한 사실이었다.

제가 알파로 발현하던 순간. 그 순간의 끔찍함과 고통, 그리고 옆에 있던 온기를 태영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 기억을 되새기고 되새기며 인고의 시간을 버텼다.

다른 이들은 은재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다. 은재가 겉으로 두르고 있는 그 얇은 보호막 같은 얼굴이 아니라, 때때로 무너지고 버거워하는 그 얼굴의 찬란함을 알지 못했다. 속에 들어 있는 연약한 얼굴은 저만 알 수 있었다.

진정으로 은재를 알고, 위하는 건 자신뿐이었다. 완전한 은재의 남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게 필요한 알파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힘을 길러야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재단을 설립했다. 미리 민 회장에게 증여받았던 주식을 처분해 재단의 초기 자본을 마련하고, 주변의 도움과 연이은 사업의 성공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기회를 기다렸다.

다시 은재에게 돌아오기에 가장 적절한 순간을.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이건 지금 한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업. T동에 괜찮은 장소로 대여해 놨어. 특별시 문화 재단이 소유하고 있는 건물인데, 공연 열기 괜찮아 보여. 규모도 적당하고.”

며칠 전 맡겨 놓은 사업의 진행 상황까지 확인한 태영이 다시 마스크를 눌러썼다.

“알았어. 우선 공고 내고 또 연락해.”

“……너 오늘 오전부터 있었다며. 지금 6시야.”

“그런가.”

“안 지치냐? 지겹다, 지겨워.”

“운동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런 거야. 어쩔 수 없어.”

“뭐가 안 되는데.”

대강 사업에 대한 논의를 마친 테오가 태블릿 PC를 옆구리에 끼며 짝다리를 짚었다. 근처에 놓인 검을 들고 대충 태영의 허벅지를 내리치기도 했다.

“열이 안 가라앉아.”

“……무슨 뜻이냐?”

“네가 알겠어?”

“……잤냐?”

휙, 태영은 테오의 검을 순식간에 내리쳐 손에서 떨어뜨렸다. 테오가 비명을 내질렀다. 강렬한 통증이 손목까지 전해졌다.

“이사님 이야기하지 마.”

“미친 새끼 아냐? 네가 먼저 했잖아!”

“내가 해도 넌 하지 마. 네가 입에 올릴 사람 아냐.”

원래 개또라이인 줄은 알았지만……. 테오는 금세 붓기 시작한 손을 내려다보며 마스크 뒤 서늘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럼 말을 하지를 말든가.”

“꽃은.”

“샀어, 인마. 네가 보내라는 대로 해서 보냈어.”

“회사로?”

“어! 오늘 출근하셨다며. 받았다고 연락도 받았고. 하도 오래 보내 가지고 알아서 다 하더라.”

“그래.”

태영은 부어오르는 손을 보고서도 개의치 않고 몸을 돌렸다. 테오에게 말했던 것처럼 열이 가라앉지 않아서 죽을 것 같으니까.

자꾸 귀에서 은재의 젖은 신음 소리가 울렸다. 쾌감을 못 이겨 작게 소리를 흘리며 절 끌어안던 손의 감각이 아직도 선연하게 느껴졌다.

그는 신음마저 달콤했다. 느끼는 얼굴마저 말도 안 될 정도였다. 신화 속 그림을 옮겨 놓은 듯 아름다웠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분위기를 지닌 사람이 또 있을까.

히트 사이클이 왔을 때와 달리 소리 죽여 신음하고, 입술을 씹으며 비교적 소극적으로 반응했지만 도드라지는 유두며, 파르르 떨리는 살결은 솔직했다. 숨을 삼키고 눈꺼풀을 떠는 것으로 반응했고, 손길이 지나면…….

후. 태영은 다시 뻐근해지는 아랫배와 허벅지에 서둘러 검을 휘둘렀다. 무릎을 접어 앞으로 오가며 애꿎은 제 몸을 혹사시켰다.

“불능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나 봐.”

테오는 보란 듯이 시비를 걸었다. 영국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온갖 파티와 모임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적당히 분위기만 어울려 주고 나오던 녀석이었다. 누구나 매혹적으로 생각하는 오메가가 페로몬을 폴폴 뿌리며 와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사실 아랫도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소문도 있었는데.

태영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꿋꿋이 검을 붙잡고 몸을 움직였다.

“하긴. 러트 때도 그 약들을 생으로 씹어 먹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어.”

이미 터질 것처럼 근육이 잡혀 있던 허벅지에 더욱 핏줄이 솟고 두꺼워지며 심상치 않게 갈라졌다. 그렇게 좋은 집안에 속해 있는 알파라고 하기엔 과한 근육이었다. 사치스러운 교육보다는 날것이 어울리는 몸이었다.

“동정 떼더니 지독해졌네.”

그 말을 끝으로 테오는 치를 떨며 경기장을 나섰다. 그 후로도 태영은 한참이나 땀을 낸 후에야 마스크를 벗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참 벤치에 앉아 목을 축여야 했다. 이렇게 해도 역시 뻐근한 건 마찬가지였다. 온종일 혹사된 몸이 이제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음에도 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자꾸 은재의 희고 매끄러운 피부가, 부드러운 손길이, 뜨겁고 좁은 안이 생각났다.

“돌겠네.”

본격적으로 태영과 은재는 몸을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 태영에게는 꽤 유의미한 성과였다. 은재가 저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마저도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몸을 허락하다니. 어쩌면 이다음 단계로, 진정한 연인으로 거듭나는 것이 꽤 긴 고난의 시간이 될 수도 있었지만 좋았다. 이제 마음껏 표현해도 되었다. 얼마나 제가 은재를 사랑하는지, 얼마만큼 그에게 발정하는지 보여 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도덕심을 지울 수 있을 것이었다.

지금도 조금씩 그가 저를 이전보다는 편하게 여기는 것이 보였다.

또, 제 페로몬이 도움이 될 테고.

섹스 파트너가 되기로 한 이후 태영은 일주일 내내 은재의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주말에는 은재를 침대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았다. 월요일에 출근을 하지 못하게 할 생각으로 더 집요하게 몸을 열었는데, 은재는 기어코 그 몸을 이끌고 회사로 나갔다.

그래서 주중에는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은재에 몸에 대고 비비며 사정을 하고, 흰 손에, 그의 속옷에 사정을 하기는 했지만 뜨겁고 좁은 안을 파고들 순 없었다. 제가 들어가면 더욱 조여 대며 달콤한 물을 흘리고, 동시에 손톱을 제 몸에 박아 넣는…….

“아, 씨발.”

태영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도 없어서 망정이지, 누군가 있었다면 경기를 하다 발기를 한 알파라며 시선을 던질 게 뻔했다.

이쯤에서 서둘러 돌아가 은재의 속옷에 차라리 코를 박는 게 나았다.

이렇게나 운동을 해도 도통 아래는 죽지 않았다. 동정을 뗐는데도 오히려 정욕은 지독하리만큼 쌓여 갔다.

“태영이 왔나요?”

“네. 한 시간 전쯤에 오셨습니다.”

정 실장은 아침보다는 꽤 컨디션이 괜찮아 보이는 은재를 보며 덩달아 미소 지었다. 은재는 어쩐지 민망해져 조금 고개를 떨어뜨렸다.

“꽃은 따로 화병에 꽂아 둘까요?”

“……아, 아니에요. 제가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내일은 임 대표님 댁에 들르기로 했습니다. 간단하게 들고 갈 거 준비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저녁은 거기서 태영이랑 같이 하고 올 겁니다.”

“화과자 괜찮을까요. 얼마 전에 소 명장님께 받은 게 있습니다.”

“……음, 네. 괜찮네요.”

“준비해 두겠습니다.”

은재는 잠시 계단을 올려다보다 곧 제 방으로 향했다. 태영이 일주일에 한 번 꼭 시간을 내 달라고 한 금요일이었다. 그림을 가르쳐 달라고, 아니면 저를 그려 달라고 하는 와중이었으니 대충 그리는 척 이젤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래도 컨디션은 괜찮네. 은재는 허탈하게 웃으며 목을 좌우로 돌렸다. 태영과 처음 섹스를 하게 된 날 이후 매일 페로몬 양을 체크하고 있는데, 이렇게 평온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더욱 모든 것이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한껏 벌어지고 짓눌려 근육통이 느껴지는 허리와 허벅지와 달리 몸 깊은 곳은 편안했다. 페로몬이 몸에 정말 큰 영향을 주는지, 오후가 되자 군데군데 뭉쳐 있던 근육들 또한 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최 박사는 계속 염려했다. 각인을 한 뒤 오랫동안 페로몬을 느끼지 못해 빈 공간에 채워 넣고 있는 거라고, 정상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더 시간이 걸린다 했다.

그사이에 빨리 적절한 약이 생기면 좋겠는데. 은재는 언젠가 벌어질 태영과의 이별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각인을 깨는 방법을 꾸준히 찾고 있었고, 영영 깨지 못한다면 평생 복용할 수 있는 약을 찾아야 했다. 이렇게 오래 지속할 수는 없을 테니까.

어쨌든……. 은재는 어쩐지 인기척이 들리는 제 방문을 열었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오랜 신뢰관계로 이어져 있어 특별히 문을 잠그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안에서 분명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은재는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이사님, 오셨어요?”

“아.”

화들짝 놀란 은재가 황급히 문을 닫았다. 제 방에는, 커튼도, 창도 활짝 열어 놓아 늦여름의 공기가 물씬 풍겼다. 그리고 그 방에 태영이 있었다.

그것도…….

“이사님.”

방 안에서 태영이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은재는 차마 들어서지 못하고 닫힌 문 밖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결국 태영이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문 쪽으로 다가왔다. 은재는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발이 묶인 듯 있었다. 뒤로 물러나고 싶은 마음과 달리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덜컥,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믿기지 않던 광경과 달리 산뜻한 향을 풍기며 다가온 태영은 당연한 듯 은재를 끌어안았다.

“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한 시간 전에 왔다며.”

“네. 한 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어요.”

“…….”

“속옷에서 이사님 냄새나서요.”

태영은 은재의 속옷에 코를 처박은 모습이었다. 꼭 그 허벅지 옆에 욱여넣은 성기를 꺼내어 흔들 것 같은 묘한 얼굴로 크게 숨을 마시며 속옷을 움켜쥐고 있었다.

“……좀 심해, 너.”

은재는 뒤늦게 태영의 등을 도닥였다. 태영은 마치 욕정을 억누르려는 듯한 손길에 피식 웃으며 천천히 몸을 떼어 냈다.

“이사님 체력 좀 키우세요. 저 받아 주시려면 지금 이 정도론 안 돼요.”

“내 나이를 생각해줄래.”

“그래 봤자 몇 살 차이나 난다고요.”

장난스럽게 웃은 태영은 은재의 손을 깍지 껴 잡으며 다시 방 안으로 들어섰다. 꼭 그랬다. 태영은 은재와 단둘이 있는 공간을 즐겼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차단하고자 했다.

탁, 생생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은재는 소리 없이 방을 둘러보았다. 역시, 태영이 있는 곳은 언제나 좁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내뿜는 열기가 항상 가득했다.

“근데 웬 꽃이에요.”

“……아, 그냥.”

“저 주시려고요?”

재킷을 벗고 셔츠 위 단추를 풀던 은재가 꽃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영이 은재를 끌어안을 때 함께 안겼던 꽃은 다행히 이파리를 별로 떨어뜨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정말요?”

놀란 얼굴의 태영이 성큼 은재에게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태영의 가슴 쪽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 은재는 거리를 벌리며 재차 고개를 흔들었다.

“너랑 잘 어울려서.”

“근데 왜 가까이 못 가게 하세요.”

“피곤해.”

“거봐요. 체력 더 길러야 한다니까.”

“네가 그렇게 치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피곤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은재는 무의식적으로 태영의 가슴을 만져 보았다. 이제는 하도 벗은 몸을 많이 봐서 옷을 입고 있어도 그 몸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운동 했거든요.”

“…….”

“이게 더 마음에 드세요?”

태영은 당당히 그 손길을 즐기며 슬쩍 가슴을 내밀었다. 은재는 그 말에 느리게 가슴을 훑었다. 애써 유두를 피해 가슴골과 등 뒤 견갑골을 만지며 순순히 수긍했다.

“운동량을 늘려야겠네요.”

조금 더 가슴을 내밀고 숨을 마시며 태영이 제 몸을 부풀렸다. 그 모습이 꼭 어릴 적 태영인 것 같아 은재가 희미하게 웃었다.

“내일 바쁜가.”

“저요? 저 내일 별 일 없어요.”

“그럼 나랑 어디 좀 가자. 갈 데가 있어.”

“데이트해요?”

“그건 아니고.”

샤워를 해야겠는데. 아직도 가슴을 부풀리고 있는 태영은 은재의 방을 차지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나갈 기미는 전혀 없었고, 외려 대놓고 셔츠 사이로 드러나는 은재의 흰 가슴팍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임 대표님이 식사하자셔. 너랑 같이.”

“……저도요?”

“응. 회장님이 안 계시니까 네가 다시 공식적인 자리에 나오게 도와주시려는 거야.”

대경의 이름으로도, 은재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태영은 은재가 그러한 관계를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민 회장의 부재로 인한 결과이기도 하고, 오래 외롭게 지낸 것으로 인한 결과이기도 했다. 사실 사람을 좋아하는 은재의 성향이기도 하고.

제가 신뢰하는 이들의 친절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럼 그 사람도 있겠네요.”

“누구. 아, 세헌이?”

“네.”

“당연하지. 세헌이네 집인데.”

태영은 손을 들어 은재의 셔츠를 툭툭 풀었다.

“이사님은 참 대단해요. 지금 섹파한테 과거 섹파를 만나게도 해 주고.”

“……세헌이랑 그런 사이 아냐.”

“그럼 아주 연인이었어요?”

“그건 더더욱 아니고.”

“그럼 왜 섹스하다가 임세헌 이름 불렀어요.”

“…….”

“고정 파트너는 아니고 그럼 가끔 한 사이?”

그 이야기엔 할 말이 없었다. 일부러 그런 거였으니까. 그렇게 하면 혹시나 태영이 물러날까 싶었으니까. 태영을 말리기 위해 가까스로 뱉은 말이었을 뿐이었다.

“거봐요. 맞는 말이라 할 말 없죠.”

“그런 거 아냐. 그리고 그렇게 이름으로 부르면 어떡해.”

“그럼 뭐라고 해요. 세헌이 형?”

“……태영아.”

태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마저 단추를 풀었다. 그러곤 거리낌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은재의 허벅지에 뺨을 비볐다. 판판한 배와 제 흔적이 잔뜩 남은 가슴에 입술을 내리며 아직도 조금 부어 있는 유두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빨아도 돼요?”

“…….”

“빨기만 할게요.”

“아직 아파.”

“그럼 혀로 살짝 맛만 볼게요.”

스물넷……. 서른셋인 은재로선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체력의 알파였다. 온종일 운동을 하고 와도 벌떡벌떡 아래를 세우는 녀석이었다.

몸을 허락해 주기는 했지만, 이런 접촉을 평소에도 받아 주겠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언젠가는 이런 접촉을 그만둬야할 것을 알면서도 태영의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에 은재는 도저히 단호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피어오르는 불편한 감각에도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예민하게 행동 하나하나를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관계. 정말 가족처럼, 혹은 그만큼 가까운 사이처럼 편안히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관계.

섹스 없이,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을까.

은재는 벌써부터 혀로 슬쩍슬쩍 제가 남긴 흔적을 건드리는 태영을 보며 숨을 뱉었다. 엉덩이와 허리를 오가는 손이 은근한 열기를 뿜으며 지그시 몸을 감싸 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좋을 거 없을걸. 네가 그렇게 핥으면 더 눈에 띄어.”

“사랑받았다는 뜻이죠.”

“내일 세헌이 만나잖아.”

“…….”

“세헌이가 아마 알아볼 텐데. 티 낼 필요 없잖아.”

복슬복슬 숱이 많은 태영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은재가 말했다. 언제 들어도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부드럽고 정확했다. 새어 나가는 발음 하나 없이 우아했다.

그 목소리로 신음을 낼 때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절정에 올라 흐트러진 얼굴로 눈가를 붉히며 소리를 터뜨리면 정말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그런데 그 음성으로 내뱉는 못된 말에 태영은 은재의 배에 뺨을 비비며 또다시 혀로 내리그었다. 판판한 배가 예민하게 반응하며 더욱 움푹 파였다.

“너 주려고 꽃도 가져왔는데.”

“마음에 들어요. 예뻐요.”

“그럼 가서…… 아, 태영아.”

태영이 짓궂게 유두를 이로 씹었다. 은재가 둥글게 몸을 말자, 태영은 옅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요. 꽂아 놓을게요.”

“……화병 정 실장님한테 물어봐.”

“이렇게 다발인 거 보여 주시려고 직접 가지고 들어오신 거죠?”

“그래야 선물 받는 기분 나니까.”

벌써 은재의 뺨에는 열이 오른 게 보였지만, 그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에 태영은 더욱 당기는 아래를 느꼈다.

동시에 흘러나온 페로몬에 은재가 슬쩍 팔을 감싸며 몸을 숙였다. 태영은 아쉬움을 담아 흰 목덜미를 한번 물었다가 놓았다.

“샤워하고 나갈 테니까…… 식사하자.”

“네.”

아, 이사님. 태영은 꽃을 챙겨 나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에는 꼭 목욕 같이 해요.”

그 주머니에는 은재의 속옷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 * *

임 대표의 집은 민 회장의 저택과 꽤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때부터 오래 인맥을 이어 온 기업이라 그런지 추구하는 이상향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때문인지 태영은 별로 흥미도 일지 않는 눈으로 정원을 살피며 모른 척 은재의 손등을 간질였다.

“많이 컸다.”

차가 입구에 멈추자 미리 나와 있던 사용인과 세헌의 모습이 보였다. 은재는 태영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처음에 저택에 올 때는 눈도 못 뗐는데.”

무슨 이야기인가하고 은재를 빤히 보던 태영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이사님 저택이라 그런 거고요.”

“왔어?”

그때 미리 입구에 나와 있던 세헌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은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태영도 그랬다.

“……더 커진 것 같냐, 너는?”

“그런가요.”

“난 꼬맹이 시절이 좋았는데.”

“전 지금이 좋아요.”

“이것 봐. 변했다니까.”

세헌은 태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은재에게 말했다. 은재는 옅게 웃으며 세헌의 그 손가락을 지그시 눌렀다.

“태영이한테 손가락질 하지 마.”

“……네가 너무 싸고돌아서 그런가 보네.”

은재가 편을 들어주자 태영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이윽고 앞서 들어가는 은재를 쫓으며 세헌을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좀 비열하시네요.”

“뭐?”

“이전부터 이사님한테 관심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대놓고 앞에서 제 욕을 하시다니.”

같이 가요, 이사님. 태영은 세헌의 질린 표정을 바라보며 일부러 더 밝은 목소리를 꾸며 냈다. 은재는 걸음을 멈춰 태영을 돌아보았다.

보란 듯이 세헌의 눈앞에서 태영의 표정이 바뀌었다. 마치 싱그러운 소년의 미소처럼 웃으며 당당히 은재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지독한 새끼.”

욕설을 겨우 참은 세헌이 몇 걸음 떨어진 뒤에서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초대받아 식사를 하러 온 자리임에도 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었던 은재가 재킷 단추를 채우며 전실에 나와 있던 임 대표에게 인사를 했다. 태영도 예의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날카롭고 예민한 인상의 임 대표는 위아래로 태영을 세심히 훑었다. 그가 묵례를 하며 건넨 화과자도 사용인에게 넘기며 연신 태영을 살폈다.

“……그쪽이 감당할 몫이 아닌데?”

임 대표는 은재를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잠깐만 보아도 은재의 옆에 붙여 놓을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나마 어려 은재의 말을 듣고 있는지 몰라도, 그게 얼마나 갈지 알 수 없어 보였다.

“우성 알파.”

“네. 그렇습니다.”

“고집 있게 생겼는데…… 뭐, 민 회장이 낳은 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군. 민 회장 젊을 적하고 비슷해.”

에둘러 전하는 칭찬에 은재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민 회장님을 닮았어요.”

“태영이라고 했었나.”

“네.”

“그래. 우리 막내놈하고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데……. 식사하며 천천히 이야기 나누면 되겠지. 들어가세.”

은재는 희미하게 웃으며 태영을 마주 보았다. 덤덤한 표정으로 임 대표와 대화를 나누던 태영은 그제야 온순한 표정을 해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임 대표가 아직 강건하게 버티고 있는 집이라 그런지, 안에는 생동감이 가득했다. 저택과 얼핏 비슷해 보였는데, 처음 은재의 저택에 들어와 느꼈던 고요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직접 가꾸는 것으로 보이는 화초들이 중간중간에 놓여 있었고, 사람을 꽤 자주 초대하는 듯 다이닝 룸과 응접실은 눈에 띄게 넓었다.

무채색의 것들이 주를 이루는 민 회장의 저택과 달리 원목으로 보이는 색의 가구가 많은 곳이었다. 다이닝 룸 뒤에는 그가 수집하는 것으로 보이는 와인들이 몇 병 장식처럼 자리를 잡고 있기도 했다. 의외로 곳곳에서 아들들과 찍은 가족 사진 같은 것도 보였다.

임 대표는 중간중간 말을 건네며 식사를 했다. 와인을 직접 따르고 잔을 부딪치기도 했고, 세헌과 은재, 태영을 살피며 음식을 추가하기도 했다.

민 회장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비슷한 시절 사업을 하고 가깝게 지낸 사이지만, 체구가 크고 단단했던 민 회장과 달리 임 대표는 마른 체구를 갖고 있었다. 호방한 인상의 세헌과도 꽤 분위기가 달랐다.

“그림 잘 받았다, 민 이사. 볼수록 마음에 들어.”

“그 그림 좋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예요. 곧 더 잘 될 거고요.”

“그래. 투자 가치도 있고. 전실에 걸어 놨다.”

세헌은 그래도 꽤 몸이 좋은 알파인데. 임 대표는 학자 같아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아마 형질이 없는 베타인 듯 보였다.

“예전에 운동을 했던 것 같은데.”

“네. 펜싱을 좀 오래 했습니다.”

“이제는 안 하고.”

혹 불편할까 주로 은재와 세헌에게 말을 붙이던 임 대표가 식사 중반이 넘어가자 태영에게도 말을 건넸다. 태영은 식기를 잠시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네. 운동보다 다른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다른 일?”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사업?”

그런 태영을 빤히 보고 있던 은재가 놀라 물었다. 잠시 임 대표의 시선이 은재에게 닿았다 다시 태영에게로 향했다.

“민 이사도 모르는 눈치인데.”

“아직 말씀 안 드렸습니다.”

“무슨 사업?”

“나중에 자세히 말씀 드릴게요.”

“아직 나이가 얼마 안 되었는데.”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닙니다. 영국에 있을 때 여러 인연이 닿아 가볍게 시작하게 된 겁니다.”

은재는 그 사업에 대해 캐묻고 싶었지만, 나중에 따로 말하겠다는 태영의 눈빛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임 대표는 차분히 화제를 옮겼다.

“그래서 세헌이는 잘 하고 있고? 대경하고 하는 리조트 사업 중요한 건인데.”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잘해야지. 큰 규모 사업이다. 망치면 안 돼.”

“믿고 맡기셨으니 더 두고 보세요.”

“부지 용도 변경 허가가 안 난다며.”

“어제 허가 받았습니다.”

“이 장관 만나 본 게냐.”

“거기까지 가지 않고 해결했습니다. 지자체의 도움이 컸습니다. 박 시장이요.”

평소 은재는 사업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굳이 태영에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레 식사 자리에서도 거리낌 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태영은 그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아, 이것 좀 더 주세요. 은재가 좋아하는 거라서.”

“아냐, 나 다 먹었는데.”

“좀 더 먹지.”

“먹을 만큼 먹었어.”

“너무 조금이야. 양 좀 늘리라고 했잖아.”

세헌은 거부하는 은재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근처에 있던 샐러드 접시를 가리켰다. 금세 수북하게 접시 위에 상큼한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가 쌓였다. 은재는 짧은 숨을 터뜨리며 샐러드를 퍼 제 접시로 옮겨 갔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그 음식은……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싫어하셔서 못 했어. 다음에 사다 줄게.”

“이사님에 대해 잘 아시나 봐요.”

태영은 입가를 닦아 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세헌은 그런 태영을 보며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보다는 잘 알지 않을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뭐 하는 거야.”

은재는 태영의 손등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괜찮은 자리 있나 좀 알아봐 주세요, 대표님.”

“어떤 자리. 태영이?”

“네. 아직 어리기는 한데……. 그래도 미리 힘 실어 줄 기업이 있으면 도움 되지 않을까 해서요.”

“무슨 소리예요?”

“아이는 오메가를 선호하는 편이에요. 제 개인적인 바람은 조금 부드러운 성격의 사람이었으면 하고요. 알파라서 그런가 확실한 면이 있어서요.”

“이사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태영은 눈썹을 구기며 은재를 돌아보았다. 임 대표는 모르는 척 점잖게 말을 이었다.

“벌써 결혼시킬 생각인가.”

“처음에는 약혼부터 진행하고요.”

“대표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태영아.”

“도움 주시려는 것 알지만 그 부분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나 태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일을 조금 더 하고 싶어서요.”

“…….”

“제가 나중에 때가 되었다고 느끼면, 그때 대표님께 도움 요청하겠습니다. 이사님이 회장님만큼이나 신뢰하는 분이라는 걸 저도 알고 있으니까…… 그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윽고 은재가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그 화제를 마무리했다. 기분이 상한 듯했지만 예의를 차리며 밝힌 의사였다. 그러면서도 커다란 손으로 불쑥 은재의 허벅지를 아프게 쥐었다가 놓으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임 대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태영의 빈 잔에 와인을 채워 주었다. 적색의 포도주가 미끄러운 소리를 내며 잔에 담겼다.

“그건 그렇다 치고……. 태영이 소개 좀 해야지. 이렇게 잘 컸는데.”

“안 그래도 그 자리도 찾고 있었습니다. 적당한 자리가 있나 해서요.”

“흐음…….”

얇은 회색 테의 안경을 쓴 임 대표가 태영을 다시금 훑었다. 그러곤 태영이 제 잔을 채우려 하자 짧게 고개를 저으며 근처에 있던 사용인에게 손짓했다.

“유한 미술관 곧 완공식이 있잖나. 민 이사도 초대받은 걸로 아는데.”

“아, 네. 받았습니다.”

“거긴 규모가 작다고 생각하나?”

“조금요. 그리고 아이가 가기엔 조금…….”

은재는 태영을 돌아보며 숨을 뱉었다.

“민 회장이었으면 그 자리를 이용했을 것 같은데.”

이걸 보니까 그게 생각이 나는구만……. 임 대표는 와인 잔을 가볍게 흔들며 말을 이었다. 어쩐지 약간의 웃음이 묻어 있는 말투였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소수고, 주로 이번 신사업 관련 기업들이던데.”

“그런가요.”

“그리고 CK로펌에서 참여한다는 말이 있던데.”

“CK로펌……. 이 검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 검사라는 말에 이들의 시선이 모두 태영에게 쏠렸다. 세헌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은재도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는 태영은 제가 따라잡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조금 치솟는 짜증을 느꼈다.

“그럼 그곳으로 가야겠네요.”

“또 재미난 구경을 하겠구만.”

임 대표는 지그시 웃으며 잔을 비웠다.

“디저트는 자리를 옮겨서 갖지. 아까 보니까 화과자인 것 같던데.”

“명혜원에서 온 물건인데,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좋지.”

말을 마친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뒤를 쫓아 세헌이 일어섰고, 묘연한 웃음이 또 이어졌다. 은재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태영을 살폈다.

“뭔데 나 빼고 웃어요.”

“아…….”

“말 좀 해 주지. 사람 바보 만들지 말고.”

샘이 난 듯한 얼굴이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사나워 보이는 표정이라 생각하겠지만, 은재는 꼭 골이 난 소년 같아 그 뺨을 만지며 웃었다.

어렸던 태영의 얼굴이 또다시 보이는 것 같았다.

젖살이 오를 만큼 통통하지는 못했지만 볕에 그을린 뺨을 하고 절 올려다보던 소년.

제 알파가 되겠다고 하면서도 모진 면이 없어 제대로 심술을 부리지는 못하고 안겨 들기만 하는 소년.

“예전에 네가 처음 갔던 그 파티, 기억 안나?”

“그게 이 검사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때 곤란했던 사람이 이 검사야. 그 후로 일이 안 풀려서 부장 검사로 승진이 안 되고, 몇 년 뒤에 로펌으로 들어갔고. 이 검사 아들이랑 너랑 붙었잖아.”

“아.”

그제야 태영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혁민. 기억 속에서 먼지를 덮고 있던 이름이 대략 그랬던 것 같았다.

“그래서 와인을 따라 주셨던 건가.”

“그때 대표님도 보셨으니까.”

“짓궂으시네. 학자처럼 생기셔서.”

“태영아.”

치기 어린 말투에 은재가 태영의 팔을 붙잡으며 조금 더 미소를 머금었다. 태영은 제가 모르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꾸 웃는 은재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왜 자꾸 웃어요. 갑자기 저 선 자리에 내보내려고 하신 것도 저 아직 화 못 냈는데.”

“그건 언젠가 해야돼.”

“그럴 일 없어요. 그러니까 자꾸 그렇게 예쁘게 웃지 마세요. 화 풀리려고 하니까.”

쪽. 태영은 잠시 사용인들이 없는 틈을 타 은재의 뺨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임 대표의 비서가 다가와 길을 안내해 주었다. 너무나 적절한 타이밍에, 은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팔꿈치로 태영의 허리를 찔렀다. 그러나 태영은 모르는 척 씨익 웃기만 했다.

안내받은 쪽으로 걸어가던 은재가 잠시 태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머리 위에 와인 엎지 말고. 예쁘게 하고 갈 건데 그럼 아깝잖아.”

“……무슨 말이에요?”

어딘가 묘하게 들리는 말에 태영이 은재의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하지만 은재는 눈물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꼬리를 접어 웃을 뿐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설마 그때 보셨어요?”

“응. 봤지. 네가 네 머리 위에 음료 붓는 거.”

“근데도 제 편 들어주신 거예요?”

“당연하지. 난 네가 더한 짓을 해도 네 편이야.”

정원이 잘 보이는 거실에 세헌과 임 대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은재는 태영의 손을 슬그머니 놓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끝까지 잘 하고 가. 대표님이 너 좋아하셔.”

“…….”

“잘할 수 있지?”

태영은 묵묵히 끄덕여 대답했다. 은재는 어릴 적처럼 태영의 머리를 만져 주며 웃었다.

간단하게 커피와 디저트를 먹은 후 세헌과 은재는 따로 임 대표의 서재를 찾았다. 식사하는 자리에서 나왔던 리조트 관련 건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함이었다.

홀로 남은 태영은 정원을 둘러보겠다며 나섰다.

금세 대화를 마치고 내려오던 은재는 창밖으로 보이는 태영의 모습에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예전에는 아주 작은 인영이었는데. 이제는 위에서 내려다보아도 늠름한 모습이었다. 특히나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니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보였다. 꽤 귀엽기도 하고.

“무슨 일이야.”

세헌은 그런 은재의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둘이 뭐 있었어?”

“…….”

“처음엔 몰랐는데…… 분위기가 이상하잖아. 너한테서 태영이 페로몬도 느껴지고.”

“……아. 심해?”

“페로몬이 이렇게 묻을 동안 왜 안 말렸어. 괜히 너 몸에 더 안 좋은 거 아냐? 어쩌려고 이래.”

은재는 걱정 어린 낯의 세헌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심스레 세헌의 손목을 붙잡았다.

“대충 태영이도 알아. 페로몬 문제 생긴 거.”

“각인한 것도?”

“그것까진 모르고.”

“어쩌다가. 밝힐 생각 없었잖아.”

세헌은 더욱 꽉 은재의 손을 쥐었다. 은재는 조금 주저하다 곧 입을 열었다.

“……갑자기 히트 사이클이 왔어. 태영이 페로몬 때문에 그런가 봐.”

“뭐?”

순간 세헌의 얼굴 위로 많은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놀란 숨과 함께 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떻게 해결했어.”

“…….”

“알파 안 불렀잖아. 갑자기 온 거면 혼자 감당 안 됐을 텐데.”

“…….”

“……설마 잤어? 태영이랑?”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은재와 세헌이 선 곳까지도 조금씩 영향을 미쳤다. 때문인지 은재의 몸에 묻은 태영의 페로몬이 더 진해진 듯했다.

싸늘함이 불쑥 들이닥쳤다.

“그걸 왜 궁금해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때, 낮은 음성의 태영이 다가와 은재를 제 쪽으로 당겼다. 손쉽게 딸려간 은재는 잡고 있던 세헌의 손을 놓으며 난처한 얼굴로 태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헌은 곧장 은재의 손목을 붙들었다.

“언제 왔어.”

“지금 막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 하실 줄은 몰랐네요.”

“……태영아.”

“두 분이 잠자리 이야기를 공유할 정도로 가까운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그렇게 이름도 불렀던 건가…….

태영에게선 약한 바람 냄새와 함께 담배 냄새가 느껴졌다. 평소답지 않게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세헌에게 붙잡힌 손을 보며 은재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세헌은 그 손을 묘한 눈길로 바라보며 한숨을 뱉었다.

“은재 네 보호자야.”

“네. 그건 변함없어요.”

“이러는 거 남들 보기 안 좋아.”

“남들은 상관없어요. 이사님만 좋으면 돼요.”

“그게 은재를 위한 길이 아니잖아. 손 놔.”

“그만해.”

은재는 절 붙잡고 있는 두 손을 모두 뿌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태영이 너 무례하게 굴지 마.”

“……이사님.”

“오늘 초대받아서 온 거야. 대접 잘 받았고. 이렇게 구는 거 예의에 어긋나.”

정말 보호자로서 하는 듯한 꾸중에 태영은 속이 뒤엉키는 기분을 느꼈다. 예의를 몰라 그런 게 아니었다. 은재가 침대 위에서 부른 그 이름에 질투가 나서 이러는 것이었다.

은재의 침대 위에, 은재의 그 아찔한 나신 옆에 세헌이 누웠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 앞에서 은재의 어린아이로만 있기에는 억울했다. 지금 그의 침대에 올라가는 건 자신이었다. 그 아름다운 나신을 더듬고 만지며 페로몬을 쏟는 알파는 저였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은재가 저를 아직도 어린아이로 생각한다는 것을 이렇게 알고 싶지 않았다.

끝내 넘지 못할 한계를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마침 모여들 있었군.”

때마침 위쪽에서 임 대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재는 그 희미한 인기척에 옷매무새를 고치며 아무 일도 없던 척 표정을 가다듬었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침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금 태영이 은재의 손을 잡아 보려 했지만, 은재는 잡혀 주지 않았다. 태영은 더욱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지만 빈손을 말아 쥐었다.

이곳에 올 때와는 꽤 다른 분위기로 다시 차에 올랐다. 이번에도 같은 차에 올라, 서로 반대편을 보고 있었지만 가라앉은 분위기의 무게는 몇 배나 더 무거웠다. 그 정적이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

“…….”

은재는 제대로 인사를 하고 나왔는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덩달아 표정이 구겨져 있던 세헌, 묘해진 분위기를 눈치챈 듯하지만 말을 얹지는 않던 임 대표까지. 그들의 마지막 표정이 뒤늦게 머릿속에서 재현되어 움직였다.

“내가 다시 전화할게.”

원래 이들이 머무르는 저택이 보일 때쯤, 어딘가에서 웅웅 진동이 울었다. 그 전화의 주인인 태영은 간략히 말했다. 이전보다 더 낮고 서늘해진 음색에 은재는 약하게 한숨을 뱉었다.

그사이 차는 입구를 지나고, 정원을 지나 평소와 같은 곳에 멈췄다.

“고생하셨어요. 내일은 쉬셔도 됩니다.”

“네.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강 비서는 차 문을 열어주고 소리 없이 모습을 감췄다. 태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빛도 잘 들지 않는 저택 뒤로 사라졌다.

은재는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잠시 정원을 훑어보았다.

“정원에서 조금만 걷다 들어가겠습니다. 오늘은 정 실장님도 이만 쉬세요.”

“네, 이사님.”

이들을 맞기 위해 나와 있던 정 실장도 짧게 고개를 숙이고 곧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은재는 담배를 챙겨 나왔는지를 확인하며 차로 지나온 길을 천천히 걸어 나섰다.

조금…… 생각이 많아지려는 찰나이니 이럴 땐 잠시 시간을 가져야 했다. 태영이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고.

민 회장이 아끼고 열심히 가꾸던 정원이었다. 민 회장의 몸이 안 좋아지고 나서는 정원사를 두었지만, 그 전까지는 정원을 직접 가꾸곤 했었다. 나무와 풀을 좋아해 직접 만져보고 화훼시장 같은 곳에 나가 사 오기도 했다. 그때는 은재도 종종 민 회장의 뒤를 쫓아 정원을 누볐는데.

민 회장의 몸이 급작스레 안 좋아지고, 또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정원을 찾지 않았다. 이렇게 큰 정원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 정도였다.

심지어 제가 처음 저택에 왔을 때 직접 민 회장이 심어 준 나무도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걸음이 익숙하게 그곳으로 향했다. 길게 이어진 길 안쪽,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쪽에 심어진 나무.

그 나무는 어느새 단단히 뿌리를 내린 지 오래였다. 몸통도 커지고 두꺼워져 정원을 이루는 든든한 나무가 되어 있었다. 은재는 그 나무를 손으로 만져 보며 그 옆에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늦여름과 초가을이 하나가 된 듯한 공기를 마시며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들었다.

“……도대체 어디 계시나 했더니.”

그리고 불을 붙이려는 찰나, 낮은 음성과 함께 불쑥 태영이 나무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은재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태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도망가시는 게 어딨어요?”

“무슨 도망.”

“저 때문에 화나신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약간 숨을 헐떡이고 있는 태영은 당연한 듯 은재의 바로 옆에 붙어 앉아 라이터를 쥐었다. 담배 끝에 불을 붙여 주며 세세하게 얼굴을 살폈다.

길게 올라온 불이 흰 담배 끝으로 옮겨 갔다. 그와 동시에 눈이 서서히 어둠에 적응해 은재의 얼굴을 이전보다 더 선명히 보여 주었다. 태영이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에 계시는 거 처음 봐요.”

“나도 오랜만에 들어왔어. 임 대표님하고 식사해서 그런지 회장님 생각이 나서.”

“저 때문에 화나신 거 아니고요?”

“난 네가 골난 줄 알았는데.”

은재는 필터를 깊게 빨며 말했다. 움푹 패는 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영은 조금 더 고개를 가까이 끌어와 기울였다.

“골났어요.”

“…….”

“제 앞에서 전 섹파 편 드시고.”

“……예의를 말한 거야.”

“네. 알아요. 제 보호자 역할을 하신 거. 그래도요.”

“…….”

하얀 연기가 어둠 속에서 언뜻 흩어지는 듯 했다. 태영은 은재의 입술 끝에 걸린 담배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그것을 빼냈다. 은재는 순순히 입을 벌려 주었다.

“지금은 이것도 부러워 죽겠으니까 빌려주세요.”

그러곤 은재의 입술에 물려 있던 담배를 한 모금 마셨다. 때문인지 드러나는 강인한 턱선과 얼굴 윤곽에 은재가 가만가만 그 모습을 살폈다.

……보란 듯이 눈을 맞추고 담배를 빨아들이는 모습이라니.

“네가 욕 먹을까 봐 그런 거야.”

“알아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다른 사람이 널 꾸중하며 안 좋게 말하는 건 더 싫고.”

“…….”

연기를 삼키고 뱉는 게 몹시도 자연스러웠다. 손가락 끝에 담배가 걸린 것이 당연한 듯 보였고, 그 손으로 금이 그어진 이마 부근을 문질렀다. 이윽고 태영은 한숨과 함께 연기를 뱉었다.

또렷한 이목구비 주변으로 흰 연기가 아스라이 퍼졌다가 사라졌다.

“화내지 마. 태영아.”

“…….”

“난 네가 화내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태영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둔 채 은재를 응시했다.

“난…… 부족한 보호자지만 그래도 널 정말 좋아해. 네가 뭘 하든 귀여워. 다 잘하는 것 같아. 제대로 봐 주지도 못했으면서 그래.”

“…….”

“알파가 되고 나서는 곁에 아예 못 있어 줬지만…… 네가 다른 사람들한테 좋은 소리만 들었으면 좋겠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자라서 그렇다는 말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

작게 한숨을 뱉은 태영은 재차 담배를 물었다. 깊은 폐부 속까지 연기를 빨아들여 매캐하게 속을 태운 뒤 연기를 뱉으며 입을 열었다.

“알아요. 그래서 제 속이 더 타는 거예요.”

“…….”

“아시잖아요. 제가 왜 임세헌한테 그렇게 구는지.”

“그렇게 부르지 말고.”

“질투 나요. 어디서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예의를 지켜야 하는지 알아요. 그래서 제 결혼 이야기 나왔을 때도 참았어요. 저 이사님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이사님은 안 믿으시지만, 진심이에요. 근데도 참았다고요. 이사님 때문에 참은 거예요.”

서늘한 열기가 서려 있는 말투였다. 토해 내지 못한 답답함은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고여 있는 것만 같았다.

“근데 임세헌은 안 돼요.”

“…….”

“그래도…… 죄송해요. 안 그럴게요.”

태영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담배를 다시 은재의 입술 근처로 옮겨 갔다. 은재는 가까워진 묵직한 페로몬과 담배 연기를 맡으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세헌이 형 앞에서도 참아 볼게요. 질투 나도, 나보다 이사님을 더 잘 아는 것처럼 굴어도 참을게요. 내가 결국 이사님 알파가 될 거니까.”

“…….”

“그러니까 안아 주세요.”

이제 와서 애교를 부리기로 했는지, 태영은 은재의 허리에 매달렸다. 은재는 필터를 빨며 제 허리에 매달리는 커다란 몸뚱이를 한 손으로 가볍게 안아 주었다.

“전 이사님한테 화 안 내요.”

“정말?”

“그냥 삐진 거니까 달래 주세요. 저 한참 연하잖아요. 원래 연하랑 만나려면 그런 거예요. 맞추기가 어렵다고요.”

“나 너랑 만나는 사이 아닌데.”

“섹스하는 사이잖아요.”

별로 피우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담배는 타들어 가 끝에 다다라 있었다. 은재는 담배를 부러뜨리곤 아쉬운 숨을 뱉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혼내실 때는 손 잡아 주세요.”

“……손?”

“네. 이사님이 변함없이 절 사랑하신다는 걸 보여 주셔야 수긍할 거예요. 언제나 저에 대한 애정이 변하지 않는다고 보여 주세요.”

태영은 제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러곤 그 담배를 은재의 입술에 대주었다.

“우린 둘 다 결핍되었잖아요. 그래서 전 가끔 불안해요. 이사님이 제 곁에서 없어질까 봐. 그럴 리 없는 거 알면서도 괜히 그래요.”

“…….”

“그러니까 화낼 때 꼭 손 잡아 주세요. 평소에도 잡아 주면 더 좋고.”

살짝 고개를 숙여 담배의 냄새를 맡은 은재는 어깨를 으쓱였다.

“독해.”

“별로 안 독해요.”

“냄새가 독한데.”

“한 모금만.”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은재는 고개를 숙여 가볍게 담배를 물었다. 깊게 숨을 삼키며 입술을 지나, 입 안의 점막을 지나 몸속으로 스미는 연기에 가슴을 들썩였다. 어쩐지 기침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애기네, 우리 이사님.”

태영은 피식 웃으며 제 입술에 담배를 걸쳤다. 은재가 기침을 하지 않도록 가슴에 손을 올려 주며 코앞에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시 제가 옆에서 제대로 돌봐가며 키웠다면 그런 엄한 생각을 갖지 않았을까.

“파티에 갈 거지? 크지 않은 행사야.”

은재는 그 얼굴을 만져 주며 말했다. 태영은 더더욱 그 손에 뺨을 기대고 큰 몸을 접어 기울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독한 담배를 물고 있는 것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은재는 막연한 귀여움과 애틋함을 느끼며 태영을 만져 주었다.

“이사님이 하라면 해야죠.”

“네가 돌아왔다는 걸 보여 줘야 해.”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그럼 이사님이 걱정하는 그 말 나올 텐데.”

“무슨 말.”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요.”

“그 말이 무서워서 널 영영 숨길 순 없으니까.”

태영은 반절 정도 남은 담배를 부러뜨렸다. 사실 그 말을 아주 많이 두려워하면서. 절 위해 그 수모를 감수하겠다는 결연한 말에 턱이 간지러웠다.

사람들의 시선을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레 감내하려는 태도. 절 위해 자연스레 그 모진 말이 나오는 곳으로 가겠다는 태도.

지금 필요한 건 담배가 아니었다.

잘린 숨을 삼킨 태영이 흰 연기를 뿜으며 은재의 코끝에 제 코끝을 비볐다.

“키스해도 돼요?”

“담배 독해.”

“그럼 유혹하지 마셨어야죠.”

“한 적 없어, 그런 거.”

묻지 않아도 태영의 아랫도리 상황은 분명했다. 점점 더 닿아 있는 열기가 뜨거워지는 것도 느껴졌다. 제법 차가워진 공기가 정원에서 느리게 맴돌고 있는데도, 닿아 있는 몸은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너 근데 정말…… 아무도 안 만났어?”

“네. 갑자기 그건 왜요.”

“이렇게 건강한데 어떻게 안 만났나 해서. 어떻게 참았어……?”

은재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태영은 그 표정에 더욱 아래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자극적이게 생긴 사람이, 느릿하게 눈만 감았다가 떠도 제 아랫도리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귀여운 표정을 지으면…….

“얘기했잖아요. 맨날 몽정했다고. 혼자 풀고 자도 안 풀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태영은 은재의 가슴팍에 뺨을 비비며 더운 숨을 뱉었다.

“지금도 죽을 것 같은데.”

“오늘은 혼자 풀어.”

“안 해 줄 거예요?”

“세헌이한테 무례하게 굴었으니까 벌 받아야지.”

“……와, 너무해. 그럼 손만 빌려주시면 안 돼요?”

“싫어.”

단호한 은재의 거절에 태영이 안달이 나 허리를 들썩였다. 은재는 그런 태영을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사님.”

바삐 태영이 은재를 쫓아 걸었다. 그러곤 은재의 어깨를 부드럽게 당겨 와 곧장 뒤통수를 틀어쥐었다.

“……음.”

처음에는 키스도 못하더니. 태영도 이제는 조금 요령이 생긴 듯했다. 껴안는 손길에도 여유가 생겼고, 자연스레 몸을 붙이며 혀를 섞고 문질렀다. 은재의 젖은 점막을 핥아 올리며 혀를 세워 치열을 훑고, 안쪽에서 머뭇대는 혀를 옭아매 긁기도 했다.

그 혀에선 변함없는 열기와 함께 씁쓸한 담배향이 느껴졌다. 은재는 입술을 떼어 내며 태영을 마주 보았다. 주변을 꽉 채우고 있던 어둠도 이제는 익숙했다. 그 와중에도 서로의 열 오른 뺨이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나의 소년…….

“담배…… 언제부터 피웠어?”

“열여덟?”

“불량 학생이네. 내 앞에서도 대놓고 피우고.”

“그러니까 혼내 주세요. 몸으로요.”

태영은 짓궂게 웃으며 은재의 입술에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은재는 태영의 어깨를 누르며 고개를 피했다. 그럼에도 절 간절히 쫓아오는 그 입술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변태 같다.”

“몰랐어요? 스물넷이 될 때까지 동정을 지키면 그렇게 돼요.”

참다못한 태영은 은재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입술을 맞댔다. 절 좀 받아 달라 애원하는 숨을 터뜨리며 입술을 좌우로 비볐다.

옅게 웃은 은재는 먼저 입을 벌려 태영의 입술을 핥아 주었다. 그 연약한 움직임에도 바르르 떨며 더욱 열을 내는 지나치게 건강한 알파의 숨소리를 들으며 조금 더 입술을 간질였다. 양손으로 뺨과 턱을 어루만지며 살며시 뒤로 물러났다.

“참아 봐.”

“참으면, 뭐가 좋아요……. 내가 안 참으면 우리 둘 다 좋은데.”

“그 자리에서 잘 하고 오면 상 줄게.”

“파티요?”

“응.”

끄응, 태영이 숨을 뱉으며 갈라지는 숨을 토했다.

“……조련당하는 것 같은데.”

은재는 태영의 허리를 도닥이며 푸스스 웃었다. 태영은 그 웃음을 빤히 바라보며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웃으면 벌을 준다고 해도 알았다고 할 거예요.”

“…….”

“함부로 웃지 마세요. 진짜…… 심장 아프니까.”

태영은 은재의 손을 깍지 껴 잡으며 발을 내디뎠다.

빈자리에선 이파리들만이 서로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 * *

“안 맞네요.”

“죄송합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어깨 너비가 제일 넓은 건데…….”

급하게 태영의 파티 참여가 결정된 상황이라 옷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의외로 옷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어깨. 여러 종류의 브랜드에서 옷을 받아 입어 보았는데도 매번 문제가 되는 건 그의 어깨였다.

“갖고 있는 정장 몇 개 있어요.”

“제일 좋은 걸 입었으면 좋겠어. 네가 눈에 제일 띄었으면 좋겠는데.”

쇼퍼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태영의 몸에 걸쳐 있던 재킷을 벗겨 냈다. 평범한 체구의 베타 여성이 태영의 뒤에서 옷을 받아 주자, 그의 덩치가 더욱 새삼스럽게 보였다. 은재는 희고 늘씬한 체격의 오메가였지만, 그래도 남자였다. 그래서인지 쇼퍼 앞에 서자 태영의 큰 체구가 더욱 실감이 났다. 쇼퍼가 위로 한참 손을 올려야 옷깃을 만져 줄 수 있었다.

“다른 건 없나요.”

“하나 더 있습니다. 동일한 사이즌데, 입어 보시겠습니까?”

“그렇게 할게요.”

태영은 연신 옷을 갈아입는 게 피곤한 듯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쇼퍼는 태영에게 재킷을 입혀주고, 타이를 걸어 주며 옷을 만져 주었다. 그러다 가슴에 손이 닿았는지 급히 뒤로 물러나며 죄송하다 말했다.

그 모습에 은재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태영이 휘청하며 뒤로 넘어가는 쇼퍼를 붙잡아 주기까지 했던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맞지만…….

“이건 좀 낫네요.”

은재는 얼떨떨한 시선으로 태영을 살폈다. 역시 어깨가 딱 맞아 보이기는 하지만 제일 나았다.

“어렸을 때도 맞는 옷이 없었는데.”

“그때랑은 다른 상황이잖아요.”

은재는 거울 앞에 선 태영에게 다가가 다시 타이를 매어 주었다.

“그래. 이걸로 하자.”

“예뻐요?”

“응. 예뻐.”

한 발 물러나있던 강 비서가 조용히 쇼퍼에게 눈짓했다. 쇼퍼는 소리도 내지 않고 짐을 챙겨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빠져나가는 소리를 다 들은 후에야 은재가 태영의 셔츠 깃을 내려 그 뒤로 보이는 제 흔적을 살폈다.

“내일까지 지워져야 할 텐데.” 

“안 지워지면 할 수 없죠. 잘 가리고 다닐게요.”

“오랜만이다. 같이 파티 가는 거.”

“네.”

어렸던 아이와 성인이 된 아이. 그 사이에 존재한 공백 때문인지 반복되는 상황이 오묘했다. 함께 가는 게 당연한 자리인데……. 괜히 뒤가 욱신거리고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

은재는 타이를 매고 재킷을 걸친 태영의 모습을 세심히 훑었다.

“반한 얼굴인가?”

“…….”

“외모는 취향이라면서요.”

“잘생기면 좋지.”

“그래서 날 선택하신 건가. 그 장지에서.”

피식 웃은 태영이 타이를 만지작거리며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은재는 그 말에도 태영이 저와 너무나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느꼈다.

저였으면…… 그때의 일은 다시 말하고 싶지 않을 텐데.

“왜 절 고르셨어요?”

태영은 은재에게 준 꽃이자, 받은 꽃이 들어 있는 화병을 보며 물었다.

“네가 제일 나이가 많아서.”

“입양 가기 어려우니까?”

“응.”

“이사님은 언제 민 회장님을 만나셨어요?”

“너랑 비슷해.”

그쪽으로 다가간 태영은 꽃 하나를 뽑아 툭, 중간을 꺾어 제 귀 뒤에 꽂았다.

“이 꽃에서 이사님 냄새나요.”

“…….”

“이사님 페로몬이 이 꽃향기랑 비슷해요.”

그래서 영국에서도 이 꽃을 맨날 봤는데……. 태영은 은재의 뺨을 조심스레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은재의 뺨에 제 뺨을 맞대고 비비며 노골적인 숨을 터뜨렸다.

“내일 잘할게요.”

“……그래.”

“상 줄 준비하세요. 이왕이면 일정 좀 빼 놓으시고요. 며칠은 침대에서 못 나가실 테니까.”

은재는 희미하게 웃으며 태영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고선 먼저 3층 서재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책상에 놓여 있는 민 회장과 저의 사진을 한번 살피곤, 어제 세헌에게 따로 받았던 사진을 새로운 액자에 껴 놔 두었다.

이전 태영이 학교에 다닐 때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펜싱 경기를 마치고 나온 직후, 1등 트로피를 거머쥐고 상기된 얼굴로 웃고 있는 아이 태영의 사진.

그 사진 속 붉은 뺨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작게 숨을 뱉었다.

* * *

파티의 규모는 들었던 대로 크지 않은 편이었다. 아직 전시가 진행되지 않은 미술관에서 진행되는 것이라 당연한 일이었다. 적당하게 선별된 인원들만이 모여 있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대화는 더욱 깊게 이어졌고, 더 농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묘하게 페로몬이 느껴지는 그런 파티이기도 했다.

어릴 적 태영이 참여한 파티는 대경에서 열었던 자선 행사로, 미성년자 아이들도 참여하는 파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철저한 성인 위주로, 참석한 인원 대다수가 형질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레 상대를 만나 페로몬을 흘렸고, 또 마음에 들면 미술관 밖으로 빠져나가 넓게 조성된 주차장과 테라스, 정원 등지에서 오묘한 시간을 즐겼다.

별관에서는 그림 판매가 이어지고 있었다. 몇 년간 관장이 노력하여 들여온 그림 소개와 경매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공간을 두르고 있는 미묘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더 눅진해지고 있었다.

“원래 이래요?”

“응. 그래서 널 데리고 오기엔 좀 그랬어.”

“왜요?”

“네가 겪기엔…… 너무 자극적이야.”

자신이 겪어 본 알파중 제일 자극적인 알파가 한태영인데. 그 누구보다 음란하고 색정적인 외관의 알파인데. 은재는 정말 아이를 대하는 얼굴로 슬쩍 눈썹을 구겼다. 마치 손으로 직접 눈이라도 가려 주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태영은 은재가 아직도 저를 그렇게 봐 준다는 사실이 꽤 즐거웠다. 침대에서는 제 아래에 깔려 움직이지도 못하고 신음을 흘리면서도, 옷을 입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욕적이고 단정한 얼굴로 저를 아이처럼 대했다. 다른 이들이 저를 해코지할까 못내 염려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제가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이렇게 드러나는 걸까. 아닌 척했지만 사실 유약한 성격 탓일까.

“이사님만 쫓아다닐게요.”

“이상한 건 보지 말고.”

은재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 태영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천천히 사람들의 소음이 더 본격적으로 들리는 곳에 들어가며, 대경 그룹 민은재 이사의 얼굴을 해 보였다.

동시에 태영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속으로 눌러 감췄다.

“민 이사!”

미술관 관장이자 오늘 파티의 주최자인 유 관장이 반가운 목소리로 다가와 은재의 손을 맞잡았다.

“와 줘서 고마워요. 민 이사가 와 준다고 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아닙니다. 평소에 많이 도와주시는데 와 봐야죠.”

“그래. 민 이사가 그림도 좋아하고. 우리 VIP 고객이기도 하고. 몇 개 취향일 것 같은 그림이 옆에 있기는 한데…… 나중에 전시 열면 와요. 따로 빼놓을 테니까.”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이쪽은 누구?”

예술가인 유 관장은 쉰이 넘은 나이에도 젊은 편이었다. 옷을 과하게 차려입지 않았음에도 생기와 활력이 가득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정말 반갑다는 듯 은재와 대화를 나누며, 그 옆에 서 있던 태영에게로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한태영이라고 합니다.”

“제가 키우는 아이요.”

“……아, 그때 그 아이? 어머, 그 애가 이렇게 컸어? 그동안 난 왜 몰랐지?”

“영국에서 공부했습니다.”

“어머나 그랬구나. 민 회장님을 좀 닮은 것도 같네.”

임 대표에 이어서 두 번째로 듣는 소리였다. 민 회장을 깊게 의지하고 존경하는 은재는 그 말에 조금 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태영은 부드러운 선을 지닌 은재보다 더 또렷한 이목구비와 큰 체구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와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자주 봐요.”

“네. 축하드립니다.”

태영은 유 관장과 악수를 하며 옅게 미소 지었다. 덕분에 드리워진 근사한 기운에 은재는 뿌듯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시선이 조금씩 이쪽으로 향했다. 다들 아닌 척하지만 낯선 태영의 등장에 호기심을 내보이고 있었다. 은재는 모른 척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태영을 소개시키고, 보여 주었다.

제 아이라고, 제 소년이라고. 민 회장의 뒤를 이을 아이라고 소개했다.

태영은 꽤나 익숙하게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은재의 도움이 없어도 다른 이들과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 갔고, 호감을 샀다. 은재와 같이 등장한 터라 다들 오묘한 눈길로 태영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분명히 드러나는 건 역시 호감이었다.

깊은 속내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다들 시선을 던지며 호기심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은재는 태영이 더 편안히 섞이도록 그 곁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민 이사.”

“아,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사업 공고 난 거 봤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아직 공고 마무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차주까지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대경 쪽에서 한동안 팔로 업 하기로 했고요.”

“그래. 뭐 대경 일처리야 알아주지. 저 쪽은 그래서 민 회장 다음?”

“네.”

함께 신사업을 꾸리고 있는 이였다. 그는 멀찍이서 태영을 잠시 훑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기운이 그의 눈에 어렸다. 본능적으로 태영이 우성 알파임을 알아채고 약간의 경계와 호기심을 모두 드러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헌과 임 대표가 다가왔다. 은재는 또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고, 인사를 나누었다. 차분히 분위기를 맞추며 대화를 이었다.

그러다 불쑥 손이 틀어잡혔다. 놀란 은재가 숨을 죽이며 돌아보자 스쳐 지나가는 것은 다름 아닌 태영이었다. 순간 아득한 기분이 훅 몸 안쪽에서부터 일어났다.

“민 이사?”

“……아, 네. 뭐라고 하셨죠?”

갑작스러운 접촉에 은재는 약간 당황했지만,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었다. 어딜 가든 태영의 시선이 절 쫓아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문득 허리 주변으로 열기 어린 손이 스쳤고, 절 향한 시선을 느끼면 곧장 눈을 마주쳐 오기도 했다.

은밀한 손장난과 눈 맞춤이 야릇하게 이어졌다. 이유 없이 미소가 입꼬리 끝에 걸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몇 번의 미묘한 장난을 주고받고, 왠지 모르게 찾아왔던 긴장이 다시 사라질 즈음 은재는 화장실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인적이 드문 곳에 있고 싶었으나 그럴 순 없었다.

그나마 태영이 있어서 다행인가. 태영의 페로몬에 이제 많이 노출이 되어서 그런지, 이전처럼 다른 알파들의 페로몬이 힘들지는 않았다.

태영에게 각인을 하게 된 후, 다른 알파들의 페로몬을 느끼게 되면 심한 거부 반응이 일 때도 있었다. 피부에 발진이 일어나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기도가 붓고 숨이 가빠지는 증상까지 이어지곤 했었다.

특히나 몇 년 전, 갑작스러운 페로몬 이상으로 알파들이 모여 있던 파티장 입구에서 발작을 일으킨 이후로는…….

조금 더 있다가 나가면 되겠지. 은재는 차가운 물로 손을 씻고 거울 속 제 얼굴을 한 번 확인한 뒤 다시 화장실을 나섰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우연의 장난인지, 달갑지 않은 이를 곧장 마주쳤다. 속내가 담긴 표정이 얼굴 위로 올라왔지만 금세 지워 내곤 고개를 숙였다.

“민 이사. 오랜만이네. 신사업 맡았다며.”

“안녕하십니까, 신 의원님.”

“안녕하지. 꾸준히 대경 쪽에 관심이 있고. 요즘은 어떤가?”

“저희도 무탈합니다.”

“근데 아직도 짝이 없어서 어째. 응?”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신 의원. 어련히 민 이사가 알아서 할까.”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가까운 것이라지만, 이런 건 좀 변해도 되지 않을까. 은재는 한결같은 신 의원의 반질반질한 얼굴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분명 이 자리에서도 난잡하게 군 게 뻔했다. 이미 지저분해진 셔츠 깃에 정체 모를 흔적들이 잔뜩 남아 어수선한 기척을 내고 있었다.

“제가 좀 까탈스러워서요. 맞춰 줄 사람이 없는 것 같네요.”

“원래 미인은 그런 법이지. 이렇게 날이 갈수록 예뻐지는데 말이야. 어릴 땐 풋사과 같기만 하더니…… 이제 다 익었구만. 물이 올랐어.”

신 의원과 함께 서 있던 이는 난처한 얼굴을 해 보이며 은재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술이 몇 잔 들어간 신 의원은 그런 분위기를 알아채지 못했다. 설령 알아챈다 하더라도 굴하지 않는 인물이기도 했고.

은재는 차분히 거리를 벌리며 입을 열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앞으로는 이런 말씀 사양하겠습니다.”

“어이구, 민 회장 가고 나서 발발 기어 다니더니, 이제는 좀 안정을 찾았나 보군.”

“벌써 시간이 꽤 지난 일입니다.”

“그때 민 회장 가고, 민 이사가 돌본다던 아이까지 보내 버리고 끙끙대더니. 그 꼴이 얼마나 가련하든지, 쯧쯧……. 모든 알파들이 아주 동해 가지고 큰일이었지. 무슨 일이 없던 게 신기해. 정말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신 의원이 노골적으로 페로몬을 쏟는 게 느껴졌지만, 은재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럴 때면 각인을 한 상대가 있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제 은재를 뒤흔들 수 있는 건 오로지 태영뿐이었으니까.

은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조금 더 가까워진 기름진 얼굴을 마주 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신 의원의 눈동자에 기이한 기운이 들어찼다.

“하하, 민 이사. 역시 누가 있나 보지? 사랑받는 티가 줄줄 나네. 하긴, 그 얼굴에 알파 없이 어떻게 사나.”

“주변에 듣는 귀가 많습니다.”

“이전에 만났던 이들은 모두 가정을 가진 걸로 아는데……. 의외로 정부 타입인가? 본처보다는 스릴 있는 관계를 즐기는 스타일이었어? 그게 재밌기는 하지.”

“…….”

“나도 그런 관계를 꽤 좋아하네. 민 이사가 원하는 것도 줄 수 있고. 응? 아니면 한 번 할 때마다 대가를 줄 수도 있고. 어때. 이제 당 대표까지 올라갔으니 민 이사 사업에도 더 도움이 되지 않겠나.”

점점 더 페로몬이 농후해졌다. 성적인 감각은 전혀 느끼지 못했으나 욕지기가 치밀었다. 무어라 쏴붙여 주고 싶었으나 입을 열었다가는 곤란해질 듯했다. 역겨워서 터지는 숨소리에도 저 알파는 헛소리를 할 테니까.

입맛을 쩝쩝 다신 신 의원은 거칠게 숨을 내뿜으며 다가와 보란 듯이 킁킁거렸다. 바지춤을 당장이라도 풀 것처럼 벨트를 움켜쥐며 불쾌한 숨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내 허리를 와락 움켜쥐었다.

“그래서 언제 한 번 대 주는 건가? 꽤 오래 참은 거 민 이사도 알 텐데. 안 그래?”

“의원님.”

“난 언제든 상관없네. 장소도 상관없고. 아, 혹시 여러 명이서 하는 걸 원하면 그것도 괜찮고. 또 그 재미가 있지 않나.”

신 의원은 대놓고 열 오른 숨소리를 뱉으며 슬그머니 제 하체를 붙였다. 귓가에 역겨운 숨이 와닿았다. 바르르 떠는 솜털을 적시며 점차 거리를 좁혀 기어코 은재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세우실 수는 있으십니까.”

순간, 은재는 신 의원의 손을 쳐 내며 눈가를 작게 찌푸렸다.

“이렇게 페로몬을 줄줄 흘리시는데…… 흥분을 일으키지 못하시는 걸 보니 문제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뭐?”

“제가 정말 대 드린다고 해도, 넣으실 게 없는데 어떻게 하실지 짐작이 잘 안 가네요. 전 약을 먹고 세우는 알파랑은 하지 않습니다.”

구역질을 참지 못한 은재가 모은 손을 입술 위에 대고 누르며 억지로 숨을 삼켰다. 누가 보아도 고약한 냄새 때문에 속이 뒤집힌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알파를 향한 고상한 모욕이었다.

“페로몬도…… 영 내키지 않는 종류고요.”

잠시 얼이 빠진 듯 은재를 바라보던 신 의원이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은재의 목줄기를 훑어 내렸다.

“이렇게 군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침착한 척하고 있으나 술기운에 신 의원은 평소보다 더 쉽게 이지를 잃은 상태였다. 흥분을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시간문제일 뿐이야. 언제까지 아닌 척할 수 있을 것 같나? 다들 자빠뜨릴 생각만 하는 걸 모르는 건 아닐 테고. 결국 더러운 꼴만 볼 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신 의원님보다는 나을 겁니다.”

“…….”

“줘도 안 먹는 알파보다는 다들 따먹고 싶어 하는 오메가가 더 깨끗해 보이지 않나요.”

은재는 재차 입을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침 옆에 서 있던 다른 이의 실소에, 신 의원은 끝내 분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으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거나한 술기운이 이성 따위를 날린 지 오래였다.

“……감히 천박한 태생 주제에!”

당장이라도 은재의 뺨을 후려갈길 것처럼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공중을 내리그었다.

“이사님.”

그때,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결코 이 순간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에 은재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굳어진 얼굴의 태영이 살벌한 눈으로 신 의원을 내려다보며 은재를 감쌌다. 신 의원의 어깨를 거세게 밀쳐 내고 은재를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가세요.”

“하, 이 꼴 좀 보게. 뭐, 민 이사 알파인가?”

한껏 흥분해 손을 들어 올렸던 신 의원은 태영의 등장에 쯧쯧 혀를 찼다.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태영과 은재를 묘한 시선으로 훑으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렇지. 그사이에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알 수 없는 알파를 또 쥐었구만? 그러니까 오메가 주제에 그렇게 당당하겠지. 그래도 한번 나눠 먹는 게 문제가 될 건 없지 않나.”

태영은 모멸 어린 언사에도 재킷을 벗어 은재에 어깨에 둘러주며 손을 꽉 쥐었다.

“별로 좋지 않은 냄새가 나네요. 제대로 페로몬 간수도 못하는 그런 냄새요.”

제 눈엔 은재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감싸 손을 맞잡았다.

“이 새끼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이봐, 너 내가 누군지 몰라서 이래?”

“이래서 제가 이사님 알파 하겠다고 그런 거예요. 이사님한테는 온갖 싸구려 알파까지 달라붙으려고 하니까.”

약하게 한숨을 내쉰 태영은 은재를 제 몸으로 가려 안으며 신 의원을 돌아보았다.

“기억 못 하시나 봅니다. 한 십 년 전에도 이런 수작을 부리셨던 것 같은데. 제 앞에서요.”

은재는 태영이 신 의원을 상대하고 나서지 않았으면 하는 맘에 손을 잡아당겼지만, 태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은재의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게 단단히 버티고 서서 똑바로 신 의원을 응시했다.

“덕분에 제가 알파로 무사히 발현한 것도 같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그렇지만 그 빌어먹을 버릇은 고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얼마 전에 모 연예인과 불륜 기사가 났던 게 신 의원님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 말에 신 의원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흠칫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얼마 전 터진 기사를 모를 순 없었다. 금세 내려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기사기는 하지만, 내용이 워낙 자극적이고 비윤리적이어서 몇몇에게는 강한 기억으로 남은…….

“누, 누가 그래!”

신 의원은 발끈하며 외쳤다. 태영은 여전히 무감한 얼굴로 말했다.

“관련된 비리가 있어서 검찰 조사가 들어간다는 말이 있던데……. 그때 가 보면 알 수 있겠죠.”

“…….”

“아, 연예인이 아니라 사실은 피아니스트라고 그랬나?”

“……너, 너!”

“그 내용이 가관이던데. 설마 진짜인 건 아니겠죠. 괴이한 성벽이라고 그 스캔들에서는 말하던데…….”

하지만 신 의원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감히 열성 알파인 제가 다가갈 수 없는 묵직한 페로몬이 태영의 주변에 감돌고 있었다. 대놓고 페로몬을 뿌리는 게 아니었음에도, 본능적으로 서열을 정리하는 알파들에게는 그것이 읽히곤 했다. 심지어 태영이 거론하고 있는 내용마저 상당한 위협이었다.

“어디서 새파랗게 어린놈이!”

신 의원은 마지막 남은 보루인 나이를 들먹이며 손가락질했다.

그럼에도 태영은 덤덤했다. 퍼렇게 질린 얼굴로 다가오지도 못하고 뒤로 넘어갈 것처럼 보이는 늙은 알파를 한심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할 때쯤.

“제 아이한테, 그렇게 말하시면 곤란합니다.”

은재가 태영의 앞을 막으며 말했다. 누가 봐도 태영이 은재를 보호하는 꼴이었지만, 널따란 품에 은재가 기대고 있는 모습이지만 태영을 어떻게든 제 뒤로 숨기려 했다.

“제 아이입니다.”

날카로운 페로몬을 몸 깊숙이 숨기고 있는 알파를, 어떻게든 뒤로 보내 보호하려 했다. 신 의원을 노려보며 제 가느다란 몸으로 그를 지키려 하고 있었다.

“……뭐?”

“앞으로 제 아이한테, 한 번만 더 이렇게 구시면 정말 난처해지실 겁니다.”

“…….”

“고작 당 대표 자리…… 갈아치우는 건 일도 아니니까요. 이렇게만 말씀드려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정말 그 자리가 본인 능력으로 얻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설마.”

페로몬 이상으로 신 의원이 내뿜는 페로몬을 제대로 느낄 순 없었지만, 그래도 은재의 몸은 줄곧 영향을 받고 있었다. 덤덤한 척 고개를 들고 있었지만 입술이 파리하게 질려 갔다. 그럼에도 은재는 태영의 손을 더 꽉 쥐며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며 태영을 당겨 왔다.

“가자, 태영아.”

“네. 이사님.”

태영은 은재가 이런 와중에도 절 지키려 하는 모습을 보며 붙잡은 손을 더 세게 쥐고 어깨를 끌어안았다. 은재가 천천히 몸을 바로세우는 것을 도우며 끝까지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신 의원을 노려보았다.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그들은 사람이 있는 쪽을 벗어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밖에서 불어오는 초가을 밤의 선선한 바람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페로몬 풀어 드릴까요.”

“…….”

“제 페로몬은 좀 낫잖아요. 거북한 게 사라지실 거예요.”

은재는 형질을 갖고 있는, 그것도 우성 오메가였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페로몬을 푸는 것을 낯설게 여겼다. 알파와 오메가들은 자연스럽게 제 페로몬을 흘려 상대를 유혹하곤 했는데, 오래 그런 것을 피하며 살아온 탓인지 과한 행동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태영이도 그런 걸까.

은재는 신 의원의 역겨운 페로몬이 가득 찬 와중에도 제 페로몬을 노출하지 않았던 태영을 돌아보았다.

“잠깐이면 충분히 괜찮아지실 거예요.”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이니 잠깐 느끼는 것만으로도 진정될 거라는 건 은재도 알았다. 하지만 은재는 고개를 저었다. 태영의 페로몬은 짙고 무거웠다. 뒤늦게 발현한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농밀했다. 그 페로몬을 묻히고 다닐 수 없었다.

“지금도 괜찮아.”

그리고…… 다른 이들이 아직 많은 공간인데, 태영의 페로몬을 노출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만, 둘만 있는 공간에서 느끼고 싶었다.

그냥…… 그랬다. 태영의 페로몬을 아무에게나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자신을 감싸고 있는 체온이면, 충분했다.

“돌아갈까요?”

“……조금만 있다가 들어가자.”

“안에요?”

“응. 그렇게 나왔는데 우리가 먼저 가면 이상해져. 더 당당하게 있다가 가야지.”

크게 숨을 삼킨 은재는 고민하듯 태영의 가슴께에 머리를 묻고 있다 이내 발뒤꿈치를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진하고 무거운 페로몬을 마시면 더더욱 좋겠지만…… 대신 상쾌하게 어려 있는 태영의 체향을 마셨다.

절 위해 숙여 준 그 목을 끌어안으며 숨을 골랐다.

나직이 숨을 뱉은 태영은 손을 올려 은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조심스레 위아래로 손을 움직이며 그를 더 꽉 조여 안았다.

느슨하게 서로를 느끼던 품이 점차 열망으로 채워져 빠듯해졌다.

태영은 제가 없는 동안, 제가 어린 아이였을 동안 은재가 홀로 이런 자리를 어떻게 버텨 왔는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당장 돌아가고 싶어도, 여러 수모를 당해도 꿋꿋이 버티고 후에 저택에 돌아와 쓰러졌겠지.

이를 악물고 고고한 척 버티지만 사실은 이렇게나 힘들어 보이는데.

이제야 보이는 것들에 태영은 속이 새까맣게 타는 것을 느꼈다.

더 빨리 알파가 되었으면, 그랬으면 더 나았을까. 더 일찍 한국에 돌아와야 했을까. 제가 힘을 키우는 것보다 조금 전 그런 더러운 새끼와 접촉을 어떻게든 줄였어야 하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몇 번 얼굴을 보았던 남자 하나가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바삐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 은밀한 곳을 찾고 있었는지, 두 사람이 있는 쪽까지 다가와 모습을 드러냈다.

태영은 날이 선 시선으로 고개를 저으며 은재를 다시금 당겨 안았다. 은재의 모습이 그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며 그들이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제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을 가리며 더더욱 끌어안았다.

주변에 다시 초가을 바람만이 남고도 한참 뒤에야 은재가 입을 열었다.

“근데 어떻게 알았어? 그 소문.”

“……아, 의형이 형이 왔더라고요. 의준이 큰형이요. 아까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 몰래 들었어요.”

“그렇구나.”

그 와중에도 은재는 저를 보호하려 했다. 이런 순간에 은재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가 더러운 것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해 영국에서 그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버텼는데.

“그런데도 이사님이 날 지켜 주네.”

태영은 낮은 소리를 터뜨리며 몸을 숙였다. 어느덧 은재가 태영을 안아 주는 꼴이 된 지 오래였다. 은재는 흐릿하게 웃으며 그 단단하고 듬직한 등을 도닥였다.

“평생 내가 지켜 줘야지.”

“…….”

“내 아인데.”

그 말에 태영은 속이 뭉그러지는 기분과 뜨거워지는 기분, 그리고 울 것 같은 기분을 한꺼번에 느꼈다. 왼쪽 허벅지가 은근히 당겨오는 기분과 함께 한숨이 마구 차올랐다. 몸이 뜨거우면서도 늘씬하고 작은 이 몸을 더더욱 깊게 안고 싶었다. 제대로 힘주어 안으며 부서질 것 같은 연약한 몸을 더 세게 안아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해요, 이사님.”

“…….”

“……사랑해요.”

은재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태영의 등을 조금 더 도닥이다 천천히 물러났다.

“들어가자.”

태영은 구겨진 은재의 옷을 털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가 된 것처럼 겹쳐있던 몸이 어색하게 거리를 두고 서게 되었다. 은재는 반 발자국 정도 앞서 걸으며 밝은 조명과 부드러운 음악, 사람들의 복작임이 서려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뭐 안 드세요?”

함께 안으로 들어가니 삼삼오오 모여 있던 이들의 시선이 한 번씩 이들에게 향했다. 이미 어떠한 이야기가 오갔는지 시선들을 바삐 교환하더니, 태영과 은재의 행동을 호기심을 담아 살폈다.

“배고파?”

“조금요.”

태영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작은 접시 하나를 들고 작게 잘린 케이크 몇 조각을 담았다. 다른 핑거 푸드와 음료들이 열 맞추어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것으로 만족했다.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화려한 실내의 인테리어와 장식들, 안에 설치된 분수와 이 날을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조각들을 훑었다.

“어렸을 때도 단 거 좋아했는데.”

“아닐걸요.”

“그랬어. 딸기 든 케이크 좋아했잖아.”

“……기억하세요?”

“응.”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신 의원이 반대편에서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등장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무 일도 없던 척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은재와 태영을 발견하고도 태연하게 굴었다.

“어렸을 때, 기억나?”

“…….”

“너 어렸을 때도 저 사람 만났었거든.”

은재는 태영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모습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저택으로 오기 전, 보육원에서 지내던 시절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회상하는 태영과 달리 은재는 아직도 그때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 태영은 알파로 발현하여 홀로 지내야 했던 순간도 개의치 않아 했다. 은재의 염려와 달리 상처를 받지 않았다.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알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은재의 곁에 있을 수 있어서 깊게 안도했다. 그를 더 당당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나중에는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은재는 아니었다. 다른 이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태영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했다.

아직 연약한 속내가 많기에 더더욱 그랬다. 보호자로서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모습만, 긍정적인 모습만 보여 주고 싶어 했다. 단단한 외피를 두른 모습만 내보이고 싶어 했다.

이런 모습은, 민은재가 아니라 그저 오메가로 존재하는 그 모습은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태영에게만큼은 영원한 보호자로 남고 싶었는데.

“저 아까 혁민이 봤어요.”

“혁민이? 아……. 이 검사 말하는구나. 인사했어?”

“저 보고 도망가려고 하길래 붙잡아서 인사했어요.”

“과하게 군 건 아니지?”

“저 이사님한테 혹독하게 배우면서 컸어요. 저만큼 제대로 예의 갖춘 사람 본 적 없는데.”

그들의 주변으로 때로 다른 이들이 지나가며 인사를 해 오고 말을 붙여 왔다. 은재는 그럴 때마다 자연스레 대화를 받아 주었다. 태영도 마찬가지였다. 흔들림 없이 대화를 나누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대처했다.

은재는 태영을 가르치던 때를 생각하며 느릿하게 입매를 당겼다.

“네가 어디 가서 괜한 소리 안 들었으면 해서.”

“덕분에 잘 컸잖아요. 왜 그렇게 하시는지도 다 알고요.”

“그래. 덕분에 잘 컸어.” 

“어쨌든…… 이사님도 그 모습 보셨잖아요. 제가 아무한테도 안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이요.”

“머리 위에 음료 붓던 거?”

“네. 그거요. 그걸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시는 줄 알았으면 안 했을 텐데.”

고개를 돌려 살피니 그때 태영의 곁에 있던 의준이 이제는 어엿한 알파로 자라 제 형과, 또 아버지와 함께 여기저기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멀리, 이 검사와 혁민의 모습도 보였고.

새삼스러운 시간의 흐름에 은재가 조금 더 기억을 더듬었다.

사람들이 연신 이쪽을 보며 눈빛을 주고받는 것 또한 보였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은, 저보다 훨씬 단단한 태영의 곁에 있는 이 순간에는 꼭 태영처럼 생각하게 되는 듯했다. 홀로 있었다면 아슬아슬하게 버텼을 텐데…… 지금은 굳이 정리하지 않아도 마음이 요동하지 않고 덤덤했다.

“예전에요, 회장님 돌아가시기 전에. 그때 저한테 회장님이 따로 말씀하신 게 있어요.”

태영은 아직 남은 케이크 한 조각을 슬쩍 은재의 앞에 밀었다. 딸기가 박혀 있는 케이크였다.

“기억 나. 그때 말해 달라고 했는데 끝까지 안 했잖아.”

은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태영은 포크로 케이크 귀퉁이를 잘라 은재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사님 잘 도와 달라고. 이사님 잘 지켜야 한다고 그러셨어요.”

“…….”

“이사님 두고 가려니 걱정이 되신다고요. 강한 척 굴어도 속이 많이 여리니까 제가 잘 챙겨야한다고 하셨어요.”

“…….”

“그래서 알겠다고 했어요.”

“……별 말씀을 다 하셨네.”

신 의원이 부쩍 이쪽을 의식하며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은재는 왠지 축축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부드럽게 흩어지는 단맛이 몸속 깊이 눌러앉았다.

“맛있죠?”

“……응. 그렇네.”

“케이크 자주 사 드릴게요.”

케이크를 먹고 싶은 것도 꾹 참으며 제 맘에 들기 위해 애쓰던 태영이, 어느새 훌쩍 자라 와인 잔을 챙겨 들고 있었다. 하나는 은재의 손에 넘기고 또 하나는 저의 것인 듯 들고 있다.

“저한테만 보여 주세요. 그런 모습.”

“…….”

“전 이사님 약해지는 거 좋아요. 그래야 내가 이사님 지킬 수 있으니까.”

기포가 터지는 잔 속의 수면이 흔들렸다. 두 잔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이들은 가볍게 와인을 머금고 약속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로에게서 비슷한 과일향과 풀향이 풍겼다.

때마침 유 관장이 다른 이들을 데리고 은재 쪽으로 향했다. 은재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와 신 의원의 접근을 의도치 않게 차단했다.

“반갑습니다. 민은재입니다. 이쪽은 제 아이고요.”

“민 이사 후계야.”

“한태영입니다.” 

저 멀리 신 의원이 태연한 척 다른 쪽으로 걸음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태영은 그 대화에 섞이는 척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응시했다.

* * *

“하, 자, 잠시만……. 읏.”

“오늘 잘하면, 상 준다면서요.”

“……들어가서, 집에 돌아가서. 아.”

태영은 차에 오르자마자 은재의 재킷을 벗기며 달려 들었다. 잘 고정해 넘긴 머리가 흐트러질 만큼 강한 힘으로 은재를 당겨왔다.

“태영아. 여긴 밖이잖아, 들어가서…….”

은재는 제 셔츠를 풀어헤치고 벌써 유두를 핥기 시작한 태영의 뒤통수를 끌어안으며 사그라드는 음성으로 말했다. 태영은 뜨거운 숨을 토하며 은재의 손을 제 허벅지 위에 올려 두었다. 차에 오르기 전부터 기립해 있던 것을 쥐게 하며 허리를 들썩였다.

“참기, 진짜 힘들어요.”

파티장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나와 차를 기다리는 동안, 묘한 분위기가 드리워지는 것을 은재도 모르지 않았다. 여전히 밝은 조명이 뒤에 가득히 놓여 있었고, 사람들의 희미한 소리와 은근한 열기가 근처에 있었지만 이들은 묵묵히 차를 기다렸다.

누군가의 발끝이 툭, 툭…… 바닥을 두드리는 듯했지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묘연한 긴장이 그 소리에서부터 피어나고 있었다.

은재는 태영의 재킷을 어깨에 덮은 채 담배를 물었다. 그러자 태영은 당연한 듯 고개를 기울여 불을 붙여 주었다.

꼭…… 그랬다. 그날, 정원에서 담배를 피웠던 이후로 태영은 은재의 담뱃불을 꼭 제가 붙여 주려 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얼굴을 살피며 붙여 주려 했고.

은재는 묘한 얼굴로 웃으며 담배를 피웠고, 적당히 몇 모금을 마신 후에 부러뜨려 껐다.

추적추적 희미한 비가 바닥에 하나둘 자취를 넓히고 있었다. 비가 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성큼 다가온 가을의 소낙비처럼 굵은 물방울이 하나둘 땅을 때리고 있었다.

그 위로 하얀 담배 한 개비가 희미한 연기를 뿜으며 추락했다.

태영은 역시나 은재의 입술에 닿았던 담배가 부럽다고 느끼며 차 문을 열었다. 은재가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손을 대주며 조금씩 영글어지는 비를 가려 주었다.

그리고 차에 오르자마자 은재에게 달려들었다.

투둑투둑, 비가 차창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차 안에 순식간에 열기가 가득 찼다. 은재는 태영을 끌어안은 채 크게 숨을 골랐다.

“들어가서…… 하자.”

“……후, 참을게요.”

“그래. 조금만 참아 봐. 조금만…….”

비는 어느새 곁에 자리한 새 계절이 끌고 온 것이었는지, 점점 더 강한 소리로 차를 강타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로를 꽉 끌어안기만 했다. 축축하고 습한 공기가 밖을 서서히 채우는데도 서로의 품만을 느꼈다. 버거울 정도로 무겁고 가깝게 닿은 품에, 숨마저 삼켜 가며 그것을 감당했다.

차는 소리도 없이 저택에 도착했다. 존재하지 않는 척 숨을 죽이고 있던 강 비서와 기사는 가림막 너머에서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태영은 제 재킷으로 은재를 싸맨 뒤, 차에서 튕겨 나오듯 서둘러 나섰다.

다행히 정 실장은 멀리 서 있기만 할뿐,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태영은 제 재킷을 더 꽉 쥐는 흰 손을 보며 급히 은재의 방으로 향했다.

“젖었어, 씻고…… 해.”

차에서 내려 걸은 것뿐인데 굵어진 빗줄기에 태영이 흠뻑 젖어 있었다. 은재는 흰 셔츠 사이로 드러나는 태영의 그을린 피부를 보며 말했다.

“상 주는 거죠.”

태영은 은재를 내려놓으며 방문을 잠갔다. 걸쇠가 걸리는 소리가 어쩐지 섬찟했지만, 은재는 젖어 속이 비치는 가슴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못내 기분이 좋지 않은 저를 위해 태영이 일부러 혁민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을. 그리고 민 회장의 이야기 또한.

아이의 앞에서, 제가 평생 보호해야 하는 아이의 앞에서 가라앉은 기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태영과 몸을 섞고 있지만 그래도 은재의 마음 한구석에는 번듯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그래서 가라앉은 얼굴을 보여 준 것이 마음 편치 않았는데. 오히려 그 모습에 저를 더 위해 주려는 태영의 배려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같이 씻자.”

태영은 숫제 은재의 옷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단추가 마구잡이로 튕겨 나갔고, 벗기는 것이 아니라 옷감으로 찢어지듯 던져졌다. 은재는 그런 태영의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 줄게.”

“……무슨 상이요?”

태영은 고개를 숙여 은재의 턱 아래를 물었다. 날카로운 턱선을 핥고 손으로 매만졌다.

“너무…… 거칠어. 제대로 알려 줄게. 어떻게, 하는지.”

“섹스요?”

“……응.”

부드러운 선을 지닌 은재의 목에 대고 물은 태영이 곧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알려 주세요.”

“…….”

“전 다 이사님한테 배웠어요. 식사 예절도, 파티 예절도…… 그리고 섹스하는 방법도 배우네요.”

그러곤 번쩍 은재를 안아 들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은재의 욕실에 들어서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을 틀었다.

“그거 알아요? 예전에는, 처음 저택에 왔을 때는 욕실도 이상했던 거.”

은재는 태영의 말을 못 들은 척 외면하며 그의 남은 옷을 모두 벗겨 냈다. 비에, 물에 잔뜩 젖어 잘 벗겨지지 않는 옷을 끌어 내리며 태영의 얼굴을 제 쪽으로 당겨 왔다.

“샤워 부스도 그때 처음 봤어요. 샴푸랑 샤워 젤을 구분할 새도 없었고.”

“……키도 많이 작았지.”

“그런데 이제는 이사님보다 커졌어요.”

그 말과 동시에 태영이 은재의 턱을 붙잡으며 입을 맞췄다. 은재는 물줄기가 함께 들어오는 입맞춤에 헐떡거리며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가슴을 긁었다.

“천천히, 좀 해.”

“가르쳐 준다면서요. 전 이렇게밖에 못해요.”

“……키스는 잘하잖아.”

“그것도 저 혼자 배운 건데.”

일부러 태영이 어릴 적 이야기를 하는 걸 알았다. 더 이상한 기분을 느끼라고, 작았던 그 녀석이 이렇게 자라 절 깔아뭉개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라고 이러는 걸 알았다.

그 때문인지 벌써부터 뒤가 저렸다. 제대로 애무를 받지도 않았는데 은근히 느껴지는 태영의 페로몬에, 저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그 눈빛에 배가 아려 왔다. 혹여나 저에게서 떨어질까 단단히 붙잡고 있는 팔에 자꾸만 시선이 향했다.

“그럼 그걸 누가 가르쳐 줘.”

“섹스는 가르쳐 줄 수 있고, 키스는 안 돼요?”

“…….”

“그럼 이사님은 어떻게 키스하는데요, 알려 주세요.”

태영이 제 몸을 기울여 은재를 조여 안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커다란 덩치에 감싸여 안긴 은재는 제 몸에 비벼지는 커다란 성기를 보며 약하게 한숨을 뱉었다.

“씻겨 줄게.”

어느새 은재의 것도 바짝 위로 올라붙어 있었다. 그래도 오메가치고 제법 괜찮은 크기의 성기였는데, 태영의 것과 나란히 두고 보니 왠지 볼품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색과 생김새마저 너무 달랐다.

은재는 샤워 젤을 손에 짜 태영의 팔을 쓰다듬고, 배와 가슴을 쓰다듬으며 자꾸만 저를 찌르는 그 흉기를 살폈다.

거품을 낼 수 있는 샤워 볼과 다른 도구들이 옆에 잘 정리되어 있지만, 이미 태영에게 정신이 빼앗긴 은재는 제가 무엇으로 태영의 몸을 문지르는지도 모른 채 움직였다. 태영은 제 몸을 모두 은재에게 내어 주며 길게 숨을 뱉었다.

“그거 알아요? 여기에 있는 샤워 젤은 꼭 이사님 냄새 같아요.”

“……네 거랑 달라?”

“네. 전 이거 안 써요. 매일 이걸로 샤워했으면 발정 나서 못 나가요.”

그러면서 태영은 거품에 싸인 몸을 은재에게 비볐다. 은근슬쩍 손에 거품을 묻혀 은재의 사타구니 쪽으로 넣으며 젖어 있는 입구를 문질렀다.

“젖었어요?”

“……물이야.”

“이사님 몸에서 나온 물?”

짓궂게 물은 태영은 은재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댄 채 말했다.

“저도 이사님 씻겨 드릴게요.”

태영은 한참 그렇게 은재의 비부를 매만졌다. 벌써 입을 열고 끈적한 액체를 내보내기 시작한 입구를 꼼꼼히 문지르며 성기를 쥐었다. 흰 거품 속에 갇혀 더욱 음란해진 성기를 보며 판판한 배를 문지르고, 제가 하도 씹어 대 부은 유두와 부드러운 목덜미, 쇄골로 손을 옮겼다.

“다리도 씻어야죠.”

그다음 새로 샤워 젤을 짜 은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뺨으로 은재의 성기를 누르며 허벅지와 종아리, 발가락을 간질였다. 은재는 태영의 어깨를 짚은 채 조금 더 소리를 흘렸다.

욕실이라는 공간적 특성 때문에 가늘게 흐르는 소리가 몇 번이나 메아리치며 울렸다. 공간 안에 달콤한 소리가 가득 차는 것 같았다. 태영은 제 것을 쥐고 흔들고 싶은 욕구를 있는 힘껏 참으며 은재의 허벅지에 뺨을 비볐다. 이마를 대고 문지르며 허리를 들썩였다.

“이제 키스 가르쳐 주실래요?”

은재는 거품이 묻은 손으로 태영의 양 뺨을 쥐었다. 꽤나 거칠어진 숨을 참지 않고 토해 내며 태영의 입술 위에 흘렸다.

그게 은재의 흥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같아 좋았다. 태영은 이대로 붙잡힌 채 사정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며 조금 더 허리를 들썩였다.

“착하게, 굴어야지.”

은재는 갈라진 음성으로 말하며 몸을 숙여 천천히 혀를 빼냈다. 태영의 뜨거운 입술을 한 번 핥더니 입술을 가르고 들어가 점막을 문질렀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로 핥으며 혀를 맞대고 비볐다.

태영은 당장 이 작은 혀를 쪽쪽 빨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은재의 뒤통수를 꾹 누르며, 강하게 조이며 마음껏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부드러운 은재의 움직임을 만끽하며 헐떡였다. 뜨거운 살덩이가 제 입 안을 느긋하게 문지르고 하나하나 핥는 것을 느끼며 은재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절 어떻게든 그 몸에 붙이려 했다.

조금이라도 제가 움직이려 하면 은재는 고개를 기울이며 피했다. 혀를 비비다가도 슬그머니 피해 옅은 웃음을 흘렸다. 안달이 나게 하는 그 움직임에 태영은 끓는 숨을 뱉으며 은재의 다리를 문질렀다.

희고 늘씬한 다리 위에 소름이 돋은 게 보였다. 고작 다리를 훑는 것인데도 묘한 기분이 느껴지는지 점점 더 떨림이 번지고 있었다. 태영은 그 다리를 움켜쥐고, 제 혀를 핥아 주는 혀를 느끼며 나직한 숨을 터뜨렸다.

이렇게 고개를 치켜들고 그에게 입맞춤을 받으니, 그가 주도적으로 해 주는 키스를 받고 있으니 속절없이 좋았다. 무릎을 꿇고 그에게 받는 키스가 좋아서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였다.

“벌써 쌌어?”

“……좋아서 죽을 것 같아요.”

“하아……. 거기 말고, 다른 데도 애무해.”

“어디 할까요. 가슴?”

원래 은재는 비부 이외에 다른 곳을 만져지는 걸 선호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일 중요한 건 삽입이었으니 그 부분만 공들여 애무해도 충분했다. 더 많은 부분을 다른 이들에게 노출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태영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섹스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일까.

은재는 태영이 제 품을 떠날 먼 미래를 간신히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을 안을 때도 마찬가지야. 사랑받는 느낌이 들게끔, 다른 곳도…….”

“다른 사람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럴 일은 평생 없으니까.”

태영은 낮은 음성으로 서늘하게 말하며 잠시 닫았던 물을 다시 틀었다. 거품이 묻어 있던 제 몸과 은재의 몸을 완전히 씻어 내다, 그의 다리 사이를 벌려 불쑥 입구에 손을 넣었다.

“……아!”

“이사님이 좋아하는 데만 말해 주세요.”

물과 함께 두꺼운 손가락이 내벽을 누르며 들어왔다. 앞서 치미는 고통에 은재가 발끝을 밀며 그 손을 피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말, 잘 들어서 상 주는 건데. 아, 응, 태영아…….”

“상 주는 건데 다른 사람 이야기를 왜 해요. 난 다른 사람하고 잘 일이 없는데. 응?”

“아파. 아…….”

아프다는 말에 태영은 하는 수 없이 손가락을 빼냈다.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젖은 그 손가락을 노골적인 시선으로 훑으며 이내 입 안에 집어넣었다.

“……그걸 왜.”

“동영상 보니까 이렇게들 하던데요. 젤 없을 때.”

“도대체 뭘 본 거야.”

은재는 하얘진 얼굴로 태영의 손을 잡아 뺐다. 태영은 그와 동시에 은재의 뒤통수를 끌어와 사납게 입술을 맞댔다. 콧방울과 입 안이 마치 짓뭉개지듯 거친 입맞춤이 이어졌다. 입술이 혀에 눌리고, 이에 긁혀 앓는 소리와 숨소리가 연거푸 새어 나왔다.

“……사과해 주세요, 빨리.”

“…….”

“빨리요, 저 안달 나요.”

집요하게 혀로 입술을 할짝이며 태영이 말했다. 은재는 결국 양손으로 태영을 안으며 작게 미안, 했다.

기다렸다는 듯 콧대가 아프게 짓눌리며 비벼졌다.

“저 안 변해요. 제가 다른 사람을 안 만나서, 몰라서 이사님을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정말로 이사님이 절 낳았어도…….”

더 이상은 들을 수 없어 은재가 혀를 아프게 씹었다. 그러자 태영은 조금 눈썹을 기울이며 물을 껐다. 커다란 하얀 수건을 꺼내 와 은재를 돌돌 감싸 가볍게 들어 올렸다.

머리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수건을 침대 위에 펼쳐 놓고 은재를 올렸다. 옷을 벗기는 것처럼 수건을 한 올 한 올 풀어내자, 뜨거운 물에 살짝 달아오른 흰 살결이 보였다.

“……아.”

태영은 지금 또 사정할 뻔한 것을 안간힘을 써서 참았다. 은재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또 쌌어?”

“참았어요.”

“……그렇게 싸고 할 수 있겠어?”

“네. 보여 드릴까요.”

정말 겨우 참았는지 태영의 성기 끝에는 프리컴이 묻어나고 있었다. 은재는 슬쩍 그 묵직한 성기를 손끝으로 건드리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꽤 수북한 검은 수풀 사이에 믿기지 않는 크기의 성기가 우뚝 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핏줄 선 그것은 꺼떡거리며 이미 잔뜩 음란한 액을 흘리고 있었는데…… 절로 그것을 받아 낼 뒤가 굼실거릴 정도였다.

은재는 숨을 삼키며 물었다.

“……한번 싸는 건 어때.”

“싫어요. 다음엔 이사님하고 같이 쌀 거예요.”

“원래는 내가 더 금방 가잖아.”

“오늘은 배우는 날이잖아요. 참아 볼게요.”

다시 누우세요. 태영은 은재의 어깨를 밀어 눕히며 빗장뼈에 대고 말했다.

“애무할게요. 알려 주세요, 혹시 불편하시면.”

태영은 먼저 은재의 빗장뼈에 입술을 내린 뒤 유두 쪽으로 다가왔다. 작고 색이 옅은 열매 같은 것을 손가락으로 굴리고 입 안에 넣으며 유륜 전체를 쓸었다. 종종 그가 내보이는 행위 때처럼 뺨을 가슴에 대고 비비며 손으로 배를 만지고 또 등에 손을 넣어 도드라진 날개뼈를 훑기도 했다.

굳이…… 섹스를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서툴고 급박했던 첫 섹스 이후 몇 번이나 몸을 겹친 덕에 이제 태영은 꽤나 능숙한 알파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태영은 모든 순간마다 허락을 받듯 눈을 맞춰 왔다.

은재는 그런 태영의 머리카락을 쥐며 무릎을 세웠다. 허리를 들썩이며 소리를 터뜨렸다. 혀가 젖꼭지를 짓누르고 삼켜 핥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돼요?”

“……응, 천천히…… 깨물지, 말고. 읏.”

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란 듯이 은재의 작은 유실을 씹었다. 은재는 눈가를 구기며 태영을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옅게 웃은 태영이 키스를 요구하는 듯 위로 올라와 콧대를 비볐다. 은재는 태영의 턱을 누르며 혀를 빼내 끝만 살짝살짝 부딪쳤다. 저를 쫓아 움직이는 혀를 놀리듯 간질이며 험악한 등 근육을 손끝으로 눌렀다.

은재는 그 몸에 매달려 자연스레 자세를 바꾸었다. 태영을 눕히고 제가 그 배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영은 자연스레 은재의 아래에 누워 낮은 소리를 흘렸다.

“……아, 이 자세 좋네요.” 

“…….”

“이사님 이렇게 올려다보는 것도 좋고…… 이사님 뒤에서 흐르는 거 다 느껴져요.”

고간 위에 닿은 은재의 엉덩이에 태영이 만족스레 허리를 뒤챘다. 은재는 터지려는 신음을 눌러 삼키며 태영의 가슴과 배를 크게 문질렀다.

“너 무슨 사업 하는지 못 물어봤어.”

“그냥 작은 거예요. 곧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진작부터 물어보고 싶었으나 꺼내지 못한 이야기였다. 이전, 태영이 알파로 발현하기 전 이 문제로 고민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은재는 열에 달뜬 김에 슬그머니 참았던 말을 토해 내며 몸을 숙여 태영의 쇄골을 씹었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제 아래 깔린 흉기를 비볐다.

그와 동시에 은재의 엉덩이가 커다란 손에 터질 듯 세게 쥐어졌다.

“……아, 넣고 싶어. 넣고 싶어요.”

“조금만 참아.”

“저도 만지면 안 돼요? 저도…….”

태영은 쉴 새 없이 은재의 부드러운 피부를 만지작거리면서도 성에 차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원래 태영은 제 큰 체구를 이용하여 은재를 짓누르는 것을 좋아했다. 제 밑에 깔려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도록 완벽히 누르며 제어하는 것을 즐겼다. 무게를 못 이겨 버둥거리며 헐떡거리며 붉은 혀가 잇새로 빼꼼 나오면 그것을 빨아 당기며 숨을 온통 앗아 가는 것을 선호했다.

은재의 머리카락 한 올마저 제게 속해 있기를 원했다.

“……빨게 해 주세요.”

대답을 삼킨 은재는 뒤로 손을 뻗어 태영의 고간을 만지작거리다 한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것을 쥐고, 또 음낭을 쥐어 보았다. 천천히 뒤로 물러나 태영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으며 이내는 입으로 그것을 물려 했다.

“안 돼요.”

그러자 태영이 벌떡 일어났다.

“저 진짜 못 참아요. 이사님 목 뚫려요.”

한 번도 누군가의 입에, 은재의 입에 넣어 본 적 없는 탓에 혹여나 자제를 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제가 할게요. 제가 하게 해 주세요…….”

태영의 성기는 사정을 하지 못해 더 커지는 듯했다. 은재는 애원하는 태영의 얼굴과 달리 날뛰는 성기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입을 크게 벌려 선단을 물었다.

“읏.”

태영이 작은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은재는 입 안 가득 성기를 넣은 채였다.

겨우 선단이었지만, 절반도 물지 못했지만 이미 한계까지 벌어진 입에 가득히 흉흉한 생김새의 것이 물려 있었다. 가늘고 붉은 입술 사이에 흉흉한 것이 들어찼다.

“진짜…… 이리 와요, 그럼.”

도저히 그 장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는지, 태영은 울대를 거칠게 들썩이더니 은재를 붙잡아 끌고 왔다. 비부가 보이게 몸을 돌려와 엎드리게 하곤 저도 그 사이에 입술을 박았다.

“아……!”

은재가 태영의 것을 꽉 쥔 채 소리를 터뜨렸다. 너무 놀라 씹을 뻔하기까지 했다.

뜨거운 숨과 혀가 골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뻐끔거리는 비부에 입술을 대고 콧대를 비비며 마구잡이로 뒤를 삼켰다. 손을 움켜쥐어 봐도 앓는 소리가 새어 나가려 했다.

어찌 되었든 섹스를 가르치고 있는 와중이니까…….

하지만 자꾸만 숨이 벅찼다. 도저히 입에 성기를 넣을 수가 없었다. 원래 은재는 다른 이들의 성기를 이렇게 애무하지 않았다. 몇 번 몸을 섞었던 애인들과도 상대가 간곡하게 조르거나, 히트 사이클인 경우에만 몸을 섞곤 했다.

입으로 이렇게 한 적도 거의 없었는데.

종종 이런 것을 요구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은재는 단칼에 거절했다. 제 성기를 그들에게 물리지도 않았고, 그들의 것도 물고 싶지 않았다. 역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개중 가장 크고 우람한 이 성기는…….

뒤를 파르르 떨며 몸을 둥글게 말던 은재가 높게 신음을 터뜨렸다.

“……읏!”

“그렇게 보면 더 커져요.”

태영은 슬쩍 은재를 확인하곤 도드라진 등줄기를 훑어 내렸다. 하얀 등 위로 가지런히 보이는 척추뼈를 매만지다 곧 엉덩이를 넓게 벌렸다. 입구에 손가락을 넣어 둥글게 휘저으며 뚝뚝 손을 타고 흐르는 물을 확인했다.

은재는 왠지 목이 타는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다시 버거운 선단을 물고 혀를 움직이며 갈라진 틈을 핥았다.

그러자 낮은 신음과 함께 태영이 허벅지를 들썩였다. 은재는 벌써 턱이 빠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조금 더 성기를 집어넣었다. 순간 목구멍이 조여들며 신물이 솟는 것도 같았지만 절 감싸는 페로몬을 느끼며 혀를 움직였다. 두꺼운 기둥을 휘어 감고 쓸어내리며 입 안의 점막으로 감쌌다. 혀로 성기에 새겨진 핏줄을 그리며 점점 더 깊은 곳까지 삼켰다.

“후우…….”

태영은 사정 직전인지 뜨거운 숨을 뱉으며 은재의 골반을 부술 것처럼 세게 쥐었다. 혀도 덩달아 거칠어졌다. 손가락 하나로 내벽 안을 꼼꼼하게 쑤시다 불쑥 은재를 들어 올렸다.

“……아, 태영아!”

그는 제 얼굴 바로 위에 은재를 앉혔다. 발목을 꽉 움켜쥐어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고는 더욱 본격적으로 비부를 탐했다. 배를 누르고, 또 다리를 벌리게 하며 동그란 고환과 회음부, 입을 열기 시작한 입구를 핥았다.

일부러 난잡한 소리를 내며 뒤를 쑤셨다. 한 손으로 연신 일어서려 하는 배를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제일 좋아하는 곳을 찾아 찔렀다. 더욱더 꼼질거리며 제 빈 공간을 채워 줄 커다란 성기를 기다리는 내벽 곳곳을 모두 긁어내렸다. 제 높은 콧대가 완전히 짓눌리도록 비부에 완전히 얼굴을 밀착해 새어 나오는 액체를 모두 삼키고, 내벽을 넓혔다.

“이렇게, 하지 마. 응……!”

돌연 태영의 얼굴 위에 앉게 된 은재는 어쩔 줄 모르고 다리를 덜덜 떨었다. 성기가 삽입된 것이 아닌데도 배가 눌리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성기 대신 들어와 있는 뜨거운 혀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배를 헤집는 것 같았다.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미끈한 감각에 어쩔 줄 모르고 모든 정신이 그쪽으로 쏠렸다.

제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몸이 붙잡혀 오로지 뒤로만 느껴야 했다. 숨을 가쁘게 삼키고, 일어서려 해 봐도 혀를 피할 수가 없었다. 음탕한 소리로 뒤가 적셔지며 힘이 풀리기를 반복했다. 찌릿하다 못해 다른 모든 감각이 무뎌질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사정하는 줄도 모르고 은재는 툭툭 정액을 토했다. 곧은 성기 끝에서 정액이 떨어졌다.

“태영아, 좀…… 흣.”

끝내 은재가 제 허벅지를 쥔 손을 쥐며 쓰러지자, 태영이 그 몸을 끌어안으며 몸을 일으켰다.

“왜 이렇게 떨어요.”

“……후, 너무, 너무…….”

“너무 좋았어요?”

은재가 몸을 돌리지도 못하고 안겨만 있자, 태영이 이번에도 손수 몸을 돌려 주었다. 은재는 그 손길에도 흡, 숨을 삼키며 절 녹여버릴 것 같은 눈빛의 태영을 응시했다.

“……응.”

이윽고 눈을 맞추며 말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뻗어져 나와 반질반질하게 젖은 코와 뺨을 닦아 주었다.

“안 가르쳐도 잘하잖아…….”

“여태까지 이사님이 다 가르쳐 주셨어요. 지금만 제가 응용한 거고요.”

태영은 절절 끓는 목소리로 말하며 은재를 다시 눕혔다. 이제 정말 터질 것 같은 제 것을 위아래로 문지르며 그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충분히 안 풀렸죠.”

“…….”

“이사님은 너무 좁아서…….”

뚝. 좁은 구멍에서 물이 떨어졌다. 은재는 제 엉덩이 사이로 느껴지는 아찔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풀게요.”

정작 태영의 것은 별로 애무해 주지 못했는데. 은재는 크게 숨을 삼키며 다리를 벌렸다. 나른한 시선을 깜박이며 제 풀죽은 성기를 쥐고 두어 번 흔들다, 곧 젖은 안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

울대가 도드라진 흰 목이 길게 늘어지며 긴 속눈썹이 떨렸다.

“직접…… 풀게요?”

“보여 줄게……. 이건 이제, 잘하지만…….”

은재는 하얀 베갯잇에 머리를 비비며 더 깊은 안쪽까지 손을 넣었다. 조금 전까지 훨씬 더 큰 태영의 손가락을 한참 받아서 그런지, 은재의 손가락은 곧잘 들어갔다.

올 듯 말 듯 오지 않는 감질나는 느낌에 은재는 손가락 하나를 더 넣었다. 좁고 뜨거운 안을 꾹꾹 눌러가며 태영을 응시했다. 다리도 조금 더 벌어졌다.

태영은 그 아래와 열이 오르는 은재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곤 다급히 몸을 숙여 은재의 눈가 끝에 있는 점을 핥다, 곧 아래 꽂혀 있는 손가락의 뿌리와 손바닥을 핥았다. 곧이어 들어갈 다른 손가락을 미리 적셔 주었다.

희미하게 드러나는 선홍색 속살을 보며…….

“으응…….”

벌써부터 허리가 휘었다. 뜨거운 숨이 닿자 작은 입구가 오그라들었다가 벌어지고, 또 오그라들었다가 벌어졌다. 태영은 은근슬쩍 그 주변을 만지고 혀로 핥으며 제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었다.

“……읏.”

약간 고통이 서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영은 꽤 깊은 곳까지 들어온 은재의 손가락을 겹쳐 잡으며 그가 제일 좋아하는 곳을 꾸욱 눌렀다.

“아……!”

곧장 은재가 반응을 해 왔다. 태영은 다치지 않도록 어깨를 누르며 손가락을 빼냈다. 워낙 새침을 떠는 내벽이니 조금 더 풀어야 하지만…….

“넣을게요. 더 이상 참으면 터질 것 같아서요.”

“……윽!”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영이 제 것을 처박았다. 은재는 손가락이 나가기가 무섭게 치고 들어오는 육중한 막대기에 숨을 삼켰다.

언제나 진입하는 순간은 버거웠다. 몸이 반으로 갈라져도 이것보다는 덜 아플 것 같았다. 몸 안을 질펀하게 때리는 통증에 시야가 사라지는 적 또한 부지기수였다.

“태영아…….”

태영은 조여 대는 내벽에 귀두만 겨우 걸친 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은재는 버거운 기분을 삼키며 태영에게 손짓했다.

급히 태영이 이마를 맞대며 은재의 숨을 마셨다. 느리게 성기를 넣으며 은재의 입술을 핥았다. 성기를 받아들이려 호흡하는 그 입술을 핥으며 천천히 안으로 진입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쾅! 올려붙이고 싶었다. 처음 이 몸을 열었을 때처럼, 그 뒤로 섹스를 했을 때처럼 들끓는 이 욕구와 애정을 쏟아붓고 싶었지만 참았다.

우아한 사람. 처음 본 순간부터 모든 정신을 빼앗겼던 사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언제나 그립고 닿아 보고 싶었던 사람. 그 사람에게 저를 받아들일 시간을 주며 이를 악물고 인내했다. 태영의 잘생긴 이마에 핏줄이 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나, 들어왔어?”

“많이요.”

절반이 남아 있었지만 태영은 거짓을 말했다. 땀이 배어나는 관자놀이에 입술을 대며 툭툭 가볍게 허리를 쳐올렸다. 은재는 파르르 떨면서도 태영의 머리카락을 넘기고 뒷덜미를 붙잡았다. 높고 또렷한 콧대와 눈썹을 만지며 소리를 뱉었다.

“……아, 너무, 깊다…….”

눈을 맞추며 하는 말에 태영은 이제 제 이성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래도 은재의 말마따나 좁은 배 속 끝까지 들어간 게 느껴졌다. 이 뒤로는 진입할 수 없었다. 아마도 은재의 발정기 때, 제대로 된 히트 사이클 때 열리는 장기인 듯했다.

태영은 그 좁은 끝을 툭툭 치며 움직였다. 쾌감에 잠겨 가는 은재의 눈을 내려다보고 속눈썹을 핥으며 바라보았다. 제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어여쁜 모습을 살피며 이를 갈았다.

조금씩 추삽질에 속도가 붙었다. 은재는 살짝 눈을 내려감으며 절 뒤흔드는 그 감각을 만끽했다. 제 박자가 따라 흔들리는 다갈색 머리칼과 젖은 눈꼬리, 그리고 눈물점. 때마다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

태영은 점점 더 힘을 실어 조이는 내벽을 때렸다. 팍, 예고도 없이 터져 나간 제 페로몬에 은재가 빠르게 녹아 허우적거리는 것을 붙잡으며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려 했다.

“너, 무. 깊어. 읏.”

은재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이불보를 쥐었다. 뒤로 도망치려다 붙잡혀 확 끌려 내려와 더욱 거센 힘으로 꿰뚫렸다.

“……아!”

태영은 은재의 페로몬이 점차 제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이 꽃향기로 가득했다. 성기에도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더 커질 수 없는 것인데도 꼭 부푸는 것 같았다.

“그만, 아. 태영아.”

너무 깊게 들어와 때리는 성기에 은재가 불편함과 낯선 쾌감을 호소하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태영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허리에 근육이 더 바짝 일어설 정도로 힘을 실어 쿵, 쿵, 쿵―! 쳐올리고 있었다.

“안 참아져요, 진짜…… 참고, 싶은데.”

은재는 태영의 팔을 붙잡은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미 태영이 뒤를 핥아 댈 때부터 가시지 않는 떨림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사정감이 치솟았다.

“……으읏!”

그때 묘한 거북함과 동시에 성기가 더 깊은 안쪽을 불쑥 밀고 들어왔다. 은재도, 태영도 둘 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은재의 젖은 눈이 크게 떠졌다.

열려서는 안 되는 장기가 열리고 있었다.

하지만 태영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흥분으로 인해 열린 것인지, 안쪽의 깊은 기관을 밀고 들어가 있는 힘껏 내벽을 때렸다. 마구 떨리며 조여 대는 곳을 누르며, 경련하는 곳을 때리며 처음으로 성기를 끝까지 집어넣었다.

“아, 태영아. 빼, 너무, 아파……!”

생전 여기까지 성기를 받아 본 적 없는 은재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배를 감싸며 몸을 말았다. 살갗에 소름이 돋고 쾌감이 아프도록 일었다. 공포와 함께 쾌감이 밀어닥쳤다.

태영은 그런 은재를 일으켜 조여 안으며 성기를 쳐올렸다. 뒤엉키는 페로몬을 크게 삼키며 살갗이 터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칠게 쳐 댔다. 절 밀어내려는 손을 구속하며 페로몬을 더욱 노골적으로 풀었다. 제 위에 앉힌 자세로 성기가 더 깊게 진입할 수 있도록 허리를 들어 올렸다.

페로몬에 완전히 취한 은재의 몸은 더욱 노글노글 풀어져 흔들렸지만, 눈에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태영은 그 눈가에 입술을 붙이며 연거푸 허리를 쳐올렸다. 살갗이 맞닿다 못해 터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칠고 깊게 허리 짓을 했다. 액체가 튀어 나가며 소리가 더욱 포악해졌다.

퍽! 기어코 발갛게 살이 물들고, 안 그래도 큰 성기의 끝이 부풀기 시작했다.

노팅이었다.

“안 돼. 아흐윽……!”

내벽의 입구를 꽉 막으며 부푸는 감각에 은재가 고통에 젖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어떻게든 그것을 빼 보려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극받은 내벽은 성감을 일으키기만 했다. 고통과 성감이 번갈아 밀려오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태영은 은재를 아프도록 조여 안으며 닿는 대로 입술을 내렸다. 제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는 성기를 툭툭 쳐올리며 은재의 바르작거림을 짓눌렀다.

“……아파.”

“죄송해요.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어서…… 후.”

태영은 눈꼬리에 고인 눈물을 핥으며 움직임을 멈췄다. 정말 아픈지 덜덜 떠는 몸을 쓸어내리며 통증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격해진 숨소리가 살짝 안정을 찾자, 태영이 은재의 성기를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거의 무의식의 세계까지 밀려났던 은재는 태영이 제 성기를 쥐자마자 새된 신음을 터뜨렸다. 다리로 태영을 조였다가 밀어내기를 반복하며 마치 발정기가 온 것처럼 앓았다. 페로몬 때문에 더욱 흐느적거리며 제대로 자세를 갖추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조금만 버텨 봐요……. 응? 조금만.”

태영은 은재를 꽉 끌어안으며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괴로운 쪽은 태영도 비슷했다. 원래도 조여 대는 내벽인데, 그 안까지 들어가 노팅이 이어지자 태영에게도 고통이 따랐다. 뜨겁게 조여진 내벽이 깊숙하게 달라붙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당기고 있었다.

그래도 은재의 몸 안에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음성이 갈라지고 더 낮은 소리가 새어 나올 만큼, 목에서 자꾸 끓는 숨이 터질 만큼 너무나 좋았다. 온몸의 피가 날뛰는 게 느껴졌다. 원래도 은재의 곁에 있을 때면 과하게 박동하는 심장이 파르르 떨며 페로몬을 사방으로 뿜어내는 것 같았다.

“숨 쉬고……. 괜찮아, 괜찮아요.”

은재는 노골적으로 터지는 태영의 페로몬에 숨을 마음껏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며 떨었다. 노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데도 도저히 그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더 깊게 태영이 들어오고, 페로몬이 새겨지는 것 같았다. 아예 몸속에 그렇게 각인이 된 게 분명했다.

펄떡펄떡, 무슨 장기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몸 안에서 뛰는 게 느껴졌다. 페로몬 샘일까. 은재는 잡으면 잡힐 것처럼 선명히 느껴지는 태영의 페로몬에 흐느적거리며 손을 뻗었다. 태영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고 몽롱한 시선으로 크게 숨을 받아 삼켰다. 그 목에 매달려 흔들리며 입을 벌렸다.

“숨 좀, 쉬어 봐.”

갈라진 음성으로 은재가 말했다. 태영은 끓는 숨을 여러 번 삼키며 혀를 빨아 주었다. 그러자 제 숨을, 제 타액을 받아먹는 듯 은재가 꼴깍꼴깍 숨을 삼켰다. 양손으로 태영의 턱선과 울대,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며 신음 같은 말을 토했다.

“여기를…… 좋아하는구나.”

“…….”

“귀가, 예민해.”

귀를 만지자 꼭 성기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는 듯 은재가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다시 귀와 뒤통수를 만지며 타액을 받아 삼켰다.

“……태영아.”

“…….”

“태영아, 태영아…….”

서서히 노팅을 한 것이 풀릴 무렵, 은재가 태영의 이름을 두서없이 불렀다. 태영은 기어코 이성의 끈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턱을 단단히 씹었다.

턱이 눈에 띄게 불거지고 그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이사님. 이제 입 벌리지 마세요. 응? 혀 씹으면 안 되니까.”

“…….”

“이사님 다치면…… 전 죽고 싶단 말이에요. 알겠죠?”

눈썹에 날이 선 태영이 짧게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윽고 쾅……! 전에 없던 힘으로 내벽을 때렸다. 오늘 하루, 태영이 은재에게 맞춰 주기 위해 부단히 참고 있었다는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힘을 다해 내벽을 때리자 정말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한 번의 충격이 여운을 남기며 몇 번에 걸쳐 장기를 울렸다. 그런 충격이 점차 빠르게 몸을 강타했다.

은재는 흐윽, 숨을 삼켰다. 이미 제 안에 사정을 했으면서도 쉬지 않고 내벽을 때리고, 약한 부분을 찔러 와 온몸이 질척거렸다. 비릿하고도 상쾌한 냄새가 떠돌며 배 안을 채웠다.

꼭 태영의 정액이 고인 것 같은데……. 은재는 차마 배를 움켜쥐지도 못하고 엄청난 속도로 흔들렸다. 무작정 힘주어 쳐 대기만 했는데, 그사이 약간의 요령이 생겨 더더욱 피하기가 어려웠다. 은재가 좋아하는 쪽을 긁으며 빠져나갔고, 다시 아프도록 밀며 들어왔다. 아직도 완전히 닫히지 않은 그 기관의 입구를 밀고 들어가기까지 했다.

은재는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사나운 속도를 따라 흔들렸다. 실금 같은 것이 주르륵, 은재의 성기 끝에서 흘러내렸다. 아직도 이 가르침이 끝나려면 멀었다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로망스(Romanc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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