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흐린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익숙한 것들이었다. 익숙한 냄새, 익숙한 구조…….
은재 자신의 방이었다. 아직도 열에 들떠 숨을 밭게 내쉬던 은재는 이불 위에서 바르작대며 늘어져 있는 제 다리를 챙기려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아주 잠시 정신이 들었을 뿐, 여전히 몸은 열에 휩싸여 있었다. 해소되지 않은 열이 배 안에 고였다가 무섭게 터져 나왔다. 이불에 쓸리는 작은 동작 하나에도 소름 끼치는 성감이 일었다.
“괜찮아요. 제가 할 테니까, 누우세요.”
“아…….”
“저 여기 있어요. 다 괜찮아요…….”
은재는 제 위를 타고 오른 남자의 어깨를 움켜쥐고 놓지 못했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도 않아 자꾸만 늘어지는데도 왜인지 모를 간절함과 불안함에 몸을 떨었다. 크게 숨을 삼키며 몸을 움츠리며 눈을 깜박였다.
“옷 벗길게요.”
“……하, 으.”
옷감이 스치는 감각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은재는 신음을 터뜨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눈을 뜨고 있으나 벗고 있으나 잘 보이지 않는 건 비슷했다. 오히려 눈을 감고 있어야 남자의 단단한 몸과 낮은 음성이 더 잘 느껴졌다. 절 짓누르며 성급하게 움직이는 그 손길이 더 가깝게 와닿았다.
그럼에도 숨을 삼키고,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낮은 음성이 이미 온몸을 휘감고 절 핥는 것만 같았다.
“밑에가 많이 젖었어요.”
“아, 으…… 보지, 마.”
“보고 싶어요. 조금만…… 조금만 볼게요.”
남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은재의 바지와 속옷을 벗기더니 아예 다리를 붙잡고 위로 들어 올려 젖은 비부를 뚫어져라 보았다.
경탄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아찔한 감탄이었다. 선홍색 구멍이 뻐끔거리며 액체를 밀어내는 광경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러곤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그 젖은 곳을 문질렀다.
“아흑!”
은재가 자지러지며 몸을 떨었다.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손길이었다. 누군가와 이런 접촉을 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페로몬이 망가진 이후로는 애인을 사귈 수도 없었다. 다른 알파가 본격적으로 페로몬을 풀면 속에서부터 거부 반응이 일었다. 제대로 그 페로몬을 느끼지 못해도 구역질이 솟고 식은땀이 나 공포마저 느껴졌다.
그런데…….
“괜찮아, 괜찮아요. 아프게 안 할게요.”
지금 이 남자는 달랐다.
“믿기지가 않아서…… 이사님이 내 앞에서 이렇게 옷을 벗고 날 원하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서…….”
남자는 낮은 숨을 터뜨리며 당연한 듯 그 비부에 입술을 묻었다. 질척한 혀와 뜨거운 입술이 흡착하듯 비부에 달라붙었다.
“아흐! 아, 안 돼. 싫어, 싫! 응……!”
남자의 혀는 어설펐다. 분명 이런 접촉이 처음인 게 확실했다. 그럼에도 은재는 이불을 쥐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뒤가 핥아지는 건 은재에게도 낯설었다. 애인을 만난 것도 아주 오래전 일이었고, 그때도 이렇게 뒤를 내어 준 적은 없었다. 강제로 다리가 붙잡혀 올라가 몸이 접힌 채 아래를 빨릴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렇게…… 난잡한 정사는 가져 본 적 없었다. 남자는 뺨을 밀부에 대고 비비며 그 액체로 뺨을 적시고 탄성을 뱉었다. 코에 액체를 묻히고 흡입하듯 숨을 마시며 엉덩이와 허벅지에 제 손자국을 남겼다.
“아, 이사님 페로몬……. 너무 좋네요. 하아…….”
남자는 아예 은재의 허벅지에 입술을 묻은 채 말했다. 한참 혀로 문지르고 핥아도 계속해서 새어 나오는 액체를 삼키다, 이제는 이를 세워 회음부와 허벅지를 씹어 대기 시작했다.
“흐읏! 으, 아, 아파. 아파…….”
“아파요?”
“응, 싫어…….”
“안 아프게 했는데……. 그럼 다시 핥을까요?”
은재는 다리를 덜덜 떨며 남자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남자는 그 손에 쪽쪽 입을 맞추더니 완전히 발기한 은재의 것을 손에 쥐고 조심스레 흔들기 시작했다.
“……으읏!”
동시에 뾰족해진 혀가 회음부를 훑으며 불쑥 입구 안으로 들어왔다. 은재는 그 침입에 다리를 모으며 고개를 젖혔다.
미칠 것 같은 쾌감과 함께 표현할 수 없는 거부감이 울컥 솟았다. 정말 발정하는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은재는 제가 어떻게 누워, 어떻게 우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여전히 앞이 가물가물했고, 몸도 말을 듣지 않았다. 모든 곳이 남자의 입 안에 담겨 핥아지는 것만 같았다.
“힘 좀, 풀어 봐요. 응? 이사님.”
남자는 숨결마저 뜨거웠다.
“어떻게 여기마저 이렇게 생겼지…….”
그 숨결로 은재의 회음부를 적시고, 입구를 적시며 허벅지를 연거푸 핥았다. 힘없이 벌어지는 허벅지를 강하게 움켜쥔 다음 재차 입구에 코를 묻고, 입술을 묻으며 뚝뚝 떨어지는 액체를 모조리 삼켰다. 이렇게 발정이 나도 예쁘기만 한 성기를 바라보며 기둥을 따라 핥았다. 계속해서 감탄을 뱉고 뺨과 입술을 비볐다.
핥아도 핥아도 모자랐다. 혀에 닿고, 코에 닿아도 더 삼키고 싶었다. 이 페로몬을, 이 간지러운 액체를 모두 먹어 버리고 싶었다. 이 꽃향이 묻어나는 밀액을 온몸에 묻히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두 손으로 뚝뚝 떨어지는 액체를 받아 마시고, 온몸을 적시고 싶었다.
“……응!”
참다못한 남자가 울긋불긋 흔적이 남은 흰 허벅지를 세게 베어 물자, 은재가 고개를 젖히며 이불을 더 세게 쥐었다.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에 이렇게 선명하게 잇자국을 새기고선 차오르는 성감에 그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남자는 은재의 성기를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은재는 금세 정액을 토해 냈다. 그러나 열기는 가시지 않은 눈치였다. 더더욱 몸의 빈 곳이 체감되는 듯했다. 몸을 바르작거리며 몇 번이나 가쁘게 숨을 마셨다.
은재가 눈물 젖은 눈을 들어 깜박깜박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더니 제 위를 점령하고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눈동자가 흔들리며 남자에게 향했다.
“너…… 누구야.”
남자는 옅게 웃으며 은재의 뺨에 입술을 묻었다. 그 접촉에도 앓는 소리를 내는 입술을 핥고 귓불을 핥으며 은재를 완전히 나신으로 만들었다.
“누구야……. 응?”
“왜 울어요.”
“…….”
“너무 좋아서?”
은재는 그 손길에 이끌려 옷을 벗으면서도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만져 보려 했다.
남자는 순순히 그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제 턱과 뺨, 입술과 콧대를 만지게 하며 그 손에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그러자 은재가 흐윽…… 하며 숨을 터뜨렸다. 서러운 숨과 함께 더욱더 눈꼬리가 젖어들었다. 눈물점이 찍힌 야한 눈꼬리가 붉어지며 눈물을 매달았다.
안 돼……. 미약한 소리가 입안에 고였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왜 자꾸 울어요. 마음 아프게.”
남자는 아직도 어설픈 그 혀로 눈꼬리를 훑었다. 그 눈물을 모조리 제가 가져가며 은재의 늘씬한 목줄기를 따라 가슴으로 내려왔다.
깜빡깜빡, 눈물을 흘려보내려 눈을 깜박인 은재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옷을 벗겼다. 열기가 느껴지는 손으로 남자의 등을 긁어 가며 옷을 벗겼다.
나직이 웃은 남자는 기꺼이 옷을 벗었다. 나신이 된 은재를 따라 저도 나신이 되어 조금 더 편하게 은재의 곳곳을 만지고 핥았다.
“이사님 몸…… 너무 예뻐요.”
“…….”
“꿈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예뻐요. 도대체 이 몸을 몇 명이나 봤을까…….”
……아! 그래도 정액을 토했다고 살짝 안정을 찾았던 은재는 다시 치솟는 열에 급하게 남자의 어깨를 쥐었다. 허리를 들썩이며 꼿꼿이 발기한 제 성기를 쥐려했다.
“제가 할게요.”
남자는 그 손을 치워 내며 손으로 은재의 성기를 쥐었다.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아프게 성기를 쥐고 흔들며 연거푸 흐르는 눈물을 핥았다.
“안 되겠다.”
자꾸만 젖는 어여쁜 얼굴이 신경이 쓰였지만 지금은 열을 가라앉히는 게 우선이었다. 결국 남자는 은재의 다리 사이로 내려가 성기를 물었다.
“흐윽!”
은재가 본능적으로 허리를 튕기며 남자의 머리칼을 쥐었다. 그 뜨겁고 좁은 입 안에, 어설프게 성기를 문 입에 허리 짓을 하고 싶었다. 주로 뒤로 쾌감을 얻는 은재였지만 성기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찌릿찌릿 살갗이 울렸다.
“처음이라서…… 좀 못해도 참아 보세요.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후, 남자는 땀을 뚝뚝 흘려가며 은재의 입구를 간질였다. 빼꼼 열리며 물을 울컥 흘리는 그 안에 쑥 손을 넣어 길을 열며 혀로 성기를 휘어 감았다. 앞뒤로 고개를 움직여 기둥을 핥고 선단을 핥으며 그 여파로 경련하는 내벽을 꾹꾹 눌렀다.
“으응! 아!”
“여기가, 좋아요?”
“물고, 말하지…… 아, 아…….”
뒤는 물을 그렇게 흘려 대는 것과 달리 너무나 좁았다. 겨우 손가락 하나를 넣는 게 전부였다. 이보다 더 큰 것은 무리라는 듯 달라붙어 조여 왔다.
하지만 남자는 끈질기게 안을 탐구하듯 살폈다. 손가락을 흡착하는 듯한 뜨거운 점막을 문지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안이 이런 감각인 줄 몰랐네…….”
“으, 아…….”
“너무 좁고 뜨거워요. 이사님도 제 입에 박았을 때 그러셨어요?”
꽤나 노골적인 말에 은재의 눈가에 다시 열이 올랐다. 남자는 옅게 웃으며 몸을 일으켜 그 눈꼬리 끝에 다시 입 맞춘 뒤 밑으로 내려갔다.
“이 안에 몇 명이나 넣었을까.”
“……아, 아파. 아파…….”
“안 아프게 해 줄게요. 다리 안고 있어요.”
“안, 안 할래. 이제, 그만…….”
은재는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숨을 마시고 있었다. 배에는 어느새 또 토해 낸 정액을 묻힌 채 잔뜩 흐트러져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왜요. 제가 너무 못해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
“이사님 생각하느라 다른 사람하고 자지도 못했어요. 매번 혼자 싸기만 했는데…… 좀 참아 주세요.”
“…….”
“오늘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이렇게 됐을 거예요. 그러려고 돌아온 거니까.”
남자는 제가 은재의 가슴을 핥아보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스레 떠올리며 몸을 숙였다. 아직까지 은재의 뒤에 꽂아 넣고 있던 손가락을 예고 없이 쑥 뽑아내며 그를 일으켜 안았다.
“흑!”
급작스럽게 빠져나가는 손가락에 은재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남자는 잔뜩 발기한 것을 은재의 고간, 회음부에 대고 비비며 옅은 색의 유두를 물었다.
작고 붉은 열매 같은 그것을 물자 은재가 몸을 위아래로 급히 뒤척였다. 뜨거운 입 안에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더 집요하게 유두를 씹고 물었다. 유륜까지 핥고 유두 끝을 긁으며 감각의 중심에 은재를 떠밀었다.
동시에 비벼지는 아래에 남자도 낮은 신음을 터뜨렸다. 마구 터지는 은재의 페로몬에 제 페로몬 또한 끌려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원래 늘 상상하며 그려 왔던 몸인데, 그토록 꿈꿔 왔던 순간인데 생각보다 더한 쾌감이 머릿속을 강타하며 진탕으로 만들어 놓았다. 더 엉망으로 굴고 싶었다. 은재가 엉엉 울면서 저에게 매달리도록 더 끔찍하게 굴고 싶었다. 처음 들어 보는 은재의 신음과 울음에 더더욱 달려들고 싶었다.
“……하, 으. 윽!”
은재의 페로몬이 아찔할 정도로 연거푸 쏟아졌다. 두 개의 성기가 비벼지고, 또 가슴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계속 침대 시트가 젖었다. 방 안이 두 사람의 페로몬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세헌아, 빨리…….”
은재의 뒤에서 새어 나온 액체가 남자의 허벅지와 음모를 적시고, 이불을 적셨다. 끈적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이 남자의 고간으로도 고였다.
“뭐라고요?”
“흐윽!”
하지만 그 달콤한 행위와 달리 은재의 입에서 새어 나온 이름에 남자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은재를 눕히고 다리를 벌리며 사나운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 누구 이름 부른 거예요.”
“……아, 살살. 흐!”
“누구 이름 불렀어요. 다시 말해봐. 내가 누구로 보여요?”
닿아 있는 남자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한 번도 누군가를 안아 본 적 없는 그 서툰 손길에 분노와 당황이 스며들어 힘 조절이 되지 않았다. 은재는 본능적으로 절 짓누르며 터지는 알파 페로몬에 남자의 어깨를 쥐어짰다. 손톱으로 어깨를 긁으며 어떻게든 밀어내 보려 했다.
남자는 그럴수록 더 낮은 숨을 터뜨리며 강제로 은재의 다리를 열었다. 은재가 거부하며 뒤로 몸을 물리려고 해도 봐주지 않고 외려 더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누구예요? 응, 나 봐 봐.”
남자는 은재의 뺨을 쥐며 절 올려다보게 했다. 은재가 감았던 눈을 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뚝 뺨으로 낙하했다.
“이사님. 저 보여요?”
“…….”
“제 얼굴 안 보여요?”
은재는 대답을 거부하며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허락하지 않았다. 조금 구겨진 얼굴로 은재를 내려다보며 다른 손으로 늘어진 다리를 더 넓게 벌렸다.
“제 이름 불러 주세요. 내 이름.”
“아, 으! 아파, 아……!”
무슨 고집인지, 은재는 끝까지 태영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아직도 시야가 돌아오지 않은 걸까. 흐릿해서 보이지 않는 걸까. 너무 울어서 그런 걸까.
그런데 왜…… 세헌의 이름을 부르는 거지.
“힘 빼세요, 이사님. 힘 좀. 아.”
태영은 이를 악물고 강제로 은재의 안에 진입했다. 깊은 안까지 젖어 있던 것 같은데도, 진입이 쉽지 않았다. 7년 동안 알파를 받아들이지 않은 몸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임세헌은, 이 정도도 안 됐어요?”
“아……! 아프, 으응!”
그 사실을 태영이 알 순 없었다. 오히려 태영은 은재가 부른 세헌의 이름에 단단히 오해를 했다.
“왜 그렇게, 이전부터 거슬리나 했더니……. 이사님, 힘 좀. 빼요. 응?”
은재는 숫제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볼 수도 없었고, 숨 쉴 때마다 밀려오는 성기가 그야말로 몸을 반으로 가르는 것 같았다. 몸 깊은 곳까지 젖었는데도 고통이 심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아래가 찢어질 것 같아 공포가 치밀었다.
오랜만의 섹스라 그런 게 아니었다. 이건, 너무나 큰 크기였다. 이제 고작 귀두만 박혔을 뿐인데도 그 부피가 과했다.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무작정 쑤시고 들어오기만 하는 것에 턱턱 숨이 막혔다. 커다란 막대기로 뒤를 헤집는 것 같았다. 땀에 젖은 커다란 육신이 심지어 무게를 실어 절 짓누르고 있었다.
“나 누구예요. 이름 부르면, 천천히 할게요.”
“……아파, 흐윽…….”
“울지 마세요. 이사님 더 울면, 저 못 참을 것 같아요.”
은재는 가쁘게 숨을 쉬며 태영을 올려다보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이렇게 페로몬을 쏟아부어도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건 태영뿐이었다. 제가, 각인해 버린 알파.
알고 있었음에도 충격이 재차 머리를 강타했다. 쾌감과 거부감이 뒤엉켜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아파, 태영아……. 아파…….”
“…….”
“살살해. 응?”
서러운 소리를 내며 은재가 꺼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와 동시에 태영이 크게 숨을 삼켰다. 원래도 탄탄한 가슴과 어깨에 더더욱 힘이 들어가더니 연결되어 있는 아래에도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비좁은 입구를 찢을 듯 커지는 게 느껴졌다.
“으흑!”
“하…… 이사님, 때문이에요.”
“아아…….”
“울지 마세요. 살살, 할 테니까.”
태영은 애써 호흡을 고르며 은재의 다리를 더 벌려 맞물린 비부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 아래는 더더욱 녹진하게 젖기 시작했다. 제가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을 알아채고 꾸물거리며 내벽을 풀어내고 있었다.
“……아, 녹는 것 같아.”
겨우 물고 있는 선단을 더더욱 꽉 조이며 입구가 꿈틀거렸다. 태영은 그 틈을 타 허벅지와 회음부를 쓸어 올리며 퍽! 허리를 쳐올렸다.
거센 충격이 내벽을 강타했다.
“아!”
“조금 더 풀린 것 같아요. 아직도, 아프세요?”
태영의 낮은 음성에는 진한 열기가 묻어 있었다. 이전보다 더 노골적으로 가라앉은 음성이 끓어오르며 짧은 숨을 반복해서 토해 냈다.
“숙일게요.”
흐읏……. 태영은 천천히 은재의 다리를 제 허리에 감게 하며 몸을 숙였다. 자연스레 깊어지는 삽입에 은재가 경련하듯 떨자, 태영은 낮은 숨을 삼키며 젖은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어디까지, 들어갔어요?”
“후으, 아…….”
“배꼽 아래까지? 넘어서까지?”
태영은 처음 겪어 보는 오메가의 뜨겁고 젖은 안에서 느릿하게 허리를 빼내고 더 깊게, 더 깊게 제 것을 욱여넣었다.
안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좁고 뜨거웠다. 물기 어린 내벽에서는 질척한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그 내벽이 제 것을 조여 무는 것 같은데 그 감각이 너무나 황홀해 영영 이대로만 있고 싶었다. 따뜻한 내벽이 젖어 성기를 오물거리며 삼키는 감각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빽빽한 내벽에 파묻혀 잘 빠지지도 않는 성기를 억지로 빼내면 딸려 나오는 살점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사님, 저 태영이에요.”
“…….”
“저 한태영이라고요.”
은재가 젖은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무겁게 태영을 응시했다. 그러곤 가늘게 숨을 삼키며 태영의 목을 끌어당겨 안았다.
“……움직여.”
그 말과 동시에 오메가의 진한 페로몬이 태영을 감쌌다. 은재의 페로몬. 그렇게나 그리웠던 은재의 페로몬. 태영은 그 페로몬이 제 뇌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씹었다.
퍼억! 더욱 조여드는 내벽의 감각을 만끽하며 허리를 쳐올렸다.
억눌린 신음이 은재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은재는 태영을 끌어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고작 허리 짓 한 번에 침대 헤드까지 밀려 올라가면서도, 몸이 절반으로 접히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태영의 목에 매달려 있으려 했다.
“너무, 좋아. 후.”
태영은 잇새에서 터지는 욕설을 집어 삼키며 더욱 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건지, 아픈 건 아닌지, 왜 자꾸 은재는 더 우는 것 같은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제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은재의 얼굴이 상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여뻤다. 젖은 눈꼬리를 스치며 흘러내리는 눈물도, 상기된 뺨도, 흰 피부에 얼룩덜룩하게 남은 제 흔적도 모두 믿기지 않았다. 다리로, 손으로 절 끌어안고, 음란한 흔적을 묻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머리를 태우는 것처럼 좋았다.
“으, 윽. 아…….”
하지만 저와 달리 은재의 얼굴엔 아직도 고통이 어린 것만 같았다. 어디를, 어떻게 해 줘야 좋아하는 걸까. 저는 지금도 미칠 것 같은데. 온몸이 녹아내린 것 같은데. 미안한 말이지만 계속 이렇게 열에 달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데.
태영은 제 움직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마른 뱃가죽을 보며 더 뜨거운 숨을 토했다. 그 숨결에 은재는 몸을 뒤챘다.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 그럴 때마다 더 커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어떤 크기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데. 지금도 미처 다 넣지 못하고 움직이는 것 같은데 자꾸만 꿈틀거리며 더 크기를 키우려 하는 것 같았다.
“페로몬, 좀. 풀어 봐. 흣.”
은재는 태영의 허리를 감고 있는 다리를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제대로 떠올리기도 버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가까스로 태영을 응시했다. 퍽! 그와 동시에 거친 삽입이 은재를 때렸다.
흣, 은재는 눈을 질끈 감으며 제 배 속을 망가뜨리는 흉기를 느꼈다. 눈앞에 닥친 새붉은 쾌감에 숨을 삼키며 태영의 어깨를 밀어냈다.
“흐윽……!”
그 반응에 기민하게 반응한 태영이 그쪽으로만 허리를 치대며 페로몬을 풀었다. 원래도 방 안에 가득 차 있던 페로몬이 더욱 색정적인 향을 입고 은재에게 달려들었다.
“여기요? 여기, 아…… 여기, 좋아요.”
“……아!”
음탕해진 페로몬과 함께 약한 부분을 찔러 대는 성기에 은재는 삽시간에 절정에 빨려들어 갔다. 히트 사이클치고 빨리 정신이 들었는데, 다시 처음 발정을 느끼던 그 순간처럼 눈앞이 깜깜해졌다. 자극제가 마치 호흡기로 쏟아지며 배 속을 누군가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제일 느끼는 부분에만 대고 혀로 긁어 올리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으응!”
“아, 조여……. 너무 조여요. 여기 좋으세요?”
자꾸만 은재의 눈이 질끈 감기고 입이 벌어졌다. 얼마 남지 않은 정신으로 태영의 시선을 피하려고 했지만 태영은 계속 은재의 턱을 쥐고 이마를 맞대며 퍽! 허리를 쳐올렸다. 묵직한 것이 계속해서 그곳만 문지르며 기어코 정신을 흩트려 놓았다.
“아흐……. 으, 응. 읏……!”
“긁을 때마다 엄청 떨려요. 자꾸 조여서, 아…… 씨발, 쌀 것 같은데.”
안 되겠다 싶었는지 태영은 몸을 일으켜 거세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힘 조절도 없이 무작정 쳐올리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제는 은재의 연약한 부분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그곳에만 대고 추삽질을 했다.
이미 쾌락을 알아 버린 내벽. 그리고 묵직한 크기의 성기.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 은재를 더 높은, 더 잔인한 절정으로 이끌었다.
돌연 쌓인 페로몬과 동시에 내벽이 꽉 성기를 붙잡았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은재는 온몸을 떨며 정액을 토했다.
“윽.”
그 조임에 저도 모르게 사정을 한 태영은 고개를 젖히며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아, 콘돔을 안 했네…….”
이윽고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불쑥 은재를 안아 제 다리 위에 앉혔다. 심하게 깊어진 삽입에 은재가 힘 빠진 몸으로 몸부림을 치자, 태영은 그 허리를 조여 안으며 퍽! 퍽! 쳐올리기 시작했다.
지금 막 사정을 한 게 분명한데도 줄어들지 않은 크기의 것이 더욱 깊은 내벽을 뚫으며 자꾸 들어왔다. 억센 힘으로 안을 때리며 밀려들었다.
“넣고 싶고, 더 닿고 싶어서…… 후, 안 되겠어요. 안고 있어야지.”
“읏! 아, 아!”
“이사님, 느껴져요? 제가 이사님 안에 있는 거, 알죠?”
“……하으!”
흰 다리가 파들파들 경련했다. 은재는 핏핏 묽은 정액을 쏘며 태영의 어깨 위로 무너졌다.
태영은 제 품에 딱 알맞게 안기는 은재의 몸을 몇 번이나 끌어안으며 허리를 끌어 내렸다. 흉흉한 근육이 선 허벅지로 제 무게를 지탱하고, 그 힘으로 쳐올리며 내벽을 때리고 또 때렸다.
덕분에 커다란 흉기 같은 것이 오가는 그 작은 구멍에서 정액이 줄줄 새어 나왔다. 흉악해 보이는 성기가 오갈 때마다 그 정액에 젖어 비부를 더 음란한 모양새로 만들고 있었다. 회음부를 지나, 골을 지나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은재는 제가 기절하는 줄도 모르고 정신을 놓았다.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을 안 태영은 놀라 은재를 내려놓았다가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침대 위로 달려들었다. 늘어진 팔을 들어 제 어깨에 두르게 한 뒤 하얀 뺨과 목줄기에 가득 제 흔적을 남겼다. 쇄골을 아프게 씹었다가, 또 한참 가슴에 머물렀다가 마른 배를 타고 내려와 성기와 회음부를 또 한참 혀로 훑었다. 그리고 거친 허리 짓이 다시 이어졌다.
연락을 받고 진작 저택으로 달려왔던 최 박사와 태영이 마주한 것은 이틀 후 저녁이 될 무렵이었다.
* * *
“페로몬 이상이라고 하셨습니까?”
태영은 얼음이 가득찬 물 컵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이사님께서는 그런 말씀 없으셨는데요.”
“……네, 도련님께는 말하지 않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걱정을 하실 테니까요.”
“언제부터 그랬던 건데요. 제가 알기로 이사님은 우성 오메가이신데.”
최 박사는 옆에 서 있는 강 비서의 눈치를 살피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태영이 돌아왔다는 말을 은재에게 전해 듣기는 했다. 그래서 부쩍 긴장하고 있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한집에서 지내게 될 테니 혹시 페로몬에 영향이 미칠까 염려하며 또 새로 약을 지어야 할지 고민했었는데.
“손은 괜찮으십니까? 상처가 나신 듯한데.”
“손? 아.”
답을 기다리던 태영은 문득 받은 질문에 다쳤던 손을 대충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꽤 큰 상처가 보이는데도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치료는 하셨습니까?”
“네. 대충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어 주신 건 감사하지만, 보여 드릴 정도의 상처도 되지 못합니다. 그럼 이제 다시 원래 문제로 돌아갈까요.”
그러곤 자연스레 다시 대화를 이끌어갔다. 최 박사는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6, 7년 정도 되셨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증상이 있던 건 아니시네요.”
7년 동안 은재는 태영을 걱정했다. 태영이 알파로 발현하던 날, 무자비하게 쏟아내던 페로몬을 받아 외려 제 페로몬 샘에 이상이 생겼음에도. 본의 아니게 정제되지 않고 흘러나오던 페로몬으로 그에게 일방적 각인을 해 버렸음에도, 혹여나 그것으로 태영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항상 걱정했다.
각인은 상대와 관계없이, 또 우성인지 열성인지와 관련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래도 태영이 알파로 발현하던 순간에 이루어진 각인이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돌아온 태영에게 별다른 특이점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깊이 안도했고.
“네, 그렇습니다.”
“원인은요. 치료법은 있습니까?”
“현재 약을 복용 중이십니다. 페로몬에 이상이 생기면 지금처럼 자연스러운 히트 사이클 증상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유도제를 사용하여 페로몬을 빼내는 게 일반적이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럼 왜 그런 겁니까?”
일반적이지 않다는 말에 태영의 눈썹이 크게 구겨졌다.
최 박사는 제 기억 속 모습과 매치되지 않는 모습에 작게 숨을 가다듬었다. 어릴 적 눈치를 살피며 분위기를 읽으려던 때와 달리 너무나 익숙하게 우위를 점령하고 있었다. 또렷한 인상에 더욱 날이 서자 본래 지니고 있던 위압감이 자연스럽게 공간을 에워쌌다.
“……보통 이렇게 페로몬 이상이 나타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이유 없이 그런 증상이 발현되거나, 혹은 각인을 한 상대의 페로몬을 오랫동안 받지 못하는 경우요.”
“각인이요?”
……박사님.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강 비서가 최 박사를 부르며 눈치를 주었다. 최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럼 이사님도 각인을 한 상대 때문에 이렇게 되신 겁니까?”
“그건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사님께서 각인을 한 상대가 없다고 하셨기에 급작스러운 페로몬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래 상대를 만나지 않으셨고, 억제제를 복용하셨기 때문에…….”
“부작용이라는 거군요.”
태영은 심각한 얼굴로 제 턱을 문질렀다.
“그럼 왜 이번에는 히트 사이클처럼 열이 오른 거죠?”
“가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간의 약효가 잘 들어서 페로몬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근래에 접하게 된 알파와 페로몬 상성이 맞는 경우입니다.”
“페로몬 상성…….”
잠시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태영은 컵을 들어 있던 얼음을 씹어 삼킨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제 페로몬이 이사님의 몸이 원하는 페로몬이라는 거네요. 근래에 이사님하고 만난 알파는 저밖에 없으니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확신할 순 없습니다.”
“제 페로몬을 받으시고 진정하셨어요. 괴로워하시지도 않았고, 열도 잘 가라앉았고요.”
그럴 수밖에. 각인을 한 알파의 페로몬이었으니까.
“앞으로도 제 페로몬에 노출된다면 어떤가요.”
점차 본질로 접근해 오는 물음에 최 박사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은재는 절대 태영에게 자신이 각인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말아 달라 요청했다. 각인도, 그로 인해 발생한 페로몬 이상도 모두 사고일 뿐이었다. 어릴 적 태영이 저택에 들어와 미숙하게 굴던 시절을 알기에 최 박사도 그 마음을 이해했다.
그러나 지금 태영의 말은…….
“어차피 계속 약을 복용 중이신 것 같은데요. 그런데 제 페로몬이 이사님께 잘 맞는다면 굳이 약을 먹을 필요가 없는 건 아닙니까? 약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또 그 약을 오래 복용하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럼 됐네요.”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태영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약으로 페로몬 이상이 생겼는데, 더 약을 복용하게 할 수 없습니다. 상성이 맞는 페로몬이 있는데 고생하실 필요도 없고요.”
“……도련님. 지금도 이사님의 상태는 불안정하신 겁니다. 원래 우성이시라 보통 일주일씩 히트 사이클이 오는데, 이렇게 짧게 2, 3일로 끝나는 경우는 언제 어떻게 또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럼 묻죠. 이제 제가 이사님 곁에서 없어져서 다시 페로몬을 받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최 박사가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굳이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묘한 직감에 절 직시하는 강 비서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미 한번 상성이 맞는 페로몬을 만났으니 더 큰 부작용이 올 겁니다. 가볍게는 약이 듣지 않고, 또 후에도 치료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고요. 히트 사이클이 주기 없이 오거나, 아예 오메가로서의 형질을 모두 잃을 수도 있습니다.”
심각한 이야기에도 태영은 덤덤했다. 그럴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근데 꾸준히 제 페로몬에 노출이 되면 어쨌든 안정이 된다는 말씀이시고요.”
하는 수 없이 최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 표현에 태영은 몹시도 상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더 고민할 것도 없겠네요. 오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또 이사님이 찾으실 것 같아요. 그때 다시 와 주세요.”
대놓고 말하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은재의 침대에 오르겠다고. 제가 은재의 남자가 되겠다고. 제가 평생 그에게 알파 페로몬을 쏟아붓겠다고.
“혹 언젠가 노출이 끊어지게 될 거라면, 차라리 이쯤에서 멈추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중단되는 것이 이사님께는 훨씬 더 위험합니다.”
“그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중단될 일은 없으니까요.”
태영은 처음부터 그 생각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왔지만 이렇게나 그 사실을 공표한 적은 없었다. 강 비서는 묵묵히 일어서는 최 박사의 뒤를 쫓았다.
“아, 굳이 입조심은 안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언젠간 밝혀야 할 테니까요.”
“…….”
“그럼 조심히 들어가시죠.”
“저, 혹시…… 도련님께서는 특별히 그런 증상은 없으십니까?”
대화를 끝마치고 일어서려던 태영은 조심스레 뒤를 돌아 묻는 최 박사를 보며 살짝 미간을 구겼다.
“무슨 증상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러트가 과하게 오래 지속된다거나, 페로몬이 불쑥 새어 나간다든가…… 아니면 페로몬 관련 그 어떤 증상도 없으신지요.”
“전 괜찮습니다. 혹시 이사님의 그 증상이 저에게도 영향을 미치나요?”
“그건 아니지만, 상성이 맞는 분이시니 혹시나 페로몬에 문제가 생길까 하는 마음에 여쭤본 겁니다.”
7년간 은재를 괴롭게 했던 고민을 에둘러 확인한 최 박사는 다행인지 아닌지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윽고 정 실장의 배웅을 받으며 찜찜하게 저택을 나섰다.
자리에 남은 태영은 천천히 일어서며 돌아온 강 비서에게 말했다.
“이사님은 며칠 더 쉬셔야할 것 같아요. 열은 떨어졌는데 아직 힘들어 하시네요.”
“네. 알겠습니다.”
“강 비서님.”
“예. 말씀하시죠.”
“이사님 깨시면 화내시겠죠?”
걱정을 담은 말과 달리 태영의 얼굴은 산뜻했다. 그렇게나 원하는 고지에 오른 승자의 얼굴이었다. 고요한 만족감이 얼굴에 고이고 있었다.
“혼날 준비해야겠네.”
그 말을 끝으로 태영은 은재의 방으로 향했다.
은재가 정신을 차린 건 그 뒤로도 또 하루가 지나서였다.
“아…… 전시회 일정 알고 있습니다. 가 봐야죠.”
“…….”
“일단은 그 사업과 별개로 저희 문화 재단 쪽과도 연결할 수 있으니까요. 미술 쪽은 신경을 못 쓰고 있었던 거라……. 네.”
“…….”
“그럼 그 피아니스트 일정도 보내 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대경이든, 정부 사업이든 들어갈 곳은 많습니다. 아티스트 풀이 더 넓어질 필요도 있고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들어오던 태영은 은재의 목소리에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섰다.
“리조트는…….”
침대에 앉아 태블릿 PC를 보며 통화를 하던 은재는 잠시 태영을 보며 말을 삼켰다.
“연계 사업으로 추진할 계획입니다. 애초에 프로그램을 같이 짜서 올라온 기획이 있던 것 같은데요. 네. 아예 문화 사업으로 꾸릴 생각입니다. 거리가 있기는 한데, 애초에 공연 후 휴식으로…… 네, 기획안 있을 겁니다. WB에서 지금 부지 관련 이슈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예. 그렇게 하시죠.”
그러나 이내 통화로 돌아가 마무리 짓고는 모른 척 태블릿 PC만 내려다보았다.
“몸은 좀 어떠세요.”
태영은 낮은 숨을 터뜨리며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물 드릴까요?”
커다란 창을 뒤에 놓고 볕을 받으며 앉아 있는 은재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원래도 눈에 띄는 외모였는데. 날연함이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리는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자극적이었다.
며칠간 시달린 몸이 성치 않아 창백해진 모습마저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할 정도로 아찔했다. 붉어진 눈가마저 관능이 배어나고 있었다.
“일 나중에 하세요.”
태영은 일부러 손가락이 스치도록 컵을 내밀며 은재가 들고 있던 태블릿 PC를 앗아 갔다. 그것을 쥘 힘도 없이 빼앗긴 은재는 어느새 제 바로 앞에 다가와 앉아 있는 태영을 발견하고 살짝 이마를 구겼다.
“눈이 좀 부었나.”
커다란 손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은재의 뺨으로 향했다. 은재는 고개를 돌려 손을 피하며 물을 마셨다.
그 모습을 태영을 물끄러미 직시했다.
“그 목소리로 근데 통화할 생각을 하셨네요.”
“…….”
“누가 봐도 몇 날 며칠 운 목소린데.”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시선과 음성에 은재는 멈칫했지만 컵을 비우고 내려놓았다. 태영의 어조가 낯설었다. 유순하고 순종적이던 아이의 분위기가 아닌, 꽤나 소유욕이 있어 보이는 알파의 향이 물씬 느껴지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나세요?”
태영은 컵을 더 먼 곳으로 옮기며 은재의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이미 몸이 스치는 거리인데. 그로도 부족한지 태영은 아예 은재를 끌어안듯이 하며 다가왔다.
내내 침묵을 지키던 은재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태영아.”
“네, 이사님.”
한숨을 뱉은 은재는 고개를 기울이며 소년이었던 제 아이를 빤히 응시했다.
“실수야.”
“…….”
“이런 걸로…… 너랑 얽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태영은 이런 말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놀라지도 않았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은재를 뚫어져라 보기만 했다.
“너랑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관계잖아.”
“…….”
“나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태영이 네가 첫 감정에 헷갈리는 거라고.”
“전 실수로 섹스 안 해요.”
“…….”
“이사님 침대에 올라오려고 그동안 버텼어요. 여기 올라올 자격을 갖추려고 참기만 했어요.”
천천히 신중한 태영의 페로몬이 은재를 휘어 감았다. 그 난잡했던 밤을 채웠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종류였다. 저와 밤을 보냈던 오메가를 위해 푸는 페로몬이었다.
은재는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삼키며 그 페로몬을 마셨다.
“들었어요. 페로몬 이상이라고.”
이어진 말에 은재가 움찔, 몸을 떨었다. 태영은 그 어깨를 붙잡아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다시금 제 페로몬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몸의 긴장을 풀어주며 은재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더욱 깊어진 눈빛이 은재의 얼굴선을 따라 움직였다.
“약 드시지 마세요. 저 이용하세요.”
“…….”
“잘 맞잖아요. 페로몬 이상 생기면 이렇게 상성 맞는 알파 찾기도 힘들다는데. 제가 할게요. 억제제를 오래 복용하셔서 그렇다면서요.”
“……태영아.”
“저 이사님이 아무데서나 발정하는 거 못 참아요.”
“…….”
“저 없는 데서 알파들 페로몬 노출돼서, 언제 어떻게 야한 얼굴 될지 모르는 거…… 절대 안 돼요.”
점점 더 몸에 달라붙는 페로몬에 은재는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각을 느꼈다. 망가졌던 페로몬 샘에 태영의 페로몬이 들어가 자극을 남기고 있었다. 오랫동안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을 받지 못했던 오메가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만 같았다.
아직도 귓가에 낮은 음성이 생생했다. 열에 달뜬 그 낮은 음성이, 너무나 선명하게 흥분을 드러낸 낮은 음성이 숨소리를 뱉으며 제 몸을 붙잡고 달려드는 감각이 선연했다.
……태영이와 기어코 잤다니. 얼마만큼 정신이 없으면 제 아이와 섹스를…….
말도 안 되는 감정을 드러내는 아이를 보면서도 섹스를 하게 될 거라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페로몬 이상으로 인한 히트 사이클이 그렇게 갑작스레 나타날 줄도 몰랐고, 그걸 태영이와…….
“왜 자꾸 한숨 쉬세요.”
태영은 이제 은재의 입술 안쪽을 만지고 있었다. 점막을 매만지며 나직이 숨을 뱉었다. 은재는 그 손을 잡아 내리며 절 바라보는 시선을 피했다.
“저 처음이었어요.”
“…….”
“이사님하고 하려고 참았는데…… 참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좋아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태영은 다시금 몸을 접으며 은재의 품에 안겼다. 은재가 저를 안아 줄 체력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깨를 말아 가며 안기려 했다.
“너 담배 냄새 나.”
“아.”
절 끌어안아 주지 않는 품에서 만족스럽게 머물던 태영은 은재의 말에 불쑥 몸을 일으켰다.
“씻고 올게요.”
그러곤 은재가 다시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침대를 내려가 욕실로 향했다.
“이사님 주무시는 동안 이사님 욕실 썼어요. 앞으로 자주 쓸 거니까 알아 두세요.”
정말 내내 이 욕실을 썼는지 태영은 익숙하게 옷을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은재는 덕분에 드러난 태영의 몸을 보다 이내 목을 붉혔다.
두툼한 가슴 근육과 팔 근육이 바로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배는 물론이고 등에도 조각한 듯한 근육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은재는 그것 때문에 목을 붉힌 게 아니었다.
은재의 시선은 태영의 등에 닿아 있었다. 누구의 손톱자국인지 너무나 확실한 것이 아직도 붉은 줄로 남은 등에.
그것을 보자 열에 달떠 울부짖던 제가 떠올라 질끈 눈을 감았다. 한숨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전 실수 아니었어요.”
“…….”
“임세헌하고도 자면서 저랑은 못 잘 이유 없잖아요.”
세헌의 이야기를 하는 태영의 얼굴이 미묘하게 사나워졌다. 태영은 그런 제 뺨을 문질러 표정을 지우더니 다가와 은재의 코에 입 맞추었다. 절 피하는 턱을 붙잡아 더 길게 콧대에 입술을 내리며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물러났다.
“씻어야겠어요. 아래가 당겨서 죽을 것 같으니까.”
이마를 찌푸린 은재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컵을 쥐었다. 더 노골적으로 변한 태영의 말투를 깨달을 새도 없었다. 두툼해진 태영의 허벅지를 보지 않으려 하는 것도 힘겨웠다.
“그래도 자위는 해도 되죠. 이사님 이름 부르는 건 참아 볼게요.”
이어진 말에 은재는 아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태영은 덕분에 드러난 목덜미와 제 흔적을 훑으며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욕실 문고리를 쥐었을 때.
“……너.”
“…….”
“손은 괜찮지.”
아직도 시선을 저 멀리 던지고 있는 은재가 물었다. 태영은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멈췄던 걸음이 욕실 쪽으로 다시금 움직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자세한 것을 상상하고 싶지 않은 물소리가 이내 쏴아아 폭포처럼 쏟아졌다.
* * *
“작가분이 아시면 좋아하실 겁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를 발견하시고 나면 지속적으로 관찰하시고, 또 구매해 주시는 분이니까요.”
“그런가요.”
“아무래도 신인 작가들한테는 제대로 작품을 파는 것이 이름을 알리는 데 효과적이니까요. 더군다나 대경의 민 이사님이신데요.”
“과찬이시네요.”
은재는 옅게 웃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정부 신사업 관련해서 보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인 취미입니다. 물론…… 문화 재단과 연결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그러시군요. 어쨌든 반가운 소식이네요.”
미술관을 제 산하에 두고 있는 일성 그룹의 류 전무가 은재를 쫓아 함께 전시회를 둘러보고 있었다. 늦은 시각, 본래라면 미술관은 문을 닫아야 할 시간이었지만 은재는 여유롭게 조명을 받으며 찬찬히 그림들을 보았다.
“그런데 혹시 어디 안 좋으신 건 아니십니까? 평소보다 안색이 안 좋으셔서요.”
“괜찮습니다. 요즘 일이 많아서 그런가보네요.”
“매번 과로하시는 것 같은데…….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쉽지만 그럴 시간까지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류 전무는 걱정이 서린 얼굴로 물었다. 은재는 나직이 고개를 저었다.
육체가 피로한 것과 달리 정신은 멀쩡했다. 정말 태영에게 각인을 한 게 맞는지…… 그 페로몬에 노출이 되자 늘 불안하게 안에서 요동치던 것이 가라앉은 게 느껴졌다.
물론, 벌어졌던 다리는 지금도 얼얼하고 뒤와 허리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지만.
그래서 평소보다 더 천천히 걷고 있는데도 류 전무는 지루함도 없는 얼굴로 그 일정에 동참했다. 그 속도에 맞추어 걸으며 작품 설명을 간간이 얹어 주었다.
“이제 혼자 좀 둘러봐도 될까요.”
“제가 너무 방해가 되었나 보네요.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 주십시오.”
류 전무는 멋쩍은 듯 웃으며 물러났다. 은재는 류 전무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잠시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음악도, 조명도 희미한 미술관. 덕분에 발걸음 소리만이 더 선명하게 들리는 공간. 은재는 그 고요함을 누비며 크게 숨을 삼켰다.
“이사님.”
은재는 그림을 여전히 좋아했다. 시간이 날 때나, 머리가 복잡할 때면 그림을 보러 오곤 했다. 차마 저는 이뤄 내지 못한 압도적인 화풍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절로 생각이 비워졌다. 다가갈 수 없는 천재성에 그저 색감을 보기에도 바빴다.
하지만 이제는 그림을 보면 저택 2층에 자리한 화실이 떠올랐다. 더욱 복잡해진 태영과의 관계가 떠올랐다.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뒤엉킨 기분인지…….
있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도통 갑갑함이 가시지를 않았다.
“최 박사가 보내 온 검사 결과입니다.”
얼굴에 훤히 드러나는 상념에도 불구하고 뚜벅뚜벅 다가온 강 비서가 묵묵히 서류를 내밀었다.
오늘, 저택을 떠나자마자 은재는 최 박사의 병원을 찾았다. 태영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뒤늦게 확인하고 페로몬 수치 검사를 진행했다.
페로몬 이상이 있던 몸이라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몇 시간 만에 확인한 결과는 역시 예상대로였다.
“고작 한 번에 나아지네.”
마찬가지로 결과를 확인한 최 박사는 앞으로도 계속 관계가 이어져야 몸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다 말했다. 오히려 페로몬이 다시 끊기게 되면 그때는 되돌릴 수 없게 된다고. 겨우 안정을 찾은 페로몬에 혼란을 준 셈이 되어 억제제도, 히트 사이클 유도제도 듣지 않게 될 거라고.
그렇다고 태영과 계속 섹스를 할 순 없었다. 왜 하필 그때 태영과 전화가 연결되어서는…….
“그 자리에 강 비서님도 계셨나요.”
“예. 그랬습니다.”
“제가, 아이한테 각인했다는 건 듣지 못한 거죠.”
“그간 복용하셨던 억제제 부작용으로 인한 증상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은재는 태영이 다시 한국에 돌아와 이렇게 될 때까지의 일을 찬찬히 되짚었다. 처음, 성숙해진 얼굴로 돌아왔던 아이. 조금씩 알파의 얼굴을 드러내며 욕망을 내보였던 아이. 그러다 다른 알파의 냄새에 순식간에 거칠어졌던 아이.
“혹시 각인 때문에 감정에 영향을 준다거나…… 그런 말은 없었나요?”
“글쎄요. 딱히 그런 말을 전해 오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최 박사도 그런 건 모를 수도 있지. 이제 각인이라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어느 순간 애정의 결실 같았던 각인은 오래된 연인들과 부부 사이에서도 드문 개념이 되어 버렸다. 노부부에게서만 주로 찾아볼 수 있는 형태였다.
하지만 태영의 모습을 보았을 땐 각인이 영향을 주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저에게 절절한 감정을 가질 리가.
“행사 소식 들리는 거 없나요?”
은재는 차오르는 한숨을 삼키며 물었다.
“몇 주 내로는 없던 것 같은데. 더 알아볼까요.”
“태영이가 다시 나가지 않는다고 하니 공식적인 자리가 필요해요. 사람들에게 회장님의 뒤를 이을 아이가 돌아왔다고 보여 줘야 하니까.”
그런 자리에 나서고 나면 나아지지 않을까. 더 많은 것을 보고 나면, 제 자리를 다시 한번 느끼고 나면 헛된 욕망은 사라지지 않을까.
“그리고, 대경 쪽에 호의적인 그룹 리스트를 한번 만들어야겠습니다. 이왕이면 우리 쪽에 이득을 얻어 갈 수 있는 사람으로.”
강 비서는 그림을 들여다보는 은재의 옆얼굴을 보며 조심스레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흐릿한 조명이 어린 은재의 얼굴에선 속내를 쉽게 읽을 수 없었다.
“여자 알파도 괜찮고…… 아니면 오메가인 게 낫겠죠.”
“…….”
“태영이가 아무래도 오메가에 호기심을 보이는 것 같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우성인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성인 아이를 낳을 테니까. 여러모로 태영이에게 도움이 되겠네요.”
덤덤하게 말을 뱉은 은재는 시간을 들여 그림 하나하나를 보았다. 그러곤 그림 하나를 더 구매한 후에야 전시회장을 나섰다.
밖은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은재는 그 공기를 깊게 마시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사위가 더욱 어두워지자 아직 채 해소되지 않은 피로가 다시금 몰려드는 것 같았다. 허리가 더 무겁고, 뻐근했다. 술 혹은 담배.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 고민하며 멈추어 섰다.
그때 이쪽으로 다가오던 인영 하나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서 주춤거리더니, 곧 다가와 은재의 앞에 멈춰 섰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7년 전, 은재의 연인이었던 사람이었다. 은재는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이런 곳에서 만날 줄 몰랐는데.”
“…….”
“아직도 그림 좋아하나 봐.”
그는 가벼운 차림이었다.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고, 이곳이 꽤나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쌓인 연륜이 분위기에 제법 묻어나고 있었다.
“우리 와이프도 그림을 좋아하거든. 오늘은 애랑 같이 그림을 좀 산다고 나왔어. 그런데 문을 닫아서 그냥 근처만 둘러보고 있었는데…….”
“그러게요. 문을 닫았더라고요.”
은재는 굳이 제가 그 문을 닫게 한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하지 않아도 알 테니까. 남자는 역시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제 뺨을 거칠게 문질렀다.
“요즘 몸은 좀 어때.”
남자는 한동안 멈칫거리며 어색해하더니 곧 이전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한때 은재만이 오롯이 담겼던 눈동자에 이전과 비슷한 빛이 살짝 감돌았다.
“그때 힘들어했잖아.”
“약 먹고 있어요. 많이 나아졌고요.”
“그래 보인다. 전보다 나아 보이네.”
하지만 헤어진 지 이미 한참 된 둘에겐 더 이상 나눌 대화가 없었다. 은재는 마침 우는 전화를 꺼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은재야, 그때는…….”
“이만 가세요.”
“…….”
“우리 사이에 할 말 더 없어요.”
“미안하다, 은재야.”
“…….”
“내가, 나 때문에 네 페로몬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어. 네가 갑자기 숨을 못 쉬면서 발작까지 일으켜서…….”
……말해. 은재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에 응답하며 몸을 돌렸다.
―목소리가 별로네요.
낮은 음성이 곧장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런가.”
―밖이세요? 바람 소리 들려요.
……은재야. 남자는 다시 한번 은재의 이름을 불렀다. 급히 다가와 손을 잡아 보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은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자리를 떴다.
그 남자의 아내와 아이로 보이는 이들을 지나치며 차에 올랐다.
평범한 가족. 평범한…….
답답한 숨이 울대 뒤로 천천히 쌓였다. 어린아이가 신이 나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갑갑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누구?
“예전에 알던 사람.”
―목소리에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는데요?
전화기 너머의 음성이 미묘했다. 은재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시트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이제 끊자, 할 말 없으면.”
―아, 그 남자한테 벗어나려고 내 전화 받으신 건가 보네요.
“어쨌든 받았으면 됐지.”
태영이 피식 헛웃음을 쳤다.
―그래요. 그런 걸로 해요. 그래도 끊지 마세요.
“…….”
―집으로 오는 거죠?
“…….”
―오늘은 침실에 안 갈게요.
이제 기운을 다 차렸는데도 태영은 매일 은재의 침실을 찾았다. 보란 듯이 은재의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은재의 이름을 부르며 자위를 했다. 속옷이 정리되어 있는 옷장을 넌지시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렇게 굴지 못하게 해도 막무가내였다. 은재가 없는 시간을 틈타 제 페로몬을 침구에 묻혀 놓기까지 했다.
한 번 섹스를 했다고 마음이 편해진 건지, 아니면 거리낄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이사님. 임 대표님 전화입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강 비서가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신 2층에 있을게요.
“…….”
―생각해 보니까 일주일에 한 번, 저한테 시간 내주시는 거 안 하셨더라고요. 그건 제가 이사님 아이일 때까지 유효한 거잖아요. 그림 알려 주세요, 오늘.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은재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임 대표의 전화를 받았다.
“네.”
―맘에 드는 그림이기는 한데. 분위기도 어울리고.
“벌써 도착했나 보네요.”
―민 이사 안목이야 믿을 만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
“주로 신인들로 모아요. 그래야 나중에 유명해지면 초기작이 더 비싼 값에 팔리거든요.”
―유명해진다고 장담할 순 있고?
“제가 샀고, 임 대표님이 받으셨잖아요. 그걸로 이미 유명해진 건데요.”
전화기 너머 임 대표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찾는 중이라 들었는데. 문화 재단.
“네. 재단을 통하든, 개별로 진행하든 알아보고 있어요. 이왕이면 새로운 얼굴들 쓰고 싶어서요.”
―지원금이 꽤 되잖나. 정부 행사용이라 심사도 까다로울 거고.
“심사는 저 말고도 다른 기업들까지 껴서 하니까 괜찮아요. 주로 김 교수가 담당할 거고요. 지원금 횡령은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마세요. 조사 받을 일 안 만듭니다.”
세헌의 아버지인 임 대표가 이끌고 있는 WB 기업 또한 신사업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여러 기업이 투자를 하고, 진행을 하는 사업인 만큼 주목도가 높은 사업이기도 했다. 막상 실질적인 이득보다는 이미지 개선을 위한 사업인 셈이지만.
―민 이사 아이 들어왔다는 말 들었다.
“……아, 네. 세헌이랑은 본 것 같더라고요.”
―한번 봐야지. 이제 실무에 들어갈 준비도 하고.
“그래야죠.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WB와는 오랜 인연이었다. 민 회장 대에서부터 친분이 두터웠고, 세헌과 은재도 그랬다. 민 회장의 친구로서도, 세헌의 아버지로서도 임 대표는 좋은 사람이었다. 이른 나이에 다시 혼자가 되어 사업을 떠맡게 된 은재에게 마음을 써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뒤로도 그는 태영과 은재의 안부를 물었다.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정원에 들어와 멈춘 후였다.
여름의 정취를 한가득 품고 있던 정원은 조금씩 변해 가기 시작했다. 아직은 이르지만 곧 다가올 가을을 기다리며 서서히 다가올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는 찬 바람을 가두어 놓고, 낮에는 뜨거운 볕을 저장하여 제가 품은 정원을 자라게 했다.
고요한 저택과 어울리고 또 어울리지 않는 정원이었다. 정원이 지닌 무성한 녹음은 풍성했고, 정돈되었으며 화려했다. 가끔 그 정원을 보고 있노라면 동떨어진 곳에 있는 것처럼 그저 멍하니 바라보게만 될 정도였다.
그 정원을 품은 저택 2층에 불이 켜진 것이 보였다. 은재는 재킷 단추를 풀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정원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계단을 올랐다.
태영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만……. 은재는 그곳이 아닌 태영의 방으로 향했다. 홀린 듯 그 방으로 들어가 안을 둘러보았다.
얼마 전까지는, 불과 두 달 전까지는 비어 있던 방인데.
태영이 한국을 떠나 지내는 동안 종종 이 방에 올라오곤 했다. 새삼스럽게 제가 아이를 잘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되짚고,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되짚으며 싸늘한 이불을 만져 보았다. 먼지가 쌓이지는 않았지만 점점 생활감이 사라져 가는 방을 둘러보며 어린 태영이 읽었던 책들을 꺼내 보았다.
그때와는 너무나 달라진 방이었다.
곳곳에서 낯선 흔적이 보였다. 태영의 날카로운 페로몬과 체향이 뒤섞여 방 분위기에 일조하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그저 귀여웠는데. 지금은 어딜 둘러보아도 완연한 성인 남성의 방이었다. 차 키와 가방, 지갑과 향수, 담배와…….
은재는 천천히 방을 둘러보다 곧 책상에 올려진 일기장을 발견했다. 제가 어린 태영에게 직접 사다 준 것이었다.
일부러 깨트린 잔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움츠렸으면서도 당돌하게 말하던 그때의 것.
묵묵히 그 일기장의 낡은 가죽을 만져 보았다. 이제는 태영의 손때가 묻은…….
“한참 기다렸는데, 여기 계셨어요?”
불쑥 가까운 곳에서 낮은 음성이 들렸다. 예상치 못한 음성에 깜짝 놀란 은재가 어깨를 들썩이며 뒤를 돌아보자 태영이 웃으며 그 어깨를 감쌌다.
일기장을 만지던 탓인가. 저도 모르게 작은 태영의 모습을 그리던 은재는 훨씬 더 크고 건장한 태영의 등장에 쿵쿵, 뛰는 심장을 느꼈다. 심장 부근이 조이며 아픈 듯한 기분이었다.
문득 이 커다란 저택에 저 혼자가 아닌 다른 이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차 소리 들려서 그때부터 긴장하고 있었어요. 그림 하나도 그릴 줄 모르면서 연필로 그어 대고 있었다고요.”
“……오늘 어디 갔다 왔어?”
“네. 누구 좀 만나고요.”
태영은 정장 차림이었다. 처음 보는 태영의 정장 차림에 은재는 그를 위아래로 한번 살펴보았다.
이렇게 입은 걸 보니…… 꽤나 그 육체의 선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듯했다. 맞춤으로 만든 옷인 것 같은데. 천이 비싸 보이는 것인데도 큰 체구를 감싸고 있기 때문인지 단정하다기보다는 외설적인 기운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조여들었던 심장 부근이 조금 더 뻐근하게 당겨 왔다.
“이렇게 보니까 영락없이 알파 같네.”
“무슨 뜻이에요?”
은재는 대답을 삼키며 일기장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태영은 때를 놓치지 않고 절 밀어붙이며 은재를 익숙하게 벽 쪽으로 몰아세웠다.
“제 외모가 마음에 드세요?”
“…….”
“근데 계속 제 보호자만 하실 거고요?”
“그래. 난 평생 네 보호자 할 거야.”
“제 오메가 하면서 제 보호자 하시면 되죠.”
“그런 게 어딨어.”
손을 들어 태영의 가슴을 밀어내 보았지만, 태영은 오히려 그 손을 눌러 제 몸을 만지게 했다.
손을 오므려 그 몸을 만지지 않으려 했지만, 그래도 선명한 육체의 선은 손등으로 전해져 왔다.
“왜 안 돼요. 불법인 것도 아닌데.”
이미 아는 몸이었다.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이 옷 뒤에 얼마나 사납고 무거운 근육들이 있는지는 몸으로 기억했다. 이 무게에 깔려 움직이지도 못하고 버둥거렸던 것이 고작 며칠 전이었다.
“제가 되게 할게요. 그러니까 제 오메가 하세요.”
태영은 당연한 듯 일어선 제 성기를 은재의 몸에 대고 비비다 곧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릴 적 제가 공부하던 책상에 은재를 앉히고 일기장을 앗아 왔다.
[태영] 그 언젠가 은재가 직접 써 준 쪽지가 일기장 제일 앞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안에 보셨어요?”
“안 봤어.”
“보셔도 돼요.”
은재는 태영을 밀어내고 내려오려 했지만, 그 석벽 같은 몸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움직이려 할수록 태영의 허벅지 한쪽이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아 참아야 했다.
“처음 저택에 발을 들였다. 주소는 성북동. 이런 곳이 한국에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이사님은 더더욱 멋있다. 이사님하고 같이 살게 된다는 건 정말 믿을 수 없다.”
“……뭐 하는 거야.”
“처음 쓴 일기예요. 사실 이건 다른 공책에 썼는데 나중에 옮겨 적었어요. 이 저택에서의 첫날을 잊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때 이사님을 장지에서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직접 제 일기를 읽기 시작한 태영은 귀엽고 순수한 내용과 달리 점점 커지는 아래를 은재의 몸에 더 붙였다.
처음, 이 일기장을 받을 때는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며 두 손으로 받았는데. 이제는 한 손으로도 너무나 손쉽게 쥐고 있었다. 그때와 달리 일기장이 몹시도 작아 보였다. 미성이 아닌 낮은 음성으로 읽는 내용이 기이한 괴리감으로 달라붙었다.
“오늘 이사님과 파티를 다녀왔다. 거기서 애들이 하는 이상한 말을……. 아, 이건 넘어갈게요.”
“다 아는 내용이네.”
“읽어 드리고 싶었는데, 여긴 별로 좋은 내용이 없어요.”
태영은 일기장을 내려놓고 은재를 응시했다.
“그때부터 생각했어요. 크면 이사님을 지켜 주고 싶다고.”
“…….”
“그딴 소리 들을 사람 아닌 거 너무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더러운 알파들이라는 것도 알고.”
그러더니 몸을 숙여 은재의 품에 안겼다. 이제 은재는 어떻게 해도 제가 태영을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차라리 휘둘려 주면 금방 떨어져 나갈까. 그래서 피어오르는 죄책감을 누르고 그 큰 몸을 마주 안아 주니, 태영은 끓는 숨을 뱉으며 은재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아, 좋은 냄새.”
조금 더 크게 숨을 마시며 이내 입술을 목덜미에 문질렀다.
“……어릴 때 네가 본 일들은, 네가 내 알파가 아니어도 감당할 수 있어.”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근데 이제는 이사님 알파 하고 싶어요. 이사님 아이면서, 이사님 알파로…….”
“아, 잠깐. 물지, 마. 태영아.”
흰 목에 입술을 묻자 태영은 금세 흥분해 핥으며 씹기 시작했다. 대놓고 흔적을 남기려는 그 몸짓에 은재는 단단한 어깨를 쥐며 밀었지만 도리어 책상 위로 쓰러뜨려졌다.
“그날 이후로 죽을 것 같아요.”
태영은 거친 숨소리를 뱉으며 뜨거운 숨으로 은재의 귓불을 적셨다. 오싹한 감각에 은재가 숨을 삼키며 고개를 젖히자, 태영은 혀로 턱 끝을 핥으며 급하게 제 바지춤을 풀었다.
“하지 마, 태영아.”
“안 넣을게요. 저만…… 저만 할게요. 그날 이후로 자꾸 서 죽을 것 같아요. 이사님 발소리만 들어도, 자꾸 서요.”
끓는 숨을 토하듯 뱉은 태영은 제 성기를 기어코 꺼내 은재의 손에 쥐여 주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던 그것은 은재의 손에 미처 다 담기지도 않았다. 손을 훨씬 벗어나는 크기였다. 태영의 근사하고 매끈한 얼굴과 달리 지나치게 크고 흉흉한 물건이었다.
“저 계속, 이사님한테 매달리잖아요. 후……. 저 좀, 책임져 달라고.”
은재는 그것을 쥐지 않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태영이 손을 겹쳐 쥐며 은재를 끌어안았다. 완전히 태영에게 눌린 상태에서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버둥거리는 몸짓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섹스 한 번 하고 나면, 나으려나 했는데……. 자꾸 이사님이 내 밑에서 울었던 게 생각나서…… 아, 좋아요.”
태영은 은재의 어깨에 이마를 묻으며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핏줄이 성성하게 선 것이 은재의 허리를 찌르며 알파의 냄새를 풍겼다.
은재는 축축해진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프리컴이 잔뜩 새어 나와 진득한 액체를 묻히고 성기를, 그리고 그것을 쥐고 있는 손을.
“…….”
“마음에, 드세요?”
잘린 숨을 토하며 태영이 은재의 뺨에 입술을 묻고 말했다. 은재는 제가 보고 있는 게 실제인지 믿기지 않아 잠시 멍해졌다.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현실의 것 같지 않았다. 형태와 묘하게 젖은 꼴이 말도 안 되게 음란했고, 왜 다 쥐지 못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이걸 받아 낸 제 몸이 놀라울 정도였다.
“이사님이 그렇게 보니까…… 더 좋네요.”
하아……. 태영은 낮은 숨을 터뜨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은재를 더 꽉 끌어안으며 힘주어 허리 짓을 했다.
쾅, 쾅, 쾅―! 점점 더 거세진 허리 짓에 책상이 덩달아 흔들렸다. 은재는 태영을 끌어안으며 쥐어지지도 않는 성기를 움켜쥐었다. 거친 흔들림에 단단한 몸을 붙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꼭 몸속에 태영이 들어온 것 같았다. 옷을 다 챙겨 입고 있는데도, 벗은 건 하나도 없는데도 배 속이 저려 왔다. 전해지는 무게와 압박감이 집요하게 은재를 짓눌렀다.
“읏.”
그와 동시에 태영이 사정했다. 며칠 전에 그렇게 진탕 섹스를 했는데도 많은 양의 정액이 쏟아지는 것을 보며 은재가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하.”
태영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조금 더 허리를 움직였다. 성기를 꺼내 놓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지 두툼한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숨을 골랐다. 빗장뼈 사이에 땀이 흘러내렸다.
몇 번이나 숨을 터뜨린 후에야 태영이 은재를 올려다보았다.
마주한 그 눈빛이 얼마나 뜨거운지. 은재는 태영이 키스를 하려 저에게 달려드는 것을 하마터면 그대로 용인할 뻔했다.
욕망하는 알파의 페로몬이 코앞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를 욕망하는 눈빛이, 저에게 발정하는 알파의 열기가, 치기 어린 부정한 정염이 살갗에 닿았다.
도저히 그 눈을 마주하기가 어려워 은재가 시선을 피했다. 그럼에도 태영은 한참이나 은근한 열이 오른 눈꼬리를, 눈물점을 마치 핥아 올리듯 직시하다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요.”
태영은 은재가 책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한 뒤 제 셔츠를 벗어 그것으로 은재의 손을 닦기 시작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닦아 주며 연신 숨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며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굳은살 하나 없는 손에 엉긴 제 정액에 음란한 상상을 더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옆에 욕실 있잖아.”
“욕실까지 못 가요.”
“…….”
“그사이에 이사님 내려가면 안 되니까.”
그렇다고 옷으로……. 은재는 다시 깨끗해진 제 손을 말아 쥐며 태영을 응시했다.
벗은 상체라 그런지 옷을 입었을 때보다 더한 색정이 더해졌다. 스물넷. 그 어린 나이에 이렇게나 외설적인 기운이 느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와 몸, 페로몬 모두가 자극적이었다.
“그렇게 보시면 저 또 서요.”
애초부터 가라앉지 않았는데. 태영은 은재의 손에 사정을 하고 난 후에도 성기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계속해서 서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마치 은재의 시선으로 인해 제가 발기한 것처럼, 어쩔 수 없는 반응인 것처럼 자연스레 책임을 떠넘기고 있었다.
“또 해도 돼요?”
태영은 은재의 손을 들어 올려 그 위에 제 얼굴을 묻었다. 두툼한 상체가 더 커지도록 숨을 마시며 설핏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야한 냄새 나네요. 이사님 손에서.”
그러곤 더 크게 숨을 마셨다. 은재가 손을 거듭 말아 쥐며 거부감을 표하자, 태영은 손목을 틀어쥐고 은재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 옷 말고 그냥 핥을걸 그랬네. 이럴 때 아니면 이사님 손가락 핥을 기회가 없는데.”
맞닿은 코끝에서 느껴지는 성급한 열기에 은재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태영은 덕분에 드러난 긴 속눈썹을 보며 코끝을 간지럽게 비볐다. 조심스레 혀를 빼내 은재의 입술을 핥으며 반응을 살폈다.
“이거 다음에 뭔지 읽어 보실래요.”
혀가 닿자 속눈썹이 더 파르르 떨리는 건 보였으나…….
태영은 입맞춤을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고 은재의 어깨에 기대어 한숨처럼 말했다. 목에 닿은 열기와 숨에 은재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견뎌 가며 천천히 손을 들어 페이지를 넘겼다.
“…….”
은재는 태영처럼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묵묵히 다갈색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옮겨가며 문단을 읽었다.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바라보던 태영은 그 눈동자를 손에 쥐고 싶다는 강렬한 기분을 느꼈다.
원래도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은, 자꾸만 주변의 시선을 당기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욱 그랬다. 알파가 아니라 베타에게도 시선을 받는 외모였다. 페로몬도 그와 어울리는 우아한 종류의 것이었고, 흰 나신도…….
“그날 봤구나.”
은재는 일기장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런 건가.”
일기장의 다음 내용은 그것이었다. 은재가 연인과 만나 밤을 보내고 새벽에 들어왔던 날.
“오늘 그 사람 만났어.”
“어쩐지 목소리에 그리움이 철철 묻어나더라니.”
“……네가 봤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절 끌어안고 있는 무거운 몸을 밀어내려 손을 들었던 은재는, 곧 그 몸에 땀이 나 더 형형해진 것을 알고는 주저했다. 태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은재의 양옆에 손을 내려놓고 눈을 맞추며 낮은 숨을 터뜨렸다.
“그때부터야?”
“이사님을 좋아하기 시작한 거요?”
“…….”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때 느꼈던 기분은 지금도 생생해요.”
태영은 은재의 손을 끌어다 제 가슴 위에 올려 두었다. 쿵, 쿵, 쿵. 단단한 뼈와 살을 지나 마치 손을 밀어낼 것처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감정의 이름을 굳이 묻지 않아도 표현하는 강한 박동이었다.
“질투가 나서 죽을 뻔했어요. 그래서 도저히 이사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때…… 그랬어요.”
손이 닿고 나자 점점 더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정말 태영의 전신에서 은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더욱이 열이 올랐고, 호흡이 계속해서 거칠어졌다. 진심을 뱉은 눈동자가 불분명하게 떨리며 간절하게 은재의 시선을 좇았다.
“처음엔 믿을 수 없었어요. 내가 그렇게나 존경하는 이사님이,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받고 갈망을 받는 이사님이 누군가의 아래에서 헐떡인다는 게…….”
“…….”
“히트 사이클을 겪는 오메가라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이사님은 완벽한 존재니까. 그런 것 따위는 겪지 않는 존재인 것 같았어요.”
은재는 제 입술 끝에서 태영의 이름이 맴도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막상 그 이름을 뱉을 수가 없었다.
처음 아이가 히트 사이클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을 순간, 그게 무엇인지 알고자 마음먹은 순간에는 모두 제가 있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그런 혼란을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제가 유일한 존재였다. 태영의 곁을 지키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그렇지만…….
“그런데 어느 순간 바뀌었어요. 이사님을 그저 지키고 싶던 마음이, 이사님에게 인정받고 싶은 존재가 되고 싶던 마음이 바뀌었어요. 나도…… 이사님하고 사랑을 나누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아직도 공중을 떠다니는 음란한 냄새와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 말을 꺼내 놓는 것이 퍽 고통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었다.
“저는.”
“…….”
“이사님을 지키고 싶어요.”
태영은 은재의 턱 끝을 붙잡아 절 보게 하며 말했다.
“이사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요.”
“…….”
“이사님 아이로서의 애정 말고, 연인으로서의 애정이요. 제가, 이사님 알파 하고 싶어요.”
전달되는 눈빛과 감정에 은재의 심장마저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진심을 다해 절실하게 고백하는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정말 이대로 넘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이 말을 하려고 돌아왔어요.”
은재는 입술을 씹으며 태영을 밀쳤다. 앉아 있던 책상에서 내려와 태영을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그럴까. 좋은 어른이 결국 되어 주지 못했는데. 의미 없는 보호자였는데.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보호자인 척…… 굴고 있는 것인데.
그 선까지 넘게 하면, 정말 저는 무용한 보호자인 셈인데.
“이사님.”
태영은 그런 은재의 손목을 잡으며 안타까운 음성을 토했다.
“너는, 태영아…… 내 아이야. 내가 널 가르쳤고, 교복을 입혀 학교에 보냈어.”
“…….”
“우리가 비록 가족도, 부모 자식도 아닌 모호한 관계지만 난 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영이 은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몸을 숙이며 은재의 등에 매달렸다.
“어차피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어요.”
“…….”
“이사님도 사실 아시잖아요. 제가 알파가 된 순간부터 틀렸어요.”
피해서만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무작정 나서려 했는데. 은재는 숨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절 따라 움직이는 짙은 시선을 보며 태영의 어깨를 당기고 허리를 안았다.
“나는 네가 그 사람처럼, 내가 오늘 다시 만났던 그 사람처럼 살았으면 좋겠어. 좋은 사람 만나서 가정을 가졌으면 좋겠어. 평범한 사람처럼.”
이게 은재의 진심이었다. 제가 데려온 아이인 이상 아무런 소리를 듣지 않고 살 순 없겠지만 그래도 평범하게 살았으면 했다. 능력을 인정받고, 노력의 보상을 받으며, 가정을 꾸리고, 태영을 닮은 잘생긴 아이를 낳아 살았으면 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서 태영에게 그 삶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우리가 아무런 사이가 아니어도, 그날의 섹스가 정말 실수로 끝이 나도 사람들은 우리를 그렇게 볼 거예요.”
은재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태영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더 그러면 안 돼.”
“…….”
“그건 나와 민 회장님을 함께 망치는 거야. 세상 사람들에게 민 회장님을 우습게 만드는 꼴이 될 거야.”
그러나 태영은 절 찌르는 말을 들으면서도 은재를 놓지 않았다. 달콤한 음성에 홀린 것처럼 신음을 토하며 은재의 품을 파고들어 안았다.
절 안아 주며 찌르는 사람. 순순히 품을 내어 주면서도 절 겨냥한 말을 뱉는 사람.
태영은 그 사랑스러운 사람을 더 깊게 끌어안았다. 이제는 절 밀치지도 못하고 멈칫거리기만 하는 그 다정한 사람을 조여 안았다.
결국 그 날카로운 말이 스스로를 향하는 것을 알기에, 대신 자신을 그 날카로운 말 앞에 들이밀었다.
“제가…… 이렇게 사랑하는데도요.”
“…….”
“제가 이사님을 이렇게 사랑하는데도 안 돼요?”
은재가 질끈 눈을 감았다.
어떻게 모진 길로 가라고 등 떠밀 수 있을까. 절대로 저는 태영에게 시련을 주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든 다른 사람의 배를 해내야 겨우 동등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그 길을 가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태영에게 좋은 것만을 주고 싶었다. 민 회장이 열심히 일궈 온 회사를 주고 싶었다.
제일 좋은 것을, 제가 민 회장에게 받았던 제일 좋은 것들을 모아 주고 싶었다.
항상 은재의 마음속엔 그 생각이 있었다. 태영이 펜싱에 관심을 보일 때도 말리지 않은 건 그 이유 때문이었다. 아이가 충분히 원하는 것을 하고, 그 후에 사업을 이어받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시기가 올 때까지 그저 시간을 벌어 줄 뿐이었다.
그게 은재가 생각하는 보호였다.
그렇기에 아이가 베타이기를 바랐다. 오메가인 아이는 저만큼이나 힘든 길을 갈 테니, 또 알파인 아이는 분명 저와 민 회장이 받았던 시선을 받을 테니.
비록 갑작스럽게 아이는 알파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 마음은 변함없었다. 오히려 알파가 되어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고, 버려야 할 것들이 분명했다. 곧은길이 있는데 그쪽으로 향하길 포기하고 험지로 향하는 것은 차마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어야 했다.
“호기심일 거야. 사랑이 아니라…… 다른 걸 거야.”
계속해서 은재는 자신을 찌르고, 또 태영을 찔렀다. 그렇게 해서라도 태영이 치기 어린 마음을 버릴 수 있다면 괜찮았다.
때로 보호자는 제 살을 잘라 내는 아픔을 견뎌 가며 아이를 책임져야 했으니까.
비도덕적인 행위를 허락하는 어른이 세상 어디에…….
“내가 네 첫 오메가였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내 몸에…….”
그런 게 아님은 너무 잘 알았다. 태영이 그렇게 성급하다거나, 정욕을 감정으로 오해하는 이가 아닌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형질에, 욕정에 지고 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절 감싸는 체온에서, 그 눈빛에서, 말 한 마디와 호흡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지만 억지로 말을 토해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라도 받아 줄 수 없는 감정이었다.
“넌 알파니까 자연스러운 욕망일 거야. 그럴 수 있어.”
제 아이라는 수식어가 이미 태영에게 짐일 텐데, 누구나 손가락질을 하는 그런 배덕한 관계는 허락할 수 없었다.
입술이 무거워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은재는 숨을 고르며 차선책을 선택했다.
“내 몸을 원하면……. 혹시 태영이 네가 그걸 원하는 거라면…….”
묵묵히 감정을 추스르며 은재의 몸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태영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은재는 배 속이 꽉 조여드는 기분을 느꼈으나 입술을 열었다. 태영의 등을 쓸어내리며, 단단한 허리를 붙잡으며 말했다.
“네가 정말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만날 때까지 하게 해 줄게.”
“…….”
“그럼 알게 될 거야.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게 될 거야.”
“…….”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알게 될 거야.”
태영은 약하게 숨을 터뜨리며 이마를 맞댔다. 코끝을 맞대고 누르며 뺨을 겹쳤다.
“어떤 보호자가 자기 아이한테 다리를 벌려 준다고 그래요.”
“…….”
“세상에 어떤 보호자가…… 섹스를 하게 해 준다고 해요. 이사님.”
벗은 그의 몸에서부터 끊임없이 열이 올라왔다. 은재는 그 육체를 조심스레 당겨 와 붙잡았다. 제 손이 닿아 있는 부근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부드럽게 매만지며 제가 손톱으로 긁었던 부분을 문질렀다. 땀 때문인지 더욱 선명해진 근육의 굴곡을 누르며 시선을 피했다.
“그게 정말 보호자의 사랑이에요?”
조금 허탈한 숨을 터뜨리며 태영이 물었다.
“이사님이야말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태영아.”
“그리고, 제가 거절할 줄 알고 말하신 것 같은데…… 저 거절 안 해요.”
힘을 빼고 은재를 안고 있던 태영이 확 끌어당겨 벽으로 밀쳤다. 순간 놀라 버둥거린 몸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기다렸다는 듯 은재의 인중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
낮은 숨소리가 입술로 흘러내리며 몸을 타고 전해졌다. 뺨에 뜨거운 손이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와닿았다. 떨림을 애써 감추며…… 곧 뺨을 감싸 쥐었다.
“그렇게 해요.”
“…….”
“제가 이사님 침대에 올라갈게요. 섹스 파트너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섹스 파트너……. 그 말이 아닌 건 아니지만 그렇게 축약되는 표현이 낯설었다. 제 아이와, 제 소년과 그런…….
“나중에 누가 생각을 바꾸게 되는지 보세요.”
태영이 느릿하게 입술을 눌렀다. 핥지도, 빨지도 않고 길게 입술을 누르고만 있었다.
“전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요. 민 회장님도, 그리고 이사님도.”
이윽고 입술을 맞댄 채 나직이 말했다. 은재는 입술 사이로 전해지는 숨결에 애써 신음을 죽였다. 자꾸만 배 속이 울렸다. 낮은 음성이 차곡차곡 배에 쌓이는 것 같았다.
페로몬 때문이겠지. 각인한 상대의 페로몬이니까, 그래서 그런 거겠지. 마음이 이렇게 짓뭉개지는 것도, 혹여나 상처를 입었을까 아득한 눈동자를 살피는 것도.
“결국 이사님이 제 사랑을 인정하게 될 거예요.”
태영은 제 눈을 들여다보는 눈을 마주하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선에서 조금의 흔들림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문득 복도 끝에 걸려있는 저와 민 회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종종 그 앞에서 자주 만나지 못하던 민 회장과 대화를 나누던 어린 태영.
은재는 그 태영의 혀가 기어코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절 들어 올리는 단단한 몸을 느끼며 다리로 그 허리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