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5화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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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님.”

강 비서는 회사로 배달된 소포 하나를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펜을 쥐고 있던 은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종 제 앞으로 전달되는 소포였다. 발신인란은 공란. 보내 온 곳 또한 알 수 없음.

그러나 발신인이 누구인지 그는 알 수 있었다.

한태영. 제가 보내 버린 소년.

어디 있는지 연락이나 좀 되면 좋으련만. 은재는 익숙하게 나이프를 들어 소포를 뜯었다. 그 안에 든 것은 어디서 구한 것인지 생소하고 오묘한 빛의 문진이었다. 여행길에 오른 걸까.

때문인지 소포에서는 바람 냄새가 나는 듯했다. 바다의 냄새도 나는 것 같고, 또 꽃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일부러 향을 묻히는 것인지, 아니면 지내는 곳에서 자연스레 묻어오는 냄새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은재는 그것으로나마 태영이 있는 곳을 추측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있는 곳에 있는 듯했다. 안전하게, 편안하게…….

처음 태영과 연락이 끊기고 일주일 정도 되었을 무렵, 은재는 급히 일을 정리해 영국으로 떠났다. 태영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을 모두 만나 행방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입을 맞춘 것처럼 태영이 공부를 하러 떠났다 했다. 오랫동안 품어온 고민의 해답을 찾으러 갔다고.

그런 대답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확실하게 알아야 했다. 영국 어느 도시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건강한 것인지, 혹시 안 좋은 일에 휘말려 몸을 피한 것은 아닌지.

심지어 그때부터 태영의 카드 사용 기록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 어디서 돈을 구해 쓰는 걸까.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한 아이가 무슨 돈을 어떻게 벌어 다니는 걸까.

위험한 일에 휘말린 게 아니라는 주변인들의 확신 어린 말을 듣고서도 은재는 한동안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다행히 주변인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인 듯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태영은 선하고 매사에 열심인 아이이니, 당연히 주변에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유학길에 오르게 되어 걱정이 많았는데…… 오히려 제 곁에 있을 때보다 조금 더 자유롭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지냈던 것 같아 은재는 조금이나마 안도했다. 다시 돌아오면 괜찮다 말해 주기 위해 그 근처에서 며칠 더 머무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태영은 졸업식에도, 그 후에 열린 펜싱 경기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분명 은재가 저를 애타게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매서운 결심을 한 것인지 편지도 한 통 보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은재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다음 달부터 이렇게 소포가 오기 시작했다. 때로는 저택으로, 또 때로는 회사로.

처음 태영에게 받은 것은 사진이었다.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과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 역시나 제 건강함과 안전을 증명해 주듯, 활기와 생기로 가득 차 아찔하게까지 느껴지는 사진.

걱정하는 걸 다 알면서. 얼마 전까지 영국에서 헤맸다는 것을 알면서……. 그렇기에 분명 활짝 웃고 있는 제 사진을 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표현이었다. 해답을 찾아 떠난 여행이 끝나면, 인생 공부가 끝나면 연락을 하겠다는 표현이 그 사진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로 은재는 태영을 찾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냥 아이를 기다렸다. 여전히 태영은 열심히 발신된 곳의 흔적을 지웠지만, 은재는 애써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기다리기로 했으니 기다려야했다.

건강하고 씩씩한 제 소년을 믿어야만 했다.

“아직도 안 오려나 보네.”

그렇게 곁이 빈 지 7년이 흘렀다. 열일곱이 될 무렵 떠난 아이는 이제 스물넷이 되어 있을 터였다. 은재도 어느덧 서른셋이 되어 있었고.

작았던 아이는 제 보호자의 나이만큼 자랐고, 보호자였으나 미숙하고 설익었던 남자는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매일매일 제가 제 소년에게 남긴 상처를 되짚어 볼 만큼.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매끄러운 문진을 만지던 은재는 코끝에 그것을 대고 숨을 마셨다. 소포에서 나는 것과 비슷한 냄새. 바람 냄새. 바다 냄새. 꽃 냄새.

그리고 미숙함과 성숙함의 냄새.

은재는 그 문진을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묘하게 안에서 뭉쳐드는 마음을 그렇게 놔두고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퇴근은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했다. 늘 태영에게 받은 선물을 잘 챙겨 두는 은재는 소포 봉투와 문진을 모두 챙겨 들고 창 밖에 서 있는 저택을 응시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익숙한 얼굴의 사용인들 몇몇이 나와 밖을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제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당황한 것은 강 비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는 급하게 나와 있던 정 실장에게 다가가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그사이 조수석에 동행하고 있던 윤 비서가 나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무슨 일입니까.”

은재는 재킷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저, 이사님.”

자초지종을 듣고서도 어리둥절해하던 강 비서는 다가오더니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게…… 도련님께서 오신 것 같습니다.”

“네?”

강 비서는 간결하게 말을 전했다. 그러나 은재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되물어야 했다.

“누가 왔다고요?”

“이사님.”

태영이? 태영이가 돌아왔다고? 은재는 놀라 다른 이가 저를 부르는 것도 알지 못하고 이마를 찌푸렸다. 그리고…….

“이사님.”

누군가의 손에 강하게 붙잡혀 홱 당겨졌다. 불쑥, 강건한 남성의 체향이 몸을 덮쳐 왔다.

“저 왔습니다.”

낯설고도 익숙한 남자가 코앞에 서 있었다.

깊어진 눈매와 도드라진 턱선, 근사하게 그려진 눈썹과 또렷한 콧대, 단단한 육체와 더불어 느껴지는 남성적인 향.

“많이 놀라셨어요?”

“……태영이?”

7년 전, 저택을 떠날 때와 너무나 다른 분위기였다. 그때도 알파가 되어 훌쩍 자란 모습으로 떠나기는 했지만…….

“네. 저 태영이에요.”

“…….”

“잘 지내셨어요?”

어, 어……. 은재는 저도 모르게 대답을 하긴 했으나, 도저히 제 기억 속 태영과 눈앞에 서 있는 태영이 연결되지 않았다. 소포로 처음 받은 사진을 익히 봤는데도 지금의 태영과는 이을 수 없었다.

……정말 태영이인가? 제 속을 끓이게 만들던 그 소년이 지금 이 남자인가? 매일 돌아오는 장면을 그렸던 그 주인공이 이 남자였던가……?

“이사님.”

태영은 그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천천히 얼굴에 드리워진 순간, 알파들 특유의 묘한 분위기가 빠르게 은재를 에워쌌다.

“……아, 미안.”

문득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태영의 손이 느껴졌다. 은재는 뒤늦게 주춤하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아니에요. 제가 너무 급했어요. 오랜만에 이사님 봬서 반가운 마음에.”

수줍음 많고 쑥스러움 많던 소년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키도 크고, 어깨도 떡 벌어져 눈에 띄는 체구가 눈앞을 장악하고 있었다.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계속 운동을 해서 그런지 그을린 색의 피부에 젊음과 활기가 감돌았다.

확연하게 낮아진 음성마저 기억과는 너무도 달랐다.

“…….”

“…….”

때마침 그 뒤로 드리워진 볕이 그 근사한 몸을 훑으며 떨어졌다.

은재는 낯섦이 담긴 얼굴로 거듭 태영의 얼굴을 훑었다. 찾아보고 싶었다. 아이가 어릴 적 수줍음을 담아 웃던 얼굴을…….

“……아.”

태영은 은재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눈을 접어 웃었다.

어릴 적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짙은 색의 눈동자에 미소가 어리고, 눈꼬리가 살짝 접혔다. 턱은 그때보다 훨씬 더 단단해졌지만 미소는 예전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몸은 커지고, 키도, 분위기도 그때와 다르지만 희미하게 어릴 적 얼굴이 보였다.

그제야 은재는 가벼운 숨을 토했다. 어느새 바짝 붙어 눈을 맞추고 있는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렇게 갑자기 돌아오는 게 어딨어.”

“더 오래 돌아다니면 이사님 속 썩으실 것 같아서요.”

“……그럼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지.”

실로 오랜만에 돌아온 아이였다. 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져 장성한 스물넷의 청년이 되었지만, 은재는 손을 뻗어 제 소년을 안아 주었다.

온몸으로 돌아온 제 소년을 느끼고 싶었다.

“오랜만이네.”

“네. 보고 싶었어요, 이사님.”

복잡한 마음이 계속 한구석에서 머리를 치켜들었지만 우선은 기쁜 마음이 앞섰다. 묻고 싶은 것도, 들을 말도 많았지만 우선 오래 만나지도, 만지지도 못했던 소년을 안아 체온을 나눠 주었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이제 태영은 은재보다 훨씬 더 위에 있었다. 180센티미터를 훨씬 웃돌다 못해 190센티미터에 가까운 키인 듯 했다. 그래서 태영은 허리를 숙여 안겨야 했다. 그런데도 불편한 내색 하나 없이 은재의 어깨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막상 어릴 때는 그렇게 어리광을 부리지 않더니……. 은재는 여러 가지 감상을 느끼며 아이의 등을 두드렸다.

이제는 손에 닿는 감각 또한 이전과 달랐다. 작고 말라 뼈가 느껴졌던 이전과 달리, 태영은 건강했고 튼튼했다. 빈틈없이 들어찬 근육의 형태가 느껴지고 있었다. 열기와 생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잠시 그 손길을 만끽하던 태영은 저도 손을 뻗어 은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예상보다 훨씬 더 크고 뜨거운 손에 은재는 내심 당황했으나, 아닌 척 태영을 깊게 껴안아 주었다.

별안간 재회를 하게 된 스물넷, 서른셋의 여름날이었다.

저택 안은 급하게 돌아온 태영을 맞이하기 위해 다소 번잡스러워 보였다. 평소처럼 조용히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물 아래 백조들의 발처럼 바삐 움직이는 기척이 모두 느껴졌다.

“제가 괜히 집 밥 먹고 싶다고 그랬나 봐요. 영국에서는 아무리 한식당을 찾아다녀도 영 이 맛이 안 나더라고요. 이해 좀 해 주세요.”

앞서 바쁘게 움직이던 정 실장이 괜찮다며 고개를 흔들어 주었다. 고요한 저택의 일원으로써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정 실장이지만, 지금만큼은 그도 반가움이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가 다짜고짜 캐리어 끌고 저택 안으로 들어왔거든요. 저기서부터 걸어왔어요.”

“이 길을?”

“네. 오랜만에 정원도 좀 보고요. 어딜 가도 우리 집 정원만큼 예쁜 데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오랜만에 한국 온 기분도 내고, 집에 온 기분도 내려고 걸어왔어요. 그리고 문 열자마자 배고프다고 말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민망해요.”

홀로 떨어져 다른 이들과 지낸 세월 때문인지, 태영은 확실히 외향적인 성격으로 바뀌어 있었다. 은재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이사님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들어가서 좀 쉬세요.”

“아니야. 할 이야기 많은데.”

“천천히 해도 돼요. 저 이제 어디 안 가요.”

“…….”

“저 영영 들어오려고요.”

“……그래.”

아니면, 원래 이런 성격인 걸 몰랐던 걸까. 은재는 어릴 때의 모습이 얼핏 남아 있는 얼굴을 보며 숨을 마셨다.

“제가 이따가 식사 준비 다 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씻고 쉬고 계세요.”

“태영아.”

“당분간 질리도록 저랑 놀아 주셔야 하니까 지금은 보내 드리는 거예요. 지금이 혼자 계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걸요.”

그래도 이제 막 들어온 아이를 두고 쉴 수가……. 무려 7년이나 보지 못했는데.

“금방 제가 모시러 올 테니까 어서 들어가세요. 나중에 괜히 그랬다고 후회하지 마시고요.”

끝까지 태영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느새 방 앞에 도착한 은재는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설픈 손길로 태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거 오랜만이네요.”

태영은 저를 향해 뻗어지는 손을 보다 느리게 머리를 숙였다. 이제는 태영이 머리를 숙여야만 머리를 만질 수 있었다.

그 변화에 태영도, 은재도 낯선 감상을 느꼈다. 묘한 침묵이 그 뒤를 따랐다.

천천히 손이 떨어졌다. 태영은 마치 포옹이라도 할 것처럼 다가왔다. 왜인지 멈칫하며 굳어진 은재는 태영이 열어 준 방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로 들어서다 뒤를 돌아 멀어지는 뒷모습을 길게 응시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들어갔다가…… 어쩐지 모를 기분에 다시 나와 문을 열었는데도 그 뒷모습은 여전히 저택 안에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며, 저택 안을 누비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태영이 돌아온 것이었다.

은재는 긴 숨을 터뜨리며 이제야 제 방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다. 그 모든 것을 뜨거운 물에 씻어 버리고 안락한 의자에 몸을 뉘였다.

다시 믿기지 않는 사실을 곱씹었다. 태영이 저택에 돌아왔다는 그 말을.

기억과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감출 수 없는 당황이 느껴지면서도 어쨌든 안전하게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가 들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왔는지 궁금하기도, 답답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런 것을 물어볼 새도 없이 태영에게 휘둘렸다. 뭐 하나 제대로 묻지도 못하고 재회의 순간을 보내 버렸다. 그렇게 엉성하게 재회 인사를 끝내다니.

그래도…… 오래 고민했던 것만큼 불편하지는 않았다. 너무나 잘 자란 모습을 보는 것이, 제 부재에도 잘 자란 소년을 보는 것이 제 깊은 마음속 어딘가를 계속 쿡쿡 찌르는 것 같았지만, 아이가 건강히 왔다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안도가 훨씬 컸다.

천천히 물어보면 되니까. 도대체 무슨 일을 해 왔던 건지. 몸은 다 괜찮은지.

은재는 가방 속에 넣어 둔 문진을 꺼내 깨끗한 천으로 한번 주변을 닦았다. 지문이 남지 않도록 잘 닦아 볕이 들지 않는 장식장 깊은 곳에 천과 함께 넣어 두었다. 그 주변에 놓여 있는 것들 또한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닦았다.

제일 처음 받은 것을 닦을 때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재는 장식장 문을 닫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사님.”

태영은 작게 문을 열고는 눈자위만 살짝 방 안쪽으로 들여놓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태영의 짙은 눈동자에 호기심이 들어차는 것을 은재는 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태영에게도 이 공간은 낯선 공간이었다. 원래 저택이란 곳이 그랬다. 자신이 주로 사용하는 방이 아니라면 익숙하지 않았다. 특히나 침실은 내밀한 공간이라 그 누구도 쉽게 들여놓지 않았다.

그래도 2층을 사용할 때는 종종 태영과 함께 방에서 차를 마시기도 했는데, 민 회장의 일 이후로 급하게 1층으로 옮겨 온 후로는 그런 경험도 거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식사 준비 다 됐다고 하시는데요.”

“응. 그래.”

태영은 그사이에 은재의 방을 훑었다.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빠르게 훑으며 은근하게 묻어나는 분위기를 삼켜 배 속에 심어 두었다. 그런 다음 모른 척 웃으면서 조금 더 문을 밀었다.

“들어와도 되는데.”

“정말요?”

“응.”

편한 차림의 은재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문을 당겨 열었다. 몸을 숙여 문에 달라붙어 있던 태영은 기다렸다는 듯 안을 살폈다.

“별거 없어.”

어찌나 그 시선이 진하고 집요한지, 은재는 조금 민망한 기분을 느끼며 문을 닫았다. 짙은 눈동자가 꼭 저를 샅샅이 훑는 것 같았다.

“너무 조금 보여 주시는 거 아니에요?”

“나중에 와. 같이 차 마시자.”

하는 수 없다는 듯 밀려난 태영은 다시 씨익 웃으며 은재의 옆에 섰다. 그러곤 손을 내밀었다.

“제가 다이닝 룸까지 에스코트해 드릴게요.”

“무슨.”

“오랜만이잖아요.”

이런 매너는 가르친 적 없지만…… 아마 처음 저택에 들어왔을 때 배웠을 게 뻔했다. 당장 필요한 지식이 아니더라도 그때 모든 것의 기틀을 잡았을 테니까.

은재는 작고 때가 탄 노트를 들고 열심히 공부하던 태영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 작았던 아이가 이렇게나 잘 크다니.

“제가 모실게요.”

무엇이든 열심인 아이였다. 처음 정 실장에게 배울 때도, 가정 교사와 공부할 때도, 학교생활과 또 운동을 할 때도.

아, 운동…….

“이사님?”

은재는 제가 태영에게 손을 내어준 것도 잊고 뒤이어 떠오르는 생각에 짧게 숨을 마셨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태영은 제 손 위에 올라와 있는 손을 꽉 쥐며 물었다.

“아, 응. 아냐.”

“불편하세요?”

“아니야.”

“제가 이런 게 처음이라 그런가 보네요.”

이제 막 태영을 봐서 뭘 물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 정리가 미처 되지 않았다. 그런데 태영은 그런 생각을 아는 것처럼 더 이상 그 혼란에 대해 묻지 않고 있었다. 대신 제 에스코트의 미숙함으로 자연스레 화두를 옮겼다.

은근히 제 손을 감싸오는 체온에 은재가 절 붙잡은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

말과 달리 태영은 꽤 능숙해 보였다. 커다란 손으로 은재의 손을 잘 감싸 온다. 확연히 커진 덩치로 상대를 잘 지지하고 있었다.

“처음이야?”

“네.”

“왜 그동안은 안 하고.”

“제가 누구를 에스코트하겠어요.”

굳이. 희미하게 그 말이 붙는 것 같았으나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쭉 뻗은 어깨와 다리 같은 곳을 훑어보기만 했다.

“키가…… 많이 컸다.”

분명 배운 대로 잘하고 있는 태영이었지만, 맞닿아 있는 부근에서 열이 솟아오르는 듯했다. 오랜만에 다른 이와 접촉을 해 보는 것은 은재도 마찬가지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빚어지는 열기에 은재가 손을 내려다보았다.

“영국 가서 더 크더라고요.”

그 맞닿은 손을 태영이 지그시 붙잡아 왔다. 손등을 부드럽게 붙잡아 쓰다듬으며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한 번쯤 이렇게 이사님을 내려다보고 싶었는데.”

어딘가 묘한 분위기가 어린 말투였다. 은재는 불쑥 느껴지는 태영의 큰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뒤이어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

“…….” 

둘은 식사를 할 다이닝 룸에 도착했지만, 그렇게 얼마간 서로를 마주했다.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은재였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깊어진 눈동자가 태영의 것임엔 변함없는데도 저도 모르게 시선이 비껴나갔다.

살짝 몸을 물린 은재는 내어 줬던 손을 떼어 내 말아 쥐며 덤덤한 척 자리로 향했다.

“도와드릴게요.”

태영은 잠시 벌어졌던 거리를 좁히듯 성큼 다가와 은재의 의자를 빼 주었다.

“고마워.”

그러곤 그 맞은편이 제자리라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마주 앉으며 미소를 내보였다.

식탁 위 분위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처음 태영은 전전긍긍하며 식사를 했다. 익숙해진 뒤에는 그렇게 눈치를 살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항상 은재를 살폈다. 좋은 옷을 입혀 놓아도 아이의 작은 키와 체구 때문에 귀여운 분위기를 벗을 수가 없었는데.

“갑자기 온 건데도 먹을 게 많네요.”

“급하게 준비했습니다. 내일은 드시고 싶은 걸 말씀 주시면 준비하겠습니다.”

“지금도 엄청난 걸요. 돌아온 탕자가 받기에는 황홀해요.”

식사를 도우러 온 정 실장에게 태영은 넉살을 떨며 말했다.

“정말 여기서 이렇게 식사하고 싶었는데. 잘 먹겠습니다.”

“부족하면 바로 말씀 주세요.”

“안 그럴 것 같지만, 네. 그럴게요.”

원래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성격이 변한다고는 하지만…… 은재는 퍽 서글서글해진 태영의 모습을 보며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갑자기 왔는데도 반겨 주셔서 감사해요.”

태영은 익숙한 듯 와인을 따고, 잔에 와인을 따랐다. 붉은 와인이 두 개의 잔에 나란히 담겼다.

“저 스무 살 넘은 거 아시죠. 벌써 몇 년 전에요.”

잔을 들어 올리며 태영이 넌지시 웃었다. 천천히 제 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쳐 준 은재는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당겼다.

“벌써 그렇게 됐네.”

자연스레 식사가 시작됐다. 은재는 처음 가르쳐 준 방식 그대로 식사를 하는 태영을 보며 괜스레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오면서 와인 몇 개 사 왔어요.”

“와인?”

“네. 이사님 왠지 와인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마디가 도드라진 손으로 입가를 닦아 낸 태영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은재와 눈을 맞췄다.

“와인 좋아하세요? 와인 드시는 거 별로 못 보기는 했는데.”

“응. 좋아해.”

“저도 좋아해요.”

“…….”

“일이 있어서 포도 농장 근처에 갔다가 이사님 생각나서 몇 병 샀거든요. 안 좋아하시면 제가 혼자 마시려고 했는데 같이 마실 수 있겠어요.”

조명 아래에서 보니 태영의 얼굴에선 더욱 남성다운 향이 풍겼다. 음성과 얼굴, 몸짓이 모두 매끄럽고 근사했다. 걷어붙인 셔츠 소매 사이로 드러난 단단한 살결이며, 낮은 음성과 외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조화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소년의 성장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오늘 아침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회장님 뵙고 바로 저택으로 왔어요.”

“피곤하겠네. 시차 적응도 아직 안 됐을 텐데.”

“그래도 생각보다 심하지는 않아요. 워낙 이 장면을 여러 번 상상했어서 그런지.”

“…….”

“소포는 받으셨어요? 오늘 도착한다고 했는데.”

이전에는 식사를 하며 말도 꺼내지 못하던 아이였다. 빨라지려는 속도를 조절해 주기 위해 은재가 가끔 말을 붙여 주었고, 그럴 때면 태영은 고기를 썰던 것도 멈추고 은재만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꺼내는 일은 상상 한 적도 없었다.

“받았어.”

“그건 처음 간 여행에서 산 거였어요. 보자마자 이사님이 떠오르더라고요. 근데 그때 생각했어요. 제일 마지막에 그걸 보내기로.”

심지어 은재의 접시 위에 샐러드를 담아 주기까지 했다. 은재는 태영의 배려를 눈여겨 살피며 절 향한 짙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집에 가기 직전에 보내야지…… 하고요.”

은재는 태영과 함께 하고 있는 이 시간이 좋고, 기쁘면서도 묘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는 시간이 지나면 성장을 하고, 어른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기묘한 간극이 더 크게 와닿는 걸까.

맹목적이던 아이를 그렇게 떼어 놓았던 자신을 향한 자책으로 그 간극이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갖게 될 분위기를 지켜보지 못한 죄책감으로 이질감을 느끼는 걸까.

이러한 변화는 당연한 일인 텐데…… 앞서 무작정 반가웠던 마음이 왜인지 다양한 형태로 번지고 있었다.

“정 실장님.”

“네. 도련님.”

“커피 진하게 내린 거 두 잔 부탁드립니다.”

“네.”

처음부터 은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태영은 은재의 손이 완전히 멈추자 저도 식기를 내려놓았다. 근처에 서 있던 정 실장에게 커피를 부탁하곤 저를 훑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항상 식사 끝나면 커피 드시잖아요. 혹시 그사이 변하신 건 아니죠?”

아무런 말은 없었으나 은재는 잔잔히 고개를 저었다. 7년이 지났어도 변함없이 화사하고 우아한 그 얼굴 위로 드리워지는 표정을 태영은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시간이 좀 필요했어요. 생각할 것도 있었고, 정리할 것도 있었고요.”

커피는 금세 상 위에 놓였다. 풀벌레 소리가 정원에 가득 찬 여름임에도 뜨거운 커피를 손에 쥔 은재가 묵묵히 태영의 말을 목도했다.

“이제는, 다 했니?”

“네. 그런 것 같아요.”

“…….”

“그래서 다시 돌아오기로 결정한 거고요.”

“…….”

“이제 여기가 제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걸 알아요.”

가만가만 절 바라보는 눈동자를 보며 은재가 커피를 머금었다.

“펜싱은. 그렇게 그만둔 거고.”

태영도 은재를 마주하며 천천히…… 커피를 머금었다.

태영은 불거진 울대를 움직여 커피를 마신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경기 보러 오셨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어요. 미리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급하게 떠나기로 결심한 거라 정신이 없었어요. 죄송해요.”

“무슨 일 있던 거야?”

“…….”

“위험한 일 같은 거, 했어?”

은재는 복잡한 감정을 차분히 정리하며 물었다. 그 흔한 말썽 한 번 없이 조용히 사춘기를 보냈던 태영이었다. 급하게 영국에 갔을 때도 잘 적응했고, 교우 관계도 괜찮았다.

위험한 일에 휩쓸릴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런 성격은 분명 아니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태영은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어요. 이사님이 여기 계시는 거 아는데.”

“…….”

“전 계속 이사님 생각만 했거든요. 이사님만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이사님 곁에 돌아올 그 날만 생각하면서요.”

어쩐지 오묘하게 들리는 말에 커피잔을 쥐고 있던 은재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별거 아닌 말일 텐데 자꾸만 생각이 이상하게 흘렀다. 맹목적으로 저를 바라보던 아이인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성인이 된 모습을 보니 애써 떠올리는 과거의 모습이 도리어 어색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은재는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자. 이제 여기서 지낼 거라고 했지.”

“네. 저 여기서 지내도 되죠?”

“당연하지. 아니면 어디를 가려고.”

“그러게요. 갈 곳도 없는데.”

가벼운 농담을 뱉은 태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재의 쪽으로 다가와 또다시 손을 내밀며 에스코트를 하겠다 의지를 표했다. 은재는 숨을 삼키며 그 장단에 맞춰 주었다.

조금…… 짓궂은 구석이 생긴 아이.

태영은 다이닝 룸으로 올 때보다 조금 더 거리를 붙여 가까이 섰다. 팔을 접어 은재가 팔짱을 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은재는 태영의 팔을 붙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느릿하고 적막한 밤공기가 이들과 함께 움직였다.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해요.”

“…….”

“걱정 많이 하셨죠.”

1층 복도 앞에 서서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여름밤이라 조명을 몇 개 켜 두지 않아도 공중을 떠도는 공기는 맑고 밝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 공기를 외면하며, 가늘게 우는 정원의 소리를 외면하며 서로만을 응시했다.

“많이 놀랐어.”

“…….”

“펜싱도…… 그렇게 그만둘 줄 몰랐고.”

“죄송해요.”

“괜히 그만둔 건 아니지?”

“…….”

“네가 하고 싶었는데 다른 이유 때문에 못한 거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한창 깊어 가는 여름밤을 뒤로한 채 서 있던 태영이 염려가 어린 은재의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보아도 듬직한 그 뒤로 익숙한 여름밤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익숙한 저택에 익숙하게 서 있는 남자.

“그런 거 아니에요.”

“…….”

“더 중요한 일이 생겨서요.”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겠다는 말을 끝으로 태영은 몸을 숙였다. 잡고 있는 은재의 손등에 느릿하게 입술을 묻었다.

은재는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서도 전해지는 온기에 손끝을 말아 쥐었다. 손바닥 아래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손의 단단함이 문득 느껴졌다.

“내일 봬요.”

은재는 어색하게 손을 내리며 복잡한 표정을 갈무리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차오르다 이내 엉킨 듯 머리가 무거워졌다.

계속, 태영을 다시 본 순간부터 묻고 싶었던 그 물음은 뱉지 못했다. 끝내 입술 끝에 머무르기만 하던 물음은 속으로 삼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묻지 않아도 아이는 건강해 보이기는 했으니까…….

어떻게 방에 돌아왔는지도 모르게 돌아왔다. 스스로 무슨 생각인지, 무슨 기분을 느끼는지 정의하지도 못한 채, 홀린 듯 움직여 침대에 눕고 수마에 빠져들었다. 무언가 강제로 의식을 끈 것처럼 기억이 잘려 나갔다.

눈을 뜨니 따가운 햇살이 커튼 사이로 비치고 있었다.

* * *

―뭐라고?

“아이가 왔다고. 태영이.”

―그 꼬맹이?

“응.”

꼬맹이……. 어릴 적 세헌이 태영을 보며 부르던 말이었다. 키가 작아 꼬맹이인 게 아니라, 어리고 귀여워 꼬맹이였던 아이.

“이젠 꼬맹이라고도 못 부르겠더라.”

―많이 컸어?

“여러모로. 키도 많이 크고 다 컸어. 잘생겼고, 몸도 좋고, 인기 많게 생겼어. 건강해 보이고.”

―제법 보호자 같은 소리도 하고.

세헌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이제 한시름 놓겠어. 매번 틈날 때마다 영국으로 날아갔잖아. 꼬맹이는 보지도 못하면서.

“걱정되니까 그렇지.”

―내가 걱정 안 해도 된댔잖아. 그 꼬맹이 보통 꼬맹이가 아니라고.

“씩씩하고 영리하긴 했지.”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 걸 알 텐데.

세헌이 말꼬리를 늘이며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재는 통화 중인 것을 알면서도 어깨를 으쓱여 보았다.

―근데 왜 그랬대?

“생각할 게 있었대. 정리할 것도 있고.”

―거창하네. 그것치고 방황이 길다.

“……아냐. 그것치곤 짧지.”

―…….

“그래도 다행이야. 크게 엇나가지 않고 다시 돌아왔으니까.”

―그런데 너 목소리는 왜 그러는데.

통화를 하며 서류 파일 위를 툭툭 두드리고 있던 은재가 작게 숨을 삼켰다.

왠지 모를 기분이 뒷덜미를 여전히 감싸고 있었다. 어제 태영을 다시 만난 그 순간부터 줄곧. 그러나 도대체 그 기분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 낼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별로 안 기쁜가 보네.

“기뻐.”

―근데.

“근데…… 좀 어색하네.”

슬슬 일에 복귀를 해야 했다. 곧 시작된 문화 재단 관련 신사업 관련 회의를 마치고 잠시 짬이 나 세헌에게 전화를 건 참이었다. 업무 시간인데 더 이상 개인적인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여러 가지 걱정도 많이 되고.

그렇지만 왜인지 전화를 끊기가 어려웠다. 은재가 시간을 확인하며 약한 숨을 터뜨렸다.

―낯가려?

“……그런가.”

―너 은근히 낯 엄청 가리잖아. 그래서 그러겠지. 게다가 엄청 커졌다며.

“…….”

―난 상상도 안 간다, 야.

은재는 저도 모르게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음소리를 뱉었다.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태영은 피로가 묻은 얼굴로 이른 새벽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 제가 했던 묘한 말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커다란 몸을 숙여 은재를 끌어안으며 인사했다.

태영이는 평소처럼 행동했는데 저만 괜히 어색한 분위기를 의식한 걸까. 가까워지는 커다란 몸이 역시 당황스러웠으나, 부은 눈꺼풀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그 눈두덩이를 만져 주었다.

―조심만 해.

“…….”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만.

“……그래.”

―들키지 말고. 도움 필요하면 연락해, 언제든지 갈 테니까.

“…….”

―이제 진짜 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 너한텐 영향 있을 거야. 약도 잊지 말고.

손안에서 뜨끈뜨끈하고 부드럽던 눈두덩이와 입구 앞에 서서 빠져나가는 차를 지켜보던 그 큰 인영이 지금도 선명했다.

그래, 그냥 기분 탓이었겠지. 시간이 지나면 어색함도 가시고, 더 많은 이야기도 할 수 있겠지. 무려 7년 만에 만난 거니까.

“끊어.”

―나중에 날 잡아서 연락해. 나도 꼬맹이 본 지 한참 됐다.

“그래. 알았어. 이제 일해야 돼.”

―어. 고생해라.

가볍게 어깨를 문지르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래도 페로몬 문제는 물어봤어야 했나. 은재는 어젯밤에 보았던 태영과 오늘 새벽 보았던 태영을 번갈아 떠올리며 다시 서류에 시선을 옮겼다.

그가 서류에서 빠져나온 건 대략 5시 30분이 조금 넘은 때였다.

“…….”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작게 울었다. 낯선 번호가 화면 위에 떠 있었다. 은재는 주저 없이 시선을 돌렸다. 혼자 울다 끊어지도록 무음으로 바꾸어 둔 채 서류를 마저 읽었다.

전화는 생각보다 오래 울다 잠잠해졌다. 그 뒤로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다.

은재는 펜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핸드폰을 쥐었다. 보통 모르는 번호의 연락은 받지 않았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를 받으면 기자이거나, 기자가 아니어도 난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사님. 저 한태영이에요.]

하지만 의미 없이 열어 본 메시지에는 예상과 전혀 다른 내용이 들어 있었다.

상황 파악이 되기도 전에 다시 그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은재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

―이사님?

혹시나 싶어 받고도 말을 삼키자, 낮은 음성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태영이었다.

―저예요. 한태영.

태영은 한 번 더 제 이름을 말했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은 낯선 음성이 매끄럽게 전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태영이와 이 낮은 음성은 좀처럼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이거 제 번호예요. 이전에 쓰던 번호로 개통하고 싶었는데, 그건 누가 쓰는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랬구나.”

―아직도 일 많이 남으셨어요?

“조금.”

―저 지금 이사님 회사 앞인데.

“……응?”

이사님이랑 같이 가려고 왔어요. 태영은 그 말에 쐐기를 박듯 다시 말했다.

은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창가로 다가갔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 창가로 다가가 그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보이세요?

거기에는 검은색 차와 그 차에 기대선 듯한 길쭉한 인영이 보였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아도 분명하게 보이는 인영.

―같이 들어가요, 이사님.

위를 올려다보며 잠깐 손을 흔들던 태영은 희미한 웃음기가 담긴 말투로 말했다.

―아니면 기다릴게요. 저 시간 많거든요.

은재도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6시가 되려면 조금 남아 있었지만…….

세헌과의 통화를 의식적으로 털어 버린 은재는 먼 인영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저녁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밖에서 먹고 들어가도 되고.”

―이사님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난 그냥.”

―그럼 집에 가요.

“그래도 되겠어?”

차에 기대어 있던 태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운전석을 향해 걸어갔다. 몇 걸음 안 되는 그 거리를 느리게 걸어간 태영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다시금 위를 올려다보았다.

먼 거리라 눈이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은재는 생각했다.

―전 이사님하고 단둘이 있는 곳이 제일 좋아요.

색이 짙고 어두운 눈동자가 분명하게 절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릴게요. 천천히 내려오세요.

전화상으로 듣는 태영의 음성은 한층 더 낮았다. 은재는 전화를 끊고 나서도 잠시간 태영을 내려다보았다.

“이사님.”

1층으로 내려가니 태영이 보였다. 저와 잘 어울리는 덩치 큰 SUV를 뒤에 둔 채였다. 강 비서는 저에게 묵례를 건네는 태영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제가 너무 어리광 부린 건 아니죠?”

“글쎄.”

“아니라고 해 주셔야 할 타이밍 같은데.”

태영은 강 비서가 들고 있는 은재의 짐을 받아 뒷좌석에 실었다.

“강 비서님은 이사님 차 타고 오시죠?”

“네.”

“네. 저희도 곧장 집으로 갈 겁니다.”

태영은 간단한 셔츠를 입고 소매를 두어 번 걷어 올린 차림이었다. 그 사이로 드러나는 핏줄과 셔츠 위로 도드라진 가슴팍에 떨어지는 볕이 선명했다.

그런 태영에게 주변의 은근한 시선이 몰리는 것도 보였다. 차체에 기대어 서 있을 때부터 주변의 시선이 분명히 한 사람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타세요, 이사님.”

정작 당사자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지, 아니면 그만큼 익숙한 건지 무심한 얼굴이었다. 조수석 쪽으로 다가와 문을 열어 주더니 은재의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손까지 대 주었다.

“아, 뒷자리로 모셔야 하나.”

그러면서 조금도 주저 없이 몸을 넣어 벨트까지 매 주었다.

“근데 여기 앉아 주세요. 이사님하고 가까이 앉고 싶어서요.”

“……벨트는 내가 할게.”

“이미 다 했어요.”

익숙한 듯 벨트를 매 주고 가까운 곳에서 은재를 내려다본 태영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신기하네요. 이사님이 내 눈앞에 있다니.”

그 상태로 태영은 잠시간 은재의 얼굴을 훑었다. 가까운 거리였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그 얼마 안 되는 거리에서 짙은 색 눈동자가 은재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뒤로 몸을 물릴 수도 없어 은재는 가만히 그런 태영을 응시했다. 약간의 열기를 띠고 절 세세하게 만져 보는 눈동자를 따라 움직였다.

“…….”

“…….”

눈에 띄게 관찰되고 있었다. 생김새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움직일 수 없는 곳에서 차마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숨소리마저 죽인 채 절 훑는 남자.

태영의 이름을 부를까 하다 시트 쪽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태연한 척 혀를 씹으며 눈꺼풀을 밀어 올려 태영을 마주 응시했다.

묘하게 비껴가던 시선이 천천히 마주쳤다.

그 순간 태영이 몸을 빼고 멀어졌다. 눈을 맞춘 적이 없다는 듯 차 문을 닫으며 사라졌다.

금세 옆자리가 덜컹하며 채워졌다. 은재는 태영이 지나간 자리에 미묘하게 남은 담배 냄새를 이제야 느끼곤 그를 돌아보았다.

“저 운전 잘하니까 걱정 마세요.”

태영은 은재와 눈을 맞추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높고 큰 차를 부드럽게 빼내 도로 위에 오른다. 운전도 지적할 데 없이 매끄럽게 이어 갔다.

그러나……. 은재는 제 셔츠 맨 위 단추를 풀며 시트에 머리를 기대었다. 뒤늦게 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차 안이 좁은 것 같았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괜히 그렇게 느껴졌다. 문득 밀폐된 공간에 둘만이 있다는 게 살갗에 와닿았다.

기분 탓…….

“그렇네.”

한참 차가 도로를 달린 후에야 은재가 나직이 대답했다. 태영은 피식 웃으며 손 하나를 뻗어 은재의 귓바퀴를 건드렸다. 예고도 없이 이어진 접촉에 소름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머리가 내려와서요.”

“…….”

“이사님은 머리 올리고 다니시는 게 정말 잘 어울려요. 물론 전 내린 것도 좋아하지만요.”

그러면서도 태영의 손길은 계속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다시금 느리게 다가와 이유 없이 은재의 귓불을 툭, 건드리고 지나가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좁게 느껴졌던 차 안이 더욱더 비좁게 느껴졌다. 원래 체온이 높은 편인지, 태영에게서 느껴지는 열기가 부쩍 가까워졌다. 은근하던 담배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은재는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을 외면하며 차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요하고 적막한 차 안과 달리 밖은 여름날의 활기로 가득했다. 화사한 볕이 내리쬐며 온갖 곳에서 생기 어린 소리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덕분에 차 안의 적막이 더 살갗 깊숙한 곳까지 치민 듯했다.

“아, 이런.”

차라리 다른 이야기를 꺼낼까. 영국에서 지내며 성격이 많이 바뀐 걸까. 별거 아닌 접촉인데 제가 어설프게 받아들이는 걸까.

그런 상념에 빠질 즈음, 태영이 나직한 소리를 뱉었다. 은재가 곧장 고개를 돌렸다.

“흘렸어?”

“죄송해요. 좀 흘렸어요.”

“뭐가 죄송해. 옷은 안 젖었어?”

“조금요.”

“휴지 있지?”

물을 마시려다 엎은 모양이었다. 허벅지와 센터페시아, 그리고 홀더 부분에 약간의 물기가 고여 있었다. 은재는 휴지를 찾아 빠르게 물기를 닦아 냈다.

“놔두세요, 제가 할게요.”

“괜찮아.”

차량 내부에 튄 물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태영의 손목과 허벅지에 많은 양이 묻어 있었다. 은재는 태영의 단단한 허벅지를 닦으며 티슈를 내밀었다.

그 결에 두 사람의 손이 스쳤다. 물기가 남은 커다란 손과 티슈를 들고 있는 손이, 아주 잠깐 서로의 살결을 스치고 지나갔다.

은재는 그 찰나로 느껴진 묘한 기분에 당황하여 티슈를 떨어뜨렸다. 딱히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도 손이 스치자 움찔하게 되었다.

동시에 끝이 날카롭고 따끔한 시선이 은재에게 닿았다.

“…….”

마침 바뀐 신호에 태영은 더욱 길게 눈을 맞추고 핏줄이 솟은 팔을 드러내며 젖은 부분을 느리게 닦아 냈다.

“이사님한테 잘 보이려다가 별 실수를 다 하네요.”

“……됐어. 무슨.”

다시 신호가 바뀌었다. 아직도 물기를 다 닦지 못한 태영은 가볍게 물을 한번 털어 낸 뒤 핸들을 붙잡았다. 태영의 손을 닦아 주려 손을 뻗었던 은재는 그저 티슈를 손 안에서 구겨 버렸다.

잠시 닿았던 허벅지의 단단한 감촉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었다. 태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물기가 남은 손으로 핸들을 붙잡고 있었고, 드러난 소매 뒤로 젖은 팔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묵묵히 핸들을 잡고 있던 태영은 다시 신호가 걸린 틈에야 제 허벅지를 닦아 냈다. 바지와 티슈가 빚어내는 소리가 괜스레 이상했다. 천 위를 문지르는 소리와 낮은 숨을 터뜨리는 태영의 숨소리가 공중을 가르며 내려앉았다.

……이런 것이 정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어색함에서 비롯된 감각일까.

알파……. 새삼스럽게 태영이 지닌 형질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희미한 곳에서 붉은빛이 점멸하는 기분이었다.

저택까지 그 오묘한 침묵과 함께 달렸다. 태영은 그 침묵이 별로 거슬리지 않는지 태연하게 저택 안에 차를 세우고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먼저 들어가세요. 짐이 있어서요.”

짐? 은재가 뒤를 돌아 뒷좌석을 살폈다.

“그림을 그려 볼까 해요.”

뒷자리에 뭐가 있는지 몰랐지만…… 이제 보니 뒷좌석에 무언가 가득 실려 있는 게 보였다.

“그림?”

“네. 이사님 그림 잘 그리신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그림을 그려 보고 싶어져서요.”

작정한 것인지 실려 있는 것이 꽤 많았다. 작은 연필과 지우개에서부터 다양한 종류의 물감과 팔레트, 이젤, 나이프와 그 외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것들이 박스에 담겨 나왔다.

“이사님 것도 같이 샀는데.”

“……내 거?”

“저 그림 가르쳐 주시려면 이사님도 필요하시잖아요.”

태영의 손에 들린 박스들에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그림을 놓은 지 꽤 오래된 은재였다. 한때는 저택에 그림을 그리는 방도 있었는데, 그림을 접게 되면서부터는 그 방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그때 사용했던 것들도 다시 꺼내 보지 않기 위해 모두 불태워 버렸다.

“나 그림 못 그려, 이제.”

“그래도 저보다 나으시잖아요.”

“…….”

“어차피 전문가 될 거 아닌데요. 천천히 알려 주세요.”

정 실장을 비롯한 다른 사용인들이 나와 짐을 나눠 들려 했지만, 태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제가 옮길게요. 그렇게 말하곤 식사를 차려 달라 부탁했다.

“저 2층에 방 하나 써도 되죠? 그림 그리는 방으로 쓰려고요.”

“그래. 그렇게 해. 그런데…….”

여러 개의 박스를 든 채 걸어 나가던 태영이 뒤를 돌아 은재를 응시했다.

“그림은 못 가르쳐 줘. 그림 못 그린다는 거 진심이야.”

태영은 대답 대신 옅게 미소 지었다. 그 뒤로 바람이 흐릿하게 불어왔다. 아직 남은 정원의 이파리들이 서로의 몸을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바람에 흩날렸다.

“그래도요.”

“…….”

“그래도 해 주세요.”

“…….”

“저는 아직도 이사님이라면 다 닮고 싶거든요.”

은재는 그렇게 그 자리에 서서 가을바람을 맞으며 오늘 아침 보았던 태영의 부은 눈두덩이를 떠올렸다. 어릴 때의 얼굴이 남아 있는 그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이제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의 이름 앞에 붙는 알파라는 그 글자를 지울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싸늘함이 점점 배 속에 자리를 잡았다.

* * *

태영은 그날 이후 계속 은재의 퇴근에 동참했다.

늦은 시간이든, 정시에 퇴근이든 항상 그 자리에 검은 SUV를 끌고 와 서 있었다. 때때로 블라인드 사이로 내려다보면 차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태영을 볼 수 있었다. 혹은 커피를 마시거나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

가끔은 차 안에서 나오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태영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건물 꼭대기 은재의 방에서도 잘 느껴졌다. 왠지 모를 묵직함이 뒷덜미를 잡아채는 기분이었다.

태영의 차에 올라서도 그 기분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더욱 선명해진 낯섦에 대화를 하면서도 은밀한 거리감 따위를 느꼈다.

그렇게 일주일이 넘게 지냈는데도 그랬다.

태영이 돌아온 순간 느꼈던 반가움과 그리움은…… 어느새 다른 감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왠지 모를 본능적인 경계심 같은 것이 자꾸만 피어올랐다.

“도련님께서 계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안 되겠는데. 먼저 들어가라고 해 주세요.”

은재는 손에 들린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싱가포르에 백화점을 짓기 위한 계획안이 새로 올라왔다. 한동안 은재는 사업을 확장하기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민 회장의 병세 악화로 갑작스럽게 이사직을 맡게 되었고, 공부를 오래 이어 가지 못하고 곧장 실무에 투입되었다.

다행히 적성에 맞아 사업을 잘 감당하고 끌어왔으나 확장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꾸준히 다른 기업들과 연계하여 국내에서의 내실을 다졌고, 민 회장의 부고 이후 사업을 더 탄탄하게 다지려 노력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린 나이에 말도 안 되는 직급을 감당하게 되었으니, 제대로 실속을 다지려 한 것이었다.

그렇게 이사직에 앉은 지 대략 10년이 지났다. 이제 더 이상의 신중함은 필요 없었다. 몇 년 전부터 은재는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공격적으로 해외 사업을 유치했고, 곳곳에 새로 백화점 건물을 올렸다. 외국인들이 주로 묵는 서울 몇 개의 지역에는 외국인 전용 면세 구역 백화점을 만들었고, 신공항에 투자하여 백화점과 연계될 수 있도록 쇼핑센터를 올렸다.

대경 산하에 있던 문화 재단 또한 다른 기업들과 연계하여 수준 높은 공연들을 선보였다. 몇 년 동안 Y국립극장에 올라갔던 공연들은 모두 대경에서 주최한 것들이었다. 딱히 분야를 가리지 않고 여러 공연을 올렸고, 얼마 전부터는 새로운 공연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제법 규모가 큰 페스티벌에도 몇 년째 후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해외에 올릴 백화점과 리조트 신사업에 매진 중이다. 곧 정부 지원으로 열릴 문화 재단의 사업 또한 중요한 건이었다.

민 회장의 부재로 살짝 흔들렸던 대경이지만, 은재의 부단한 노력으로 어느새 다시 굴지의 기업으로 자리매김해 있었다.

“말씀 전하겠습니다.”

일을 할 때면 다른 것들이 별로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도표와 사업 계획서 같은 것 따위에만 정신이 팔려 버렸다.

그게 제일 마음이 편했다. 그 때문에 더욱 일에 매진을 하는 것도 있었다.

가끔 태영이 영국으로 가고난 뒤 은재는 이유 모를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저에겐 그럴 염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앉아 태영이 보내온 선물들을 응시했다. 큰 저택에 홀로 지내며 저 외에 그 누구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기분을 기이하게 맞이했다.

그리고 종종…… 알 수 없는 곳에서 오는 또 다른 소포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그것 또한 태영이 보낸 것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주로 그것은 한국에서 배달된 것들이었다. 꽃. 대체로 꽃이었다.

보낸 이가 없는 소포를 받을 수 없었지만 어쩐지 은재는 그 꽃만큼은 버리기 어려워했다. 특별히 위험한 물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몇 번이나 세심하게 확인했지만 카메라 같은 것이 함께 봉송되어 오지도 않았고, 그저 꽃이 전부였다.

배달된 꽃은 늘 이사실 테이블에 꽂아 두었다. 언젠가부터 저도 모르게 꽃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다음 꽃 배달이 늦어질 때면 제 손으로 꽃을 사다 화병에 꽂아 넣을 정도로 이제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은재는 어느새 테이블 중간에 놓인 꽃을 보다 전산으로 올라온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블라인드 너머를 한번 보고 싶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알파. 아이가 알파라는 것이 자꾸만 느껴졌다. 오히려 열여섯, 열일곱 그 무렵 태영이 막 알파가 되었을 때보다 더 잔인하게 와닿았다.

차에 나란히 앉아 있을 때도, 마주 앉아 식사를 할 때도, 저를 에스코트하겠다며 다가와 거리를 좁힐 때도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낯선 기분이 슬그머니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었고, 서슴없어진 태영의 스킨십에 배 속에서부터 놀라 들썩이는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아이를 봐 반가운 마음에 확인할 것들도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하고 가깝게 지내려 했는데. 이건…… 어색해서 느껴지는 기분들이 분명 아니겠지.

그간 태영을 보지도, 목소리를 듣지도 못해 안타까웠던 마음을 갈무리할 때가 온 것이었다.

―이사님. 문화 재단 이 팀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네. 들여보내세요.”

상념에서 빠져나온 은재는 차 한 잔을 새로 올려 달라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이미 시각은 7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회의를 마무리하고, 다시 서류를 보기 시작한 은재가 고개를 든 것은 어깨가 굳어졌다고 느낄 무렵이었다. 일부러 이런 때를 위해 가까이 두었던 시계는 벌써 자정을 넘어간 시간을 내보이고 있었다.

강 비서를 제외한 다른 직원들은 모두 들어간 후였다. 은재는 뒤늦게 차에 올라 눈을 덮으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라 도로 위는 한산했다. 꽉 막혀 있던 서울의 도로가 그나마 여유로운 때였다. 기사를 보내고 직접 운전대를 잡은 강 비서는 속도를 높여 저택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늦었어요.”

“상 차릴까요?”

“아닙니다. 간단히 챙겨 먹었습니다. 실장님도 쉬세요.”

“저, 이사님. 아직 도련님께서 오시지 않으셨는데요.”

“……네?”

당연히 태영이 돌아왔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2층을 올려다보지도 않았다. 2층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손끝을 따끔따끔하게 찌를 것을 알아 눈을 감은 채 정원을 지나쳤고, 내리자마자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안 들어오셨습니다. 오늘 이사님이랑 같이 들어온다고 하고 나가셨는데…….”

그런데 오지 않았다니.

은재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냈다. 곧바로 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태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순간 불안함과 아찔함이 머리를 때렸다. 한동안 연락 두절되었던 때의 기분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나올 때 태영이 보셨나요?”

“……죄송합니다. 지하에서 곧장 나온 터라.”

약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확인하지 않아도 태영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거기 있는 것 같은데.”

친구를 만났을 수도 있고,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제 말없이 없어지지 않겠다고 했으니 또다시 연락이 닿지 않는 곳에 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분명 회사 앞이었다.

왜인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회사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모시겠습니다.”

“제가 운전하고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모시겠습니다.”

강 비서는 은재를 뒷자리에 태우고 서둘러 운전석에 앉았다. 은재는 가는 동안 계속 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영은…… 분명 알아차렸을 터였다. 요 근래 저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은근슬쩍 거리를 벌리고자 하는 것을.

은재는 설명할 수 없는 아찔함과 아득함을 느끼며 전화기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도통 들려오지 않는 그 낮은 음성을, 이제는 익숙해진 그 낮은 음성을 떠올리며 더욱더 한산해진 도로 위를 응시했다.

순식간에 차는 다시 회사 앞에 도착했다. 저택으로 올 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였다.

회사 앞에 가까워지자 정말 언제나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검은 차 한 대가 보였다. 은재는 급히 차에서 내렸다.

―……여보세요.

그때 낮은 음성이 지루한 송신음을 끊고 들려왔다.

은재가 멈칫, 발을 멈춰 세웠다. 운전석에 눈을 감은 채 기대어 앉아 있는 태영이 보였다.

―……이사님이네.

새벽이 되어 더욱 차가워진 바람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분명한 음성이 그 전에 이미 귓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꿈인가.

태영은 뚫어져라 은재를 보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오히려 꿈인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은 은재였다.

색이 짙지 않은 창 덕에 차 밖에서도 태영의 모습이 보였다. 차체 너머로, 그 얇은 유리 너머로 절 직시하는 태영의 눈빛이 너무나 잘 보였다.

태영은 느른한 얼굴로 헤드레스트에 기대어 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이마를 덮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적막한 주변의 분위기와 달리 잠든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분명한 눈동자가 은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눈 뜨자마자 이사님이 보이네요.

“…….”

―나 어제 착한 일 안 했는데.

은재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런 태영을 바라보았다. 태영은 후…… 길게 숨을 뱉으며 제 뺨을 문질렀다. 거리감을 지닌 낮은 음성이 낯설도록 매끄럽게 고막에 달라붙었다.

―이제 일 끝난 거예요?

여전히 나른함 따위가 그 얼굴에 어려 있었지만 은재는 다가가 차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태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은재를 올려다보았다.

“일을 너무 오래 하시는 거 아니에요?”

“먼저 들어가라고 했잖아.”

“어떻게 들어가요. 이사님 일하시는 거 아는데.”

“늦게 끝난다고 했잖아.”

“전 하는 것도 없어서 괜찮아요.”

태영은 약한 숨을 터뜨리며 차에서 내렸다. 은재는 다가오는 커다란 몸에 뒤로 물러나며 제게 뻗어진 태영의 손을 뿌리쳤다.

“화나셨어요?”

“이렇게 기다리지 마.”

“같이 가려고 그런 건데.”

“언제 끝날지 몰라. 요즘 일 많아. 매번 같이 못 들어가.”

“저 괜찮아요. 기다리는 건 익숙해요.”

“…….”

권태로움이 머물러있는 태영의 얼굴은 조금 서늘했다. 그것을 본인도 아는 듯, 태영은 거듭 눈썹과 뺨을 문지르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익숙한 어릴 적의 표정과 낯선 표정이 뒤섞인 얼굴로 은재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요즘 이사님 얼굴 자주 못 본 것 같아서요.”

“…….”

“저 이사님 좋아하는 거 아시잖아요.”

태영은 커다란 제 몸을 접으며 은재에게 안겨 들었다. 은재는 태영을 향해 마주 손을 뻗어 주지 않았지만, 그는 알아서 은재의 어깨에 뺨을 묻었다. 이마를 묻고 비비며 낮은 숨을 터뜨렸다.

“이럴 때 아니면 이사님 언제 봬요.”

“…….”

“이사님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지금 못 보면 영영 못 볼 것 같아서.”

조금 더 끓는 듯한 숨소리와 함께 태영이 은재의 허리를 지그시 당겨왔다. 은재는 차마 태영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입술을 씹었다.

저택에서, 태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불안이 옅게 고개를 쳐들었다. 이렇게 태영을 끌어안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단단한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기다리지 마. 가라고 할 때는 가.”

그 손이 닿자 태영은 크게 숨을 터뜨렸다.

“너 안 들어왔다고 해서 놀랐잖아.”

“집에 가셨어요?”

“…….”

“전화하시지. 아…… 제가 전화 안 받았구나.”

이윽고 저도 손에 힘을 주어 꽉 은재를 끌어안았다. 닿은 몸이 아플 정도로 당겨 대는 힘에 은재가 약하게 허리를 비틀었다.

과할 정도의 힘과 체온이 너무나 가깝게 닿아 있었다.

“다음부터 이러지 않겠다고 해.”

“이사님이랑 같이 들어가고 싶은데.”

“……너 기다리면 내가 일을 못 해.”

“왜요?”

태영은 은재의 어깨에 뺨을 기댄 채 시선을 돌렸다. 목덜미 부근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은재는 태영의 팔을 붙잡았다.

태영이 어디 가지 않고 지금 이 시간까지 저를 기다렸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연락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지 않았다는 것에 또 안도가 들었다.

복잡한 생각이 마구잡이로 머릿속을 헤맸다.

“……빨리 끝내야 할 것 같아. 집중이 잘 안 돼.”

“저 기다리는 거 잘해요.”

“내가 마음이 불편해.”

“…….”

“그러지 마.”

재차 은재가 단단한 팔을 밀었다. 순순히 밀려나 준 태영은 다시금 운전석에 앉아 은재를 올려다보았다.

속을 읽을 수 없는 짙은 눈동자가 시선 끝에 있었다.

“그러지 마, 태영아.”

“그럼 전 이사님 언제 봐요.”

“…….”

“이사님 자주 보고 싶은데. 그래서 한국 온 건데…… 또 기다려요?”

꼭…… 작정을 한 것처럼 태영은 은재의 약한 부분을 찔렀다.

“그럼 또 일주일에 한 번 시간 내주실 거예요? 이제 그걸로는 부족한데.”

그러자 은재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흐릿한 얼굴이 되었다. 그 얼굴에 태영은 은재의 손을 맞잡으며 옅게 웃었다.

“저 피하지 마세요.”

“…….”

“일 많으실 땐 보내세요. 그땐 정말 갈게요. 근데 괜히 저 보내지 마세요. 시간 되면 같이 집에 들어와요. 저녁도 먹고요.”

다시 일어선 태영은 은재의 손을 꽉 잡은 채 돌아 조수석으로 향했다. 은재를 조수석에 앉히고 벨트를 매어 주며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

“오래 안 기다릴게요. 오늘 같은 일은 없도록 할게요.”

“…….”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놀랐는지 하얗게 질린 은재의 손끝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꾹 쥐었다.

그 손은 꼭 은재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싶은 것처럼 잠시 공중에 머물렀다 곧 연기처럼 사라졌다.

“너 원래 이래?”

은재는 가까운 곳에서 보이는 태영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태영은 대답 없이 돌아 운전석에 올랐다.

탁, 하며 문이 닫혔다. 차 안은 순식간에 밀폐된 공간이 되었다.

은재는 태영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림, 알려 주면 되는 거야?”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버거웠지만 손을 쥐며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짧게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조차 목이 빳빳하게 굳을 만큼 힘겨웠다. 그것을 아는 듯 태영은 희미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저 그저 그런 알파 아니에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그렇게 보여.”

“저 태영이에요, 이사님.”

태영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상쾌한 체향을 뿜어냈다. 옅게 알파 페로몬이 묻어나는 체향이었다.

뒤늦게 태영이 알파라는 생각이 들어 함께 귀가하는 것도 피하려 했지만, 태영은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다시 7년 전 그때와 같은 결과는 만들어 내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미숙했던 소년이었던 그때는 자의에 의해, 또 타의에 의해 한국을 떠야 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외려 더 깊숙하게 곁을 차지하려 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 걸까. 태영은 은재가 어릴 적 소년인 저를 그리워했다는 걸 알고 있던 걸까. 그 소년을 걱정하며 기다리던 걸 알았던 걸까.

아직 은재에게 태영은 알파라기보다 그 장지에서의 소년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알파로 곁에 있던 것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랬다. 그래서 묘하게 떠오르는 불편함을 참으려 했던 건데.

……쉽지가 않았다. 태영은 이제 어릴 적 그때처럼 은재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오히려 태영의 수에 발이 묶인 기분이었다. 은재는 왜인지 모를 위험함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 * *

“스케치는 해 봤어?”

“이 연필 처음 잡아 봐요.”

“뭘 그리고 싶은데.”

주말이 되어 결국 둘은 2층 작업실로 향했다. 태영이 지내는 방 옆에 마련된 방이었다. 태영의 방과 구조가 언뜻 비슷하지만 그것보다는 약간은 작은 방. 저택의 입구가 약간은 다른 각도에서 보이는 그곳에는 사용하지 않은 물감과 연필들, 그리고 두 개의 이젤과 종이가 놓였다.

흰 종이는 이제 다시 보고 싶지도 않았는데. 막상 그 방에 들어서니 은재는 왠지 모를 벅찬 기분을 느꼈다. 태영에게 휘말려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잠시 잊을 정도로 반가웠다.

그 누구도 드나들지 않던 방. 서늘함이 들어 있던 방에 익숙하고 낯선 물건들이 들어와 있었다.

“사람을 그리고 싶은데.”

“……사람?”

“네. 너무 어렵겠죠?”

은재는 이젤 앞에 다가가 연필을 쥐었다. 잘 깎인 연필의 감촉은…… 마치 처음 잡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때 그림을 그렸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어색했다. 다시 제대로 그림을 그리려면 오래 연습을 해야 할 텐데. 누굴 가르쳐 줄 실력이 되지 못하는데.

그러면서도 은재는 종이를 가볍게 그어 보았다. 약한 소리를 내며 연필이 종이를 스쳤다.

그 순간 소름이 어깨까지 끼쳤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저 연필이 종이를 그어 내린 것뿐인데도 마치 미뤄 두었던 모든 감각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리던 그 순간이, 어릴 적 그림에만 몰두했던 그때의 기억들이 생동하는 것 같았다.

두려울 정도로 활력 있는 감정들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멋있어요.”

“…….”

“이사님은 연필만 쥐어도 멋있네요.”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태영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사님이 다시 그림 그리는 거 보고 싶었어요.”

“…….”

“좋아하는 거 안 하고 사시는 것 같아서요.”

진심이 담긴 눈동자였다. 옅은 미소가 담긴 눈으로 은재를 보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생각했어요. 내가 어른이 되면 이사님이 하고 싶어 하셨던 거 해 드려야지. 내가 다 하게 해 드려야지.”

“……그래서 사 온 거야?”

“겸사겸사요. 이사님 그림도 보고, 곁에 있기도 하고요.”

은재는 입을 열었다가 이내 말을 삼켰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졌다. 은근하게 돋아 있던 예민함이 조금씩 모로 누워 사그라들었다. 그림을 그렸다고 이야기를 했던 건, 정말 찰나였는데. 짧게 지나갔던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니.

아직도 태영이 알파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고, 묘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태영의 그 미소에, 저를 위해 마련해준 이 공간에 왠지 모를 안도를 느꼈다.

가장 친밀하고, 가장 가까운 소년을 경계해야 한다고 느끼던 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찾아와 뒤덮는 기분이었다. 때문인지 더 깊은 숨이 잇새로 터졌다.

“전 그림에 소질 없어요.”

스케치북 하나가 은재의 이젤 위에 올라왔다. 언제 그렸는지 모를 스케치들이 가득했다. 스케치…… 라고 하기엔 볼품없었지만.

은재는 그 오묘한 그림에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스케치북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덮으며 태영을 마주했다.

“네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조금은 편안해진 말투였다. 사뭇 경계심이 묻어 있다기보다 평소와 같은 그런 말투.

“한국 들어온 지 벌써 2주일 넘었지.”

“네.”

“할 일이 있다며. 그래서 온 거라며. 그 일 하고 있어?”

“네. 하고 있어요.”

“무슨 일인지 말해 줄래.”

이제는 더 미뤄 둘 수 없었다. 도대체 태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방황의 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어떤 생각으로 들어왔는지 알아야 했다.

은재는 태영을 믿었다. 태영은 영리한 아이이고, 앞가림을 할 줄 아는 아이니 선택한 일을 그 또한 지지하려 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제가 손을 놓았으니 더 깊게 간섭할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보호자이면서도 보호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 한들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자꾸 묘하게 저에게 와 부딪치는 듯한 아이를 멈춰 세워야 했다.

“정말…… 들어 주실 거예요?”

하지만 태영은 묘한 말투로 말했다.

“생각보다 더 이른데…….”

“…….”

“전 언제든지 말할 수 있어요. 근데 이사님이 마음의 준비가 안 되신 것 같은데.”

이윽고 제 이젤 위에 올려져 있던 연필을 들어 슥슥 종이를 그었다. 별 의도 없이 그어지는 줄들이었지만 그 소리가 유독 귀에 생생히 꽂히는 기분이었다.

“말해 주세요. 준비되시면.”

“…….”

“사실 눈치채고 계시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절 피하려고 하시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아니었나 보네요.”

웅, 웅…….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렸다. 태영은 핸드폰을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은재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아 그 손등에 입술을 내렸다.

느릿하게 입술을 떼어낸 태영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금방이라도 다시 입술을 내릴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며 깍지를 껴 왔다. 조금 탁하게 가라앉은 눈 안에서 감정이 소리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은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말도 안 돼.

그 순간 확실해졌다. 태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은재는 그 묘한 감정들을 분산시켜 놓았다. 하나로 합치지 않고 확정 지어지지 않은 생각들로 떠다니게 만들었다. 그러지 않아야 했다. 몰라야만 했다.

수많은 시선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버텨 왔다. 그 상대가 태영이라고 하더라도 버티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태영을 많이 아꼈다. 다른 보호자들처럼 품에 끼고 살피는 일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진심으로 태영을 생각했다. 두고두고 알파로 발현했던 그 시기를 미안해할 만큼 제 소년이라 믿었다.

그렇기에 무엇이든 허락할 수 없었다.

……그럴 수가 없으니까. 보호자에게 그런 감정을 품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 존재해서는 안 되는 그런 일이니까.

제 시선을 거부하는 은재의 낯을 보며 태영은 먼저 방을 나섰다.

은재는 홀로 이젤 앞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씁쓸하고 탁한 연기가 가슴 속을 훑고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끼며 흰 종이를 바라보았다.

* * *

“뭐, 민 이사 일처리야 알아주지. 대경에서 나서는데 걱정할 일도 없고.”

“감사합니다.”

“민 회장한테 잘 배웠어. 어린 나이에 고생했지.”

“근데 민 이사는 누구 만나는 사람은 없고?”

“예. 딱히 없습니다.”

은재는 묵직한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려한 음식들이 상 위에 가득 놓여 있었지만 은재는 도통 식사를 이어 가지 못했다. 분위기도 고즈넉하니 좋고,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정취를 돋우며 직접 가야금과 해금을 연주하는 이들이 있었는데도 입맛은 싹 사라졌다.

그저 잔을 놓으며 제 살을 내어놓고 입을 벌리고 있는 돗돔 대가리에 시선을 던졌다.

“한창 나이인데 왜.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제가 부족한가 봅니다. 영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네요. 막상 인기도 없는 편이고요.”

“아이고, 무슨 소리를. 민 이사는 워커홀릭이라 그렇지.”

두툼한 회 한 점을 접시로 옮기며 맑은 술을 따르던 남자가 은재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난한 말이었지만 은재는 저에게 닿은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았다. 그 시선은 넌지시 제 옷깃 뒤를 훔쳐보고 있었다. 은재는 짧게 시선을 숙였다가 곧 그 남자를 응시했다.

“그런 것도 있고요. 한 번에 두 가지를 못하는 편이다 보니 어렵네요.”

“술 한잔들 하지.”

“우리야 뭐, 사랑으로 결혼했나. 여기서 연애 결혼한 건 저기 저 박 씨밖에 없지.”

“낭만파야. 그때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했다고?”

“우리 마누라가 좀 예뻤어야지. 그래서 우리 애들이 예쁘잖아. 안 그런가.”

“그럼 민 이사랑 짝지어 주는 건 어때. 민 이사 외모도 아주 기가 막히는데, 일도 잘하고.”

“건배하자고.”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잔이 부딪쳤다. 은재는 짧게 잔에 입술만 대고 다시 뜨거운 차를 쥐었다. 이파리 하나가 떠 있는 차가 천천히 입 안을 데우고 뒤로 넘어갔다.

“민 이사. 언제든지 상대 필요하면 말하라고. 솔직한 말로 우리야 대경과 사돈만 될 수 있다면 환영이지. 더군다나 민 이사라니. 제일 좋은 상대 아닌가.”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말씀만이 아닐세. 꼭 기억해야 되는 이야기야. 진심이라고.”

“누가 민 이사의 선택을 받을지 기대가 되는구만.”

허허, 남자들은 웃으며 마저 식사를 이어 갔다. 그런 와중에도 은재의 옷 뒤로 숨은 몸을 그려보는 시선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교양 있는 척 감춘 음흉한 시선들이 찰나로 번져 나왔다.

은재는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가 그 기대를 채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전 이미 아이가 딸려 있어서요. 그런 사람을 누가 받아 줄지 걱정이 되네요.”

“그래, 맞아. 민 이사가 아이를 데려왔었지. 몇 살 차이 안 났던 것 같은데.”

“네.”

“영국에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래도 손은 덜 가겠네. 민 이사 안 그래도 바쁜 사람 아닌가.”

태영의 이야기가 나오자 은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더 따랐다.

“베타라고 그랬지?”

“…….”

“하긴, 베타여야지. 알파면 큰일 나지. 민 이사 얼굴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텐데.”

이들은 조금 더 묘한 시선으로 은재의 얼굴을 훑었다. 약간의 침묵이 찾아왔다. 연주되는 고풍스러운 음악만이 방 안에 흐르고 있었다.

은재는 그저 익숙하게 차를 마셨다.

“저택으로 모실까요?”

“……그러죠. 일찍 들어가 봐야겠네요.”

마지막 흰 연기를 뱉으며 장초를 부러뜨려 버린 은재는 지친 얼굴로 차에 올랐다.

오랜만에 가지는 정찬 자리였다. 이전 민 회장의 대에서부터 긴밀했던 이들이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정부 신사업을 위해 종종 가져야만 하는 자리였다.

다들 속이 시커먼 노인네들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보다는 예의를 차리는 이들인 건 맞았다. 그럼에도 능구렁이 같은 이들을 만날 때면 별로 속이 좋지 못했다. 특히나 7년 전, 몸이 망가지는 그 일이 있고 나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들은 은재를 대경 그룹 이사 민은재가 아닌, 오메가 민은재로 대했다. 사업 이야기를 하다가도 은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거나 몸을 훑었다. 페로몬을 대놓고 흘리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묻히려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틈틈이 은재를 눈요깃거리로 삼았다.

도무지 변하지 않는 습성들이었다. 선을 넘어오는 경우는 없었지만, 그 바로 밑에서 다들 발정이라도 난 듯 침을 흘려댔다.

서른을 넘기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은재의 분위기는 더 선명해졌다. 여물어 피어난 것처럼 청초하고 성숙해졌다.

이제 은재는 완전히 제 자리에 적응을 했다. 다소 어색해하던 과거와 달리 훨씬 더 능숙하게 사람을 부렸다. 사업과 오메가인 형질을 구분하는 기묘한 분위기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 노련함마저 그를 이루는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시선들에 시달린 은재는 날연한 낯으로 뺨을 문질렀다.

이윽고 그는 품을 뒤적여 흰 알약이 몇 개 들어 있는 약통을 손에 쥐었다. 그것을 열어 물도 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약이 녹으며 느껴지는 씁쓸한 맛도 지금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 중을 메운 듯한 탁한 페로몬이 가시기만을 그저 바랐다.

“이건 뭐죠.”

“아, 회사 편으로 온 소포 받아 온 겁니다.”

“……소포?”

옆자리에는 익숙한 포장지에 담긴 것이 보였다. 은재는 이사실 테이블 위에 놓인 꽃이 처음의 생기를 잃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그 소포를 받아 들었다.

“이번에도 확인해 봤습니다. 딱히 위험한 물질은 없고요.”

“여전히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고요.”

“네.”

은재는 그 소포를 받아 풀며 안에 담긴 꽃을 확인했다. 잔뜩 물을 머금어 생생하게 피어난 꽃에서는 부드러운 향기가 풍겼다. 도대체 누가 보내는지 알 순 없지만…… 은재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임이 확실했다.

향이 너무 진한 꽃은 좋아하지 않았다. 꽃향기는 좋지만 금세 질리는 데가 있어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향기가 옅은 꽃을 좋아했다. 그래야 테이블에 놔두어도 오래 두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늘 배달되는 꽃은 그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부드럽고 온순한 향을 풍겼다. 역하지 않을 정도의 향을 풍겼다. 그 산뜻함에 오히려 더욱 시선이 가는 꽃들이었다.

“회사로 온 걸 굳이 가져왔나 보네요.”

은재는 꽃잎을 조심스레 만지며 조수석에 앉아 있는 강 비서를 바라보았다. 아마, 오늘 정찬 자리가 편하지 않음을 알고 신경 써서 챙겨 온 게 분명했다.

“고마워요. 내일 봐도 될 텐데.”

“윤 비서가 오가느라 고생했습니다.”

“이사실에 꽂아 놔야겠네요. 회사로 가죠.”

희미했던 정신이 꽃향기에 깨어나는 것 같았다. 은재는 회사로 차의 목적지를 바꾸며 뒤늦게 우는 전화를 꺼내 들었다.

―정찬 끝났어?

세헌이었다.

“지금 막.”

―근처야. 차 한 잔만 줘.

친구라고 부를 만한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침묵을 지키자 세헌은 덤덤하게 말을 덧붙였다.

―네 회사 앞인데.

“…….”

―너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야. 아무 짓도 안 해.

“…….”

―할 말도 있고.

“……알았어. 들어와.”

동시에 은재가 탄 차가 미끄러지듯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은재는 꽃을 든 채 차에서 내렸다. 꽃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이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그 은근한 향을 맡으며 이사실로 향했다.

재킷을 벗고 꽃을 화병에 꽂았다. 그리고 차를 달라고 요청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세헌은 익숙한 듯 이사실에 들어서며 테이블로 다가왔다.

이사실에 상주하는 다른 비서가 금세 들어와 차 두 잔을 놓고 나갔다. 은재는 세헌의 맞은편에 앉으며 가늘게 숨을 뱉었다.

“자리 어땠어.”

“어땠겠어.”

“얼굴에 써 있네.”

차에서 부드러운 향이 올라왔지만 은재는 차를 쥐지 않았다. 별로 속이 좋지 못했다. 자리에서 내내 차만 들이켰고, 또 알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던 것 때문인지 머리도 무거웠다. 은재는 의자에 팔을 기대고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너무 자주 만나지 마. 항상 컨디션 그렇잖아, 다녀오면.”

“최대한 줄이고 있어.”

“두통약 꺼내 줘?”

“그 정도는 아냐. 괜찮아. 페로몬 약 먹었어.”

작게 한숨을 뱉은 세헌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 내밀었다.

“나 담배 피웠는데.”

거절하는 말에 세헌은 고개를 저으며 거듭 손을 흔들었다.

“피우고 정신 차려.”

“…….”

“네 얼굴 지금 보기 힘들어. 눈 다 풀렸다.”

……불 붙여 줄게. 세헌이 나직이 말을 덧붙였다. 그제야 은재는 담배를 물었다. 세헌이 붙여 주는 불로 깊게 호흡하며 흰 연기를 뿜어내고 의자에 편안히 몸을 늘어뜨렸다.

은재가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러 억지로 표정을 만들었다.

“아무 짓도 안 한다며.”

“안 했어, 아직.”

그 은근한 변화를 세헌은 마른침을 삼키며 응시했다. 억지로 다른 화제로 말머리를 돌렸다.

“문화 재단 빠진다면서, 이번 사업.”

“……아, 응. 보기 이상해서.”

“아까운 사업인데. 괜찮겠어? 마무리만 잘 되면 문화 재단 더 커질 수 있어. 좋은 기회잖아.”

“그렇다고 후원사에서 빠질 순 없어. 둘 다 할 수도 없고.”

“다들 아무 말 없잖아. 재단 고르는 것도 다들 참여할 텐데.”

“그래도 빠지는 게 나아. 여지 줘 봤자 괜히 난처해.”

“다른 기업들은 안 그래.”

“민 회장님 방침이야. 회장님 계셨어도 그렇게 하셨을 거야.”

정부 부처의 지원을 받아 시작하는 사업이었다. 여러 기업을 후원사로 두고, 문화 재단과 힘을 합쳐 만들어 내는 그런 사업. 잘만 마무리된다면 곧 열릴 국가 차원의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번 사업의 목표는 올림픽을 유치하는 것이었다. 현재 최종 단계까지 올라갔으니 기업 측에서 로비를 해 완전 유치를 해야 했다. 그런 다음 행사에 올린 리스트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보통 기업들은 유치에 힘을 쓰지만, 대경은 문화 재단이 있다는 이유로 그 후속 사업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게 진행된다면 문화 재단 측에서 거둬들이는 수입이 상당했다.

아직까지도 문화 재단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있기는 했지만, 실직적인 대표는 변함없이 은재였다. 그리고 은재는 문화 재단에 은근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여러모로 더 많은 사업을 열고 싶었고, 더 많은 기회를 꾸리고 싶었다. 적성에 잘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경 그룹에서 이미 유치를 위한 후원사로 참여하고 있으니 대경 산하의 문화 재단은 빠지는 편이 나았다. 사실상 유치는 확정되었으니까. 아쉽지만 그게 옳았다.

후……. 은재가 연기를 길게 뿜었다. 이윽고 한 번 더 필터를 물었다가 가까운 재떨이에 지져꺼 버렸다.

“그 이야기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

“그것도 그렇고……. 나 며칠 전에 꼬맹이 봤어.”

시선을 떼지 않고 복잡한 표정으로 은재를 지켜보던 세헌이 이제야 본론을 꺼내 들었다.

“……태영이?”

“어. 이제 꼬맹이라고 못 하겠던데.”

“……그런 말 없었는데. 만난 줄 몰랐어.”

은재는 세헌의 말에 몇 시간 전 받은 메시지를 떠올렸다.

[오늘은 데리러 못 가요. 일이 있어서요. 집에서 봬요.]

그 말 외에 다른 말은 없었다. 세헌을 만났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이제 계속 한국에 있으려는 것 같던데.”

“응. 그럴 건가 봐.”

“뭐 하는데. 이제 펜싱도 안 하잖아. 자리 하나 만들어 주려고?”

“그러게. 속을 알 수가 없네.”

지난 주말, 이젤 앞에서의 일 이후 은재는 태영과 마주하지 않았다. 태영이 그 선을 넘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막상 마주할 때면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알았다.

제가 태영의 보호자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기에 냉정하게 굴기가 어려웠다. 여전히 미안했고, 죄책감이 느껴졌으며, 또 섬세한 성격에 눈이 향했다. 그래서 주말 동안 다시 태영을 보지 않았다. 다행히 태영도 은재를 찾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며 이사님, 하며 부르기는 했지만 침묵의 뜻을 알아듣고 곧 자리를 떴다.

“다행히 페로몬에 문제는 없어 보이더라.”

“…….”

“물론 그렇게 봐서는 모르겠지만……. 혹시 물어봤어?”

세헌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은재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했다. 소리 없이 세헌이 들고 있던 잔이 받침 위로 내려앉았다.

“약은.”

“아직 있어.”

“한집에서 같이 지낼 거야?”

“태영이 내 아이야.”

“우성 알파야. 그냥 알파도 아니고 우성이라고.”

“……알아.”

“조심해.”

은재는 잔잔한 차 표면만 내려다보았다.

“네 몸 상태, 말 안 할 거지.”

“…….”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약 먹을 거고. 언제 어떻게 히트 사이클이 터질지 모르는 상태로 지내면서.”

“괜찮아.”

“…….”

“지금까지…… 7년 동안 아무 일 없었어. 알파들하고 같이 일했고.”

“은재야. 걔랑 같이 사는데도 아무 일 없을 것 같냐.”

세헌은 한숨을 터뜨리며 은재를 더 가까운 곳에서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 조금 더 진지한 기색이 새겨졌다.

7년이 지나는 동안, 곁에서 은재를 지켜보았던 세헌의 얼굴에도 이제는 노련함이 깃들어 있었다. 조금 더 성숙해진 알파의 분위기가 그에게서도 이제는 물씬 느껴졌다.

“걔랑 뭐 할 거 아니잖아.”

“…….”

“별생각 없이 꼬맹이 왔다는 소식에 반가워했는데…… 얼굴 보니 안 되겠더라. 너 걔 못 버텨. 알파들한테 둘러싸여서 일하고 돌아오면 며칠을 앓는데, 그 집에서 같이 살 수 있겠어? 망가진 페로몬으로?”

“세헌아.”

“걔가 그렇게 변한 줄 알았으면 진작 내쫓으라고 했을 거야. 네가 데리고 있으면 안 돼. 걔가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세헌은 7년간 은재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히트 사이클 주기가 갑작스레 뒤엉키고, 알파들과 가까워지면 알 수 없이 몸에서 일어나는 불완전한 증상을 알고 있는 소수의 인물이었다.

“네 페로몬이 그렇게 망가진 게 누구 때문인데.”

그리고, 그 이유도.

“이미 무슨 일 있던 건 아니지.”

“…….”

“……설마.”

그 순간 은재의 핸드폰이 울었다. 껄끄러운 대화에 은재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가.”

“은재야. 너 정말 무슨 일 있었어? 걔랑 지내면 너 위험해. 걔 발현열 때문에 망가진 페로몬이야. 제일 위험하다고.”

“……아무 일도 없었어. 저녁 같이 못 먹어. 가.”

세헌은 할 말이 남은 것 같았지만 저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화해라.”

은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헌이 나가는 것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핸드폰을 쥐었다.

나가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캘린더를 확인했다. 아직 예정된 히트 사이클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페로몬 이상으로 인해 히트 사이클이 자연적으로 터지지는 않겠지만, 페로몬이 불안해진 이후 이전 주기에 맞추어 일부러 유도제를 복용하곤 했다.

어쨌든 그 전에 미리 저택을 떠나 있는 편이 나을 듯했다.

“하…….”

태영이가 돌아온 후로는 마음이 반갑고 또 복잡해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알파가 있는 저택에서의 히트 사이클이라니.

민 회장은 그 시기가 오면 여유 있게 저택을 떠나 있었다. 출장이라는 명목으로 은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다른 곳에서 잠시간 머물렀다. 하지만 이제는 은재가 피해야 했다. 스물넷의 알파를 집에 두고 발정열을 앓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알파는…….

“이사님. 오셨어요.”

“어, 이사님?”

대충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정신도 없이 앉아 있다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즈음, 저택에 들어서는 차 한 대가 보였다. 은재는 문 앞에 서서 차에서 내리는 이들을 보았다.

“비슷하게 왔네요. 이럴 거면 회사 들렀다 올걸 그랬어요.”

태영과 의준이 함께 서 있었다. 은재는 태영과 그 옆에 서 있는 의준을 잠시 둘러보았다. 제법 성숙해진 얼굴을 보자 피곤한 상황에서도 반가운 마음이 천천히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서서히 미소가 얼굴 위에 걸쳐졌다.

“오랜만이네.”

“네, 이사님. 잘 계셨어요? 이사님은 그대로시네요.”

의준도 마찬가지인지 활짝 웃으며 은재에게 다가왔다.

“한국 들어온 줄 몰랐는데. 언제 왔어.”

“저 작년에 왔어요.”

“전무님 그런 말씀 없으시던데.”

“뭐…… 제가 아직 일도 못하고 그러니까요. 조금 있다가 다시 나갈 것 같아요. MBA 마무리 못했거든요.”

“컨디션 안 좋으세요?”

태영이 유학길에 오르던 때, 의준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돌아왔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는데, 얼마 전에 한국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어릴 적부터 지켜본 태영의 친구임을 알고 있는데도 주춤거리며 발이 굳어졌다. 얼굴은 어릴 적 모습이 많이 남았지만 키가 훌쩍 자라 단단해진 골격이 눈에 띄었다. 영락없이 알파다운 모습이었다.

그러자 그 앞으로 태영이 다가와 물었다.

“안색이 별로예요. 정말 괜찮으신 거 맞아요?”

“괜찮아.”

태영에게는 약한 땀 냄새가 느껴졌다. 한쪽 어깨에 무언가를 메고 있었고, 평소보다 더한 열기가 느껴졌다. 주말에 마주했던 것보다 조금 더 몸이 커진 것도 같았다. 드리워진 기운이 더욱 짙었다.

“운동했어?”

“오랜만에 한 판 붙었어요. 태영이 여전하던데요? 도대체 펜싱 왜 그만뒀나 몰라.”

빼꼼 고개를 뺀 의준이 대신 대답하며 검을 휘두르는 듯한 동작을 해 보였다. 태영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은재는 옅게 웃어 주었다.

그런 은재의 등 뒤로 식은땀이 서서히 맺히기 시작했다. 조금 숨이 가빴다. 온종일 느껴지는 알파들의 은근한 페로몬에 힘이 부쳤다.

“너 먼저 들어가.”

“그래도 돼?”

“들어가.”

태영은 그런 은재를 살피며 의준을 집 안으로 떠밀었다. 의준은 집 주인들을 놔두고 홀로 들어가는 게 민망한 듯했지만, 금세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그제야 은재가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뱉었다.

“죄송해요. 안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괜찮아. 씻고 저녁 먹여서 보내야지.”

“몸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더욱 가까이 다가온 태영은 은재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없는데…….”

“괜찮아. 나와.”

은재는 태영의 어깨를 밀어내며 저택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하지만 채 한 발을 내딛기도 전에 태영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이사님.”

“…….”

“이사님 몸에서 알파 냄새가 진동을 해요.”

낮게 깔리는 음성에 황급히 은재가 태영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태영은 다시금 그 손목을 붙잡아 당기며 아예 은재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깊은 숨이 목덜미를 스치고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허리가 더 바싹 끌어당겨졌다.

바르작거리며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렸다. 조이듯 안긴 품이 강하게 옥죄어 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코앞에, 태영이 있었다.

“……담배 냄새도 나네.” 

“하지 마.”

은재는 강하게 태영을 밀어냈다. 태영은 순순히 밀려났지만 묘한 눈빛으로 은재를 응시했다.

애써 아무 일도 없던 척, 슬그머니 속내를 드러냈던 그 일을 모른 척 넘어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태영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이제 대놓고 제 부정한 야욕을 내비치고 있었다.

“한태영.”

“네.”

“선 넘지 마.”

“…….”

“나 네 보호자야.”

“…….”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돼.”

“피는 안 섞였잖아요.”

태영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낮고 조곤하게 말했다.

“피가 안 섞였는데…… 문제 있나.”

그러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열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손이 은재의 눈꼬리 끝에 살짝 닿았다. 눈물점이 찍혀 있는 곳이었다.

“저 피하려고 하시는 거 아는데, 그래도 다른 알파들 냄새 묻혀 오지 마세요. 불쾌해요.”

은재는 저에게 닿은 손을 홱 밀치며 태영을 노려보았다.

“이사님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다른 알파 냄새나면…… 저 못 참아요.”

“…….”

“7년 동안 이를 악물고 참았어요. 이사님 생각하면서 밤마다…….”

하. 태영은 짧게 숨을 터뜨렸다. 순간 머릿속이 치열해졌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알파로서의 본능이 자꾸만 머리를 들어 올렸다.

“씻고 나올게요. 이사님도 씻고 오세요. 완전히 몸에 배면 안 되니까.”

태영은 주저하다 결국 먼저 자리를 떴다. 은재는 그런 태영의 커다란 뒷모습을 보며 답답한 숨을 터뜨렸다.

쉽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상황이 극한으로 달려가는 것 같았다.

태영과 이런 부도덕한 관계가 되는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오히려 태영이 알파라는 형질로 저를 짓누르면 짓눌렀지……. 이런 상황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마음을 잡게 해야 하는지, 저에게 그런 자격이 있기는 한 건지 알 수가 없어 막막함이 더욱 치솟았다.

“가.”

“뭐? 나 지금 막 나왔는데.”

“지금 나왔으니까 하는 소리야.”

손님 전용 방에 먼저 들어와 앉아 있던 태영이 의준을 보자마자 말했다. 머리를 말리지도 못하고 이제 막 욕실에서 나온 의준은 황당한 얼굴로 앉아 있는 태영을 내려다보았다.

“옷 제대로 입고 나가.”

“진심이야?”

“어.”

“나 차 없어.”

“집까지 곱게 모셔다 달라고 할 테니까 가.”

씻지도 않은 채 의준이 나오기만 기다렸던 태영은 의준이 대충 던져 놓은 짐들을 챙겨 그의 손에 들려 주었다. 옷도 걸치지 않고 반라로 나온 의준은 제 배에 던져진 가방을 엉거주춤 받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앞으로 이렇게 벗고 다니지 마.”

“뭐야. 왜 이래 갑자기?”

“아. 아니다. 여기 다시 올 일 없으니까 상관없겠네.”

지금 차량 준비해 주세요. 태영은 의준이 벗어던진 옷가지까지 그 손에 들려 주곤 방문을 열었다. 너무나 명백한 의사에 의준은 하는 수 없이 옷을 주워 입으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영국 갔다 오더니 또라이가 됐네.”

“너 때문에 이사님 힘들어하셔.”

“……아, 그래? 나 페로몬 안 풀었는데.”

“그래도 우성이니까 느껴지시나 보지.”

대놓고 옆에서 태영을 욕하던 의준은 그제야 수긍하는 낯빛을 해 보이며 복도를 지나 전실로 향했다.

“넌 근데, 괜찮으시대?”

차는 문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태영은 의준의 등을 강하게 떠밀며 차를 향해 턱짓했다.

“너 우성이잖아. 너야말로 페로몬 조절 좀 해. 너 페로몬 진하고 독한 거 알지.”

“난 괜찮아.”

“그런 게 어딨냐?”

“난 이사님 아이니까, 괜찮아.”

“…….”

“내가 유일한 이사님 알파라고.”

……진짜 또라인가. 왜 저렇게 변했지? 의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차에 서둘러 올랐다. 지금 오히려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 페로몬을 뿜는 건 태영이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네…….

태영은 의준을 태운 차가 정원을 돌아 나가는 것도 보지 않고 곧장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의준이 나간 저택엔 다시 고요함이 부피를 늘렸다. 태영은 도무지 가시지 않는 열에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다가도 이내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자꾸만 은재의 몸에 묻어 있던 여러 가지 페로몬이 떠올랐다. 우성 오메가인데 페로몬에 그렇게나 둔한 걸까. 아니면 페로몬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있어야만 했던 걸까.

시간이 꽤 오래 지난 일이었지만 태영은 아직도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은재가, 늘 오점 하나 없이 아름다운 그가 다른 알파의 품에 안기듯 기대어 저택에 돌아오던 그 순간.

제가 어린아이였을 때, 성장통에 아파 견디지 못하고 내려왔을 때 연인과의 섹스를 마치고 돌아오던 은재의 얼굴. 연인에게 입맞춤을 요구하며 손등을 내밀던 그 요요한 얼굴.

“젠장.”

여전히 선명한 그 장면에 태영은 배 속이 부글거리는 것을 느꼈다. 갈무리하지 못한 페로몬이 새어 나가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묘한 불쾌감만 지녔으나, 이제는 알았다. 은재가 새벽에 와야만 했던 이유. 그렇게 나른한 얼굴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며 안기듯 그 알파에게 기대어 걸어야 했던 이유를.

당연히 은재의 처음을 가질 순 없었지만, 은재의 그 얼굴을 다른 이들이 보았다고 생각하면 열이 치솟았다. 제가 그의 마지막이라도 가져야 했다. 그 얼굴을 이제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게 해야 했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발화된 감정이었다. 처음에는 은재를 향한 오롯한 존경심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멋있었고, 그의 손짓과 눈짓에도 제가 다가갈 수 없는 성숙함이 있었다.

그가 선택하고 하는 모든 일은 제가 다가갈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그가 연인과 함께 저택에 들어온 순간. 그가, 히트 사이클로 인한 얼굴을 내비친 순간…… 그 감정은 순식간에 다른 감정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은재는 태영의 모든 것이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은재만을 생각하며 견뎠다. 성인이 되어 가며 제가 그에게 품은 감정이 어느샌가 변화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른 이들은 제 보호자에게 이런 식의 질투를 품지 않았다. 이러한 소유욕을 품는 건 보호자를 향한 애정과는 달랐다.

그가 없는 곳에서 알파로서의 자의식을 확립하며 그 감정의 이름 또한 명확히 파악했다. 그래서 은재의 곁에 돌아와 당당히 그 옆을 차지할 날을 기다렸다.

그를 완전히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알파들의 페로몬을 묻히고 오다니.

그가 소문처럼 난잡하거나 문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저택을 떠나기 전 본 그의 연인은 단 한 명뿐이었고, 그 외에도 알파를 부른 적은 한 번이 전부였다. 오히려 화려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금욕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한 번 쥐어 보고자 하는 저질스러운 알파들이 그딴 소문을 내어 꾀어 보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렇게나 은재를 다들 한 번쯤 깔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

순간 강한 파열음과 함께 손에 쥐고 있던 컵이 부서져 추락했다. 태영은 가루가 된 컵을 털어 버린 채 욕실로 향했다. 아랫도리가 묵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갔다고요?”

“네, 조금 전에 도련님께서 차량 준비해 달라고 하셔서……. 한 20분 전에 나가셨습니다.”

은재는 뒤늦게 나와 텅 빈 다이닝 룸을 보며 숨을 뱉었다. 의준과 태영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다이닝 룸에는 음식과 두 개의 식기가 놓여 있을 뿐, 사람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식사하세요.”

“……의준이 보냈어?”

“네.”

“밥도 안 먹이고?”

“걔 밥 먹이면 이사님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

“제대로 숨도 못 쉬고 계셨으면서.”

태영은 낮게 가라앉아 갈라진 목소리로 다가와 평소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은재는 앉을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도 자리에 앉아 물로 입을 축였다.

제가 의준을 보냈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앉아 있는 꼴이 너무나 낯설었다. 마치 제 오랜 친구를 경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너 손이 왜 그래.”

그 익숙지 않은 모습에 태영을 빤히 바라보던 은재는 곧 태영의 손에 점점이 묻어나고 있는 핏방울을 발견했다.

“다쳤어?”

“……아.”

태연한 척 수저를 들던 태영은 그제야 제 손을 내려다보며 상 아래로 숨겼다. 하지만 은재는 다가와 태영의 손을 낚아챘다.

“왜 그래, 손.”

다친 것 때문인지, 아니면 태영의 원래 체온인지 손에 닿는 열기가 뜨거웠다. 그럼에도 은재는 눈가를 구기며 군데군데에서 피가 묻어나는 손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레 움켜쥐며 무심한 낯의 태영 대신 제가 아픈 얼굴을 해 보였다.

“컵이 깨졌어요.”

“지금? 조금 전에?”

“방에서요.”

“치료는 왜 안 했어.”

“생각을 못 했어요.”

하, 은재는 허탈한 숨을 뱉더니 곧 그 손을 당겼다. 상처가 난 손을 잡아당기는 힘에 태영이 이마를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재가 향한 곳은 제 방이었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 온 입 무거운 사용인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도대체 왜 이렇게 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치기 어린 제 아이를 다른 이들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야 했다.

어느새 손은 자연스레 겹쳐져 있었다. 분명 은재의 손에 태영의 커다란 손이 붙잡혀 있는 꼴이었는데, 그 손을 움직여 태영이 은재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 사이로 다시금 피가 흘러내렸다.

그 감각에 움찔한 은재는 가까운 곳에서 절 내려다보며 문을 닫는 태영을 응시했다.

“…….”

“…….”

그 누구의 시선도 없는 방에 들어오자 태영의 눈빛이 조금 더 묘해졌다. 원래도 짙은 빛깔의 눈에 더 진한 색이 감도는 것 같았다. 태영은 방을 아주 짧게 돌아보며 다시 그 눈으로 은재를 내려다보았다.

“치료하려고 데려온 거야.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은재는 손을 놓고 약을 찾으려 했지만, 태영은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손을 쥐며 다시 피가 손날 쪽으로 흐르게 만들었다.

“……놓고 앉아.”

“…….”

“한태영.”

은재가 이름 세 글자를 부른 후에야 태영이 약한 숨을 터뜨리며 손을 놓았다. 누가 봐도 아쉬움이 철철 묻어나는 얼굴로 손을 놓고, 보란 듯이 느릿하게 걸어 테이블 쪽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태영의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은재는 그 손을 잠시 바라보다 벽 쪽에 붙어 있는 서랍장 쪽으로 다가갔다.

소독약과 연고를 들고 돌아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태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영은 욕실로 향하더니 사용하지 않은 수건을 꺼내 적셔 왔다.

“손 주세요.”

태영은 은재의 손을 붙잡아 묻은 피를 닦았다. 피가 흐르는 것은, 다친 쪽은 저인데도 은재의 손을 붙잡아 손등과 팔에까지 묻어난 피를 닦았다. 당연히 은재에게 묻은 오염을 닦아 내는 게 먼저라는 태도였다.

“안 다치셨죠.”

“…….”

“깨진 거 만지고 씻기는 했는데……. 따가운 데 있으면 말하세요. 다치시면 안 돼요.”

그러면서 혹여나 제 손에 상처를 입었을까 손을 더듬어 가며 상처를 찾았다. 은재는 하얀 수건으로 옮겨 가는 붉은 선혈을 보며 숨을 뱉었다.

“손 줘.”

“…….”

“다친 거 너잖아.”

“치료해 주실 거예요?”

“치료해 달라고 그렇게 있던 거 아니었어?”

“그건 아니었는데……. 좋네요. 앞으로도 그래야겠어요.”

은재는 태영의 손등 아래로 흘러내린 피를 닦으며 눈썹을 구겼다. 대놓고 노려보는 얼굴에 태영은 피식 웃으며 수건을 가져갔다.

“피는 제가 닦을게요. 만지지 마세요.”

다이닝 룸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당장 터질 것 같은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보이더니. 지금의 태영은 평소와 비슷해 보였다. 평소 같은 무덤덤한 얼굴로 흘러내린 피를 닦으며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컵이 깨졌어?”

“네.”

“……갑자기?”

누가 봐도 믿지 못하겠다는 어투였다. 태영은 소독 솜으로 손바닥을 조심스레 닦는 은재를 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싸한 냄새가 주변으로 퍼졌다. 상처에 소독약이 닿으며 아직 남아 있는 상처를 적셨다. 태영은 그런 고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저 은재만을 응시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

“…….”

“그러지 말라고.”

“뭘요?”

다행히 상처가 깊지는 않았다.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바르니 피도 나지 않았다. 은재는 그 위에 커다란 밴드를 둘러 주며 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그 시선을 마주했다.

“컵 이야기 하시는 거 아닌 것 같은데.”

“…….”

“그럼 이사님도 다른 알파 냄새 묻혀 오지 마세요.”

“태영아.”

“네.”

태영은 대답하며 동시에 은재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짙은 눈동자에 기다렸다는 듯 은재가 비쳤다.

“아직도 컨디션 안 좋으세요?”

“놔.”

“페로몬 불안정해요.”

그 손을 풀어내려 은재가 애를 써 보았지만, 단단한 손은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애써 치료해 놓은 상처에 다시 피가 번지는 게 보일 정도인데도, 태영은 더더욱 단단히 은재의 손을 쥐었다.

“태영아.”

“아까는 이렇게 불안정하지는 않았는데. 자꾸 새어 나와요.”

“……손 아파.”

강하게 손을 쥐고 있던 힘이 아프다는 말에 불쑥 풀어졌다. 은재는 아직까지도 저릿저릿한 그 손을 내려다보다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냥…… 더 이상 말을 섞지 않는 게 나을 듯했다.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는 아이에게 어떠한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태영의 말대로, 페로몬이 불안정하기도 했으니까. 이럴 때 그 원인인 태영을 보는 건 적절하지 않았다.

“이만 나가 봐.”

“화나셨어요?”

점점 더 피로감이 진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페로몬이 망가진 은재에게 오늘 하루는 너무나 길었다. 달갑지 않은 알파들과의 정찬, 세헌과의 일, 그리고 역시 알파인 의준과 태영까지.

“나가 봐. 쉬어야 할 것 같으니까.”

하지만 태영에게 그 피로한 일에 대한 짜증을 내고 싶지도 않았다. 태영의 태도에 휘말리는 모습도 이제 그만 보여야 했다.

이미 늦은 것 같았지만 은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이사님.”

그러나 두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은재는 걸음을 멈췄다. 태영이 다가와 은재를 끌어안았다. 뒤에서 마른 몸을 조이듯 끌어안으며 어깨에 이마를 묻고 있었다.

“……화내지 마세요.”

“하아…….”

“화내지 마세요. 이사님 화나게 하려고 그런 거 아니에요.”

크고 무거운 열기가 뒤를 덮쳤다. 그러곤 마치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어깨에 이마를 묻어왔다. 조심스럽게 은재의 허리를 안으며 숨을 뱉었다.

“……이사님 페로몬이 불안정하잖아요.”

“…….”

“마음이 안 놓여요. 어떤 사람들인지 아는데…… 그 사람들 속에 이사님 보낼 수가 없어요.”

쿵, 쿵. 닿아 있는 태영의 가슴에서 박동하는 심장이 느껴졌다. 은재는 점점 더 커지고 빨라지는 그 박동을 느끼며 손을 들어올렸다.

이렇게 하는 것이……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태영의 머리카락 속에 손을 넣어 흩트려 놓았다.

태영이 알파라는 것도, 이렇게 있는 것이 그렇게 합당한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어릴 적 모습이 그 틈새로 떠올랐다.

영리하던 아이.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던 아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

“너도 그러니까 그만해.”

천천히 은재가 뒤를 돌았다. 조금 전까지 절 끌어안고 있어 바로 눈앞에 있는 태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황스러워.”

“…….”

“네가 이렇게 구는 거,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나 네 보호자야. 내가 널 키웠어.”

“…….”

“……네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생각하는 거라면.”

“그게 뭔데요.”

태영은 그 거리를 더더욱 좁히려 들며 기어코 은재의 허리를 다시 끌어안았다. 서로의 하체가 맞닿고 곧 가슴이 맞닿는 가까운 거리에서 은재를 끈질기게 내려다보았다.

“응? 그게 뭔데요…….”

“내가 네 처음이잖아.”

“…….”

“그래서 그래. 그런 감정 아니야.”

쿵쿵. 여전히 태영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은재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태영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뒤로 물러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잠잠히 말했다.

“헷갈리는 거야.”

“…….”

“너는 착하고 맹목적인 아이였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야.”

“…….”

“내가, 널 잘 챙겨 주지 못하기도 했고 애정이 부족했을 테니까……. 잘못 생각하는 거야. 헷갈릴 수 있어. 한 번도 엇나가지 않았잖아. 그래서 뒤늦게 잘못된 생각을 하는 거야.”

온종일 페로몬에 시달려 버거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태영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게다가 난 오메가고, 너는…….”

그 연약한 손길에 태영은 크게 숨을 삼키며 은재 쪽으로 몸을 쓰러트렸다. 놀라 바르작거리는 움직임에도 그 큰 몸을 구겨 안기며, 곧 은재의 허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척추를 따라 느릿하게 손을 움직이며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눈을 맞췄다.

급하게 몸속으로 도망치듯 숨는 숨소리가 고스란히 들리는 곳이었다.

“…….”

“…….”

열기로 가득 찬 눈동자가 파랗게 빛나며 절 올려다보고 있었다.

은재가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그 눈빛에 숨통이 틀어막히는 것만…… 같았다.

“이사님은…… 제 처음이에요.”

“…….”

“그래서 오해할 일 없어요.”

닿아 있는 하체 부근에서 태영의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태영은 순간 놀라 멀어지려는 은재의 허리와 손을 낚아채며 더욱 허리를 깊게 숙여 그 품에 안겼다.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조금 더 아래의 상황이 선연히 느껴졌다. 도드라진 허벅지의 굴곡에 은재는 뻣뻣하게 굳어졌지만, 태영은 오히려 지그시 제 허벅지를 은재의 몸에 눌러 붙였다.

“몇 번이나 상상했는데. 그래서 지금도 꿈에 나와요.”

“…….”

“이 나이에 전 아직도 몽정해요. 매번 이사님이 꿈에 나올 때마다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럴수록 닿아 있는 것이 더 힘을 얻는 게 느껴졌다.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는 그것이 더 힘을 받아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묵직하고 뜨겁게 은재를 짓눌렀다. 조금씩 비벼지며 그 무게가 절 각인시키려 했다.

“이사님이 절 보고 웃으면서 입을 맞춰 주면 알 수 있어요. 아, 꿈이구나.”

이미 다 커진 것 같은데도 그것은 계속해서 크기를 키웠다.

“전 7년 동안 이 생각만 했어요.”

“…….”

“이사님 알파가 되는 생각. 이사님한테…… 제 페로몬 잔뜩 뿌려 놓는 생각만 했어요. 매일 그 모습을 상상했어요.”

“……그런 거 아닐 거야.”

“그럼 왜 서요.”

“…….”

“왜, 이사님 벗은 몸 생각하면서 몽정하는 건데요. 저는.”

휘둘리지 않으려는 마음은 물에 녹은 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흐릿하게 남은 감각이라도 붙잡으려 했지만 하체를 맞대고 제 열기로 짓누르는 알파 앞에서는 그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하필, 오늘. 왜 하필…….

“이러지 마.”

은재는 이를 악물고 태영을 밀어냈다. 그럼에도 한참 은재의 허리를 끌어와 몸이 아플 정도로 끌어안고 있던 태영은 한참 뒤 은재를 놓아주었다.

“정말 몸 괜찮은 거 맞아요? 아니면…… 곧 히트 사이클이세요?”

“……나가.”

더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차라리 아예 집을 나가거나 해서 이 오묘한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머리 한구석에서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태영의 앞에서는 그게 쉽지 않았다.

페로몬 때문일까. 망가진 페로몬 때문에 이렇게 단호해지지 못하는 걸까.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으면서 그래도 키웠던 정이 있어서 그런 걸까.

제가 제대로 된 보호자가 아니라서, 더 강하게 나가지 못하는 걸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걸 알면서도 혀가 굳어졌다.

“한 번만 더 이러면, 다시 안 봐.”

태영은 페로몬을 풀지도 않았는데 은재의 상태는 급격히 안 좋아졌다.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모습에 태영은 눈썹을 구기며 은재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은재는 태영을 밀쳐내며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다. 할 수가 없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주세요.”

“…….”

“약도 미리 준비하고 있을게요.”

은재가 쓰러지듯 의자에 앉아 이마를 감싸고 나서야 태영은 자리를 벗어났다. 무겁게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은재는 거듭 한숨을 뱉었다.

그렇게 앉아 있으니 몸이 쑥 아래로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페로몬과 열이 뒤섞여 달려드는 것 같았다. 은재는 무거운 몸을 세워 약병을 찾았다. 대충 물로 약을 한 움큼 삼킨 뒤 커튼을 샅샅이 치고 불을 껐다.

암흑 같은 수면이 은재를 그대로 덮쳤다.

* * *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오늘은 집에서 쉬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약 먹었으니 버틸 수 있습니다.”

“……최 박사를 부를까요?”

“…….”

“이사님.”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냥 가죠.”

다음 날, 강 비서는 차 문을 열어 주면서도 더욱 안 좋아진 은재의 안색에 걱정 어린 표정을 해 보였다.

그저 어제 겪었던 여러 페로몬의 여파로 두통이 조금 남았을 뿐이었다. 속이 좋지 못하기는 했지만, 이런 건 괜찮았다. 약도 충분히 먹었고…….

“이사님.”

“…….”

은재는 절 부르는 목소리를 외면하며 차에 올랐다. 이른 시간부터 내려와 저를 애타게 바라보는 태영을 꿋꿋이 무시하며 차에 타 눈을 내리감았다.

“출발하겠습니다.”

기사가 은재와 태영을 번갈아 살피며 말했다. 은재는 대답하지 않았고, 차는 결국 매끄럽게 저택을 빠져나갔다.

우두커니 선 태영은 그 장면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권태로움과 지끈거리는 두통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은재를 괴롭혔다. 혹시 몸살인가 싶어 뒤늦게 다른 약을 챙겨 먹었지만 약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오전 일정을 보내고 진한 커피를 더 들이부어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섰을 무렵이었다. 순간 앞이 핑 돌며 다리가 풀렸다. 배 속이 근지럽고 빈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제 페로몬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 사이에서 급하게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히트 사이클. 히트 사이클이 올 때와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데. 7년 전 망가진 페로몬 때문에 이제 히트 사이클을 정상적으로 보낼 수 없었다. 유도제를 맞고 터뜨려야만 했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는 없었다.

‘각인 상대의 페로몬을 다시 받으면 됩니다. 만약 각인으로 인해 페로몬이 망가진 게 아니라면 영영 돌릴 수 없지만, 이사님의 경우는 분명한 각인으로 인한 증상이니…….’

최 박사의 탄식 어린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점점 더 다리가 풀렸다. 테이블을 잡고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은재는 약한 신음을 뱉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덜덜 몸이 떨렸다. 7년 만에 느껴 보는 감각이 강렬하게 몸을 뒤흔들었다. 이전에 느꼈던 아찔함보다 몇 배는 더 거세져 소용돌이쳤다.

알파의 페로몬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토록 강하게 터져 나와 페로몬 샘을 망가뜨렸던 그 페로몬을 달라 재촉하고 있었다. 몸 안을 거세게 쥐어짜고 있었다.

“아흑…….”

‘만약 다시 각인 상대와 만나시게 된다면, 그래서 다시 페로몬 교류가 일어난다면 히트 사이클이 돌아오기는 할 겁니다. 주기를 찾을 때까지는 불안하게 터지겠지만…….’

“안 돼, 안……. 아…….”

시간이 지날수록 배 속이 더 꼬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 사이가 젖고 있었다. 살갗에 온통 소름이 돋아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가, 강 비서…….”

은재는 풀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여 핸드폰을 쥐었다. 강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최 박사에게 연락을 하라고 전했다.

다급히 문 밖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은재는 더욱 크게 숨을 삼키며 팔을 감쌌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쥐었다.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강 비서. 아마 그일 거라고 추측하며 전화를 받았다. 시야마저 가물가물해 제대로 글씨도 인식이 되지 않았다.

“……빨리, 어떻게 좀……. 최 박사…….”

전화기 너머에서 놀란 음성이 전해졌다. 무어라고 마구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이제는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하아……. 버티기가, 어려워…….”

결국 은재는 그대로 쓰러졌다. 몸이 경련하며 팔다리가 저릿저릿하고 몸 안이 근지러웠지만 방도가 없었다. 열이 불쑥불쑥 올랐다. 숨이 가빠지고 한기가 들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다급히 문이 열리며 들어온 남자는 서둘러 은재에게 달려와 입고 있던 제 재킷을 벗어 몸을 감쌌다.

“으, 응…….”

은재는 저를 감싼 그 재킷을 구명줄처럼 쥐며 몸을 말았다. 커다란 손은 제 겉옷에 몸을 움츠려 숨은 은재를 더더욱 단단히 쥐었다.

커다란 손 위로 파르르 떨리는 흰 손이 겹쳐졌다. 그렇게 서로의 손을 안타까울 정도로 붙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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