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9)

4

“…….”

새벽녘, 태영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도저히 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요 근래 성장통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심했다. 이 나이까지 성장통이 있는 건가. 언제까지 성장통이 있는 거지. 열여섯 살이 된 태영은 작년부터 부쩍 심해진 성장통에 잠 못 이루기 일쑤였다.

그에 비해 키는 느리게 자랐다. 보다 못한 은재가 보약을 지어다 줄 정도였지만, 겨우 5센티미터가량 자란 게 전부였다. 무릎 아래가 잘려 나가는 듯한 통증에 비해 우스운 결과였다.

고통스러운 낯의 태영은 욱신거리는 무릎과 관절을 내려다보다 욕실로 향했다. 이럴 때는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해야 했다. 차갑게 전신을 얼려야 조금 통증이 가셨다.

덕분에 태영은 매일같이 새벽부터 찬물로 샤워를 해야 했다. 그러곤 묵묵히 계단을 내려왔다.

이른 새벽이라 저택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아직 동이 트기에도 한참 남은 시간이었다. 그 어둡고 묵직한 고요를 느끼며 부엌으로 향했다. 태영이 종종 이렇게 내려오는 것을 알기에, 정 실장이 미리 밖에 내어놓은 보약과 물을 마시며 아픈 무릎을 두드렸다.

그래도 통증이 남아 있어, 태영은 창을 열고 바깥에 서려 있는 차가운 공기를 마셨다. 깊게 숨을 삼키고 뱉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차 한 대가 느리게 정원을 가르며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딘가 은밀한 공기를 지닌 차는 왠지 모를 향과 함께 평온하게 잠들어 있던 정원을 일깨우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 안에서 내리는 건 다름 아닌 은재였다. 태영은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뒤 곧장 밖으로 나서려 했다. 설마 이 시간에 퇴근하는 것인지 여쭤보고 인사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그 옆에서 내리는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낯선 얼굴의 남자였다. 그는 점잖지만 서두른 걸음으로 다가가 은재의 옆에 섰다. 자연스럽게 은재의 어깨와 손을 붙잡으며 얼굴을 매만졌다.

태영은 나서려던 걸음을 순간 뒤로 물렸다. 밖에서 이쪽이 보이지 않을 것을 알지만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어둠 속에서 심장 박동이 쿵쿵, 거센 북을 울렸다. 희미하게 새어 드는 대화 소리와 알 수 없는 기운이 불쾌하게 태영의 심장을 붙잡아 뒤흔들고 있었다.

“내일 들어가라니까.”

“이미 날 바뀌었어요.”

“그 뜻이 아니잖아. 충분히 쉬고 가지. 이렇게 새벽에 와야겠어?”

“그러게 혼자 온다니까요.”

“은재야.”

남자는 다정한 음성을 내며 은재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은재는 미소 지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이제 가요. 뭐가 걱정이라 이 시간에 여기까지 쫓아와요.”

“꼭 말을 그렇게 하지. 몇 시간 전까지 내가 붙잡고 있었는데 그럼 혼자 보내?”

“뭐 어때서요.”

“난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랑 잔 오메가가 옆에 없는 거 싫어해. 그리고 나랑 잔 오메가를 혼자 보내는 건 더 싫어하고. 어느 알파가 자기 오메가를 이렇게 보내.”

“난 나랑 잔 알파가 이렇게 목매는 거 싫던데.”

나른한 얼굴의 은재가 어깨를 으쓱이다 남자의 어깨를 밀어냈다.

“내가 그쪽한테 그냥 오메가예요?”

“무슨 뜻이지?”

“자꾸 오메가, 오메가 하길래. 나 말고 다른 오메가를 옆에 둬도 될 것 같아서.”

“이런, 그런 뜻 아니야.”

“그럼 말버릇 고쳐요. 안 고치면 더 못 만나요.”

“미안해. 실수야. 고칠게.”

남자는 점잖고 다정한 얼굴로 사과하며 은재의 뺨에 입 맞추었다. 거절하는 기색 없이 입맞춤을 받은 은재는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키스해도 돼?”

“많이 했던 것 같은데.”

“한 번만.”

“그럼 여기에 해요.”

은재는 옅게 권태로움이 스친 얼굴로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남자는 그 손을 깍지 껴 잡으며 애무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안쪽의 살을 미끄럽게 매만지며 헤어짐의 입맞춤이라고 하기에는 진한 입맞춤을 손등에 내렸다. 약하게 숨을 터뜨린 은재가 재차 남자를 밀었다.

그제야 남자는 아쉬움이 잔뜩 남은 얼굴로 멀어졌다. 천천히 차에 오르며 마지막까지 인사를 건네고 또 건넸다. 은재도 남자를 제법 마음에 두고 있는지, 차가 정원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차가 사라지고 나서야 옅은 숨을 몰아쉬며 안으로 들어섰다. 나른한 얼굴로 걷던 은재는 방이 아닌 부엌으로 방향을 바꿨다. 물을 마시려는 모양이었다.

본능적으로 태영은 몸을 더 깊게 숨겼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부엌과 연결된 통로 안쪽에 들어가 숨을 삼켰다.

쿵쿵쿵쿵, 이전보다 훨씬 더 선명해진 북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손으로 입을 누르고 숨을 삼키는 데도 살갗에 이유 모를 불쾌감이 돋아나 있었다. 질끈 눈을 감으며 무엇인지 모를 것을 외면하려 했다.

“……하.”

은재는 차가운 물을 마시며 거듭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런 그에게서 낯선 향이 느껴졌다. 이전, 태영이 맡았던 그 꽃향. 싱그러운 과일향. 그리고 그 주변을 감싼 탁하고 무거운 향.

그 남자의 향이 묻은 것이라는 걸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태영은 그 향이 제 비강을 스쳐 뇌 한중간을 가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손을 말아 쥐었다.

소리가 조금 가신 심장은 대신 깊은 배 속으로 무겁게 추락했다.

어느새 성장통은 가셔 있었다. 쪼개질 듯 아리던 무릎 대신 머리 깊은 곳에서 다른 무지근한 통증이 일었다.

그 통증의 이름은 아직 알 수 없었다.

태영은 은재가 사라지고도 한참 뒤에야 방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방에서도 왠지 모를 기분에 다시 잠을 이룰 순 없었다. 잊을 만하면 원인도, 어디서 이는지 알 수도 없는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침대에 누워는 있었지만 뜬눈으로 남은 새벽을 보냈다.

“안색이 안 좋은데.”

당연히 밥도 잘 먹히지 않았다. 느리게 자라는 키 때문에 태영은 어떻게든 끼니를 챙기려 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통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다이닝 룸에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어제도 성장통 때문에 고생했구나.”

그리고…… 이렇게 바로 은재와 마주칠 거라 생각하지 못했고.

태영은 몇 술 뜨지도 못한 수저를 내려놓았다. 새벽과 달리 정갈해진 모습의 은재는 태영의 그릇을 넌지시 살피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약이 효과가 없나.”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태영은 그 얼굴 위로 지난 새벽 보았던 그의 얼굴을 덧씌웠다. 남자와 퍽 다정한 분위기로 서슴없는 스킨십을 하며 나른하게 웃던 얼굴.

익숙한 얼굴이 아니었다. 단정하게 슈트를 차려입고 머리를 넘기고 타고난 듯한 고상함을 두른 것이 훨씬 더 익숙했다. 편안한 옷을 입고 휴식을 취할 때에도, 새벽처럼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분명 그에겐 제가 모르는 얼굴이, 제가 볼 수 없는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태영아.”

문득 몇 년 전 방문 앞에 죽을 내려다 놓으며 마주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히트 사이클. 오메가. 그 불필요한 단어들이 자꾸만 그를 향한 존경심에 제동을 거는 것만 같았다.

“……출근하세요?”

“응. 해야지.”

“…….”

“많이 불편하니? 최 박사님 오시라고 할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열여섯. 미성이던 태영의 목소리가 조금씩 변해 가는 시기였다. 그래서 그러는 걸까. 은재는 태영이 속내를 털어놓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보며 작게 숨을 뱉었다.

“많이 힘들면 오늘은 쉬어도 돼.”

“…….”

“학교에 전화해 줄게.”

“아니에요. 다녀오겠습니다.”

은재가 태영의 어깨에 손을 짚으려 하자, 태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챙겨 온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쩐지 태영이 제 손길을 피한 것 같은 기분에 은재는 살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힘들면 일찍 들어와.”

“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은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태영은, 처음 저택에 발을 디딘 순간보다 성큼 더 자라난 태영은 여전히 작은 아이였다. 은재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소년이었다. 태영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오히려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 은재였다. 저도 한때 민 회장에게 비슷한 감정을 가졌다. 모든 것이 멋있어 보이고 존경스럽던 그때. 저와 민 회장에 대해 도는 소문을 듣고 나서는 금세 식어 버린 마음이지만, 그래도 은재는 민 회장을 마음 깊이 존경했다. 정직하고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그 대쪽 같은 심사를 닮으려 애를 썼다. 지금도 제일 존경하며 닮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그 마음이 태영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와는 조금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성격이 다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인정받고 싶어 하고,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그 마음만큼은 닮아 있었다.

도리어 은재가 어린 태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를 때도, 먼저 다가온 건 태영이었다.

그러니까…….

“태영아.”

은재는 태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금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태영은 이번에도 손을 피해 옆으로 물러났다. 스스로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

“…….”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열여섯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수줍음도 많고, 쑥스러움도, 애교도 많은 태영은 은재의 손길이 닿는 것을 기뻐했다. 가끔 머리를 만져 줄 때면 귓바퀴까지 붉히며 수줍은 얼굴로 웃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전에 없던 일에 둘 다 당황해 그대로 굳어졌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피해 놓고 제가 더욱 놀란 태영은 눈을 크게 뜨며 은재를 응시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다시 황급히 시선을 돌려 인사했다.

급한 걸음이 현관으로 이어졌다. 은재는 다이닝 룸에 홀로 남아 태영이 차를 타고 정원을 지나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세헌이가 온다고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네.”

이제는 차가 정원을 밀고 지나간 소리마저 들리지 않도록 멀어져 있었다. 은재는 조금 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숨을 삼켰다.

“정 실장님.”

“네. 이사님.”

“요즘도 태영이 성장통 때문에 힘들어하나요?”

“그러신 것 같습니다. 어제도 새벽에 일어나신 것 같더라고요.”

“……새벽에요?”

순간 스치는 새벽의 기억에 은재가 작게 움찔했다.

“꼭 그때 일어나시면 찬물을 드시는데, 어제도 드신 것 같습니다. 제가 보약과 함께 테이블에 꺼내 놓거든요. 그래야 통증이 나아지신다고요.”

“아…….”

그게 몇 시쯤인지는 모르겠지. 아이가 더 먼저 내려왔다가 올라간 걸까. 아니면 후에 내려온 걸까. 무언가를 본 건 아니겠지. 딱히 저택에 돌아와서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으니까…….

은재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애써 정리하며 고개를 저었다.

“태영이 신경 좀 써 주세요. 혹시 계속 무릎이 아프다고 하면 최 박사님을 다시 불러야 할 것 같네요.”

“네, 이사님.”

정작 은재는 제 식사는 챙기지도 못한 채 곧장 출근길에 올랐다. 가시지 않은 피로와 묘한 기분이 심장 주변에서 점점 요란해지기 시작했다.

태영이가 그 남자를 본 걸까. 그 남자와 있는 장면을 봐서 그런 걸까.

“저, 이사님. 기사 빨리 확인하셔야겠습니다.”

그러나 은재는 회사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재촉하는 강 비서의 얼굴에 제 방으로 뛰어 올라가야 했다. 저와 그 알파의 스캔들 기사가 터져 있었다.

지난 새벽에 그렇게 들어온 것이 역시나 무리한 일인 모양이었다. 그의 오피스텔에서 나오는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다.

은재는 그 남자와의 연애를 공개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민 회장이 곁을 떠난 지도 2년이 지났지만, 불쾌한 소문은 항상 곁을 떠돌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누군가와의 열애설 기사가 터진다면 곧장 은재에게 타격을 남기게 되었다.

몇 년 만에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해 어렵게 시작한 사이였는데…….

하지만 사진은 너무나 직접적이었다. 가까운 사이가 분명한 모습이었고, 함께 한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까지 명확하게 나와 있었다. 부정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실시간으로 크게 움직이는 주가를 확인한 은재는 그와 연락을 주고받고, 당장 진행되고 있는 사업의 내역을 바삐 확인했다. 협력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던 내역도 모두 꼼꼼하게 검토한 후에야 인정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맺었다. 곧장 공식적인 발표가 이어졌다.

굳이 연애사의 일부분을 공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괜히 흐지부지한 관계로 남았다가 앞으로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를 악물고 한 번 인정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신뢰를 가지고 가는 일이었다.

물론, 주가는 기다렸다는 듯 바닥을 쳤지만.

2년 만에 사귄 연인이었으나 세간에서는 역시 그러한 시선으로 은재를 보고 있었다.

황당한 숨이 연신 터져도 은재는 오늘 해야 할 일을 뒤늦게 살폈다. 이제 일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더 이상 그런 상념 따위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강 비서. 기획팀 회의 보고서 올리라고 해 주세요.”

무언가 잊은 듯했지만, 지금 해야 할 일에 빠르게 몰두했다.

민 회장님이 계셨으면 어떻게 처리하셨을까. 문득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은재는 진한 커피에 그 생각마저 녹였다.

그리고 저택에 돌아오고 나서야 은재는 제가 잊은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렸다. 태영이었다.

“오늘 태영이 몇 시에 들어왔나요?”

“평소처럼 수업 다 들으시고 오셨습니다. 오늘 일정 무리 없이 소화하셨고요.”

“컨디션은 괜찮아 보이던가요?”

“네. 평소와 똑같으셨습니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잠자리에 들었을 수도 있었다. 굳이 아이를 내려오게 해서 볼 필요는 없었다.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아이에게 중간에 전화를 걸어 몸은 좀 어떤지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일을 시작하고 나니 또 정신없이 일에 파묻혀 있기만 했다.

“잠깐 올라갔다 와야겠네요.”

저택에 들어올 때 태영의 방 불이 켜져 있었는지, 꺼져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무심한 제 처사에 은재는 결국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태영아. 자니?”

“…….”

희미한 소리로 노크를 하며 물었다. 하지만 방 불은 꺼져 있었고, 그 외의 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2층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서늘하고 고요했다.

“태영아.”

“…….”

차마 방문을 열지는 못하고 옅은 소리로 한 번 더 아이의 이름을 부르다 다시 몸을 돌려 나왔다.

복도 끝에는 여전히 저와 민 회장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태영이 처음 펜싱 대회에서 1등 했을 때 찍은 사진도. 은재는 그 사진들을 한참 바라보다 뒤늦게 1층으로 내려왔다.

또 한 번의 무심한 새벽이 그렇게 흘러갔다.

“태영아. 오늘 세헌이 오기로 했는데.”

“오늘요?”

“한때 세헌이가 펜싱 유망주였거든. 좀 도움이 될까 싶어서. 운동 하는 거 결정 아직 못 했잖아.”

“아, 네. 일찍 올게요.”

다음 날, 등교를 위해 먼저 식사를 하고 있던 태영의 맞은편에 은재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재의 앞으로도 아침 식사가 차려졌다.

자연스럽게 둘은 시간을 나누게 되었지만, 어쩐지 묘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대화가 오가는 데도 투박한 정적이 공존했다.

“어제도…… 아팠던 거야?”

넌지시 컵을 내려놓으며 묻자 태영은 역시 어색한 얼굴을 만들며 고개를 저었다. 은재는 태영이 저와의 접촉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아프면 꼭 말해야 해.”

“그냥 펜싱 연습 때문에 그런 걸 거예요.”

“그럼 마사지라도 받게.”

“네.”

다녀오겠습니다. 태영은 아직 식사가 절반이나 남았는데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

은재는 어딘가 흩어지는 음성으로 물었다. 애써 상 위에 고정한 시선은 태영을 향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나이프를 움직이고 있었다.

“요즘도 새벽에 내려오니?”

“…….”

태영은 잠시간 침묵했다. 그 짧은 침묵이…… 얼마 되지 않는 침묵이 무겁도록 잔인하게 흘렀다.

“아니요.”

그리고 태영은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삐끗, 은재가 들고 있던 나이프가 그 대답과 동시에 빗나갔다.

“요즘은 샤워하면 괜찮아져서요. 안 내려와요.”

“…….”

“다녀오겠습니다.”

은재가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사이, 태영은 꾸벅 인사하고 완전히 다이닝 룸을 나섰다.

그러나 은재의 피부 위에는 희미한 소름이 돋아 있었다.

은재는 서둘러 일을 마친 뒤 태영보다 일찍 저택에 돌아왔다. 그와 비슷하게 도착한 세헌은 오랜만에 방문한 저택의 정원을 한 바퀴 돈 후에야 응접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굴 안 좋네.”

“그런가.”

“어. 왜 그래. 기사 때문에?”

기사의 여파는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강 비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돌릴 연예계 기사를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몇 시간 뒤면 그 기사로 관심은 옮겨 갈 것이었다. 애초부터 정재계 인사의 연애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이쪽 사람들에게는 한동안 가십거리가 되겠지만.

“여러모로.”

“이미지 안 좋은 사람 아니잖아. 그동안 판결했던 것도 보니까 대중적인 생각으로 잘 맞게 했고. 자수성가한 편이고.”

“애초에 그 사람이 판결한 재판들이 이렇게 공개되는 게 비정상적인 일이잖아.”

“……그렇기는 하지.”

은재는 표정을 지우며 차로 입술을 축였다. 별로 입맛은 돌지 않았지만 입술이 이유 없이 말라 건조했다.

“만지지 마. 피나잖아.”

“아.”

차로 입술을 축인다고 축였는데도 잠시만 생각을 놓으면 입술에 손이 갔다. 느른한 자세로 앉아 있던 세헌은 몸을 일으켜 그 손을 붙잡았다. 피가 나는 입술을 건드리며 제가 더 아픈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뭘 바르든가 하지. 왜 만져.”

“내가 할게.”

“됐어. 피 더 나잖아.”

세헌은 옆에 있던 티슈를 뽑아 은재의 입술을 꾹 눌렀다. 은재는 제가 하겠다며 그 손을 몇 번이나 밀어냈다. 하지만 세헌은 밀리지 않고 피가 나지 않을 때까지 그 입술을 눌렀다.

“너 자꾸 이런 식으로…….”

“…….”

은재는 세헌을 밀어내다 그 시선 끝에 걸리는 작은 인영을 발견했다. 태영이었다. 태영이 뒤늦게 인기척을 내며 제가 왔음을 알렸다.

“꼬맹이 왔냐.”

굳어진 은재와 달리 세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제 손에 묻은 피를 닦으며 앉으라는 듯 제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저 옷 갈아입고 올게요.”

“그래.”

은재 대신 세헌이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대답했다. 은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영아.”

평소 같은 걸음으로 걷는 태영의 뒤를 쫓아 나섰다. 태영은 절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아니야. 옷 입고 천천히 내려와.”

“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 은근하게 엇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괜한 말만 하고 다시 응접실에 돌아왔다.

“왜 그래?”

그새 차를 비운 세헌은 눈썹을 작게 구기며 물었다.

“요즘 좀 그래. 태영이랑.”

“꼬맹이랑? 왜. 사춘긴가?”

“……그런가.”

“한창 그럴 나이지. 솔직히 꼬맹이 그 나이치고 순했어. 난 그 나이에 망나니였는데.”

그런 건가……. 저 나이 대면 어른들의 간섭이 귀찮게 느껴질 법했다. 그냥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한 것 같아.”

정말 들켰다면, 새벽의 그 장면을 본 거라면…… 조금 아득한 기분이 머릿속을 채웠다.

은재는 그나마 제일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는 태영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물러지는 순간은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 왠지 모르게 그런 순간들이 들키면 그런 것들이 모여 저를 뒤흔들 것 같았다.

또한 저는 태영의 보호자였다. 심지어 묘한 소문을 달고 있는 사람이니…… 태영에게는 그런 모습을 조금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태영이가 날 피하는 것 같아.”

“널? 꼬맹이가 너를?”

사춘기라면 그러는 게 당연한 나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태영이 그런 행동을 보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순하고 수줍음 많은 아이였으니 사춘기가 와도 크게 변화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 사춘기인가 보네.”

“…….”

“그래. 그럴 시기야. 어떤 열여섯 먹은 남자애가 어른을 그렇게 따르고 좋아하냐.”

하지만 세헌은 잘 알고 있었다. 은재의 그 묘하게 무심한 성격 덕분에 태영과 그렇게 많이 접촉하지도 않았으리란 걸. 그래서 태영이 더욱 은재에게 목을 맸음을.

그런데 그 아이가, 눈에 은재에 대한 호기심과 존경을 가득 담고 있는 아이가 은재를 피한다는 것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됐어. 신경 쓰지 마. 남자애들은 원래 그러면서 크는 거야.”

태영이 응접실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세헌은 그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했다.

“꼬맹이, 오랜만이다.”

“안녕하세요.”

“이야. 이렇게 보니까 많이 컸네. 곧 고등학교 간다더니, 이제 완전히 청년인데?”

정 실장은 새로운 차와 음료, 간식을 잔뜩 가지고 와 내려놓았다. 태영은 정 실장을 보며 감사하다 인사했다. 저도 모르게 태영이 하는 것을 지켜보던 세헌은 이내 은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넌 나가 있지.”

“왜?”

“나도 꼬맹이랑 긴밀한 시간 좀 갖자. 오랜만에 보잖아.”

“…….”

“원래 보호자가 있으면 못 하는 이야기도 있는 거야. 어?”

“괜찮겠어?”

은재는 세헌이 아닌 태영을 보며 물었다. 순간 멈칫한 태영은 곧 은재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눈 맞춤은 찰나였다. 태영은 다시 어설픈 표정을 만들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은재는 몸을 일으켰다. 영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눈치였지만 응접실을 벗어났다.

“정원에 있을게.”

“저, 이사님.”

“응. 말해.”

“……밖에 추워요. 카디건 챙겨 입으세요.”

묵묵히 시선을 떨어뜨리고 앉아 있던 태영은 은재가 응접실을 거의 다 벗어났을 무렵에야 말을 붙였다. 그 별거 아닌 대화에 은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태영은 잠시 그 얼굴을 보다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분명 뭐가 있기는 하네. 세헌은 새로운 차를 잔에 따르며 다리를 꼬았다.

은재가 문을 나서자마자 태영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왜 펜싱 안 하셨어요?”

“갑자기?”

“네. 그게 궁금했어요.”

펜싱에 대한 조언을 좀 해 주라고 해서 온 자리이기는 하지만, 다짜고짜 이렇게 대화가 시작될 줄은 몰랐다. 은근슬쩍 은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떠보려 했던 세헌은 짧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장남이거든.”

“…….”

“차남만 됐어도 운동했을 텐데, 내가 장남으로서 운동하겠다고 나설 수가 없었어. 그게 궁금했어?”

의준과 비슷한 대답에 태영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님은 저 운동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

“저는…….”

태영은 짙은 눈썹을 구기며 다시금 고개를 떨어뜨렸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충돌해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그 남자, 아세요?”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태영의 눈 위로 짙은 쌍꺼풀이 생겼다. 그 안에서 고요하게 타는 듯한 검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세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어떤 남자.”

“이사님이 만나시는 분이요.”

“기사 봤어?”

“네.”

“나도 잘은 몰라. 그래도 평판은 괜찮아.”

“꿍꿍이가 있는 사람은 아닌가요.”

그쯤 되자 세헌은 태영이 은재의 남자를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 어미 새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

“뭘 묻고 싶은 거야?”

곧 있으면 겨우 고등학교에 진학할 녀석이지만, 이르게 사회로 떨어져 나가 생활한 것 때문인지 그 나이보다 더욱 성숙하게 느껴지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애새끼 같기도 했고, 또 다 큰 청년인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의도로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존경심? 제 세계를 지키는 유일한 어른을 향한 순진무구한 욕심?

“좋은 사람이어야 해요.”

“…….”

“이사님을 만날 거라면, 꼭 좋은 사람이어야 해요.”

세헌은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제일 멋있는 분이세요. 다른 애들 부모님을 봐도, 형들을 봐도 이사님 같은 분은 없어요. 그렇게 멋있는 분 옆에 이상한 사람이 있는 건…….”

애새끼였구만. 세헌은 태영의 동그란 머리 위에 손을 턱하니 내려놓았다. 태영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세헌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열여섯의 치기 어린 눈동자가 묵묵히 세헌에게 향했다.

“은재가 알아서 할 거야.”

“…….”

“누굴 만난다고 해서 너한테 소홀해지는 일도 없을 거고. 그 남자한테 은재 뺏기는 그런 거 아냐.”

“그런 건 상관없어요.”

“…….”

“가끔 이사님이 아주 먼 곳에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는 하지만…….”

금세 고개를 털어낸 태영은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조금 헷갈려요. 이사님이 아빠인지, 형인지요.”

“…….”

“가족으로 묶인 사이가 아니라는 건 알아요. 그런데 저한테 펜싱을 해 보라고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모르겠어요.” 

“무슨 의미.”

“의준이도…… 부모님의 사업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운동을 해도 된다고 하셔서……. 그렇게 물러나 있으면 되는 건지 확신이 안 서요. 제가 뭘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더 이상 이사님께 가까워지면 안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

“이사님은 베타인 제가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세헌의 짐작보다 태영의 생각은 훨씬 더 큰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별안간 입양되어 온 아이. 하지만 가족은 아닌 사이. 그 사이에서 겨우 열세 살이었던 소년이 어떤 혼란을 가지고 자랄지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은재도 아마 그럴 테고.

“이사님 사업을 제가 감히 받겠다고 말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전 뭐든 이사님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혹시 제가 펜싱을 하겠다고 하는 게 부담이 되신다면……. 아니면, 제가 선을 넘고 있다면.”

“야, 꼬맹이.”

침착한 척, 어른스러운 척하고 있었지만 세헌의 눈에는 태영이 점점 더 자신 없는 모습을 내보이는 것이 보였다. 저조차도 제가 무엇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고, 왜 제가 서운한지, 기분이 왜 가라앉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생각이 많고 의젓한 열여섯인 것이었다. 세헌은 다시금 그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너 겨우 열여섯이야. 아직 열일곱 되려면 몇 달 남았고. 아직 어린애라고.”

“…….”

“은재가 해도 된다고 하면 해도 돼. 네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래, 알아. 네가 은재 엄청 신경 쓰는 거. 그래도 은재 능력 있어. 자기 필요 때문에 네가 휘둘리는 거 원치 않을 거야. 네 존재가 위협적이라서 운동으로 밀어주는 것도 아니고.”

“…….”

“넌 은재가 운동 관두고 사업 이어받으라고 하면 할 거야?”

“네.”

태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대답했다.

“이사님이 원하시는 대로 할 거예요.”

다만 지금은 은재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 헷갈린다는 얼굴이었다. 분명하게 말해만 준다면 뭐든 하겠다는 태도였다.

저 소년에게 목적이라곤 오로지 민은재 하나였다.

“선 밖에 있으라고 하시면 그렇게 하면 돼요. 이사님이 필요하신 거면 다 할 수 있어요. 옆에 있을 수만 있으면 돼요.”

중증이네. 세헌은 혀를 쯧쯧 차며 조금씩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었다. 은재의 소리였다. 일부러 제가 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소리를 내어 걷는 걸음.

“제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에요.”

똑똑. 응접실로 들어선 은재는 벽을 두드리며 제가 왔음을 알렸다. 그제야 태영은 표정을 풀고 은재를 바라보았다. 또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지만.

“나 너무 일찍 왔나.”

“아니에요.”

태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카디건을 입고 있는 은재의 모습을 살피더니 당장 응접실을 나설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전 이만 가 볼게요.”

“벌써?”

“네. 이야기 다 했어요.”

은재의 시선이 태영과 그 앞에 놓여 있던 트레이로 향했다.

“올라가 보겠습니다.”

줄지 않은 간식에 은재는 작게 숨을 내쉬었지만, 태영은 기어코 응접실을 벗어났다. 차마 그 뒤를 쫓지 못한 은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 했어.”

돌아온 은재에게선 옅은 담배 냄새가 풍겼다. 정원에서 담배 한 대를 태운 모양이었다.

“춥냐? 좀 걷게. 나도 담배 좀 피우자.”

다행히 은재는 거절하지 않았다. 으슥한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불을 꺼내 주는 게 전부였다.

빛이 없는 정원은 짙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녹음이 돌 때 눈에 띄는 다른 정원과 달리, 이 저택의 정원은 유독 가을에 사람들의 이목을 당겼다. 묵묵한 저택의 주인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지니기도 했고. 그래도 이렇게 빛도 없는 저녁에 보는 건 왠지 쓸쓸했다.

세헌은 붉게 물들었을 이파리를 하나 떼어 내며 손안에서 부쉈다.

“태도 똑바로 해야겠다, 너.”

흐릿한 불이 길게 피어나 세헌의 뺨 위에 그림자를 남겼다. 세헌은 차가운 바람과 함께 숨을 마시며 태영의 방이 있을 2층을 넌지시 올려다보았다.

“가족인지 아닌지 헷갈린대.”

그의 말과 함께 부연 연기가 짧게 피어올랐다.

“아직 네 의도를 헤아리기에는 어려. 네가 펜싱하라고 밀어주는 게 걱정인가 봐. 나나 의준이는 아버지 사업 때문에 운동 포기했으니까.”

“자기가 운동하는 게…….”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

은재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아이가 그런 고민을 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사춘기인가 했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네.”

담배를 피운 게 조금 전이지만, 은재는 다시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여 주겠다는 세헌의 손을 밀어내며 고개를 기울여 스스로 불을 붙였다.

긴 숨과 함께 은재가 가느다란 흰 연기를 뱉었다.

“자격 박탈이다.”

“과해. 거기까지 갈 문제 아냐.”

“의준이 이야기면…… 태영이 1학년 때 나온 이야기야. 지금 3년째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거잖아.”

“속 깊은 애잖아. 자기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거야.”

“…….”

“시간을 좀 줘.”

한숨 같은 연기가 은재의 잇새에서 몇 번이나 새어 나왔다. 은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잘근잘근 필터를 씹었다.

숨을 몇 번이나 뱉어도 도통 가슴이 시원해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무언가가 턱하니 가슴 한중간에 걸려 있는 듯했다.

그 뻐근한 조각의 일부를 느리게 입밖으로 꺼내놓았다.

“예전에, 히트 사이클 직후에 태영이랑 부딪친 적이 있었어.”

“…….”

“벌써 몇 년 전일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문득 그때가 생각나. 그때 조금 어색했거든, 우리.”

“몇 년 전이라면서.”

“응. 그런데 또 기사도 났으니까. 그것 때문에 그러는 줄 알았어.”

“…….”

“내 소문, 들었을 거야. 첫 파티에서도 시끄러웠고, 또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말할 테니까.” 

새벽의 일을 아이가 봤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은재는 그쯤에서 말을 멈췄다.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순 없었다. 저도 차마 짐작하지 못하는 태영의 혼란을 굳이 세헌에게 말할 필요 없었으니까.

“거기까지 가지 마.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으니까.”

정말 세헌이 말한 문제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일이 있는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새벽의 그 장면을 봤다고 해도 왜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제가 그런 소문을 달고 있는 보호자 아래에 있다는 것이 문득 부담스러워진 것인지. 아이를 데려오기로 결정한 후 제 소문에 대해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고마워, 오늘.”

“다음 주에 잠깐 봐. 나 다시 미국 들어가는 거 알지.”

“그래. 연락해.”

담배를 다 태운 세헌은 곧장 차에 올랐다. 은재는 차분한 얼굴로 그를 배웅했다. 홀로 남은 후엔 태영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

미미한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앞에서 희미하게 일렁이던 그림자가 곧 소리 없이 사라졌다.

“……여보세요.”

한동안 창문을 올려다보던 은재는 주머니에서 우는 전화를 꺼내 받았다.

―어, 나야. 은재야. 지금 시간 돼?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잠깐 괜찮아요.”

―목소리 별로 안 좋네. 무슨 일 있어? 갈까?

은재는 다시 정원 속으로 사라졌다. 아주 희미한…… 웃음소리가 은재에게서 새어 나올 즈음, 다시 창가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은재에게 닿지 못한 창가에는 연고가 놓여 있었다.

* * *

은재는 일단 세헌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저도 그 나이에는 온갖 생각으로 잠을 이루기 어려울 정도였다. 민 회장이 무슨 일 있냐며 자주 물어왔지만, 저도 잘 모를 정도로 그냥 모든 것이 복잡했다.

갑작스레 세상이 뒤바뀐 태영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기다려 주기로 했다.

가족은 아닌 사이. 펜싱과 사업. 그리고 새벽의 일과 몇 년 전의 일. 그 모든 것이 해답이라곤 없이 뒤엉킨 채 자연스레 길을 찾아가도록 놔두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원래 도대체 태영과 어떻게 대화를 했었나, 어떻게 마주 앉아 식사를 했었나 싶을 정도로 둘은 따로 움직였다. 그간 은재는 나름대로 태영에게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 사실 태영의 엄청난 노력으로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있던 것이었다.

식사를 하는 것도, 배웅을 하는 것도, 마중을 나오는 것도. 그 외에 함께 시간을 보냈던 모든 것들이 전부 태영의 노력이었다.

은재는 제 무심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태영의 곁에 정 실장을 붙였고, 제가 채우지 못하는 것을 다른 이들이 채워 주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저도 나름의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돌봤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은재는 태영을 아꼈다. 정을 받아 본 경험이 민 회장밖에 없어 서툴 뿐, 진심으로 태영을 제 아이라고 생각했다. 저의 소년이었다. 제가 평생 책임을 질 소년.

“오늘부터 일주일 쉴 겁니다.”

“네, 이사님.”

“그래도 저택에서 업무 볼 거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이르게 저택으로 돌아온 은재는 정원을 괜히 한번 돌아보며 정 실장에게 말했다.

“오늘 태영이 일찍 들어오라고 해 주세요. 식사 같이하게 준비해 주시고요.”

“네, 이사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는 동안, 태영과 제대로 식사를 하지도 못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면서도 아이가 혼자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하지 않도록 애를 썼는데. 그게 태영에게 충분히 닿았을지도 지금은 의심스러웠다.

“저 3층에 있겠습니다.”

조금 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걸까.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얼굴을 보며 함께 갖던 시간도 아직까지 피하는 걸까. 은재는 태영의 속내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시간을 줄 수도 없었다.

이제 몇 개월 뒤면 고등학교에 입학해야 했다. 아이는 여전히 펜싱을 하고 있었고, 공부도 곧잘 했다. 혹시 유학을 가고 싶어 하는지, 아니면 한국에서 고등학교 진학을 할 것인지를 알아야 했다. 과고나 외고 같은 데도 괜찮았고, 자사고도 나쁘지 않았다. 펜싱을 할 것이라면 아예 영국으로 가 더 체계적으로 운동을 배우는 방법도 있었다.

조금 더 빨리 의견을 물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늦은 것도 같았지만 은재는 이제라도 다시 태영의 곁에 다가가고자 했다. 일주일간 저택에서 업무를 보기로 하고 태영을 돌볼 셈이었다.

은재는 오랜만에 서류가 아닌 책을 펴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할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것에 정신을 팔고 싶었다. 태영을 기다리는 동안, 흡입력 있게 절 빨아들이는 이야기에 몸을 맡기고자 했다.

창밖에서는 싸한 바람이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파리가 없어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서늘하고 고요했지만, 겨울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렇게 책을 절반쯤 넘겼을 때…….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은재는 살짝 미간을 구기며 문을 열고 들어선 방문객을 응시했다. 태영이었다. 태영은 어째서인지 숨을 헐떡이며 은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살짝 구겨진 얼굴로 안색을 살피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이사님. 아프세요?”

“태영아.”

“일주일 동안 쉬신다고 들었어요. 몸…… 안 좋으세요?”

오랜만에 마주한 태영은 기억 속 태영과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고작 몇 주, 길어 봤자 2개월 정도가 지나는 동안 태영은 훌쩍 자라 있었다. 이제는 은재와 키가 비슷할 정도였다.

언제 이렇게 컸지. 이렇게 갑자기 크려고 그렇게 아팠던 걸까.

은재는 벌컥 문이 열렸다는 사실도 잊고, 그저 대견함과 묘한 감정을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쩍 자란 티가 나는데도 아직도 제가 보기에는 열세 살의 어린애 같았다. 씩씩하고 담담한 열세 살. 장지에서 비를 맞으며 동생들을 챙기던 열세 살. 저보다 더 듬직했던 열세 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태영은 아직까지 놀란 얼굴이었다. 좀처럼 놀란 기운을 추스르지 못했다. 은재는 그 얼굴을 보며 태영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흔들리는 표정이 보였다. 몸은 훌쩍 자랐어도 아직 앳된 기색이 얼굴에 드러났다.

“너랑 시간 좀 보내려고.”

“…….”

“네 학교 문제도 상의하고. 오랜만에 식사도 좀 하고. 너랑 대화한 지가 오래된 것 같아서.”

“아프신 건 아니고요?”

은재가 조심스럽게 태영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너무 오랜만에 이어지는 접촉에 태영은 부쩍 넓어진 어깨를 움찔, 떨었다.

“키가 많이 컸네.”

이제는 정말 자란 티가 나기 시작한 태영이었다. 원래도 길었던 팔다리가 더욱 길어졌고, 어깨와 가슴도 단단하게 넓어졌다. 꾸준히 펜싱을 해 와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단단하게 몸이 자란 느낌이었다.

그러나 은재의 손이 닿자 그 어깨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몸은 자랐지만 아직도 솜털이 남은 귓불이 자르르 일어서며 붉어지는 것도 보였다.

“아픈 거 아냐.”

“…….”

“태영아.”

“……네.”

목소리도…… 한결 낮아져 있었다. 은재는 소년의 성장을 새삼스럽게 살피며 태영의 두 손을 붙잡았다.

굳은살이 박인 손. 펜싱 검을 잡느라, 그리고 그 전부터 사회로 인해 박혀 있던 굳은살. 그것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은재가 태영과 눈을 맞췄다.

신중한 숨과 함께 두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해 줘.”

“…….”

“난 네 보호자잖아.” 

“…….”

“내가 너한테 좋은 보호자가 되어 주지 못해도, 부족한 사람이어도…….” 

“아니에요.”

은재의 하얗고 고운 손을 보던 태영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은재는 그 뺨에 손을 올려 들어 올리며 재차 시선을 맞췄다.

“제일…… 좋은 분이세요.”

조심스럽게 태영의 손이 은재의 그 손을 덮었다. 얼추 크기가 비슷해진 손이 흰 손을 덮었다. 하지만 손이 닿기가 무섭게 파르르 떨며 단단한 손이 떨어져 나갔다. 은재는 나긋하게 웃었다.

천천히 그 입술이 열렸다. 흐릿하게 숨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이야기 하나 해 줄까.”

제법 깊어진 태영의 시선이 은재의 그 입술로 향했다.

“난 그림을 좋아했어. 그때도 한 고집하시던 민 회장님은 나한테 말을 주셨지만, 난 말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꽤 재능도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데요?”

“그런데 포기했지. 회장님의 일을 급하게 이어받아야 했거든. 내가 나서서 포기했어야 했어.”

한참 지난 일에 대한 이야기지만, 태영은 은재의 말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태영이 네가 뭐든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어. 그게 뭐가 됐든. 네가 원하는 걸 다 해 주고 싶어, 나는.”

“…….”

“그리고…… 네가 괜찮다면 계속 네 보호자 하고 싶어. 나도 노력할게.”

부드러운 손이 태영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깃털 같은 아쉬움을 남기며 멀어졌다.

태영은 깊게 숨을 삼켰다. 언젠가부터 느껴졌던 그 간지러운 향이 지금도 나는지를 확인하며, 아닌 것에 이유 없이 안도했다.

“오늘 식사 같이 할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태영은 대신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 모습에 은재는 숨을 뱉으며 웃었다.

“그래. 이따가 보자.”

이렇게 간단한 일을……. 이렇게 속을 내놓고 이야기하면 될 것을. 태영이 얼마나 성숙하고, 얼마나 좋은 아이인지 알면서도 조바심을 냈던 몇 주간의 제 모습이 한심할 정도였다. 이렇게 짧은 대화로도 다시 회복할 수 있는데. 그사이 아이가 이렇게나 자란 모습을 보지 못하다니.

“이따가…… 봬요.”

약간 걸걸해진 음성으로 태영이 인사하고 뒤를 돌았다. 이전과 달리 넓어진 등을 보며 은재는 다시 숨을 뱉었다.

자리로 돌아와 앉았을 때는 슬며시 웃음마저 나올 정도였다. 아닌 척했지만, 은재 또한 긴장하고 있었다. 제가 보호해야 하는 아이 앞인지라 어른 같은 척을 하고 있었을 뿐, 아이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남길까 꾹꾹 혀를 씹어 가며 말을 해야 했다.

“진짜…….”

은재는 다 식은 커피로 입을 축이며 허탈한 숨을 뱉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함께하는 식사니 저녁은 신경을 쓰는 편이 나았다. 은재는 부엌으로 향하며 가벼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저녁 시간이 되어도 태영은 내려오지 않았다. 은재는 자리에서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리다 결국 계단을 올랐다.

“태영아.”

“…….”

“태영아, 자니?”

문을 두드리며 물어도 희미한 인기척 외에는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자는 건가. 문 안에서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은재는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의 프라이버시를 지켜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은재는 초조해져 한 번 더 문에 노크했다.

“태영아. 괜찮아? 괜찮은 거야?”

그러자 안쪽에서 무어라 말을 하려는 소리가 들렸다. 은재는 그 소리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곧장 문을 열었다. 동시에 쭈뼛 머리가 서는 것이 느껴졌다.

“안 되겠다, 들어갈게.”

방은 넓었고, 침대는 창가 쪽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문을 열자마자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너른 공간 가득히 열이 묻어났다.

“태영아.”

침대에 누워 있는 태영의 얼굴에 잔뜩 열이 올라 있었다. 이불 사이로 드러난 몸에 얼룩덜룩하게 핀 열꽃이 보일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은재는 놀랄 새도 없이 서둘러 다가가 태영의 목과 뺨을 짚었다.

으흐……. 은재의 손이 차가운지 태영이 옅은 소리를 내며 손을 피했다. 당황이 짙게 올라왔지만 은재는 땀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넘겨주며 1층을 향해 소리쳤다.

늘 고요가 누비던 저택에 은재의 음성이 메아리치듯 울렸다.

“……정 실장님!”

그 소리에 정 실장이 서둘러 2층으로 달려 올라왔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광경에 작게 숨을 삼켰다.

어느새 방을 가득 채우던 열기가 문으로까지 번져 가고 있었다.

“최 박사님 부르세요. 당장요.”

“네, 이사님.”

태영의 상태를 확인한 정 실장은 급히 최 박사를 호출한 뒤 물수건과 해열제를 갖고 올라왔다. 급한 걸음이 계단을 바삐 오갔다.

“태영아. 정신 차려 봐. 약 먹고 자자.”

“…….”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아이였다. 키도 훌쩍 크고 넓어진 어깨가 다부져 보일 정도로 건강함을 발산하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이렇게 한순간에 열에 끓다니. 은재는 태영의 곁을 떠나지도 못하고 직접 입에 약을 넣어 주고 물수건을 올려놓았다. 한 번도 이렇게 앓은 적이 없던 아이라 자꾸만 초조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이사님. 내려가세요.”

“괜찮습니다. 제가 해도 돼요.”

“이러다 옮으시면 큰일 납니다.”

“이런 걸로 안 옮아요. 괜찮으니까 최 박사님께 연락 한 번 더 넣어 주세요. 생각보다 늦으시네요.”

은재는 단호한 얼굴로 정 실장을 내보냈다. 열이 심해 헛소리를 뱉고, 앓는 소리를 뱉는 아이를 안타깝게 내려다보며 입술을 씹었다.

약을 먹었는데도 아직 약기운이 돌지 않는 모양이었다. 은재는 연신 식은땀을 흘리는 태영을 보며 계속해서 물수건을 갈아 주었다. 물수건과 얼음주머니를 올려 주는 것밖에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안타까운 얼굴로 지켜보기만 했다.

한 시간 정도 후, 최 박사가 황급히 저택에 도착했다. 그는 곧장 2층으로 올라와 태영의 상태를 살폈다. 약을 먹은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를 확인한 후, 열을 재더니 살짝 희게 질린 안색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왠지 모를 섬칫함이 은재의 등골에 달라붙었다.

“일단 해열제를 하나 더 써 보겠습니다. 그러고도 열이 30분 내에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

묘한 긴장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최 박사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가 어떤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두 손이 말아 쥐어졌다.

“검사를 다시 해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무슨, 검사를.”

“지금으로써는…….”

최 박사는 말 사이에 많은 공백을 넣으며 숨을 몇 번이나 골랐다. 마침내 무거운 입술이 떨어지며…….

“발현열로 보입니다.”

이게 척추를 타고 오르던 긴장의 원인이었던 걸까. 은재는 최 박사의 말이 믿기지 않아 작게 숨을 삼켰다.

“갑자기요. 이전에는 그런 증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발현이라니…….”

“도련님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지금 열여섯 살인 걸로 전 기억합니다만.”

“네. 이제 곧 열일곱이 됩니다.”

“……아무래도 발육이 늦다 보니 뒤늦게 2차 발현이 온 것 같습니다.”

그 뒤로도 최 박사는 무어라 말을 했지만 은재의 귀에는 아무 것도 맺히지 못했다. 그저 자음과 모음으로 흩어져 바닥으로 추락하기만 했다.

“지금 증상으로 보아 알파로 발현할 확률이 커 보입니다.”

급하게 자라기 시작한 아이. 채워지지 않았던 것들이 채워지자 이제야 비로소 아이의 몸속에서 특징을 드러낸…….

은재는 최 박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알파. 알파라니. 아이가 알파라니. 이해하지 못할 단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금씩 은재의 눈동자에 불안이 스몄다.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었으나 버티기가 힘들었다.

“일단 열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보는 편이 좋습니다.”

“열이 떨어지면, 알파가 아닌 건가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어느새 최 박사는 태영의 손가락 끝에 작은 페로몬 측정기를 붙인 후였다. 하지만 지금은 열로 인해 제대로 페로몬이 검출되지 않는 듯 보였다.

아니……. 저렇게 높은 수치의 페로몬이 검출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알파라고 한들, 설령 우성 알파가 된다고 한들 이렇게 높은 수치를 내뿜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잘못된 결과일 것이었다.

“조금 더 기다려 보시죠.”

은재는 떨리기 시작한 손으로 물수건을 갈아 주었다. 다시 미지근해진 수건을 내리다 태영의 이마를 짚었다.

역시 뜨거웠다. 은재는 저도 모르게 태영의 이마를 다시 짚었다가 크게 들썩이는 아이의 가슴팍을 보고 놀라 손을 떼어 냈다.

“…….”

“…….”

함께 그 장면을 목도한 최 박사는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지옥 같은 30분이 지나갔다.

약한 신호음이 났다. 최 박사는 태영의 열을 한 번 더 측정한 후 페로몬 측정기의 화면을 확인했다. 낮은 신음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굳이 듣지 않아도, 묻지 않아도 알 만한 결과였다. 은재는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두 손 사이에 얼굴을 묻어 숨을 고르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눌렀다.

“열이 이상할 정도로 높았습니다. 보통 이렇게 열이 높으면 위험한 증상들이 보이는데, 그것치고는 편안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해열제를 썼다면 조금이라도 내려가야 하는데…… 열은 떨어질 기미도 없이 과하게 높은 온도에서 그대로 있었습니다.”

“……발현열의 증세죠.”

“그렇습니다.”

“페로몬은 나왔나요.”

이미 확인한 수치지만 최 박사는 한 번 더 측정기를 확인했다.

“확실합니다.”

“…….”

“우성 알파로…… 보여집니다. 일단 발현열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다시 한번 검사를 해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만, 우성 알파의 형질이신 것 같습니다.”

알파. 그것도 우성 알파…….

따지자면 늦은 발현은 아닌 셈이었다. 이제 열일곱이 될 아이. 열일곱이 되기 전까지 페로몬이 잡히지 않았다는 게 놀라운 일이지만, 발육 상태를 봤을 때는 당연한 일이었다. 알파로서의 발현 이전에, 육신을 키우는 것도 아이에게는 버거운 일이었을 테니까.

열네 살, 태영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 다시 받은 검사에서도 나오지 않은 결과였지만…….

“그럼 저희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건가요.”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하……. 은재는 낮은 숨을 뱉으며 뺨을 문질렀다. 아직도 펄펄 끓는 열에 잠식되어 가쁜 숨을 뱉고 있는 태영을 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셔도 될 것 같네요.”

“열이 가라앉기까지는 사흘 정도 걸릴 겁니다. 후에 검사가 필요하시면 연락 주시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정 실장은 최 박사를 1층으로 안내하며 함께 방을 나섰다. 홀로 방에 남게 된 은재는 숨을 몇 번이나 삼키며 느리게 아이에게 다가갔다.

알파……. 아이가 알파라니. 도무지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작고 어리던 아이가, 눈짓 하나에도 크게 숨을 삼키던 아이가 알파로 발현했다니. 꼭 피부를 뒤집어 까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벌건 살이 드러나도록 피부를 젖혀 내장을 다 드러내 보여도 지금보다 나을 것 같았다.

앞으로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을까. 아이가 절 수치스럽게 했던 이들과 동일한 형질을 갖게 되어도, 저의 히트 사이클에 영향을 받아 눈을 붉히고 페로몬을 제게 쏟아도…….

그러나 은재는 이를 악물고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별안간 제 몸이 왜 이러는지 모르고,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도 모르고 버텨야 할 아이를 생각해 아이의 손이 닿는 근처에 앉았다.

“…….”

태영은 꼭 은재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소리 죽여 신음했다. 입술이 다 터지도록 씹으며 눈도 뜨지 못하고 열 속을 헤맸다.

……줄 약도 없는데. 오메가로의 발현열을 지독하게 겪은 은재는 태영의 고통이 어떨지 익히 알고 있었다. 한참 전의 일인데도 생생한 통증이었다. 아마 일평생을 살며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경험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버텨.”

“…….”

“네가 버텨야…… 더 빨리 끝나.”

아이에게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은재는 태영의 입술을 쓸어 주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창가에 놓여 있는 연고를 가져와 입술에 발라 주며, 그새 또 미지근해진 수건을 갈아 주었다.

“나아질 때까지 있어 줄 테니까 버텨.”

은재는 숨을 몇 번이나 애써 고르며 말했다. 태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은재는 고개를 흔들었다. 사흘. 이렇게 함께 보내야 하는 시간이 사흘이었다.

태영에게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은재는 사흘 내내 방을 벗어나지 않았다. 잠깐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방에서 눈을 붙였고, 짧게 무언가를 읽다가 태영을 돌봤다. 강 비서가 들어와 도우려 하기도 했으나 은재는 고개를 저었다.

태영은 주로 깊은 잠에 빠졌다가 옅은 잠을 헤맸고, 때로 고통스러운듯 앓는 소리를 내기만 했다. 몸을 뒤척이며 아파할 때 다가가 어깨를 붙잡아 주고, 이마를 쓸어 주면 그래도 비교적 쉽게 진정했다. 날것의 페로몬을 뿜다가도 이를 갈며 무의식으로 빠져들었다.

서서히 열이 가라앉기 시작한 것은 사흘째의 날이 밝을 무렵이었다. 천천히 방에서 빠져나가는 열기에 벽에 기대어 눈을 붙이고 있던 은재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소리 없이 걸어 태영에게 다가갔다. 손을 올려 홧홧하던 이마를 짚고…….

“열 거의 다 떨어졌네.”

이제 몇 시간만 있으면 태영은 아마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이었다. 은재는 태영의 이마에 올려져있던 물수건을 마지막으로 갈아 주고 자리를 정리했다. 이 방에 머무르지 않았던 것처럼 정리하고 추가 방으로 내려왔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사실 은재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알파가 된 아이를 보고 있는 것도, 그리고 아이가 문득 쏟아내는 페로몬을 받는 것도 모두 힘겨웠다. 조금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뿜어내는 페로몬은 그 어떤 알파가 내뿜는 것보다 사납고 따가웠다. 오메가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의 페로몬이 아니었다. 그 영향인지 목소리마저 쉬어 있었다.

씻어야 하는데……. 페로몬을 씻어 내야 하는데. 은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죽은 듯 잠에 빨려들었다. 그런 은재가 눈을 뜬 것은 태영과 거의 비슷한 시간이었다.

* * *

“이사님.”

은재는 몇 시간 짧게 눈을 붙인 후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태영의 페로몬이 피부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게 몸을 담갔다가, 여러 번에 걸쳐 씻어 냈다. 그제야 따갑게 달라붙었던 페로몬이 가신 듯했다.

차가운 물로 흐릿했던 정신까지 깨운 은재는 때마침 노크하는 정 실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대답했다.

“도련님께서 내려오셨습니다. 이사님을 찾으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모든 것이 뒤바뀌어야만 하는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은재는 한 번 더 입을 축였다.

“간단하게 식사 준비해서 먼저 올려 주세요. 속 편한 걸로요. 그다음에 제가 아이 보겠습니다.”

“네. 이사님.”

알파가 되었다고 알려야 하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은재는 허탈한 숨을 뱉으며 며칠 전 아이를 위해 준비했던 고등학교 목록을 챙겼다.

가벼운 차와 간식을 부탁하고 거실에 앉으니 금세 태영이 내려왔다. 은재는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

“…….” 

사흘 내내 그 방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계속 붙어 있었음에도 이렇게 보니 또 그 사흘 동안 태영이 부쩍 자란 것이 느껴졌다. 원래도 단단했던 골격이 더욱 벌어진 게 보였고, 그을린 피부에서 이제 알파의 향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앓는 동안 키도 자란 것인지 평소보다 더 높은 위치에 태영의 시선이 닿아 있었다.

답답한 숨이 가슴 깊은 곳에서 맴돌았다.

“앉아.”

은재는 가라앉은 음성을 내어 말했다. 태영은 아직까지 혼란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은재의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는 어땠어. 며칠 동안 열이 나서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저 갑자기 왜.”

어떤 것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무엇부터 해야 할까. 여러 가지가 머리를 가득 채워 복잡했다. 은재는 흔들리는 태영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천천히 서류철에 손을 올렸다.

“일단 급한 것부터 이야기하자.”

“……네.”

“네 고등학교 문제야. 가고 싶은 학교가 혹시 있니.”

“…….”

“공부도 곧잘 하니까 과고나 외고도 괜찮고. 아니면 지금 다니는 학교 재단에서 자사고를 운영 중이니까 거기도 괜찮아. 아니면 아예 유학도 괜찮고.”

“유학이요?”

태영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약간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갈라진 턱선과 그 위로 살이 내린 뺨에 혼란과 당황이 동시에 어렸다.

“영국으로 가면 펜싱을 배우는 것도 더 좋을 거야. 유럽이 조금 더 운동을 배우기에는 낫겠지만…… 영국으로 가는 게 미래를 생각하면 더 나아 보여.”

“…….”

“아니면 다른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줘. 이제 곧 결정해야 돼. 시간이 별로 없어.”

원서를 제출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입학식 직전이라도 아이를 넣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하지만 태영은 여전히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

“몸은 좀 어때.”

먼저 물어야 할 건 이거였는데. 은재는 제 미숙함을 타박하며 태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선은 금세 비껴갔다. 먼저 태영의 시선을 피한 은재는 작게 떨리는 손을 찻잔으로 뻗어 감추며 숨을 뱉었다.

“그 전에 증상 같은 거 없었니.”

“…….”

“향이 느껴진다거나…… 몸이 이상하다든가.”

태영은 제가 알파가 되었다는 것을, 갑자기 몸이 이상하게 변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겠지. 별안간 형질이 크게 몸속에서 발현하게 되면 공중에 떠도는 묘한 공기를 느낄 수 있게 되니까. 이전과 달리 살금살금 기어가는 페로몬들을,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감각 기관으로 느끼게 되니까.

“……죄송합니다.”

태영은 대답 대신 사과를 했다.

“베타가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

“다시 베타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겠죠.”

고작 발현열을 겪었을 뿐인데 태영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져 있었다. 은재는 그 목소리에마저 묻어나는 미숙한 페로몬에 다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느꼈다.

갈무리하지 못하고 은근하게 공기 중을 메우는 페로몬이 절로 몸 안에 고여 있던 페로몬을 이끌고 나가려 했다. 본능적으로 은재의 몸에서 열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태영이 알파가 되기 전까지, 저택에서 형질을 지닌 건 은재 하나였다. 그럼에도 은재는 늘 완벽히 페로몬을 조절했다. 홀로 있음에도 페로몬이 새어 나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완벽함에 금이 가고 있었다.

은재가 떨리는 손을 거듭 말아 쥐었다.

“페로몬 감추는 방법부터 배워야겠다.”

“……아.”

“몸은 금방 나아질 거야. 발현열이었으니까 내일이 되면 서서히 컨디션도 돌아올 거고.”

“…….”

“학교는 그다음에 이야기하자.”

견디다 못한 은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망하게 태영의 페로몬이 흔들렸다. 나름대로 페로몬을 거두려 하지만, 아직은 잘 되지 않아 고스란히 감정을 내비치고 있는 페로몬이었다.

혈연관계라면 미숙하게 발현한 페로몬에 흔들리지 않겠지만, 은재와 태영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은재를 충분히 휘두를 수 있었다.

그래서 급하게 거실을 빠져나갔다. 괜찮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아 그저 도망치듯 나섰다.

뒤늦게 고개를 돌려 보니 거실에는 낯선 남자가 하나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더 이상 은재의 소년이 아닌 알파였다.

그 이후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무언가 드문드문 끊기는 기억들로 시간들이 쌓여 갔다. 급하게 최 박사가 들어와 태영에게 페로몬을 갈무리하는 법을 알려 주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외의 교류는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은재는 제가 먼저 태영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쉽사리 그러지 못했다. 민 회장과 저를 둘러싼 그 많은 소문들이 귓가에 울리는 기분이었다. 그 소문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할 자신이 있었지만, 그 소문에 태영이 들어간다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얼마나 더러운 상상들로 아이와 저를 엮어 댈까. 입양된 아이. 그리고 알파가 된 아이. 누구나 한번쯤 돌아볼 만한 외양으로 자라난 아이.

어떤 더러운 소문이 아이의 앞길을 막을지 훤히 보였다. 또 그 아이를 보호하고 있는 저에게 얼마나 천박한 시선들이 쏟아질지도. 알파의 어린 정부가 되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더니, 또 이제는 다른 알파를 데려왔다며 온갖 구설수가 이어지겠지.

저와 민 회장이 꿋꿋이 맞섰던 그 소문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그래서 민 회장이 오메가 아이를 입양했고, 또 그 오메가는 배운 대로 알파 아이를 데려왔다고.

이 모든 번잡한 마음이 정리되기도 전에 은재는 태영과 이전처럼 식사 자리를 가졌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굴기 위해 가진 시간이었다. 하지만 은재는 제대로 무언가를 먹지도 못하고 급히 자리를 떠야 했다.

태영의…… 모든 것이 당황스러웠다. 태영은 그대로인 것을 알면서도 조금씩 느껴지는 페로몬에 손이 떨렸다. 태영이 손을 뻗으려 할 때면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주시했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알파의 것인 게 분명한 손에 괜한 거부감이 피어올랐다. 태영은, 제가 그동안 겪었던 알파가 아님을 아는데도 알파 특유의 끝이 날카로운 페로몬이 안 좋은 기억들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일어섰다. 시선 하나가 절 좇는 것을 알았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은재는 아직 시간을 필요로 했다. 민 회장의 비호 없이 그것을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다지는 시간. 제가 알파가 된 아이를 보듬을 수 있을 정도의 시간. 아이를 알파가 아닌 제 소년으로 비춰 볼 시간.

그 시간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태영이 은재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은재는 그것도 피하려 했으나 태영은 정 실장을 통해 의견을 전했다. 유학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은재는 태영과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앉았다.

“…….”

“…….”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은재는 그저 그 사이 더 자란 태영을 보다 금세 시선을 피해 버렸다.

“영국으로 가려고?”

“네.”

“……그래. 어디든 괜찮을 거야. 펜싱도 더 배울 수 있고.”

“…….”

“영국 학기는 9월에 시작이니까…….”

“되는 대로 빨리 나갈게요.”

여전히 보호자의 숙명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누가 봐도 알파가 된 태영은 낯설었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감정도 속내도 잘 숨기는 은재였으나, 제 소년 앞에서는 그것도 쉽지 않았다.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가시지 않는 불안이 공존했다. 아이를 보면 조금씩 피어나고 있을 소문들이 불쑥 곁에 다가온 것 같았고,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아이에게 그 불안을 투영하는 제가 싫었다.

갑작스럽기는 태영이 더할 텐데, 조금도 위로가 되어 주지 못하는 제가 혐오스러웠다. 비겁하게 유약해지는 제 모습이 싫었다.

“왜 빨리 가려고.”

“영어도 배워야 하니까요.”

“…….”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가서 준비도 하고, 먼저 공부도 하는 게 맘 편해요.”

천천히 은재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럼 2월에 나가자. 난 2월이 되어야 시간이 조금 나니까…….”

“아니에요. 저 혼자 갈게요.”

“……태영아.”

“괜찮아요. 어차피 이사님은 한국에 계셔야 하니까 저 혼자 해 볼게요.”

느리게 눈이 마주쳤다. 태영은 눈동자를 피했다가도 이전처럼 웃어 보였다. 누가 봐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처음엔 누가 있어야 마음이 편하지. 다 낯설 텐데.”

“이사님이 오시면 더 불편해요.”

“…….”

“저 아직 페로몬 정리하는 거 어려워요. 그런데 저랑 같이 있으면 불편하시잖아요.”

“태영아.”

“저 정말 괜찮아요.”

태영은 조금 더 표정을 풀며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최대한 빨리 갈게요. 다음 달…… 아니, 이번 달에 가게 해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태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재는 차마 아이를 붙잡지 못하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응시했다.

제 서툰 모습이 기어코 아이에게 흔적을 남겼다. 혼란스러운 아이를 보듬어 줬어야 하는데……. 아이가 앞서 알고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보며 은재는 언젠가의 제 모습을 떠올렸다.

아이에게 정을 조금 덜 주었으면 나았을까. 더 무심하게 굴었으면, 아이와 시간을 덜 보냈으면 상관없었을까.

아니면…… 훨씬 더 아이를 곁에 가까이 두고 살폈으면 나았을까.

이미 소문이 붙어 있는 상황이니 어쩌면 더 추가된다고 하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항상 있었던 일일 뿐이었다. 제가 당하는 모욕과 태영은 별개였다.

처음엔 제 소문에 불을 붙이는 일이 될까, 그 소문에 태영이 휘말리게 될까 염려했다. 하지만 이제 걱정은 오롯이 태영에게 향했다.

그 소문에 원치 않아도 끼어들게 될 것이고. 제가 느꼈던 그때의 기분을 태영이 느낀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싫었다. 또 혹여나 태영이 저처럼 제 형질을, 제 스스로를 원망하게 된다면.

혹시 그때…… 히트 사이클이 끝나고 난 뒤에 내가 부지불식간에 아이에게 페로몬을 쏟아부었던 걸까. 내가 조금 더 주의했더라면 아이가 혹시 발현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온갖 불안과 염려를 끌어안고서도 스물다섯의 은재는 매일매일, 매 시간마다 생각을 가다듬었다. 태영을 위해. 여전히 기억 속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작은 소년을 위해. 제 안에 숨겨진 여린 은재를 누르며 괜찮다고 매일 되새겼다.

다른 알파들과 태영은 다르다고 늘 생각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태영은 착실히 유학 준비에 매진했고…….

저택을 떠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 *

“가면 도와주는 사람 많을 거야. 너무 어려워하지 마. 세헌이도 종종 들여다봐 준다고 했고.”

“네.”

“가서 큰 세상을 보면 더 좋을 거야. 영리하고 성실하니까 도움 많이 될 거야.”

은재는 공항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태영은 그것도 거절했다. 긴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꽤나 강경하게 나와 은재는 저택 앞에서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어려우면 들어와도 돼. 알지.”

“네.”

몇 년간 함께 살았던 아이인데, 남들처럼 옆에 꼭 끼고 살피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돌봤던 아이인데. 이렇게 마주하니 모든 것이 생경하고 어색했다.

어젯밤, 은재는 묵묵히 계단을 올랐다. 몇 년간 머물렀던 저택을 떠날 준비를 하는 태영에게 인사를 해 주려 했지만, 끝내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끝까지 비겁한 어른이었다.

그런데도 태영은 씩씩했다. 제가 처져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은재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제 마음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태영아.”

어느덧 많은 짐들이 차에 모두 실려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저택을 둘러보던 태영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은재와 눈을 맞췄다. 은재는 천천히 소년에게 다가갔다. 손을 벌려 뻗자, 태영이 몸을 숙여 은재에게 안겼다.

이제는…… 태영이 몸을 숙여야 안길 수 있었다.

은재는 다가오는 알파의 품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칠 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태영을 끌어안았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뜨거운 체온이 맞닿은 곳에서 느껴졌다. 은재는 부쩍 커 버린 제 작은 소년의 등을 두드리며 몇 번이나 숨을 삼켰다.

많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도 처음 태영과 만나던 순간, 저택에 발을 디디던 순간, 파티에서 대화하던 순간, 학교에 가고 또 상장을 받아 활짝 웃으며 들어서던 순간들이 모두 생생하게 스쳐 지나갔다.

저보다 작았던 열셋에서 어느새 훨씬 더 커진 열일곱이 되기까지…….

함께 지내며 쌓았던 사소한 순간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곧 보러 갈게.”

“네.”

“금방 보자, 우리.”

“……네.”

그렇게 둘은 잠시간 이별의 포옹을 나누었고, 다시 천천히 멀어졌다. 태영은 길게 자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차에 올랐다.

잠시 멈칫한 태영이 은재를 돌아보았다.

“저, 이사님.”

“응.”

“그 사람, 지금도 만나세요?”

은재는 태영이 누구를 물어보는지 생각하다 곧 공식적으로 발표한 저의 연인을 묻는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 어째서 지금 그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 죄송해요. 괜한 걸 물었어요.”

“…….”

“저 잘하고 올게요.”

그리고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멋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은재는 왠지 복잡해진 기분에 뭐라 말을 하지도 못하고 태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태영은 움찔했지만 피하지는 않고 잠시간 그 손길을 만끽했다.

“진짜 가 볼게요.”

작게 숨을 뱉은 태영은 표정을 풀어내며 문을 닫았다. 은재를 위해 창을 닫아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저택을 빠져나갔다.

“머리를 좀 잘라 줄걸.”

영양제도 넣어 줄걸. 다른 약은 필요 없나. 키가 이제 훌쩍 자라 성장통 약은 먹지 않아도 되는 걸까. 정 실장이 그 누구보다 잘 챙겨 짐을 꾸렸을 걸 알면서도, 은재는 멀어지는 차를 보며 긴 쓸쓸함을 느꼈다.

이제 저택에 남은 건 은재 하나였다. 다시…… 혼자였다.

저를 위해 태영이 떠나는 것을 알면서도 은재는 그 순간을 오래 후회했다. 저로 인한 결과라 더 후회가 쌓였다.

은재는 틈틈이 태영을 보러 가기 위해 일에 더 매달렸다. 오래 휴가를 내도 괜찮을 정도로 일을 당겨 와 하는 게 습관이 될 정도였다. 어른이 되어 태영을 품어 주지 못한 죄로 일에 몰두했다. 휴식을 취한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태영은 영국에 간 지 3년 만에 연락을 끊어 버렸다. 사람을 시켜 학교 주변을 찾고, 근처 한인회에 연락을 넣기까지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태영이 은재와 살던 저택에 돌아온 건 그가 스물넷이 되어서였다. 저택을 떠난 지 7년 만이었다.

그사이 변한 건 태영뿐만이 아니었다. 

로망스(Romanc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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