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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저택에 처음 발을 디뎠던 태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해를 맞았다. 눈이 내린 저택에서 맞이하는 고요한 새해였다.
보육원에서도 떡국은 먹었지만, 저택에서 먹는 떡국은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정성스럽게 장식되어 있는 고명과 정갈하게 놓인 반찬들, 이 날을 위해 특별히 만든 것 같은 수저와 식기가 새삼스럽고 신기했다. 이제 매일 익숙하게 보는 것이지만 반찬 하나하나 가지런하게 놓인 모습은 꼭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홀하게 열네 살을 맞았다.
동시에 태영은 학교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파티가 끝난 직후부터 가정 교사와 공부를 시작한 태영은 가까스로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학업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원래 공부와는 거리가 먼 태영이었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다. 공부를 하려면 필요한 것이 많았다. 선생님들이 가끔 태영을 불러 문제집을 주고, 참고서를 주기는 했으나 한때에 그칠 뿐이었다. 학년이 올라가면 또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고, 언젠가 용기를 내어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렇게 쉽게 얻으려는 정신머리로 뭘 하겠냐며 폭언까지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뒤로 태영은 공부에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 설령 대학에 합격을 했다 하더라도 학비를 낼 수 없었을 테니 조금 이르게 포기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택에 와서 하는 공부는 그때와 달랐다.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뒤늦게 하는 공부임에도 가정 교사는 차분히 시간을 들여 학업을 도와주었다. 이해가 안 되면 될 때까지 붙잡고 있어도 되었고, 더 다양하고 많은 방식으로 문제를 접할 수 있었다.
조금씩 문제가 풀리고,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되자 공부에도 흥미가 붙었다. 무엇보다 실질적인 것들이 눈앞에 많이 보였다.
은재가 일하는 모습.
태영은 은재에게 보탬이 되고 싶었다. 제 배경이 되어 주겠다고 그렇게 멋있게 말하던 남자에게 꼭 도움이 되고 싶었다. 모든 방면에서 능숙하고 익숙해 보이는 남자에게 보탬이 되려면 공부를 해야 했다. 이렇게나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경험하게 해 주는 그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덕분에 3월이 되었을 때 태영의 학업 성취도는 아주 높아져 있었다. 학교에 가도 충분할 정도였다.
은재는 직접 태영이 다닐 만한 학교를 알아보았다. 여러 개의 사립 학교에 직접 방문하거나, 긴밀한 사업 파트너들이 운영하고 있는 재단을 찾아 학교의 분위기와 위치, 커리큘럼 등을 확인했다.
오히려 민 회장보다 이런 쪽에서는 더 철저한 은재였다.
그가 선택한 학교는 가장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제일 높은 입학금을 내야 하는 곳이었다. 그 외에도 분기별로 내야 하는 돈이 높은 액수로 책정되어 있고, 여러 가지 연계 교육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재단 자체가 훌륭하고 역사가 깊어 인맥을 쌓기에도 적절했다.
이제 드디어 그 학교에 발을 내디딜 때였다.
태영은 어색하게 교복을 입고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요즘 들어 성장통이 자주 느껴졌다. 열네 살이 되어 그런지, 혹은 겨울이라 그런지 무릎이 쪼개질 듯한 아픔이 매일 찾아왔지만, 정작 키는 그대로였다. 억울할 정도였다. 그렇게 침대에서 구를 정도로 아픈데 키가 그대로라니.
“도련님, 이사님께서 찾으십니다.”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 밖에서 정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영은 금방 내려가겠다고 대답한 뒤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발걸음 소리가 울리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 1층 거실로 향했다.
은재는 정원이 잘 보이는 거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젯밤 또 눈이 소복이 내려 더 평화롭고 고요해진 풍경과 은재는 몹시 잘 어울렸다.
느릿하고 고요하게 흐르는 모든 것은 은재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하얗고 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며 고요 속에서 머무는 사람.
언제 보아도 늘 시선을 빼앗는 그의 모습을 훔쳐보던 태영은, 은재가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기울여 그쪽을 돌아볼 때쯤에야 거실로 들어섰다.
“왔니.”
아직도 은재가 내려놓은 잔에서는 옅은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태영은 겨울의 풍경과 잘 어울리는 은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 줄 게 있어.”
“또요?”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은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태영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어제, 태영은 민 회장으로부터 입학 축하 선물을 받았다. 다름 아닌 말이었다. 이제 승마를 시작해야 할 나이라며 말을 선물한 민 회장은 근처에 아예 은재가 사용하는 축사 옆에 태영의 축사를 마련해 주기까지 했다.
가방 정도를 생각하고 있던 태영은 앞서 걷는 은재를 보며 휴, 숨을 골랐다.
“별 건 아니고. 이제 제대로 공부할 방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은재가 향한 곳은 2층이었다. 은재를 쫓아 계단을 오른 태영은 그가 문을 여는 방에 들어서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문을 여는 방은 분명 며칠 전까지 은재가 사용하던 침실이었다.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네 방이야. 이제 여기서 지내.”
안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은재가 쓰던 침대가 사라진 대신 커다란 책상이 창가 쪽에 서 있었다. 벽을 따라 길게 이어진 책장에는 은재가 선물한 것으로 보이는 책들과 작은 티 테이블도 자리했다.
눈이 쌓인 정원이 훤히 보이는 창과 은재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은 조명과 의자.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를 소품들과 책장, 그리고 소파와 작은 냉장고까지 적재적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방의 복도와 연결된 안쪽에는 커다란 침대까지.
그 방에 제대로 들어서기도 전에 태영은 널찍한 공간에 압도되어 숨을 삼켰다.
“이 방 제가 써도 돼요? 그럼 이사님은 어디서 지내세요?”
“어차피 업무는 3층에서 보니까 괜찮아. 옆방도 있고.”
아니, 은재의 마음에 압도되어 벅찼다.
이 방이 2층에서 제일 큰방인데. 태영은 자꾸만 과분한 것을 받는 것 같아 민망했다. 열심히 공부를 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았다. 잠을 줄여서라도 해야 했다.
“학교 갈 준비는 다 했니?”
“네.”
은재는 씩씩하게 대답하는 태영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파티 이후, 태영은 은재를 더욱 신뢰했다. 눈에 띄게 신뢰가 자라는 게 보였다.
원래도 맹목적이던 태영은 이제 활발한 성격을 되찾아 열심히 저택을 쏘다니며 은재의 방을 찾았다. 아직도 수줍고 쑥스러워하는 소년이었지만, 가끔 차를 함께 마셔도 되는지를 물었고, 가정 교사에게 시험을 잘 쳐 선물로 받은 케이크를 꼭 나눠 주었다. 정 실장에게 간식을 받으면 먹기도 전에 은재의 몫을 떼기도 했다. 이전 은재가 말했던 정원 쪽에 나가 공도 찼다.
그 모습에 은재 또한 점차 태영에게 할애하는 시간을 늘렸다. 가정 교사가 있음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직접 교양 같은 것을 가르쳤고, 또 그 외에도 시간이 될 때면 태영의 방에 들러 살폈다.
여전히 누군가를 옆에 끼고 살피는 데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서툰 노력에 태영은 크게 반응했다. 제가 먼저 용기를 내어 손을 뻗으면 은재는 어색해하면서도 손을 내치지 않고 꼭 잡아 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태영은 늘 부끄럽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은재의 곁을 맴돌았다.
“잘할 거라고 믿어.”
태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은재의 미묘한 분위기와 묘한 향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서재를 살피며 쿵쿵 뛰는 가슴을 문질렀다. 힘껏 숨을 마셔 이 기분을 저장하려 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태영이 천천히 걸어 책장 쪽으로 다가갔다. 은재가 선물한 책을 손에 쥐고 싶어 다가가 손을 뻗으니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충분히 닿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
그 뒤를 쫓아온 은재가 책을 꺼내 주었다. 방 안을 떠도는 부드럽고 따듯한 공기와 함께 은재가 태영의 뒤에서 책을 뽑았다.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진 태영은 그 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꾹 쥔 채 감사 인사를 했다. 제 작은 키를 원망하며 높은 곳에 있는 책들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은재는 그 방에서 태영과 시간을 보냈다. 둘 다 말이 많지 않은 편이라 별다르게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그저 차를 마시며 눈 내리는 창밖을 보았다.
소리도 없이 눈이 조금씩 흩날렸다. 싸락눈처럼 내리는 눈은 그림처럼 창가에 스치며 나무 위에 쌓였다. 잘 정리된 정원에 소복소복 쌓이고, 며칠 전 태영이 공을 차던 곳 위에 쌓였다.
직원들이 눈을 치우러 나오는 소리에 은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은 월요일, 처음으로 태영이 학교에 가는 날이었다. 은재는 일찍 누우라 말하며 3층으로 올라갔다. 그때까지도 그가 꺼내 준 책은 품에 있었다.
학교에 가는 일이 그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저택에 온 뒤로 태영에게 가장 긴장되고 떨리는 일은 파티였다. 이곳에 온 뒤로 불과 몇 개월 만에 치른 행사 덕분인지 태영은 처음 학교에 가는 날을 앞두고도 태연했다.
제 뒤에, 제 배경이 되는 어른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한 두려울 일은 없었다. 그저 민 회장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그리고 은재에게 받은 선물이 너무나 믿기지 않고 설렐 뿐이었다.
쌍꺼풀이 진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듯한 은재 특유의 부드러운 향에 태영은 깊게 숨을 삼키며 침대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이불을 턱까지 끌어 올려 안락함을 만끽했다.
그런데 무언가 등허리에 딱딱하게 걸리는 게 있었다. 태영은 머리맡의 조명을 켜고 이불을 뒤집어 살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작은 상자였다. ‘태영’이라는 제 이름 두 글자가 정갈한 글씨로 그 위에 적혀 있었다.
이건 또 뭐지. 태영은 박스를 열어 그 안에 든 것을 발견하곤 소리 죽여 환호했다. 핸드폰이었다. 제 핸드폰이 분명했다. 태영은 그것을 열어 손에 쥐어 보곤 상기된 얼굴로 침대를 쿵쿵 두드렸다.
조심스레 침대에서 나와 박스와 그 위에 붙어 있는 은재의 글씨를 떼어 내 일기장 깊은 곳에 넣어두었다. 핸드폰만큼이나 소중한 흔적들을 품에 안은 채 이리저리 방을 배회하다, 다시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덮었다.
쿵쿵, 가슴이 마구 뛰었다. 가만히 그 위에 올려 둔 손마저 그 움직임에 들썩였다.
후우……. 애써 차분하게 호흡한 태영은 아직 방에 남아 있는 은재의 향을 마시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어서 잠에 들어야 날이 밝을 것이었다. 그래야 이사님이 주신 것을 들고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가 눈꺼풀에 덮이고 곧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직도 심장은 요란하게 뛰었지만, 은재가 며칠 전까지 쓰던 방이라는 생각에 기분은 순식간에 나른해졌다.
수마가 흰 정원을 지나와 고요히 창가에 걸터앉았다.
이윽고 웃으며 잠든 태영의 머리 위에도 수마가 자리했다.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부터 일어나 준비를 한 태영은 정 실장의 도움을 받아 한 번 더 확인한 뒤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1층에 내려서자마자 절로 눈이 크게 뜨였다.
“이사님!”
그곳에는 은재가 서 있었다.
“왜 아직도 안 가셨어요?”
“글쎄.”
은재는 잠시 주저하다 이내 태영의 머리통을 눌렀다. 잘 빗어 놓은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가볍게 만진 것이었다. 태영은 귓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괜히 교복 바지를 매만졌다. 새어나오는 미소를 감출 길이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크게 미소를 지은 태영은 뒤를 돌아 강 비서와 정 실장에게도 인사를 했다. 그들은 엄밀히 따지자면 은재와 태영이 부리는 사용인이었으나, 또 다른 보호자이기도 했다. 살갑게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맞은 어린 주인을 정성스레 보필하는 이들이었다.
한동안 저택에는 은재 혼자였고, 또 그 전에도 민 회장과 은재만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과는 퍽 다른 성격을 지닌 태영의 인사에 다른 사용인들도 마주 인사하며 배웅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이사님.”
은재는 직접 태영을 차에 태워 배웅했다. 태영은 창문을 내려 인사하며 저택 앞에 서 있는 은재를 길게 관찰했다.
베스트까지 갖춘 완벽한 슈트 차림으로 배웅해 주는 은재. 눈이 녹은 정원에서, 넓게 번지는 볕 아래에서 차가 나가는 것을 보는 은재. 손을 흔들어 주지는 않지만 고요한 다정함으로 지켜봐 주는 은재.
약간 긴 교복 소매가 태영의 손등을 덮었다. 태영은 조금 밝아진 듯한 피부를 내려다보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더 없이 완벽한 등굣길이었다.
“이따가도 여기에 있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다녀오세요, 도련님.”
등하교를 책임져 주는 박 기사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태영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비슷하게 생긴 차량들이 가까운 곳에 줄지어 서 있었고, 먼저 도착한 아이들은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교문을 통과했다. 태영은 새롭고 낯선 학교를 올려다보며 잠시 뒤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사님 차다.”
어쩐지 익숙한 차를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분명 은재의 차였다. 제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은재의 차가 교문 근처에 있었다.
은재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지만, 태영은 분명 그 자리에 그가 있다는 것을 믿었다.
첫 등교에 그가 함께해 준 것이었다.
이전에 다녔던 초등학교와 달리 화려한 건물들이 곳곳에 우뚝 서 있었지만 태영은 그런 것에 시선을 던지지 않았다. 싸늘하기만 한 건물에, 제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에 나눠 줄 시선이 없었다.
그래서 그 차를 향해 꾸벅 인사한 뒤 더 씩씩한 걸음으로 교문을 지나쳤다.
태영은 미리 은재에게 들었던 대로 교무실에 들렀다가, 교실에 향했다. 1학년 1반. 모든 학년을 3반까지밖에 운영하지 않는 학교에서 태영은 1반을 배정받았다.
중학교의 첫날이었지만, 이들은 비슷한 초등학교를 거치고, 또 비슷한 배경을 지닌 이들이어서 그런지 이미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가 익숙한 듯 보였다. 그런 와중에 태영이 등장하니 자연스레 시선이 태영에게 쏠렸다.
묘한 침묵이 번져 나갔다. 그러나 태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빈 책상을 찾아 가방을 놓고 앉았다.
“야! 너 여기 다녀?”
그런 태영에게 거침없이 다가온 다른 소년이 있었다.
“걔 맞지? 민 이사님네.”
“……손의준.”
“와. 너 내 이름 기억해?”
“응.”
“우와! 그럼 진짜 친구하자. 그때는 말도 한 마디도 안하더니.”
파티에서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던 아이. 그리고 태영의 편에 서 거짓말을 해 줬던 아이. 태영은 의준의 얼굴을 잠시 빤히 쳐다보았다.
“야. 손의준. 너 진짜 쟤랑 친구할 거야? 걔 그 거지지? 고아 새끼.”
“어쩌라고.”
의준은 대각선에서 말을 붙인 다른 남자 아이에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 진짜 거지 새끼랑 다니려고? 너네 아빠가 싫어할 텐데.”
“우리 아빠는 좋아할걸? 그리고 네가 뭘 알아. 그날 오지도 못했으면 그냥 조용히 있어.”
아무래도 의준은 그날 태영의 행동이 아주 감명 깊었던 모양이었다. 은근히 아이들이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걸어야 할지, 아니면 거리를 둬야 할지 헤매는 와중에 덥석 다가와 친구를 자청하고 있었다.
덕분에 고아 새끼를 운운하던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날 이 소년은 파티에 참석하지 못했다. 때문인지 의준에 말에 지레 찔려 혼자 거친 숨을 뱉고 있었다. 고작 열네 살이지만 줄 세우기를 하는 것에 몹시도 익숙한 아이들이었다.
“나랑 자리 바꾸자.”
의준은 태영의 옆자리에 앉은 소년을 꼬셔 그 자리를 강탈했다. 태영은 의준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의준 같은 녀석과 친구를 하는 게 저에게도 가장 맘 편한 선택임을 알았다. 아직도 제 주변에서 여러 시선이 오가는 이런 분위기는 영 어색했으나, 은재가 잘 하고 오라고 했으니 잘 해야 했다. 첫날부터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직접 은재가 교문까지 배웅도 해 줬는데.
“한태영.”
“……어?”
“내 이름. 한태영이라고.”
“아, 어. 난 손의준.”
“그날 고마웠어.”
의준이 태영의 말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저택에 온 뒤로 처음 태영에게 친구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시간들은 시끌벅적했다. 태영을 보고 거지 새끼라고, 고아 새끼라고 욕하는 아이들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근감 있게 구는 아이들도 있었다. 영악하게 제 부모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그와는 상관없이 새로 보이는 얼굴이라 말을 거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그 정도면 괜찮았다. 의준 말고도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을 친구들이 생겼다. 평범한 열네 살처럼 TV 이야기를 했고, 기억에도 남지 않는 시답지 않은 화제로 잡담을 나눴다. 부모님과 싸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하교를 할 때도 차가 대기하고 있는 곳까지 같이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태영은 가끔 무언가가 기이한 속도로 흘러가는 듯한 순간을 체험했다.
의준 말고도 몰려다니는 녀석들이 몇 명 있었으나,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면 자연스레 시선은 태영에게 몰렸다. 별거 아닌 주제에도 그랬다. 처음 저에게 몰리는 시선에 당황했던 태영은 저도 모르게 은재의 말을 떠올렸다. 어두웠던 차 주변으로 총총히 서 있던 차들의 불빛과 사람들의 시선 또한.
제가 선 위치. 민 회장이 은재에게, 그리고 은재가 저에게 넘겨주는 위치. 소름 끼칠 정도로 이상하고 비틀린 듯한 위치.
여전히 저는 은재의 시선을 받기 위해, 은재와 조금 더 가깝게 지내기 위해 애를 쓰는 별것 아닌 열네 살이었지만 여기선 아니었다. 부모의 서열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이들은 당연한 듯 태영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태영은 제가 딛고 선 그 비탈길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저택에 겨우 적응했는데, 학교라는 곳에 나와 보니 또 가파른 비탈길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단단하고 흔들릴 일 없는 높은 지대였지만 그래도 깊게 가라앉은 곳에서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살던 태영에게는 멀미가 날 정도로 높은 곳이었다. 아직 은재가 선 곳까지 올라가지 않았음을 아는데도 높이가 까마득했다.
분명 저보다 더 높은 곳에 서 있는 애들이 있음을 알지만 때로는 불안했다. 민 회장을 믿고, 민 회장을 보던 사람들의 시선을 기억했고, 또 은재를 믿었지만 아직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제가 떨어지지 않도록 온갖 안전장치를 해 두는 이들이 있음을 알면서도 가끔 절벽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사님도, 이런 기분을 느끼면서 그 높이에 올라가신 걸까.
가을에 저택에 와 적응하기가 반년이 걸렸다. 또 학교에서, 아이들 사이에서 묘하게 형성되는 생태계에 적응하는 데에도 또 반년.
그렇게 저택에 들어온 지 일 년이 꼬박 지나 다시 가을이 될 무렵, 태영은 아이들과 지내는 것이 비로소 편해졌다.
딛고 선 높이를 받아들이게 된 그 가을이 무르익을 때쯤, 다시 태영을 흔드는 일이 일어났다.
민 회장의 죽음이었다.
* * *
민 회장은 의사가 선고를 내린 것보다 오래 버텼다. 그렇지만 올해를 넘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여름쯤부터 들었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되자 민 회장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피부가 말라 갔고, 잠을 자는 시간이 늘었다. 거동도 쉽지 않았고, 종내에는 폐렴을 겪었다.
임종 전날, 민 회장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는지 태영과 은재를 불렀다. 태영은 이미 한 번 원장선생님의 죽음을 겪었지만, 이렇게 목전에 죽음을 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의외로 건강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주름진 그의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거동하는 것도 가벼워 보였다.
그래서 꼭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라고, 내년 떡국을 꼭 함께 먹자 말했다. 얼마 전부터 회장님이 선물해 준 말을 타기 시작했고, 말을 타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도 말했다. 다음 주에는 펜싱 경기도 있으니 그것도 보러 오라 말했다.
하지만 민 회장은 대답 없이 태영의 손을 쥐기만 했다. 유언장은 진작 김 변호사에게 넘겼다는 이야기를 하여 은재의 고운 미간이 구겨지게 했다.
그날, 태영과 은재는 민 회장의 방에서 하루를 보냈다.
잠을 거의 자지 못했던 은재는 새벽부터 일어났고, 태영이 인기척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민 회장이 하얀 천 아래 덮여 방을 나설 무렵이었다. 태영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서 은재의 손을 붙잡았다.
“…….”
“…….”
은재는 말없이 태영을 내려다보았다. 두 눈 가득 걱정을 담고 있는 까만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작년보다 조금 커진 손을 꽉 쥐었다.
그 맞닿은 두 손에서 온기가 나누어지고 또 나누어졌다.
곧장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태영은 알지 못했지만 TV와 신문에도 민 회장의 부고 소식이 전해졌다. 엄숙한 분위기 아래에서 빈소를 차렸다. 방문객은 끊이지 않았다. 원장 선생님의 장례식과는 퍽 다른 분위기가 낯설고 어려웠지만, 버티는 은재를 보며 태영도 곁을 지켰다.
3일간의 장례식이 끝나고 저택으로 향했을 때는 기분마저 새로웠다. 원래도 민 회장 없이 둘이서 지내는 집이었는데 괜히 저택이 더 크게 느껴졌다.
보호자를 잃은 마음에 작은 구멍이 난 것 같았다. 저도 이런데 은재는 더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꾸만 속이 상했다.
“좀 쉬어. 고생했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이사님도 쉬세요.”
태영과 은재는 계단 앞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은재는 소년의 얼굴 위로 떠오르는 명백한 걱정을 읽으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열네 살한테 걱정 받는 기분이 오묘하네.”
“…….”
“내일까지 학교는 쉰다고 해 놨어. 모레부터 갈 수 있겠지?”
“네. 그럴게요.”
며칠 사이에 태영이 훌쩍 큰 것 같다고, 은재는 생각했다. 제가 태영이었으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제가 열네 살이었다면, 저는 아마 장례식을 지키지 못할 것이었다. 이렇게나 어려운 자리에서, 제 등을 지키던 어른이 사라진 상황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태영은 제 자리를 지켰다. 열심히 은재의 옆에서 절을 하고 인사를 했다. 은재가 틈틈이 업무를 위해 자리를 비울 때면 혼자 남아 민 회장의 곁을 지켰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사진을 보고 앉아 있었다. 기자들과 다른 방문객들이 많아 정신이 없는데도 차분하게 은재의 곁에 붙어 때때로 눈을 맞춰 왔다.
“이사님. 강 비서입니다.”
“들어오세요.”
은재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서류를 들고 들어오는 강 비서를 보며 매고 있던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차가운 물로 나른한 머리를 일깨웠다.
“민 회장님 유언장입니다. 진행하셔야 할 일이 있어서 곧장 전달 드립니다.”
“환원은 내일부터 절차 밟기로 했죠.”
“네. 선형 복지 재단 통해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적당한 곳 추려서 내일 중으로 명단 제공받기로 했습니다. 그 외에 처리하셔야 할 일들입니다. 법무팀에서도 미리 전달된 내용은 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굳이 세금 줄이려 애쓸 필요 없다고 해 주세요. 민 회장님 그런 거 싫어하시니까.”
“네. 알겠습니다.”
“급하게 봐야 할 서류 있으면 놓고 가세요.”
강 비서는 들고 온 서류를 다소 민망한 낯으로 내려놓았다. 하지만 은재는 오히려 그런 것이 반가웠다. 뭐라도 정신을 팔 게 필요했다.
“다음 주 중에 예정되었던 정찬들은 취소할까요?”
“괜찮습니다. 진행해야죠. 이런 것도 민 회장님 아시면 싫어하실 거고.”
동의하는 듯 강 비서가 옅게 표정을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들은 씻고 나와서 보겠습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필요한 것 있으면 불러 주세요.”
“됐어요. 내일까지 좀 쉬세요. 덩달아 정신 없으셨을 텐데, 이만 들어가 보시고요.”
무심한 음성으로 은재는 내일까지 저택에서 그를 마주칠 일이 없도록 하라며 말했다. 무감한 듯하지만, 오래 민 회장과 일해 온 절 위해 하는 말임을 알아 강 비서는 마지막까지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방을 나섰다.
은재는 씻고 나와 책상에 앉았다. 딱 알맞은 때에 준비된 커피를 마시며 서류를 열었다.
민 회장은 끝까지 완벽하게 처리를 해 두고 숨을 거뒀다. 은재가 조금의 험한 말을 듣지 않도록 재산의 일부를 지속적으로 사회에 환원하도록 만들었고, 그 외에 대경 그룹 산하에 있는 문화 재단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도록 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민 회장이 은재를 신뢰하지 않는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민 회장이 은재의 평판을 위해 앞서서 수를 쓴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현재 은재가 담당하고 있는 백화점 사업은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민 회장의 먼 친척뻘인 강 비서와 정 실장, 그리고 태영에게 약간의 주식을 나눠 주어 은재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게 했다. 전문 경영인에게 문화 재단의 운영을 맡겼지만, 실질적인 대표가 은재라는 것도 자명하게 밝히고 있었다.
세상에 홀로 남을 제 아이를, 처음부터 모든 이들의 시선을 당기던 오메가를 지키기 위한 유언장이었다.
“끝까지 아주…….”
은재는 결국 서류는 펴 보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을 나서 복도 끝에 있는 커다란 사진 앞에 섰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옆에 태영이 다가와 섰다. 느리게 자라는 태영은 이제 은재의 가슴을 웃돌 만큼 자라 있었다.
“셋이 같이 사진을 찍어 둘걸 그랬네.”
“아쉽지만…… 괜찮아요.”
태영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회장님하고 대화를 하던데.”
“…….”
“무슨 대화였는지 안 알려 줄 건가.”
그렇게 가만가만 사진을 보며 서 있던 은재가 태영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태영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기며 목을 가다듬었다.
병실에서 함께 밤을 보내던 날, 민 회장은 고요히 손짓으로 태영을 불렀다. 그리고 태영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은재는 그 말이 궁금했지만 금방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죄송해요. 저랑 회장님의 비밀이에요.”
그러나 태영은 꿋꿋이 비밀을 지켰다. 은재는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적이는 소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죄송해요.”
끝까지 회장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아이가 귀엽고 또 우습기도 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온 일이 소화가 가능한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나중에 내가 여쭤봐야겠네.”
“나중에요. 아주아주 나중에요.”
태영은 발끝을 밀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사님. 저 다음 주에 경기해요.”
“아……. 그랬지.”
“오실 수 있으세요?”
“가야지. 2시라고 했나.”
“네. 2시요.”
둘은 그 뒤로도 나란히 서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졸음을 이기지 못한 태영의 하품 소리를 듣고 나서야 각자의 방으로 찢어졌다.
훨씬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온 은재는 창을 열어 두고 앉아 담배를 물었다. 개운하게까지 느껴지는 담배를 깊게 빨아 흰 연기를 토해 내며 나른한 숨을 뱉었다.
이제 1층에 남아 있는 민 회장의 방을 치워야 했다. 병원에 계시는 동안은 치우지 못했지만, 그 방을 치우고 제가 1층으로 옮겨 가는 것도 괜찮았다.
“후…….”
은재는 담배를 한 모금 더 깊게 마시며 달력을 확인했다. 다음 주에 있을 정찬과 태영이 경기가 겹치지 않아야 했다. 태영이 경기는 금요일이라고 들었으니까…….
“…….”
달력을 넘기던 은재의 손이 불쑥 공중에서 멎었다. 별다른 표시 없이 붉은 동그라미가 다음 주 중간에 그려져 있었다. 우성 오메가인 은재의 히트 사이클은 꽤 규칙적인 편이었다. 대략 4개월 주기를 갖고 있었고, 지난번 히트 사이클이 대략 4개월 전에 있었으니…….
민 회장이 병원에 입원한 순간부터 제대로 관계를 갖지 않았던 은재에게 최 박사가 몇 번이나 경고했던 그 히트 사이클이었다. 아무리 우성 오메가라도 오래 약을 먹는 건 좋지 않았다. 주기가 망가지거나, 후에 약이 듣지 않게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꼭 휴약기를 가져야 한다고 최 박사는 오래도록 말했다. 지난번 히트 사이클에 약을 처방해 주면서도, 앞서 다음에는 약을 복용해서는 안 된다 경고할 정도였다.
장례식과 겹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은재는 저에게 페로몬이 느껴지는지 확인한 뒤 다시 새 담배를 꺼냈다. 가을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창가에서 흐릿한 연기가 조금 더 길게 뿜어졌다.
“나야.”
―좀 쉬었어?
“응. 덕분에. 애써 줘서 고마워.”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임 대표님한테도 말씀 전해 주고.”
―그래. 근데 왜 안 자고 이 시간에 전화야.
“…….”
―무슨 일 있어?
은재는 세헌의 잠잠한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길게 숨을 삼켰다. 필터가 타는 소리가 연약하게 수화기를 넘어 전해졌다.
―……너 곧 히트구나.
이럴 때만 은재가 저를 찾는다는 것을 알기에 세헌은 짧은 숨을 뱉으며 말했다.
“하필 이럴 때 그러네. 또 온갖 헛소리가 들릴 텐데.”
―너처럼 금욕적으로 사는 오메가가 또 어딨다고.
그래 봤자 오메가인걸……. 은재는 그 말을 삼키며 고개를 젖혔다. 권태로움에 젖은 눈꼬리가 평소보다 더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높은 콧대 위로 가을바람과 무르익은 달빛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필요해. 약을 먹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그래. 알았어.
“소문 안 나게 부탁해.”
세헌의 담담한 대답을 들으며 은재가 전화를 끊었다. 당장 내일 1층으로 방을 옮겨야 했다.
* * *
“다녀왔습…….”
“오셨어요?”
하교 후 돌아온 태영은 저택에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발을 멈칫, 했다.
“네.”
정 실장이 다가와 기사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으며 오늘 잡혀 있는 일정을 간략히 말해 주었다. 태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색한 저택의 분위기에 계속 주변을 살폈다.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혹시 이사님 계신가요?”
“아, 네. 몸이 안 좋으셔서 당분간 쉬신다고 하셨어요.”
민 회장의 장례식을 치르고 며칠 만에 다시 등교한 학교였다. 아이들은 민 회장의 소식을 들었는지, 태영이 등교하자 부러 반갑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특히 의준은 더욱 반가운 표정을 지었고, 가끔 지나가며 인사하던 아이들도 다가와 말을 붙였다.
다음 주에 펜싱 경기를 할 수는 있냐며 묻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어설프고 미숙한 배려였다. 그래도 덕분에 태영은 편안히 아이들 속에 섞일 수 있었다. 오랜만의 등교인데도 웃을 수 있었고, 다음 주에 있을 경연대회에 관련한 이야기를 하며 수업을 마쳤다.
그러고서 돌아왔는데…….
“당분간요?”
“네. 며칠 동안 쉬신다고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태영은 2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1층을 서성거렸다. 작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이맘때쯤 몸이 좋지 않아 며칠 동안 집에서 쉬신다고 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자주 아프신 걸까. 몸이 건강하지 못하신 걸까. 태영이 보기에도 은재는 늘씬한 편이었다. 아니, 마른 편이었다. 피부도 저와 달리 하얀 편이었고.
벌써 두 번이나 이렇게 아픈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못했다. 저는 건강한데. 저는 흙을 먹어도 괜찮을 만큼 건강한데.
하지만 왠지 작년과는 다른 분위기가 뺨에 와닿는 것만 같았다. 버석거리는 낙엽들이 정원에 쌓여 가는 계절인데도 건조함이 아닌 오묘한 축축함이 느껴졌다. 처음 저택에 발을 디디던 순간이 떠오를 때처럼 괜히 숨을 삼키는 것마저 이상했다.
숨을 크게 삼켰다가는 왠지 모를 이 축축함에 빠질 것 같았지만 태영은 모른 척 숨을 뱉으며 물었다.
“그럼 오늘 저녁에 제가 죽을 가져다드려도 될까요?”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그때, 태영이 들어온 후에도 활짝 열려 있던 대문 사이로 낯선 남자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 뒤에 묘한 얼굴로 서 있던 강 비서가 태영을 발견하고는 표정을 애써 갈무리했다.
“당분간은 방 근처에 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베타인가? 하긴, 아직도 이렇게 작은걸 보니 그렇겠군. 형질에 염증이 있는 사람이니 알파를 집에 들일 일도 없을 거고.”
“누구세요.”
정장 차림에 장신인 남자는 피식 웃으며 태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본능적으로 태영이 남자의 손길을 강하게 뿌리쳤지만, 남자는 귀엽다는 듯 태영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또래보다 훨씬 더 느리게 자라는 태영은, 장신의 남자에게는 그저 어린애에 불과했다. 설령 키가 컸더라도 열네 살의 맹목적인 소년은 그에게 상대할 필요도 없는 어린애였겠지만.
“글쎄. 그걸 말하면 내가 민 이사한테 혼날 것 같은데.”
“…….”
“난 민 이사 다시 보고 싶거든. 어떻게 얻은 기횐데. 이럴 때는 더 큰 상을 바라면서 입단속을 해야겠지?”
“이만 들어가시죠.”
강 비서는 그쯤에서 대화를 중단하려 했다. 그러나 태영은 남자가 저를 지나쳐 1층에 있는 은재의 방으로 향하는 것을 보면서도 발을 떼지 못했다.
남자는 너무나 당연하게 은재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요.”
태영이 곁에 서있는 정 실장에게 물었다.
“최 박사님…… 아니신데.”
아직도 은재와 태영은 최 박사에게 진료를 맡기고 있었다. 며칠 전에도 최 박사가 저택을 찾았었다.
그런데 누구일까. 너무 당연하게 은재의 방으로 들어가는 저 사람은. 강 비서의 안내를 받아가며 저택에 당당하게 발을 디디는 저 남자는.
“은재야.”
“…….”
“은재야. 나 왔어. 들어갈게.”
남자가 은재를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태영이 선 곳까지 전해졌다. 태영은 바람에 실려 전해지는 그 음성에 문득 묘한 외로움을 느끼며 조용히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도련님. 올라가시죠.”
묵묵히 곁을 지키던 정 실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그제야 태영은 발을 움직였다. 하지만……. 자꾸만 은재의 방으로 시선이 향했다.
……은재야. 이사님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라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 몸이 안 좋다는데 곁에 있지도 않고 방을 나서 서재로 향하는 강 비서. 최 박사도 아닌데 방으로 향하는 남자.
그리고 얼핏 느껴지는…….
“이게 무슨 향이죠?”
“네?”
“무슨 향이 나는데요. 과일향 같기도 하고, 꽃향 같기도 하고…….”
무거운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던 태영은 짧게 스친 향에 또다시 걸음을 멈췄다. 순간 겪어 본 적 없는 아찔함이 척추를 강타했다.
태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거세게 움켜쥐었다가 파르르 숨을 삼켰다.
“특별히 향을 바꾼 건 없는데……. 밖에서 들어오는 향인가 봅니다.”
“아…… 그런가 봐요. 지금은 또 안나요. 그냥 잠깐 흘러들어 왔나 봐요.”
향은 금세 사라졌다. 아주 짧은 순간,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머릿속을 스쳤지만 한순간에 불과했다.
“저, 정 실장님. 이사님 언제까지 쉬신다고 하셨나요?”
“일단은 다음 주까지 계신다고는 하셨습니다. 그전에 몸이 나아지면 다시 출근하시고요.”
“그럼 죽은 나중에 드려야겠네요.”
죽을 삼키실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며칠이 걸리실 테니까……. 태영은 남자가 저에게 했던 행동과 말이 계속 생각났지만,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왜 온 걸까. 이전에도 이렇게 저택에 오는 남자가 있던 걸까. 제가 저택에서 살게 된 이후로는 한 번도 없던 것 같은데 몰랐던 걸까.
생각해 보면 은재가 딱히 누구를 만나거나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태영은 은재의 나이를 알고 있었다. 스물셋. 저와 아홉 살 차이였다. 태영에게는 한참 어른처럼 느껴지는 나이였지만, 사회에 나가기엔 어린 나이였다. 사람을 만나 연애 놀음을 나누기에 적절한 나이이기도 했다.
그런 자세한 사정까지는 몰랐지만, 태영은 언제든지 은재가 누구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지금껏 그 사실을 제가 너무 무심하게 여겼다는 것도.
왜인지 갈피를 잃은 마음이 혼란 속을 오래 떠돌았다.
* * *
[금빛 고수머리와 붉은 뺨, 부드러운 피부를 가졌던 에로스의 몸이 자라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프쉬케를 본 이후. 프쉬케의 옆구리를 스친 창이 에로스의 살갗에도 상처를 남기고, 당연하게도…….]
“오늘 끝까지 연습하고 갈 거야?”
애써 활자에 정신을 팔고 있던 태영의 곁으로 불쑥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아. 어. 그럴 거야.”
“뭐야. 책 읽고 있었어?”
날이 며칠이나 바뀌어도 도통 가시지 않는 상념에 태영은 그늘이 비치는 곳에 앉아 연신 페이지를 만지작거리는 와중이었다. 때마침 다가온 의준을 발견하고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웬 책이야?”
“예전에 이사님이 골라 주신 거야.”
아하. 펜싱 수트가 담겨 있는 가방을 대충 바닥에 내던진 의준이 양팔을 젖혀 몸을 기대며 발을 까딱였다. 잠시 낯선 제목의 책에 시선을 두었다가 곧 다시 태영을 바라보았다.
태영은 잠시 책 페이지를 손으로 매만지다 소리 나게 책을 덮었다. 기다렸다는 듯 의준이 말을 붙였다.
“근데 넌 계속 이사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응.”
“아빠는 아니고?”
“그런 거 아냐.”
“이사님 몇 살이신데?”
스물……. 선선히 은재의 나이를 이야기해 주려던 태영은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냥.”
의준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 재밌어?”
“별로.”
열네 살의 소년이 책을 좋아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지금도 태영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자의로 책을 찾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저 이것은, 은재의 손길이 닿은 무언가라도 잡기 위해 가져온 것이었다. 이전 새로 방을 선물 받았을 때 은재가 꺼내 준 책이었기에.
날이 꽤 많이 지났건만, 은재와 그 남자는 그때 그 시간 이후 방을 나서지 않았다. 가끔 정 실장이 그 앞에 음식과 마실 것들을 놓고 사라지기만 할뿐이었다.
그때에도 문은 활짝 열리지 않았다. 장신의 남자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와 트레이를 가져가는 게 전부였다. 그 어디에서도 은재를 볼 수가 없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태영은 처음으로 은재의 서재에 들어섰다. 잠시 주인을 잃은 3층에 발을 디뎠다. 제게 허락된 은재의 공간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왜인지 솟구쳤다. 은재가 재밌게 보았을 법한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하고도 싶었다. 민 회장의 장례식 이후 다소 우울해할지 모르는 그를 그렇게 위로해 주고 싶었다.
제가 그렇게 멋있고 아름다운 사람에게 그런 거라도 할 수 있게 된다면 몹시 기쁠 것만 같았다.
정작 은재의 도움 없이는 책을 꺼낼 수도 없고, 무엇을 그가 좋아하는지 몰라 한참 서 있어야만 했지만.
긴 고민 끝에 예전 은재가 꺼내 준 책을 챙겼다. 그것이라도 곁에 두고 싶었다. 자꾸만 허탈함과 무력감이 가슴 아래에 생소하게 걸려 있었다.
제가 위로가 되지 못해 다른 남자를 부르신 걸까. 아니면…….
“너 형 있다고 했었지.”
“응. 형 두 명. 큰형은 미국에. 작은 형은 캐나다.”
“다들 외국에 있네.”
“보통 유학을 가니까. 어릴 때부터 가는 애들도 많고.”
“너도 갈 거야?”
“언젠가는 가지 않을까? 아빠가 대학은 꼭 미국에서 나오라셔서.”
태영은 꽤 많이 이런 생활에 적응했다고 생각했지만, 의준을 볼 때면 가끔 멀미 같은 것을 느꼈다. 저는 그저 은재가 원하는 대로, 그가 기뻐할 만한 대로 살아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속한 세계가 아직도 먼 세계의 일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것을 익숙하게 여기는 의준도.
“근데 형은 왜?”
“그냥 형들이 연애하는 거 본 적 있나 해서.”
“음. 봤던 것 같기는 한데. 근데 그냥 별 건 없었어. 그 누나네 가족들이 와서 밥 먹고, 또 우리가 누나네 집 가서 밥 먹고. 둘이 따로 데이트는 했겠지만……. 근데 그 누나네 집 진짜 좋았어.”
“그때 어땠어?”
“하도 예전이라 잘 기억 안 나. 근데 큰형이 평소에는 날 보지도 않으면서 친절한 척 말 걸어서 역겨웠던 기억만 난다.”
우웩. 의준은 구역질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태영도 비슷하게 입꼬리를 당겨보았지만 웃음은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가 이상한 사람인 것 같다는 확신만 강해졌다.
그들의 세계에 아직 완전히 속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왜. 이사님 누구 만나시는 것 같아?”
명랑하지만 내심 눈치가 빠르고 약은 구석이 있는 의준이 슬그머니 소리를 죽여 물었다. 태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데……. 나 하나만 더 물어도 되지.”
“어. 해봐.”
“그 소문 있잖아. 그때 파티장에서 이혁민이 말했던 소문.”
“아, 진짜. 그 이야기가 왜 나오냐. 그날 이후로 이혁민 미국으로 쫓겨났어. 신경 쓰지 마.”
“아니 그게 아니고, 자세히 좀 말해 봐.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서 그래.”
“……너 그 소문 그때 처음 들은 거야?”
“내가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듣겠어.”
“하긴…….”
아직 대화가 끝나기 전인데도 예비 종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며칠 뒤에 열릴 경연회 덕분에 오후 수업은 모두 취소되었다. 각자 펜싱 경기장이나 승마장, 혹은 레슨실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펜싱 경기에 출전하는 태영과 의준도 체육관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르게 연습을 시작한 것인지 수영장에서는 물 튀기는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가 매섭게 터져 나왔다. 의준은 그 찰나를 틈 타 숨을 고르며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한숨과 함께 다시 의준의 입이 열렸다.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런 파티 가서 주워 들은 게 전부야.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그런 이야기 내 앞에서 안 하시거든.”
“…….”
“그냥…… 민 회장님은 알파시고, 이사님은 오메가잖아. 그것도 눈에 확 띄는 오메가. 그렇다 보니까 두 분 관계가 조금 이상하게 보였나 봐.”
오메가……. 베타인 태영은 형질을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은재는 태영이 베타라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만족했고, 다른 형질에 대해서는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의준은 약간 난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어. 오메가를 낳으면 일부러 알파인 애들을 데리고 와서 양자로 입적시킨다고.”
“왜?”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오메가들한테는 그냥 그렇게 한대. 그런데 이사님은 오메가인데도 민 회장님이 양자로 들이고 엄청 밀어주셨다는 거야.”
의준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메가인 은재를 데려온 순간부터 소문이 시작되었을 게 뻔했다. 이해가 되는 듯 되지 않는 일에 태영은 눈썹을 크게 구겼다.
은재가 민 회장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미처 놀랄 새도 없이…….
“히트 사이클 때문에 그런 소문이 생기는 거라고 예전에 큰형은 그랬어.”
“……히트 사이클?”
“어. 막 왜, 오메가들이 막…… 그런 거 있잖아.”
히트 사이클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보육원에 있을 때도 오메가인 어린 동생들이 몇 명 있었다. 완전히 형질을 입기 전에 금방 입양을 가기는 했지만…….
“일단 들어가자. 끝나고 다시 이야기 해. 너 가방은?”
“체육관에 있어.”
일정한 주기로, 혹은 불규칙한 주기로 오메가들에게 오는 오한과 발열 등이라고 배웠는데.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일어나는 자연적인 증상이라고 배운 게 전부인데.
태영은 제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것에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했다. 가장 날것의 세상을 경험하며 자란 아이들이지만,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지내는 만큼 오히려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더디게 세상을 배우곤 했다.
그 역설로 인해 고스란히 피해를 보는 건 또 보호자 없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아이들이었고.
“헐, 야. 뛰어. 저기 감독님 오신다.”
의준은 아직까지 가만히 앉아 있는 태영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태영은 제 무릎 위에 놓인 책을 챙겨 의준을 따라 체육관을 향해 달렸다.
그렇지만 머리는 히트 사이클에 대한 생각으로 무겁기만 했다.
땀 범벅이 될 정도로 펜싱 연습에 매진하고 돌아온 태영은 며칠간 서 있던 차량이 사라진 것을 보며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연습을 할 때에도 내내 무표정하던 얼굴에 묘하게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사람 갔나요?”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마중을 하러 나오던 정 실장은 별안간 들은 물음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했다.
“아, 네. 오전에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묻는지 파악하자마자 곧장 대답해 주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태영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럼 오늘 이사님 뵐 수 있나요?”
“아직까지는 컨디션이 다 돌아오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따가 제가 죽을 놓고 올게요. 그건 되겠죠?”
요 며칠간 태영이 얼마나 은재를 그리워했는지, 얼마나 은재를 보고 싶어 했는지 너무나 잘 아는 정 실장이었다.
아기 새처럼 태영은 은재를 따랐다. 태어나 처음 본 것이 은재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좋아했다. 일주일에 한번 함께 식사를 하는 날을 얼마나 기다리는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저녁때쯤이면 괜찮을 것 같네요.”
“네. 그때 내려올게요.”
오늘은 정원에서 연습할 거예요! 태영은 성큼 계단을 뛰어오르며 외쳤다. 오랜만에 활기를 찾은 듯한 그 모습에 정 실장은 소리 없이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저녁이 되어서야 태영은 다시 저택으로 뛰어 들어왔다. 혼자 하는 펜싱 연습은 어려웠지만, 나름대로 감독님께 배웠던 것을 기억해 훈련을 했다. 또 한 번 땀범벅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은재의 몸이 나아졌다는 사실과 그 남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기뻐 더욱 매진할 수 있었다.
서둘러 들어와 씻은 뒤 부엌으로 향했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식사를 마친 태영은 정 실장이 쥐여 준 트레이를 들고 섰다.
드디어 이사님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제대로 보지는 못하더라도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었다. 왜 자꾸 아프신지. 그래서 그 남자는 왜 부르셨는지. 그 사람이 간호를 잘 해 주는지. 다음엔 제가 하는 건 어떤지 등등 떠오르는 온갖 생각을 갈무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요 며칠 인적이 드물었던 복도 위로 자박한 걸음 소리가 울렸다. 태영은 고요하고 그늘진 복도에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손안에 땀이 배어나는 것이 느껴졌지만 더 꾹 쥐었다.
은재의 곁에 갈 때면 종종 이랬다. 더 잘 보이고 싶어서, 더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어서 일평생 사용할 긴장이 다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의준이나 정 실장, 강 비서에게는 이러지 않는데 유독 은재의 앞에선 실수를 연발하는 것 같았다.
자주 보지 못하는 분이니까…….
태영은 요 며칠간 은재의 곁을 차지했던 그 장신의 남자를 떠올리며 걸음을 멈췄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 남자가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왜인지 모를 기분이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저에게 보여 준 모습만 봐도 그랬다. 사람들은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에게만 예의를 갖추곤 했다. 어린아이들은 뭘 모를 거라고 생각하며 함부로 말을 하곤 했다. 그러곤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 나올 때면 아닌 척 모습을 가다듬었다.
그런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다. 보육원에서도, 파티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저택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태영은 본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었고, 꺼려 했다. 오랫동안 결핍된 곳에서 자란 덕분에 이제 그런 사람을 구별하는 본능이 몸에 새겨져 있었다.
그 남자가 그런 사람이었다.
“이사님.”
태영은 조심스레 들고 있던 트레이를 내려다 놓고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똑똑. 혹시 잠에 드신 건가. 태영은 제가 그의 잠을 깨울까 싶어 입을 다문 채 노크만 한 번 더 했다.
“…….”
역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응답도 없었고, 희미한 기척조차 없었다. 태영은 숨을 죽인 채 문 틈 사이에 귀를 대 보았다. 계속 묵묵부답이시면 방해를 하지 말고 이대로 그냥…….
“……앗!”
그때 예고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태영은 급하게 벽을 붙잡아 보았지만 몸은 이미 기운 후였다.
“……이런.”
동시에 문을 열고 나선 은재가 조금 가라앉은 음성을 뱉었다. 자연스레 제게 쏟아지는 몸을 받아 세워 주었다.
“읏.”
태영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은재의 손이 닿았던 부근이 너무나 뜨거웠다. 괜찮아지셨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손이 닿은 부근에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소스라치며 그 손에서 물러난 태영은 놀라 은재를 올려다보았다.
“……태영이구나.”
호되게 앓은 것인지, 은재의 창백한 얼굴에 살이 더욱 내려 있었다. 태영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기운에 뒤로 한 발 더 물러섰다.
“……죽 가지고 왔어요. 아프시다고 들어서.”
“고마워. 이런 거 안 해도 되는데.”
애써 은재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태영은 식은땀이 등 뒤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작년 이때, 제 저녁 식사를 걱정하며 방을 찾았던 때와 비슷하고 다른 얼굴이었다.
원래도 차분하고 침착했던 은재의 주변에 잔뜩 나른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차마 열네 살 소년이 짚어 낼 수 없는 그런 분위기가 더욱 선명하게 묻어났다.
자꾸만 입 안이 말랐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의 앞에서는 숨소리조차,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아 미성인 목소리조차 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이만 올라가 봐.”
“…….”
“또 보자.”
지난주에 맡았던 그 향이 불쑥 느껴졌다. 태영은 제가 넋을 잃고 은재를 응시하던 것도 모른 채 있다, 뒤늦게야 굳게 닫힌 문을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죽…….”
은재는 죽도 챙겨 가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저 때문에 끼니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사님. 죽 앞에 두고 갈게요. 챙겨 드세요.”
태영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문틈에 대고 말한 뒤 복도를 뛰어 계단에 들어섰다.
방에 들어오고 나서야 태영은 숨을 뱉었다. 숨을 참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탁,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들어서니 참았던 숨이 길게 새어 나갔다. 뱉고 또 뱉어도 가득 고였던 숨이 한참이나 밭게 터져 나왔다.
히트 사이클. 왠지 모르게 그 단어가 입 안에서 굴러다녔다. 히트 사이클, 오메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저히 맞는 단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이상한 기분에 태영은 무작정 침대 위로 올라갔다. 은재의 서재에서 훔쳐온 책을 그저 읽어 내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속이 시끄러웠다. 무자비하게 뻗어 나간 강한 색의 직선들이 머리를 아프게 찌르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쿵 거세게 뛰며 숨이 짧아졌다.
다음 날, 의준을 만나자마자 태영은 히트 사이클에 대해 물었다.
* * *
학교에 더한 활기가 들어차 있었다. 오전에 시작된 경연회는 음악 연주를 시작으로 하여 각개의 행사를 이어 갔다. 2년에 한 번 열리는 행사였다. 체육대회와 전시회, 그리고 경연회가 번갈아 가을마다 열렸다.
앞뒤 운동장이 고급 차량으로 가득 찼고, 교문에는 아이들을 위한 간식 차량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색색의 드레스와 운동복을 입은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웃다가 사라지고, 또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건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홀에서는 독창과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오보에, 플루트 같은 악기 연주회가 이어졌고, 메인 체육관에서는 펜싱과 사격, 태권도와 검도, 승마, 수영 등 스포츠 경기가 진행되었다. 여러 건물에서 활기가 솟아나고 있었다.
민 회장으로부터 말을 선물 받았던 태영은 승마에 먼저 발을 들여 보았지만, 그건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칼을 잡았고, 펜싱에서는 국가 대표 출신의 감독이 눈을 빛낼 만큼 큰 소질을 보였다.
제가 잘하는 게 있다는 사실에 태영은 크게 안도했다. 또 나날이 느는 실력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눈에 띄는 실력에, 평소 말을 걸지 않던 친구들과 선배들도 다가와 친한 척 굴기도 했다. 또래들보다 월등한 실력은 인기를 얻기에 충분한 요소였다.
그것도 물론 좋았지만, 은재의 앞에서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은재의 앞에서 칼을 잡았을 때 이왕이면 더 좋은 실력으로 보여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
“아빠!”
이 날은 평일이지만, 부모님들은 꼭 이 행사에 참여했다. 할아버지의 재력과 아버지의 무관심, 어머니의 치맛바람은 이제 통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제 사업을 이어 갈 아이들의 교육에 부모들은 누구보다 열성적이었고, 또 학교에서 맺어지는 인연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사업으로 인해 만나는 것보다 오히려 아이들을 통해 만나는 인연이 더 끈끈한 경향이 있다고 다들 믿는 편이었다.
“어, 아들. 준비 많이 했냐.”
“안녕하세요.”
“태영이구나. 아이고, 둘이 고만고만하네.”
첫 경기를 앞두고 있는 태영과 의준은 마스크를 벗은 채 다른 선배 부모님이 사다 준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 이들을 먼저 찾은 것은 의준의 아버지였다.
“아빠 저기 3번째 자리에 앉을 테니까 잘 좀 해라. 네가 기어코 첼로 안 하겠다고 해서 펜싱 시킨 거니까. 이것도 못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시작부터 기운 빠지게!”
의준의 아버지는 씨익 웃으며 땀에 젖은 아들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그는 태영에게도 응원의 말을 전해 준 뒤 전화를 받으며 대기실을 나섰다.
“……이사님은 안 오신대?”
“모르겠어. 아직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았어.”
히트 사이클. 이제는 히트 사이클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했다. 그것을 설명해 준 의준 또한 은재가 히트 사이클을 보냈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태영은 차라리 은재가 오지 않았으면 했다. 누구나 관계를 맺고 살 테지만, 그렇기에 아이를 갖겠지만……. 그것을 은재가 했다고 생각하면 어딘가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 거칠고 본능만 남은 행위에 우아하고 멋있는 은재가 동참한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나도 아빠 안 왔으면 했는데. 분명 또 찍어서 형들한테 보내겠지. 그럼 또 큰형이 얼마나 놀릴까.”
다행히 의준은 좋은 친구였다. 철없이 굴거나 물어본 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녀석이 아니었다. 지금도 태영을 배려하며 말하고 있었다.
태영은 코치가 절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발견하고 먼저 칼과 마스크를 챙겨 일어섰다.
“고마워.”
“우웩. 됐거든?”
태영은 작게 웃으며 수트를 마저 올렸다. 대기실을 나서 메인 경기장 쪽으로 걸어가며 점점 커지는 환호와 마주했다. 꽤나 켜켜이 쌓인 환호가 귀청을 뻐근하게 메웠다.
“이제 오 분 후면 올라갈 거야.”
“네.”
“바디코드 연결 했니? 검에 드 꼬르 연결하는 건 이따가 올라가기 직전에 내가 해 줄게.”
코치는 한 번 더 태영의 차림을 확인하며 목청 높여 물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경기에 홀 안은 더없이 시끄러웠다. 학생들의 경연인데도 열띤 응원이 주변을 울릴 정도로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여기서 조금 기다리자.”
“네.”
코치를 따라 걸으니 어느새 경기장 바로 뒤편이었다. 앞에서는 저와 함께 연습했던 친구들이 열심히 경기를 하는 것이 보였다. 버저가 울리는 소리와 검이 부딪치는 소리, 심판이 외치는 소리와 발이 부지런히 오가는 소리들이 환호와 동시에 겹쳤다.
그 모습에도 별로 긴장되지 않았다. 열심히 연습했고, 자신도 있었다. 다만, 은재가 보이지 않아 가라앉을 뿐이었다.
히트 사이클을 보낸 그가 차라리 며칠 더 쉬었으면 하면서도 저 홀로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저택을 찾았을 때, 그리고 은재의 이름을 불렀을 때의 그 외로움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태영은 크게 한번 숨을 삼키며 제자리 뛰기를 했다. 아직도 키가 작은 태영은 펜싱에서 다소 불리한 위치였다. 그래도 다행히 키에 비해 팔과 다리는 긴 편이었다. 몸이 유연해 길게 손을 뻗을 수 있었고, 날렵했다.
태영 본인은 몰랐지만, 오늘 경기의 기대주였다. 감독이 인정할 만큼 끈기 있는 노력이나, 쉽게 무언가를 놓치지 않는 성격이 자못 기대를 받고 있었다.
잠시 사라졌던 코치가 다시 태영에게 다가왔다. 이제 올라가야 할 시간이었다.
“태영아.”
그때 수많은 소음을 뚫고 나직한 음성이 다가왔다. 태영은 발을 옮기려던 것을 그대로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안 늦었네.”
“…….”
“준비 다 됐어?”
변함없이 몇 겹으로 쌓이는 두꺼운 소음 속에서 그 희미한 소리만이 오롯이 들려왔다.
은재였다. 평소와 비슷한 차림의 은재. 언제나처럼 베스트까지 잘 차려입고 머리를 넘기고 서 있는 은재.
그를 발견하자마자 소름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사님.”
“경기하기 전에 보려고 서둘렀는데 다행이다.”
은재는 선명히 미소를 지었다. 점점 더 커지는 환호와 안내 방송에 귀가 아플 법한데도 눈가 한 번 찌푸리지 않고 평소와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태영은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경기를 위해 온갖 것들이 주렁주렁 수트에 매달려 있었지만 은재에게 몸을 돌렸다. 왜 이러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
“…….”
“…….”
한 번도 이렇게 어리광을 부린 적 없던 태영이라 은재는 조금 놀랐지만, 곧 소년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 하고 와. 앞에 앉아 있을게.”
“……네.”
“끝나고 맛있는 거 먹자.”
별거 아닌 말이지만 태영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 향해 웃어 주는 그 얼굴을 보며 검을 꼭 쥐었다.
경기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은 조금도 무겁지 않았다.
덕분인지 태영은 아주 좋은 성적으로 경기를 마쳤다. 1학년 중 제일 좋은 점수를 냈고, 당당히 1등을 거머쥐었다.
경기 중에는 관중석을 볼 수 없었지만, 올라가며 은재가 앉아 있던 것을 똑똑히 보았다. 의준의 아버지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누며 손을 흔들어 주는 은재. 그 모습에 태영은 평소보다 훨씬 더 좋은 기량으로 경기를 마쳤다. 공격권이 넘어가는 순간이 유일한 약점이었는데, 그때에도 날렵하게 검을 막아 내고 오히려 점수를 획득하기도 했다.
원래도 상대를 지독하게 물고 놓지 않는 성미였지만 오늘은 그야말로 이를 간 것처럼 상대를 물어뜯었다. 타고난 소질과 끈기 있는 노력, 그리고 약간의 야욕이 드리워져 단연 눈에 띄는 경기력이었다.
자연스레 경연회가 끝난 후에는 의준의 가족과 자리를 함께했다. 역시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중국식 식당이었다.
“지난번 복지 재단 통해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장학금 전달도 잘 됐고요. 신경 쓸 것들이 많았는데 도와주신 덕에 수월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저희야 뭐, 큰일 한 것도 아닌데요. 이사님과 회장님께서 큰 결정 하셨죠.”
“그런데 이 교수님은 안 오셨나 봅니다. 오늘 함께 인사드렸으면 좋았을 텐데요.”
“큰애 때는 열심히 따라다니더니, 이제 막내라고 지치나 봅니다. 강의 있다고 학교로 일찍부터 가던데요. 학생들 논문을 봐준다나, 그래서 제가 부랴부랴 왔지요.”
허허,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손 전무가 음식을 제 접시로 옮겨 담았다.
“저도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회사 나갔다가 급하게 학교로 왔습니다.”
“민 이사는 더 그렇겠습니다. 그래도 오길 잘했죠. 태영이가 이렇게 잘할 줄 몰랐는데. 못 봤으면 서운할 뻔했습니다.”
눈치 좋은 손 전무는 테이블을 돌려 태영이 자주 먹던 음식을 그 앞에 놓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태영은 손 전무에게 인사하며 집게로 음식을 집었다.
“너 진짜 잘하더라.”
“고마워.”
“연습 때보다 훨씬 잘하던데. 실전에 강한 타입인가 봐.”
“너도 잘했잖아.”
“야. 넌 1등 했잖아.”
의준은 양 볼 가득 빵빵하게 음식을 넣어 씹으며 말했다. 손 전무는 보란 듯이 한숨을 쉬며 의준에게 턱짓했다.
“누굴 닮아서 저렇게 교양이 없나 몰라.”
“나? 왜?”
“태영이 좀 봐라. 어? 넌 태영이랑 놀면서 뭐 배웠냐.”
“난 아빠 닮아서 그래. 얘는 당연히 이사님 닮지. 난 아빠 닮고.”
헤헤. 의준은 소년 같은 얼굴로 웃으며 제 그릇을 당당히 손 전무에게 내밀었다. 아무리 봐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막내아들이었다. 손 전무는 의준을 타박하는 척하다가도 아들의 애교에 결국 그릇을 받아 가득히 음식을 떠 주었다.
“많이 먹고 키나 커라. 네 영상 보고 큰형이 아주 낄낄거리고 웃더라. 아직도 초등학생인 줄 알았다고.”
“왜! 나 그래도 키 좀 컸어. 태영이보다 크잖아.”
“그래. 둘 다 키 좀 커라. 언제들 클래.”
편안한 부자의 대화를 보고 있던 은재가 눈을 접어 웃으며 차를 따랐다.
“제가 별로 큰 키가 아니라 태영이는 컸으면 하는데요.”
“아이고, 민 이사는 그 정도면 크죠.”
오메가인데. 그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은재도, 손 전무도 모두 알고 있었다.
“태영이는 앞으로도 많이 클 겁니다. 우리 애들은 애 엄마가 작아서 걱정이지.”
은재와 태영이 생물학적 연관이 없다는 것은 모두 알지만 태연하게 대화했다.
“그런데 아까 보니까 코치가 뭐 말하던데. 물어봐도 됩니까? 그 코치가 그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서 더 궁금하네요.”
“아…….”
일찍 식사를 마친 은재는 태영의 잔에도 차를 따라 주며 태영과 눈을 맞췄다.
“너 펜싱 시킬 생각 없냐고 물으시더라.”
“……저요?”
“응. 국가 대표로 키우고 싶으시다는데.”
“우와!”
아직도 양 볼이 빵빵한 의준이 대신 환호했다. 손 전무는 인상을 팍 구기며 티슈로 제 아들의 얼굴을 벅벅 닦았다.
“해 볼래? 생각 있어?”
“…….”
“네가 하고 싶으면 해도 돼.”
아빠, 나도. 아직도 손 전무에 손에 붙잡혀 있는 의준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손 전무는 가볍게 눈을 흘기며 곧장 고개를 저었다. 꽤 단호한 얼굴이었다.
“왜?”
“넌 태영이만큼 못하잖아.”
“연습하면 되지!”
“안 돼. 무슨 운동이야. 넌 아빠 일 이어받아야 돼.”
“형들 있잖아.”
“그것들 안 한다고 하나는 의대로, 하나는 법대로 간 거 몰라서 이래? 너 주려고 내가 이 나이에도 버티고 있구만. 그러니까 공부 좀 열심히 해라.”
흥. 의준은 손 전무의 손을 밀어내며 다시 고추기름이 묻은 숟가락을 들었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그 대화에 태영은 잠시 침묵하다 은재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볼게요.”
“그래. 급한 거 아니니까.”
저와 은재는 가족이 아니었다. 은재는 분명한 보호자지만, 혈연관계도 아니었고 그저 동거인일 뿐이었다. 민 회장의 양자로 들어간 은재와 달리 태영은 민 회장의 양자도, 그렇다고 은재의 양자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가끔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베타 남자아이. 그 요건에 맞춰 절 데리고 왔다는 것을 알지만, 제 역할이 무엇인지 헷갈렸다.
의준처럼 저도 사업을 이어 가는 건 무리인 걸까.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는 걸까.
그렇다고 그의 아들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그가 넘치게 주는 것을 받으며 살면 충분했다.
이 정도가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평생 그렇게 살 수 있었다.
식사는 손 전무가 계산했다. 다음에 은재가 계산하는 자리를 만들자 이야기를 하며 의준과 태영도 각자의 차로 향했다.
오랜만에 함께 들어가는 길이었다. 언제 묘한 기분을 느꼈냐는 듯, 태영은 제 옆에 앉은 은재의 손을 훔쳐보며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께서 보셨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나중에 오늘 받은 상 보여 드릴게요.”
“그래. 그러자.”
은재는 그래도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 몸이 안 좋았던 것도 이제 다 회복된 모양이었다. 태영은 불쑥 떠오르던 며칠 전 은재의 모습을 기억에서 지우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말 말고 검을 사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없이 앉아 있던 은재는 저택의 입구가 보일 무렵, 태영의 귓바퀴를 툭 치며 말했다. 순식간에 태영의 귓바퀴가 선명하게 붉어졌다.
“승마는 별로 재미없니?”
“……네. 그건 좀.”
“그렇구나.”
웃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은재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 승마를 좋아했는데.”
“어, 저, 저도. 좋아해요. 근데 그냥 승마는 훨씬 더 어려워요. 말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급하게 태영이 말을 덧붙였다. 은재는 낙엽이 떨어지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조금 더 소리 내어 웃었다. 좀처럼 자주 들을 수 없는 그 웃음소리에 태영은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며 승마를 좋아한다 외쳤다.
어느샌가 태영의 몸이 은재 쪽으로 한껏 기울었다.
“그래. 알겠어.”
“진짜예요. 저 승마 좋아해요.”
“믿을게.”
“다음에…… 다음에 제가 보여 드릴게요.”
“말 타러 간 지 한참 됐다고 들었는데.”
“그건 요즘 펜싱 연습하느라……. 이번 주에, 이번 주에 가려고 했어요! 이번 주말에 갈 거예요.”
차는 어느새 긴 정원을 달려 문 앞에 도착했다. 은재는 직접 태영이 탄 쪽의 문을 열어 주며 싱그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 뒤에서 역광으로 비치는 볕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사했다. 마치 그에게서 온통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 그럼 주말에 가자.”
“……이사님이랑 같이요?”
“혼자 가고 싶어?”
“아니요! 같이 가요!”
태영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고요한 저택에 울렸다. 나와 있던 정 실장도 차마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황급히 뒤로 돌아야 할 정도였다.
“정말?”
“네. 꼭이요. 꼭 같이 가요, 이사님. 열심히 할게요.”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 위로 장난기 어린 미소가 새겨졌다. 태영도 제가 은재에게 놀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좋았다. 그가 저를 보며 웃는 것도 좋았고, 그의 머리가 자연스러운 가을바람에 흩날리며 저택과 어우러지는 것도 좋았다.
어쩐지 모르게 제 안에서 꿈틀거리던 묘한 기분이 한순간에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가 남자와 며칠간 나오지 않던 이유도, 제가 보았던 그 얼굴도, 그 분위기도 이제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이게 옳았다. 이게 은재였다. 이게 막연한 존경심을 갖게 하는 은재였다.
제가 어떤 자리이든, 미숙한 모든 것이라도 바치고 싶은 사람.
웃음 한 번에 모든 생각을 지우는 사람.
“그래. 토요일에 같이 가자.”
“네!”
태영은 은재의 미소가 오래 남아 있는 것을 보며 귓불을 붉혔다. 은재의 앞에서만 나오는 수줍음이 튀어나와 뺨을 발그레하게 만들었다.
이사님도 다시 내가 편해지신 거겠지. 죽을 들고 있던 그때의 일은 아무렇지 않은 거겠지.
“안녕히 주무세요!”
태영은 더욱 씩씩하게 인사했다. 은재는 태영의 머리카락을 흩트려 준 뒤 먼저 방으로 사라졌다.
왠지 모를 확신과 기쁨이 가슴에 가득 찼다. 이사님이 다시 그 남자를 부를 일은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었다. 그와 연인 사이라면, 그 재수 없던 남자와 연인이라면 주말에 데이트를 나갈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태영은 더욱 기뻤다.
다행히 은재와 그 남자가 다시 만나는 일은 정말 일어나지 않았다. 자연스레 은재를 향한 마음은 더욱 숭고해졌다. 태영의 마음속에서 은재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 어떤 표현들을 가져다 대도 은재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태영의 모든 순간이며, 모든 감정이었다.
그 믿음은 꽤 오랫동안 견고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은재에게 애인이 생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