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9)

2

“도련님, 이사님께서 찾으세요.”

“지금 내려갈게요!”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가을이 더욱더 무르익어 이제 겨울을 맞이하는 계절이었다. 노랗고 붉게 물들어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해도 절로 감탄이 나오던 시기도 끝물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지던 단풍비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한동안 밖에 가만히 서서 우수수 떨어지는 단풍을 손에 은근슬쩍 잡아 보고, 정원사를 몰래 쫓으며 푹신하게 쌓인 나뭇잎을 꼭꼭 밟았던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계절 내내 이파리를 달고 있는 나무들만이 이파리를 내보였고, 나무들은 겨울옷을 미리 챙겨 입었다.

다시 회사로 출근하기 시작한 은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태영과의 약속을 지켰다.

함께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셨다. 식사 자리에서는 별다르게 지적을 받지 않았지만,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는 몇 가지 조언을 들었다.

“케이크 안 좋아하니?”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은재는 태영이 따라 준 차를 마시며 물었다.

“먹어도 돼.”

“…….”

“먹는다고 예의에 어긋나지 않아. 그리고 아직 어리니까.”

그러나 태영은 쉽게 포크를 들지 않았다. 심지어 은재와 차를 마실 때는 또다시 우유와 설탕을 넣지 않았다. 그를 따라 하고 싶은 마음과 지나치게 어린애처럼 보여서는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뒤섞여 만든 결과였다. 제 세계를 지키는 유일한 어른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짧은 숨을 뱉은 은재는 케이크 한 귀퉁이를 베어 먹었다. 생크림 케이크가 딸기가 쏙쏙 박힌 단면을 드러내며 더욱 먹음직스럽게 변했다.

“먹어.”

그 모습을 본 후에야 태영이 포크를 들었다. 은재가 먼저 한 행동이라면 저도 해도 될 것 같았다. 이제야 완전한 허락이 떨어진 셈이었다.

그 후에야 케이크를 베어 먹은 태영은 슬그머니 뺨을 밀어 올리며 웃었다. 차마 숨기지 못한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저택에서는, 그러니까 나랑만 있을 때는 해도 돼.”

“…….”

“하지만 밖에 나가서는 지금처럼 하지 않는 게 좋아.”

“왜요?”

태영은 들었던 포크를 다시 내려놓으며 물었다. 은재는 떠낸 케이크를 먹으라 손짓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나가 보면 알겠지만…… 사람들은 말이 많아. 특히 나에 대해서는 더 그래. 그리고 나랑 사는 너한테도 그러겠지.”

“…….”

“미안한 일이지만, 밖에 나가서 다른 애들이 자유롭게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항상 넌 배운 대로 행동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더 쉽게 책잡히게 될 거야. 가진 게 많을수록 더 엄격한 기준이 요구되기도 하고.”

피가 섞이지 않아서 그런가. 갑자기 이 저택에 들어오게 되어서. 그러나 은재에게도 말이 많다는 말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들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괜히 사람들이 군소리를 할 여지를 줘서 좋을 건 없다고 저 또한 생각했으니까.

또 그 다음 주에는 일기장을 받았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 지켜야 할 것들을 새롭게 배웠고, 기본적인 지식 또한 배웠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선물 받았고, 영어와 또 다른 언어를 배우기 위해 탐색을 시작했다.

그렇게 은재와의 하루를 기다리며 살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저택에 온 지 두 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며 은재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여전히 그를 만날 수 있는 건 일주일에 하루, 금요일뿐이었다. 그 외에는 그와 식사를 하거나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태영은 기뻤다. 하루라도 그를 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에게 배우고 싶다고 용기 내어 말한 자신을 금요일마다 칭찬할 정도였다. 평소에는 방해가 되지 않게 숨죽이고 있었지만 이 날만큼은 그의 시선을 받을 수 있었다.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막상 그의 앞에 서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어쩐지 쑥스러웠지만.

태영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누르며 복도에 걸린 사진에 습관처럼 꾸벅 인사한 뒤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왔니.”

응접실에는 강 비서와 은재, 그리고 낯선 얼굴의 여자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태영은 절 향한 은재의 시선을 의식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집 안에만 있던 것 같아서. 이제 좀 나가야지. 지금 넣어 둔 옷이 취향에 안 맞을까 봐.”

“……아.”

둘러보니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는 옷걸이 앞에 서 있었다. 거울도 마련되어 있는 걸 보니 의상을 담당하는 직원인 모양이었다. 그는 한 번 더 태영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은재는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울 쪽으로 다가가며 태영을 불렀다. 조심스럽게 태영이 거울 앞에 다가섰다.

“밖에 나가서 식사할 건데, 원하는 옷을 골라 봐.”

태영의 어깨를 쥐며 은재가 그 뒤에 섰다.

“할 수 있겠지.”

굳게 움켜쥔 어깨. 등 뒤에 선 온기. 태영은 거울로 은재의 눈을 보며, 그리고 제 뒤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에 한 번 은재를 보는 게 전부였지만, 그를 향한 태영의 마음은 더욱 깊어졌다. 가끔 마주하는 그 무심한 시선을 더 자주 받고 싶었다.

짧은 숨을 삼킨 태영은 은재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옷을 골랐다. 직원이 태영을 도우려 나서자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어린 표정이 떠올랐지만, 금세 가르침을 떠올리곤 익숙한 척 대화했다. 몇 개 추천받은 옷을 더 챙기며 은재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될 것 같네요. 나중에 또 뵙죠.”

“네, 이사님. 또 뵙겠습니다.”

담백한 인사가 이어졌다. 태영은 저에게도 건네지는 인사를 돌려주며 슬그머니 가슴을 폈다.

“갈아입고 내려와.”

“네.”

받은 옷가지들을 한 아름 챙기려던 태영은 뒤늦게 멈칫하며 근처에 서있던 정 실장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정 실장이 다가와 옷을 챙겨 들었다.

“저, 이사님.”

그 짧은 사이 다시 서류를 든 은재가 태영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입고 가세요?”

“……음. 왜. 나도 갈아입을까?”

“아니요, 아니에요.”

은재는 출근하고 돌아온 그대로의 정장 차림이었다. 태영은 그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며 방으로 올라갔다. 그러고선 저도 비슷한 색감의 옷을 찾아 입었다. 어설프지만 하얀 셔츠와 바지를 입고, 셔츠를 바지 속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거울 앞에 서자 볼품없는 모습이 보였다. 두 달이 훌쩍 지났는데도 아직 고아 티가 나는 것 같았다. 이사님은 멋있는데.

매일 까맣게 탄 얼굴을 깨끗이 문지르는데도 피부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난의 증거가 완전히 밴 것 같았다. 태영은 애써 실망한 기색을 감추며 나섰다.

키라도 빨리 컸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면서.

1층으로 내려가니 대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다. 뜨거울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지는 빛을 맞으며 그 사이로 걸어가니 두 대의 차가 보였다. 저택에 오던 날 차를 타 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태영은 제 차가 어느 것인지 헷갈려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밖에 나와 대기하고 있던 강 비서가 성큼 다가왔다.

“도련님. 이걸 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태영은 배운 대로 강 비서의 눈을 짧게 마주친 뒤 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 안쪽에 앉아 있던 남자를 발견했다.

은재.

“이사님 차를 타고 가나요?”

그와 같은 차를 타고 간다는 사실에 태영은 놀라 물었다. 은재는 태영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내가 일이 있어서 그랬던 거고. 네가 혼자 외출할 때가 아니면 같이 타도 될 것 같은데.”

“네, 좋아요. 그렇게 해 주세요.”

강 비서가 조수석에 오르고 나자 차에 시동이 걸렸다. 기사는 출발해도 된다는 은재의 명을 받은 후에야 기어를 당겼다.

부드럽게 차가 저택 앞을 돌아 빠져나갔다. 매일 위에서 내려다보던 정원을 이렇게 지나는 건 또 오랜만이었지만, 태영은 밖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제 옆에 앉아 있는 은재를 의식했다.

다이닝 룸에서 그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할 때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 어딜 가도 크고 넓은 저택에서 그를 마주할 때도 긴장이 살금살금 몸 위를 기어가는 듯했는데, 이렇게 한차에 앉으니 더욱 그랬다.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함께 외출하는 것도, 같은 차에 나란히 앉은 것도, 이렇게 좋은 옷을 입는 것도.

모두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한 일들이었다. 보호자의 존재만으로도 벅찬 마음에 또다시 새로운 기대와 만족이 틈을 억지로 만들어 비집고 들어왔다. 무릎 위로 올라온 손이 자꾸만 꼼지락거렸다.

“먹고 싶은 거 있니?”

평소 말이 많지 않은 은재였지만, 열심히 옆에서 창밖을 보는 척하며 눈치를 살피는 아이를 위해 먼저 입을 열었다. 태영이 앳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기서 살면서 먹고 싶었던 거 없었어?”

“다 먹고 싶었어요. 그런데 여기 와서 다 먹어 본 것 같아요. TV에 나오지 않는 것도요.”

이제 제가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갈 일이 없다는 확신이 든 것인지, 태영은 더 많이 웃었고 말수도 조금씩 늘었다. 아직도 수줍음을 탈 때가 있었지만, 두 달여의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이 점점 더 편해지는 모양이었다. 강 비서를 볼 때면 자못 반갑다는 얼굴을 해 보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아직도?”

“네. 평생요.”

“…….”

“평생 말씀드려도 모자랄 것 같아요. 계속 말씀드릴게요.”

작고 까맣던 아이인 것엔 변함없었지만, 마음까지 작고 어두웠던 아이는 아닌 듯했다. 아이는 금세 밝은 모습을 드러냈다. 구김살이 갈 수밖에 없는 곳에서 살면서도, 그 흔적이 아직 삶의 전반에 남아 있는데도 씩씩했다. 쑥스러워하면서도 잘 웃었다.

“묻었다.”

“……아.”

은재는 아이의 동그란 머리통 위에 붙어 있는 작은 이파리를 떼어 주었다. 태영은 제가 칠칠치 못하게 군 것 같아 수줍은 얼굴로 뺨을 붉혔다.

“정원 내려다보는 거 좋아한다면서.”

“네. 크고 넓어서 좋아요. 입구도 잘 보이고요. 신기해요.”

“그렇구나.”

“전 키가 작아서 다 둘러볼 수가 없는데 위에서 보면 잘 보이기도 해서요.”

벅벅 제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면서도 태영은 씩씩하게 말했다.

“요즘 정원사는 단풍나무를 따라 움직이느라 주로 외곽에만 있을 거야. 더 안쪽까지 들어가면 뛸 곳도 많은데. 들어가 봤니?”

“……아직은요.”

“저택은 다음에 나랑 다시 둘러봐야겠네.”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슴없는 태영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두 볼 가득 홍조를 띠었다.

열세 살이면 그렇게 어린 나이는 아닌데도 이렇게 보니 어린 티가 많이 났다. 보육원에서는 오랫동안 형 노릇을 해 왔을 텐데. 제가 저택에 오면 동생들은 어떻게 되냐며 묻던 얼굴이 지금도 선연했다. 그리고 그 얼굴 위에 머무르는 순진한 웃음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씩씩하고 철이 든 것처럼 굴었으면서, 제가 보호받는다고 느끼자 이런 면이 뒤늦게 튀어나오니. 영락없는 아이였다.

민 회장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저와 비슷하고도 다른 아이라 못내 시선이 가는 걸까.

사실 은재는 아직도 태영과의 시간이 어색하고 왠지 모르게 난처했다. 그래도 조금씩 이 시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떻게 해 줘야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인지, 뭘 더 해 줘야 하는지 미궁 속에 빠진 듯 어려웠으나, 어설프게나마 대화를 이어 갔다.

“이사님도 거기서 뛰어노셨어요?”

“……아니. 난 안 그랬어.”

“축구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세요?”

“……응.”

“그렇구나. 그럼 저 혼자 할게요. 보육원에서는 동생들이랑 했는데, 혼자도 할 수 있어요. 헤딩도 잘해요.”

하지만 어린 은재는 이렇게 밝지 못했다. 어두웠고 우울했다. 겁도 많고 소심한 아이였다. 민 회장을 신뢰하는 데에 무려 1년이나 걸렸고, 경계심이 높았다.

그런데 태영은 아니었다.

“보육원에 있을 때 그래도 즐거웠니?”

“음…….”

누가 보아도 태영은 은재를 신뢰하고 있었다. 은재를 좋아했고, 보호자로 굳게 믿으며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자 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눈치를 살피기는 했지만 저를 드러내는 것도 크게 주저하지 않았다.

상처투성이일 게 분명한 기억에서 꿋꿋이 좋은 기억을 찾아냈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극도로 피했던 은재와 달리 보육원에서의 일들을 곧잘 꺼내 놓았다. 어설픈 보호자와의 대화에도 거리낌 없이 웃어 주었다.

“힘든 것도 많았는데요, 그래도 동생들하고 있는 건 좋았어요.”

“…….”

“저흰 혼자지만 그럴 때면 혼자가 아닌 것 같았거든요. 우리끼리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아요. 큰 가족이잖아요.”

“…….”

“매일 밤마다 모여서 엄마 아빠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요.”

이사님. 때마침 차가 예약해 둔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 은재는 희미하게 가라앉은 표정을 갈무리하며 태영에게 고개를 흔들어 주었다.

먼저 내린 강 비서가 문을 열어 주었다. 태영은 미숙하지만 배운 대로 또 예의를 갖추며 차에서 내렸다. 그 뒤를 은재가 쫓았고…….

“태영아.”

건물을 올려다보던 태영이 절 부르는 소리에 급하게 은재의 앞에 다가갔다.

“옷 잘 어울리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차에서 내리면 옷을 한번 보는 게 좋아.”

여전히 은재가 부르는 제 이름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은재는 다른 이들에게 태영을 아이라고 호칭했다. 물론 태영은 그렇게 불리는 것도 좋았다. 형, 오빠이던 제가 아이라고 불리다니.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보호였다.

그러나 이름이 불릴 때면 손가락이 더욱더 근질거렸다.

둘은 잠시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들어가자.”

삐져나온 옷을 직접 정리해 준 은재는 태영의 옆에 나란히 섰다. 다른 보호자들처럼 손을 잡아 주지는 않았지만, 따가운 늦가을볕이 눈앞을 가리지 않게 든든히 막아 주었다.

커다란 그의 그림자가 길 위에 그려졌다. 태영은 그 그림자마저 든든하다고 느끼며 발을 옮겼다. 숨을 힘껏 삼키고 씩씩하게 발을 뻗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늘 이용하시던 안쪽 룸을 비워 뒀습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는 처음 오는 거라서요.”

지배인으로 보이는 직원이 식당 입구에 나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영은 아주 조금 익숙해진 이런 광경에 혀 아래로 어색함을 눌러 삼켰다.

“안녕하십니까.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불편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은재는 태영의 어깨를 쥐며 저에게 향했던 사람들의 시선을 옮겨 놓았다. 태영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이의 인사를 받으며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태영이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하고 나자 은재가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곧장 안쪽 방으로의 안내가 이어졌다. 은밀한 복도를 지나, 중정으로 보이는 널찍한 정원을 지나 다른 문과 돌계단을 지나 방으로 향했다.

크고 깔끔한 방에는 스무 명도 충분히 들어갈 것 같았지만, 은재와 태영만이 자리를 차지했다. 메뉴판은 딱히 없었다. 셰프 옷을 입은 사람이 나와 직접 오늘의 요리를 소개했고, 은재는 익숙한 듯 몇 가지를 변경해 주문했다. 영어와 이탈리어가 섞인 말들이 자연스럽게 식탁을 차지했다.

혹시 요리를 고르라고 하시면 어떡하나 긴장했는데. 저택에서 요리 고르는 법도 배웠으나,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에 특히 약한 태영은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은재는 태영의 것도 알아서 주문을 해 주었다.

묵례를 한 셰프는 태영에게도 빠지지 않고 인사를 한 뒤 사라졌다. 그제야 태영은 소리 없이 눈을 돌렸다. 대놓고 구경을 하고 싶었지만 여태까지 배운 것들이 있어 꺼려졌다. 그래도 안 보기에는 너무나 멋있고 감탄이 나오는 곳이었다.

이사님과 사는 저택도 볼 때마다 신기하고 놀라웠는데 이곳은 다른 분위기로 신기했다. 앞에 놓인 그릇이며 벽의 무늬 같은 것들이 정말 외국 같았다. 가끔 보육원에서 다 같이 자장면을 먹으러 외출을 한 적은 있었지만, 이런 식당은 처음이었다. 저택의 분위기와 비슷하고 달랐다.

도대체 이사님은 돈이 얼마나 많으신 걸까.

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라고 하더라도, 저택이며 이런 생활을 누리고 살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이런 것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이상해, 태영은 새삼스레 감사 인사를 뱉었다. 별안간 받은 인사에 은재는 미간을 짧게 구겼다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요리는 코스로 나왔다. 저택에서 먹는 식사도 늘 맛있었지만, 또 다른 맛에 태영은 자꾸 속도가 빨라지려는 것을 참으며 식사를 이어 갔다. 문득 손이 마구 움직이려 할 때면 꾸욱 손바닥을 누르며 작게 잘라 속도를 조절했다. 열세 살치고는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은재는 가끔 태영에게 말을 붙이며 대신 속도를 조절해 주었다. 태영은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편인지, 고기를 자르다가도 은재가 말을 붙이면 은재만 바라보고 대답했다. 대답을 모두 한 뒤에야 다시 고기를 잘랐다.

양이 많지 않은 은재가 인심을 써 제 요리를 나눠 주자 태영은 크게 감동한 눈을 하며 열심히 맛을 봤다. 맛에 대한 평가와 감사 인사는 빠지지 않았다. 눈동자에 기쁨이 어린 것이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크게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은 아니지만, 그렇게 달달 외울 정도로 배운 것치고는 무용했다. 하지만 소문을 의식하여, 그리고 아이가 밖에 나가면 듣게 될 이야기를 의식하여 더 엄하게 가르친 것은 맞기에 이 정도는 용인해 주었다.

그래도 다른 아이들과 있으면 훨씬 늠름할 테니까.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까지 먹자 태영의 얼굴이 더욱 반질반질해졌다. 어린아이라 그런지 영양분을 흡수해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제법 긴 식사 시간이었는데도 지루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태영의 표정은 더 밝아져 있었다.

“오늘 데려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공부 열심히 할게요.”

“다음에는 회장님을 뵈러 갈까 하는데.”

은재는 짙은 빛깔의 커피가 담긴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태영은 사진으로만 봤던 민 회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크게 눈을 떴다.

“그래도 돼요?”

“뵈어야지. 널 궁금해하셔.”

“……저도, 뵙고 싶어요.”

“무서우신 분인데.”

나름대로는 농담 삼아 한 말인데, 태영은 큰 소리가 날 정도로 마른침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 속 민 회장은 큰 체구를 자랑하고 있었다. 한참 전에 찍은 사진이니 혈색이나 그 형형한 눈빛이 고스란히 사진에 담겼다. 희게 세었지만 두꺼운 눈썹이나 큰 눈에서 자연스레 상대를 압도하는 기운을 내뿜는 사람이었다.

“공부 더 하고…… 봬도 되나요?”

슬그머니 태영이 한 발을 빼며 말했다. 은재는 소리 없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야. 좋은 분이야. 나보다 더 잘해 주실 거야, 아마.”

“…….”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은재가 좋은 분이라고 말하니 분명 그렇겠지만, 태영은 은재가 가장 좋았다. 강 비서도, 정 실장도 좋았지만 은재와 있는 게 제일 좋았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 가끔 보아도 그랬다.

“그럼 이제 갈까.”

“네.”

그때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가야지. 태영은 의자에서 내려와 잊지 않고 옷을 정리했다. 은재는 웃으며 그것을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방을 나서는데…….

“이게 누구야. 민 이사 아냐?”

껄끄러운 페로몬과 함께 걸걸한 음성이 은재를 붙잡았다. 은재는 금세 표정을 굳히며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신 의원님.”

뒤쪽에서 걸어 나오는 것은 다름 아닌 신 의원이었다. 본능적으로 은재가 태영을 당겨 제 뒤로 감추었다.

“이런 곳에서 볼 줄 몰랐는데. 식사하러 왔나?”

“네. 잠시 시간이 나서요. 신 의원님도 여기 좋아하시나 봅니다.”

“영 내 입맛엔 아닌데…….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가끔 오지. 우리 마누라도 좋아하고.”

말과 달리 그는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온 것이 아닌 듯 보였다. 동행인을 알고 싶지도 않았다. 분명 지독할 만큼 익숙하고 역겨운 상황이 나올 게 뻔했다.

아직까지 신 의원의 몸에 달라붙은 과장된 페로몬이 보란 듯이 그 생각을 증명하고 있었다. 난잡한 향취로 달라붙은 페로몬과 묘하게 달뜬 얼굴.

“그래서 우리 민 이사는 누구랑 오셨나.”

유독 ‘이사’라는 직함에 묘한 어감이 달라붙어 있었다.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과한 일을 떠맡게 된 상황을 향한 조소였다.

그는 은재의 동행인이 궁금한지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다, 곧 은재가 붙잡고 있는 태영을 발견하고 묘한 소리를 뱉었다. 아……. 미약한 탄성이 그에게서 터져 나왔다.

짧은 순간 여러 가지 표정이 그 기름진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소문이 돌던데. 진짜였나 보군.”

“벌써 소문이 돌았나요.”

“워낙 빠른 세상이니까. 그래서, 진짜 아들은 아니지?”

은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태영이 신 의원과 마주하지 못하게 당길 뿐이었다.

“겨우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데…….”

“나중에 정식으로 자리 만들 겁니다. 그때 참석해 주시죠.”

“민 이사가 부르면 당연히 가야지. 그런데 의외네. 이렇게 큰 아들이 있는 줄 몰랐는데.”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은재는 급하게 이사직을 달게 되었지만, 겨우 스물두 살이었다. 민 회장의 건강 악화로 갑작스레 이사직에 앉은 것이었지 아직도 어린 나이였다.

그보다 훨씬 어린 태영에게는 큰 어른으로 느껴졌지만, 나이가 지긋한 신 의원의 눈에는 새파란 애송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은재에게 열 살이 된 아들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신 의원은 묘한 눈으로 은재의 몸을 훑었다. 은재는 어딜 가나 받는 시선에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히트 사이클이 한참 전에 지난 게 다행이었다. 나른한 기운은 가셔 있었고, 별다른 색이 묻어 있지 않았다.

……그럴 거라 믿었다.

“허허, 우리 민 이사가 워낙 인기도 많고 사람이 꼬이는 편이니까 별별 생각이 다 드네. 그래서 민 이사 결혼은 아직인가?”

“아직은 생각 없습니다.”

“창창한데 어서 가야지. 민 이사와 똑 닮은 아이가 생기면 그게 민 회장의 기쁨일 텐데. 응? 사업에도 도움이 될 거고. 그래야 그 정정하던 인물이 벌떡 일어나지.”

그러면서 신 의원은 은근슬쩍 은재의 쪽으로 몸을 붙였다. 은근한 입김을 뱉으며 슬며시 거칠게 숨을 골랐다. 꼭 입맛을 다시는 것 같은 소리가 그의 입가에서 터져 나왔다.

히트 사이클은 지났어도…… 타고난 은재의 외관은 변하지 않았다. 스물둘. 한창때의 젊음이 은재의 아름답고 우아한 외관과 어우러져 오히려 더욱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신 의원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우리 큰애가 이번에 미국에서 사업장을 하나 열었는데 사람이 필요하다네. 빠릿빠릿하고 머리가 잘 도는 사람이면 좋을 텐데, 민 이사처럼 말이야.”

뜨거운 숨결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은재는 태영의 눈과 귀를 덮으며 아이가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하기를 애써 바랐다. 점점 더 번져 나오는 페로몬을, 제 허리춤과 뺨에 닿는 역겨운 시선을 아이가 느끼지 못하기를 바랐다.

하아……. 금세 흥분이 깃든 끈적한 숨소리가 은재의 귓가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태영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은재의 손을 꽉 잡았다. 자꾸만 절 야릇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신 의원을 있는 힘껏 노려보며 은재의 곁에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그 모습에 신 의원이 쯧쯧 혀를 차다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짐 덩어리가 붙었구만.”

“신 의원님.”

“그래그래……. 우리 애가 워낙 성격이 난봉꾼이라 굳이 가까이 지내지 않아도 돼. 원하면 저 꼬마 녀석도 데려오고. 내가 민 이사를 책임지고 돌볼 거니까 가끔 일만 봐주면 되지, 뭘. 원래 오메가들은 넉넉한 집에 정부로 들어가서 사랑받으며 사는 게 제일일세. 민 이사도 알지 않나? 머리 아프게 사업은 무슨 사업인가.”

“말씀은 감사하지만 딱히 그런 일은 생각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왜, 이번에 WB하고 사업한다더니 정말 그 아들하고 뭐가 있는 건가? 젊은 알파가 쌩쌩하니 좋기는 하겠지. 열성이긴 하지만 말이야.”

불쾌하고 소름 돋는 페로몬이 은재의 등줄기를 훑었다. 기어이 몸에 맞닿은 두툼한 배와 노골적인 하체의 욕망에 은재는 더욱 이를 악다물며 고개를 세웠다.

얼굴 위로는 애써 아무런 표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혐오가 드러나는 표정마저도 지금은 사치였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아야 했다. 불쾌한 감정의 조각을 보여 주는 것도 지금 저 더러운 알파에게는 유희거리가 될 것을 알았다.

때마침 강 비서가 레스토랑 안쪽으로 들어왔다. 은재는 제 뒤에 감추고 있던 태영의 어깨를 지그시 밀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태영이 은재를 올려다보다 곧 강 비서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강 비서는 태영을 데리고 곧장 레스토랑을 나섰다. 태영은 나가지 않겠다고, 홀로 나서지 않겠다고 잠시 버텼으나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마지막으로 태영이 은재를 돌아보았다. 그 짙고 까만 눈동자를 보며 은재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제야 태영이 시무룩하게 강 비서를 쫓아 나섰다.

은재는 아이가 자리를 뜬 것을 다행으로 여겼지만, 그것은 신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금 더 몸을 은재에게 붙이며 은근슬쩍 손을 뻗었다. 간발의 차로 그 손을 피한 은재는 숨을 삼키며 신 의원을 응시했다.

“여기까지만 하시죠. 조금만 더 오시면 추행으로 신고할 겁니다.”

“민 이사. 이게 무슨 추행인가. 우리 사이에.”

“내년에 총선이 있는 걸로 아는데…… 이번에는 후원금을 미리 다 모으셨나 봅니다.”

그가 숨을 삼키고 내쉴 때마다 느껴지는 살덩어리에 척추가 빳빳하게 굳어졌지만, 은재는 입 안의 살을 씹으며 꼿꼿이 고개를 쳐들었다.

“저희와 신 의원님은 그 정도 사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닌가 봅니다. 아무래도 새로운 후원금 제공처를 찾아봐야겠네요. 박 의원님 쪽에서 요즘 부쩍 적극적인 모습 보여 주시던데요.”

제법 야무진 말이었으나 풋풋한 아름다움을 가진 은재의 겁박은 그다지 먹혀들지 않았다. 신 의원은 손을 뻗어 은재의 턱을 툭 건드렸다. 그러곤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윽고는 손을 움직여 잘 잠가진 셔츠 단추를 툭 풀고 흰 살결을 들여다보았다. 군침을 삼키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온몸에 빠르게 소름이 돋았다.

“의원님.”

“꼭 민 이사는 이렇게 정 없이 굴지. 응? 얼굴값을 해.”

“이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더 이상의 대화를 막기 위해 은재가 묵례 후 자리를 벗어났다. 노골적으로 뿌려 댄 페로몬에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혀를 씹으며 꼿꼿하게 걸음을 옮겼다.

“민 회장이 피도 안 섞인 오메가를 참 잘 키웠어.”

“…….”

“그런데 오늘내일하니 어쩌나……. 이렇게 어리고 예쁜 양자를 알파들이 득실득실한 곳에 두고 가려니 힘들겠어.”

“…….”

“이대로 먼저 가 버리면 생길 상황은 불 보듯 뻔한데 말이야.”

조소 같은 것이 묻은 말이었다. 멈칫 걸음을 주저하던 은재는 잠시 신 의원의 쪽을 돌아보다 자리를 벗어났다.

“언제든 필요하면 연락하게, 민 이사. 나야 늘 민 이사에게 열려 있는 사람 아닌가. 나만큼 침대 매너가 좋은 사람은 또 없을 테고 말이야.”

민 회장의 부재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었다. 민 회장이 은재의 뒤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을 때는 없던 일이었다. 언제나 알파들은 눈에 띄는 외모의 은재에게 눈독을 들였고 입맛을 다셨지만, 그가 강건할 때에는 이런 추행은 벌어지지 않았다. 눈으로만 은재를 벗겨 놓고 핥았지, 실로 이렇게 접근하지는 못했다.

그가 병원으로 옮겨 간 후에야 본격적으로 역겨운 짓들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은재는 곧잘 버텼다. 갑작스럽게 떠맡게 된 회사도, 이 더러운 시선들도 언제나 있어 왔던 것이니 버틸 만했다.

그러나 이렇게 민 회장이 세상을 뜬 후에…… 그 버팀목이 사라진 후를 기약하는 말들을 마주할 때면 미약한 공포가 피어올랐다. 형체 없이 공중에 흩뿌려져 있던 감각들이 한데 뭉쳐 감정을 자아냈다.

태영에게 은재가 유일한 보호자인 것처럼, 은재에게 민 회장은 그런 존재였다. 민 회장이 흔들릴 때면 은재도 크게 휘청였다. 겨우 버티고 선 은재를 보호하는 것은 민 회장뿐이었다.

이제는 강해져야 하는 것을 아는데도……. 은재는 숨을 뱉으며 뺨을 문질렀다.

언젠가는, 민 회장이 제 곁을 떠날 언젠가는 저 홀로 단단히 버텨야만 했다. 민 회장마저 우습게 만들며 뒤가 가벼운 오메가로 추락할 순 없으니까.

눈을 찔러 오는 오후의 햇살이 유독 따가웠다.

아직 차에 오르지 않은 태영이 기다렸다는 듯 은재에게 다가왔다.

“이사님, 괜찮으세요?”

앳된 얼굴 가득 걱정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은재가 작게 숨을 골랐다.

“응, 괜찮아.”

손을 잡는 것도 눈치를 살피는 그 어린 눈동자를 보며, 욕망 같은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한 맑은 눈동자를 보며 꽉 그 손을 잡아 주었다.

“걱정했어요.”

“아냐. 아무 일도 없었어.”

작은 온기지만, 민 회장에게서 느꼈던 것처럼 단단한 안도는 아니지만. 미약한 온기에 마음이 녹았다. 가시가 돋았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어찌 되었든 제가 보호해야 할 아이였다. 지켜야 할 아이였다. 오메가인 저만큼 혹독한 삶을 맞지는 않겠지만, 알파인 이들만큼 수월한 삶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제가 지켜야 했다.

민 회장이 저를 지켜 줬던 것만큼. 제가 받았던 만큼. 이 어린아이의 걱정을, 진심 어린 걱정을 받은 만큼.

은재는 신 의원의 일을 털어 버리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태영의 머리를 쓸어주며 괜찮다고 다시 말해 주었다.

“이제 집에 가자. 오늘은 가서 정원을 둘러보고…….”

“이사님.”

그때 한 걸음 물러나 있던 강 비서가 다급히 다가왔다. 은재는 태영의 어깨를 감싸며 강 비서를 돌아보았다.

불쑥 불안한 기운이 솟았다.

“지금 바로 병원으로 가 보셔야겠습니다.”

이어진 말에 은재가 휘청하며 흔들렸다. 태영을 보며 꿋꿋이 버티려 했으나, 마지막 보루가 기어이 무너진 것이었다. 그 몸을 붙잡은 강 비서는 송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사님.”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영의 표정도 더욱 불안해졌다. 은재는 제 손을 꽉 잡아오는 작은 두 손을 내려다보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몸을 숙여 태영과 눈을 맞췄다.

“저택에 먼저 가 있어야겠다.”

“……이사님은요?”

“난 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지?”

태영은 괜찮았다. 태영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태영이 걱정하는 것은 은재였다.

“이사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

“괜찮을 거야.”

핏기가 가셔 창백해진 얼굴이었지만, 은재는 태영을 붙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태영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님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였다.

급하게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들에게 태영을 부탁하며 은재가 다시 한번 태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집에서 보자.”

그 말을 끝으로 은재는 서둘러 다른 차에 올랐다. 이번에는 은재가 사라지는 것을 볼 새도 없이 태영도 급하게 자리를 떠야 했다. 그럼에도 그의 뒷모습은 태영의 머릿속에 또 정확한 잔상으로 새겨졌다.

그날, 태영은 저택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다음 주부터 가정 교사를 부른다고 했으니, 그전에 공부를 해 놔야 했다.

하지만…… 도통 머릿속에서 은재의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리던 순간.

결국 태영은 몇 장 읽지도 못하고 또 창가로 다가갔다. 굳게 닫힌 문을 통과하는 차는 하나도 없었다. 원래도 고요한 저택이지만, 오늘은 어쩐지 더 빽빽한 고요가 저택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부쩍 앙상해진 가지 사이사이에 묵직한 정적이 걸려 있었다.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태영이 창가에 팔을 기대고 앉았다. 그렇게 어느 틈에 잠에 들었다.

그 밤이 지나도록 은재는 돌아오지 않았다.

* * *

은재가 다시 저택에 온 것은 무려 일주일이 또 지나서였다.

“빨리 닦을 것 좀 가져오세요. 서둘러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여기, 빨리! 수건!”

평소답지 않게 1층이 소란했다. 아침부터 창가에서 책을 보며 선잠에 들었던 태영은 1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방을 박차고 나섰다.

“괜찮아요. 다친 데도 없고요.”

“최 박사 부르겠습니다.”

“이사님! 여기 수건입니다. 방 준비해 놓을까요?”

“네. 부탁드려요. 저 괜찮으니까 다들 진정하세요.”

“이사님, 다른 차량 계속 돌리겠습니다. 기자들이 아직도 계속 뒤를 쫓는 것 같습니다.”

정 실장과 강 비서, 그리고 저택에서 일하는 다른 직원들이 은재에게 모여들고 있었다. 쿵쿵 소리를 내며 달려 내려오던 태영은 곧 그 사이에 서 있는 은재를 발견하고 멈칫, 걸음을 멈췄다.

“도대체 경호를 어떻게 하는 건지……. 죄송합니다, 이사님. 오늘 이 팀장 불러서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됐습니다. 그런 걸 이 팀장이 어떻게 막겠어요. 멀리서 던지는 건데.”

은재의 얼굴에…… 은재의 머리와 옷 곳곳에 계란이 묻어 있었다. 언제 보아도 우아하고 고상하던 그 얼굴과 목에, 몸에 더러운 것들이 가득했다.

“당분간은 유의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차라리 저택에서 일을 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요.”

“네. 그렇게 해야 될 것 같네요. 이렇게 여론이 안 좋을 줄 몰랐는데.”

크게 다친 건 아닌 듯 보이지만 수치스러운 몰골이었다. 머리카락에도, 뺨과 옷에 묻은 계란이 비릿한 냄새를 내고 있었다. 망신을 주려고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정작 은재는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지만, 그것을 본 태영의 얼굴엔 큰 충격이 감돌았다. 그대로 굳어져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태.”

뒤늦게 계단에 서있는 태영을 발견한 은재가 소리 내어 부르려 했지만, 태영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적이 없는 것처럼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

은재는 태영이 계단을 성급히 올라 사라지는 장면을 계속 바라보았다. 쾅, 문 닫히는 소리가 1층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렇게 들어온 태영은 문을 꼭 닫고 그 문에 기대어 스르르 주저앉았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병원으로 간다고 했던 은재가 일주일이 지나서, 그것도 누군가의 악의를 묻힌 채 돌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저에게는 한없이 멋있고 좋은 사람인데. 그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저인데, 그런 그가 저렇게 돌아왔다는 것이 어린 태영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태영의 행동을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1층에서 들렸던 소음들도 이제는 모두 가셔 있었다.

한참 뒤, 약간의 인기척이 태영의 방문 앞을 지나갔다.

“1층에 있겠습니다.”

“네. 비서님도 좀 쉬세요. 정신 없으셨을 텐데.”

“아닙니다. 기사들 올라오는 대로 작업 진행하겠습니다. 기사를 막고 있기는 한데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다들 즐거워하겠네. 바로 앞에서 그런 사진이 찍혔으니.”

강 비서와 은재였다. 문 앞에 앉아 있던 태영은 숨을 죽여 문틈에 귀를 대었다. 소리 없이 인사한 강 비서가 뚜벅뚜벅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또 방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기척이 느껴졌다.

방으로 들어가신 걸까. 아직도 태영의 가슴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눈을 비벼 보았지만 조금 전에 본 장면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일한 어른이, 절 지키는 유일한 사람이 흔들리는 것을 본 기분.

이제 고작 한 계절을 함께 지내고 있을 뿐인데, 태영은 생각보다 더 깊게 은재를 의지했다. 은재를 좋아했고, 은재처럼 되고 싶었다. 그런 은재의 나약한 모습에 태영은 당황했다.

쿵쿵, 무릎에 이마를 부딪쳤다. 외식을 나갔던 레스토랑에서 보았던 은재의 모습이 떠오르고, 또 그날 차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가 안 좋은 것을 보지 못하게 뒤로 감춰 주던 모습과, 거울 앞에서 제 어깨를 붙잡으며 눈을 맞춰 주던 모습이 모두 복잡하게 뒤엉켰다.

무심하게 저택에 들어오다가도 절 발견하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절 안다는 표시를 해 주던…….

일주일에 한 번, 마주하는 금요일이 아니더라도 가끔 저택에서 마주칠 때면 은재는 늘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자신에게도 낯설어 보이는 행위였지만, 그것으로 서로를 늘 인식했고, 점차 가깝게 여기고 있다고 느꼈다.

“아.”

연거푸 무릎에 이마를 박던 태영은 제가 고개를 돌리던 순간 희미하게 움직였던 은재의 입술을 떠올렸다. 그가 저를 부르려 했다.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을 텐데도, 저를 발견하자 말을 걸어 주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제가 그를 외면했다.

태영의 얼굴이 더 희게 질렸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태영은 방 안을 서성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나 때문에 더 상처받으셨으면 어떡하지. 나한테 실망하셨으면 어떡하지. 아직도 이사님을 엄청 좋아하는데. 이사님과 더 시간을 보내고 싶고, 이사님이 하라는 건 뭐든지 다 열심히 하고 싶은데.

혹시 나를…… 다시 보육원으로 보내고 싶어지시면 안 되는데.

한참 방을 빙글빙글 돌며 고민하다 결국 방을 박차고 나섰다. 느릿느릿 계단을 탐색하듯 내려와 아무 일도 없던 듯 고요해진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먼 곳에서는 강 비서가 바쁘게 전화를 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태영은 우두커니 서 그 고요한 소란을 관망하다 다시 목적지로 향했다.

“저…….”

“도련님.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1층에 있는 다른 방을 치우고 온 듯한 정 실장이 물었다. 혹여나 제가 보인 비겁한 행동 탓에 그의 태도가 달라졌을까 염려하던 태영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이사님 방에 계신가요?”

“네. 방에 계세요. 오늘은 쉬신다고 하셨거든요.”

“그러면 식사는 어떻게 하신대요?”

“글쎄요. 아직 별다른 말씀 없으셨습니다.”

“아…….”

다행히 정 실장의 태도는 이전과 같았다. 하지만 태영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조금 더 손을 만지작거리더니 괜히 저 먼 복도와 방들을 살폈다. 그러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차 가져다드려도 될까요? 인사를 못 드려서요.”

정 실장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주전자가 있어서 무거우실 텐데, 커피는 어떠세요? 이사님이 커피도 자주 드시거든요. 잔에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태영은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말끔하게 치워진 현관 입구를 살폈다. 계란의 흔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군데군데 더러운 것을 묻히고 들어오던 모습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도련님.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아니면 2층에 올려드리겠습니다.”

“제가 들고 갈 수 있어요.”

한참 그 자리를 보고 있으니, 곧 정 실장이 다가와 작은 트레이를 넘겨주었다. 비교적 가벼운 잔과 디저트가 놓여있었고 포크도 두 개나 있었다. 태영은 느릿느릿 걸어 계단을 올랐다. 2층에 올라서는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삼키며 은재의 방 앞으로 다가갔다.

여기가 은재의 방이라는 것은 알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방이었다.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다시금 긴장이 차올랐다. 트레이를 든 손에 식은땀이 맺혔다.

태영은 트레이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셔츠에 벅벅 손을 문질렀다. 이마에서도 땀이 나는 듯했다. 고작 이걸 했다고 이렇게 땀을 흘리다니.

“이사…….”

태영은 은재를 부르다 말고 다시 몸을 숙여 트레이를 챙겼다. 커피에서 다행히 아직 김이 솔솔 나는 것을 보며 살금살금 걸어 복도 끝으로 향했다.

“…….”

문이 살짝 열린 줄도 모르고, 태영은 민 회장과 은재가 나란히 있는 사진 앞에 다가갔다. 사진 속 은재라도, 사진 속 민 회장이라도 봐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커피가 식기 전에 이사님께 가져다드려야겠지만. 우선은 문을 두드릴 용기가 필요했다.

“진짜 비겁해.”

“…….”

“거기서 그렇게 도망치는 게 어딨어.”

“…….”

“내가 이사님이었으면…… 다시 안 보고 싶을 것 같은데.”

대답해 줄 민 회장도, 은재도 없었지만 태영은 그들에게 마음을 토로했다. 그래도 계속 콕콕 마음이 찔리는 것 같아 길게 한숨을 뱉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태영이에요.”

“…….”

“잘 지내시죠?”

“…….”

“나중에 이사님이랑 회장님 뵈러 가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일단 지금은 이사님부터 봬야 해요. 이사님 커피를 들고 왔거든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 해서요.” 

“내 커피?”

앗. 태영은 갑작스레 들린 은재의 음성에 놀라 덜컥, 트레이를 들썩였다. 소리 없이 다가온 은재는 태영이 들고 있던 것을 대신 받아 주었다.

“고마워.”

“…….”

“회장님하고 인사하고 있었나 보네.”

“……네.”

씻고 나왔는지 은재의 머리카락 끝이 축축했다. 주로 머리를 올리고 있던 평소와 달리 자연스럽게 갈색빛이 감도는 머리칼이 흩어져있었고, 옷차림도 편안해 보였다. 낯선 모습이었다.

“…….”

그 모습에 태영이 넋을 놓고 은재를 응시했다. 슈트를 입었을 때 반짝반짝 빛나던 모습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편한 차림이어도 멋있는 사람의 외양은 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편안한 모습에서 느껴지는 여유와 분위기에 입술이 달싹거릴 정도였다.

태영이 보던 사진을 한참 바라보던 은재는 어느새 조용해진 태영을 내려다보았다.

“왜?”

“……아니에요.”

지난번에는 주절주절 말이 많더니, 오늘은 또 수줍은 모양이었다.

“회장님을 뵈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괜찮아요. 나중에 봬도 돼요.”

은재가 머금은 커피 향이 조금씩 주변으로 퍼져갔다. 태영은 크게 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이사님.”

“…….”

“놀라서 실수했어요.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정말 죄송합니다. 태영은 다시 한번 사과했다. 아직도 눈을 잘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더듬더듬 말을 이으며 진심을 다해 말했다. 은재는 그 발간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잠시 묵묵한 공간 위로 커피 향만이 흘러갔다.

그러자 태영은 더욱 속이 타는지 슬리퍼에 쌓인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제법 큰 소리로 크게 숨을 고르는 것도 모르는 듯 두 손을 꽉 쥐며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방에 들어갈래?”

“그래도 돼요?”

은재는 눈으로 트레이 위에 놓인 디저트를 가리켰다. 태영을 그것이 절 위한 것임을 이제야 알고는 소리 없이 귀를 붉혔다.

“……이사님 괜찮으시면 전 좋아요.”

은재가 먼저 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태영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열심히 내리며 그를 쫓아 걸었다.

그의 방은 태영의 방에서 별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열 걸음 정도. 은재의 보폭으로 열 걸음을 걸으면 나오는 방이었다.

“치워 둘 걸 그랬네.”

부드럽게 문고리를 돌려 연 은재는 태영을 먼저 들어가게 했다. 너무 어색했지만 태영은 안으로 들어서며 작게 감탄을 뱉었다.

정말 좋은 방이었다. 물론 제 방도 믿기지 않을 만큼 좋았지만, 더 넓고 깨끗했다. 좋은 냄새가 났고, 방 안 거실로 부를 만한 곳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도 놓여 있었다. 욕실과 드레스 룸으로 연결된 복도 또한 방 안에 딸린 데다, 태영의 방에서는 보이지 않는 정원이 황홀하게 창가에 드리워졌다.

“앉아.”

아직 뭐가 더 좋다 안 좋다 가릴 순 없는 태영의 눈에도 이 방이 은재와 잘 어울린다는 것은 느껴졌다. 단조롭지만 지루하지는 않은 방. 고요하고 잠잠한 방.

제 페로몬이 고여 있지 않도록 탈취 향을 피우던 은재는 그것을 끄고 작은 창문을 열어 두었다. 다행히 베타인 태영은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고 주변을 열심히 살폈다.

“따로 마실게 없는데.”

“괜찮아요.”

“방에 뭐가 많은 게 싫어서 냉장고를 안 들였거든.”

은재는 테이블에 트레이를 올리고, 포크를 밀어 주었다. 그러곤 다시 그 짙은 색의 커피를 머금었다.

“사과해 줘서 고마워.”

“……아.”

“별일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과는 받을게. 그러니까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태영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은재를 살폈다. 이제 보니 살이 좀 빠진 듯했다. 또 아프셨던 건가. 태영은 차마 그것을 물어보지 못하고 다른 포크를 은재의 앞에 놓았다.

“많이 드세요, 이사님.”

“그래. 고마워.”

그 배려에 은재도 이내 포크를 쥐었다.

“회장님이 편찮으셔. 지난주에는 많이 위독하셨어. 그래서 내내 병원에 있다가 오는 길이야.”

그렇게 급하게 간 곳이 다름 아닌 병원인 모양이었다. 태영은 은재가 저에게 이런 것을 이야기해 줄 거라 생각지 못해 포크를 들고 있던 손을 허벅지 위에 내려놓았다. 까만 눈동자가 얌전히 은재에게 향했다.

“더 여쭤봐도 되나요?”

“계란?”

“……네.”

의외로 편안한 표정의 은재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을 골랐다.

“대경그룹에 대해 들어봤니? 회장님이 만드신 회산데.”

얼핏 들어 본 것 같았다. 태영이 알 정도면 TV광고에 나오거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회사라는 뜻이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큰 기업인 게 확실했다.

그 회사를 민 회장이, 그리고 은재가 감당하고 있었다.

“회장님이 그렇게 되시기 직전에 나한테 하신 말씀이 있었어.”

“네.”

“그래서 곧 파티가 열릴 거야.”

“……네?”

“회사 창립 기념일이거든. 올해로 50주년이니 기념할 만해. 그런데 회장님 상태가 안 좋으시니까 파티를 하기에 적절하지는 않지. 근데 나는 파티를 준비했거든.”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른들의 세계는 이렇게 복잡한 건가.

“회장님은 꽤 서민 친화적인 모습을 많이 갖고 계셨어. 자수성가로 이루신 사업이었고, 나와 너 같은 아이들에게도 힘을 많이 쏟으셨지. 장학금도 많이 주시고, 여러 가지 지원 사업을 많이 하셨어.”

“…….”

“그런데 그분이 위독하신데 나는 파티 준비를 하고 있으니 욕을 먹을 수밖에.”

태영으로선 곧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런 상황에 파티 준비를 하는 것도, 그리고 또 그 이유로 계란을 맞는 것도.

그저 아직 제가 모르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제가 그것을 들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는 것 또한. 나와 너 같은 아이들…….

“회장님이 말씀하신 거잖아요.”

“…….”

“이사님이 잘못하신 거 없어요. 저도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회장님이 편찮으셔서 제일 걱정하시는 건 이사님이시잖아요.”

정말 그랬다. 원래도 늘씬했던 은재는 이제 야윈 듯 보였다. 강 비서가 전해 준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란 것도 은재였고, 일주일간 그곳에서 오가며 일을 했던 것도 은재였다.

제일 마음을 쓰며, 제일 염려하는 건 바로 그였다.

그 누구도 은재에게 계란을 던질 수 없었다.

“전 이사님 믿어요.”

“…….”

“제가 이사님 편 할게요.”

“…….”

“그러니까, 힘내세요.”

말없이 태영의 까만 눈을 바라보던 은재는 뒤늦게 표정을 만들었다. 아주 희미한 표정이라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태영은 입술을 꾹 씹으며 나름대로 진지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생각했다. 빨리 크고 싶다고. 키뿐만 아니라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태영은 한 사람만 있어도 충분했다. 놀이를 할 때도, 체험 학습을 갈 때도, 학교에 갈 때도. 절 잘 알고 제가 믿는 한 사람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느꼈다. 은재도 그럴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저는 그런 사람이 돼 주어야겠다고 그 어린 나이에 생각했다.

은재가 태영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 주었으니까.

그 보육원에서, 오랜 떠돌이 생활에서 태영을 구원한 게 은재였으니까.

“그럼 태영이 너도 이제 파티에 갈 준비를 해야겠다.”

은재는 짧게 웃으며 다 식은 커피를 마셨다. 식어 비릿해진 커피는 처음의 향취를 다 잃었지만, 그래도 은재는 컵을 비웠다.

* * *

“진짜 괜찮겠어?”

“왜. 안 어울리나.”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파티 준비는 착실히 진행되었다. 은재는 그 뒤로 계란을 또 한 번 맞을 뻔했으나, 다행히 옷을 버리는 일은 두 번 일어나지 않았다.

온 국민이 먹고 살 게 없을 때 쌀을 흔쾌히 쾌척했던 남자의 곁에 갑작스레 들어온 오메가. 제 월급을 받지 않고, 임원진의 월급을 삭감해 지자체에 기부했던 남자.

작은 구멍가게에서부터 시작한 사업을 이뤄 낸 남자와 어린 오메가.

그를 들인 이후, 민 회장의 평판이 나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은재가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민 회장과 은재에 대한 이미지는 나빠지기만 했고, 애먼 소문이 따라붙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그 오메가가, 위독한 민 회장을 두고 파티 준비를 한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국민 정서와 어울리지 않은 일이었다.

매일 기사를 막았지만 작은 신문사들은 꿋꿋이 기사를 냈다. 그 기사를 읽는 것이 새롭게 추가된 은재의 일정일 정도였다. 

“케이크가 작은가.”

“야, 민은재.”

“그래도 내일 올 것들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요란하게 준비하는 건 또 안 좋아하시니까.”

은재와 함께 호텔 연회장을 미리 찾아 준비된 것을 확인하던 세헌이 걱정 어린 숨을 뱉으며 짜증스레 얼굴을 구겼다. 한 발 앞서 연회장을 살피는 은재의 손목을 덜컥 붙잡았다.

정작 은재의 얼굴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며칠 내내 이어진 자선 행사로 인해 피로가 약간 묻어 있을 뿐, 염려는 어디에도 없었다.

며칠 전부터 대경 그룹에서는 다른 기업들과 연계하여 자선 행사를 열기 시작했다. 그룹의 주 사업체인 백화점과 문화 재단에서는 숙박권과 상품권, 여행 상품 등을 걸고 다양한 이벤트를 선보였고, 자선 사업에 참여한 다른 기업에서도 항공권과 그 외 전자 제품 등을 이벤트 상품으로 제공했다.

대경 그룹과 가까이 지내던 이들은 흔쾌히 장학금과 후원금을 기부했고, 그것은 며칠에 걸친 행사로 진행되었다. 민 회장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도 소아암 환자들을 위한 행사가 크게 열렸다.

아니꼬운 시선으로 은재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전에 없이 큰 규모로 열린 행사에 백화점으로 몰려들었다. 아직까지 반대 여론을 형성하며 계란을 들고 모여 있던 이들과 백화점을 찾은 손님들이 자연스레 충돌했다. 세간에서는 그것을 두고 또 날 선 비평을 날렸으나 그래도 파티를 두고 날카롭게 모인 시선들이 누그러진 건 분명했다. 그 누구도 보지 않는 신문에 독한 논설을 싣는 이들은 여전히 구린 꿍꿍이가 있을 거라 확신했지만, 사실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순수한 선의에 가까웠다.

그래도 여전히 세헌은 걱정이 앞섰다.

“당장 내일 또 계란 맞으면 어쩔래. 기사만 막으면 다야? 사진이 인터넷에 다 퍼지는데.”

“어쩔 수 없지. 우선 경호 등급 높였어.”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 아니잖아. 네 이미지는 없어? 온갖 욕을 다 하더라, 사람들이.”

“이미지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잖아.”

강 비서는 묵묵히 다가와, 케이터링과 관련한 사항을 다시 한번 꼼꼼히 확인했다. 개인 사정으로 인해 교체된 연주단의 목록을 확인하고, 문화 재단에서 앞으로 주최할 행사와 관련 있는 사람들도 새로 목록을 구성했다. 또한 발송된 초대장의 주소록을 재차 훑었고, 남은 것들은 모두 폐기 처리했다.

대경의 것은 그래야만 했다. 포용력 있는 기업이었지만, 누구나 곁에 두지는 않았다. 손에 닿을 듯 닿지 않았다. 그게 민 회장의 방침이었고, 은재가 이어 오는 지침이었다.

그래서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은 제가 이 명단에 속한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민 회장이 유언장을 수정했다는 이야기가 나도는 와중에 파티를 여는 은재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막상 은재가 나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든 그 자리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임 대표님하고도 이야기한 사항이야.”

“우리 아버지하고? 대경 그룹 창립 기념 파틴데 우리 아버지는 왜.”

“곧 있으면 리조트 사업 본격적으로 론칭이야. 당장 내년부터 시작인데, 지금 대경 평판 떨어지면 너희 회사에도 직격타야. 논의하지 않고 어떻게 이런 일을 벌여. 자선 행사로 시선 돌렸어도 어려워.”

은재는 급하게 실무에 투입되었지만 부족함 없이 일을 감당하고 있었다. 세헌은 새삼 그가 어린 나이에 많은 짐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고개를 저었다. 몇 개 사업에 겨우 참여하여 배우는 저와는 달랐다.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 높은 자리에 올라간 은재를 욕했지만, 억지로 그 일을 떠맡아야 했던 날의 그 얼굴을 세헌은 기억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으나 쇠약해진 민 회장을 위해 감수하던 얼굴. 그리고 그 직함을 벌처럼 떠안은 이를 향한 조롱.

“도대체 회장님은 왜 이런 일을 하자고 하시는 거야.”

“기념할 만한 날이잖아.”

“그래도. 당신 몸이 먼저지. 그리고 그렇게 아끼는 네가 욕을 먹고.”

“그래서 자선 파티로 하잖아. 그렇게 큰 파티도 아냐. 자선 행사에 참여한 기업들 초대해서 고맙다고 성의 표시하는 게 전부고.”

세헌의 말에 대꾸를 해 주면서도 케이터링 상황과 관련한 서류를 모두 읽은 은재가 짧게 강 비서에게 의견을 전달했다. 강 비서는 서류를 받아 몇 가지를 체크하고 파티장을 가로질러 빠져나갔다.

“이게 요란한 거 안 좋아하시는 분의 생각인지 난 모르겠다.”

“굳이 안 와도 돼. 어차피 임 대표님 오실 테니까.”

천천히 파티장 내부를 살피며 시계를 확인한 은재는 곧 걸려온 전화에 간결히 응답하고 옷매무새를 한번 가다듬었다.

“더 채워야 할 거 보여?”

“…….”

“너 이런 거 잘 보잖아. 나보다 더.”

은재의 부탁 아닌 부탁에 세헌은 한숨을 내쉬며 이제야 연회장을 대강 둘러보았다. 워낙 꼼꼼한 성격의 은재가 맡은 일이다 보니 부족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수군거리며 소문을 만들면서도 못내 참석하고 싶어 할 만했다.

다들 싸구려 핏줄이 섞였다며 입방아를 찧지만, 타고나게 돈이 많은 이들보다 훨씬 더 고급스럽고 우아한 것을 영위하는 이들의 분위기였다. 어떻게든 초대장을 얻어 보려 애를 쓸 이유가 넘쳐나는 파티였다.

“없어.”

“다행이네. 고마워.”

가만가만 세헌을 응시하던 은재는 대답이 나오고 나서야 짧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나중에 봐.”

“내일 봐.”

“그러든가.”

그러곤 아쉬움 하나 없는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일 보냐. 그 꼬맹이.”

“누구……. 아.”

응, 그러겠지. 은재는 걸음을 멈추며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나 미묘하게 나긋해진 음성이었다.

워낙 무심한 성정이니 저 정도로 말하는 거면 아이에게 나름 정을 준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꽤 마음에 드나 봐.”

“…….”

“처음에는 별 관심도 없더니. 이젠 제법 신경 쓰는 것 같네.”

은재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강 비서님 오기 직전까지 꼬맹이 옷 보고 있었잖아.”

파티 주최자 입장이니, 그리고 태영이 사람들과 처음 만나는 날이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은재를 몇 년간이나 뜯어보던 시선들은 이제 태영에게로 향할 것이었다. 챙겨 줄 수 있는 건 모두 완벽하게 준비해 놔야 했다.

겨우 열세 살인 주제에 제 편이 되어 주겠다고 이야기하는 녀석이기도 했고.

은재는 민 회장의 뜻을 다 짐작할 순 없지만, 이게 공식적으로 민 회장의 후계로서 태영을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것은 알았다. 자신의 삶이 끝나기 전에 은재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태영의 입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영리해. 상황 파악도 잘하고.”

“다행이네. 민은재 속 안 썩여서.”

“내일 인사해. 사람 좋아하는 애야. 정에 약해.”

그만큼 해 주면 더 잘할 아이이기도 하고. 은재는 짧게 미소를 머금었지만, 금세 피로한 얼굴로 눈썹뼈를 꾹꾹 눌렀다. 세헌은 일을 마치고 파티장 입구에서 서성이는 강 비서에게 대신 손짓했다.

“들어가, 이만. 피곤해 보인다.”

“내일 정말 안 올 거야?”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딘 은재가 세헌을 돌아보며 물었다.

“와. 왔으면 좋겠어.”

“…….”

하지만 세헌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은재의 무심한 말을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약 먹고 와, 너.”

“…….”

“아무리 공식적인 자리여도 개 같은 알파들 많아. 조심하라고.”

“너 있으면 괜찮잖아.”

“…….”

“그러니까 시간 되면 와. 더 이상 요구 안 할게.”

은재는 비교적 선선히 대답했다. 세헌은 대놓고 숨을 뱉으며 혀를 찼다. 이전처럼 학생 때였으면 저 머리카락을 대강 쓸어 버렸겠지만.

“친구 잘 뒀네, 나.”

그 마음을 아는 것처럼 은재는 제가 대신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 찰나로 드러나는 하얀 이마에 세헌이 시선을 고정했다.

“이거 지난번에 빌린 담배.”

그리고 은재가 사라진 후에야 그가 마지막으로 인사로 전한 말을 곱씹었다. 제 옆에 뜯지 않은 담뱃갑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하여간, 아닌 척하면서 선을 긋는 데는 제일이었다.

“조금 기네…….”

“…….”

“키 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파티장을 떠나 저택으로 향한 은재는 태영에게 이것저것 여러 종류의 옷을 입어 보게 하며 살폈다. 그래도 그사이에 키가 조금은 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져온 옷들은 묘하게 길었다.

치수를 재서 재단해 온 것들인데도 그랬다. 평상복이라면 상관이 없을 테지만 내일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

거울 앞에 선 태영은 제 모습과 그 뒤로 보이는 은재의 얼굴을 바라보며 머쓱하게 손을 만지작거렸다.

“제일 공을 들인 건 아직 남았으니까 입어 봐.”

“네.”

이건 꼭 맞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하루 만에 키가 크든가.

하루 만에 키가 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태영은 도움을 받아 옷을 입으며 이건 맞기를 간절히 바랐다.

“…….”

태영은 정 실장의 시선을 한껏 받으며 다시 나와 거울 앞에 섰다. 소파에 앉아 말없이 기다리던 은재의 입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잘 어울리네.”

열세 살 소년에게 입힐 만한 옷은 아니었다. 보타이에 멜빵이 달려있었고, 색도 미묘하게 밝았다. 바지의 기장도 애매했다. 열세 살이 아니라 다섯 살 정도의 아이가 입으면 알맞게 귀여울 옷이었다.

그래도 이것이 태영에게 가장 잘 어울렸다. 어설픈 꼬마 신랑 같던 모습 대신 싱그러운 태영의 얼굴이 조금 더 돋보였다. 몇 가지만 바꾸면 충분히 괜찮을 것 같아 보였다.

“점잖은 옷이어도 좋겠지만, 난 이것도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은재가 다가와 보타이를 매어 주며 말했다. 태영은 거울 속 제 모습을 아주 낯설게 들여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보기엔 어색했지만…… 은재가 괜찮다면 괜찮은 것이었다.

“바지만 긴 바지로 바꾸면 되겠다. 아, 멜빵도 빼고.”

“좋아요.”

“그럼 이걸로 하죠.”

“네. 준비해 놓겠습니다.”

“저, 이 옷 제가 보관해도 되나요?”

다시금 태영의 환복을 돕고, 연미복을 챙기러 다가오던 정 실장이 걸음을 멈추며 은재를 돌아보았다.

“왜?”

식어 가던 찻잔을 쥐려던 은재도 태영을 응시했다.

“그냥…… 걸어 두고 자고 싶어서요. 처음 이런 거, 입는 거라서요.”

잘 다려진 옷이기는 하지만, 한 번 더 다린 뒤 옷감이 조금도 상하지 않을 만한 곳에서 컨디션 관리를 하는 게 일반적인 절차였다.

“걸어 두고 보기만 할게요. 안 만지면 더러워지지 않을 거예요.”

태영은 제 종아리를 간질이는 바지를 저도 모르게 만지며 말했다. 은재는 넌지시 그 손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대신 더 일찍 일어나야 할 텐데. 괜찮겠어?”

“…….”

“입기 전에 한 번 살펴야 해. 행사가 오후라도 아침부터 정신없을 거거든.”

“네. 그럴게요. 더 일찍 일어날게요.”

안 될 수도 있다고, 그게 당연한 거니 실망하거나 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태영은 은재의 답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은재는 희미한 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마구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발끝이 위로 쑥쑥 들려올라갈 만큼 기뻤다.

이렇게 좋은 옷을 입어야 하는 만큼 중요한 자리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저도 동행하는 자리이니 그에게 망신이 되지 않도록 잘해야 하는데.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담긴 옷을 저에게 보관할 수 있게 해 준 게 기뻤다.

그냥…… 그가 저에게 무언가를 허락을 해 준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감사합니다.”

태영은 달려가고 싶은 것을 참으며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입을 때와 달리 아주 공들여 옷을 벗고 옷걸이에 걸었다. 껴안듯 옷을 들고 계단을 성큼 올랐다.

거의 계단을 다 오른 뒤에야 은재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서재로 가는 듯 보이는 은재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이사님.”

“내일 보자.”

“네. 좋은 꿈 꾸세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태영은 인사하며 다시 계단을 올랐다.

“안녕히 주무세요, 회장님.”

사진 속 민 회장에게도 빠짐없이 인사한 뒤 방에 들어섰다. 창문을 열어 두어 겨울 냄새가 듬뿍 나는 공기가 방 안에 머물러 있었다. 태영은 그 상쾌하고 찌릿한 공기를 크게 마시며 옷을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었다.

서늘한 공기가 머무는 방 안은 태영이 발산하는 열기를 부드럽게 감싸 끌어안았다. 태영은 제 방이 추운 줄도 모르고 한참 옷 주변을 서성이다, 뒤늦게 양치를 하고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래도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자꾸만 발걸음이 연미복 주변을 배회하게 했다.

생전 처음 입어 본 턱시도였다. 우스꽝스러운 몰골이기는 했지만 생전 처음 가는 파티였다. 그것도 은재와 함께하는 파티.

가슴이 들썩거렸다. 막상 가면 재미가 없을 거라고, 제가 할 건 여태 배운 예의를 차리는 일밖에 없을 거라고 되뇌어도 봤지만. 그냥 은재와 하루를 보내고, 또 이런 멋있는 옷을 입는다는 것 자체가 기뻤다. 어쨌든 은재와 시간을 온종일 함께 보내는 셈이었다.

“파티 예절…….”

정 실장에게 배우며 적었던 노트를 펴며 태영은 애써 침대에 누웠다. 가슴이 뛰어 글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태영은 기어코 페이지를 다 읽은 후에야 옷이 잘 보이는 쪽에 누웠다.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 파티 전날이었다.

* * *

파티 당일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은재는 침착했고 차분했으나, 집 안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휩쓸리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은재의 옆자리에 타 있었고, 또 정신을 차리니 파티장이었다.

분명 저녁 무렵에 시작되는 일정이라고 들었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광경에선 벌써 노을이 넘어가고 있었다.

“태영아.”

톡톡, 호텔 연회장 입구에 들어서며 은재가 태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태영은 정신없는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잘해야 해.”

“…….”

“사람들은 널 보러 오는 거야.”

“……몰랐어요.”

“그럼 지금부터는 잊으면 안 돼. 꼭 잘해 내야 해.”

벌써부터 연회장 입구가 복잡했다. 드라마에 빨려들어 온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소음을 빚어내는 사람들이 저 멀리 보였고, 연회장 안에서 움직이는 여러 직원들의 열기가 가까워졌다. 미리 준비된 것에 맞추어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생경했다. 제일 고급스럽고 화려한 것을 상상해 보아도 눈앞의 그림에 비할 수 없었다.

부드러운 음악과 곳곳에서 피어나는 향, 작게 울리는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 구겨진 곳 하나 없이 고급스러운 차림들, 그것을 비추는 화려한 장식들과 조명들.

평소 여는 파티를 생각하면 격식을 많이 요하는 자리도 아니었고, 몹시 가벼운 규모였지만, 처음 이런 것을 겪는 태영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세계였다.

긴장이 무겁게 머리를 때렸다.

“할 수 있어.”

“……네. 할 수 있어요.”

“그래.”

은재는 태영의 어깨를 가볍게 털어 주며 연회장에 들어섰다. 태영은 이 순간의 열기와 시선, 그 뜨거웠던 조명과 은근하게 귓불을 만지는 음악이 흐르는 순간을 사진처럼 기억했다.

원장 선생님의 장례식이 불과 세 달 지난 무렵이었다.

세 달이 느리고도 빠르게 지나는 동안, 평생 잊히지 않을 기억 두 개가 강렬하게 뇌리에 저장되었다.

비 오는 날의 장지. 관 위로 떨어지는 동그란 빗물. 머리와 어깨, 그리고 발등을 적시던 차가운 비. 맞지 않아 어깨 위로 흘러내리던 옷들. 그 위로 얹히던 무거운 비와 결국 그 틈새로 드러나던 가난의 증거. 까무잡잡한 피부와 마른 어깨. 뼈가 보이는 몸.

노골적인 시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추어진 조명. 볼륨마저 정제되어 있는 연주. 음식이 놓여 있음에도 부드럽게 흐르는 향. 이제는 딱 맞게 재단된 옷과 겨우 세 달 동안 습득한 부자연스러운 부의 흔적. 아직도 변함없는 그을린 피부와 조금 자란 키.

그리고 은재.

그리고 사람들.

그리고…….

매끄럽게 사람들 사이로 빨려들어 간 은재는 제 옆에서 잘 쫓아오는 태영의 어깨를 한 번 더 지그시 쥐었다.

태영은 몇 번이나 어색함과 긴장을 혀 아래로 숨겼다. 대신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무심하게 미소를 지어 주는 제 보호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조명 사이로 절 내려다보는 시선이 와닿았다.

수많은 시선들 속 제가 찾는 시선이 오롯이 저에게 향해 있었다.

열세 살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가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은재는 잠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눈 뒤 잔을 들어 올렸다. 그가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려 하자 더욱 노골적으로 변한 시선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태영은 변함없이 존경이 어린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손님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오늘 파티의 의미를 간략히 말하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어라고 말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제 보호자가, 제 인생의 유일한 어른이 이렇게나 멋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각인했다.

은재는 마지막으로 단상에 모금함을 내려놓고 말을 마쳤다.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모금이었다. 사람들은 천천히 움직여 다시 멈췄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들과 함께 온 이들은 작은 손에 봉투를 쥐여 주었고, 조금씩 모금함이 채워졌다.

“태영아.”

은재가 태영을 부르며 다가왔다. 홀로 텅 빈 단상을 보며 서 있던 태영 역시 은재 옆으로 다가가 섰다.

다시 정신없고 단조로운 인사가 시작되었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 뒤로 보이는 미묘한 시선을 모른 척해 가며 은재를 따라 인사를 했다. 사람들은 제 속내를 숨기면서도 묘한 혐오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파티에 초대된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태영과 은재를 보며 제가 가진 것들을 되새겼다. 태어나면서부터 손에 쥐고 있던 지위와 재산.

참으로 기이하고 이상한 세상이었다. 부러움과 갈망이 질투와 시기로 번지는 건 어떤 이유일까.

과하게 반가워하며 살갑게 구는 이들도 있었으나, 은재와 태영은 불쌍한 이들이니 제가 참아 준다는 얼굴로 말을 붙이는 사람도 있었다. 무슨 염치와 낯짝으로 이사라는 자리에 앉았는지 조소하는 이들도 있었고. 유독 그런 표정은 더 생생히 드러났다.

은재는 그 표정을 똑똑히 응시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장에 목을 매며 이 자리에 참여하게 되기를 바라는 그들의 속물적인 얼굴을.

때때로 보란 듯이 페로몬을 풀며 다가오는 알파들도 있었다. 은재는 집요한 시선으로 온몸을 훑는 알파들을 마주하며 그 시선을 만끽하는 것처럼 굴었다.

구역질이 솟아오를 정도였지만 도리어 그런 남자들에게 손을 뻗어 인사하고 제 체온을 남겼다. 짧은 눈 맞춤이 사라지고 나면 알파들은 짜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서서 은재의 손이 닿았던 제 손등을 만지곤 했다. 여운이 남은 눈길로 그 뒷모습을 좇았다.

파티는 여느 때처럼 여운과 아쉬움, 질투와 혐오로 뒤섞여 있었다.

“민 이사, 민 이사!”

한참 그렇게 뭘 먹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은재는 세헌의 다급한 부름에 급히 자리를 비웠다. 태영을 홀로 두고 가는 것이 영 신경 쓰이는 눈치였지만, 태영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이 찰나에야 그가 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태영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나마 닿지 않는 곳으로 향했다. 속이 비어 허했지만, 입맛은 없었다. 사람들이 많고, 절 뜯어보며 평가하는 시선들이 많아 별로 먹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녕!”

그때 태영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가 다가와 인사했다. 그러나 태영은 침묵했다.

하도 다양한 사람들을 이 짧은 시간 동안 만난 터라 사람에게 질려 있었다. 다들 제 속내를 숨긴다고 생각했겠지만, 오래도록 짜증이 어리고 트집을 잡는 시선을 받아왔던 태영은 그들의 시선을 누구보다 잘 읽어 냈다. 제가 어떻게 구는지, 얼마나 미숙하게 실수를 하는지를 기다리는 눈빛들이 지금도 은근히 달라붙어 있었다.

“난 손의준.”

“…….”

“넌?”

의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아이는 태영의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의준이 태영에게 다가오자, 곳곳에 흩어져 있던 아이들 또한 슬금슬금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태영은 절 흘긋거리는 시선들을 무시하며 침묵을 유지했다.

“너 몇 살이야? 난 열세 살인데.”

“…….”

“나보다 동생인가?”

키가 작아 오해를 받는 건 평범한 일이었다. 태영은 고개를 돌려 의준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 전에 나선 은재가 어디 있는지를 찾아보았지만, 아직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걔도 열세 살이래.”

“그래? 그럼 친구네.”

“친구는 무슨 친구. 난 저런 거지랑 친구 안 해.”

뒤늦게 다가온 다른 소년 하나가 불쑥 고개를 치켜들며 공격적인 태도로 말했다.

“무슨 말이야 그게?”

영락없는 열세 살 소년 의준은 아직도 코웃음을 치고 있는 소년에게 물었다.

“야. 손의준. 아직도 몰라? 저 오메가가 데려온 애잖아. 더러운 오메가가 낳았는지 했다는 거지 고아.” 

“야. 고아면 고아지 낳은 건 뭐냐.”

“몰라. 고안데 저 오메가가 데리고 산다잖아. 왜 그러겠어.”

“…….”

“…….”

아이들과 의준의 시선이 기다렸다는 듯 태영에게 쏟아졌다. 그제야 태영은 빤히 소년을 응시했다.

“넌 이름이 뭐야.”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거지 주제에.”

거지라는 말은 익숙했다. 고아라는 표현도 그랬다. 그런 일에는 화도 나지 않았다.

다만 돈도 제법 있고, 능력도 있다는 이들마저 이런 소리를 해대는 게 신기했다. 돈이 많고 능력이 있다고 모두 은재처럼 멋있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 아빠가 너같이 더러운 애랑은 말하지 말랬는데. 특히 저 남자처럼 더럽고 엉덩이가 가벼운 오메가랑은 눈도 마주치지 말래. 더러운 거 옮는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오메가? 저 사람이 오메가야?”

“그거 이상한 거 아냐? 짐승 같은 거잖아!”

“오메가는 천박해. 몰라?”

철없는 아이들의 의문과 제가 뭐라도 된 양 의기양양한 소년의 대화가 보란 듯이 태영의 눈앞에서 이루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과 영악한 아이들이 뒤섞여 순진무구한 폭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함부로 몸을 굴리고 다닌다고. 남자들을 유혹해서 그 돈으로 이런 걸 한다고. 그런 뜻이야.”

“맞아. 나도 들었어. 그래서 그 할아버지한테 붙어서 돈을 뜯어냈다며!”

“그럼 그 할아버지랑 자는 거야? 으웩.”

“막 몸에서 이상한 것도 나온다며. 아, 더러워.”

“우엑!”

누군가 구역질하는 소리를 내자 너도 나도 그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태영은 아이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대상이 은재라는 것을, 그리고 민 회장이라는 것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소년의 앞으로 다가갔다.

소년은 태영이 다가오자 주춤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거지 새끼 주제에. 지금 누구한테 오는 거야?”

주변을 둘러봐도 도와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이야기에 별반 관심이 없었고, 그들 또한 아이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뒤가 가벼운 오메가.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알 수 없는 오메가. 사실은 천박한 출신이지만 아닌 척 내숭을 떠는 오메가.

태영은 그들의 말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거친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저를 향한 조롱은 참아도 은재를 향한 것은 참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그런 취급을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뭐, 뭐!”

소년은 저보다 키도 작은 태영에게 위협감을 느꼈는지 앞서 태영의 어깨를 밀어냈다. 태영은 개의치 않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문득 머릿속에 스친 건 은재의 모습이었다.

“손의준.”

“……어?”

“나 음료수 하나만 가져다주라.”

태영이 저에게 제일 먼저 다가왔던 의준에게 부탁했다. 갑작스러운 부탁에 의준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것을 넘겨주었다.

“……여기.”

“고마워.”

흥. 소년은 태영이 한 발 물러서는 것 같자 다시 어깨를 펴며 웃었다. 억지로 자아낸 게 분명한 웃음을 터뜨리며 제 똘마니로 보이는 녀석들에게 눈짓했다.

“혹시 너도 오메가냐? 키가 작은 게 그렇게 보이기는 하네.”

“그것치고는 턱이 너무 단단해. 별로 예쁘지 않잖아. 피부도 까무잡잡하고.”

“근데 왜 이렇게 키가 작아? 아, 거지라서 그런가?”

소년은 하하! 웃으며 태영을 놀림거리로 만들었다. 의준은 심해지는 아이들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살폈다.

“애초에 더러운 오메가가 데려온 거지가 그렇지 뭐.”

“난 알파라서 아빠가 오메가랑은 말하지 말랬는데. 요사스럽다고.”

“으, 오메가라니.”

아이들은 뜻도 모르는 단어를 그럴듯하게 따라 하며 말했다. 태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한 말 잘 들었어.”

태영은 다녔던 보육원에서 늘 형 노릇을 했을 만큼 동생들을 좋아했다. 친구도 많았고 인기도 많았다. 그만큼 인내심도 많았고, 참을성도 좋았다. 다양한 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만 들을래.”

그러나 태영은 이제 은재를 맹목적으로 따랐다.

이제 따를 곳은 오로지 은재 하나였다.

태영은 들고 있던 음료를 제 머리 위에 쏟아부었다. 붉은 음료가 곱게 단장해 빗은 머리를 볼품없이 적시고 턱 아래에서 뚝뚝 떨어졌다.

빈 플라스틱 잔이 텅,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셔츠는 물론이고 태영의 바짓단과 구두 주변에도 붉은 물방울을 점점이 남겼다. 하지만 태영은 이전처럼 변함없는 표정으로 소년을 응시하기만 했다.

놀란 아이들의 숨소리가 빠르게 파티장에 번졌다. 앞장서서 태영과 은재를 싸잡아 욕하던 아이의 얼굴이 당황으로 희게 질리기 시작했다. 치워야 할지, 혹은 누굴 불러야 할지 몰라 잔과 태영의 얼굴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태영아.”

때마침 태영이 그토록 기다렸던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재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

“…….”

민 회장이 있었다. 부쩍 살이 내린 모습으로, 강건한 두 발을 딛고 서있는 것이 아닌 휠체어에 앉아 있는 민 회장. 그럼에도 형형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이 파티의 권위자.

태영은 그를 처음 보는 것이지만 곧장 알아보았다. 사진 속, 은재의 곁을 단단히 지키고 있던 커다란 체구의 노인.

은재는 조금 동요하는 얼굴빛으로 태영에게 다가왔다.

“이게 무슨……. 누가 이랬니. 괜찮은 거야? 다쳤니?”

“……제, 제가 안 그랬어요! 얘가 그랬어요! 지가 혼자 그랬다고요!”

태영의 어깨를 밀쳐내던 소년이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급히 소식을 들었는지 어딘가에서 그 소년의 부모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들은 바닥에 나뒹구는 컵과 태영의 모습을 발견하곤 애써 소리를 죽인 탄식을 터뜨렸다.

노골적인 시선을 제외하면 고요하게 흐르던 파티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숭숭해지고, 아이들 쪽으로 시선이 몰렸다.

또한 예고도 없이 뒤늦게 민 회장이 모습을 드러내, 수군거리는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물결치던 파티장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모이고 있었다.

……민 회장 위독하다고 하지 않았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설마 진짜 민 이사 애를 건드린 거야? 숨죽인 물음들이 서로의 눈을 타고 전해졌다. 혼란과 당황이 싸하게 연회장을 덮쳤다.

“태영아. 누가 그랬어.”

은재는 태영의 어깨를 감싸 붉은 색의 음료를 닦아주며 침착하게 물었다.

“……네가 그랬어? 이혁민. 네가 그랬어?”

혁민이라 불린 소년은 아버지에게 어깨를 아프게 붙잡혔다. 혁민은 연거푸 아니라 말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미 당황이 가득 얼굴에 묻어 있었다.

어른들의 시선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다들 알고 있었다. 민 회장이 직접 파티에 나설 줄은 몰랐지만, 이 자리가 민 회장의 그 의도를 반영했다는 것을 알았다. 은재를, 그리고 태영을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태영의 꼴이…….

혼돈이 담긴 시선들은 계속해서 태영에게, 그리고 혁민에게 쏟아졌다. 묘해지는 분위기에 혁민은 얼굴을 빨갛게 붉혔지만 태영은 계속 침묵했다. 잠시 뒤 입을 열려고 할 때쯤…….

“……이혁민이 그랬어요.”

“야! 손의준! 내가, 내가 언제!”

“계속 거지라고, 더럽다고 그랬어요.”

한 발 물러나 있던 의준이 혁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침묵하던 아이들이 덩달아 혁민을 가리켰다. 이상한 말을 해 댔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발을 빼기 시작했다. 뒤늦게 달려온 의준의 어머니가 아이를 데려갔지만, 상황은 정리된 후였다. 모든 시선이 혁민에게 쏟아졌다.

혁민의 부친은 당황이 가득 어린 얼굴로 아들 대신 다급히 사과를 하고 나섰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아직 애가 어려서 뭘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 겁니다. 애가 워낙 철이 없다 보니까 제가 교육을…… 교육을 잘못시켰습니다.”

“내가 안 했다고! 아씨, 내가 안 했다고!”

그리고 아빠가 저 남자 더러운 오메가라며! 주제도 모르고 설쳐서 언제 한번 큰 망신을 당해야 한다며! 혁민은 제가 범인으로 몰리자 할 말, 하지 않아야 할 말을 가리지 못하고 억울함을 토했다. 새파랗게 질린 혁민의 아버지는 질끈 눈을 감으며 혁민의 머리를 붙잡아 숙이게 만들었다.

“조용히 하고 어서 사과드려! 어서!”

“아 왜! 싫어!”

혁민의 아버지는 아이의 입을 막고 민 회장과 은재의 눈치를 살폈다. 허리가 90도로 꺾일 정도로 인사하며 죄송하다 말했다.

크흠, 민 회장이 헛기침을 뱉었다.

“이 검사를 꽤 신뢰했는데 말이지.”

“……회장님.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청렴한 검사라고 많이 아꼈는데. 사람도 물건도 시간이 흐르면 때가 묻는 법이야. 그래도 이 검사는 그 세월을 버텨 왔다고 믿었는데……. 별반 다르지 않구만. 안타까운 일이야.” 

“……죄송합니다.”

“돈이 무서운 건지, 시간이 무서운 건지……. 쯧쯧. 어쨌든 그간 고마웠네. 자식 교육만큼은 제대로 시키길 바라지. 이런 일을 제 자식이 당하면 얼마나 속이 아픈지 알게 될 테니까.” 

묵묵히 지켜보던 민 회장이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이제 이 검사라 불린 남자의 얼굴은 희게 질리기 시작했다. 어린 태영의 눈에 띌 정도로 사색이 되어 갔다.

그대로 민 회장은 단호하게 휠체어를 돌렸다. 은재는 손수건을 꺼내 태영의 얼굴을 닦아 주며 손을 붙잡았다.

“나가자.”

“…….”

“이만 돌아가.”

“……그래도 돼요?”

태영은 은재의 손을 뒤로 당기며 물었다. 은재는 피처럼 붉은 음료가 흐르는 어린 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파티 주최자시잖아요.”

“그럼 여기 이렇게 있을까. 네가 이렇게 다 젖었는데.”

“저만 먼저 돌아갈게요.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

“…….”

“죄송해요. 난동 피우지 말았어야 하는데.”

닦아 내기는 했지만 말라붙은 음료 자국이 아직도 뺨에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은재는 손수건 대신 제 손으로 그것을 닦아 주었다. 아직도 저들을 둘러싼 시선은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 외면하며 기어코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회장님, 회장님! 뒤늦게 혁민의 아버지인 이 검사가 민 회장을 부르며 애원했지만 민 회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죄송해요, 이사님…….”

그제야 태영은 제가 한 짓의 여파를 깨달았다. 이제 막 은재의 집에, 민 회장의 집에 오게 된 제가 이렇게 굴어서는 안 되는데 그만 실수를 해 버렸다.

이런 적이 별로 없었기에 태영은 더욱 당황했다. 아무리 어린 아이들이 보육원에서 짓궂은 장난을 쳐도, 학교에 갔을 때 위 학년 아이들이 다가와 식판을 엎고 머리를 밀치며 신발을 하수구에 처박아도 화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나 화가 났다. 저 때문에 은재가 욕을 먹는 것 같아 화가 났고, 한참 어린 애들이 감히 그렇게 멋있는 사람을 우스갯거리로 삼는 게 화가 났다. 저를 욕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그를 욕하는 건 견딜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저와 은재에게 붙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비록 이제 세 달이지만, 열심히 배웠다고 알려드리고 싶었는데. 절 데려온 게 후회할 일이 아니라고, 제가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여 주고 싶었는데.

적어도…… 그의 평판에 누를 끼칠 만한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은재야.”

그때 먼저 연회장을 나서 복도 쪽에 머물러 있던 민 회장이 강 비서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태영은 두 손을 모아 고개를 푹 떨어뜨린 채 민 회장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죄송한 마음에 입이 한일자로 꾹 다물어졌다. 허리를 크게 숙이며 민 회장에게 인사한 태영은 이제 와서 안녕하시냐고 인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죄송하다고 해야 할지 고민했다.

민 회장은 그런 태영을 바라보다 곧 은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은재야. 네가 그렇게 나오면 이 늙은이 얼굴이 뭐가 되겠냐.”

“죄송합니다, 회장님.”

“안에서 세헌이가 애를 쓰던데 잠깐 거들고 나오거라. 마무리는 해야지. 어디 대경이 연 파티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려고.”

“…….”

“왜. 늙은이가 그 사이에 요절할까 싶은 게야?”

그래도 이 나이면 호상이지. 자신을 두고 농담을 뱉은 민 회장은 아직 커다란 손을 대강 공중에 휘저었다.

강한 권고는 아니지만 명백한 의미가 담긴 몸짓이었다. 결국 은재는 태영의 젖은 머리칼을 한번 쓸어주었다.

“금방 올게. 불편하면 차에 들어가 있어.”

“……다녀오세요, 이사님.”

표정을 풀어 보았지만 태영의 얼굴엔 아직도 근심이 어려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 회장은 은재가 사라진 후에야 태영에게 손을 뻗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건강하신 듯 보여 안도가 되면서도 민망했다. 제가 한 짓을 알고서도 차마 아무렇지 않게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구나.”

“……안녕하세요. 한태영입니다.”

“그래. 들었다. 태영이라고.”

“……네.”

죄송합니다. 태영은 제 이름을 말하자마자 죄송하다 말했다. 휠체어에 앉아 태영의 얼룩덜룩한 뺨과 젖은 머리칼, 셔츠에까지 물든 흔적을 보던 민 회장은 간결하게 숨을 뱉었다.

“다친 데는 정말 없는 거냐.”

“네. 정말 괜찮아요.”

“그럼 은재가 오기 전에 나가 있자꾸나.”

민 회장의 말에 태영의 고개가 느릿하게 들렸다. 태영은 제 스스로 휠체어를 움직이려는 민 회장의 모습을 보며 서둘러 그의 뒤로 다가갔다.

“제가 해 드릴게요. 그래도 될까요?”

“할 수 있겠니?”

“해 볼게요.”

작은 손으로 태영은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다. 아직도 작은 키라 손잡이를 잡는 게 썩 편하지는 않았지만, 낑낑대며 휠체어를 밀었다. 병세로 인해 부쩍 야위었어도 작고 마른 열세 살 아이가 감당하기엔 민 회장의 무게는 버거웠다. 그럼에도 태영은 꿋꿋이 휠체어를 감당했다.

밖으로 이어지는 복도 끝까지 애를 쓰며 걸어간 태영은 곧 저에게 뻗어지는 커다란 손을 발견했다.

“아가, 이리 오거라. 얼굴 좀 보자.”

휠체어를 세우고 주변을 살핀 태영은 뜨끈해진 이마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민 회장의 앞에 다가갔다. 민 회장은 찬찬히 태영의 얼굴을 살폈다. 이윽고 손을 공중에 내밀자 쫓아 나오던 민 회장의 비서가 손수건을 꺼내 쥐여 주었다. 태영은 손수건을 민 회장으로부터 건네받으며 또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네? 아니에요. 실수를 많이 해서 걱정이에요. 이사님께도 도움이 못 되는 것 같아요. 오늘도 정말 죄송했습니다.”

태영은 식은땀이 나는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민 회장을 처음 봐서 그런지, 또 실수를 하고 난 직후라 그런지 아직도 배 속이 꼬였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이 뒤섞였다. 왜 그렇게 굴었는지 후회가 치밀었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굴지 않을게요.”

“그럼 어떻게 굴려고.”

멀리서 보기에는 건강한 듯 보였으나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보니 그게 아니라는 게 실감 났다. 민 회장은 태영이 보기에도 병세가 완연한 얼굴이었다. 젊을 때의 건강을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 육체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동시에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환자의 분위기 또한 풍겼다.

그럼에도 민 회장은 아직 강했다. 이제 막 보호자의 그늘 아래 들어간 열세 살이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무게였다. 등장만으로도 파티에 참석했던 이들의 자세를 바꾸게 할 만큼 영향력 있는 노인이었다.

“그럼 참을 게냐? 그런 소리를 들어도 묵묵히 있을 게야?”

그런 민 회장의 질문을 받자 태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또다시 혁민이 은재를 모욕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예 때려 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과 은재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복잡하게 줄다리기를 했다.

“……그래 볼게요.”

그 고민 끝에 태영은 은재를 택했다. 그러자 민 회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포도 냄새가 나는 태영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만지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은재가 역시 아이를 잘 데려왔어.”

“…….”

“태영아.”

“……네, 회장님.”

“앞으로도 자주 보자꾸나.”

태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민 회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는 가지 않았다. 그래서 참는 게 맞는다는 건지, 오늘 같은 일을 해도 된다는 건지…….

아냐. 아니야. 태영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은재에게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조금이라도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다.

그래도…… 오늘 일에 대해 무어라 꾸중하시는 게 아닌 것은 알았다. 괜찮다고 말해 주고 계셨다. 은재 외에도 제 뒤에 서 있는 보호자가 하나 더 있었다.

마침 연회장 안쪽에서 바삐 걸어 나오는 은재가 보였다. 민 회장은 절 발견하고 숨을 고르는 은재를 보며 태영의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쓸어 주었다. 잔잔한 체온이 그 손이 지나간 자리에 부드럽게 번지고 있었다.

“나와 계셨어요?”

“태영이 손이 네 손보다 야무지더구나.”

강 비서는 제가 휠체어를 밀겠다 나섰지만, 은재가 직접 뒤에 섰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모르겠지만 태영의 표정이 훨씬 나아진 것을 발견했다. 아직도 머리에 묻은 물기는 말랐지만, 뺨과 턱, 셔츠에는 여전히 붉은 자국을 남긴 채 손수건을 꼭 쥐고 다시 수줍은 얼굴이 된 아이.

“이제 학교에 가야지.”

휠체어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연회장 밖에는 민 회장을 태워 갈 커다란 차와 다른 직원들이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훨씬 더 짙어진 어둠과 연회장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충돌하며 묘한 분위기로 주변에 내려앉고 있었다.

소음과 고요. 어둠과 빛. 그 모든 것들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네. 이제 학교에 가야죠.”

민 회장은 제 속도에 맞추어 걷는 태영을 돌아보았다. 태영은 민 회장과 은재를 번갈아 살피며 엉거주춤 걸음을 멈췄다.

“학교에 갈 때가 되면 선물을 보내 줘야겠지.”

“…….”

“그때까지 원하는 걸 골라 놓거라.”

그 말을 끝으로 민 회장은 다른 차에 올랐다. 당연히 저택으로 함께 갈 거라 생각했던 태영은 크게 아쉬운 얼굴로 민 회장에게 다가갔다.

“뵈러 가도 되나요?”

민 회장은 점잖은 얼굴로 웃으며 태영의 뺨을 감쌌다. 은재의 손길이 닿았을 때와 달리 훨씬 크고 포근한 손에 태영은 조금 더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곧 뵈러 갈게요.”

정 실장이 다가와 태영의 옷을 받아 주며 다른 차로 이끌었다. 그 손길에 이끌려 걸으며 태영은 은재와 민 회장이 잠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았다.

민 회장의 앞에 선 은재는 평소 태영이 마주하는 은재와 어딘가 달라 보였다. 편안해 보였고, 약간의 어리광도 묻어나는 듯했다. 희미하게 드러났다 사라지는 미소의 무게가 평소와는 몹시 달랐다.

그러나 그 차이를 알지 못하고, 태영은 자신을 지켜 주는 이들의 얼굴을 열심히 살폈다. 든든해진 마음으로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은재는 금세 돌아왔다. 민 회장을 태운 차가 먼저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다소 날연함이 스민 얼굴로 천천히 차에 올랐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느릿하게 태영을 내려다보았다. 태영은 아직 은재에게 사과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또다시 사과했다. 은재는 셔츠 위쪽 단추를 풀며 태영을 응시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니?”

“네.”

“뭘?”

“……파티장에서 예의를 지키지 못하고 무례하게 군 거요. 이사님이, 회장님이 여시는 파티인데 제가 실수했어요.”

“아니.”

은재는 꽤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네가 잘못한 건 날 믿지 않은 거야.”

“…….”

“누가 뿌렸든, 네가 그 아이를 상대하기로 결정했으면 더 당당해야지.”

태영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인영들과 차들, 그리고 차들이 뿜는 불빛을 어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연회장에서는 천천히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고, 아직까지 서 있는 은재의 차를 보고 머뭇거렸다.

“그 아이는 제 아빠를 믿고 그렇게 당당한데, 넌 아직도 겁을 내는구나.”

“……이사님.”

“오늘 만났던 사람들 기억하니?”

“……네.”

“그 사람들 중에 너를 대놓고 짓밟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래서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널 견제하려 할 거야. 비단 오늘에 그치는 일이 아닐 거야.”

태영의 검은 눈에 그 빛들이 비치며 모조리 은재에게 쏟아졌다. 은재는 그 황홀한 빛에 휩싸여 소년의 눈동자를 흔들림 없이 바라보았다.

“왜 저 사람들이 아직까지 저기 있는 것 같니.”

“…….”

“이게 너의 위치야.”

그제야 태영은 왜 오늘 민 회장이 이 파티를 열라고 했는지를 깨달았다. 새롭게 식구가 된 저를 위한 자리였다. 아직도 제 존재를 더 무겁게 받아들이는 이들 앞에서, 은재와 태영을 전면으로 앞세워 권위를 넘겨주는 것을 내보인 것이었다.

민 회장의 등장 이후로 아직까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이들이 그 생각이 옳았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주눅들 필요 없어. 상대하기로 했으면 제대로 상대해.”

“…….”

“내가 어떻게든 배경이 되어 줄 테니까.”

오메가인 은재와 베타인 태영의 갈 길은 달랐다. 민 회장이 버티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추문에 휩싸여야 했던 은재와 달리 태영은 조금 더 곧은길을 가게 될 것이었다. 그게 은재가 원하는 길이기도 했다.

저를 구렁텅이에서 꺼낸 민 회장처럼, 저도 태영에게 그런 배경이 되어 줄 것이었다.

“그래도…… 잘했어. 오늘 정신없고 힘들었을 텐데. 끝까지 배운 대로 행동하려는 거 알아.”

“…….”

“정말 학교에 가도 되겠어.”

태영이 벅찬 숨을 뱉었다. 은재는 상기된 아이의 얼굴을 보며 나직이 웃었다.

아직도 주변에는 차들이 내는 불빛들이 가득이었다. 태영은 제가 먼저 자리를 뜰 때까지 남아 있는 빛들을 오래 가슴에 새겼다.

그리고 그 빛 사이에 앉아 있는 은재의 얼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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