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9)

1

이 장례식 분위기는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그 어린 나이에도 생각했다.

모든 것이 머릿속에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갑작스럽게 없어져 버린 누추한 쉼터. 유일하게 시선을 던져 주던 선생님들과의 갑작스러운 이별. 급하게 어딘가에서 후원을 받아 추레하게 걸쳐 입은 검은 옷.

예기치 못한 불로 인해 목숨을 잃은 건 다행히 원장 선생님 한 분뿐이었다. 그렇지만 화재의 충격으로 보육원에서 근무하던 선생님들 대다수가 중상을 입었고, 그들이 장례식에 참여하는 건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언제나처럼 작은 어깨들끼리 모여 서로를 지탱하고 서 있어야 했다. 죽음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래서 더 두렵고 몸이 떨렸을 거라고, 그래서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우산을 들지 못한 거라고. 빗방울을 모조리 맞으며 주먹을 쥐지도 펴지도 못했던 그 이유를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깨에 얹히는 손 하나만 있었더라면, 한 발 뒤에서 묵묵히 지켜 주는 어른 하나만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두렵지는 않았을 것 또한.

그런 어른의 존재는 겪어 본 적이 없음에도 결핍은 언제나 생생하게 와닿았다. 채워진 적 없는 자리임에도 요란하게 제 존재를 각인시켰다. 이별의 순간에도 쉬지 않았다.

“……이원영 원장님께서는 보육원뿐만 아니라 사회 약자들에게 꾸준한 관심을 보이셨고, 지역 사회가 하지 못하는 훌륭한 일을 도맡아…….”

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장례식이라고 부르기엔 모호했다. 원장 선생님의 시신이 놓인 관을 장지에 묻고 흙을 뿌리기 전 하는 의식이었다. 그런 걸 뭐라고 할까. 그 자리에 낡아 빠진 성경책을 들고 서 있던 목사가 있었으니 입관 예배라고 해야 하나.

“…….”

“…….”

하얗게 질린 여러 명의 아이들 뒤엔 선생님 한 명만이 보호자로 서있었다. 마침 그 날 휴가를 받아 운 좋게 화재를 피한 선생님이었다. 그는 이전과 달리 아이들을 세심하게 돌보지도 못하고 멍한 얼굴로 관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도 우산은 들려 있지 않았다.

몸에 맞지 않아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옷가지가, 급하게 기부를 받아 다리지도 못하고 잡히는 대로 입은 검은 옷들이 점점 더 젖어 들었다. 속눈썹에도 빗방울이 맺혀 시야가 흐려지고, 젖살도 오르지 못한 아이들의 뺨에, 버석한 입술에 빗물이 매달렸다.

그런데도 목사는 개의치 않았다.

“그럼 다 같이 이원영 원장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그 영혼을 받으시고 천국 길로 인도해 달라고…….”

하얗게 센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긴 목사의 음성은 낮고 단조로웠다. 성경 책이 젖어 가는데도 묵묵히 책 위에 손을 올려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종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깨닫지도 못한 아이들은 습관처럼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뒤늦게 터진 여자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아이들은 제 두 손을 간절히 모았다.

원장 선생님을 살려 주세요. 원장 선생님을 살려 주세요…….

다시 그가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기도했다.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가 없으면 여기 모인 아이들은 돌아갈 곳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이들 앞에 놓인 미래는 그저 또 다른 보육원, 또 다른 시설. 혹은 파란 눈의 부모가 기다리는 공항일 뿐이었다.

하지만 모두 그 모든 과정을 몇 번이나 거쳐 온 아이들이었다. 고작 열 살 남짓, 그리고 그 나이까지도 채 살지 못한 아이들의 삶은 늘 불안의 연속이었다. 파양되고, 파양되며 또 다른 보육원으로, 또 다른 곳으로 옮겨 가다 마지막에 다다른 곳이 이곳이었다.

더 이상 옮겨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이 모이는 곳.

다른 곳과 별다를 바 없는 보육원이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몰린 아이들이 모인 곳이어서 그런지 이곳은 비교적 편안했다. 선생님들은 몇 명 되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아이들을 돌봐주었고, 서로가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며 이렇게 성인이 될 때까지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나마 희미한 한 줄기로 마주했던 생활도 이제는 누릴 수 없었다.

이제 또 뿔뿔이 흩어져 언제 다시 정착할지 모르는 생활이 발목을 붙잡게 되겠지. 그 생활을 오래 겪어 온 아이들은 누가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자신들이 다시 그 삶에 던져졌다는 것을 알았다. 점차 선명히 느껴지는 불안을 외면하며 목사의 기도에 동참했다.

제발 원장 선생님을 살려 주세요…….

태영은 모인 아이들 중 제일 나이가 많았다. 열셋. 아이들이 제일 의지하는 큰형이자, 큰오빠였다.

열세 살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고 마른 아이였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낯선 이들과 뒤섞여 살아온 태영은 이 장례식을 차지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저와 같은 아이들의 두려움이 땅 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축축한 흙 위로, 여전히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 사이로,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모여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했다. 가장 어린 막내가 그 분위기를 못 이기고 울음을 터뜨렸으나, 그럴수록 외면하려 했던 불안은 더 또렷해졌다.

그래서 태영은 기도하지 않았다. 보육원에서 지내는 동안은 저도 손을 모으고 기도했으나 이 순간은 아니었다. 기도할 수 없었다. 제 주변에 서 있는 동생들의 얼굴을 훑으며 조용히 관 위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저라도 동생들의 얼굴을 기억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모두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것처럼 헤어져 모르는 사이가 될 테니까.

길었던 목사의 기도가 끝났을 때, 서 있던 이들의 시선이 하나둘 한곳으로 모였다. 그때까지도 관과 동생들의 얼굴만 보던 태영은 이곳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제일 늦게 발견했다.

검은 우산을 들고, 검은 옷을 입고 다가오는 남자.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가 입은 검은 옷은 유독 강렬하게 시야를 스쳤다. 검은 옷과 대비되는 하얀 얼굴이, 크기가 맞지 않고 이미 다 젖은 옷을 겨우 걸치고 있는 우리와 달리 몸에 딱 맞고 좋은 향을 내며 다가오는 그 모습이 꼭 환상을 보는 기분이었다.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이들은 소리 없이 동요했다. 불안한 눈빛들이 장지 위에서 오갔다.

멀찍이 서 있던 선생님이 묵묵히 걸어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남자 뒤로 쫓아오던 다른 남자가 다가와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아이들의 긴장감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 남자가 누군가를 선택하러 온 사람이라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모두가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지닌 묘한 분위기 때문인지, 혹은 제가 선택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 때문인지 모르지만 다들 그 요요한 시선이 저에게 닿기를 바라며 숨을 삼켰다.

태영 또한 그 남자의 얼굴을,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지는 그의 분위기를 느꼈으나 다시금 관 위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태영아.”

“…….”

“이쪽으로 와야겠구나.”

열셋이나 된 아이를 데려가는 사람은 없었다. 비록 키도 작고 체구도 작아 열 살 남짓으로 보이는 태영이라지만, 곧 중학교에 갈 아이는 그 누구도 찾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부름에 태영이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이쪽으로.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으나 그런 목소리를 들었다고, 태영은 생각했다. 절로 몸이 움찔 떨리는 음성이었다. 새삼스럽게 등을 훑고 지나가는 비가 소름 끼치게 느껴지는 그런…….

“…….”

“…….”

모두가 태영과 남자의 눈맞춤을 바라보았다. 저에게 향하는 그 시선이 익숙한지 남자는 태연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 별것 아닌 움직임에 태영은 다시금 움찔했다.

모두 볼품없이 비에 젖은 것과 달리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남자. 그저 고개를 기울인 것뿐인데도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남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호기심과 두려움, 부러움과 긴장을 담은 눈동자들이 역시 남자를 좇아 움직였다.

“……네가.”

“…….”

“태영이니.”

남자는 움직이지 않는 태영의 앞에 직접 다가와 우산을 씌워 주었다. 토독, 토독……. 우산 위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와 부드러운 남자의 음성이 곧장 고막으로 꽂혔다. 태영이 눈썹을 찌푸렸다.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쨍하게 울리는 음성이 아닌 선명하고 분명하게, 또 매끄럽고 은근하게 젖은 공기를 헤치고 와 닿는 목소리.

“……네.”

“그래.”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태영의 옆자리에 서 우산을 나눠 주었고, 천천히 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별다른 말이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목사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예배를 마치는 기도를 하겠다 말했다.

어느 순간 기묘해진 이 의식을 마치는 기도의 순간에도 태영은 눈을 감지 않았다. 관을 보고, 저를 보는 동생들의 눈을 보고……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짧게 고개를 숙여 기도했다. 그가 눈을 뜨는 순간 태영은 어설프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모든 몸짓을 아마 남자는 알고 있던 듯했다. 묘한 얼굴로 숨을 고르더니 어느샌가 꽃을 받아 태영에게 한 송이를 내밀었다.

입관 의식을 마무리하기 위해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얀 국화를 관 위에 던지고 있었다. 남자를 보호하듯 뒤에 서 있던 이들이 그 다음으로 흙을 뿌렸고, 남자도 천천히 관 쪽으로 다가갔다.

“…….”

왜인지 태영은 그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가 하얀 꽃을 들고 다가가 관 위에 내려놓는 모습은 유독 느릿하고 선명했다. 숨소리마저 죽여야 할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래서 그가 직접 몸을 숙여 꽃을 관 위에 내려놓고 제 앞에 다가올 때까지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뒤늦게 태영이 남자를 따라 움직였다. 무릎을 꿇고 관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레 국화를 올려두었다.

비에 젖은 동생들과 선생님, 그리고 목사는 묵묵히 걸어 장지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태영은 차마 그들을 쫓지 못하고 어색하게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나랑 가면 돼.”

“…….”

“나랑 사는 거야.”

남자의 음성은 부드러웠지만 다정하지 않았다. 친절한 성격을 지닌 것 같았지만 애정과 관심이 어린 음성은 아니었다.

분명한 선이 그와 저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왜…… 저를요.”

누군가 보육원을 후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가끔, 근처에서 보이지 않던 차가 세워져 있거나 크리스마스 같은 때 선물이 들어오곤 했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선생님도, 남자도 자세한 통성명 없이 서로를 익히 아는 눈치였다. 누가 누구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지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남자가 후원자일 게 뻔했다.

그렇지만 왜…….

입양을 하겠다고 온 부모들은 아이들 앞에서는 정성껏 제 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그게 실재이든, 꾸며 낸 것이든 어떻게든 함께하고자 하는 열의를 드러냈다. 물론 태영은 그런 것을 반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처음부터 건조한 사람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네가 제일 나이가 많다고 들었는데.”

“…….”

“다른 아이들은 그래도 아직 기회가 남았고.”

이런 생태계를 잘 알고 있는 듯 남자가 단조롭게 말했다.

“동생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뒤로 돌았던 남자가 다시 태영을 돌아보았다.

“저보다 동생들을 데려가시는 게 더 나으실 거예요.”

“…….”

“동생들이 더 어리고 착해요. 적응도 잘 할 거예요.”

그는 넌지시 태영을 내려다보며 들고 있던 우산을 넘겨주었다.

“그럼 넌 갈 데가 있고?”

“……다른 보육원으로 가면 돼요.”

태영은 제 손에 남자의 손과 체온이 스치는 것도 모르고 무심결에 우산을 받았다. 완전히 젖은 손과 조금도 젖지 않은 부드러운 손이 어설프게 서로를 스쳤다. 그제야 태영이 작게 움찔했다.

남자는 그런 태영의 눈동자를 조금 더 들여다보았다.

가는 빗줄기 하나가 남자의 하얀 뺨 위를 내리그었다.

“다들 잘 살게 될 거야.”

“…….”

“아마 너만큼.”

너만큼. 그 말을 끝으로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대신 그 뒤를 지키던 남자가 서둘러 남자에게 제 우산을 넘기고 태영에게 다가왔다.

안경을 쓰고 있는 이 남자는 앞서 지나간 남자와 분위기가 퍽 달랐다. 조금 더 나이가 있는 듯 했고, 조금 고지식해 보이기도 했다. 그 남자는 저를 강 비서라고 소개했다.

“가시죠. 차가 밖에 있습니다.”

“……네.”

가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동생들이 아닌 제가 선택받았다는 것이 아직 믿기지 않았지만, 가지 않겠다고 해 봤자 갈 곳도 없었다. 선생님도, 동생들도 이미 떠난 뒤였다.

그리고…… 남자의 그 단조로운 말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모두 각자 좋은 곳을 찾아 떠날 것 같았다. 제가 그를 따라 나선다면 모두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마음 한편으로는 제가 제일 좋은 곳으로 가는 것 같아 불편했지만…….

어차피 다른 보육원으로 갈 거라면, 다들 잘 살게 될 거라면 저도 이 남자를 따라가도 되지 않을까.

태영은 잠시 비를 맞고 있는 원장의 관을 내려다보았다. 투둑투둑……. 이 커다란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저 아래 관도 두드리고 있을까.

소리 없이 태영은 원장에게 인사를 전했다. 새 삶은 그렇게 빗속에서 시작되었다.

오래된 운동화 사이로 들어오는 축축한 빗물과 함께.

* * *

차는 두 눈이 크게 뜨일 정도로 편안하고 컸다. 제 키가 작아서 그런 건지, 깊게 올라가 등을 대고 앉았는데도 바닥이 한참 아래에 있었고 위로도 넉넉히 남았다. 몇 바퀴를 굴러도 될 만큼 시트도 부드럽고 넓었다. 강 비서라는 사람에게 건네받은 수건마저도 솜털처럼 보드라웠다.

보육원에서 늘 느꼈던 가난의 냄새가 아닌, 차원이 다른 부의 냄새가 곳곳에 묻어 있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저기…….”

“네.”

그런데 먼저 보았던 남자는 차에 오르지 않았다. 다른 곳에 계신 걸까.

“아까, 그분은 안 타시는 건가요?”

태영은 최대한 예의 바른 음성을 내며 물었다. 조수석에 올라 서류를 보던 강 비서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차가 과속 방지 턱에 다다랐다. 태영은 본능적으로 시트를 꽉 쥐었지만 차는 부드럽게 턱을 넘었다. 덜컹일 때면 옆에 앉은 동생들에게 체중이 급격히 쏠리던 보육원 차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사님께서는 일이 있으셔서 먼저 출발하셨습니다.”

“아…….”

“이건 따로 모셔 오기 위해서 준비한 차고요. 앞으로 계속 이 차를 타시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태영 전용의 차라는 뜻이었다. 태영은 도대체 이사라고 불리는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조금 시간이 걸립니다. 편하게 계세요.”

“……감사합니다.”

짧게 웃은 강 비서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태영은 빗소리도 거의 전해지지 않는 창밖의 풍경을 보며 거듭 숨을 삼켰다.

갑작스레 마주한 새 삶이 생각보다 더 낯설었다. 단계도 없이 너무나 높은 곳에 발을 내딛는 기분이었다.

“도련님, 도련님.”

태영은 저를 조심스레 흔드는 몸짓에 번쩍 눈을 떴다. 잠이 든 줄도 몰랐는데, 따뜻하고 안락한 공간에 저도 모르게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도착했습니다.”

강 비서가 저를 무어라고 불렀는지 듣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차에서 내렸다.

눈앞에…… 꼭 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화려한 저택이 서 있었다. 잠깐 눈을 붙였던 사이, 마치 다른 세계로 이동한 것만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파헤쳐진 땅과 관 위를 아프도록 때리던 비는 어느새 멎어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아직도 우중충했다. 먹구름이 잔뜩 껴 언제 다시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였다.

그럼에도 태영은 그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다. 소리 없이 떠 가는 먹구름 따위에는 나눠 줄 정신이 없었다. 눈앞을 장악한 커다란 저택이 도통 믿기지 않았다.

크기도 높이도 이상할 정도로 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식구들이 사는 걸까. 제 또래 아이들도 있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큰 집에 살 이유가 있을까. 집에 뭐가 있는지 알 수는 있을까.

강 비서는 멍하니 서 있는 태영을 잠시 바라보다 한 발 앞서 움직였다. 뒤늦게 태영이 그의 걸음을 쫓았다.

아마 이 집에 사는 어른의 취향일 것 같은 고즈넉한 외관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외국에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풍기면서도 오래전 지어진 저택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세월의 흔적은 저택을 망치지 않았다. 외려 단단한 시간의 흐름과 고상한 자신감을 내보이고 있었다. 살짝 흐린 날씨 속에서도 화려함이 감춰지지 않고 않았다.

저택 주변으로는 잔디가 깔린 마당이 광활하게 펼쳐졌고, 높게 자란 나무들이 길을 이루고 있었다. 좌우로 고개를 돌려 보아도 풍경의 끝은 보이지 않고 도리어 드문드문 서 있는 건물들이 보였다. 그것들이 설마 모두 저택의 일부인 걸까.

태영의 나이를 고려해 일부러 저택 안으로 들어와 가까운 곳에서 차를 세웠는데도, 태영은 꽤 오래 걷는다고 느꼈다. 곳곳에 서 있는 건물을 정신없이 훑고 나니 또 정원에 시선이 팔렸다. 가을이라 색색으로 물든 정원이 꼭 숲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 정원에서 축구를 하면 공이 날아가는 것도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밟기에는 너무나 좋은 잔디였지만.

“도련님.”

“아.”

엉거주춤 걷다보니 누군가 어깨를 스치듯 붙잡는 게 느껴졌다. 화들짝 놀란 태영은 그게 강 비서의 손이라는 것을 알고 애써 놀란 기운을 갈무리했다. 강 비서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이라서요. 조심하시죠.”

한참 주변을 구경하며 오다 보니 저택의 입구였다. 강 비서를 따라 몇 개의 계단을 딛고 올라오니 대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역시 밖에서 보는 것만큼 화려하고 큰 저택이었다.

정원 쪽으로 난 커다란 창에서 녹색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날이 좋은 날 보았더라면 눈부실 정도로 쏟아지는 볕이 보일 듯했다. 현관을 지나, 전실을 지나 보이는 계단도…….

“도련님 쓰실 방은 2층에 있습니다.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강 비서의 말에 대답을 하고는 있지만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렇게 대놓고 집을 구경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곳곳에서 느껴지는 좋은 향과 이 고즈넉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장식, 높은 천장과 떡하니 보이는 계단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예의가 없어 보이는 행동인 것을 알면서도 입이 벌어졌다.

“강 비서님. 오늘 WB쪽 사람 만나서 정찬하기로 했으니까…….”

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집을 구경하던 태영은 계단을 딛고 내려오는 남자를 발견하고 급히 제 옷가지를 정리했다. 뒤늦게 몸을 바로세우고 놀라 벌어졌던 입을 꾹 닫았다.

그러나 남자는 하던 말을 멈추고 뚜벅뚜벅 태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차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고…….”

“…….”

미리 저택에 도착해 있었는지, 남자의 옷차림은 바뀌어 있었다. 장례식을 참석하기 위해 입었던 검은 옷은 던져 버리고 더 밝고 깔끔한 슈트를 걸쳤다.

검은색이 아닌 하얀색의 셔츠를 받쳐 입으니 그의 얼굴이 더욱 환해진 것이 느껴졌다. 이쪽이 훨씬 더 잘 어울렸다. 좋은 향이 나고 하얀 피부에, 미성의 목소리를 내는 남자에게는 밝은 색이 더 나았다.

본능적으로 손이 꾸욱 쥐어졌다.

“아직도 젖었네.”

“…….”

“무릎에도 여전히 흙이 묻었고.”

그러나 남자는 태영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구겼다. 머리를 넘겨 드러난 미간에 골이 파였다.

“강 비서님.”

“죄송합니다. 수건을 드렸는데, 미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태영의 양어깨를 짚어 손에 묻어 나오는 물기를 확인한 남자는 서늘해진 시선으로 강 비서를 응시했다. 서류를 들고 서있던 강 비서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차에서 내려서 걸어오는 시간이 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대경의 아이라는 걸 생각하세요.”

“시정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 죄송해요. 수건을 받았는데 정신이 없어서 못 닦았어요.”

“…….”

“오는 길에 잠이 들어서…….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한 사람이 혼이 나는 듯했다. 젖은 건 저인데, 우산이 없었으니 젖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애꿎은 강 비서님을 꾸중하는지 몰라 태영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러자 남자가 조금 몸을 숙여 태영을 내려다보았다.

이 커다란 저택과 잘 어울리는 남자……. 이렇게 커다랗고 화려한 집을 배경으로 두고 선 것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남자는 익숙한 듯 태영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었다.

“저택을 좀 둘러봤니?”

“……밖에서만요.”

“그래. 여기가 너와 내가 살 곳이야. 이곳에 사는 사람은 너와 나밖에 없어.”

“…….”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어?”

남자의 또렷한 이목구비 뒤로 높은 천장과 그 위에 매달려있는 조명이 보였다.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던 긴 계단과 미처 안을 다 볼 수도 없이 뻗어 있는 안……. 제가 작고 어린 아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생각하더라도 엄청난 크기였다.

남자가 장지에 나타난 순간부터 알았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거대한 세계가 절 기다리고 있을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세계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런 세상과는 닿을 수 없었다.

“넌 내 뒤를 따르게 될 거야.”

“…….”

“여기 계시는 강 비서님하고 널 도와주게 될 사용인들하고는 달라. 무슨 뜻인지 알겠니?”

변함없이 남자의 목소리는 친절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졌고, 동시에 묘한 권위마저 깃들어 있었다. 태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영리하다고 들었어.”

남자는 숙였던 몸을 바로 세우며 태영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접촉해 본 적이 많지는 않은지, 실로 어색한 손길이라 태영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굳혔다.

“WB 쪽에 연락 넣으세요. 조금 늦는다고.”

“네.”

“올라가자.”

어색한 건 태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육원 선생님들 외에 이렇게 접촉한 사람은 없었다. 다른 동생들은 잠시라도 가정을 얻곤 했지만, 태영은 그것마저도 없었다. 작고 마른 베타. 볼품없는 베타 남자 아이는 입양에서도 인기가 없는 편이었다.

서로에게 낯설었던 접촉은 그렇게 오묘한 거리감을 되살리며 끊어졌다.

“일부러 2층 제일 앞방으로 하라고 했는데.”

그럼에도 태영은 남자의 뒤를 홀린 듯 쫓았다.

멀리서부터 시선을 빼앗던 계단을 올라왔는데 어떻게 올라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낯선 방문 앞에 서자 정말 제가 테두리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제 저도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이 온 감각을 뒤덮었다.

갑작스러운 원장 선생님의 죽음으로 마비되었던 감각들이 이제야 요동치기 시작했다.

“……좋아요. 감사합니다.”

남자는 떨리며 나온 태영의 음성에 희미하게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 얼굴을 태영은 길게 바라보았다. 이런 행위 또한 무례한 것을 알면서도 더 길게, 길게.

태영은 불현듯 깨달았다. 앞으로 제가 이 미소를 보기 위해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저도 테두리의 안에 들어왔지만, 누군가의 영역 안에 초대되어 들어왔지만. 오래 외로웠던 마음을 채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 미소를 기다리게 되리라는 사실을. 절 데려온 남자가 후회를 하지 않도록, 남자의 기대에 무엇이든 보답할 수 있도록 저 미소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안에 욕실이 있어. 네 방이니 뭐든 사용해도 돼.”

“……네.”

“씻고 나오렴.”

남자는 방문을 열어 주었지만 들어선 것은 태영 하나였다. 태영은 거리를 유지하며 문 밖에 서있는 남자에게 꾸벅 인사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방을 구경할 새도 없이 욕실로 곧장 향했다. 씻고 나오라고 하셨으니 씻고 나와야 했다. 이사님께서…….

“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못 물어봤는데.”

괜히 다른 사람이 꾸중을 듣는 것 같아 급하게 나섰지만, 사실 몸에 묻었던 물기는 진작 마른 후였다. 머리카락이 다소 늦게 말라 축축한 기운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태영은 남자의 말이라면 뭐든 따르고 싶었다. 절 선택해 준 남자를 위해 살고 싶었다. 저는 이제 겨우 열세 살이고, 볼품없는 베타일 뿐이지만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었다.

지금은 우선 빨리 씻어야 했다.

“아, 뜨거워.”

보육원에서 여러 명이 함께 지냈던 방보다 훨씬 큰 욕실에 들어와 종종걸음으로 샤워 부스에 들어갔다. 처음 접해 보는 샤워 부스에 어색하게 문을 닫고 레버를 잡고 당겨 물을 맞았다.

머리 위에서 쏟아진 물은 김이 펄펄 날 정도로 뜨거웠다. 태영은 발을 동동 구르며 레버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부드럽게 레버가 돌아가자 적당한 온도의 물이 몸에 샅샅이 묻었던 빗물을 씻어 냈다.

비를 맞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따뜻한 물을 맞으니 이렇게 한참 있고 싶을 만큼 온몸이 풀어졌다. 노곤노곤하니 이대로 낮잠을 자면 좋을 것 같았다. 솜이 다 삭은 얇은 침구를 덮어도 지금은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태영은 씻고 나오라고 했던 남자의 말을 떠올리며 서둘러 부스 안을 살폈다. 눈꺼풀에 묻은 졸음을 부릅뜨며 밀어냈다.

‘샴푸, 샴푸.’

사실 그건 바디 워시였지만 태영은 무작정 보이는 걸 눌렀다. 아직도 긴장이 가시지 않아 뭐라고 써 있는지 볼 정신이 없었다.

공용 욕실에서 쓰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냄새에 태영은 잠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코끝에 바디 워시가 묻어 향이 더 깊게 느껴질 때쯤 수줍게 웃으며 손으로 비볐다.

역시 좋은 거라 그런지 거품도 풍성하게 일어났다. 눈만 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세 흰 거품에 싸였다. 몇 번이나 온몸에 거품 칠을 한 태영은 남은 흙이 있을까 싶어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열심히 손발톱 아래를 문질렀다. 비 냄새, 흙냄새. 그 외에 가난의 냄새를 모두 지우려 목도 피가 날 정도로 비볐다.

보육원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겠지만, 두 번이나 더 바디 워시를 짜 겨드랑이와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팔에 코를 박고 킁킁거린 후에야 샤워 부스를 밀고 나왔다.

수건걸이에 매달려 있는 수건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것으로 머리와 몸을 거칠게 닦고 방으로 들어가니 누군가 가져다준 새 옷이 놓여 있었다. 태영은 수건으로 한참이나 머리를 턴 후에야 옷을 입었다. 절 위한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실내화까지 마저 신고 달려 방을 나섰다.

“어차피 곧 다시 미국 들어간다고 하던데요. 길어 봐야 한 달?”

“당분간 WB 쪽에 머무르신다는 말도 있고요.”

“그래요? 아직 졸업을 안 한 걸로 들었는데. 알 수가 없네.”

“이전처럼 몇 개 사업에만 참여하실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오늘 나가 보면 알 테니 일단 서류부터 정리합시다.” 

쿵쿵. 태영은 최대한 소리를 죽이면서도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말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 향하니 역시나 큰 규모의 공간이 나왔다. 거실……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 앉아 신문을 보며 차를 마시던 남자가 태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금방 나왔네.”

“기다리실 것 같아서요.”

별로 달리지도 않았는데 숨이 찼다. 헐떡이며 말하니 남자는 시원한 물을 따라 태영의 손에 밀어 주었다.

“씻겨 놓으니 볼만은 하네. 마르기는 했지만.”

“…….”

“그럼 난 이만 가 봐야겠다.”

남자는 태영이 물을 한 모금 마시는 것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게 꼬아져 있던 다리가 풀어지며 늘씬한 몸이 일으켜졌다.

“저…….”

그 남자를 쫓아 태영이 한 걸음 내디뎠다. 다행히 남자는 작은 소리에도 뒤를 돌아봐 주었다.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

“비서님께서는 이사님이라고 하시던데…… 저도 이사님이라고 하면 되나요?”

깨끗하게 몇 번이나 문지른 손가락인데도 남자의 앞에 서니 더러운 것들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저와 달리 깨끗하고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옷도, 머리카락도 모두 오래 관리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이제 겨우 뜨거운 물로 씻고 나왔을 뿐, 여전히 까무잡잡한 저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의 앞에 서기에는 제가 한참이나 볼품이 없었다.

남자는 다른 세계에 속한 어른이었다.

“민은재.”

“…….”

“내 이름이야.”

“민…… 은재.”

태영은 어설프게 그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이름마저도 남자의 것은 예쁘고 우아했다.

“저는, 한태영입니다.”

이미 다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태영은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자 남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사님이라고 부르면 될 것 같아.”

어렴풋한 표정을 지은 남자, 은재는 태영의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쓰다듬었다.

“정 실장님.”

“네, 이사님.”

“집 안내 좀 해 주세요. 그리고 드라이어도 꺼내 주시면 좋겠네요.”

“그러겠습니다.”

역시 그의 손길은 어색했고, 친밀함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지만 태영은 목을 가다듬으며 귓불을 붉혔다.

“또 보자.”

“……안녕히 가세요.”

이렇게 인사하면 안 되는 거였나. 예상치 못하게 닿은 은재와의 접촉에 태영은 횡설수설하며 인사했다.

“아, 아니. 다녀오세요.”

“그래.”

은재는 희미한 소리를 내며 대답해 주었다. 귓불이 더 뜨끈해졌다.

“저, 이사님…….”

감사합니다. 태영은 꾸벅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은재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도련님,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쉬운 눈으로 은재가 사라진 자리를 보던 태영은 문득 절 부르는 호칭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그 뒤로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정 실장이라는 사람이 다가와 짧게 묵례했다. 태영은 덩달아 인사하며 그의 뒤를 쫓았다.

“제가, 도련님인가요?”

슬며시 묻자 정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여전히 뭐가 뭔지, 이곳이 정확히 어디이고 그가 뭘 하는 사람인지. 저는 왜 도련님이고 그는 어떻게 이렇게 넓은 곳에 살게 된 건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다. 남자의 이름이 은재라는 사실도 알았고, 정말 그와 같이 산다는 것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저택의 곳곳을 모두 알려 주며 사용하는 방법을 안내해 주는 것도 바로 그 점을 완곡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 괜찮았다.

“쓰시다가 모르시거나 불편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드라이어는 욕실에서 나오시면 왼쪽에 보이는 서랍에 들어 있습니다. 사용하시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작게 웃은 정 실장은 다시 방으로 안내를 해 주었다. 속도를 맞춰 주는 그 걸음을 따르며 태영은 발 아래로 보이는 저택을 다시 구경했다.

“식사는 어떻게 준비해 드릴까요?”

“어…….”

그 말을 듣고 나니 오늘 제대로 된 걸 먹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돌연 급하게 몰려오는 허기에 태영이 슬그머니 배를 움켜쥐었다.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특별히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신가요?”

“아니요. 다 좋아요.”

“그럼 머리만 말리고 1층으로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전에라도 필요한 게 생기면 말씀 주시고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번이나 감사하다고 인사한 태영은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았다. 방이 워낙 커 드라이어의 소음이 밖으로 들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몰랐다. 주의하는 편이 나았다.

태영은 복슬복슬한 실내화를 발가락으로 쓸어 본 뒤, 욕실 옆 서랍장에서 드라이어를 꺼내 머리를 말렸다. 머리는 금세 말랐다. 함께 들어 있던 빗으로 어설프게 머리를 빗으며 길게 숨을 뱉었다.

“오메가…….”

이사님은 오메가, 그런 걸까. 돌아가신 원장 선생님은 알파였고, 그 외 선생님들은 모두 베타였다. 동생들도 그랬다. 형질을 가진 동생들이 몇 명 있기는 했지만 그 아이들은 입양을 금방 나가는 편이었다. 파양되어 돌아오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또다시 선택을 받아 나가는 것도 오메가 동생들이었다.

도대체 알파가 무엇이고 오메가가 무엇인지, 왜 저는 베타인지 열세 살의 부모 없는 태영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저를 선택해 준 남자는 오메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던 것이 꼭 남자와 같았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분위기. 자꾸만 시선을 당기는 우아한 남자.

분명 겪어 본 적 없는 분위기니 베타는 아니었다. 알파, 아니면 오메가였다. 평범한 저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랐다.

“…….”

이게 그냥 은재를 향한 동경인지, 애정의 갈구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멋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제가 그렇게 멋있는 사람과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뛰었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릴 정도였다.

태영은 은재의 손이 닿았던 머리카락을 다시 여러 번 빗고 제 널찍한 방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볼 게 많이 남았지만, 벽을 몇 번 쓰다듬으며 제 방이 생겼다는 놀라운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에야 방을 나섰다. 이전 은재가 밟은 계단의 가장자리를 밟아가며 1층으로 내려왔다.

이사님이 퇴근하고 오시면…… 꼭 마중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불과 몇 시간 전 제가 밟고 들어온 커다란 대문을 응시했다. 이제 그 대문은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는 듯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고 태영은 그 안에 있었다.

조금 눈가가 뜨거워졌다.

* * *

다시 은재와 태영이 만난 건 일주일 뒤였다.

“병원은 제가 다음 주 중으로 가볼 겁니다. 그 전에 회장님께 말씀 드릴 건 있어야죠. 이번 분기에 실적이 없어서 영 난처하네.”

“지금 진행 중이신 건 마무리되면 그 문제는 해결될 겁니다. 애초부터 내년을 목표로 시작한 사업이니까요.”

“……다녀오셨어요.”

태영의 방에서는 대문이 보였다. 1층에 있는 대문이 아닌, 저 멀리 차가 지나쳐 오는 그 대문. 이 집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고작 일주일 전부터였지만 태영은 어느새 그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 되어 있었다.

무성하게 자라난 풀들과 황홀한 정원을 보는 것이기도 했지만 실은 은재가 탄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려 했다. 가을의 정취를 고스란히 담아 매일매일 저택과 어우러지는 정원이 계속 시선을 당겼지만, 그 사이를 지나는 차가 있는지를 무엇보다 열심히 살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은재를 보지 못했다. 열심히 이 창가에 앉아 새로 받은 책들을 읽고 공부를 시작했는데도 그 차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은재가 무슨 차를 타는지도 몰랐다. 처음 이 집에 올 때 이미 은재는 출발한 뒤였고, 도착했을 때 은재는 실내에 있었다.

그래서 태영은 차가 들어올 때마다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차에 탄 것은 정원사일 때도 있었고, 때로는 강 비서, 정 실장이었다.

일주일 동안 늘 실패만을 겪은 태영이지만 그래도 꿋꿋했다. 오늘도 차가 보이자마자 뛰어나와 1층에 섰다.

“……아.”

그리고 오늘은 정말 은재가 저택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강 비서는 짧게 고개를 숙여 태영에게 인사했다. 태영도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정작 은재는 태영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어딘가 곤란한 얼굴로 눈가를 찌푸리더니 이내 강 비서에게 시선을 던졌다.

“말씀 좀 해 주시지.”

“죄송합니다. 알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태영은 꿋꿋했다. 일주일 만에 은재를 봤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커다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네. 안녕하세요.”

“살이 좀 올랐나.”

여전히 은재는 변함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고작 열세 살인 태영이 정확히 짚어 낼 수 없는 분위기.

어른 같은…… 분위기.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인 은재는 손을 들어 태영의 볼을 툭, 건드렸다. 유일한 보호자의 관심을 받게 된 태영은 티 나게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이 검진했나요?”

“아직 안 했습니다.”

“많이 늦었네. 지금 최 박사님께 연락 넣으세요. 그래도 검진은 해야지.”

일주일 동안 뵙지 못해서 그 날 혹시 제가 너무 바보같이 군 것인가 했는데. 태영은 은재의 눈치를 빠르게 살펴보았으나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저의 존재를 잊은 것에 가까웠다.

“최 박사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네.”

그건…… 괜찮았다. 실수를 한 게 아니라면 이제부터 남자의 마음에 들게 굴면 되었다.

“응접실로 가야겠는데.”

먼저 걸음을 내딛던 은재는 곧 태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은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태영은 그 몸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일주일 동안 제가 이 집에 얼마나 적응했는지를 보려 하는 것이었다. 응접실의 위치를 아는지 확인해 보려는 거겠지. 13년간 보육원을 전전하며 눈치를 키운 태영은 곧장 앞서 걸음을 내디뎠다. 응접실로 향하며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걸었다.

“이사님. 차 준비할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응접실에 앉아 본 적 없는 태영이지만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재는 그 모습을 모두 확인한 후에야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집은 좀 둘러봤니?”

무려 일주일이 지난 후지만 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강 비서님이 선생님들하고 동생들 소식 전해 주셨어요. 잘 살고 있다고요. 감사합니다.”

정 실장은 금세 차와 간단한 쿠키를 내왔다. 은재는 소파에 기대어 앉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형 노릇을 했다고 들었는데.”

“나이가 많아서요. 제가 제일 형이었거든요.”

“그래?”

“네. 그리고…… 다들 착했어요.”

태영은 고급스러운 생김새의 찻주전자를 보며 손을 달싹였다. 차에 익숙한 환경도, 나이도 아니었으나 움직이지 않고 관망하듯 앉아 있는 은재를 보니 어쩐지 제가 차를 따라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손을 뻗어 주전자를 잡자 은재가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잡으면 데일 텐데.”

능숙하게 태영의 손에서 주전자를 앗아 가 제 잔에 차를 따랐다. 잔은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태영이 마시기에는 떫고 뜨거운 차였지만, 은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영의 몫 또한 따라 놓았다.

딸려 나온 찻잎이 잔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이 주신 차니까……. 차에서 뜨고 쓴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아 마시고 싶지는 않았으나 태영은 두 손으로 잔을 붙잡았다. 은재가 먼저 차를 머금는 것을 슬쩍 눈치로 살핀 후에야 저도 슬그머니 혀끝을 대 보았다.

역시 뜨겁고 썼다. 떫은 맛이 도통 왜 마시는지를 알 수 없게 했다.

“먹을 만하니?”

“……네.”

열세 살 어린아이 입맛에 맞지 않는 차였지만 그렇다 대답했다. 낮게 웃은 은재는 함께 딸려 온 쿠키를 태영의 앞에 밀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태영은 은재가 하는 모든 것을 따라 하고 싶었다. 자신도 은재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저를 데려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하려면, 저도 그처럼 쓸모 있고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여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쿠키를 먹으면…… 그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았다.

보육원에선 간식을 많이 구경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달콤해 보이는 쿠키가 시선을 잡아 당겼지만 태영은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발가락만 소리 없이 꼼지락거렸다.

“아, 이 슬리퍼 부드럽고 좋아요. 이것도 감사합니다.”

그러다 시선이 닿은 슬리퍼를 보며 말했다. 은재는 어느새 두 번째 차를 따르며 고개를 기울였다. 웃는 듯 아닌 듯 알 수 없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그려져 있었다.

“이사님, 최 박사님 오셨습니다.”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강 비서의 뒤로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최 박사인 모양이었다. 태영은 앉아 있던 소파에서 내려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사님.”

“네. 요 근래 경황이 없어서 연락도 못 드렸네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당연한 말씀을요. 회장님이 무엇이든 우선이지요.”

안녕하십니까. 최 박사는 태영에게도 허리 숙여 인사했다. 백발의 신사가 정중히 인사하는 모습에 당황한 태영도 다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은재는 그 사이에서 홀로 고고하게 앉아 있었다.

“아이 검진을 부탁드리려고요. 믿을 만한 분이 최 박사님밖에 없네요.”

“항상 맡겨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왕진 가방으로 보이는 것을 풀어놓은 최 박사는 강 비서가 내민 서류를 받아 태영의 간단한 신상 정보를 확인했다. 그러곤 청진기로, 또 맥으로 건강 상태를 확인하며 가방 속에 들어 있던 물건을 꺼냈다.

혈압 측정기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그것은 손가락 끝에 달라붙었다. 아프지는 않지만 전기가 오르는 듯 찌릿한 감각이었다. 저도 모르게 태영이 짧게 몸을 떨자 은재의 고요한 시선이 닿았다.

삐이, 간단한 기계음과 동시에 찌릿찌릿 흐르던 감각이 사라졌다. 왜인지 숨을 참고 있던 태영은 기계가 손가락에서 떼어지자마자 숨을 골랐다.

최 박사는 낮은 숨을 뱉으며 결과를 면밀하게 확인했다. 다소 긴장 어린 침묵이 공간에 내려앉았다.

“베타가 맞는 것 같네요. 그런데 아직은 좀 불안해 보이기는 합니다. 영양 상태가 고르지 못해서 결과가 불확실한 것도 있고요.”

“페로몬이 나오기는 합니까?”

“미량입니다. 이 정도는 베타에게서도 종종 나오는 현상이고요. 너무 염려할 것은 없어 보입니다.”

검진이라고 했지만, 사실 형질을 파악하기 위한 검사인 모양이었다. 최 박사는 태영에게 키와 몸무게를 형식적으로 물어보고는 앞으로 한참 더 커야 한다 말했다.

“염려는 마세요. 그래도 열세 살이라고 했으니 형질이 바뀔 일은 없을 겁니다.”

“알파보다는 베타인 아이가 필요해서요.”

어른들의 대화를 다 알아듣는 나이였지만 태영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시선을 돌렸다. 베타……. 이사님은 베타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열 살 정도라면 걱정할 만하지만 열세 살이면 괜찮아 보입니다. 다만 키가 많이 작은 편이니 내년쯤에 다시 검사를 해 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발육 상태가 영향을 미치기도 하나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형질이 변할 정도의 페로몬이 나오는 건 아니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최 박사는 한 번 더 확정 지어 말해 주었다. 그 말에 은재는 작게 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그럼 또 뵙는 걸로 하죠.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강 비서가 대신 최 박사의 배웅을 맡았다. 태영은 인사를 할 새도 없이 제게 다가오는 은재의 시선과 마주했다.

“차는 마셨고, 이제 식사를 해야겠지.”

“……네.”

은재의 시선이 녹녹하게 태영을 향했다. 태영은 절 향한 밝은 색의 눈동자를 보며 목에 힘을 주었다.

제가 베타라는 것이 처음으로 감사하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정 실장은 어느새 다이닝 룸으로 옮겨 가 있었다. 화려하고 다양한 음식들이 테이블에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고, 식기 또한 여럿이었다. 둘이서만 갖는 식사 자리치고는 화려한 테이블이었다.

은재는 자연스레 시중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태영의 뒤에도 식사를 도와줄 직원이 서 있기는 했지만, 태영은 혼자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아무런 대화도 이어지지 않았다. 식사 중에 대화를 하는 걸 그다지 예의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태영도 굳이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최대한 느리게 시선을 굴려가며 은재가 하는 양을 따라 식사를 했다.

포크도, 나이프도 너무나 많아 뭘 써야 할지, 어떻게 먹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은재를 살피며 최대한 비슷하게 흉내를 냈다. 그걸 보기 위해 이 자리에 저를 불렀음을 알았다. 응접실의 위치를 물은 것도, 차를 내온 것도, 그리고 지금도 모두 저를 보기 위한 자리였다.

그가 저울에 제 행동을 올려 보고 있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쳤는지 은재는 물로 입을 축였다. 태영도 소리 없이 식기를 내려놓았다.

잘 보이고 싶었다. 어떻게든 잘 보여야 했다.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잘 맞는 옷과 부드러운 침구, 처음으로 가져 본 따뜻한 제 방 외에도 이곳이 무작정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닮고 싶은, 멋있는 사람이 있었다. 시설을 옮겨 다니는 건 이제 상처도 아니었지만, 왜인지 그에게 버림받는 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동생들을 챙겨 준다는 약속까지 지켜 준 사람.

은재는 짧게 태영에게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정 실장님.”

“네, 이사님.”

“일주일이면 될까요? 아이 가르치는 데.”

“해 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영리하니 잘 할 겁니다.”

정 실장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태영은 이해하고 허리를 세웠다. 그 모습에 은재가 어렴풋이 입매를 당겼다.

역시 영리한 아이였다. 타고난 것인지, 혹은 자라난 환경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좋은 눈치를 활용해 제가 처한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설명하지 않아도 제가 행동해야 할 바를 알았고, 배운 것이 없어도 주변을 살펴 가며 행동을 삼갔다.

베타에, 말귀도 밝고……. 딱 제가 찾던 아이였다.

“정 실장님이 가르쳐 주실 거야. 그걸 잘 기억하고 배워. 네가 잘 따라오면 곧 가정 교사를 붙여줄게. 학교는 그 다음이야.”

“네.”

태영은 제법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이사님.”

시간을 확인하던 은재는 태영의 부름에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잘 배우면, 앞으로도 이사님하고 밥 먹을 수 있나요?”

예상치 못한 말에 은재의 고운 미간이 약간 흐트러졌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지우곤 태영을 응시했다.

“앞으로도 계속 식사하고 싶니?”

“네.”

“나랑?”

“……네.”

은재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숨에 태영은 짧게 어깨를 떨며 긴장했지만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애들 특유의 생기가 어린 뺨이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

“잘 배웠는지 보려면 보기도 해야겠고……. 그것 말고도 네가 원한다면.”

“감사합니다.”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던 태영은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로 곧 눈을 맞춰 왔다. 열셋……. 열세 살치고도 작은 아이였다. 열 살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작았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가난하고 누추한 곳에서 삶을 이어 온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못내 단단한 구석이 있었다.

……고작 아이 주제에.

그 모습이 마음에 들면서도 씁쓸해 은재는 다시금 입가를 닦아 냈다. 얼굴 위로 떠올랐던 표정이 천천히 사라졌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뤄 놓고 말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해야겠다.”

“…….”

“이번은 처음이니 들어줄게. 그렇지만 다음엔 네가 먼저 보여 줘야 해. 내가 꼭 들어줘야 할 이유를 만들어 와.”

충분히 이해할 나이였다. 그리고 영리한 아이는, 오랜 눈칫밥을 먹으며 살았던 아이는 더 빠르게 이해할 것이었다.

그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태영은 조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재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알 수 없는 기분이 가슴속에서 맴돌았지만 삼키며 다이닝 룸을 나섰다.

한참 뒤에야 아이가 다이닝 룸을 나섰다고, 은재는 전해 들었다. 지금쯤이면 정 실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나. 저택 맨 위층에 있는 서재에서 일을 보던 은재는 약한 숨을 터뜨리며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액자를 응시했다.

권위가 느껴지는 의자에 앉아 있는 백발의 노인과 그 옆에 서 있는 저. 은재는 사진 속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 * *

다음 날도 은재는 이른 시간부터 저택을 나섰다. 이제 은재는 알고 있었다. 태영이 저택의 대문이 열리는 순간을 기다리며 늘 1층으로 내려온다는 사실을. 그게 저를 기다린다는 뜻임을.

그래서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저택을 나섰다.

헛된 희망을 줄 필요는 없었다. 제가 받은 대로, 배운 대로 아이에게 많은 것을 내어주겠지만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 줄 수는 없었다. 저도 태영과 마찬가지로 아이들과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자랐지만 아이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보면 어릴 적 제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데려온 이상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겠지만…….

“어쩜 그렇게 똑같을까.”

차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은재는 허탈한 말투로 읊조렸다.

“병원으로 가죠.”

“예.”

다리 위에 봐야 할 서류들이 올라와 있었지만 그것들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황량하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회장님. 저 왔습니다.”

차는 VIP병동 앞에 도착했다. 혹시나 진을 치고 있을지 모르는 기자들을 피해 뒷문으로 들어선 은재는 휠체어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백발노인의 곁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노인의 두꺼운 눈썹이 은재를 발견하고 짧게 꿈틀거렸다.

“얼굴이 별로인데.”

“잠을 설쳐서요. 식사는요.”

“늙은이가 뭘 챙겨 먹는다고.”

젊었을 적에는 꽤나 기골이 장대했을 것처럼 보이는 노인이었다. 안색으로만 따지면 은재보다 더 정정해 보였다. 은재는 짧게 웃으며 늘 이곳에 오면 앉는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한동안 안 보이더니.”

“요즘 사업이 그저 그래서요. 뭐라도 들고 오려고 좀 버텼어요.”

회장이라 불린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젓기만 했다. 이윽고 여전히 형형한 시선을 움직여 은재를 훑었다.

“무슨 일이냐.”

“일은 무슨 일이요.”

“복잡한 얼굴인데.”

“…….”

은재는 표정을 잘 감추는 편이었으나, 민 회장의 앞에서는 늘 실패했다. 감춘다고 감춰도 민 회장은 그 속내를 언제나 알아챘다.

“내가 널 몇 살 때부터 봤는지 기억하냐.”

“그럼요. 열넷이었죠.”

“그때도 얼마나 애가 독했는지……. 손을 대면 꼭 이로 잘라 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지.”

마치 그날을 선명히 기억하는 것처럼 민 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천천히 멀리 사라졌던 시선이 다시 눈앞에 앉아 있는 은재에게로 향했다.

“그런 주제에 그다지 야물지 못했지. 손이 많이 가는 애였어. 제가 겁먹은 줄도 모르고 이를 세웠으니까. 그게 귀엽긴 했지만.”

고개를 숙였던 은재는 옅게 표정을 만들며 그를 마주했다.

“들었다. 아이 데려왔다고.”

“네.”

“굳이 왜 아이를 데려와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민 회장은 은재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말했을 때 반대를 표했던 인물이었다. 파양과 보육원 사이를 전전하던 열네 살 은재를 저택에 데려온 인물이 반대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민 회장은 생각보다 더 단호했다.

“갈 곳이 없다는 걸 뻔히 아는데 두고 볼 순 없었어요. 충동적인 결정이긴 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그 이유를 이제야 은재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아이가 불쌍해서요.”

“…….”

“어떻게든 시선을 받아 보려고 전전긍긍하는데…….”

태영의 모습에서 저의 모습이 보였다. 애정을 갈구하던 제 과거가.

은재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날연한 숨을 뱉었다.

“저 같더라고요.”

“그래도 너보다는 말을 잘 들을 것 같다고 그러던데.”

민 회장은 무릎 위에 올려진 책을 넌지시 펴며 말했다.

“강 비서님 입이 생각보다 더 가벼우시네요.”

“일부러 나한테 전하라고 그이를 데리고 다니는 거 안다.”

“…….”

“그 앙살은 도무지 가시지 않는구나.”

정작 민 회장도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모른 척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은재는 저 역시 8년 동안 민 회장 곁에서 살며 그런 면을 닮게 된 건가 생각했다.

“아이는 착해요. 베타고요. 열세 살치고 키가 작기는 한데, 잘 먹이면 크겠죠.”

“그래.”

“나중에 자리 마련해 보겠습니다. 저택에서요.”

변함없이 체구가 큰 노인이기는 하지만, 요 몇 년 사이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다. 젊음으로 버텼던 세월은 결국 나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한계를 호소하고 있었다.

이렇게 버티고는 있지만, 언제 어떻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의사는 말했다.

“모시러 올 테니, 나오세요.”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저택에서 보자 말하니, 민 회장은 커다란 손으로 제 뺨을 만지며 웃었다.

“이건 이번 분기 영업 실적 정리한 내용입니다. 지금 WB 그룹하고 연계한 신사업을 준비 중이에요. 리조트 쪽과 연결 지으면 새로 상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확인해 보시고 말씀 주세요. 아직 여유 있으니 시정하겠습니다.”

“은재야.”

“네, 회장님.”

“네가 데려온 아이니 잘 할 거다.”

“…….”

“아이에게 일부러 엄하게 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야.”

은재는 나직이 웃었다.

“때가 되면요.”

그 말을 끝으로 은재는 민 회장의 병실을 나섰다. 건강 챙겨라. 민 회장은 마지막 인사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은재는 어제오늘 피로했던 것이 페로몬의 영향임을 깨달았다.

요즘 일이 바빠 캘린더를 확인하지 못했더니 이런 일이…….

우성 오메가. 민 회장의 집에 입양되기 직전 판정받은 형질이었다. 그리고 민 회장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강건한 알파였다. 그런 집으로 입양되어 가니, 당연히 민 회장과 은재에겐 온갖 소문이 달라붙었다.

은재와 태영의 관계와 달리, 친자로 은재를 입양한 것이었는데도. 그래서 민 회장의 성을 따르게 되었는데도. 순전히 은재가 오메가라는 이유로 붙은 소문이었다.

은재의 외모 또한 그 소문을 부풀리는데 한몫했다. 차마 십 대를 상대로 그런 표현을 꺼낼 수가 없어 사람들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은재가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그의 외모는 단연 화두였다.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서로를 향하는 눈빛들에서 그 음험한 속내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스무 살이 되자 그 외모는 더욱 꽃피웠다. 우성 오메가임을 증명하는 얼굴이었다. 페로몬을 맡지 못하는 베타들조차 은재가 오메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피부는 매끄러웠고, 청초한 얼굴 위로 묘한 색정이 흘렀다. 깊은 눈매와 아스라한 분위기는 결코 쉽게 잊을 수 없는 종류였다.

히트 사이클이 다가올 때면 더한 나른함이 맴돌았고, 주변을 스치는 알파들은 절로 긴장 어린 숨을 삼키게 되었다. 타고나길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게 아님에도 관능적인 분위기와 몸짓이 한번쯤은 그의 눈길을 받고자 하게끔 만들었다. 도대체 저렇게 생긴 얼굴은 침대에서 어떻게 울까, 하는 음욕 어린 생각들이 사람들의 면면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그래서 은재는 베타인 아이를 찾아야만 했다. 민 회장의 건강이 부쩍 안 좋아진 요즘이지만, 그 소문은 가실 길이 없었다. 그런데 또 알파 아이가 들어온다면 곤란했다. 민 회장과 은재, 태영을 별개로 생각하지 않고 한데 묶어 불쾌한 시선을 던질 게 뻔했다.

다행히 태영은 베타였다. 또 다행히 나이가 제일 많았고.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아이. 민 회장의 뒤를 잇기에도 저보다 훨씬 적절한 아이.

하아……. 은재는 나른한 숨을 뱉으며 가슴 안쪽에서 징징 우는 전화를 꺼냈다.

세헌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말해.”

―회사?

“지금 들어갈까 해.”

―주말인데.

“언제 그런 거 가리고 일했나.”

―당장 급한 일 없잖아.

“……그래서?”

전화기 너머에서 세헌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한잔해.

“지금 대낮이야.”

―언제 그런 거 가리고 마셨나.

세헌은 은재의 말을 따라 하며 말했다.

―내가 사는 거야. 아버지가 너 접대하라고 하셨어.

“…….”

―이번 사업 우리 쪽에도 이득이잖아.

은재는 시트에 머리를 툭, 투욱…… 두드리며 잠시 침묵했다.

―우리 단둘이 본 지 오래됐다.

“…….”

―대접할 기회 좀 줘라. 나 아버지한테 겨우 애원해서 사업 참여한 거 알잖아.

툭, 투욱……. 은재는 몇 번 더 머리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어디로 가.”

전달받은 주소는 세헌이 애용하는 바였다. 세헌의 사촌 형이 하는 곳이랬나……. 미리 말을 해 두었는지, 바 안은 사람들 없이 한적했다.

은재는 입구에서 서성이던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데도,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침침하고 눅눅한 바에는 은근한 페로몬과 담배 냄새, 그리고 벽에 밴 듯한 술 냄새가 피어올랐다.

“페로몬 치워.”

은재는 방 입구에 우두커니 선 채 말했다. 그제야 세헌은 피식 웃으며 페로몬을 거뒀다.

“이 정도는 그냥 나오는 거라고.”

“열성인 거 티 내? 제대로 갈무리해. 아니면 안 들어가.”

“까탈스럽기는. 이래서 나랑 사업은 어떻게 해?”

“너랑 하는 거 아니잖아. 네 아버지랑 하지.”

“영 이상하게 들리네.”

그러면서도 세헌은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사용하지 않은 빈 잔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얼핏 보아도 비싸 보이는 양주를 따랐다.

그런 후에야 은재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렸다는 듯 문이 닫혔다. 은재는 잠시 문을 돌아보았지만 이내 시선을 돌렸다.

“자.”

“…….”

“너 이거 필요한 얼굴이야.”

세헌은 담배를 들고 있었다. 은재는 대충 말아진 담배가 아닌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천천히……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하얀 담배가 물렸다. 세헌은 붉은 입술에 물린 담배를 보며 품 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희미한 소리와 함께 주홍빛 불이 솟았다. 그 불쪽으로 은재가 몸을 기울이며 크게 숨을 마셨다. 필터가 타는 연약한 소리와 함께 숨이 안쪽으로 꺼지는 소리가 섞였다.

“……너 곧 러트야?”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고개를 젖히던 은재가 느른히 물었다. 페로몬을 완벽히 거둬들였는데도 묘하게 공중에 페로몬이 떠다니는 듯했다. 아무리 열성이라고 해도 이렇게 페로몬이 노출되는 경우는 그것밖에 없었다.

세헌은 그 속눈썹과 눈꼬리 끝에 달라붙은 눈물점을 훑으며 짧게 어깨를 으쓱였다.

“러트면?”

은재는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담배를 옮기며 연기를 뱉었다. 나긋하고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미끈한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러트면…….”

무슨 말이 나올지 알면서도 세헌은 그 입술을 직시했다.

“돌아가야지.”

“…….”

“뭐 하러 러트 앞둔 알파랑 이러고 있겠어.”

무심한 시선을 마주하며 세헌이 싱긋 미소 지었다. 아직도 담배가 걸려있는 매끄러운 입술을 보며 저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다시 불이 타오르고, 필터에 불이 붙자 은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헌이 곧장 그 손을 붙잡았다.

“아직 남았어.”

“…….”

“2주도 더 넘게 남았다고. 요즘 사업 하느라 피곤해서 그래.”

“…….”

“야, 은재야. 나 너한테 술 한 잔도 못 따라 줬다. 오늘 아버지 명 받고 나온 거라고 했잖아. 내가 네 생각 몰라서 이러고 있을 것 같냐.”

시중 좀 받아 줘라. 세헌은 눈썹을 찌푸리며 애원하듯 말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묘하게 떠돌던 페로몬도 어느새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너 먹인다고 바 다 치웠는데. 너 밥은 먹었어? 요즘 정신없다고 끼니 안 챙기지, 또.”

알파답게 가끔 멋대로 구는 구석이 있는 놈이지만, 그래도 유일한 친구인 녀석이었다. 은재가 처음 민 회장님의 집에 왔을 때부터 유일하게 적대적이지 않은 놈이었고.

“밥만 먹고 가. 멀찍이 앉을 테니까.”

그나마…… 말이 통하는 놈이기도 하고.

결국 은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주 알맞게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세헌은 자리에서 일어서 친히 문을 열어 주었다.

정말 제대로 접대를 할 생각인지, 문 앞에는 온갖 술들과 음식들이 뒤섞여 있었다. 디저트 같은 것도 보였고 과일도 수북했다. 밥을 먹고 가라는 말이 헛소리는 아니었는지, 끼니를 할 만한 것들도 가득 놓여 있었다.

“술은 안 마셔.”

“그러든가.”

아직까지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세헌은 잇새로 연기를 뿜으며 은재의 앞에 피쉬 앤 칩스를 올려 주었다. 눈에 절로 띌 정도로 넘치게 부어진 칩스가 생선튀김을 가릴 정도로 많았다.

“너 이거 좋아하잖아. 이렇게 칩스 가득 해서 먹는 거.”

“…….”

“나이프 줄게. 기다려.”

은재는 유독 이 음식을 좋아했다. 다른 요리들을 많이 접한 후에도 종종 이 음식을 찾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은재에게는 약간의 향수처럼 느껴지는 음식이었다. 보육원에 있을 때 이 음식을 제일 사치스러운 음식이라고 생각했어서 그런가.

어릴 적 우연히 여행 프로그램에서 피쉬 앤 칩스를 먹는 장면을 보았다. 해외는커녕 간식조차 원 없이 먹어 본 적 없던 은재에게 그 기억은 강렬하게 남았다. 그래서 돈을 벌게 되면 꼭 이 음식을 먹어 보리라 생각하기까지 했다.

이제는 이 음식보다 더 비싸고 좋은 음식이 많은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 기억 때문인지 은재는 여전히 이 음식을 가장 선호했다.

“하여간 까칠하기는……. 밥 한번 먹이기 힘들다.”

세헌은 은재가 나이프와 포크를 쥐는 것을 본 후에야 자리에 앉았다. 트레이에 넘치도록 실려 온 음식은 함께 들어온 직원의 손에서 테이블로 하나하나 옮겨졌다. 절로 시선이 가는 음식들이 쌓이는데도 은재는 묵묵히 눈앞의 음식에만 집중했다.

“맛있지?”

“…….”

“청담동 L식당에서 가져온 거야. 너 여기 음식 좋아하는 것 같아서 셰프한테 부탁했어. 이런 거 주문하는 사람 처음 봤다고 그러더라.”

“난 태생이 재벌이 아니라 그래.”

“또 너무 가네.”

유독 먹는 속도가 느린 은재를 위해 세헌은 몸을 일으켰다. 직접 요리를 잘라 주려는 것이었다. 그 눈에 띄는 몸짓에 은재가 크게 얼굴을 구겼다.

“하지 마.”

“그렇게까지 질색해야 돼?”

“그러지 좀 마. 이런 거 싫다고 몇 번 말해.”

“야. 너 학교 다닐 땐 내가 맨날 해 줬거든?”

“그건 어릴 때고.”

“지금도 나이 얼마나 먹었다고 그래. 그때랑 몇 살 차이 안 난다.”

“술이나 줘.”

“안 마신다면서.”

그러면서도 세헌은 마시지 않은 술을 따라 버리고 다시 양주를 따라 밀어 주었다.

“아이 데려왔어? 보육원 가 본다고 했잖아.”

“지난주에.”

“어때. 남자애야?”

“응. 베타.”

세헌이 자꾸 말을 거는 게 귀찮은지, 은재는 입을 닦아 버렸다. 뭐 얼마나 먹었다고……. 새 담배를 꺼내며 그릇을 살핀 세헌은 결국 짧은 숨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넌 진짜 내 동생보다 더하다. 그래도 걔는 잘라 주는 것도 좋아하고, 또 좋아하는 거 갖다주면 잘 먹는데. 쉽게 해 준다는데 왜 싫대.”

그러나 은재는 세헌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시계를 잠시 살피고는 양주로 가볍게 목을 축였다.

“회장님은 어떠셔, 좀.”

“보기에는 똑같으신데 잘 모르겠어. 의사는 별다른 말은 안 하고.”

“괜찮아지실 거야. 제일 건강하신 분이잖아.”

“그래야지. 그럼 이제 갈게.”

굳이 보란 듯이 재킷 단추를 정리하길래 가겠다는 표시를 하는 줄은 알았지만……. 8년을 보아도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성격에 세헌이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접대받았어. 임 대표님한테도 말씀드릴게.”

“그래. 가라, 가. 무슨 이야기를 못 하겠네.”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던 은재는 담배에 불을 붙이는 세헌을 내려다보았다. 막상 나서려니 약간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없어, 인마.”

“그럼 됐어. 갈게.”

“야, 은재야.”

깊게 필터를 빨며 연기를 한 모금 뱉던 세헌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느슨해진 눈으로 은재를 불러 세웠다.

아닌 척하지만 눈꼬리가 슬그머니 붉어진 것이…….

“너 아무래도 곧 히트 사이클인 것 같은데.”

“…….”

“같이 보낼 사람 있어?”

“애인 없는데.”

“애인 없어도. 다른 알파 부르면 되잖아.”

“…….”

“이제 약 그만 먹어. 넘치는 게 알파고, 넘치는 게 남잔데 왜.”

나른하고 희뿌연 연기가 세헌의 잇새에서 피어올랐다. 가만가만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은재가 가늘게 숨을 뱉었다. 그와 동시에 세헌의 눈동자가 조금 더 짙어졌다.

천천히 은재가 몸을 숙여 다가왔다. 세헌의 어깨를 붙잡고 턱 부근에서 숨을 터뜨리더니 가까운 곳에서 눈을 맞췄다.

“어떻게 해도 너랑은 잘 일 없다고 말한 것 같은데.”

세헌은 대답 대신 한 번 더 연기를 뱉었다. 그의 입가에서 새어 나온 흰 연기가 은재의 요요한 얼굴 위로 흩어졌다.

“네가 이러는 거 피곤해.”

“…….”

“날 걱정하는 거야, 아니면 만만하게 보는 거야.”

코앞에 다가온 은재를 올려다보던 세헌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 아직 네 친구냐?”

“임세헌.”

“그럼 걱정.”

“…….”

“걱정하는 거라고. 형질 있는 사람이 굳이 약 먹는 거 몸에 별로 안 좋다. 다른 알파라도 불러줄게.”

그러면서도 세헌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다가와 은재의 턱을 지그시 누르고 곧이어 뺨을 감싸려 할 무렵, 은재가 고개를 돌리며 단호하게 몸을 일으켰다.

약간의 권태가 묻은 시선이 절 올려다보는 알파에게 향했다.

“그런 거 필요 없어.”

“…….”

“이걸로 알파 접대는 충분해.”

그러곤 세헌의 입가에 물려있던 담배를 꺼내 짓밟고는 방을 박차고 나섰다. 홀로 남은 세헌은 깔깔해진 입 안에 술을 담으며 은재가 먹고 남긴 접시를 살폈다.

“새 모이만큼 먹었네.”

사실 은재는 워낙 낯을 가리고 쑥스러움이 많은 성격이라, 이 정도 먹은 거면 저를 꽤 많이 신뢰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괜히 잘 먹던 애를 들쑤셨나. 요즘 일도 많고 회장님 일로 피곤할 텐데.

세헌의 입에서 짧은 한숨 같은 것이 터졌다.

“난데.”

그는 뺨을 문지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거 남은 거 잘 포장해서 민 이사 집으로 좀 보내요. 많이 식은 건 다시 요리해 달라고 하고.”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깔끔한 슈트를 차려입은 직원들이 들어와 테이블 위에 올려진 것들을 다시 들고 나섰다. 세헌은 그 와중에 테이블에 남아 있는 은재의 잔을 노려보며 마저 잔을 비웠다.

“강 비서님. 최 박사님한테 연락 좀 넣어 주세요.”

“도련님 일이십니까?”

“아니요. 제 일입니다. 약이 없는 것 같아서요. 주기예요.”

“아, 예. 알겠습니다.”

강 비서는 더 이상 자세한 것을 묻지 않았다. 가림막을 올려 은재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한 뒤 곧장 저택으로 가겠다 말했다. 은재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순식간에 저택에 도착했다. 화려하고 높은 담장 사이에 자리한 철문을 지나 긴 정원을 지날 때쯤 은재가 천천히 눈을 떠올렸다.

“아이 집에 있나요.”

“그럴 겁니다.”

“그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라고 해 주세요. 지금은 보기가 좀 그렇네요. 술도 마셨고…….”

“바로 전하겠습니다.”

눈치 좋게 차는 그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강 비서가 전화를 끊고 나서야 느리게 속도를 올렸다.

평소보다 훨씬 더 느린 속도로 정원을 지나온 차는 커다란 대문 앞에서 멈췄다. 은재는 깊게 숨을 삼키며 다시 한번 시계를 확인했다. 머릿속으로 날짜를 가늠했다.

“급한 서류 있으면 제 방 앞에 놔두시고……. 그 외에는 들어오지 마세요.”

“…….”

“일주일 동안은 회사에 출근 못 할 것 같다는 말 전해 주시고요. 최 박사님 오시면 박사님만, 올려 보내 주세요.”

은재는 우성 오메가임에도 페로몬에 둔한 편이었다. 발현하자마자 알파인 민 회장의 곁에서 페로몬을 억누르고 억누르며, 웬만하면 약에 의지해 히트 사이클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정조 관념이 완고한 것은 아니었다. 형질을 가진 사람인 이상 그럴 순 없었다. 애인이 있을 땐 애인과 히트 사이클을 보냈다. 애인이 없으면 홀로 삼키는 게 당연했다. 다른 이들은 이런 시기를 함께하는 파트너를 만들곤 했지만 그건 내키지 않았다. 애인이 없으면 없는 대로 감내할 일이었다.

하도 문란하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굳이 이 시기를 달래기 위해 지나가는 알파를 붙잡고 다리를 벌리고 싶지 않았다. 민 회장의 정부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알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들킨다면 곧장 민 회장의 치부가 될 것을 알았다.

덕분에 금욕과 어울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로써 또 피해를 보는 건 은재였지만.

은재는 차에서 내리며 저도 모르게 태영의 방을 살폈다. 다행히 정 실장이 일을 잘 처리했는지, 창가에 붙어 있는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후우……. 더욱 뜨거워진 숨이 목에서부터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히트 사이클의 전조 증상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눈물점이 찍힌 눈꼬리가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뺨에 열이 오르고 숨이 은근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애써 그 열기를 억누른 은재는 재킷 단추를 풀며 급하게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빠르게 오르며 먼 곳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느리게 시선을 옮겼다.

“아이랑, 안 부딪치도록 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아이는 조용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다는 것을 까맣게 잊을 만큼 고요하게 사는 아이였다.

그렇지만 그 마음속에 어른에 대한, 보호자에 대한 갈망이 있을 것을 알기에 은재는 특별히 당부했다.

이런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었다. 발정이 무엇인지, 오메가와 알파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겠지만 보호자인 제가 굳이 그런 모습을 노출할 필요는 없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약 가져다드릴까요. 정 실장 말이 이전에 남은 약이 하나 있다고 하던데요.”

“……아, 그럼 부탁드릴게요. 제 침실에 있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은재는 나머지 계단을 뛰듯이 올랐다. 2층 복도 끝에 저와 민 회장이 같이 찍은 사진이 크게 붙어 있었지만 그쪽을 돌아보지 않고 다급히 걸어 방으로 향했다.

“이사님. 강 비서입니다. 문 앞에 약과 물 놓고 가겠습니다.”

강 비서는 은재가 침대에 걸터앉기가 무섭게 문을 노크한 뒤 다시 2층을 내려갔다. 한참 뒤에야 은재는 문을 열었다. 약병과 물을 챙겨 방 안으로 들어서며 매고 있던 타이를 풀어냈다.

물과 약을 한꺼번에 삼킨 뒤 달려온 것처럼 벅차게 차오른 숨을 뱉었다. 문 쪽에 놓인 거울에 얼굴이 비쳤다.

발정하는 오메가의 얼굴. 은재는 묵묵히 눈을 감았다.

* * *

“보통 음식을 먹는 순서가 정해져 있습니다. 파티 같은 경우엔 제외가 되겠지만, 정찬과 같은 식사 자리에 초대되는 경우엔 그 순서를 따르시는 게 좋습니다. 보통의 순서로는…….”

태영은 열심히 공부했다. 은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또 은재와 보내는 시간을 따내기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주로 저택을 관리하는 것 같아 보이는 정 실장은 다방면에 지식이 많은지, 식사 방법뿐만 아니라 상대를 에스코트하는 방법, 초대받았을 때의 예의, 파티에서 행동하는 법과 차에 오르는 방법 그리고 가벼운 승마, 골프에 대한 지식도 알려 주었다. 음악을 감상하는 방법과 오페라 배우를 만났을 때의 예의도 배웠다. 모두 이곳에서 생활하기 위한 지식이었다.

또, 민은재라는 사람과 민 회장이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그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곁에 있으려면 저도 부족함 없이 배운 것들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한번 해 보시죠.”

친절하지만 엄격한 선생인 정 실장은 화려하게 식탁을 차려놓고 태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영은 배웠던 것들을 떠올리며 순서에 맞춰 식사를 시작했다. 팔이 너무 나가지 않게, 식기는 바깥쪽에 있는 것부터, 행동은 과하거나 빠르지 않게 삼가고 앙트레가 끝이 나면 그때 사용했던 식기는 다시 건드리지 않고…….

식사 예절은 코스로 나올 때, 한 번에 정찬으로 차려졌을 때, 또 파티 같은 곳에 갔을 때가 모두 달랐다.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닌 어중간한 시간대에 갖는 식사일 때도 물론 다른 예의를 갖춰야 했다. 파티를 주최하는 사람일 때와 초대받았을 때의 예의가 또 달랐다. 파티의 규모와 형식에 따라 행동하는 법이 모두 구분되어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식사 마치시고 차를 드릴까요?”

“네.”

정 실장은 태영이 일주일간의 가르침을 모두 잘 배워 사용하는 것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매일같이 연습을 했으니 더 이상 입에 맞지 않는 차를 마셔 가며 티타임에 갖춰야 할 예의를 되짚을 필요는 없는데도, 태영은 또다시 연습하겠다 말했다.

내일이면 은재와 약속한 일주일이었다. 요즘은 어쩐지 대문을 통과해 지나오는 차들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일이면 은재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태영은 기뻤다. 그에게 보여 주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 그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절 데려오길 잘했다고 믿게 하고 싶었고, 제 보호자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다이닝 룸에서 준비할까요?”

“응접실로 갈게요.”

정 실장은 태영이 식사를 마치자 자리를 정리해 주며 물었다. 태영은 의자에서 뛰어내려 응접실을 향해 걸으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옷은 너무 크거나 작지 않게. 소매 길이를 확인해야 하고,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는 커프스단추를 꼭 확인해야 하고. 걸을 때 턱을 들거나, 너무 당기지 않은 몸짓으로. 어깨에 힘을 주어 올리지 않고 끌어 내려 무릎과 손이…….

공부를 좋아하거나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태영은 달달 입에 붙은 것을 홀로 읊조리며 응접실로 향했다. 그리고 정 실장에게 배웠던 대로 제가 앉아야 할 의자에 앉아 다리가 너무 달랑거리지 않게 모았다.

도대체 무슨 맛인지 모르겠지만 찻주전자를 배운 대로 들고 따랐다. 이사님은 안 계시지만 계시다고 상상하며 두 잔을 따르고 오늘은 이사님이 안 계시니 몰래 우유와 설탕을 녹였다.

일주일 내내 참고 쓴 차를 마시니 어제 정 실장이 슬쩍 언질해 준 것이었다. 그렇게 만든 달콤한 차를 한 입 머금고서, 태영은 다시 다리가 달랑거리려는 것을 꾹 참고 ‘여유롭게, 여유롭게’를 중얼거리며 차를 마셨다.

며칠 전에야 자세히 둘러보게 된 응접실 내부를 다시 꼼꼼히 살피며 발가락을 꾹 눌렀다.

“도련님. 함께 나온 디저트도 드셔도 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태영은 포크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매일 올라온 케이크와 쿠키들이 말라 쓰레기가 되어 갔지만, 꿋꿋이 그 결심만은 지켰다.

정 실장은 그 속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 두 번 권하지는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일 저녁에 이사님과 함께 식사하시는 걸로 준비해 두겠습니다.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 주시고요.”

한 모금 더 차를 마신 태영은 소파에서 내려오며 떨리는 마음을 눌렀다. 내일 드디어 이사님께 보여 드리는 날이었다. 일주일 동안 잘 배웠다고. 언제 써먹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에스코트를 하고, 파티에서 춤을 추는 법도 배웠다고 보여 드리고 싶었다.

태영은 절로 방방 뛰어오르는 걸음을 누르며 계단을 밟았다. 긴 계단을 천천히 밟아 오르며 복도 끝에 보이는 사진 앞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사진 속 민 회장과 은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태영은 매일같이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태영의…… 가족이었다. 비록 저는 민 회장처럼, 은재처럼 민 씨가 되지는 않았지만 같은 테두리 안에 있는 가족이었다. 저에게 이런 신기하고 이상한 규칙들을 배우게 하는 것도 그 테두리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봬요. 회장님.”

민 회장은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언젠가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은 편찮으시다고 들었으니까.

“건강하세요.”

대답은 없지만, 이 행위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했다.

“이사님은…… 내일 꼭 봬요.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태영은 허리 숙여 사진에 인사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습관처럼 창가에 붙어 차가 들어오는지 확인한 뒤 정 실장에게 배운 것들을 적어 놓은 노트를 보다 잠에 들었다.

드디어 은재를 만날 수 있는 날이었다.

* * *

“죄송합니다, 도련님. 오늘은 아무래도 이사님을 뵐 수 없으실 것 같아요.”

“……왜요?”

아침부터 태영은 신이 나 계단을 뛰어 내려오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저에게 허락된 자유로운 공간은 방뿐이었다. 계단에서 뛴다고 누가 혼을 내지는 않겠지만 예의를 지켜야 했다. 작은 것이라도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 쿵쿵 발을 구른 뒤 점잖은 척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하지만 정 실장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은재를 보는 게 어렵다 말해 주었다.

“사실 이번 주 내내 이사님께서 몸이 안 좋으셨어요. 그래서 집에서 쉬셨는데 오늘도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

“……아.”

자초지종을 들은 태영은 제가 방방 뛰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난처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사님 방도 같은 층인데…….

“많이 아프신 건가요? 출근을 못 하실 정도면…… 어디가 아프시대요?”

“이제 거의 다 나아지셔서 오늘 도련님과 약속을 지키실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는데, 하루를 더 쉬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러시네요. 큰일은 아니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래서 오가는 차가 안 보였던 건가. 태영은 가라앉는 기분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 실장은 아침 식사를 내오겠다며 부엌 안쪽으로 사라졌다. 태영은 괜히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계단 쪽을 보며 숨을 삼켰다.

“이사님 식사는 하시나요? 죽 같은 거요.”

“네. 올려다 드리고 있어요.”

부엌에서 일하는 다른 사용인에게 태영이 물었다.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그럼 오늘은 가져다드릴게요.”

“죄송합니다, 도련님. 도련님께서 일을 하신 걸 아시면 나중에 이사님께서 화내실 거예요.”

“아……. 네. 알겠습니다.”

은재가 화를 내는 건 원치 않았다. 아직 은재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지만, 상상도 되지 않았지만. 그 상상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태영 몫의 아침상은 오늘도 개의치 않고 차려졌다. 태영은 이제 조금 몸에 익은 순서와 예의를 놓치지 않고 갖추며 식사를 했다.

변함없이 고요한 식탁이었으나 어제 저녁과 달리 어딘가 가라앉은 기운이 다이닝 룸에 감돌았다.

태영은 저택에 온 이래 처음으로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럴 기분도 아니었고, 왠지 소화도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은재가 아파 일주일째 누워 있다는데 저 혼자 잘 먹고 다니는 게 양심에 찔렸다. 유일한 가족이 그러고 있는데 저만 잘 먹을 순 없었다.

“도련님, 정말 식사 안 하실 건가요?”

“네. 저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배가 불러서요.”

그래도 은재의 사람들을 신경 쓰이게 할 수 없어 태영은 나름대로 괜찮은 척했지만, 정 실장의 눈에는 시무룩한 어린애의 표정이 훤히 다 보였다. 그래서 다시 조심스레 방문을 두드려 물었는데도 태영은 여전히 어색한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똑똑,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태영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저녁 안 먹는다고 했다면서.”

은재였다.

“속이 안 좋니?”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생각지 못한 이의 등장에 태영은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두 눈을 비볐다. 무심한 음성을 들으면서도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럼 내려와.”

“……이사님 괜찮으세요?”

은재는 무슨 소리냐는 듯 이마를 짧게 구겼다. 그러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이제 막 자리를 털고 일어선 듯, 날연하고 권태로운 기운이 그 몸짓에 가득 묻어 있었다.

“공부가 부족한가…… 아니면 시간이 부족한가.”

“…….”

“일주일 더 필요하니?”

“아, 아니요. 괜찮아요. 내려갈게요.”

“그래.”

대답이 나오자마자 은재는 문을 닫고 사라졌다. 홀로 방에 남은 태영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아침처럼 성급하게 계단을 달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걷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지 않도록 걸어 1층으로 내려오니, 깔끔한 셔츠를 입고 있는 은재가 보였다. 희미하게 그의 언저리에 머무르던 권태로운 기운도 어느새 가셔 있었다.

그 모습에 태영은 더욱 발이 빨라지려는 것을 혀를 씹으며 참았다.

“…….”

“…….”

은재는 태영을 기다렸는지, 태영이 곁에 서자 다시 걸음을 옮겼다. 태영은 그를 올려다보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속도를 맞췄다.

묘한 긴장감이 다이닝 룸에 번졌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배워 정 실장에게도 인정을 받았지만, 막상 은재의 앞에 서니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벌써부터 뭐가 뭐인지 헷갈리고 손이 떨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은재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컨디션이 다 돌아오지 않은 건 은재도 마찬가지였다. 은재의 히트 사이클은 유난히 길었다. 일주일을 꼬박 채우는 편이었다. 그래도 7일차 정도가 되면 많이 증상이 가시는데, 나른한 기운은 아직 남아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그래서 오늘도 태영과의 약속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을 뻔했다. 아이는 미리 단념하고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했지만…….

“식사하자.”

“네.”

상 아래에서 손을 한번 쥐었다 편 태영은 은재를 잠시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올렸다. 순서에 맞추어서……. 머리는 복잡하고, 또 일주일 만에 만난 제 유일한 보호자를 보니 더 잘하고 싶었지만 어설프게나마 움직였다.

은재와 속도를 맞추었고, 소리가 나지 않게 식기를 움직였다. 요리에 맞는 식기를 골라 잘 사용했고, 씹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직도 벅찬 호흡이 가슴 안에 가득 차 숨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제법 의젓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딱 보아도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려 한 흔적이 묻어났다. 아직 완전히 몸에 배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긴장을 한 것인지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일주일 만에 배운 것치고는 괜찮았다.

태영의 성격이 아주 잘 보이는 순간이었다.

역시 영리한 아이. 제게 떨어진 몫을 어떻게든 해내는 아이.

결국엔 해내고 마는 아이.

지독하게 이런 것도 절 닮았다고, 은재는 생각했다. 혹은 오래 결핍되었던 아이들의 특징이거나.

희미한 열이 남은 몸속에 차가운 물을 들이부으며 은재가 입을 열었다.

“정 실장님.”

다른 사용인들과 함께 서 있던 정 실장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태영이 잘 배웠나요.”

“네, 이사님. 일주일 만에 다 습득하셔서 웬만한 건 문제없이 하십니다.”

정 실장을 호출했을 때부터 더욱 긴장하고 있던 태영은 은재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에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삼켰다. 방금 전 정 실장이 칭찬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

그 소리에 은재는 가만가만 태영을 바라보았다.

태영은 절 향한 그의 시선을 피하고도, 또 마주하고도 싶었다. 그래서 손톱 모양이 손바닥에 새겨질 정도로 손을 쥐며, 발끝을 꾹 말며 목에 힘을 주었다.

느릿하게 은재의 손이 상 위로 올라왔다.

절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움직였다. 늘씬한 손이 컵 주변으로 향했다. 그 손을 컵을 쥘 것처럼 하다 이내…….

“……이런.”

아찔한 파열음과 함께 은재의 손이 닿았던 컵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의도적으로 컵을 밀어 깨뜨린 것이었다. 태영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본능적으로 컵과 물을 닦기 위해 바닥으로 내려가 엉망이 된 주변을 살폈다.

“…….”

“…….”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휴지와 걸레를 찾으며 시선을 돌리던 태영은 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은재의 시선을 발견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흔들리지도 않고 어둑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제 뺨에 붙어 있었다.

이건, 시험이었다.

제 행동을 보려 일부러 컵을 민 것이었다.

짧은 고민 끝에 태영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깨어진 컵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흐른 물이 은재의 허벅지를 적시고 있었지만 태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찔움찔 몸이 튀어나가 손으로라도 닦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여기.”

“네, 이사님.”

“닦으세요.”

“금방 치우겠습니다.”

한참 그런 태영을 지켜본 후에야 은재가 사용인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기다렸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이들이 컵을 치우고 바닥을 닦았다. 은재의 젖은 허벅지 또한 닦아내며 남자의 발 아래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태영은 소리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많은 사람들이 허리를 숙이고 몸을 숙이며 발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정작 컵을 밀어 깨트린 은재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고고하게 앉아 저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런 것은 낯설었다. 그가 저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고, 큰 회사를 이끌고 있다는 것도 알지만 이렇게 사람 위에 군림하는 듯한 모습은 이상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제 위치가 저 바닥이었기에 그랬다. 저는 이 집에 사용인으로도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바닥이었다. 다른 이들의 발 아래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는 것이 저의 처지였다.

이런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이 기분을 모르겠지만.

“아직 덜 배운 것 같은데.”

“…….”

“시간이 더 필요하려나.”

시간이 걸린다고 이런 것을 배울 수 있을까. 태영은 차마 표현 못 할 기분을 느끼며 깔끔하게 물이 사라진 바닥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여전했다. 유일한 보호자를 만났다는 안도감은 생각보다 더 짙은 것이었다. 결핍되어 살아온 인생에 다시 만날지 모르는 보호자의 도덕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에 저도 소속되어 있다면야.

그것을 제 보호자가 원한다면…….

“그래도 일주일 동안 고생했어.”

그렇다면 이 불편한 찔림은 외면할 수 있었다. 가슴 속에 송곳을 하나 심어 놓은 것처럼 불시에 찔리는 듯한 이 기분은 모른 척할 수 있었다.

태영은 자리를 정리하려는 듯한 은재를 보며 입술을 꽉 씹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저도 컵을 밀어 깨뜨릴 순 없겠지만, 그의 행위가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서는 불편하게 남아 있지만. 저도 해야 했다.

목 아래에서 뜨겁게 치솟는 것을 그렇게 태영은 억눌렀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

“그럼 다음에…….”

“이사님.”

“…….”

“저 갖고 싶은 게 있어요.”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은재는 찬찬히 태영을 응시했다. 아직도 두 눈 가득 혼란을 담고 있는 태영은 억지로 그것들을 누르며 은재를 직시했다.

“말해 봐.”

“일기장이…… 필요해요.”

“일기장?”

이미 태영의 방에 노트는 많았다.

“이사님이 고르신 걸로요. 이사님이 사다 주세요.”

“…….”

“일주일 동안 열심히 연습했어요. 이사님이 하라고 하셔서요. 그리고 대가는 그 후에 말씀하라고 하셨잖아요. 전 이게 필요해요.”

그러나 태영은 다른 조건들을 덧붙였다. 희미하게 입술을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대로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만히 태영을 바라보던 은재는 뒤늦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상을 받을 정도는 되었다. 이제 저택에 온 지 2주를 조금 넘긴 아이가 그런 상황에서 정답을 말하는 건 어려울 테니. 애초부터 태영이 그 상황에서 적절한 제 위치를 찾아 정답을 말할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선한 심성을 가진 소년이, 제 눈치를 살피며 엉거주춤 다시 의자에 앉아 사용인들이 일하는 지켜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이사님.”

다시금 마른침을 크게 삼킨 태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르쳐 주세요. 저 정 실장님한테 열심히 배웠는데…… 이런 건 배우지 못했어요. 이사님이 이런 걸 배우기 원하신다면 직접 알려 주세요.”

“…….”

“그럼…… 또 열심히 하겠습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태영은 나름대로 문제를 풀려 했다. 정답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내고 있었다.

“저도 컵을 깨야하면, 깰게요.”

나직이 숨을 뱉은 은재는 턱을 괴며 태영을 응시했다.

“이미 일기장으로 대가를 주기로 한 것 같은데, 내가 네 말을 들어줘야 하는 이유는?”

“전 컵을 깨고 싶지 않아요. 깨진 컵을 줍고, 물을 닦고 싶어요. 그래도 이사님이 원하시면 할게요. 가르쳐 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

“저도 깨야 하는지, 아니면 오늘처럼 지켜만 봐도 되는지 알려 주세요.”

저와 닮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엇비슷한 시간을 시설에서 보냈고, 갑작스레 저택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제가 처음 저택에 왔을 때보다 더 강했다. 눈치만 살피고 모든 행동을 삼가던 저와 달리, 영리하게 굴었다. 차마 컵을 깨고 사람을 부리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제 배포를 보여 주려 나서고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굴어도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만 그랬다. 강 비서와 최 박사, 정 실장에게는 늘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그 어린 눈으로 보았을 때 저택의 꼭대기에 있는 저에게만 제 강단을 내보이고 있었다. 저도 무언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살짝 입술을 떨면서도 제 원하는 바를 요구했다. 제 위치를 체감하며 거래를 하고 나섰다.

은재는 조금 더 옅게 입매를 당겼다. 아이는 충분히 민 회장의 뒤를 이을 수 있었다. 그럴 배포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현명하지만 영악하지는 않은 아이였다. 이미 저택의 질서를 습득해 체화시키고 있었다.

“그래.”

“…….”

“그럼 다음 주에 또 보자.”

꽤 흔쾌히 나온 대답에 태영의 눈이 놀라 크게 떠졌다. 감사합니다……. 당돌하게 던진 요청과 달리 수줍은 감사 인사가 뒤따랐다. 은재는 정 실장에게 커피를 올려 달라고 부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생했어.”

한 번 더 태영을 돌아보며 다이닝 룸을 나섰다. 태영은 그 자리에 서 멀어지는 은재를 응시했다.

“……아프지 마세요, 이사님.”

작은 소리였지만, 은재는 뒤를 돌아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은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태영은 휴우…… 크게 숨을 고르며 쿵쿵 뛰는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조금 전 제가 벌인 행동에 뒤늦게 열이 올랐다. 목과 얼굴이 모두 시뻘게져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아! 태영이 뒤늦게 바닥으로 주저앉으며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지를 살폈다. 제가 앉았던 의자 다리를 손으로 훔치다 정 실장의 제재를 받고나서야 어설프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저, 실장님.”

“네, 도련님.”

“정원에 나가 봐도 되나요?”

“추우실 텐데, 옷을 챙겨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챙겨서 나갈게요.”

2주가 지나는 동안 태영은 정원에 제대로 나가 보지 못했다. 허락을 받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나갈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이제는, 인정을 받은 오늘은 나가도 되지 않을까. 태영은 소리 죽여 계단을 오른 뒤 옷장에서 재킷 하나를 꺼내 밖으로 나섰다.

더 깊은 가을이 되어 가고 있는 정원은 2주일 전보다 푸릇푸릇한 기운은 많이 가셨지만, 태영은 뭐든 좋았다. 더욱 붉어진 정원을 보는 것도 운치 있었다. 싱그러움 대신 이 저택과 잘 어울리는 붉은 분위기를 입은 정원을 걷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정원에서도 지켜야 할 규칙과 예의가 있는 것을 알아, 최대한 기운을 억누르다 꽤 많이 걸어갔을 무렵에야 마구 원하는 만큼 달렸다.

바스락거리며 이파리가 밟히고, 조용히 잔디가 눌리는 감각을 모두 기억 속에 새겨 놓으며 빠듯하게 숨이 차오를 때까지 속도를 높여 달렸다.

그렇게 몇 바퀴를 빙글빙글 돈 후에야 저택을 돌아보았다.

“…….”

제 귀에도 벅찬 숨과 과한 심장 소리가 울렸다. 이렇게 숨을 내쉬는 것도 이 저택 안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것 같지만…….

2주일 넘게 살았지만 믿기지 않는 집. 아직도 가 보지 못한 곳이 많지만 굳이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되는 곳.

그 벅차고 거대한 집을 보며 태영이 크게 숨을 삼켰다. 어둠 사이를 가르는 조명 때문인지 저택은 훨씬 더 크고 웅장해 보였다. 저택의 입구 앞에 양쪽으로 드리워진 나무가 더욱 깊어지는 계절 덕분에 이파리를 벗고 가지를 형형하게 드러냈다. 쉬이 타인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제 위용을 가득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이제 진정으로 저의 집이었다.

저는 그 무성한 가지 사이를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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