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팅 웨딩-60화 (60/60)

60화

외전

일주일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앞으로 일주일 남은 시점에서, 여주는 어느새 이곳이 편해졌다.

여유로운 일상을 만끽한다는 것이 이런 걸까?

지날 며칠간, 아침은 침대 위에서 내려오지 못해 자동 생략됐다.

그 대신 점심을 후하게 먹었다.

호텔 측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그야말로 화려했다.

뷔페식은 물론이고, 현장에서 조리해주는 그릴과 바비큐가 향시 준비돼 있었다.

세계 각국의 디저트와 못 보던 과일들까지 있어서 눈을 즐겁게 했다.

식사를 마쳤을 때쯤, 여주는 태오에게 일정을 확인했다.

“태오 씨는 오후에 서핑한댔죠?”

“여주 너도 이참에 같이 배워보는 게 어때?”

“…나중에요. 지금은 체력이 너무 떨어졌어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주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정말이지, 그는 놀라울 정도로 엄청난 체력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그녀처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저렇게 팔팔했다.

지난 며칠간 그는 여러 외부 활동을 즐기기도 했다.

태오가 비치볼을 하거나 보트를 타면, 여주는 주변에서 구경을 했다.

“그럼 오늘도 근처에서 나 구경할거야?”

“네.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도 꽤 힘들어요. 왜 그런지는 태오 씨가 이제 더 잘 알겠지만요.”

그에게 밤새 괴롭힘당한 몸의 후유증은 상당했다.

뻣뻣이 허리를 세우고 바른 자세로 앉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최근에 알게 됐다.

그래도 숙소에 누워만 있는 것보다는 이곳의 활달한 분위기에 젖어 드는 게 더 좋았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아 떠나려 하니, 여주는 벌써부터 아쉬워지려 했다.

“정말이지, 여주 넌 너무 체력이 약하다니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보다는 태오 씨가 너무 강한거죠. 매일 밤마다 힘쓰는 건 태오 씨인데.”

“듣고 보니 그건 그렇네.”

전혀 농담조가 아닌 그녀의 말에도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이제 이 정도 수위의 대화는 두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주는 그의 웃음 소리가 몇 번을 들어도 꽤 근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조각 남은 열대 과일을 집어 먹었다.

3시간 정도 낮잠을 잔 뒤, 여주는 숙소 밖으로 나갔다.

석양이 지는 바다를 배경으로 태오가 물 만난 고기라도 된 듯, 서핑 보드 위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게 어떻게 가능한거지?’

며칠 전, 여주도 호기심으로 그의 옆에서 무게 중심을 잡아보려고 시도를 해봤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도로만 그쳐야 했다.

그 무게 중심이란 걸 전혀 잡을 수가 없었다.

아예 물 위에서 두 발로 반듯하게 서는 거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에 반해, 그녀의 남편은 주변 구경꾼들까지 몰려들 정도로 스킬을 뽐내고 있었다.

잠시 구경하면서 박수 세례에 동참하던 여주는 이내 따가운 햇빛을 피해 파라솔 아래로 들어갔다.

간단한 스낵과 음료가 준비돼 있었고, 여주는 그중 레몬 셔벗을 집어들었다.

상콤하고 시원한 맛이었지만, 이상하게 쓴 맛이 느껴졌다.

여주는 하는 수 없이 먹다 말고, 물을 대신 마시기로 했다.

근처를 지나가던 외국인들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여주도 똑같이 인사를 건네 줄만큼 익숙해졌다.

‘이런 세상이 있는 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

여주는 원형 썬베드에 편히 드러누워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는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몰랐으니, 와 볼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다.

유명 휴양지답게, 이곳은 머무는 사람들 모두 여유롭고 편안했다.

말뜻은 몰라도, 제각각 쏟아내는 언어에서 느껴지는 어조가 그랬다.

보이는 얼굴들은 하나같이 조급함이 없었고, 웃음기가 가득했다.

이 놀라운 곳의 영향인 걸까?

오늘 아침, 여주는 욕실 거울을 보다 깜짝 놀랐었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늘 긴장이 서려 있던 눈매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날부터인지 초조함에 입술을 마구 깨물지도 않았다.

무언가로부터 쫓긴다는 느낌에서 벗어난 덕분이었다.

‘늘 열심히 살아야만 하는 줄 알았지.’

그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었다.

치열하게만 살아야, 잘 사는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내 몸 하나 고생하면, 나 혼자 조금 불편함을 감수하면 주변 사람들이 언젠가는 그 수고로움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그런 인생은 그녀가 원했던 게 아니었다.

지금의 이 안일한 평화야말로 그녀가 늘 갖고 싶던 것이었다.

그때, 그녀의 발치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온몸으로 열기를 한껏 발산하며 나타난 건 태오였다.

“여주야. 나 서핑하는 거, 잘 보고 있었지?”

“왔어요? 계속 보고 있었는데, 태오 씨 정말 잘 타던데요.”

“그래? 그럼 나 번호 달라던 여자들도 봤겠네.”

“진짜요? 어떤 여자들이었는데요?”

여주는 잠깐 생각하는 사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자 궁금해졌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여자들이면 그에게 직접 번호를 달라고 했을까?

여기 와서 그에게 눈독을 들이던 외국인들의 적극적이던 눈빛은 늘 따라다녔다.

그런 여주에게, 오히려 아쉬워하는 건 남태오 쪽이었다.

“뭐야. 나 질투 안해 줘?”

“으음. 저는 질투 안 해요. 태오 씨 믿으니까.”

“그렇다면야 고맙지만, 그래도 가끔은 질투를 좀 해 줘.”

“네. 태오 씨가 원하면 노력해 볼게요.”

여주는 사실 질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태오가 말은 저렇게 해도, 접근해오던 여자들한테 눈길 한 번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을 서운해하더니, 이제는 저렇게 질투해 달라고 먼저 요구하고 있었다.

“아니, 노력 말고 나중에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면 그때 해 줘.”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맞닿아오는 살결에서 물방울이 조금 튀었고, 여주는 그 시원한 감촉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잠시 그가 훤히 드러낸 상반신을 물끄러미 보았다.

깎아놓은 조각상처럼 매끄러워 보이는 그를 보고 있으면 경건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도 잠시, 여주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으음. 저도 그냥 비키니 입고 있을까요? 여기서는 다들 그러나 본데.”

주변에 있던 다른 여자들을 봐도 하나같이 수영복이나 짧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에 비해 그녀만 긴팔 셔츠로 너무 꽁꽁 싸매고 있는 것 같아, 떠보듯 태오를 올려다봤다.

“아니, 안 돼. 절대, 벗지 마.”

셔츠를 벗는 시늉을 하자마자, 그가 단호하게 여주를 제지했다.

“태오 씨는 아예 벗고 있으면서, 저는 그러지 말라고요?”

“나도 가릴게. 그럼 됐지?”

농담이 아니라는 듯, 그가 바로 벗어뒀던 겉옷을 가져와 걸쳤다.

그 다음, 그는 여주더러 그만 방으로 돌아가서 푹 쉬자고 했다.

사실, 그녀에게는 비밀이었지만 아까 그에게 번호를 따던 여자들 말고도, 남자들도 말을 걸었었다.

그들은 혹시 여동생과 함께 여행을 온 것이냐며 말 좀 붙여도 되겠냐는 식으로 허락을 구했다.

어이가 없었던 나머지, 그 자리에서 오해를 풀어줬지만 그는 바로 여주가 있는 자리로 부리나케 달려온 참이었다.

물론 여주는 태평하게 앉아 있었지만 말이다.

‘나 참. 아무리 내 아내가 어리다지만 말이지.’

설마 남매 관계라고 오해를 받을 줄은 몰랐다.

영문도 모른 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 여주를 서둘러 데리고 돌아가는 남태오였다.

* * *

한국으로 돌아오기 하루 전, 길거리를 함께 걷자는 여주의 말대로 두 사람은 저녁 식사가 끝나고 산책했다.

시장이 열리는 날이라, 여기저기 구경할 것들이 많았다.

상인들과 조금 떨어져서 조용한 골목길 쪽에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아계셨다.

앞에는 타로 카드들을 늘어놓고 있었는데, 여주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저기, 태오 씨. 잠깐만요.”

“왜? 그쪽은 좀 아닌 것 같은데.”

태오는 건너편의 캐리커처를 그려주던 젊은 청년을 보고 있었다.

여주는 미간을 찌푸린 그의 오해를 풀어 주려고, 웃으면서 팔을 끌어당겼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요.”

그제야 여주도 캐리커처를 그려주던 젊은 청년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쪽에는 볼 일이 없었다.

그보다는 할머니와 타로 카드들을 보는데 무언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지나쳐버린다면 후회가 될 것 같았다.

여주가 할머니 앞으로 가서 서자, 타로 카드를 뽑아보라고 손짓했다.

“5장을 골라 보라는데.”

태오가 통역을 해주고, 여주는 눈치껏 고민하다가 5장을 뽑았다.

조심스레 건네드리자, 빠르게 낚아챈 할머니가 한참 쳐다보면서 설명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하네. 지금이 여주 너한테는 두 번째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면서. 어렵게 잡은 만큼 그 기회의 끈을 놓치지 말라고 조언을 해주고 싶대. 흐음. 나도 한 번 뽑아 볼까?”

“네. 저는 태오 씨 얘기도 궁금해요.”

여주는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마치 저 할머니는 그녀의 비밀을 아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덕분에 신기하면서도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틀린 내용은 없었고, 어찌됐든 조언을 얻은 셈이니 여주는 팁까지 얹어 돈을 건넸다.

잠시 후, 태오가 자신이 들은 내용을 말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한테는 축하 인사를 전하네? 곧 좋은 소식이 올 거라고 축배를 높이 들 준비를 하라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면 안 되나? …손님? 귀한 손님이라는데.”

“…손님이요?”

문득 여주는 아까 쓴 맛이 느껴져 먹지 못했던 레몬 셔벗을 떠올렸다.

좋은 소식이라면, 귀한 손님이라면.

너무 앞서가는 걸지는 몰라도, 어쩌면 아이가 생긴 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 준비할 때부터 지금까지 소식이 없네.’

그동안 경황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생리 주기가 한참 지나 있었다.

고민 끝에 여주는 돌아가는 길, 그에게 임신테스트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자 태오는 당장 사러 가자며 그녀보다 더욱 서둘렀다.

그들은 그 길로 두 손을 꼭 잡고 상점으로 달려갔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번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