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외전
식이 끝나고, 예정대로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떠났다.
여주는 몰디브행 비행기 안에서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정말로 정신없는 결혼식이었다.
“많이 피곤하지? 나한테 기대서 잠깐 눈 좀 감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내주는 남태오도 피곤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고마워요. 태오 씨.”
여주는 그의 넓은 어깨에 편히 몸을 기울였다.
드디어 둘만 남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의 친가 식구들이 그렇게 많을 줄 누가 알았을까?
한 달 후 태희의 결혼식이 또 금방이었지만,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남 회장의 머나먼 친척 어른들까지 다 인사를 다니느라 여주는 지금,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었다.
발가락도 쑤시고, 종아리도 탱탱 부은 것이 느껴졌다.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았다.
처음으로 뵙는 집안 어른들 앞에서 긴장을 한 탓인지, 신경도 꽤 곤두섰었다
물론, 반가운 얼굴들도 많았다.
태희랑 동구, 유해라 대신 참석했던 남편과 아들 지유도 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 회장이 기뻐하던 얼굴까지.
여주는 기념 사진을 찍을 때부터 이미 진이 빠져 있었다.
그녀의 가족이 없었기에 그나마 그 정도로 끝난 것이었다.
‘근데 그 분은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계셨지?’
객석에 있던 박 회장과 잠깐 눈이 마주쳤었다.
그는 이미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다가 그녀를 보더니,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가 딸을 시집보내는 신부 아버지인 줄 오해할 정도로, 박 회장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고 끝내 식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웨딩카에 오를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았다.
특히 남 회장의 “허니문 베이비 꼭 만들어와라!”라는 덕담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평생 살면서 받아야 할 축복을 이번 기회에 다 받은 것 같았다.
남태오는 비행이 처음이고, 추위를 잘 타는 여주를 위해 두꺼운 담요와 수면 안대를 챙겨주었다.
“식사 시간에 깨워 줄게. 일단 자.”
“네. 태오 씨도 수고했어요. 잘 자요.”
“수고는. 우리 결혼식인데.”
그의 말대로 여행에 대한 설렘은 잠시 접어두고, 일단 잠부터 자기로 했다.
두 사람을 태운 비행기는 안전하게 도착지를 향해 날아갔다.
* * *
몰디브에 도착해 예약해둔 곳으로 가는 전용 요트를 탔다.
해 질 녘 노을을 감상하는 것도 잠깐, 객실에 짐을 정리하고 나자, 저녁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단잠을 잔 두 사람은 체력을 회복했다.
“저녁 식사 전에 한 바퀴 가볍게 돌아볼까?”
“그래요. 좋은 생각이에요.”
남태오의 손을 잡고 여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직원이 영어로 말한 것 중 알아들은 것은 ‘럭셔리 풀빌라’였다.
자연주의의 라틴풍과 초록 식물들, 그리고 나무 목재의 향이 기분 좋게 풍겼다.
일출과 석양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테라스는 훌륭했다.
“태오 씨는 언제부터 영어를 그렇게 잘했어요?”
“나는 어릴 때부터 후계자 경영 수업을 받았으니까.”
“…정말 대단하네요.”
아까 체크인을 능숙하게 영어로 하면서, 가볍게 농담까지 주고받던 남태오에게 그녀는 또 한번 반하고 말았다.
그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4개 국어 능력자라는 것이었다.
여주는 한국에 돌아가면 영어 공부를 하기로 다짐했다.
‘전생대로라면 외국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해야 하니까 미리 준비해 두자.’
이번 생에서는 시상식에 참석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실제로 보니까 어때, 마음에 들어?”
두 사람 모두 각자 일이 바빴기에 호텔 예약 과정이 쉽지 않았다.
여주가 사진만 보고 고른 곳을 남태오는 바로 예약했다.
“네. 저, 엄청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여주는 실물에 더 감탄하는 중이었다.
5성급 호텔이라더니, 객실마다 개인 풀이 있었다.
테라스에서는 빌라와 해변이 이어지는 바다까지, 그야말로 에메랄드 빛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여주의 손가락에서 비슷한 빛깔이 뿜어져 나왔다.
“여주야, 그 반지도 마음에 드는거지?”
“그럼요. 볼수록 너무 예뻐요.”
목걸이는 여행지에서 끼기에 너무 화려했다.
대신 태오는 여주가 여행지에서 낄 에메랄드 반지를 새롭게 구매해뒀다.
지난번에 걸어준 목걸이와 세트였다.
그는 휴양하는 동안 손가락에 꼭 끼고 다니라고 당부했다.
그래야 유부녀인줄 알고 이상한 놈들이 접근을 하지 않는다나?
잠깐 밖으로 나가보자, 하얀 모래사장이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꼭 밤하늘의 별빛들이 조각조각 떨어져 내린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여주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태오 씨, 지구상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여기, 아침에 오면 더 예쁜데. 여주 너처럼.”
그가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바닷바람이 혹시라도 얇은 옷차림의 그녀에게 닿을까 봐, 제 체온으로 감쌌다.
여주의 관심은 온통 눈앞의 풍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생기가 돌아 처음으로 제 나이 또래처럼 보였다.
남태오는 바다보다 여주의 얼굴에 푹 빠져버렸다.
“정말요? 이거보다 더 예쁠 수가 있어요?”
“원하면 아침에도 한 번 와. 근데 내일은 안 되겠다.”
“왜요?”
“우리 미션, 벌써 잊었어?”
허니문 베이비, 남태오가 속삭이더니 그녀에게 입술을 쪽 맞췄다.
한동안 농밀하게 서로를 탐닉하던 두 사람은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빌라로 돌아갔다.
“아, 안녕, 하세요. 식사는, 언제, 지금 하십니까?”
방으로 식사를 가져다준 직원이 어눌한 발음으로 한국말을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와인과 과일 바구니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영어로 친절하게 설명하는 그에게 남태오가 유창한 발음으로 답을 했다.
“허니문 기념용 스파클링 와인을 준비했다는데.”
여주는 감사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직원이 이번에는 여주의 손가락을 가리키면서 무어라고 말했다.
감탄하는 얼굴이었는데, 여주는 자연스레 남태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말문이 막히게 신부님이 아름답다고, 환영한다고. 바닷빛을 담은 반지가 잘 어울린다고, 나랑 로맨틱한 시간 보내다 가라고 전해달래.”
“…그럼 저도 여기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태오 씨가 전해 줄래요?”
립서비스 멘트일지 몰라도, 여주의 기분이 좋아졌다.
이전의 그녀라면 다른 사람의 호의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이유 없이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전생의 그녀에게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그녀의 말을 남태오가 전하자, 직원이 또 웃으며 대답했다.
“햇빛이 강해서 피부가 금방 타니까 조심하고, 사진 찍기에 좋은 곳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 얼마든지 물어보라고도 하네. 근데, 여주야. 물어보지 마. 더 번역하라고 하면 나 질투 나서 더는 못하겠다.”
“알겠어요. 그럼 그만할게요.”
그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태오는 손수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직원을 밀어내다시피하며 내보냈다.
그의 손에 떠밀려가면서도 웃으며 직원이 손을 흔들며 뭐라뭐라 했지만 여주는 알아듣지 못했기에 같이 손만 흔들어줬다.
남태오는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나서, 여주에게로 다가갔다.
여주는 창밖의 이국적인 분위기에 한껏 취해 있었다.
여주가 밝은 걸 보는 것도 좋았지만, 오늘은 신혼여행 첫날이었다.
오늘이 가면, 이 밤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아직 안 씻었지? 그럼 나랑 같이 씻는 걸로 해.”
“…네? 이, 이렇게 갑자기요?”
“지금 시간이 없어요. 나만 급한가?”
그는 여주가 방심한 틈을 타서 뒤에서 끌어안다시피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내려달라는 여주의 목소리는 이내 샤워기의 물줄기 소리에 묻혔다.
잠시 후, 욕실 너머로 달콤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 * *
욕실에서 사랑을 나눈 걸로는 부족했을까.
그에게 들려 갔던 것처럼, 다시 침대로 옮겨온 것 같은데.
여주는 아직도 제 위에서 열정이 식지 않은 남태오를 몽롱하게 바라봤다.
스파클링 와인은 도수가 낮았고, 취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몸의 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다.
“태오 씨. …이제 잠 좀 자면 아, 안 될까요?”
여주가 꿈틀거리며 그를 밀어내려고 두 팔을 휘저었다.
하지만 그 두 손도 꼼짝없이 잡혀서 머리 위로 고정이 됐다.
“정말로 자고 싶어? 오늘, 우리 첫날인데?”
남태오가 그녀를 달래듯 이마 위로 잔키스를 쏟아냈다.
그러자 그녀가 소스라치며 빨개진 눈가로 말했다.
“첫날 아까 벌써 지나갔는데, 지금 일부러 그러는거죠?”
계속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하면서 그녀를 어르던 남자였다.
지난번에 그의 집에서 첫 관계를 맺었을 때보다 더 불타오르는 남태오라니.
여주는 그를 상대하는 것보다 졸음을 참기가 더 힘들었다.
“울면서, 관두라는 거 너무 잔인한 말인데.”
“…앞으로 시간 많이 남았잖아요.”
“이래서 앞으로 버틸 수는 있겠어?”
남태오가 여주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물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그녀의 몸에는 근력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말랑거리는 살도 부드럽고 좋았지만, 이래서야 그를 상대하는 것이 버겁기만 할 터였다.
“알았어, 울지 마. 뚝.”
그가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이불을 덮어줬다.
발개진 눈가를 보면 더 흥분되는 걸, 모르니 저러지.
어른스러운 구석만 있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여주도 부부 관계에 차차 익숙해질 터였다.
남태오는 끝까지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간신히 내리눌렀다.
누구 아내의 말처럼, 앞으로 시간은 많았다.
신혼여행을 2주로 넉넉히 잡아놓기를 잘했다.
그는 옆으로 드러누워 여주를 꼭 끌어안았다.
“한국 가면 운동할거예요. 결심했어요.”
이불 속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잘 생각했어. 다음에는 안 봐줘.”
남태오는 피식 웃어버리고, 어서 자라고 토닥였다.
“고마워요. 항상.”
아내의 수줍은 진심이 그를 웃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