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두 달 후, S호텔에서 여주와 남태오의 결혼식이 열렸다.
GK그룹의 남 회장이 앞장서서 호텔 측에 요구한 것은 하나였다.
최대한 성대하게, 라는 그의 요구에는 생전 아들 내외에게 해 주지 못했던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여주와 남태오는 그의 뜻을 존중하는 한편, 비공개로 진행하기로 했다.
하객들은 주로 정재계의 인사들로 100여 명 정도, 엄선하여 초청됐다.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여주는 신부 대기실에 있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는 그녀의 가녀린 목선과 부드러운 어깨선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신부 화장까지, 한껏 꾸민 제 모습이 어색해 여주는 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거울 속의 여주도 따라 움직이고, 옆에 서 있던 태희가 묘한 신음을 흘렸다.
아까부터 태희의 시선은 오직 여주의 웨딩드레스에 꽂혀 있었다.
“여주야. 자꾸 반복해서 미안한데, 내가 진짜 아쉬워서 그래. 아무래도 내가 골랐던 게 더 예쁜 것 같지 않아?”
“언니. 아시겠지만, 이것도 태오 씨가 많이 양보해 준 건데.”
“알지, 아는데. 무슨 남자가 그렇게 질투심이 많아? 어깨가 이렇게 예쁜데. 신부한테 오늘은 세상에서 제일 예뻐야 하는 날이잖아. 더 과감하게 드러냈어야 했는데.”
웨딩드레스를 같이 보러 갔었던 태희는 좀 더 과감한 디자인을 골랐었다.
화려한 패턴이 눈을 사로잡기는 했지만, 여주가 불편해했다.
무엇보다 최종 선택은 결정권자인 남태오에게 있었다.
그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불가”라며 막았었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 입고 있으니 여주는 그의 선택이 맞았다는 걸 확신했다.
남에게 예뻐 보이는 건 둘째치고, 결혼식이 끝나기까지 호흡은 편히 해야 할 게 아닌가.
다행히 이 옷은 그녀의 몸에 잘 맞았고, 조이지 않았다.
“저는 이것도 마음에 들어요. 저 말고 언니 결혼식 때, 그 드레스 입으시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아아. 내가 그거 입으려면 지금부터 다이어트 해야 하는데 자신이 없어.”
태희가 제 결혼식 날짜를 손가락으로 꼽으면서 말했다.
바로 한 달 후에는 여주가 앉은 자리에 태희가 앉게 됐다.
어떻게든 장손인 남태오 먼저 보내겠다는 남 회장의 뜻이 확고했기에, 그렇게 일정이 잡히게 됐다.
남태오는 그에 따르는 대신, 동생 태희의 결혼식 역시 자신의 결혼식과 동일하게 지원해 달라고 했었다.
남 회장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고, 태희 역시 그 일을 전해 듣고 매우 기뻐했었다.
“언니는 다이어트 안 하셔도 충분한데요. 그리고 저는 언니가 여기 와 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보통 신부 대기실에는 신부의 친구들이나 지인이 와서 기념사진을 찍는 식이었다.
하지만 여주에게는 그럴 지인이 없었으므로, 태희가 아니었다면 혼자 있었을 것이다.
혼자였다면 대기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겠지.
“에이. 고맙기는. 나도 친구 별로 없어. 나 대기실에 혼자 있으면 여주도 와 줘야 해, 알았지?”
“네. 언니. 저야 당연히 가야죠.”
태희와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안녕. 오늘의 신부, 차여주 씨 보러 왔어요. 지금 들어가도 될까?”
S호텔의 유해라 대표의 등장에 태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해라 언니가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기는. 오늘 우리 호텔 VIP 고객님이신데 얼굴은 비춰야지.”
유해라가 생긋 웃으면서 태희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유해라 대표님.”
여주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여주 씨, 결혼식 참석 못 해서 미안해요. 전부터 해외 출장이 잡혔던 거라, 대신 축의금 넉넉하게 했으니까 신혼여행 다녀와서 한번 또 봐요, 우리.”
“네. 대표님께서도 바쁘실 텐데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신부 대기실에 사람이 두 명이나 찾아올 줄은 몰랐다.
여주는 감격스러워하는데, 유해라가 은근슬쩍 옆으로 다가와 윙크를 하며 작게 속삭였다.
“딱딱하게 대표님 말고 나도 그냥 언니라고 불러요. 참, 우리 지유가 여주 씨 정말 많이 보고 싶어 했는데 이번에 시험 잘 보면 만나게 해 준다고 했어요. 엄마로서 미리 부탁 좀 할게요.”
그 말은 이미 남태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일전에 호텔에서 고마웠던 일로 지유한테 팬레터 답장을 써 줬는데, 유해라가 이게 정말 작가의 친필이 맞는가를 증명해 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남태오는 유해라에게만 알고 있으라고, 여주가 곤 작가임을 밝혔었다.
“네. 해라 언니. 저,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그래요. 여행 잘 다녀오고, 태희는 다음 달에 식장에서 보자.”
곧 유해라는 비서의 전화를 받고는 서둘러 나갔다.
바빠 보이는데 잠깐 시간을 내준 것이 고마워서, 여주는 다음에 만나면 아이에게 무엇을 또 선물해 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희는 유해라가 가자마자, 질문을 폭풍처럼 쏟아 냈다.
“와, 진짜 해라 언니네. 평소에 얼굴 한번 보기가 힘든 언니거든. 여주는 좋겠다. 저 언니랑 친해지기 쉽지 않은데 어떻게 둘이 친해졌어? 나랑은 예전부터 봤어도 대화는 몇 번 안 해 봤거든.”
“저도 오늘 두 번째 뵌 거라…… 그렇게 친해 보였어요?”
“응. 저 언니가 아들 관련해서는 좀 유한데, 그거 말고는 칼 같은 성격이거든.”
태희의 말 속에 이미 정답이 있었다.
여주는 바로 납득했는데, 바로 유해라의 아들인 지유가 곤 작가의 팬이라서였다.
하지만 그 얘기를 하려면 자신이 곤 작가라는 걸 이 자리에서 말해야 했다.
‘언젠가는 말하려고 마음먹긴 했지만.’
전생에서와 달리, 생각이 바뀐 게 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녀가 곤 작가임을 말하자는 것이었다.
밝힌다고 해서 문제가 될 사람들이 아니었고, 그녀에게 도움을 줬던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그녀의 팬을 해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여주는 가방 속에 넣어 다녔지만, 미처 건네지 못한 선물을 꺼냈다.
“저기, 언니. 놀라지 말고 들어 주세요. 제가 언니가 곤 작가 팬인 거 알고 나서, 선물 드리려고 소소하게 준비를 했는데. 여기, 선물이에요.”
“어머, 뭐야. 나 선물 주는 거야? 고마워! 나 무슨 선물이든 너무 좋아하는데.”
“네. 언니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여주가 조심스레 포장한 책을 내밀었다.
태희는 한껏 기대한 얼굴로 포장을 뜯더니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며칠 전 팬 카페에 공식으로 올라왔던 곤 작가의 손 글씨 편지와 글씨체가 똑같았다.
“……어? 이거 어떻게 구했어? 이 작가가 며칠 전에 팬 카페도 겨우 알았다고 접속 처음했었는데, 내가 모르는 사인본 이벤트 같은 건 없었는데?”
“아, 저 그게. 사실은 제가 그 작가예요. 언니.”
여주의 말에 이번에는 태희의 턱이 한껏 벌어졌다.
얼빠진 모습으로 몇 번이고 여주한테 다시 되묻기를 시작했다.
“……어어? 여주 네가 이 작가라고? 여기 곤 작가란 말이야, 여주 네가? 아니, 잠깐만. 오빠가 출판사에서 일한다고만 말했는데. ……세상에, 진짜로?”
“네. 혹시 못 믿으시겠으면 제가 출판 계약서라도 보여 드릴 수 있는데.”
여주가 긴장을 풀어 주려고 농담조로 말했지만, 별로 효과는 없었다.
태희는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하더니, 이내 반쯤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어우, 아니야. 지금 너무 놀라서 그래. 가만! 내가 작가님 앞에서 무슨 실수라도 한 건 아니지? ……오빠는 알고 있어? 하긴, 그 인간이 모를 리가 없지! 다 알고 결혼하는 거구나, 맞지?”
“네. 사정이 생겨서 태오 씨가 먼저 알게 됐어요.”
그 사정을 물어본다면, 너무 길어서 줄여서 말하기도 그랬다.
여주가 남은 대기 시간을 확인하는 사이, 태희는 하나뿐인 오빠에게 열을 잔뜩 올리고 있었다.
어느새 태희는 허공으로 주먹질을 날리는 중이었다.
“와, 생각할수록 진짜 어이가 없다. 내가 덕질로 인도해 줬는데 어떻게 나한테 비밀로 할 수가 있지? 내가 입이 좀 가볍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배신감이 막, 진짜.”
남태오가 주변에 비밀로 했던 건, 여주를 위해 배려한 것이었다.
그런 태희에게 여주도 미안한 마음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저, 태희 언니 덕분이에요. 그때 팬 카페 보여 주시면서 언니가 했던 말들이 제게 도움이 됐어요. 저는 팬 카페가 있는 줄도 몰랐거든요. 출판사에서도 따로 안내해 준 말이 없기도 했고, 저를 그렇게나 좋아해 주시는 사람들이 많은 줄도 몰랐어요.”
여주가 며칠 전, 공식 팬 카페에 가입하여 손 편지를 써 올린 것은 팬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용기를 내기로 한 것이었다.
아직 작가로 공식 석상에 나설 기회는 없었지만, 우선 그렇게나마 보여 주고 싶었다.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었노라고 말이다.
여주의 말에 태희는 금세 머쓱해하며 중얼거렸다.
“그랬구나. 에이,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지. 사실, 나 지금 너무 떨려.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이랑 한 가족이 되는 거잖아. 우리 오빠가 장가 하나는 끝내주게 잘 갔네.”
“어, 언니도 참. 태오 씨 들으면 섭섭해할지도 몰라요.”
“아니야. 여주야. 성덕 몰라? 성공한 덕후야. 나는 지금 우리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
태희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여주는 좀 부끄러워졌다.
당사자인 걸 밝히지 않았을 때도 태희가 저런 말을 하면, 듣고 있기가 힘들었는데 지금은 더 힘들었다.
그때 타이밍을 딱 맞춰서, 남태오가 직접 신부를 데리러 왔다.
“사실이니까 부정은 안 할게.”
“어어? 오빠, 벌써 왔어?”
태희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더니, 그의 눈치를 보면서 서둘러 식장으로 갔다.
남태오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일으켜 세웠다.
“여주야. 우리 입장해야 돼.”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요?”
남태오가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풍성한 웨딩드레스들이 발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잘 감아쥐었다.
덕분에 여주는 앞으로 걸어 나가기가 한결 수월했다.
“누구 신부인지, 오늘 너무 예쁜데.”
“태오 씨도 오늘따라 눈이 부셔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면서 대기했다.
곧 결혼식 입장곡이 울리고 문이 열리며, 환한 시야가 두 사람을 반겼다.
순백의 아름다운 커플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