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만약 그가 전생과 달리 부친에게 신임을 얻을 만큼 책임감 있고 성실한 아들이었다면?
그는 도 씨 집안으로부터 내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형과 조금이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더라면?
그렇게까지 비참한 죽음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박하나와 바람만 피우지 않았더라면.
그녀와 자신을 저울질하지만 않았더라도.
하지만 그는 전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수를 반복했고, 죄를 지었다.
그 죗값을 받은 것이라고 친다면, 오히려 편히 간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모든 과거를 알고 있는 그녀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남들에게는 그저 한창때의 젊은이가 불운의 사고를 당한 것이라 여기겠지.
‘박하나는 좀 아쉽게 됐네.’
도지성을 먼저 처리하고, 그 다음으로 박하나를 손봐 주려고 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렸을 줄이야.
임신한 몸으로 제 아이와 함께 저세상으로 가 버린 마지막이, 박하나한테는 좀 지옥다웠을까?
나는 제발, 네게도 그랬길 바란다.
‘그래도 너는 네 아이를 먼저 보내지는 않았잖아?’
이미 죽은 사람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여주는 결코 박하나의 명복을 빌어 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맺어졌으면 안 됐을 악연이었다.
“하아.”
이제 더 이상 같은 하늘 아래 그 둘이 없다고 하니.
숨이 가빠져 오는데도 기분이 날아오르려고 했다.
‘남태오 씨가 여기 없어서 다행이야.’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의 얼굴이 어떨지 예상이 갔다.
마음껏 기뻐하지도, 마음껏 슬퍼할 수도 없는 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이겠지.
그녀 스스로도 도저히 들여다볼 자신이 없는 그런 얼굴이었다.
난 지금 어째서 슬플까?
그 둘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어째서, 나는 기쁠까?
그 둘의 얼굴을 더 이상 보지도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또 어째서 감사할까?
다시 얻은 이 삶에서, 그녀의 손으로 직접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니까.
수천 번 상상을 했었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되면 정말로 둘 중 하나를 죽일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하늘은 끝내 그녀를, 그런 파국으로까지 치닫게 만들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지금도 하늘의 뜻은 결코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었지만,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존재였다.
……나한테 복수를 하라고 다시 돌려보낸 게 아니었다면, 뭐였을까?
왜 나를 다시 살게 한 거지?
언젠가 남태오와 나눴던 대화가 이런 주제였던 것 같은데.
“그 둘한테 보란 듯이 차여주 씨 잘 사는 걸 보여 주고 싶지 않습니까?
“대표님께서는 그게 정말 복수가 된다고 생각하세요?”
“최고의 복수는 성공이라는 말, 알고 있습니까?”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이곳에 그녀가 증오하던 두 남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앞으로 내 남은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최고의 복수란 것에 조금쯤 가까워졌을까?
모르겠다. 지금 당장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이제 그녀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만들어졌다.
……내가 앞으로 남태오 씨와 행복해도 되는 걸까?
앞으로는 그 질문에 대답을 찾는 일이 남아 있었다.
* * *
“로비에서 제 가족들이 기다리니, 되도록 말씀은 짧게 끝내시죠.”
미팅 룸에서 박 회장과 마주 앉은 남태오는 사무적인 태도였다.
남 회장 앞에 있을 때보다 더 고압적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은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그것에 박 회장은 익숙하다는 듯이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여전히 자네는 나한테 가시를 세우는군. 어릴 때만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
“뭔가 착각하신 모양입니다. 저는 박 회장님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남태오는 그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제 조부의 인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것만으로는 박 회장을 기업인으로 존경하기에는, 그의 도덕 관념에 어긋나는 인간이었다.
박 회장은 존경할 만한 기업인이 아니었다.
그의 행실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의 태반이 거의 사실이었다.
그걸 알고 나서부터 남태오는 그를 사업 파트너는 물론, 지인으로 두는 것도 아예 배제했다.
“그렇게 얼굴에 대놓고 써 있는데, 아니라고?”
“눈이 많이 침침하신가 봅니다.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건 최소한, 동질감과 친분을 바탕으로 가능한데, 저는 N유업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요. 여주 씨에 대해 꼭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으면, 애초에 이 자리에 앉지도 않았습니다.”
“알았네. 본론만 얘기하지. 이걸 좀 봐 주게.”
박 회장은 유전자 검사의 결과가 적힌 서류를 내밀었다.
차여주와 박 회장의 친자 관계를 말해 주는 내용이었는데, 그는 서류를 확인한 남태오의 태도가 방금과는 달라질 것이라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빠르게 서류를 훑어 내린 남태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실 말씀은 뭡니까?”
그의 질문은 무척 의외였다.
어떻게 된 일이냐 앞뒤 사정을 따져 묻지도 않고,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아무리 제가 포커페이스로 단련됐다고 해도, 아직 어린 놈 아닌가.
결혼하겠다는 여자의 과거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 걸 보고 박 회장은 속으로 제 할애비를 닮아 독한 놈이라고 욕을 했다.
“차여주 그 아이랑 어떻게 만나게 된 건지 설명해 주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내키지도 않네요.”
그렇지만 아쉬운 쪽은 박 회장이었다.
여유롭기 그지없는 남태오를 거듭 속으로 욕하면서도, 박 회장은 부탁하는 어조로 말했다.
“부탁 좀 하지. 사람 시켜서 알아봐도 나오는 게 없어서 꽤 속이 탔단 말이네.”
그에 남태오가 팔짱을 끼더니, 빠르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 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얼마 전 유방암 수술을 끝냈습니다. 안정기라서 정서적으로 관리가 꾸준히 필요한 상황이죠.”
“수술을 끝내고 안정기라고…….”
“박 회장님이 바라시는 그런 일은, 사전에 방지되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태오는 그 말을 하면서, 박 회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시선 앞에서 박 회장은 제가 믿었던 유전자 검사 서류가 종이 쪼가리로 전락하는 것을 보았다.
차여주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서라면, 눈앞의 남태오는 무슨 일이든 할 기세였다.
오히려 타격을 입은 건 박 회장이었다.
“암 수술이었다니. 정말, 그런 큰일을 겪었단 말인가? 난 몰랐네.”
“거듭 말씀드리지만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만,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로봇처럼 지치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남태오였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여주를 이 방에 데려오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박 회장의 행동이 심상치 않은 건 알았지만, 설마 그가 차여주의 친부라는 카드를 가져왔을 줄은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가 일체 흔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서류 한 장에 그와 여주와의 결혼식을 망칠 위력 따위는 없었다.
처음부터 여주가 고아인 걸 알고도 좋아하던 거였으니까.
이제 와서 그녀가 누구의 자식이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당사자끼리 맺어진 와중에, 남의 간섭은 방해만 될 뿐이었다.
“이보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 애의…….”
“박 회장님. 지금 제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어, 어떤지는 글쎄. 내가 그걸 알 리가 있나.”
“불쾌합니다, 상당히.”
남태오는 박 회장의 말을 깔끔하게 잘라먹었다.
그에게는 안정을 취해야 하는 여주를 대신해 보호자로서, 그녀의 심신을 편하게 만들어 줘야 한다는 명목이 분명하게 있었다.
여주는 더 이상 부모가 필요한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 줄 남편이었다.
남태오는 그것이 자신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 다른 것은 여주에게 필요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그러니 지금 할 일은 박 회장을 설득을 하든, 협박을 하든 해서 아예 방해가 될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설마 이제 와서 친딸이랍시고 나타나서, 결혼을 반대하기라도 할 작정입니까?”
“아니 나는 그저, 다만.”
“아니라면 됐습니다. 용납도 안 할 거지만, 꿈도 꾸지 마시죠.”
남태오가 할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박 회장이 덩달아 따라 일어났다.
그는 마음이 다급해졌고, 더 이상 여유를 꾸며 낼 수도 없었다.
남태오의 팔을 붙잡은 그가 저자세로 나갔다.
“나도 이제 와서 그 애한테 애비 노릇 할 생각은 없네. 그냥 보상을 좀 하고 싶어. 내가 살 날이 얼마 안 남았거든.”
“솔직하게 말씀하시니 오히려 마음이 움직이네요. 어설프게 부모 노릇 하겠다고 하셨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거든요.”
“그래. 자네를 보니까 내가 갈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드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 그러면 결혼식에 내 돈을 좀 보태는 게 어떻겠나.”
“사양하죠. 여주 씨는 제 돈만 쓰게 할 겁니다.”
“아예 내 돈도 받기 싫은 모양인데, 그럼 나는 뭘 어떡해야 하나.”
“밥 한 끼, 제가 허락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입니다.”
“고작 밥 한 끼로 나더러 만족하라는 건가?”
“내키지 않으면 관두시고요.”
자기는 아쉬울 거 하나 없다는 남태오에게 박 회장이 졌다며, 두 손을 들었다.
“여태 버렸던 자식이 계속 불행하길 바란다면, 어디 입 한번 놀려 보세요. 회장님은 여주 씨가 행복해질 유일한 기회마저 앗아 간 장본인이 될 테니까.”
“……알았네. 내 죽을 때까지 입을 봉하고 조용히 죽겠네. 그러니 밥 한 끼, 같이 먹게 좀 도와주게.”
“이따 저희 회장님과 식사 같이 하시죠.”
남태오는 어디까지나 남 회장의 지인으로만 참석하라, 선을 확실하게 그으라고 경고하였다.
“이건 제가 일단 갖고 갑니다.”
남태오는 서류를 가져갔고, 박 회장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자식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