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팅 웨딩-55화 (55/60)

55화

태희는 여주를 자선 사업 행사장까지 데려다줬다.

여주가 같이 들어가자고 했지만, 남 회장 얼굴이 보기 불편하다며 거절했다.

“할아버지나 나나 서로 얼굴 안 보고 산 지 오래됐거든. 더군다나 오빠보다 결혼 먼저 한다고 해서 미운털 박혔잖아, 완전.”

“언니. 할아버님께서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막상 보시면 반가워하실지도 몰라요.”

여주가 남 회장을 많이 겪어 본 건 아니었지만, 냉정하기만 한 분은 아니었다.

제삼자인 여주가 보기에는 그랬다.

어쩌면 남 회장과 태희가 서로 비슷한 성격이라 친해지기 어려운 걸지도 몰랐다.

누군가 한 사람이 먼저 다가가 말을 건다면, 관계가 나아질 수도 있었다.

‘할아버님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 같아.’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미워한다면,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희의 표정을 보아서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아냐. 내가 아는 할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마 지금 여주 너 앞에서만 이미지 관리하고 계시는 거지, 얼마나 무섭고 냉랭한지. 나는 좀 그래.”

하지만 태희가 정말로 들어가기 싫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주는 기왕이면 함께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혼자 들어가기로 했다.

“언니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저는 그럼 들어가 볼게요. 바쁘실 텐데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바쁘기는. 나 놀고먹는 백수인데. 그럼 또 다음에 보자.”

태희가 그만 가겠다고 돌아섰을 때, 두 사람 앞으로 미끄러지듯 외제 차량 한 대가 섰다.

“여주 양! 빨리 왔네 그래.”

창문이 열리고 남 회장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내렸는데, 태희를 보고는 멈춰 섰다.

태희 역시 쓰읍, 소리를 내더니 여주와 함께 그에게로 걸어갔다.

“할아버님. 오셨어요. 저, 태희 언니가 데려다줬어요.”

“어, 응. 태희구나. 오랜만이다.”

“아, 네. 할아버지. 오랜만이네요.”

서로 쳐다보는 둥 마는 둥 하는 두 사람의 태도를 보니까, 여주가 더 어색했다.

언제쯤 남태오가 도착할까, 저절로 기다려졌다.

“저기, 두 분 꽤 오랜만에 뵙는 걸로 아는데요.”

역시 어색했지만,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만회해 보려고 여주가 말했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서먹하게나마 안부를 주고받았다.

“어, 그래. 잘 지냈냐?”

“아, 네. 전 잘 지냈어요. ……할아버지는요?”

“어. 잘 지냈다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여주 스스로도 친화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일대일로 겪어 본 두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기에, 잘 지내게끔 돕고 싶었다.

별로 큰 도움이 안 될지 몰라도, 시도를 해 보기로 했다.

“할아버님. 혹시 행사 곧 시작하나요?”

“아닐세. 여주 양, 늦지 않았으니 걱정 안 해도 되네.”

여주가 물어보자, 남 회장은 아직 여유 있게 와서 시간 좀 남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안에 들어가서 주변을 둘러봐도 좋다고 했다.

여주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저, 할아버님. 제가 이런 장소는 처음이라서요. 태희 언니랑 같이 들어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아니, 뭐. 안 괜찮을 거야 없지. ……그래, 태희 너는 같이 들어가고 싶으냐?”

여주가 조심스레 물어보자, 남 회장이 슬쩍 태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태희 역시 헛기침을 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뭐. 저도 딱히 안 들어갈 이유는 없지만. 할아버지는 저 별로 안 보고 싶어 하시던 거 아니었어요?”

아무래도 내내 마음에 담아 뒀던 게 분명한 그 말을 꺼내자, 남 회장이 거세게 헛기침을 하고는 대답했다.

“아니, 뭐 딱히. 그런 거는 아니지만. 들어오고 싶으면 여주 양이랑 같이 즐겁게 시간 보내다 가면 좋지.”

남 회장이 권유하는 모양새가 되자, 태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주 씨가 저랑 같이 들어가고 싶다고 하니까 들어갈게요.”

“어, 그래라. 그렇게 하래도.”

자연스럽게 여주까지 세 사람이 함께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태희와 여주는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좋아 보였던 걸까?

남 회장이 입구에서 잠깐 멈춰 서더니 두 사람에게로 팔 한쪽을 내밀었다.

“내 팔짱은 누가 같이 안 껴 주나? 좀 허전한 것 같아서 말이다.”

여주가 이런 경우는 어떡해야 하나 싶어서, 태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태희가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할아버지, 그런 거 싫어하시잖아요. 회장으로서 품위 떨어지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아니 내가 언제 싫어했다고 그러냐. 이 정도로 체통이 없어 보이면 그건 내가 평소 행동거지를 잘못한 탓이겠지.”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 손 잡고 회사에 가 보고 싶다고 하니까 안 들어주셨잖아요. 제가 똑똑히 다 기억하고 있거든요?”

남 회장과 태희 사이에는 여주가 몰랐던 과거가 있었다.

아무래도 가족끼리는 남이 모르는 일들이 많았던 거겠지.

여주는 서먹함을 넘어서 불만스럽게 말하는 태희를 보면서 깨달았다.

역시 두 사람 사이는 안 좋다기보다는, 서로 말을 하지 않은 것이 많아서였다.

쌓인 게 있는데 그것만 풀면 잘 지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됐다, 그럼. 너 말고 여주 양한테 팔짱 껴 달라고 하면 되지.”

“그러세요. 여주 씨는 착하니까요.”

“알았대도.”

어느새 남 회장은 여주 앞으로 팔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나 여주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합리적인 사유가 있었다.

남태오가 미리 말해 줬는데, 그녀의 팔 상태가 아주 심각하다고 남 회장에게 미리 말을 해 놨다는 거였다.

여주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할아버님. 제가 팔 한쪽이 아직 좋지 않아서요. 저보다는 태희 언니가 할아버님 팔짱을 끼는 게 그림도 더 좋게 나올 테고, 그리고 제가 키도 작아서요.”

끝에 가서는 여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남 회장과 태희와 함께 서 있으니 유독 제가 작은 것처럼 느껴졌다.

남씨 집안 사람들은 전부 하나같이 키가 크고 늘씬했다.

그제야 남 회장과 태희가 여주를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나서, 다시 여주를 보고 웃어 버렸다.

“저런. 내 여주 양이 하도 의젓해서 이렇게 키가 작은 줄 미처 몰랐구만.”

“그러게요. 어, 그래도 나는 여주 씨 키 그렇게 작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별로 작지 않다고 말했지만, 여주는 이미 현실을 받아들였다.

남씨 집안은 정말로 우월한 유전자를 지녔다는 걸.

그리고 여주가 생각하기에도 제 키는 보통이었지, 절대 작은 키가 아니었다.

“두 분, 똑같이 저를 놀리시네요.”

이번에는 여주가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어흠. 아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여주 씨. 전 할아버지랑 다르다고요.”

그러자 남 회장이랑 태희가 얼굴을 살짝 굳히고는, 서로 홱 얼굴을 돌렸다.

가만히 지켜보니 두 사람 다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태오 그 녀석, 일이 많아서 좀 늦게 오나 보다.”

남 회장은 주최측으로 가 봐야 한다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주에게는 남태오가 도착할 때까지, 태희와 같이 있어도 좋다고 했다.

“그럼 여주 씨, 우리 저쪽으로 가자. 좀 있으면 서로 아는 척 해야 돼서 피곤하거든.”

남 회장이 능숙하게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걸 보던 태희가 여주를 데리고 편한 곳으로 가자고 했다.

“네. 언니. 저도 조용한 게 편해요.”

두 사람은 차와 간단한 와인, 디저트가 준비된 곳으로 옮겨 갔다.

거기서는 입구가 잘 보여서 남태오가 언제 오는지 볼 수도 있었다.

태희가 맛있는 와인이라며 건네주는 걸, 여주는 맛을 보았다.

“여주 씨도 이런 곳 불편해할 줄 알았어. 나는 어릴 때 처음 할아버지 따라서 왔었거든? 근데 적응이 너무 안 되더라고. 쓸데없이 격식 차리고 말이야.”

태희가 그러면서도, 주변 인물들을 하나씩 가리키면서 얘기를 해 주었다.

어느 기업의 사장이고, 또 누구의 부인이고, 어디를 운영하고 있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을 다 알고 있어서, 여주는 놀라웠다.

그러다 태희의 목소리가 한껏 커지는 순간이었다.

“저기, 저기 막 들어오는 분 보이지? N유업 박 회장님인데, 사모님 말고도 첩이 엄청 많기도 하지만, 그 첩마다 자식을 다 본 걸로도 유명해. 근데 얼굴 보니까 예전보다 엄청 엄청 몸이 안 좋으신가 보다.”

“언니는 어쩜 그렇게 사람들 얼굴하고 다 잘 외우고 있어요? 신기해요.”

여주는 그를 보자마자, 박하나의 아버지라는 걸 떠올렸다.

그의 뒤로 박하나는 보이지 않았다.

비공식적인 자리였고, 나서길 좋아하는 성격이니 나타났을 텐데.

아무래도 임신한 몸이니 그건 무리였으려나?

여주가 박하나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동안, 태희는 가십거리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특히 박하나라고, 박 회장이 바람피워서 낳은 자식 중에 또 물건이 있어. 성격이 아주 뭣 같아서 나는 어릴 때도 상대하지도 않았지만. 요새는 좀 나이 먹고 철들었을까?”

철이 나이 먹는다고 드는 게 아니라서요.

여주가 속으로만 대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태희가 쿠키를 집어 먹었다.

“이런 말, 여주 씨 앞에서 하기 좀 그렇지만 이쪽도 다 그 나물에 그 밥이야. 몇 번 다니다 보면 맨날 보이는 사람만 보이니까 바뀌질 않아.”

태희가 자기 남친이 보고 싶다고 덧붙이는 그때, 누군가 슬쩍 여주의 뒤로 걸어왔다.

“남태희. 아주 못 하는 말이 없네. 누가 보면, 너는 그 나물에 그 밥 아닌 줄 알겠다.”

여주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는 손길에 먼저 알아차렸다.

“……태오 씨, 왔어요?”

그래서 천천히 돌아봤는데, 그가 그녀의 목덜미를 쓰윽, 쓰다듬었다.

“난 줄 알고 가만히 있었던 거겠지, 여주 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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