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가족 간의 불화가 엄청나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걸까요. 어느 쪽이든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화면 속의 그들은 도지성의 죽음에 대해 돌아가면서 의견을 보탰다.
띠익.
박하나는 화면을 꺼 버리고 거친 동작으로 리모컨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진짜 재수 없게. 사람 하나 죽는 게 뭐라고 뉴스까지 나와?”
그런 딸의 행동에 은숙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너는 왜 죽은 사람한테 말을 그렇게 하고 그래. 그래도 좀 유명한 집안 사람들 같은데.”
“유명하긴 개뿔. 어차피 사람은 다 죽어. 그리고 저 인간은, 잘 죽어 버렸어.”
박하나가 이를 갈면서 서슬 퍼렇게 눈을 빛냈다.
고작 저렇게 쉽게 가 버릴 거면서, 마지막까지 그렇게 질척거린 거였어?
도지성이 돈 좀 빌려 달라고 연락했던 걸 알면서도, 차단했던 박하나였다.
그런데 정말 저렇게 죽어 버렸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하나야. 너 왜 그래? 이미 죽은 사람한테, 너랑 무슨 사이였어?”
평소보다 박하나의 반응이 격하자, 은숙이 염려하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박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별로. 나랑은 딱히 관계없었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관계가 없기는. 그러고 보니까 네가 책 냈다던 그 출판사, 맞지? 거기서 일했던 사람 같은데.”
은숙이 기억력을 되살리면서 연관 지었지만, 이내 박하나의 살기 어린 눈빛에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내가 거기서 책 냈다고 거기서 일하는 직원까지 다 알아야 돼? 아 시끄럽고 나 지금 나가야 되니까 비켜!”
박하나는 지금 그 누구와도 도지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도지성의 시신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아무리 뉴스에서 기정 사실로 보도했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 한편에서는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언제는 같이 차여주 망가트리자고 하더니! 고작 그 돈 몇 푼이 없어서, 그렇게 죽어 버렸다고?’
정말로 그 인간이 죽어 버렸다면, 그렇게 신랄하게 비웃어 주고 싶었다.
그래야 제 안에서 들끓는 분노와 적대감이 좀 사라질 것 같았다.
왠지 모를 패배감과 안타까움, 그리고 인정하기 싫었지만 약간의 슬픔도 뒤섞여 있었다.
그녀가 대충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뒤에서 은숙이 붙잡았다.
박하나의 성격을 아는 만큼, 당장이라도 어디 가서 사고를 크게 칠 분위기였다.
“하나야. 너 그, 배 속의 애는 어떡할려고 그래.”
“이거 놔. 나한테서 제발 신경 꺼. 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려고 그래!”
“잠깐 편의점 좀 갔다 올라고 그런다 왜!”
박하나는 그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내달려 갔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앞이 뿌옇게 변해 갔지만 내리막길을 거침없이 뛰어 내려갔다.
자신이 고작 도지성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한심한 인간의 말로에 슬픔 따위를 느낄 가치도 없었다.
‘내 배 속의 애는 어떡할 거냐고?’
도지성이 죽은 시점에서, 이미 답이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떡하기는 어떡해. 없애 버려야지.
처음 임신 진단을 받았을 때는 아주 조금 기뻤던 것도 같다.
어쩌면 도지성과 남들 보기에 제법 그럴싸한 가정을 꾸릴 수도 있다고, 핑크빛 미래를 그렸던 것도 같다.
물론 그를 전적으로 완벽하게 신뢰하지는 않았기에 임신 사실을 숨겼었지만.
임신 사실을 알고도 회피할 것이 분명한 그 남자를 미워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죽어 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
이제 유일한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박하나는 골목길을 빠져나와 잠시 멈춰 섰다.
아직은 그렇게 많이 부르지 않은 제 배를 쓰다듬어 봤다.
모성애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아이였고,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임신이었다.
여기, 편의점이 어디 있었던 것 같은데?
박하나는 당장 갈 곳이 없었기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 사거리 앞에 있는 횡단보도를 보았다.
저녁 시간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신호등은 빨간불에서 이제 막 초록불로 바뀌고 있었다.
환한 불빛이라고는 건너편의 편의점에서밖에 볼 수 없었다.
그때, 하필 팥빙수 최저가 세일 문구가 박하나의 눈에 콕 박혀 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름에는 임신한 뒤로 우울해지고 짜증이 솟구쳐서 거의 방 안에만 처박혀 지내느라 아이스크림 한 번 못 먹어 봤다.
설마 이것도 내가 임신한 탓일까?
평소에는 쳐다본 적도 없던 팥빙수가 미친 듯이 입맛을 당겼다.
팥 알갱이가 씹히는 걸 떠올리자마자, 입 안에 군침이 돌기 시작했다.
‘저것만 먹고 그 다음에 생각을 좀 해 보는 거야.’
생각해 보면 도지성의 죽음으로 절망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차여주를 향한 증오심은 저를 이길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박하나는 그렇게 팥빙수 한 번을 먹기 위해 횡단보도로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기분이 들뜨기까지 했다.
잠시 후면 시원하고 달달한 알갱이들이 입 안에서 녹아내리겠지.
그럼 바닥까지 가라앉았던 제 기분도 회복될 테고 말이다.
마지막 세 걸음을 남겨 둔 그 순간이었다.
빠아아아앙!
신호를 무시한 채, 거침없이 달려오던 검은색 차량이 박하나의 몸으로 돌진했다.
쿠웅.
차량과 부딪쳤다가 힘없이 튕겨져 나간 몸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온몸으로 충격을 받아 낸 박하나는 제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해 보았지만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팔과 다리가 기괴한 방향으로 서로 엇갈려 반대편으로 돌아가 있었다.
박하나는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목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저를 쳤던 차량 주인은 나와 보지도 않고, 빠르게 직진해 가 버렸다.
피, 피가 나잖아.
내가 정말 이렇게 죽는다고?
“어, 어으어.”
살려 줘.
나 좀 살려 줘. 엄마.
박하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이름을 간절하게 불렀다.
하지만 횡단보도를 다니는 사람도 없고, 바닥에 널부러진 그녀를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 싫어. 이렇게 죽기는 싫다고.
내가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단 말이야.
차여주, 걔보다 먼저 죽을 수는 없단 말이야.
박하나는 안간힘을 쓰고 손가락으로라도 앞으로 조금씩이라도 기어가 보려 했다.
어떻게든 아무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원망스러우리만치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았다.
편의점까지만 가면 누가 저를 도와주지 않을까?
하지만 제 몸에서 계속해서 쏟아지는 핏물로 바닥이 미끄러웠다.
“어으윽.”
한참을 바르작거리던 박하나의 손이 아스팔트 바닥에 갈리며 주욱 미끄러졌다.
고개가 앞으로 푹 꺾이고,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30분 후, 편의점에서 쓰레기를 비우러 나오던 알바생이 그 충격적인 장면의 첫 목격자가 됐다.
서둘러 119로 전화를 걸어서 구하려고 했지만,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에 이미 과다 출혈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거 전형적인 뺑소니 사고지. 인근 것도 돌려는 보겠지만, 쉽지 않아 보이네.”
“어쩌다 임신부가 보호자도 없이 여기를 다녔대?”
“그러게. 현장 목격자 증언도 없어서 진짜 난감하다, 야.”
뒤이어 달려온 경찰은 현장 조사를 하고 나서, 하필 사고 현장이 도로의 CCTV 촬영 범위가 아니었다면서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렵겠다며 혀만 끌끌 찰 따름이었다.
“저 여자분 불쌍해서 어떡해요. 제가 공시 준비하느라 이어폰 끼고 노이즈캔슬링 하고 있었거든요. 어쩌면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알바생은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잊고, 울면서 중얼거렸다.
잠시 후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박하나의 엄마가 제 딸의 시신을 부여잡고는 흐느껴 울었다.
* * *
한 달 후.
여주는 유방암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휴식 중이었다.
남태오는 가족들과 안 실장에게만 그 소식을 전했다.
남 회장과 태희는 수술 결과를 듣자마자 제 일처럼 기뻐해 줬다.
그리고 안 실장은 여주의 병문안을 왔다가 얼굴을 보고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지난번 곤 작가를 모시고 왔던 것도 그였으니, 사실은 남태오와 연인 관계가 됐다는 말에 속전속결이라며 혀를 내두르기까지 했다.
“우리 대표님을 사로잡은 여성분이 누군지 궁금했는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엄지를 척 내세우면서 언제까지 신비주의 작가 컨셉으로 나가실 거냐는 질문을 했다.
물론 그 즉시, 남태오에게 떠밀려 병실 밖으로 쫓겨났다.
며칠 후, 여주는 첫 외출을 하게 됐는데 바로 GK그룹에서 주선한 자선 사업 파티였다.
남태오의 파트너 자격으로 주변 인맥들에게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히자는 남 회장의 권유였다.
남태오는 여주만 괜찮다고 하면,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리고 여주는 용기를 내서 참석을 하기로 했다.
공식 행사라고는 하지만, 참석하는 사람들 전부 남 회장의 지인이었다.
장차 남태오와 결혼할 사이였으니 이번 기회에 안면을 터 놓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여주는 아침부터 태희와 함께 청담동의 메이크업샵으로 가게 됐다.
태희는 단골이라면서 신기하게 매장을 구경하는 여주를 대신해 헤어와 메이크업에 대해 간단하게 주문을 넣었다.
“실장님. 나한테 늘 해 주던 대로, 그거보다 더 더 예쁘게 해 주세요.”
“자기야. 새벽부터 갑자기 불러내 놓고, 예쁜 사람들이 더 예쁘게 해 달라고 하면 나야 기분 좋지만. 손님은 어떤 스타일을 원하세요?”
사람 좋게 생긴 실장이 여주를 자리에 앉혀 놓고 물어보았다.
“저, 잘 모르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부탁드려요.”
여주로서는 그게 최고의 주문이었다.
패션이나 스타일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니, 전문가의 손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태희 언니. 오늘 자리에 N유업 관계자들도 온다고 했죠?”
“응. 그렇게 참석하기 까다로운 자리는 아닐 거야. 어차피 두루두루 아는 사람들끼리 오는 곳이니까.”
초대장이 없어도 올 수 있는 곳이라면, 어쩌면 박하나도 올지도 몰랐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넌 지금의 나를 어떤 얼굴로 쳐다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