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세탁비? 그걸 왜 누나랑 주고받은 건데.”
그 말에 남태오는 더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 사이 있었던 일들을 저렇게 축약해 버리다니!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라 여주가 난감한 미소를 띠었다.
“주고받을 만하니까 주고받았지. 예민하게 굴기는.”
유해라는 피식 웃어 버렸다.
‘정말 저 아가씨한테 단단히 빠져 버린 모양이네.’
남태오와는 꽤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오늘처럼 다양한 표정은 처음 보았다.
이제 막 시작한 연인을 구경하는 건 정말 재밌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누가 봐도 저 두 사람은 첫 연애다 보니, 묘한 서투름과 어색함이 있었다.
물론 당사자들은 절대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자세한 얘기는 여주 씨한테 나중에 들어.”
“네. 태오 씨. 나중에 설명할게요.”
“나중에 꼭 설명해 줘야 합니다. 그럼 인사 다 했으니까 그만 가시지?”
남태오는 유해라에게 눈치를 주면서, 슬쩍 고개를 돌려 레스토랑 안을 살폈다.
건너편에서 안 실장이 이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신호였다.
그것까지 확인하고 나자, 이제 유해라를 보내는 일만 남았다.
“가라니까 더 가기 싫네.”
“지유가 집에서 엄마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우리 지유는 성숙해서 그러지 않아. ……알았어. 간다, 가. 표정 싸늘한 거 봐. 춥다 추워.”
유해라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양팔로 두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난번 박하나를 상대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느긋하게 남태오를 놀리는 태도를 보니 역시 대단했다.
여주는 낯익은 아이의 이름이 나오자, 슬쩍 안부를 물었다.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귀에 박혀 버려 잊을 수가 없었다.
“대표님. 지유는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럼요. 너무 잘 지내서 문제지. 밤 늦게까지 책 읽느라 눈이 나빠졌지 뭐에요. 참, 혹시 앞으로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태오랑 결혼하면 나랑도 지인 되는 건데.”
유해라가 먼저 그렇게 말하니 여주도 고마웠다.
남태오 다음으로 이번 생에서 만난 귀인이었다.
뿌듯해하는 여주와 달리, 남태오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는 유해라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던졌다.
아쉬울 게 없는 그녀였지만, 아들 바보이니 통할 것이다.
“저기, 유해라 대표님. 전에 아들이 곤 작가 팬이랬지? 연재 시작하면 가장 먼저 알려 주고 사인본까지 넘길 테니까 이만 가 주시죠.”
“그냥 사인본은 우리 지유도 있어. 그 작가한테 팬레터 답 좀 써 달라고 하는 건 어때?”
“……시도는 해 볼게.”
남태오가 여주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 대답했다.
그의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던지, 유해라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럼 다음에는 결혼식장에서 보는 걸까, 남태오 대표?”
“축의금을 미리 준비해 두면 좋을 거야.”
“안그래도 네가 준 것보다 0 하나 더 붙일 생각이었어. 아, 룸 업그레이드시킨 건 내 서비스야. 두 사람 좋은 시간 보내라고.”
유해라는 마지막까지 화끈함을 선보이며 빠르게 사라졌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여주는 얼떨떨했다.
눈앞에서 숫자 0들이 셀 수 없이 불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래. 재벌가면 돈이야 정말 많겠지.’
확실히 두 사람은 전생에서 그녀가 겪어 보지 못했던 부류였다.
이렇게 실감하게 되자, 그저 감탄만 나왔다.
“정신 없었죠? 원래 저 누나가 좀 그래.”
남태오가 얼른 들어가자며 서둘렀다.
그답지 않게 서두르길래 여주는 잠자코 따라가면서 물어보았다.
“저기, 태오 씨. 저분 아들도 곤 작가 팬이래요? 방금 잘못 들은 거 아니죠?”
“그러게요. 아니었으면 싶은데 그 꼬맹이가 그렇다네. 어린 게 무슨 범죄 추리 소설을 읽는다고.”
흐음. 기분 탓인가?
상당히 남태오의 반응이 까칠했다.
설마 아까 남 회장이 보내 준 꽃바구니에 이어서 질투는 아니겠지.
여주는 남태오의 질투가 그 정도는 아닐 거라며 대답했다.
“태오 씨. 그건 어린이 독자한테 실례되는 말이에요.”
“그보다 지금, 우리가 더 중요하게 해야 될 일이 있거든.”
그가 거듭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고요. 저는 이제 퇴근합니다.”
미리 도착해 있던 안 실장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후다닥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니까 여주는 궁금해졌다.
“태오 씨, 안 실장님은 지금까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요?”
“보너스를 받기 위한 추가 노동, 이라고 하던데.”
“추가 노동이요?”
“거기까지만 알아 두고. 바로 식사합시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셰프가 걸어나와 메뉴를 설명했다.
줄줄이 직원들이 걸어나와 셰팅을 해 줬다.
여주는 현재 상황에 대해서 추리를 해 보려고 했다.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네.’
문제는 전혀 예상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녀는 이런 이벤트 쪽으로는 문외한이었다.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막상 당사자가 되도 설렘보다는 막연한 느낌이 강했다.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까지 먹었지만 모르겠어서 그냥 물어보기로 했다.
“태오 씨. 우리 이제 다음은 룸으로 올라가나요?”
그녀의 질문에 막 식사를 끝낸 남태오가 양손을 마주 대고 비볐다.
“그 질문, 룸으로 바로 올라가고 싶어서 묻는 겁니까?”
싱글거리는 미소를 본 여주가 머쓱해했다.
“아니 저는 그냥 밥 다 먹었으니까 룸에 가서…….”
깜박했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낯 뜨거운 분위기로 흘러간다는 걸.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런 흐름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마치 그녀가 얼른 룸으로 가고 싶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요. 룸에 가서 그 다음은?”
저 남자의 반응은 정말이지 귀신같았다.
남태오의 눈빛이 건수 제대로 잡았다는 느낌이라 여주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제 발등을 제가 찍은 것이었다.
“……어, 태오 씨. 저는 룸에 가서 쉬자는 뜻이었어요.”
“내가 다른 쪽으로 오해할까 봐 그래? 굉장히 서두르네요.”
한 손에 턱을 괴고 여유롭게 놀려 대는 남태오는 얄미울 정도로 활짝 웃고 있었다.
평소에 잘 웃는 남자도 아니면서, 꼭 이럴 때만 웃지.
저렇게 눈망울까지 반짝반짝 빛내면서 웃어 버린단 말이야.
“왜 말을 하다가 마는 걸까, 응?”
거기다 여주가 시선을 피하려는 것까지 알고, 아예 손을 뻗어서 그녀의 손을 감아쥐었다.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만지작거리면서 손바닥을 간지럽히기까지.
“하아, 그럴 리가요.”
아무런 행동도 안 해도 눈길이 갈 만큼 잘난 남자가 적극적으로 나온다.
이제 그가 보내오는 신호에서 자연스레 지난밤, 사랑을 속삭였던 동작들이 연상됐다.
전생에서는 그렇게나 도도하고 까칠하게 굴었으면서.
대체 사람 마음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하는 게 누구인데.
어쩔 수 없이 여주는 같이 눈을 마주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하지만 그 이상의 양보는 절대 불가였다.
“아니요. 전혀 아니에요. 태오 씨는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그런 사람이란 게 뭘까?”
“그렇게 비인간적인 사람은 아니잖아요. 저, 진짜 힘들어요. 당분간은 좀 봐주세요.”
여주가 눈썹을 살며시 찡그리며 약한 소리를 하자, 남태오가 피식 웃고는 손을 놔줬다.
그러더니 정장 재킷을 벗어서 여주의 어깨 위로 덮어 줬다.
“한참 잘못 짚었네. 나 보기보다 꽤 음험하고, 비인간적인데.”
다정한 손길로 여주의 어깨를 토닥인 그가 작게 속삭였다.
흠칫 놀란 여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없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태오 씨.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사실인데 뭐. 잠깐 야경 보러 안 갈래요?”
그러면서 테라스로 이끄는데, 거기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주말이 아니라고는 해도, 늘 사람들로 붐비던 곳이었다.
“사람들이…… 오늘따라 없네요?”
“내가 다 비우라고 했으니까?”
아까 유해라 대표하고 한 얘기가 그런 거였구나.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주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밥 한 끼 먹는데 이렇게까지 돈을 쓴다니.
가만. 아까 먹은 게 그럼 얼마짜리였던 거지?
마지막으로 남은 케이크 한 조각을 다 먹지 못해 남긴 게 떠올랐다.
그녀가 아쉬워하는 사이, 남태오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손 닿는 위치에 목걸이를 보관해 두라고, 분명히 안 실장에게 지시했었다.
몇 가지 아이디어가 나오기는 했지만 남태오가 모두 기각시켰다.
케이크에 프러포즈용 반지를 넣는다든가, 먹는 것에 장난을 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그는 실소를 머금었다.
고민 끝에 그가 프러포즈용으로 주문한 것은 반지가 아닌 목걸이였다.
기왕이면 크고 비싼 걸 여주의 목에 걸어 주고 싶었다.
멀리서 누가 봐도 그의 여자라는 걸 알 수 있게끔 말이다.
‘여기 어디쯤에 있으려나.’
마침내 그가 근처에 있는 테이블 위에 있던 바구니를 발견했다.
손을 넣어서 상자를 열고, 목걸이만 움켜쥔 그가 뒤돌았을 때였다.
“태오 씨. 여기 야경이 유명하다던 이유를 알겠어요. 정말…… 아름답네요.”
그는 여주가 남산 타워 조명을 보고 빠져 있는 걸 발견했다.
의외로 아이 같은 얼굴로 우와, 소리를 내면서 보고 있었다.
“……그러게. 아름답네.”
남태오의 시선은 여주의 옆모습에 꽂혀 있었다.
제가 살면서 아름답다는 말을 쓸 일이 얼마나 있었던가.
그런 식상한 형용사는 입 밖에 낼 일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그 말밖에는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남산 타워의 조명을 보면서 기뻐하는 여주의 얼굴 위로 무지개색으로 변하는 조명의 불빛이 내려왔다.
넋을 잃고 보고 있는 여주를 보면서, 남태오가 넋을 잃을 차례였다.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뒤로 걸어갔다.
그의 손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나던 보석은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여주의 흰 살결과 대조되어 더 존재감을 드러냈다.
“……태오 씨?”
차가운 촉감이 닿자 놀란 여주가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