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런 여주를 본 가정부가 화들짝 놀라면서 물었다.
“어머. 아가씨. 선물 받아 놓고 왜 울어요. ……혹시 편지에서 막 회장님이 화내고 그러신 거예요?”
여주는 가정부의 추측에 설핏 미소가 나왔다.
“아, 아니요. 편지가 따뜻해서요.”
“……아아. 감동 받아서 그런 거구나. 난 또 놀랐잖아요.”
여주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가정부를 보면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용인의 입장인 가정부는 번번이 남 회장과 남태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것에 자기까지 일조한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놀라셨죠.”
“아유. 그럴 수도 있죠. 뭐 이런 일로 사과까지 하고 그러세요. 그럼 저는 가서 청소하던 거 마저 할게요.”
가정부는 다행이라면서 여주의 손을 토닥여 주고, 방문을 닫아 줬다.
여주는 들고 있던 편지를 조심스레 손으로 만져 보았다.
따뜻하다는 말이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종이에서 온기가 느껴졌기에, 끌어안았다.
정말로 마음 깊숙이 포근해졌다.
* * *
그날 저녁, 퇴근한 남태오도 꽃바구니를 발견했다.
거실 협탁 위에 가정부가 보기 좋게 올려 두고 간 것이었다.
그는 리본에 묶여 있는 편지까지 보면서도 한껏 질색하는 표정이었다.
“뭡니까, 이 수상쩍어 보이는 꽃바구니는?”
“회장님, 아니 할아버님께서 보내 주셨어요.”
여주는 그의 냉랭한 눈초리 앞에 꽃바구니를 슬쩍 가리고 섰다.
그와 조부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꽃은 아무런 죄가 없지 않은가.
“하아.”
일순간 그의 눈빛이 번쩍거리더니, 입술 사이로 탄식이 새어져 나왔다.
설마 여주의 팔을 그렇게 혹사했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남 회장이 보냈다는 건가?
아무리 제 조부라지만, 이건 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태오 씨. 보기보다 할아버님은 다정하신 분 같아요.”
여주는 꽃바구니로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볼에 홍조가 돌고, 그로부터 꽃을 보호하듯 가로막고 서 있었다.
발간 그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지만.
그 전에 바로잡을 것이 있었다.
남태오는 여주가 방금 한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다정하다고?
보기보다 다정해? 누가?
GK그룹의 남 회장은 그런 달달한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여태껏 그의 여동생인 태희에게도 다정한 말 한마디 한 적 없었다.
예비 손주 며느리 앞에서만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시나 본데.
양의 탈을 쓴 척하는 늑대하고 다를 게 뭐지?
“그거, 생화입니까?”
“네. 향이 정말 좋아요.”
솔직히 꽃보다 여주가 더 예뻐 보이는 남태오였다.
하지만 퇴근하고 온 자신보다 꽃에게 더 관심이 있어 보였기에 시니컬하게 말이 나갔다.
“생화라 벌레가 잘 꼬이게 생겼네요. 아닌가?”
그의 반응에 여주의 눈이 살짝 커졌다.
“태오 씨. ……혹시 지금 꽃한테 질투하는 거예요?”
“그래요. 꽃한테 질투하는 거 처음 봅니까?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보다 더 크고 화려한 꽃바구니 사 줄 수 있어요.”
남태오는 처음으로 꽃 선물을 해 줄 생각이었다.
갑자기 남 회장이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이따가 선물했을 꽃바구니가 더 빛났을 텐데.
기분이 언짢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오늘 밤 계획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바구니는 괜찮아요. 태오 씨는 꽃 한 송이만 줘도 저는 엄청 기쁠 테니까요.”
그의 계획을 알 리 없는 여주가 거리를 좁혔다.
그의 서류 가방을 건네받을 듯, 자연스럽게 뻗어졌다.
남태오는 그 손에 제 손을 대신 겹쳐 잡았다.
“고마운 말인데, 지금 시간이 얼마 없거든. 가서 외출 준비하고 나올래요?”
저놈의 꽃바구니가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다.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여주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태오 씨, 이 시간에 어디 가요?”
“그래요. 나랑 같이 어디 갑니다.”
그는 일부러 확실하게 알려 주지 않았다.
미리부터 알면 기껏 이벤트를 준비한 보람이 없었다.
“어, 어딜 가는데요?”
“글쎄요. 가 보면 압니다.”
“음. 네. 알겠어요.”
그는 여주가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사이, 안 실장에게 연락했다.
“난데, 꽃바구니는 생략하자.”
- 네. 그렇게 하죠. 늦지 않게 오셨으면 좋겠네요.
안 실장은 늘 그랬듯이, 이유도 묻지 않고 따르기로 햇다.
지금쯤 레스토랑에서 진두지휘하고 있을 텐데, 그의 말대로 늦지 않게 가야 했다.
남태오는 사실, 오늘 비밀리에 프러포즈를 준비해 뒀다.
꽃바구니는 겹쳐서 생략하기로 했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제 진심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이었다.
장소 선정도 매우 완벽했다.
바로 여주가 기억하는 그와의 첫 만남인 S호텔이었다.
그곳의 라운지 레스토랑 테라스를 빌렸는데, 당일 예약은 유해라 대표가 편의를 봐줬기에 가능했다.
사업상 비즈니스 파트너이기도 했고, 집안끼리도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이따가 그 누나가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겠지?’
유해라 대표는 워낙 활달한 성격이고 시원시원해서 뒷끝 없었지만, 짖궂은 면모도 있었다.
특히 예전부터 그를 볼 때면 놀리질 못해서 안달 난 사람처럼 굴곤 했었다.
그러니 제발 오늘만큼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만약 그의 프러포즈를 망친다면,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봐줄 수 없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여주가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저, 태오 씨. 이 옷 입으면 어때요?”
여주가 그가 입고 있는 옷과 어울리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누드 톤의 드레스를 골랐는데 투명한 살결이 훤히 비쳤다.
그는 열기가 오르는 걸 느끼면서, 넥타이를 쭈욱 잡아당겼다.
벌써부터 흥분해서는 곤란했다.
“아니, 그건 옷이 좀 야해서 안됩니다.”
“네? 이게 야해요? 길이도 긴데.”
“야합니다. ……그거 말고 저 옷으로 입는 게 좋겠어요.”
그는 옷장에 걸린 핑크빛 드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주의 발목까지 가려 줄 만큼 충분한 길이였고, 소매 길이도 길어서 마음에 들었다.
“으음. 이것도 꽃무늬인데. 태오 씨, 이런 거 안 좋아하지 않았어요?”
반면, 여주는 드레스에 꽃무늬가 새겨진 걸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그랬단 말입니까?”
남태오는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에, 모르는 척했다.
“네. 그때 이렇게 사납게 쳐다봤었잖아요.”
지난번 그에게 꽃무늬 가디건을 지적당했던 경험을 떠올렸던지, 여주가 그가 했듯이 눈썹을 높이 치켜올렸다.
그때 그의 표정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녀는 그길로 백화점으로 달려갔었다.
“아니. 난 기억이 전혀 안 나는데.”
그녀의 말에 남태오가 모르쇠로 나갔다.
“흐음. 태오 씨가 그렇다면 하는 수 없죠.”
여주는 그의 패션 감각을 믿기로 했다.
그가 입고 있는 정장은 짙은 네이비 컬러에 심플한 핀 장식이 꽂혀 있었다.
그에 맞췄는지 몰라도 제법 그녀가 입을 드레스와 잘 어울렸다.
“자, 완벽해요. 그럼 얼른 갑시다.”
남태오는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안 실장도 없이 그가 손수 운전을 하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대체 어디로 가려고 이러지?’
편한 옷차림으로 갈 곳이 아니라면…….
나름대로 추측을 해 보려고 했지만, 추리 소설 작가라는 것이 무색하리만치.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주어진 힌트가 너무 부족했다.
여주는 잠자코 남태오가 하는 대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
* * *
“태오 씨, 여기는…….”
“그래요. 우리 처음 만난 곳이에요. 발 조심해서 내리고.”
도착해서 내린 곳은 S호텔 앞이었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서 내리자 여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회귀하고, 남태오와 처음으로 만났던 그 장소였다.
야외 테라스와 레스토랑이 있던 이곳에서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었다.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났던 남자가 지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 저녁 먹는 거예요?”
“저녁도 먹고, 둘이서 할 얘기도 있고.”
아, 데이트하려던 거였구나.
여주는 남태오가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는 것에 마음이 몽글거렸다.
다시 한번 잘 살아 보자고 다짐했던 곳에 그와 다시 오다니.
제게는 정말이지 뜻깊은 장소였다.
그는 일부러 이곳으로 데려와 준 것이었다.
아까 남 회장의 편지를 받고 눈물을 흘렸을 때 기분이었다.
“아직 감동받기는 이른데.”
남태오가 장난스럽게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그런 다음,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레스토랑 쪽으로 걸어가던 때였다.
“남태오 대표, 맞지?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그치?”
그의 불안한 예상은 적중했다.
레스토랑 입구에서 두 사람을 맞이한 건 유해라 대표였다.
통굽 하이힐을 신고 있어서, 장신에 속하는 남태오와 거의 눈높이가 비슷할 정도였다.
“……누나가 왜 거기서 나오는 건데.”
“그야 내가 대기 타고 있었으니까? 남태오 네가 괜히 나한테 부탁을 했을 리가 없지. 옆에 피앙세 맞지? 소개 좀 해 줘. 나도 알고 지내고 싶네.”
“부탁할 때 조건, 분명하게 명시했을 텐데?”
까칠하게 반응하는 남태오에 유해라 대표는 웃고만 있었다.
누나라니?
예상치 못한 호칭이 여주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미처 소개받지 못한 그의 가족이 또 있었나?
여주는 키가 작았고, 낮은 굽의 구두를 신고 있었기에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느라 고개를 최대한 젖혀야 했다.
어라?
저 여자와는 구면이었다.
사실 저 당당한 태도, 배우 못지않은 훌륭한 발성은 쉽게 볼 수 없었다.
“우리, 또 보네요?”
“네. 안녕하세요.”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는 걸 보던 남태오가 여주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여주 씨, 무슨 사이입니까?”
그게 설명하자면 좀 사연이 긴데…….
여주가 머릿속으로 간략하게 정리하는데, 유해라가 대답했다.
“세탁비 주고받은 사이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