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하, 시발. 진짜 엿같네.”
졸지에 어디 갈 데도 없는 신세가 된 도지성이었다.
고작 하루 사이에 살인자란 누명까지 쓰고 말았다.
“뭣같은 타이밍 때문에 내가 지금 이 꼴이 됐단 말이지. 누군지 몰라도 걸리기만 해 봐. 이 손으로 찢어 죽여 버린다.”
그는 억울해 미칠 것 같았지만, 돌이킬 방도가 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하다못해 어젯밤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악마가 지금 나타나서 앞으로 남은 제 수명의 반을 달라고 해도 기꺼이 줄 수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실 줄, 그도 미처 몰랐다.
“이제 네 혼자 힘으로 벌어먹고 살아. 내 출판사에서도, 호적에서도 네놈은 완전히 아웃이야. 이 집안의 수치밖에 안 되는 자식아!”
“수치요? 언제는 뭐 제대로 아들 취급이나 해 주고 그런 말 하셔야지. 장남이라고 도지철 저새끼만 끼고돌았던 게 누군데! 누구냐고!”
“뭐? 뭐가 어쩌고 어째. 내 돈이고 내 회사야!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네놈이 뭐라고 나한테 감히 대들어! 이제는 남의 집 딸년 임신까지 시키고 사고나 친 놈 주제!”
“내가 그 사고 치고 싶어서 쳤어요? 그냥 여자랑 잠 좀 잤는데 그렇게 된 걸 나보고 어쩌라고! 나도 지금 알아서 억울하다고요.”
“네놈이 얼마나 못 미더우면 그 여자도 비밀로 했겠냐. 썩을 놈의 자식. 네놈은 아예 세상에 나질 말았어야 했어. 내 수치야 수치!”
몇 번의 험담이 오가고, 계속되는 폭언에 참을 수 없었던 도지성이 그대로 제 몸으로 아버지를 들이받았다.
도지문 회장은 떠밀리면서도 그를 향한 손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 혈압이 치솟아 버리고 말았다.
끄어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가더니 어떻게 손쓸 사이도 없이 숨이 끊겼다.
이미 죽은 아버지를 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방 보증금도 도지철이 뺐겠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돌아갈 차비도 없었는데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연락할 사람이 이렇게 없나.
도지성은 내키지 않았지만, 제일 먼저 박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부재중으로 넘어갈 뿐, 받지를 않았다.
하긴, 저한테는 임신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쳤었지.
혹시 진짜로 박하나가 그 등기 우편을 보냈을까?
완전히 믿을 수가 없으니, 도움 요청하기는 관두었다.
“……차여주. 시발.”
역시 구관이 명관이려나.
그는 이런 상황에서 차여주가 떠오른 것이 어이가 없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와 연락하고 지내던 이들 중, 아버지의 배경과 연관 없던 사람들이 없었다.
도지철 하는 걸로 봐서는 이미 제 편으로 만들려고 전화를 싹 돌렸을 게 뻔했다.
일단 밥을 사 먹을 돈이라도 필요했다.
오직 그 본능만으로, 그의 손가락이 과감하게 움직였다.
“……어. 차여주! 나 도지성인데, 그래도 네가 역시 내 전화를 받아 주는구나.”
전화를 받는 신호음에 그는 순간적으로 기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상대가 끊어 버릴세라 서둘러 말을 쏟아 냈다.
“어, 차여주. 그러니까 내가 잘못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나한테 이제 너밖에 없어. 아직 안 늦었으니까 돌아와. 대체 어디 숨어 있는 건데. 아니 그냥 말해. 내가 너 있는 곳으로 갈 테니까.”
그녀의 긴 한숨 소리가 들리고, 그의 심장이 긴장감으로 미칠 듯이 뛰어 댔다.
차여주까지 놓친다면 끝이었다.
- 도지성 씨.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요. 난 이제 당신하고 볼일 없어요.
“야. 네가 우편 보낸 거 아냐? 발신인 내 이름으로 해서 우리 집이랑 형한테 양쪽으로 보낸 거 너 맞잖아? 내가 바람 좀 피웠다고 이런 식으로 복수하냐?”
- 글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도지성은 박하나 아니면 차여주가 자신을 해칠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걸 빌미로 돈을 조금이라도 뜯어내야만 했다.
그는 작전을 바꿔서 한껏 불쌍한 척 목소리에 힘을 뺐다.
실제로도 기력이 달릴 대로 달린 상태였다.
“……그래. 그러면 네 말 믿을게. 내가 너 작가로 키워 준 은혜는 잊지 않고 있지? 내가 널 살려 준 셈이니까 이번에는 네가 나 좀 살려 줘. 나, 돈 좀 보내 줘라. 너도 알다시피 내 상황이 좋지가 않아.”
- 그래 보여요. 근데 어쩌나. 그쪽한테 돈을 주느니 차라리 어려운 불우 이웃을 돕겠어요. 그리고 키워 줘? 웃기는 소리 집어치워. 나는 내 모든 걸 바쳐서 글을 썼고, 너는 그런 나를 이용만 했을 뿐이야. 그 지경이 돼서도 변한 게 없네.
혀를 차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도지성은 식었던 분노가 다시 머리끝까지 차고 올라가는 걸 느꼈다.
꾹 참고 있던 것이 폭발했고, 그는 더 이상 본성을 숨기지 못했다.
“야, 시발. 차여주. 너 그딴 식으로 나올래? 네가 언제까지 나 피해서 그렇게 숨어 살 수 있을 것 같아? 한국 땅 좁아, 모르지?”
- 돈이 없으면 일당으로 알바라도 뛰어. 구질구질하게 구걸하지 말고.
그리고 전화가 뚝 끊겼다.
으아아악, 이걸 진짜 어떻게 죽여 버리지?
분한 마음에 마구 소리 지르면서 뛰던 도지성이 발이 빗길에 꼬여 그대로 쭈욱 미끄러졌다.
그대로 안면을 시멘트 바닥에 부딪치고 피를 철철 흘리던 그가 이를 갈면서 고개를 들었다.
택배 차량이 멈춰 서고, 기사가 내려 물건을 잔뜩 들고 상가로 들어갔다.
도지성의 눈이 차량 한쪽에 랩핑된 광고를 홀린 듯이 보았다.
<물류 센터 알바 급구! 일당 7만 원, 식사 당일 지급>
저, 저거다!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얼른 일어났다.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자 친절하게 안내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경기도 외곽 지역의 물류 센터라면서, 서울역까지 오면 대형 차량이 데려다준다고 했다.
“그 일당보다 식사 당일 지급, 그거 확실한 거죠? 아니면 신고할라고.”
지금 도지성한테 밥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당황한 목소리가 확답을 해 주자, 그는 눈이 반쯤 뒤집힌 채로 서울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운이 좋으면 거기서 노숙자들한테 제공하는 무료 배식도 받을 수 있겠지.
일단 배부터 든든하게 채우고 나서, 생각을 좀 해 봐야겠다.
박하나하고 차여주, 그 두 년한테 어떻게 복수하지?
피와 땀, 그리고 채 마르지 않은 빗물에 젖은 옷까지.
그는 역한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질질 다리를 끌며 걸어갔다.
* * *
“역시 인간은 변하질 않는구나.”
여주는 전화를 끊자마자 핸드폰을 내려 두고, 침대를 벗어났다.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도지성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잠기운이 가셨다.
‘뭔가 도지성의 신변에 위협이 갈 만한 큰일이 벌어진 모양이네.’
협탁 위에 있던 리모컨을 들고 텔레비전을 켰다.
한낮의 뉴스는 지난밤에 전한 소식을 다시 보도 중이었다.
황금 출판사 도지문 회장의 별세.
화면에 뜬 글자를 보던 여주의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리모컨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이내 신음이 흘렀다.
“하아아.”
퍽퍽 제 가슴을 두드린 그녀가 침대로 가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파묻었다.
뉴스 보도 내용이랑 방금 전 도지성과 통화한 걸로 미루어 짐작하자, 대충 돌아가는 상황이 그려졌다.
‘전생에도 그분께서는 참 몰인정하셨더랬지.’
도지문 회장은 대외적 이미지는 출판계의 거목이었지만, 집안에서 그를 겪어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고아 주제, 그깟 글 좀 써서 돈 번다고 네 남편 기죽일 생각은 아예 처음부터 접는 게 좋을 거다. 그게 네 아내로서 도리다. 그리고 우리 집안 행사도 꼬박꼬박 참석해라. 그게 며느리로서 네 도리다.”
전생에서 그분께서는 그녀를 작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신 아들과 결혼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종 같은 며느리처럼 부려졌었지.
시댁에서 제사를 지낼 때마다 그녀는 빠짐없이 참석해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 날밤을 새서라도 글을 썼었다.
다른 며느리들은 중간에 친정으로라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주는 고아였기 때문에 도망칠 곳도 없었다.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분의 감시하는 눈초리가 어찌나 매섭던지.
시자가 붙은 그들도 가족이라고 믿고 싶었던 마음 탓에 그녀는 그런 이들도 제 가족이라고 믿고 어떻게든 정을 붙이려 했었다.
‘이 끔찍한 기억이 다시 떠오를 줄이야.’
여주는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듯이 잡아당겼다.
간신히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전생의 기억을 모조리 잊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까는 잘했어. 아주 잘한 거야. 차여주.’
도지성이 도와 달라고 했을 때는 희열을 느낌과 동시에 가증스러웠다.
두 번 다시 볼 일은 이제 없겠지만, 끝까지 한심한 인간이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겠지.
여주는 두통이 스미는 것에 약을 먹으려고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출근했다면 좋을 텐데.
약 좀 찾아 달라고 부탁해 볼 생각이었다.
주춤거리며 한쪽 손으로 허리를 붙잡고 문 앞까지 갔을 때였다.
“여주 아가씨. 혹시 지금 일어났어요? 텔레비전 소리가 난 것 같아서. 괜찮으면 문 좀 열어 볼래요? 선물이 왔어요.”
“……저 방금 일어났는데 선물이요?”
“잠시 실례할게요. 귀한 선물인데, 아무래도 직접 봐야 할 것 같아서.”
문이 열리고 가정부보다 커다란 꽃바구니가 먼저 들어왔다.
“글쎄, 회장님께서 직접 손 편지를 써서 보내오셨지 뭐예요. 그날 뵀을 때랑 달리 스윗하신 면모가 있으신가 봐요.”
가정부는 여주가 잘 볼 수 있게끔 꽃바구니를 협탁 위로 내려 뒀다.
제법 묵직해 보이는 바구니에는 정말 카드가 하나 꽂혀 있었다.
여주가 열어 보자, 만년필로 적힌 정갈한 글씨가 들어왔다.
<여주 양. 그날은 미안하네. 나 때문에 팔을 못쓰게 됐다니 면목이 없구만. 역시 그날 침을 맞혀서 보냈어야 했는데. 내 사과를 받아 주겠나.>
물결처럼 흐르는 문장을 하나씩 새기는데, 어느새 눈앞이 흐려졌다.
하루 만나 뵀던 남 회장의 무서운 눈빛, 인자한 미소가 덧씌워졌다.
톡. 톡.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걸, 여주는 참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