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자승자박이었나?”
남태오는 그렇게 된 경위를 물었는데 안 실장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사실 이건 극비리에 아까 전 입수한 정보인데요. 어제 도 회장 앞으로 특급 우편이 왔었다네요. 퇴근하고 방에 들어가서 우편을 보다가 따로 나가 살던 도지성까지 아들들을 긴급 소집했는데…… 그렇게 됐다네요.”
“정보 출처가 누군데?”
남태오는 안 실장의 설명이 필요 이상으로 구체적이라는 걸 지적했다.
“사실 도지철 사장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상주를 맡게 될 테니 장례식에 대표님께서 꼭 참석해 주십사 말이죠.”
“그럴 정신이 있다니 대단한데.”
굳이 남에게 밝히지 않았도 됐을 가정사였다.
본인의 치부일 수도 있는 걸 밝힌다는 건, 그만한 목적이 있다는 거였다.
‘제게 유리한 상황을 적극 이용하는 거군.’
남 회장의 죽음에 도지성이 일조한 몫이 크다는 거였다.
아무래도 도지철은 이쪽뿐만 아니라 연락이 닿는 주요 인사들마다 그 이야기를 전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뭐, 살아생전에도 남 회장의 장자 사랑은 요란하기로 유명했지만 말이다.
“도지철 사장이나 도지성 편집장이나 형제 둘이서 나름 야망은 넘쳤잖습니까. 뭐 딱히 효심은 모르겠고요. 제가 보기에는 말이 상주이지, 권력 다툼에서 승리를 거머쥔 자의 여유, 뭐 그런 거 아닐까 싶습니다만.”
“흐음.”
“그리고 대표님. 죽은 회장님한테 뭘 들었는지 GK기업을 슬쩍 언급하더라니까요. 아무래도 대표님 뒤에 누가 있는지 확실히 알았던 것 같습니다.”
“어쩐지 잘 숙이더라.”
남태오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보니까 죽은 남 회장이 정말로 장자한테만 모든 것을 전했던 모양이다.
“마땅히 장례식 참석하겠다 전해. 화환도 제대로 보내고.”
공과 사는 구분하는 것이었다.
남태오는 마음 같아서야 도지성네 집안과는 더 이상 상종하기 싫었지만, 죽은 도지문 회장은 그래도 괜찮은 비즈니스 파트너였다.
이미 죽은 자에게 그 정도 예우는 해 줄 수 있었다.
“아니, 무슨 날씨가 저렇지? 아까까지도 화창하더니 갑자기 흐리네요. 꼭 비가 곧 쏟아지기라도 할 것처럼. 꼭 하늘도 타계한 그분을 추모하는 것 같네요. 곧 이런 기사가 쏟아지겠어요.”
“안 실장, 보기보다 꽤 감성적이야.”
남태오는 여름 날씨가 으레 그렇듯 뭐든, 갑작스럽지 않냐고 말했지만, 이내 본전도 못 찾을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보기보다라니요. 대표님, 저 원래 감성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는 대표님께서야말로 아까까지 저기 창가에서 느끼한 얼굴로 레몬차를 마시면서 손가락을 두드리고 계셨잖아요.”
“……그러게 노크를 하라니까.”
“아니, 전 노크를 했는데 못 들으셨다니까요. 저 진짜 억울합니다?”
어째 갑자기 필요 없는 대화가 길어진 것 같아서 남태오는 이만 나가 보라고 손을 저었다.
안 실장이 웃으면서 방을 나간 뒤, 남태오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쯤 여주가 일어났으려나?
괜히 도씨 가문의 소식을 알게 돼서, 그쪽에 마음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데뷔한 출판사이고, 얼마 전까지 있었던 곳이지만.
‘이참에 출판사를 하나 차릴까?’
아직 여주가 새로운 출판사하고 계약하지는 않았다.
수술도 남아 있었으니까,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여주를 위해 또 다른 사업을 계획해 보려고 하는 그때였다.
또 남 회장이라, 남태오는 바로 이마를 구겼다.
- 나다. 태오야.
“예. 회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 곧 비도 오고 파전에 막걸리 한 잔, 딱이지 않냐.
“회사 출근하신 분이 하실 생각은 좀 아니지 않습니까?”
- 당연히 너랑 먹겠다는 건 아니고, 여주 양이 전화를 안 받아서 말이다. 이따 저녁에 같이 밥 먹으면 얼마나 좋으냐. 너도 오든가.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손주 며느리 부리듯이 그러지 마시죠. 그리고 여주 지금 피곤해서 못 일어나고 있을 겁니다.”
- 뭐? 설마 나 때문에 여주 양이, 설마 팔이 그렇게 아프댔냐?
“예. 팔을 너무 혹사시켜서 움직이질 못해요. 그렇게 아시고 당분간 연락 자중하세요.”
남태오는 그 말을 끝으로 서둘러 통화를 종료했다.
‘아직 잠을 자고 있다니 다행이네.’
그는 여주가 푹 자고 있을 걸 생각하면서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투두두둑.
어느새 창밖으로 거센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의 기분은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의 속도를 따라서 손가락을 튕겨 보던 그가 이내 업무에 집중했다.
얼른 일 처리를 끝내야 퇴근도 빨리할 테니까.
집에 꿀단지라도 숨겨 놓은 듯, 뿌듯하였다.
* * *
오후부터 점차 거세지던 소나기가 퍼붓고 있었다.
연희동의 주택가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길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의 발목까지 빗물이 잠겼을 때쯤, 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대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남자 역시, 온몸이 푹 젖어 있었다.
남자의 앞에 굳게 닫힌 철제 대문이 오늘따라 유난히 거대했다.
그걸 초점 없이 바라보던 남자가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이를 꽉 악물고는 대문을 주먹 쥔 손으로 두들겨 댔다.
“문 좀 열어 봐! 시발, 문 좀 열어 보라고. 내가 설명한다니까? 내가 다 설명하겠다고! 네가 형이면 다야? 야 도지철! 나보다 박하나 걔 말을 더 믿는다고, 어?”
남자는 손에서 피가 나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이 문이 열릴 때까지 죽어라 두드리고, 다시 두드릴 생각이었다.
잠시 후, 바닥을 질질 끄는 느린 발소리가 났다.
끼이이익.
대문이 열리고 나온 건, 도지철이었다.
그는 밤새 울어서 시뻘게진 눈으로 우산을 쓰고 서서 내려다보았다.
“도지성, 미친놈아. 그래도 최소한 인간의 탈을 썼으면 우리 집안에서 꺼질 줄 알았는데. 지금 꼴에 억울하다고 시위하냐?”
지난번과 달리 도지성의 태도는 고분고분했다.
“……내가 잘했다는 게 아니야. 나 때문에 아버지 그렇게 되신 것도. 그래. 다 내 잘못이야. 근데 실수는 할 수 있는 거 아냐? 막말로 그 우편 내가 보낸 것도 아니고, 어떻게 식구라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내 말은 믿지도 않냐고.”
하지만 말을 꺼낼수록 원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도지성을 보던 도지철이 퉤, 침을 뱉어 냈다.
“하. 이 인간 말종 같은 새끼 봐라. 실수? 넌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은 죄인이야. 우편을 누가 보냈든 뭐가 중요하지? 그리고 아버지가 네놈 불러서 물어봤을 때, 오히려 역으로 따지면서 달려든 새끼가.”
도지성은 얼굴에 침이 묻은 채, 무릎 걸음으로 기어갔다.
도지철의 바지 밑단을 붙잡고 우는소리를 냈다.
“야, 도지철. 형. 나 좀 봐주라. 한 번만 봐줘. 내가 아버지 죽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잖아. 어? 시발, 제발 한 번만 봐줘라. 내가 이렇게 빌게.”
“난 더 할 말 없다. 네놈은 누가 뭐래도 살인자니깐. 한 번만 더 형이라고 부르면 경찰 부를 테니까 꺼져라.”
도지철이 마지막으로 경고를 하자, 도지성이 본색을 드러냈다.
“그래. 시발. 네가 날 살려 주는 척 덮고 넘어가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최대한 조용히 넘어가면서 네가 다 먹으려는 거잖아.”
그때 도지철 아내가 우산을 쓰고 신발을 끌면서 나왔다.
“진짜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여보, 내가 경찰에 신고했어요. 이만 들어가요. 뭐 저런 인간도 아닌 걸 상대하고 있어요. 아버님이 살아 계셨으면 노하실라.”
제 남편에게 팔짱을 끼며 깔보는 언행에 도지성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형수! 내가 당신 그 시커먼 속내 모를 줄 알아? 도지철 저 새끼랑 짜고 치고.”
“아유 정말, 귀 아프다니까. 마침 저기 경찰차 오네. 여보, 가요.”
경찰이라는 말에 도지성이 주춤했다.
그도 아버지의 죽음에 죄의식은 갖고 있었다.
“어. 그래. 들어가자고.”
“아 참. 이거, 갖고 얼른 꺼져요. 불결해.”
도지철 아내가 종이를 꺼내서 던져 버리고 대문을 닫았다.
종이는 삽시간에 빗물에 잠겨 잉크가 번져 버렸다.
맨 위에 적힌 글씨도 잠겨 들고 있었다.
망할 박하나의 임신 진단서였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발신인으로 해서 등기 우편을 보냈다.
아버지는 추궁했고, 형인 도지철은 말리는 척하면서 분노를 거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변명하기 급급하다가, 성질을 못 이겨 아버지에게 대들어 몸싸움까지 벌였다.
원래 고혈압이었던 걸 깜박했다.
평소에도 그렇게 장남만 끔찍이 아끼더니, 유언장에도 모든 재산은 장남에게 상속된다고 적혀 있었다나.
도지성은 반쯤 삶의 의지가 꺾여져 나가 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머릿속에서 벌레가 웅웅거렸다.
왜 내가 이런 비참한 일을 겪어야 하는 거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어쭙잖은 패배 의식과 분노가 그의 숨통을 조여들었다.
꼬르르륵.
그 와중에 눈치없이 울려대는 소리에 그는 배를 어루만졌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갑자기 이 집에 불려 올 때부터 뭘 먹은 기억이 없었다.
비척비척 어딘가로 걸어가던 그가 기사 식당 앞에서 멈춰 섰다.
“우린 선불이여. 카드는 안 받고 현금만 취급혀.”
카운터를 보는 중년 남자가 말끝을 잘라먹고 툭툭 던졌다.
“어르신. 이번만 제발 카드 받아 주세요. 네? 제가 하루를 꼬박 굶었다고요.”
도지성이 애원하자, 남자는 카드를 받았지만 결제가 되지 않았다.
“이거 말고 딴 거 없어? 되질 않잖아. 돈 없으면 다음에 오든가.”
“그럴 리가 없는데. 다시 잘 좀 해 보세요.”
도지성은 허기에 먹힐 것 같아서, 어떻게든 여기서 밥을 먹고 싶었다.
남자가 다시 해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 카드가 정지됐잖아. 그러게 현금을 들고 다녀야지. 젊은 사람이 정신을 어따 두고 다니는겨? 쯧.”
쌀쌀맞은 중년 남자의 태도에 후불로 하면 안 되겠냐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도지성은 그렇게 식당에서도 쫓겨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