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남태오에게 순간 마음이 약해질 뻔했다.
그래도 여주는 할 말은 하기로 했다.
“……며칠 저를 혼자 자도록 냅두면, 그러니까 태오 씨가 좀 봐주면 금세 나을걸요.”
“그건 나도 장담할 수가 없는데.”
“백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녀의 말에 남태오가 방 문고리를 잡은 채로,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넓은 어깨가 들썩거리다가 이내 허리가 반쯤 접혔다.
덕분에 그의 남자답게 잘빠진 허리 라인이 셔츠 위로 드러났다.
그 절경 앞에서 여주도 같이 웃어 버렸다.
방금 그렇게 내가 웃긴 얘기를 했나?
잠시 후 남태오가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말했다.
“이제 보니까 차여주 씨, 남자 잘 다루네.”
“네?”
“아니. 나한테는 오십 보 후퇴나 다름없잖아.”
남태오가 대꾸하며 시간을 보자,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정말 늦게 생겼다.
“푹 쉬어요. 나 진짜 갈 테니까.”
“네!”
기다렸다는 듯이 단답형으로 짧게 대답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여주가 닫히는 문 너머로 사라졌다.
이대로 가는 게 아쉬운 건 나뿐인 것 같네.
그가 현관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이, 안 실장이 전화로 재촉했다.
서둘러 밖으로 나간 그가 차에 오르자 운전석에서 핀잔이 날아왔다.
“대표님. 미리 언질도 주시지 않고, 늦으셔서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르시죠?”
“미안해. 안 실장, 많이 기다렸나?”
평소라면 안 실장의 핀잔은 가볍게 넘겼을 테지만, 그래도 되는 두 사람 사이였지만.
기분이 무척 좋았던 남태오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 말을 듣자마자 운전대를 쥐고 있던 안 실장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그렇다고 저한테 그렇게 바로 미안하다고 말씀하실 것까지야……. 그런 것까지 커버하는 게 제 일 아니겠습니까. 정말 미안하시면 성과급 보너스를 좀 올려 주시면 좋고요.”
“그런데 왜 그렇게 손을 떨지?”
“아. 제 수전증 따위는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그보다 대표님, 아침부터 무슨 좋은 일 있으셨어요?”
안 실장은 농담이 먹히지 않자, 적당히 분위기를 감지하고 운을 띄웠다.
부하 직원으로서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 바로 상사의 표정과 말투였다.
특히 남태오처럼 감정 표현이 절제된 사람이라면 예민하게 살펴야 했다.
“그래 보여?”
“대표님. 지금 좀 많이 티 나시는 거 모르죠?”
“응. 거울이 없어서 모르겠네.”
순순히 남태오가 제가 들떠 있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안 실장은 거 보라는 듯이, 방금 전보다 목소리를 더 높여 말했다.
“이것 보세요. 평소에는 제가 말 열 마디를 해야 대표님께서 한두 마디 하실까, 말까 그러시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제가 하는 말마다 다 받아 주시잖아요? ……연애 사업이 평탄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안 실장은 남태오의 기분이 연애 사업과 관련 있을 거라 적당히 찍어 본 거였다.
그동안 봐 온 남태오는 연애를 한다고 해서, 상대에게 휘둘릴 성격이 결코 아니었기에 확신하는 어투는 아니었다.
“어.”
그런데 이번에도 돌아온 건 긍정이었다.
뭐지?
내가 지금 때려 맞췄는데 다 맞췄네?
안 실장이 속으로 이게 무슨 로또 같은 확률이냐, 의심할 때였다.
“그래서 말인데, 안 실장.”
“네. 말씀하시죠. 대표님.”
“나 결혼하고 싶어졌어.”
이어서 하는 말까지 듣고 나서는, 안 실장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귀를 후비는 거였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 들은 것일 테지.
그가 알기로 남태오는 이게 첫 연애였는데, 결혼이라니…….
“네? 결혼이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대표님. 갑자기 왜 그러시는데요?”
“어. 그니까 장난 아니게 하고 싶다고.”
이제는 되도 않는 드립까지 받아치다니!
안 실장은 횡단보도 대기 신호가 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멈춘 뒤, 심호흡을 크게 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 남태오의 결혼을 누구보다 간절하게 원하던 것은 남 회장이었다.
당사자인 남태오는 그저 할 도리를 한다는 식의 수동적인 태도였고 말이다.
“날 오래 봐 온 너라서 먼저 말하는 거야.”
잠시 갓길에 차를 댄 안 실장이 숨을 훅 들이켰다.
“네? 진짜요? 진심으로요? 어느 분이신데요?”
“진심이야. 프러포즈 준비를 해야겠어.”
“……대박. 어느 분이신지 몰라도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우리 대표님께서 결혼을 생각하게 만들다니.”
안 실장이 기함하자 남태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 대단한 여자가 누구인지 알면, 안 실장도 깜짝 놀랄 것이다.
“안 실장 너도 아는 사람인데.”
“네? 그럴 리가요. 저하고 대표님하고 겹치는 인맥은 거의 없죠. 근데 대체 언제 만나서 연애하시고 결혼하실 생각까지 다 하신 겁니까? 저 진짜 궁금해서 그럽니다.”
안 실장은 제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면서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눈 떠서 일만 하던 상사였고, 그 시간의 대부분은 저 역시 함께했다.
그랬으니 자신도 지금까지 본의 아니게 모태 솔로였는데 말이다.
“대표님이나 저나 모태 솔로였잖아요.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어렸을 때부터 지켜봐서 그건 제가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남태오가 먼저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무진장 허전해졌다.
그런 안 실장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태오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나중에 소개하지. 일단 앞에 보고 운전 똑바로 하도록.”
“네! 저도 꼭 대표님이 먹여 주시는 국수 먹고 싶습니다.”
안 실장이 미리부터 김치 국물을 한 사발 가득 들이켰다.
남태오는 피식 웃더니 무시하지 않고 답을 해 줬다.
“아, 안 실장 국수 좋아했지. 두 그릇 먹고 가.”
“저 그럼 진짜 식장 가서 두 그릇 먹고 갑니다? 진짜로요.”
“그러라니까.”
남태오는 거기까지 하라며 손을 휘휘 젓고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저답지 않게 지금 좀 들떴다는 걸, 자각하고 나자 얼굴이 홧홧했다.
‘그래도 안 실장이 있어서 다행이군.’
안 실장은 남 회장과 태희를 제외하고 가장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가족 같은 사이였다.
오랫동안 서로를 보았기에 그를 믿고 의지하는 부분이 있었다.
만약 제게 소중한 상대가 생긴다면, 지금처럼 자랑을 하고 싶었던 건가?
남태오는 그런 제 모습이 낯설었지만, 구름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이 느낌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제부터 프러포즈를 준비해 볼까?’
어디서 들으니까 커플 사이에서는 이벤트가 그렇게 중요하다더라.
분명 여주도 그런 이벤트를 해 주면 기뻐해 줄 것이다.
제대로 이벤트 형식을 갖춰서 빠른 시일 내에 청혼을 할 생각이었다.
* * *
남태오의 고조된 기분은 대표실 안에서도 여전했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책상으로 가는 대신, 창가에 앉아 햇살을 만끽하였다.
손에는 콜드브루 대신, 달달한 레몬차를 들고서 향을 음미하는 중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여주와의 첫날밤을 보낸 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콧노래를 살짝 흥얼거리던 그가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잔망스러운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을 때였다.
“……저, 분위기 깨서 죄송합니다만. 대표님.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요.”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몰라도 안 실장이 굉장히 멋쩍은 얼굴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왔으면 노크를 할 일이지.”
남태오는 혀를 쯧, 차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안 실장 앞으로 걸어갔다.
“했습니다. 저, 진짜로 했어요. 그런데 대표님께서 지금 평소랑 달리 붕 떠 계시는 바람에 미처 못 들으신 겁니다.”
“그래. 그럼 어디 붕 떠 계시다가 내려온 김에, 설명 들어 보자고.”
억울해하는 안 실장더러 남태오가 소파 쪽을 고갯짓해 보였다.
대충 안색을 보아하니 지난번 따로 부탁해 뒀던 일인 것 같았다.
어째 시일이 좀 걸린다 했더니 나름대로 애를 쓴 모양이었다.
“대표님. 지난번, 황금배 출판사에 박하나 작가 알아보라고 지시하셨던 건 기억하십니까?”
“당연히 기억하는데, 왜?”
역시 그때의 일이라면, 여주와 관련이 있어서 따로 지시한 게 맞았다.
남태오가 계속해 보라는 듯,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제가 알아보니까 박하나 그 여자, 배경이 꽤 화려하더라고요. 별명이 반쪽짜리 재벌이라고, N유업 박 회장님 혼외 자식이었던 거죠. 사실 그래서 좀 뒷조사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워낙 안하무인이라 집안에서도 통제가 안 되는 성격이라고 합니다.”
“반쪽짜리가 왜 출판사 편집장하고 바람이 났지?”
박하나의 배경이 뭐든, 남태오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여주와 조금이라도 엮였다는 것이 불쾌할 따름이었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근에 박 회장님 사모님과 트러블이 있어서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네요. 그래서 그 도지성 편집자에 대해서도 조사를 좀 해 봤습니다.”
“잘했어.”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쪽은 출판계 큰손인 황금 그룹의 도지문 회장 둘째 아들인데, 집안이 장남 위주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불화가 극심했던 모양입니다. 본가에서 일부러 따로 나와서 살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최근에 집안에 변고가 닥쳤고요.”
“무슨 변고지?”
“도지문 회장이 평소 고혈압이 있긴 했었는데, 어젯밤 갑작스럽게 뇌출혈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어젯밤에…….”
안 실장이 태블릿으로 자료 화면을 보여 줬다.
사회문화면 가장 상단에 커다란 글씨로 헤드라인이 눈에 띄었다.
<황금 도지문 회장 타계, 출판계의 큰 별이 지다.>
사망 추정 시각을 보는 남태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창 여주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텔레비전은커녕, 핸드폰조차 꺼 놓아 버렸으니 알 리가 없었다.
이 정도면 문화계가 들썩일 만한 일이기는 했다.
도지문 회장은 황금 그룹의 창시자였으며, 60년이 넘도록 평생 대한민국 출판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쳐 온 거목이었다.
그 옛날 북촌의 허물어져 가던 작은 단칸방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휘하 5개 브랜드를 일궈 낼 만큼,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도 회장님 일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도지성은 지금 쪽박 신세 될 일만 남았다네요. 글쎄, 모든 상속권이 장남한테로 넘어갔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