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도, 동정?’
아니, 이쪽이야 회귀를 해서 어려졌으니 그렇다 쳐도, 저 잘난 남자가 대체 왜?
여주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양쪽 눈썹을 크게 씰룩거렸다.
빠르게 눈을 껌벅거리다가 고개까지 흔들었다.
최근에 그녀가 보여 줬던 표정 중에서 가장 다채로웠던 터라, 남태오는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제 턱을 문질렀다.
“왜, 내 말이 영 안 믿깁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네.”
솔직하기 짝이 없는 여주의 성격이 이럴 때도 드러났다.
멍하니 딴생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여, 남태오는 그녀의 뺨에 손바닥을 가져갔다.
살짝 열이 있는 듯한 피부에서 지난밤의 열기가 피어오를 것만 같았다.
그의 턱에 순간 힘이 들어갔지만, 이내 숨기고 그는 손으로 여주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무 여자한테나 내 동정을 주고 싶지 않았거든. 그래서 고이 아끼고 아꼈습니다만.”
“……아.”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속삭이자, 힘이 빠져 늘어져 있던 여주의 몸에서 체온이 점점 올라갔다.
맥박 역시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전보다 그의 시선을 받는 그녀의 눈빛에 긴장감이 서렸다.
그녀 역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지난밤, 사랑을 나누었던 어느 순간을 떠올렸으려니.
남태오는 그녀의 속눈썹이 떨리는 걸 즐겁게 바라보았다.
“믿게 해 주고 싶은데 뭘로 증명해야 하나?”
“아, 저는 그러니까…… 태오 씨가 처음 같지 않게 너무 능숙해 보여서.”
“보고 들은 건 있으니까. 내 나이에 그런 경험치를 무시하면 안 되겠죠.”
여주 입장에서는 그의 나이가 있으니까 경험이 있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에게 실전은 어젯밤 여주와 나눈 밤이 처음이었다.
남태오는 할 수만 있다면 저 역시 총각이었음을 증명하고 싶을 정도였다.
안타깝게도 남성은 신체 구조상 증명해 낼 방법이 없었지만 말이다.
여태껏 그는 여성의 순결 주의에는 까다로운 편이 아니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제 여자가 저처럼 처음이었다는 걸 알고 나니까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 됐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기분이 한껏 고조된 탓에 그는 평소보다 더 짖궂게 굴고 있었다.
“필요하면 어떻게, 몸으로라도 더 증명해 줄까요?”
여주 옆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다부진 몸이 어느새 이불처럼 그녀의 몸을 뒤덮을 것처럼 기울어지고 있었다.
“아니요. 저, 완전 이해했어요. 증명하실 필요 없어요.”
“정말?”
“……태오 씨 성격을 아니까요.”
멍한 눈빛이던 여주가 다시 이성이 돌아왔는지, 확신조로 말했다.
전생에서 남태오는 다소 결벽증이 있다고 볼 만큼 주변 사람들에게 거리감을 뒀었다.
이성은 물론이고 동성도 포함했는데 그 또한 자기 관리의 일환이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차기 GK기업의 후계자였으니 당연한 처신이었다.
하지만 처음에 그의 출신을 몰랐던 업계 관련자들 일부는 재수가 없다고 평하기도 했었다.
개중 일부에는 도지성과 박하나도 껴 있었다.
나중에 신분이 밝혀지고 나서도 재벌로 유세를 떤다며 없는 말을 지어내기도 했다.
‘……그때는 저 남자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기억해 두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는데.’
지금 와서는 그때의 기억이 희미하지만, 많은 도움이 됐다.
저 남자의 평판은 누가 뭐래도 그녀가 잘 알았다.
그리고 뭣보다 여주는 웃고 있는 남태오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 주제로 대화를 계속해서 이어 나갈 자신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잖아?’
저 남자는 불과 몇시간 전까지 맨몸으로 뒹군 사이였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놀리기까지 하는 걸까?
그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그녀로서는 그의 저런 행동이 몹시 신기했다.
“저기, 태오 씨. 이제 그만 출근 안 하세요?”
“내가 이제 그만 여주 씨 곤란하게 하면 좋겠는데, 그치?”
여주의 속마음을 정확히 간파해 낸 남태오가 이번에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그 갑작스러운 접촉에 여주는 살짝 움츠러들었다.
“근데 어쩌나…….”
여주의 숨결이 빨라지자, 태오의 눈이 짐승의 그것처럼 돌연 번쩍였다.
슬쩍 훑어 내리는 그의 눈에 여주의 목 주변부터 가슴 언저리까지 밤새 제가 남겨 놓았던 붉은 흔적들이 가득했다.
그렇지 않아도 흰 살결에 인장이라도 찍은 것처럼 여기저기 번진 것을 보고 있자니,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이 차올랐다.
도저히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주의 몸 상태와 출근 시간을 고려해서 관계의 연속은 무리겠지만, 최대한 밍기적거리고 싶어졌다.
“어제 못 물어본 거 마저 물어봐야 되는데…….”
“태오 씨. 퇴근하고 나서 하면 안 될까요?”
“아직 그 정도 시간은 남았는데. 말로 하는 거 싫으면, 몸으로 대화할까?”
“아, 아니요. 뭐가 궁금한데요?”
남태오는 곤란해하는 여주의 얼굴 역시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곤란할 정도로 지금 기분이 좋았으니까.
스스로 감성적인 인간이라 여긴 적은 없었지만, 오늘 아침만큼은 달랐다.
눈을 뜨자마자 들이마신 공기가 얼마나 신선했던가.
이 방 안의 풍경마저도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던지…….
누군가 묻는다면 계속해서 쏟아 낼 자신이 있었다.
그는 여주가 제게 등을 기대고 편히 누울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누웠다.
그리고 어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시간을 보냈을 여주의 일상을 듣기로 했다.
“그래서, 회장님이랑 데이트는 잘 하고 왔습니까?”
“……제가 할아버님이랑 어제 다녀온 걸 데이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뭐 했는지 말해 봐요. 난 하나도 모르니까.”
남태오는 일부러 남 회장하고 전화해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걸 숨겼다.
그는 여주의 목소리로 직접 듣고 싶었다.
“노래방 가셔서 할아버님 노래하시고, 저는 탬버린 치고 밥 먹으러 가서 맛있는 갈비 사 주셨어요. 돌아가실 때는 용돈도 주시고, 얼른 결혼하라고도 하시더라고요.”
“여주 씨가 탬버린을 쳤다고?”
남태오는 그 순간, 멀리서 남 회장의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착각을 느꼈다.
어제 왜 그렇게 즐거워하나 했더니만.
결국 여주를 데리고 그놈의 노래방에 가서 소윈 성취를 하셨군 그래?
그는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여주의 모습을 상상하느라, 상상력을 한껏 동원해야만 했다.
“아, 네. 그게 리듬을 타려다 보니까, 그렇지만 어설펐을 거예요. 저도 노래방은 처음이라.”
“아니, 그럼 노래방을 처음 갔는데, 그걸 회장님이랑 간 겁니까? 하아.”
남태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심각하게 이마를 짚었다.
질투심으로 금방이라도 돌아 버릴 것 같은데, 여주 앞이라서 참는 중이었다.
반면 여주는 그의 격한 반응에 깜짝 놀랐다.
“그러면 안 됐나요? 저는 할아버님이 적적해 보이셔서.”
“아니, 여주 씨한테는 아무 잘못이 없지. 다 회장님이 고집부리신 탓이겠지.”
노래방 가는 거 그 버릇 끊은 줄 알았더니.
예전에 남태오가 퇴짜를 세게 놓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젊었을 적 노래방을 갔다고 한들, 남태오는 없는 기억이었다.
그런데 같이 가서 분위기를 맞춰달라던 남 회장의 제안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 없을 때. 또 뭐, 처음 해 본 거 없습니까?”
“……이건 정말 사소한 얘기라서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뭡니까. 나중에 아는 것보다는 지금이 나을 텐데.”
남태오가 목을 좌우로 흔들고 손마디를 우두둑 꺾었다.
이런 사소한 걸로 화가 나는 걸 저라고 어쩌겠는가.
다름 아닌 여주와 관련된 일이라서 질투심이 폭발하는 중이었다.
“……태희 언니랑 요리할 때 앞치마 같이 입었어요. 몰랐는데 그거 커플이더라고요.”
“아아. 앞치마.”
순간적으로 남태오는 앞치마를 입은 여주를 떠올렸다.
요리에는 전혀 취미가 없던 그였지만, 커플로 입고 요리를 하는 그림.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거 어쩌지? 주변이 전부 여주 씨를 너무 좋아하네.”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제 안에서 들끓는 감정은 해결이 안 됐다.
아니 솔직히 이건 핑계고 품에 안겨 있는 여주를 한 번 더 안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그냥 내가 여주 너 데리고 어디 섬으로 들어가 버릴까?”
남태오가 여주가 입고 있는 원피스 잠옷의 끝을 지분거리다가, 이내 손안에 꽉 움켜쥐고서 소유욕을 한껏 드러냈다.
그때, 그의 위험 신호를 알아챈 여주가 본능적으로 손을 다급하게 내저었다.
“태오 씨. 좀 봐줘요. 저 정말 몸이 힘들어요.”
사실 힘들다고 말하는 것도 굉장히 순화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제 탬버린의 여파도 무시 못 하고, 남태오와 함께했던 밤 역시 만족감과는 별개로 후폭풍이 상당했다.
그녀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는 것은 순전히 생존 본능 때문이었다.
“음. 그래 보이네요.”
“태오 씨도 피곤할 것 같은데……. 라고 말하고 싶지만 전혀 그래 보이지 않네요.”
어쩜 저렇게 남태오는 피부결도 매끈하지?
똑같이 밤을 샜고, 육체노동을 했는데도 말이다.
창가로 들어온 햇살로 인해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은 적나라했지만, 굴욕 하나 없었다.
이럴 때조차 쓸데없이 참 잘생긴 남자였다.
“나요? 나도 아직 힘든데.”
“대체…… 어디가요?”
“정확히는 내 욕망을 숨겨야 한다는 거?”
남자가 씨익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고, 여주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뭐라고 더 대꾸할 말도, 의지도 없어서 그를 밀어내며 어서 출근이나 하라고 하는데 그가 못이기는 척,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옷차림을 정돈했다.
그러고 방을 나가는 줄 알았는데 방문 앞까지 걸어가던 남태오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가 제일 아픈데?”
“팔도 아프고, 엉덩이랑 허리도 굉장히 아파요.”
혹시나 그가 다시 되돌아올까 봐 겁이 난 여주가 서둘러 말했다.
“팔은 어제 회장님이랑 탬버린 흔드느라 그런 거고, 허리는…… 그래요. 내가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