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남 회장은 그 질문을 몹시 기다렸던 듯, 흐뭇해하며 대답했다.
“아까 주인장이 나 대하는 거 봤지? 내 이래 봬도 여기 단골이라. 내 아들, 그러니까 태오 녀석 애비가 젊었을 때 여기를 다녔거든. 살아생전에는 내 바빠 같이 못 다녀 주고. 그때는 뭐 놀러만 다니냐고 했는데, 한번 맛을 들이니까 끊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아드님과의 추억이 있으셨던 것이군요.”
그러고 보니 태오도 남 회장 얘기를 했을 때 ‘은혜를 갚아야 할 분’이라고 표현했었다.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셨고 동생과 함께 남 회장 밑에서 자랐을 텐데, 그의 부친 이야기를 이렇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자신이 곤 작가로 태오와 만났을 때, 어머니 얘기는 해 준 기억이 났다.
그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을까?
떠올릴 만한 추억이 있는 가족은 역시 좋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그, 말하자면 그렇지? 크, 크흠.”
어느새 눈시울을 살짝 붉히는 남 회장이었다.
아들 생각이 났는지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여기 젊음의 거리, 알지? 나 만날 오던 거기로 데리러 오거라.”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비서가 곧 차량을 끌고 올 거라 알 수 있었다.
여주는 남 회장이 눈가를 닦아 내는 걸 슬쩍 못 본 척, 다른 곳으로 시선을 자연스럽게 돌렸다.
남 회장한테는 먼저 앞세워 보낸 자식이니, 가슴에 박힌 대못일 것이다.
아마도 한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가족이란 게 없었던 여주이지만 그 정도는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감정을 정리한 남 회장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여주의 두 팔을 눈치챘다.
“내 정신 좀 보게! 그보다 여주 양, 팔은 좀 괜찮은가? 아까 보니까 그 연약한 팔을 떨어져라 흔들던데. 나 때문에 너무 무리한 거 아닌가?”
“회장님께서 너무 신나 보이셔서…… 제가 멈출 수가 없었어요.”
여주가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처음에는 노래방이란 공간이 어색하고 낯설기는 했지만, 곧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었다.
탬버린을 흔드는 것 말고는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것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나참. 고지식한 구석이 있구만. ……그래도 덕분에 고마웠네. 간만에 내 아주 즐거웠어.”
“네. 저도…… 신기하고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여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로 이런 경험은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할 것이다.
“여주 양, 혹시 갈 때 침이라도 맞고 갈 텐가? 내가 잘 아는 한의원이 있는데 침술이 기똥차거든. 태오 녀석이 알면 제 여자친구 부려 먹었다고 나한테 뭐라 할 것 같은데.”
“제가 가서 잘 설명하면 태오 씨도 이해해 줄 것 같아요. 회장님.”
남 회장의 비서가 와서 차량에 다시 오를 때까지, 남 회장은 여주를 걱정했다.
아까는 흥이 넘쳐서 잠깐 이성을 잃었지만, 생각해 보니 태오한테 비밀로 하고 여주를 만나러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오죽 까탈스러운 녀석이어야 말이지.’
제 것이라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끔찍이 여기는 태오였다.
남 회장은 은근 마음이 쓰였지만, 여주의 대답에 또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이지, 어디서 이런 손주 며느리를 얻을 수 있나 싶게끔 손주 녀석이 자랑스러워지기까지 했다.
뒷좌석에 여주와 나란히 앉은 남 회장을 본 운전석의 비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동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 회장 성격으로 보아서는, 저 아가씨가 초면임에도 대단한 신임을 얻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회장님. 식사는 어디로 모실까요?”
“아아. 보자, 보자. 내 단골집 중에서 가장 단골집으로 감세.”
“예. 알겠습니다. 바로 모시겠습니다.”
척하면 척, 알아들은 비서가 바로 방향을 꺾어 평창동으로 주소를 찍었다.
그 사이 남 회장은 어떻게 하면 예비 손주 며느리와 사이를 좁힐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었다.
그는 내친 김에 제대로 호칭 정리를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보다 여주 양! 참, 태오랑은 다른데 내 마음에 쏙 드는구만. 그리고 아직까지도 나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면 어떡하나? 지금부터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익숙해지지.”
“제가 그 호칭을 불러 본 일이 없어서…… 사실 조금 많이 어색합니다.”
그 말을 하는 여주는 두 손을 꼭 모아 잡고 있었다.
호칭 정리에 유독 단호한 부분이 태오를 떠올리게 했다.
그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니, 왜? 조부모께서 일찍 돌아가신 건가?”
남 회장으로서는 여주의 생각을 모르니, 따지듯이 물었다.
그는 더 이상 여주한테는 딱딱하고 정 없는 호칭으로 불리기가 싫었다.
회사도 아니고 무려 예비 손주 며느리한테까지 거리감 느껴지는 건 별로였다.
“아예 계시질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저런, 저런. 그렇다면 혹 여주 양은 부모님도.”
“네. 저는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회장님.”
“그럼 태오도 당연히 알고 여주 양을 만난 것이겠군?”
“……네. 물론입니다.”
여주는 남 회장의 말끝이 올라가자, 눈을 빠르게 감았다가 떴다.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전혀 예측이 가지 않았다.
만에 하나 남 회장이 이 이야기로 자신이 별로라고 해도 당연한 거라고 되새겼다.
염려와 달리, 남 회장은 덥석 손을 뻗어서 여주의 손을 잡아 줬다.
“괜찮네! 여주 양은 그야말로 내 손주 며느리로 합격이야 합격!”
“회, 회장님.”
“어린 나이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나 그래. 크, 크흠. 내 그것도 모르고 오늘 불러서 탬버린이나 치게 하고 말일세. 더 미안해지는구만.”
그 말을 하면서 남 회장이 또 헛기침을 했다.
아까 아들 이야기를 할 때와 비슷한 반응이라 여주는 불안해졌다.
아니, 아까보다 더 남 회장의 눈시울이 빠르게 붉어지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저기, 회장님.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만…… 우, 울지 마세요.”
여주가 난처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자, 남 회장이 그 와중에 고개를 내저었다.
“울기는! 내가 언제 울었다고 그러나? 내가 얼마나 감성이 메마른 사람인데! 회사 나가면 별명이 철옹성 늙은이란 말이지.”
“아……. 네. 회장님 별명이 그러시군요.”
여주는 이쯤에서 태오의 여동생인 태희를 떠올렸다.
그 언니도 별명이 얼음 공주라고 했지 않았나?
본인들은 아니라고 하는데, 눈물이 많은 것은 사실인 것까지 둘이 비슷했다.
그러고 보면 남 회장이랑은 손자, 손녀가 비슷한 부분이 한 구석씩은 있었다.
“얼른 할아버지라고 불러 보게. 그러면 내 주책맞은 눈물도 멈출지 모르지 않나. 여주 양한테 할아버지 소리 듣기 참 어렵네.”
이어서 남 회장이 눈물이 그치는 방법을 알려 주며 권하는 것까지, 태희랑 똑같았다.
“……그럼 할아버님이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여주는 아무리 그래도 첫날, 초면인 남 회장에게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했다.
있는 그대로 말했다가는 서운해하실 것 같아서, 나름대로 대안을 정해 보았다.
“흠. 그래. 정 입에 익지 않는다면 하는 수 없지! 그렇게라도 불러 주니까 내 듣기 훨씬 좋아. 가족 같고 얼마나 좋은가.”
남 회장이 드디어 흡족해하고 좋다고 박수를 치는 사이, 차는 멈춰 섰다.
평창동의 유명한 갈비 정식집이었다.
4층 통건물을 사용하는 곳이라 입구부터 높다란 계단이 휘황찬란했다.
“자, 어서 가자고. 내가 오늘 부려 먹은 만큼 여주 양도 많이 들게.”
남 회장이 비서의 부축을 받아 가면서 뒤따라오는 여주에게 큰소리를 쳤다.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여주는 열심히 따라 올라가면서, 식욕이 샘솟는 걸 느꼈다.
요즘 들어 먹을 복이 참 많아졌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 * *
퇴근길의 남태오는 남 회장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말이 안부 전화지, 완전히 새로 생긴 예비 손주 며느리와 데이트했다고 자랑하는 식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가만히 듣고 있자니 태오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제 조부라고는 해도, 참 고약한 성미 아닌가.
뻔히 일 때문에 여주랑 데이트도 못 하는데, 몰래 찾아와서 만나고 가시다니.
태오는 생각할수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회장님. 그러니까 오늘 저한테 연락도 없이 여주를 만나러 가셔서는 노래방에 갈비까지 사 먹이셨다고요. 그 말씀이십니까?”
- 그래, 이 녀석아! 이 늙은이하고 한시도 같이 있기 싫어하는 내색 숨기지도 못하는 누구랑은 달리, 여주 양은 아주 상냥하더구나. 내 마음에 아주 쏙 들었다.
“말에 어폐가 있으십니다. 저랑 결혼할 사람인데, 왜 회장님 마음에 쏙 드셨다고 합니까?”
- 뭐야, 이 자식 이거 할애비한테도 질투하나 보네. 야, 됐고 너 말 나온 김에 결혼식 날짜부터 잡자. 네 동생보다는 먼저 식 올리자고, 알았냐?
태오가 뭐라고 답을 하기도 전에, 통화가 끊어졌다.
하여간 정말이지 제멋대로인 조부 되신다.
여주가 얼마나 마음에 드셨는지 몰라도, 그가 맞선을 거절할 때보다 남 회장이 더 극성으로 나오는 건 분명했다.
태희도 그렇고, 남 회장까지 왜 저보다 가족들이 더 난리들인 건지.
……곤 작가인 걸 알면 지금의 난리로 끝나지 않겠군.
결코 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남태오가 거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여주가 잠들어 있었다.
긴 원피스 차림이었는데, 윗단추를 채 잠그지 않았던 걸까.
“으음.”
몸을 뒤척이는 사이, 벌려져 있던 틈이 더 열리면서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만지면 뽀얀 분가루가 묻어 나올 것 같길래, 그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유독 피부가 연해서 몇 번 지분거리기 무섭게, 바로 살결에 그의 손자국이 남았다.
“……정말이지 미치겠군.”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여주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남태오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이내 넥타이를 거칠게 쭈욱 잡아당겨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는 단번에 여주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