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예, 예비 손주 며느리…….
생전 저와는 연관 없을 것이라 여겼던 단어를 듣자마자 여주의 볼에 홍조가 졌다.
“여주 양, 일단 좀 앉지.”
남 회장이 소파 상석으로 가서 앉고, 여주는 살짝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가정부가 미리 준비해 놓고 간 차와 간식이 놓여 있었다.
약과가 유독 많았는데 남 회장이 이미 까먹은 봉지의 수가 꽤 많았다.
“단것 좀 좋아하면 들지. 내 입맛에는 잘 맞더라고.”
남 회장이 한 봉지를 까서 권하자, 여주는 일단 받아 들었다.
입에 넣기는 했는데 맛을 느낄 여유도 없이 열심히 씹어 넘겼다.
머릿속으로는 그가 예비 손주 며느리를 상대로 어떤 질문을 할지, 예상 질문지를 써 내리는 중이었다.
“저, 회장님. 저 준비됐습니다. 물어보셔도 돼요.”
“응? 벌써 마음의 준비가 됐나 그래? 호오. 다들 내가 쳐다보면 한참 걸리던데 여주 양은 확실히 특별하군. 아니면 나에 대해 태오 녀석이 귀띔이라도 해 준 모양인가.”
남 회장은 여주의 반응이 의외였던지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로워했다.
그런 시선을 받으면서 여주도 멋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남 회장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다.
왜냐면 웃고 있어도 남 회장의 짙은 눈매는 일순 잔혹해 보일만큼 매서웠으니까.
한 기업의 총수라면 역시 저 정도의 무게감은 있어야겠지만, 코앞에서 영접하니 감히 마주 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가정부처럼 줄행랑을 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익숙해져야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면 즐기라는 말처럼, 여주는 시늉이라도 해 보기로 했다.
“네. 태오 씨한테 회장님 재밌는 분이라고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흥. 그런가. 태오 그 녀석이 내 얘기 하면서 좋은 소리 했을 리는 없는데. 혹 여주 양이 나 듣기 좋으라고 그냥 하는 소리, 아닌가?”
남 회장이 의심하는 눈초리로 여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취업자로서 면접관과 독대하는 기분이 들 만큼, 필요 이상으로 매서웠다.
조손 사이가 그리 정답지는 않다는 걸 눈치챘지만, 예의상 하는 말도 짚고 넘어가다니.
그래도 여주는 꿋꿋하게 미소를 띠려고 노력했다.
평소대로 무표정한 얼굴을 한다면, 웃어른이 보기에 좋은 점수를 따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럴 리가요. 실제로 오늘 뵙고 나니까 태오 씨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걸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뭔지 말해 줄 수 있나?”
“언뜻 보면 무서운 표정을 짓고 계시지만 입술은 웃으시는 걸 보고 생각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웃음이 많은 분이시지만, 습관적으로 엄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시는 분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여주의 태도는 조심스러웠지만, 눈빛만큼은 확신이 서려 있었다.
전생까지 통틀어서 여주는 분명 소설가로서의 재능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점은 바로 주변 인물, 나아가 처음 보는 인물들의 태도와 심리, 말투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인간적으로는 쓰레기라고 할 수 있어도, 소설의 캐릭터로 놓고 보면 모두 하나같이 귀한 소재가 됐다.
남 회장 역시 여주가 보고 관찰했던 여러 부류 중 비슷한 부분들이 있었다.
“으음. 출판사에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요즘에는 관상도 볼 줄 알아야 하는 건가?”
남 회장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흥미로워했다.
“그건 아닙니다만……. 저는 황금배 출판사의 소설 부서에 있었습니다. 소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다루거든요. 그래서 글을 많이 읽다 보면 현실에서도, 겉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읽혀지기도 합니다.”
여주가 어디 가서 남한테 이런 얘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희망 고아원에 있을 때는 기증받은 세계 문학 전집들이 빼곡했고, 아이들은 그걸 읽지 않았다.
어린 여주는 종종 아이들의 괴롭힘에 시달리다가 창고에 틀어박혀서 책을 읽고는 했었다.
책에는 미처 경험해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또한 책 속의 인물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불안함이나 불행을 떠안고 있었기에, 읽다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제가 아니려니 위로가 되고는 했었다.
“저…… 어디까지나 그냥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것일 뿐, 회장님께서 꼭 그런 분이라는 건 아닙니다만.”
여주가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남 회장의 말에 조심스레 덧붙였다.
지금의 제 나이를 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고작 스무 살짜리 어린 네가 뭘 아느냐고 반문한다면, 솔직히 할 말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남 회장이 여주를 보는 눈빛에는 예상외로 경외감과 기이함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 참 놀랍구만! 사실 다들 몰라서 그렇지, 내가 얼마나 유쾌한 사람인데. 허허. 초면에 봐 놓고도 그걸 알아차리는 게 참 대단하군 그래.”
때맞춰 남 회장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짜짜라짜라짜라짠짠짠!
귀에 낯익은 멜로디에 여주가 움찔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짠, 짠, 짠에 맞춰 까딱거렸다.
그걸 보던 남 회장이 씨익 웃더니,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 진 여사. 날세. 밥은 저녁까지 먹고 들어갈 것 같은데 자네도 그만 들어가 봐. 손주 재롱 잔치 본다면서. 부럽구만.”
탁, 전화를 끊은 남 회장이 핸드폰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여주가 했던 대로 짠, 짠, 짠 소리 내면서 손가락을 까딱하더니 물었다.
“내 벨 소리가 어떤가?”
“쉽고 편안한 구성이라 금방 귀에 익어서 좋은데요.”
여주는 대중가요를 잘 몰랐지만, 유명한 트로트 몇 곡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 노래는 전생이나 현생이나 고전 같은 곡이었기에 반가운 마음도 있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저렇듯 변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 내는 것들도 있으니까. 그게 퍽 안심이 됐다.
“역시! 태오 그 놈은 몰라주는 걸 단박에 알아주는구만. 그렇지! 난 나이 먹으면서 이렇게 유치뽕짝이 마음에 들더라고.”
“네. 회장님께서 트로트를 좋아하실 줄은 미처 몰랐지만요.”
“듣는 것만 좋아하는 게 아닐세! 내 직접 부르는 것도 얼마나 좋아한다고.”
여주의 대답을 들은 남 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슬쩍슬쩍 몸이 리듬을 타며 움직이는데, 그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여주는 흠칫 놀랐지만, 표정 관리에는 신경을 썼다.
“……회장님.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음치입니다.”
여주는 예전에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 생각나 진지하게 말했다.
며느리가 시부모님 앞에서 점수를 따려고 노래 한 곡조를 뽑는 장면이었지, 아마?
만약 지금 이 상황이 그런 쪽이라면, 아주 많이 곤란했다.
여주는 자신도 없고 재능도 없음을 남 회장에게 강력하게 어필했다.
“허허. 상관없네. 내가 사실 남이 부르는 것보다 내가 부르는 걸 더 좋아하거든!”
“……그러시다면 다행이지만요.”
천만다행으로 남 회장은 장기자랑을 직접 나서는 것을 선호하는 쪽이었다.
여주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정말 다행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괜히 무리하게 음치를 뽐냈다가는 오히려 역으로 밉보일 수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랑 가 줬으면 하는 곳이 있네!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네? 거기가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지…….”
“여주 양도 가 보면 알아. 당장 가자고!”
남 회장이 힘차게 앞장서면서 외쳤다.
얼굴 위로 한껏 들뜸이 드러난 그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불과 몇 분 전, 처음 뵀을 때와 너무 분위기가 달랐다.
여주는 항의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따가 밥 한 끼도 같이 하고. 겸사겸사 그럼세. 아 뭐 하나? 안 가고!”
남 회장이 카리스마 있는 눈빛으로 절도 있게 팔다리를 움직이며 여주더러 어서 오라고 고갯짓을 했다.
‘아……. 태오 씨한테 문자라도 하는 게 좋겠네.’
여주는 엉겁결에 남 회장과 함께 차에 올랐다.
도통 어디를 가자는 것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지만, 남 회장은 그저 가 보면 안다는 식이었다.
이쯤 되니, 아까 가정부 아주머니가 왜 줄행랑을 쳤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남 회장의 막무가내 성격을 도저히 당해 낼 수 없었던 것이겠지.
아닌 게 아니라 사실일 것이 분명했다.
* * *
종로에 있는 젊음의 거리.
대낮에 지하에 있는 노래방을 선택한 것은 남 회장이었다.
비서는 익숙하다는 듯, 두 사람을 내려 주고 주차하러 사라졌다.
2시간 후, 여주는 남 회장과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아이고. 확 내지르고 나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하하. 1시간만 더 불러도 됐을 법한데.”
“……회장님. 그 말씀, 진심이신가요?”
“그럼! 여주 양, 그렇게 안 봤는데 아까 보니까 흥이 넘치던데!”
“아, 아하하. 흥은…… 저보다는 회장님께서 더…… 네. 감사합니다.”
여주는 솔직히 말해 당장이라도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벌써 마비가 된 걸지도?
아까는 저리는 감각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남의 팔 같았다.
처음 입장할 때는 남 회장이 노래하는 걸 들어 주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흥겨운 전주가 흐르기 시작하자, 남 회장은 여주에게 탬버린을 던져 줬다.
그리고 2시간 내내 마이크를 한 번도 놓지 않고 열창을 했다.
그 말인즉슨, 여주도 2시간 내내 탬버린을 쉴 새 없이 흔들었다는 말이었다.
“농담일세. 여주 양, 이 늙은이 비위 맞추느라 애쓴 거 다 아네. 요즘 젊은 사람들 말해 뭣 해. 태오 그 녀석부터 내가 이런 곳 오자고 하면 펄쩍 뛰니까…… 그동안은 내가 쭉 혼자 다녔었거든.”
남 회장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주 보라고 엄지를 추켜세웠다.
여전히 기업 회장과는 의외의 장소라는 생각에 여주는 질문을 했다.
“회장님께서…… 여기 노래방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