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농담이에요, 농담. 여주 씨, 많이 놀랐구나?”
“……조금 놀랐어요.”
태희가 웃으면서 여주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봤다.
여주는 태희의 눈동자가 이미 은은하게 돌아 있는 걸 보았기에 이미 식은땀이 났다.
그래도 농담이라니까 믿는 셈 치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이 책이 그렇게나 재밌어요?”
표현이 좀 극단적이기는 했지만, 현실에서 듣는 독자평은 또 처음이었다.
특히나 자신이 작가인 걸 밝히지 않고 듣는 리뷰는 진심에 가까울 터였다.
“당연하죠. 내가 원래 수면제가 필요가 없었어요. 그냥 책을 펴면 잠이 오니까. 근데 이 책은 계속 다음 얘기가 궁금한 거 있죠? 독서에 흥미가 없는 내가 봐도 재밌었어요. 덕분에 어디 가서 취미를 독서라고 한다니까요.”
여주는 그 말에 적잖게 감동을 받았다.
책을 별로 읽지 않았던 사람이 자신의 책으로 독서를 하게 됐다니.
자신이 엄청 좋은 일을 한 것만 같았다.
여주가 새삼스레 제 책의 표지를 보는 동안, 태희가 핸드폰을 바로 가져왔다.
“아! 혹시 여주 씨도 이 책 읽기 전에 서평이 궁금하면 팬 카페 들어가서 읽어 봐도 돼요. 요즘에는 다들 남의 리뷰를 보고 책을 고르더라고요.”
“정말요? 그럼 저도 한번 보고 싶어요. 팬 카페는 처음이라서요.”
“좋아요! 지금 당장 보여 줄게요.”
태희는 그 자리에서 핸드폰으로 접속해서 화면을 보여 줬다.
여주는 태희가 보여 주는 다양한 감상평들을 하나씩 읽어 보았다.
독서 감상문처럼 길디긴 내용도 있었고, 일러스트를 그려 놓은 것도 있었다.
저마다 표현해 놓은 방식이 달라서 신기했다.
태희는 가장 게시글이 많은 게시판을 보여 줬다.
“여기 팬레터는 작가한테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놓는 거예요. 물론 작가님은 읽어 주시지 않지만요.”
“……출판사 측에서는 이 카페를 모르나요?”
“모르지는 않아요. 그런데 작가님이 한창 연재 중이라 바쁘시다고만 하더라고요. 그래도 그냥 자기 만족인거죠. 원래 덕질이란 게 그렇거든.”
태희는 곤 작가가 워낙 신비주의라면서 그 흔한 sns 하나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 말에 여주는 저절로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신비주의란 것도 결국 의도된 마케팅의 일부라는 것을 독자들은 몰랐을 것이다.
도지성이 기획한 천재 작가 이미지는 브랜딩 그 자체였으니까.
“어어! 지유천재님, 초판 한정본 구하겠다고 벼르더니 진짜 구하셨네요. 인증샷 올라온 거 보니까 진짜 부럽다.”
그때, 태희가 화면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여주도 보니까 게시글을 올린 사람의 닉네임이 지유천재였다.
사진 속에는 아이처럼 작은 손이 책을 들고 있었다.
‘이번 생에는 지유라는 이름이 참 흔하네.’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태희의 모습에 여주는 자신이 갖고 있는 초판 한정본 샘플 몇 권을 떠올렸다.
나중에라도 꼭 태희에게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렇게 좋아할 정도면, 분명 기쁘게 받아 줄 것 같았다.
* * *
점심시간쯤, 태희는 남친과 약속이 있다며 돌아갔다.
여주도 외출할 일이 있어 준비를 했다.
근처 문구점에 먼저 들러서 복사를 할 것이 있었다.
그다음에 우체국으로 가서 등기 우편을 보낼 계획이었다.
그녀는 서랍에 잘 숨겨 놓았던 박하나의 임신진단서를 꺼냈다.
이걸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 내내 고민했었다.
전생에서는 박하나가 임신을 하지 않았으니까, 이 또한 변수였다.
박하나가 숨기려 하던 이 정보를 누구에게 보내야 가장 타격이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자 답은 금방 나왔다.
황금 그룹 본사와 황금배 출판사 주소를 외워 놓았다.
그녀가 복사본 2장을 가지고 문구점을 나섰을 때였다.
남태오가 한 전화를, 여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쁘게 받았다.
“여보세요. 태오 씨.”
- 여주 씨. 태희는 갔죠?
“네. 저, 태희 언니가 곤 작가 팬이라고 말해 줬어요.”
- 아. 내가 미처 그 얘기를 못해 줬네. 맞아요. 혹시 태희가 여주 씨, 부답스럽게 했습니까?
“아뇨, 전혀요. 언니랑은 재밌었어요. 맛있는 브런치도 같이 해 먹고요.”
남태오답지 않게 말투에서 초조한 기색이 묻어났다.
태희가 다음에도 또 놀러 왔으면 하는 마음에, 여주가 얼른 덧붙였다.
- 벌써 꽤 친해졌나 보네. 다행입니다.
“고마워요. 태오 씨. 저 언니랑 독자와의 만남 하는 기분이었어요.”
- 그 녀석이 부럽네요. 여주 씨한테 벌써 언니 소리 듣고. 벌써 질투 나려고 하는데.
“아, 그건.”
- 응. 그건 뭐. 말을 해야 알지.
남태오 이 남자가 이제는 이렇게 대놓고 질투를 하다니!
지난번 차여주 한정 질투가 많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던 모양이었다.
여주의 얼굴에 곤란함이 번지는 것도 잠시,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태오 씨 동생이니까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였는데.”
- 농담이에요. 대신 사인본은 나 먼저 주는 걸로 해요.
여주의 설명에 남태오의 목소리는 다시 다정해졌다.
그런 그가 귀엽게 느껴져 여주는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네. 그렇게 할게요. 점심 식사는 했어요?”
- 안 실장이랑 먹었습니다. 여주 씨도 맛있는 거 먹어요.
여주도 이제는 어색하지 않게 제법 연인다운 대화를 나누었다.
전화상으로 듣는 목소리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저녁에 보자는 인사를 끝맺음으로 통화를 마쳤다.
여주는 우체국으로 가서 대기한 뒤, 등기 우편을 접수했다.
“등기 우편 2통이시고, 수신인 두 분 성함 확인할게요. 도지철 씨, 도지문 씨, 맞으실까요?”
“네. 당일 특급으로 보내 주세요.”
“네. 접수되셨습니다. 도착하는 대로 알림톡 갈 테니 확인해 주시고요.”
계산을 마치고 돌아선 여주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빠져나왔다.
도지성, 그 인간에게 보낼지 말지 아주 잠깐 고민했었다.
하지만 그 인간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는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그건 바로 도지성을 밉게 보는 인간들에게 이용하게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전생이었다면 몰라도, 지금의 도지성은 곤 작가를 놓치고 무능력함만 알린 꼴이었으니까.
‘도지철 사장이 제 잇속은 확실히 챙길 줄 아는 인간이니 믿어 봐야지.’
원래도 장남 위주로 돌아가던 도씨 집안에서 도지성은 쫓겨날 일만 남았다.
전생에서는 그녀를 카드로 쥐고 도지성이 도지철을 밀어냈지만, 현생에서는 반대로 이뤄질 것이다.
박하나와 혼외 임신은 아주 좋은 빌미가 되어 줄 것이었다.
* * *
여주가 남태오의 오피스텔로 돌아왔을 때, 현관에는 못 보던 신발이 놓여 있었다.
와인 빛깔의 가죽 수제화는 척 보기에도 집주인의 취향은 전혀 아니었다.
“어이구. 들어오셨네요. 아침부터 어딜 가셨나 했어요.”
그때 현관 입구에 서 있던 가정부가 구세주를 보듯 반갑게 나섰다.
“안녕하세요. 점심쯤 나갔었는데, 지금 퇴근하시나요?”
여주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가정부의 얼굴은 평소보다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아무래도 저 신발의 주인과 관련이 있는 듯해 보였다.
“아, 네. ……저기, 회장님께서 와 계십니다. 대표님께서 미리 언질이 없으셨던 걸 봐서는 아무래도 회장님께서 대표님 몰래 오신 듯합니다.”
“……네. 많이 놀라셨겠네요.”
가정부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남태오가 미리 경고했을 만큼 회장님께서는 정말 대단하신 분인가 보다.
여주도 덩달아 긴장이 됐다.
만약 남태오가 알았다면, 그녀에게 먼저 연락을 줬을 것이다.
손자를 만나러 온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 시간에 여기로 발걸음 하지는 않으셨을 테고.
설마 그 방문 목적이 자신인 것인가?
여주가 그건 아니길 바라 보는데, 가정부가 두 손을 꼭 모아 잡고 말했다.
“예. 많이 놀랐고말고요. 하지만 저로서는 문을 열어 드리는 수밖에 없었어요. 사실 저도 회장님을 뉴스에서만 봤지, 실제로는 처음 뵌 거라. 어이구. 아직도 가슴이 떨리네요.”
자신의 심장께를 손으로 두드려 보이는 가정부를 슬쩍 보자, 퇴근 준비를 마친 모양새였다.
여주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같이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은 퇴근이 빠르신 것 같네요.”
“예. 원래 퇴근 시간은 자유로운 편인데요. 아무래도 선견지명이 있었나 봐요. 어쩐지 오늘은 좀 빨리 청소를 끝내야 할 것 같더라니. 반찬도 다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 뒀어요. 그럼 아가씨. 회장님과 말씀 잘 나누시고 대표님께도 저 일은 다 마치고 퇴근했다고 말씀 좀 잘해 주세요.”
가정부는 빠르게 말을 쏟아 내고는 여주가 설사 잡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는지, 가방을 꼭 끌어안고는 줄달음쳐 사라졌다.
어어?
여주가 손을 뻗었을 때는 현관문이 이미 닫힌 뒤였다.
어디 얼마만큼 대단한 분인지 직접 보면 알겠지.
여주가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잘 빗어 넘겨 가지런한 백발과,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꼿꼿한 자세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남 회장이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자, 여주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
제법 묵직한 발소리가 여주의 발 근처에서 멈췄다.
“아가씨가 우리 태오하고 사귄다는 사이인가? 만나서 반갑네. 나는 남만춘이라고 하네.”
커다랗고 뼈마디가 굵어 보이는 손이 다가와 여주는 조심스레 맞잡았다.
“저는 차여주라고 합니다. 회장님.”
“회장님? 호칭이 딱딱한 게 영 마음에 안드는데, 그냥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그러는가.”
“하지만 회장님이신데…….”
여주는 남태오가 9시 뉴스를 보여 줬고, 기업 회장인 모습이 더 익숙하다고 설명했다.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면서 묵묵히 제 말을 하는 여주에게 남 회장은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괜찮대도. 오늘은 기업 회장으로 온 게 아니니까 말일세. 그냥 내 예비 손주 며느리 얼굴도 보고 이야기나 좀 하러 왔으니 부담 갖지 말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