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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팅 웨딩-41화 (41/60)

41화

“회장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하는 수 없지만, 금 여사님께서도 보통 분이 아니신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아마도 차화련, 그분께서 죽기 전까지 주시하고 계셨을 겁니다. 만약 회장님께서 서두르지 않으시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금 여사님이…….”

비서가 우려하는 목소리로 박 회장에게 말했다.

“그래. 나도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야. 지난 세월 그 자존심과 성질머리 받아 주느라 나도 지쳤어. 여전히, 그 아이는 행적이 묘연한가?”

박 회장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 황금배 출판사 측에도 물어봤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습니다. 집도 들어오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습니다.”

“정…… 찾기 어렵거든 하는 수 없지. 얼굴은 안 보고 돈만 주는 방법도 있으니까.”

“……남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해 찾아보겠습니다.”

비서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박 회장은 담요를 끌어다 덮고 두 눈을 감았다.

저승 가서 마음 편히 차화련을 만나고 싶어서, 차여주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은 이 마음.

다 그의 욕심이고, 이기심이라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박 회장이 잠깐 잠이 들려고 할 때쯤, 온실 안으로 금 여사가 들어왔다.

“회장님. 저요. 시간 낭비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본론만 얘기할게요. 차여주 그 애 찾고 있는 거 저도 알아요. 제가 한 발 물러날 테니까 회장님께서도 한 발만 물러나 주시는 게 어떠세요.”

“당신, 미쳤어? 갑자기 들어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까 사람 시켜서 마리아 원장이라는 여자 만나는 거, 다 알고 왔어요. 옆방에서 제 귀로 직접 들었으니까 잡아떼지 않는 게 좋으세요.”

“뭐야? 기업 사모라는 사람이 품위 없이!”

박 회장은 벌떡 일어나려다가 기력이 달려서 기침을 했다.

그런 박 회장을 벌레 보듯 쳐다보는 금 여사였다.

“결혼 전에 다른 여자한테 애까지 낳은 회장님한테 그런 소리를 왜 들어야 하죠?”

“……아냐. 그 애는 내 딸이.”

박 회장은 부정하려고 했지만, 금 여사가 더 빠르게 말을 잘랐다.

“변명하실 필요 없어요. 이미 친자 확인까지 마친 모양인데, 상관 안 해요. 회장님 지금 얼마 안 남았다고 동정심이 폭발하신 것 같은데, 적당히 그 아이 먹고 살 만큼만 떼어 주겠다고 약속하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 아이를 위해서도 그게 나을 테니까요. 회장님, 약속은 잘 지키시잖아요. 결혼 초에 저한테 약속했을 때도 차화련, 그 여자 지키려고 한 거 모를 줄 알아요? 이번에는 그 여자 딸 지키고 싶으시잖아요. 일 시끄러워지고, 회장님 가시고 나면 누가 그 아이를 지켜 주겠어요?”

금 여사는 결혼 초에 나이가 많았던 박 회장과 결혼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박 회장의 나이가 더 많은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자신은 팽팽했지만, 박 회장은 병들고 쇠약해진 몸으로 저렇게 누워 있었다.

그러니 이런 협상을 유리한 입장에서 제시할 수 있는 거였다.

어차피 박 회장에게는 혼외 자식이 박하나를 비롯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먹고 살 만큼만 쥐어 주는 건 금 여사도 용납할 수 있었다.

차화련이 박 회장이 아끼던 여자라고 해서 더 많이 주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 자식들 경영 승계 잇는 거랑 재산에는 문제없이 내 선에서 처리할 생각이었어. 이거면 이제 만족하나?”

“잘 생각하셨어요. 공식적으로 존재가 드러나는 거, 그 아이도 원치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제 자식들은 회장님 자식이기도 한다는 거 잊지 마세요. 제 말, 아시겠어요?”

금 여사는 그 자리에서 독하게 쐐기를 박았다.

남의 자식 지킨답시고 내 자식 눈물나게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말이다.

“할 말 다했으면 그만 나가 봐. 나 혼자 있고 싶으니까.”

박 회장은 다시 자리에 드러누웠고, 담요를 끌어다 덮었다.

천장으로 어둠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마치 어둠이 내려와 금방이라도 제 몸에 닿기라도 할 것처럼, 한껏 웅크려 누웠다.

나이가 들수록 밤은 꺼려지고, 고요함이 성가셔졌다.

그의 주변에는 전부 하나같이 제 잇속만 챙기려는 이들뿐이었다.

자신과 피가 얼마만큼 섞인지의 차이일 뿐, 늙고 힘이 빠진 그에게 자의로 찾아와 주는 자식 하나 없었다.

박 회장은 자신의 말년이 이렇듯 쓸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차화련이 마지막 가던 길도 이렇게 쓸쓸했을 텐가.

생각하던 그가 연신 소매로 눈을 훔쳤다.

* * *

태오는 여주와 연인 관계가 됐음을, 남 회장보다 태희한테 먼저 알리기로 했다.

언제 시간되냐고 문자 한 통을 넣었을 뿐인데, 아침 출근 시간에 그의 집으로 달려왔다.

“오빠. 이렇게 늦게 출근해도 돼?”

“야. 지금 8시도 안 됐는데.”

시계를 확인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던 태오는 헛웃음을 쳤다.

“아아. 벌써 출근한 줄 알고 서둘러 왔지. 동구 씨도 출근해서 마침 심심했거든.”

“남태희. 오늘 왜 불렀는지 알지?”

태오는 오늘따라 유달리 활발함이 넘쳐 보이는 동생에 잠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주에게 태희가 올 거라고 말해 두긴 했지만, 그가 없을 때 둘만 놔두는 게 과연 잘하는 일일까 고민이 되려고 했다.

“척하면 척이지. 여주 씨랑 미리미리 친해지라고 한 거 아니야?”

“그것도 그렇고, 회장님 뵈러 갈 때 어색하지 않게끔.”

“알겠어! 약간 코치를 해 달라는 거 맞지? 그전에 나랑 여주 씨랑 좀 친해져야 하니까 오빠는 얼른 회사 가셔. 아, 그 전에 나 용돈 좀 주라.”

태희가 두 손을 공손히 척 모아서 앞으로 쭉 내밀었다.

태오가 익숙하다는 듯이 그 손에 카드를 내려놓자 태희는 아싸! 소리를 내며 좋아라 했다.

저럴 때 보면 중학생 시절 동생을 보는 것 같아서 그는 졌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귀찮게 하지는 말고, 오빠 말 알아듣지?”

“걱정 마. 여주 씨도 출판사에서 일한댔지? 내가 같이 책 읽으려고 우리 곤 작가님 책을 이렇게 다 가져왔지롱?”

태희가 등에 메고 있던 책가방을 그 자리에서 열어서 보여 줬다.

그 안을 꽉 채운 책들은 하나같이 곤 작가의 소설이었다.

그걸 보는 태오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차갑게 이지적으로 빛나던 눈이 살짝 멍해지고, 입매는 일순 굳었다.

태희는 그런 그의 표정이 웃겨서 죽으려고 했다.

“와하하핫, 뭐야! 오빠 표정이 왜 그래, 꼭 똥 씹은 것처럼?”

“……아니다. 간다.”

태오는 3초 정도, 곤 작가의 정체를 말할까 말까 입이 근질거렸지만 꾹 참았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그 작가가 바로 그 차여주라는 사실은, 그 혼자만이 알고 있어야 했다.

동생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궁금하고 재밌을 테지만, 여주의 비밀을 지켜 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응. 잘 다녀와. 오빠.”

“어제 늦게 잤으니까 여주, 깨기 전까지 놔두고.”

“에이. 알겠다니까. 뭐 하느라 늦게 잤는지도 물어보면 안 돼? 아, 농담이야. 걱정은 그만하고 얼른 출근이나 하세요.”

어쩐지 태오는 저 둘만 남겨 두고 출근하는 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의 손에 등이 떠밀려서라도 가야만 했다.

여주와 함께 병원을 갔던 날, 여주가 갑자기 쓰러져서 하루 일정을 통으로 비웠었다.

안 실장이 그를 대신해 움직여 줬다고는 해도, 그가 직접 거래처들과 상황을 파악은 해 놔야 했다.

“여전히 모델 하우스 저리 가라구나. 이 깔끔함. 이 정돈머리. 참 대단하다니까.”

태희는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거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손으로 닦아 봤다.

튕겨 봐도 먼지 한 톨 안 나오는 것이 역시 오빠 남태오의 집이구나!

역시 한집에 같이 살 성격은 절대 못 된다고 궁시렁거리던 태희는 뒤쪽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봤다.

문을 열고 여주가 나오고 있었다.

여주는 세수를 막 끝낸 얼굴이었고, 편한 옷차림이었다.

“어, 깼어요? 내가 너무 시끄럽게 해서 깼나 보다. 미안해요. 여주 씨.”

“아니요. 저도 평소에 이 시간에 일어나서요. 방금 일어났는데 대표님께서는…….”

남태오라면, 일부러 깨우지 않고 출근했을 걸 알았지만 그래도 배웅하고 싶어 나왔다.

“우리 오빠요? 아, 출근했어요. 가면서도 나보고 여주 씨 너무 귀찮게 굴지 말라고 당부를 얼마나 하던지. 내가 알던 오빠 남태오가 아닌 줄 알았다니까요.”

태희가 여주의 어깨를 툭 치면서 재잘거렸다.

사람 하나가 들어왔을 뿐인데, 어쩐지 집 안의 분위기가 밝아졌다.

여주는 쑥스러워하며 뺨을 손으로 긁적거렸다.

“맞아요. 태오 씨는 참 다정해요.”

“으으. 오빠가 다정이라니, 상상이 안 되네요. 그보다 여주 씨는 평소에 아침 먹어요? 나 요리 엄청 잘하는데.”

어느새 태희는 여주한테 팔짱을 끼고 주방으로 이끌고 있었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의욕이 가득한 태희의 눈빛을 보고 여주는 원래 태오랑 같이 있으면서도 아침을 안 먹었다는 말을 도로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저는 원래 아침…… 먹죠. 네.”

“잘됐다! 그럼 간단하게 브런치 해 줄게요. 여기 앉아 있어요.”

“아, 저도 도울게요. 참, 그리고 말씀 편히 하셔도 돼요.”

여주는 이제껏 자신을 스물다섯 살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태희보다 나이가 어렸다.

꼬박꼬박 존대를 하니까 듣는 입장에서 좀 어색했다.

“진짜 그래도 돼요? 오빠가 알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긴 한데, 사실 나는 그 말 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럼 여주 씨도 나한테 언니라고 불러 줘요.”

“어, 언니요?”

“응. 나 어릴 때부터 동생 갖고 싶었거든요. 여주 씨가 이제부터 내 동생 하면 되겠다!”

“……저도 어릴 때부터 언니나 오빠가 갖고 싶었어요.”

여주가 태희의 들뜬 목소리에 마음속에 있던 소망을 수줍게 고백했다.

“어머, 진짜요? 그럼 여주 씨는 외동인가요? 실례가 아니라면 혹시 부모님은 뭐 하세요?”

“외동은 맞고, 부모님은 안 계세요. 저, 어릴 때부터 안 계셨어요.”

“세, 세상에…….”

태희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고, 여주는 덩달아 긴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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