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팅 웨딩-40화 (40/60)

40화

“……네. 알아 둘게요.”

“물론 차여주 한정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그녀가 혹시라도 이해하지 못할까 봐 덧붙이는 부연 설명까지도, 마음에 쏙 들었다.

여주는 분위기의 흐름을 타고 그냥 그에게 몸을 맡기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살아 돌아왔을 때부터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운명 같았다.

그에게 마음이 동하고, 몸까지 동했는데 굳이 그를 피하고 사리고 싶지는 않았다.

전생에서 그녀는 작가로만 살았지, 한 번도 여자 차여주로 살았던 적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휘둘리는 삶은 이제 지겨웠으니까.

“그럼 아까 마리아 원장이 여주 씨를 보고 반가워했던 건…… 역시 오바였군.”

“저더러 처음 입양 가게 됐다고 말할 때 그렇게 웃었거든요. 아직도 기억이 선명해요.”

그건 여주에게 정말이지 끔찍한 기억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일이 꼭 잊혀지지 않았다.

여주가 진저리를 치자, 태오는 즉시 결정을 내렸다.

“그럼 앞으로도 차단 박으면 될 일 아닙니까?”

“네. 그렇네요. 저는 마리아 원장과는 다시 연락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요. 내 명함 주길 잘했네. 내 선에서 처리하죠.”

그는 그녀를 안심시켜 주려 그렇게 말했다.

왜 그렇게 여주에게 연락하려고 했는지는 알아볼 참이었다.

그녀가 수술을 받을 때까지 마음 편하게 해 주려고 남 회장과의 약속도 기한을 미뤄 달라고 했던 그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마리아 원장이라는 과거의 그림자 때문에 그녀가 힘들어하게 냅둘 태오가 아니었다.

여주의 사정을 얼추 들었으니, 이제는 그가 배경을 얘기할 차례였다.

“내가 여주 씨한테 해 주겠다던 얘기는 다름 아니라 우리 회장님 얘기입니다.”

“회장님이요?”

“내 설명보다는 이게 빠르겠네.”

시간을 보니 9시가 조금 넘었다.

안 실장을 통해 전해 들은 바로는 GK기업 관련 보도 기사가 최근 뉴스에 자주 보도되고 있다고 했다.

국내를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가 지금처럼 자신의 기업 소식을 들으려고 뉴스를 킨 것은 처음이었다.

“저기, 우리 회장님 나오셨군. 나한테는 할아버지 되십니다.”

텔레비전 화면이 켜지자, 태오는 바로 뉴스로 돌렸다.

마침, 화면에서는 남 회장의 자료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두 명의 앵커가 마주하고 또렷한 발성으로 막 설명을 하고 있길래, 태오가 여주가 잘 듣도록 음량을 더욱 높였다.

“최근 GK, 명가, SSC 등 국내 내로라하는 유통 업계 공룡 기업들이 명품 사업 부문을 대폭 강화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경기가 침체된 와중에도 베블런 효과로 명품 소비 시장이 더 커질 전망이라고 하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베블런 효과란 과시 욕구를 말하는데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명품에 대한 수요가 오히려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부 소비자들이 투자 목적으로 명품을 사들이면서 진입 장벽이 낮아지고 있으며 최근 소비 관련 인식 조사 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명품 구입 경험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죠. 특히 GK백화점은 본점을 리뉴얼하여…… 또한 GK건설은 최근 신정 혁신 도시에 사업비 1조 원을 들여……100층 높이의 주상 복합 건물을 신축키로 했는데…… 대형 쇼핑몰과 스카이 라운지, 레스토랑, 오피스텔 등등…….”

거기까지만 들어도 충분했다고 여긴 태오가 음량을 다시 줄이고 화면을 껐다.

암전을 마주하고 여주는 태오에게 할 말을 적당히 골랐다.

전생에서 이미 알았던 상대의 과거를 현실에서 마주한 것이었다.

다시 봐도 정말 대단한 과거였지만, 너무 놀라는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반응을 하는 게 나을 것이라 여겼다.

“저분이 태오 씨 할아버님이셨네요. 회장님께서 엄청 젊으시네요.”

“저건 과거 자료 화면입니다. 언론에 노출되는 걸 꺼리시는 편이라.”

“아아. 네.”

“그래도 동안이라고 하면, 퍽 좋아하실 겁니다.”

여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자, 태오가 피식 웃었다.

내심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었다.

그녀가 놀라면 놀라는 대로, 어떤 얼굴로 자신을 볼지 지켜보고 싶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상당히 여주는 침착하게 보였다.

“생각보다 여주 씨, 많이 안 놀라네?”

“……저 지금 되게 놀랐어요. 안 놀란 척하고 있는 건데요.”

여주가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놀란 표정을 해 보였다.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그녀의 모습이 평소와 달리 장난스러움이 묻어나 태오는 재밌어했다.

“미리 안 놀라도 됩니다. 실제로 뵈면 괴짜 같은 면모가 있으신 분이라.”

“네. 참고할게요. ……저, 그럼 오늘은 이만 주무세요.”

태오가 잠시 웃느라 힘을 푼 사이에 여주가 쏘옥 몸을 돌려 그에게서 빠져나갔다.

제 품에 안고 있던 여주가 사라지자, 태오가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피곤할 거 알아서 이만 여주 씨 놔주려고는 했지만.”

“…….”

“그렇게 도망치면 쫓아가고 싶어집니다.”

그가 당장이라도 쫓아갈 것처럼 몸을 앞으로 내밀자, 여주가 놀라서 헉 소리를 내더니 뒤돌아서 방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태오 씨, 안녕히 주무세요!”

빠르게 닫히는 방문을 보던 그가 3초 멍을 때리더니,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보나마나 오늘은 밤새 애국가나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다음 기회를 노린다, 반드시.

* * *

박 회장의 자택 뒤편에는 작은 온실이 있었다.

간이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박 회장에게 비서가 마리아 원장을 만나고 와서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회장님. 명하신 대로 희망 고아원 원장을 만나 함구하라고 잘 말하고 왔습니다.”

“홍삼 박스는 충분히 채워서 준 거 맞지?”

박 회장은 돈을 주고받는 것에서만큼은 철저했다.

필요할 때는 과감히 베풀었기에 지금까지 그의 돈을 받아먹은 이들 중에서 배신을 하는 이는 없었다.

“예. 물론입니다. 그 원장, 박스를 열어 보더니 아주 만족했는지 알아서 종적을 감추겠다고 했습니다.”

비서는 홍삼 박스를 열어서 액수를 확인하던 원장의 탐욕스러운 얼굴을 떠올리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 그런데 회장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차여주 아가씨, 친자 확인까지 하시고 나서 왜 바로 만나러 가지 않으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랬다.

이미 박 회장과 차여주 사이의 친자 확인은 끝난 상태였다.

박 회장은 대학교 입학식 때 재단 후원 관련자로 참석해 수석 입학생이었던 차여주를 우연히 만났다.

지척에서 악수하고 격려하며, 잠시 포옹한 사이 차여주의 머리카락이 떨어졌다.

그걸 가져다가 비서에게 은밀히 검사를 하도록 지시한 것이 박 회장이었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 애 앞에 나타나겠나. 이제까지 관심도 없이 찾지도 않았었는데. 죽을 날 받아 놓으니까 눈에 밟히는 건 그냥 내 사정이지 않나.”

박 회장은 이제껏 부인인 금 여사와 자식들에게는 미안한 감정이 없었다.

결혼할 때 금 여사한테 했던 약속대로 가정에 충실했고, 연인이었던 차화련에게 관심을 끊었다.

그녀의 존재를 알았다면, 금 여사와 처가가 그 여자를 망가트릴게 뻔했으니까.

차화련을 지키기 위해서 병이 있던 그 불쌍한 여자를 버렸다.

그 여자가 끝내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찾아가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그 여자가 아이를 낳아서 죽기 전, 희망 고아원에 보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지금 박 회장의 앞에 서 있는 비서를 통해서였다.

아이를 한번 만나 보려고 했지만, 그가 방문했을 때는 이미 미국으로 입양됐다고 했다.

일부러 문제를 키울 필요는 없고, 인연이 없다고 자위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재단 후원 관련자로 참석했는데 젊었을 적 차화련과 똑같이 생긴 여대생을 만났다.

생김새도 닮았지만, 이름을 듣는 순간 박 회장은 확신했다.

차여주는 차화련의 딸이라는 것을.

“그 마리아 원장이라는 이는 어떻지? 자네도 그 고아원 출신이니까 잘 알 거 아닌가.”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전 끝까지 입양되지 않아서 시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지요. 마리아 원장은 수녀의 탈을 쓴 마녀입니다. 고아원 내에서 따돌림과 폭력을 방관하고 오히려 가해자들을 두둔하는 잔인한 면모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돈 주고 입 다물게 하길 잘한 것 같군.”

비서는 시설에서 나와서 갈 데가 없어 방황을 했었다.

어렵게 정부 지원 사업을 알아보던 중, 박 회장이 마침 기업 차원에서 자선 사업 후원 중 일부로 계약직으로 고용했다가 쓸 만해서 아예 곁에 두고 개인 비서로 부리고 있었다.

이후로는 그림자처럼 박 회장을 뒤따르며 은밀하게 지시를 받고 움직였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갑자기 내가 친부라고 나타나면, 차여주 그 아이도 혼란스럽겠지. 언제가 좋을지, 지켜봐야 할 것 같아.”

박 회장은 만나고 싶다면서도, 막상 만나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회장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차여주 아가씨의 생김새 말고도 확신이 드셨던 부분이 있으셨나요? 저도 고아라 그런지, 핏줄끼리는 땡긴다는 말이 정말인지 늘 궁금했었습니다.”

“제 엄마가 생전에 나한테 말했던 적이 있었지. 차화련이, 그 여자가 만약에 자기가 딸을 낳으면 이름을 여주라고 짓겠다고 했어.”

차화련은 차분한 성격으로, 글짓기와 꽃을 좋아하던 여자였다.

왜 딸의 이름을 여주로 짓고 싶냐고 물었더니, 그때 했던 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자기 인생은 이미 틀렸지만, 자기 딸만큼은 제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더군. 특히 딸이면 드라마 속의 여주인공처럼 사랑 받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었지.”

“듣고 보니 낭만이 있으셨던 분 같습니다.”

비서의 말에 박 회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차여주의 인생은 고아였기에, 제 어미가 바랐던 대로 귀하게 자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 회장은 이제부터라도 차화련의 바람대로 그 딸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고 싶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