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나만 이렇게 차여주, 당신이 갖고 싶은 건 아니잖아?
분명 여주의 눈빛 또한 그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하던 걸 마저 하고 싶었다.
갑자기 걸려 온 남 회장의 전화만 아니었다면 키스는 이미 하고도 남았다.
열에 들뜬 여주의 눈을 보자 더 참기가 힘이 들었다.
그의 손에 손목이 붙들린 채, 여주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네. 왠지 모르겠지만 키스로 안 끝날 것 같은 기분이…… 저도 들었어요.”
“잘 아네. 솔직히 참기 힘듭니다.”
태오가 그녀의 손목으로 제 입술을 가져갔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운 각인이라도 찍인 것처럼 여주가 바르르 떨었다.
남자의 유혹에 모른 척, 넘어가고 싶었다.
아니, 그녀는 이미 반쯤 넘어간 뒤였다.
남자의 시선이, 촉감이,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이성과는 멀어지게 만들었다.
남 회장의 전화가 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대표님께는 미안하지만 지금 아니면…… 제가 용기가 더 나지 않을 것 같아서요. 희망 고아원, 그리고 마리아 원장에 대해서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처음으로 지척에서 듣게 된 남 회장의 목소리가 여주의 이성을 다시 깨웠다.
생각해 보니 오늘이 두 사람이 계약을 맺기로 한 첫날이었다.
그는 그녀가 제안을 확실히 받아들이면, 남 회장의 존재를 알려 줄 것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물론 그녀는 그가 말해 주지 않더라도, 전생의 기억 덕분에 그가 누구인지 얼마나 대단한 남자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태오에게는 밝히지 못했던 그녀의 사정이 있었다.
그 사정은, 전생에서도 누구에게도 밝혀 본 적 없던 이야기였다.
“그런 용기라면, 내가 참아야겠네. 여주 씨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태오가 그녀의 손목에서 입술을 떼어 냈지만, 놓아주지는 않고 말했다.
어차피 남 회장의 전화로 산통은 이미 깨졌다 싶었으니, 내키는 대로 그녀와 더 닿아 있고 싶었다.
“……다음에, 저 다음에는 계속하고 싶어요.”
“그 말, 진심입니까?”
“……저 아무래도 대표님 좋아하는 것 같아요.”
여주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하는 말에, 그는 심장이 지끈거렸다.
이제 다음은 또 언제 기약하는지 고민도 잠시, 그녀가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웠다.
자신만 저 여자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는 걸 확인받은 셈이었다.
그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수확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날 좋아하는구나. 그래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진하디진한 미소가 나왔다.
그는 그다음 말을 내뱉기 위해서 목청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조만간 그녀에게 고백을 할 생각이었지만, 뭐 어떤가.
그녀의 인생에 불현듯 끼어들고 싶었던 건 제가 아닌가.
계획대로만 맞춰 살던 그의 인생이 엇나가는데도, 그는 기껍기만 했으니.
“난 차여주 씨 사랑하는데.”
여주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이내 그의 눈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팔을 잡은 그대로, 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옷 위로 맞닿은 그녀의 몸 아래, 그의 모든 신체 부위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태오 씨가…… 저를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라도 들은 것처럼 여주가 되물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가 제 심장이 있는 가슴 왼편을 짚어 주었다.
쿵, 쿵, 쿵.
말로 하는 건 모자라서, 심장 소리로 확인 사살까지 시켜 주었다.
입이 바짝 마르고, 그녀의 볼이 창백해졌다가 붉어졌다.
“저는 저만 좋아하는 줄 알고. 대표님께서 저를 좋아하는 건 그냥 제 팬이니까 그건 그럴 수도 있다 생각했지만……. 사랑한다고 하시니까…… 너무 놀라서.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나 봐요.”
그녀가 말을 한마디씩 할 때마다 태오의 가슴이 저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솔직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고백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고작 몇 초 만에 그는 머릿속에서 이미 그녀를 넘어뜨리고 올라타고 있었다.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음험한 상상이 펼쳐졌다.
그녀의 붉어진 눈가가 지독하리만큼 자극적이었다.
남자는 시각에 약한 동물이라는 걸, 태오는 처음으로 실감했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처음부터 계약하자고 여주 씨 꼬신 건 나니까.”
그는 그녀의 눈가를 못 본 사람처럼, 평정심을 유지하며 그녀가 제게 등을 돌리고 앉도록 자세를 고쳐 주었다.
그녀가 제게 편히 기대도록 소파 뒤로 허리와 등을 더 비스듬히 기댔다.
생각해 보니까 그녀와 첫날밤을 집에서 보내기 싫어졌다.
잠시 이성을 잃고 저지를 뻔했지만, 생각해 보니까 이건 아니지 않은가.
그에게도 인생 첫 고백인 셈인데, 여주에게도 기억에 남을 만큼 좋은 추억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일단은 그녀와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기로 했다.
정면으로 또 보았다가는 참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저를 꼬셨다고요? 대표님께서요?”
돌아앉은 채로 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몸짓마저도 귀여워서 그는 혀를 깨물 뻔했다.
그 대신, 그녀에게 확신을 심어 주는 대답을 해 줬다.
“관심 없는 여자한테 달려가고, 도와줄 만큼 오지랖이 넓지 않거든.”
“아…….”
“근데 또 대표님이라고 하네?”
그가 손으로 가볍게 그녀의 허리를 간지럽혔다.
간지럽다며 그녀가 바르르 떨다가, 고개를 자꾸 돌려 말하려고 하길래 그는 아예 돌아보지 못하게 그녀를 꽉 껴안았다.
“태오 씨. 그런데 이 자세는 좀…….”
여주는 이해를 못하겠지만, 그는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용기를 내서 할 말이 있다는데, 들어 줘야지.
사실, 그로서도 마리아 원장을 본 뒤로 여주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다그치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아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자, 이렇게 앉아서 얘기해요. 나한테 할 말 있다고 했잖아.”
“자세가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전혀. 이렇게라도 안고 있어야지, 안 그럼 억울해서.”
“이게 더 불편할 것 같은데요. 태오 씨…… 잘생긴 얼굴도 안 보이고.”
몇 번을 반복해 확인하는 여주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귀까지 빨개져서는 그더러 잘생겼다고 말하는 여주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그것도 꾹 참았다.
“오늘만 참아요. 나도 지금 여주 씨랑 자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까.”
억울하다는 말의 부연 설명까지 완벽하게 마친 그가 턱을 높이 들어 아래에 있는 여주의 작은 머리통 위로 올려놨다.
두 팔로는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아서 더 움직이지 못하게끔 결박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어요. 저, 그럼 음. 고아원에서부터 얘기해야겠네요.”
여주는 그에게 가만히 안긴 채,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요. 듣고 있습니다.”
태오가 안심하고 말하라 독려했다.
차여주란 여자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네……. 마리아 원장은 제가 희망 고아원에 있을 때 계셨던 분이에요. 저한테는 그렇게 좋은 분이 아니셨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고 붙임성이 없다 보니…… 거기서도 따돌림을 당했는데……그냥 참으라고 하셨거든요.”
고아원에서 자라던 어린아이들은 눈치가 빨랐다.
여주가 따돌림을 당해도 누군가에게 고자질할 성격이 못 되는 것을 알고 나서는 점점 더 짓궂게 괴롭혔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던 장난이 간식을 빼앗고 구타로 이어졌다.
그러다 우연히 미국으로 입양을 가게 됐을 때, 마리아 원장은 처음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좋은 말을 해 주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양부모는 그녀를 학대했고, 여주는 트라우마를 얻었다.
버려지고, 괴롭힘 당하고, 쑤셔지고, 할퀴어지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파양을 당하고 상처로 얼룩진 그녀가 도피처로 택한 것은 소설을 집필하는 것이었다.
“제가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사실…… 어디서도 밝히고 싶지 않았어요. 들으셨다시피 그리 남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말할 만한 내용이 아니거든요.”
황금배 출판사로 투고하자마자, 그녀를 한국으로 데려간 것이 도지성이었다.
그 역시 그녀가 필요했던 것이지만, 적어도 그녀의 쓸모를 알아주기는 했다.
유일하게 그녀의 보호자와 담당자를 자처했던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도움을 받았던 것이 전생에 그녀가 저지른 실수였다.
“선택지가 도지성 하나뿐이었다는 건…… 지난번에 했던 얘기가 그 얘기였군요. 이제 나도 이해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태오의 숨결이 등 뒤로 느껴졌다.
그녀의 얘기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가 그녀의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스치듯 찰나였지만 여주의 가슴에는 크게 물결이 일어났다.
“……네. 그때 제가 말씀드렸듯이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마 지금 얼굴이며 목까지 다 빨개졌겠지.
여주는 그의 짧았던 입맞춤을 음미하는 기분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곤 작가 어시라고 할 때부터 내가 의심했어야 했는데. 더 빨리 여주 씨랑 알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혹시 지금 질투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나 질투 처음 하는 거 아닌데, 몰랐습니까?”
태오가 그녀의 손을 쥐고 깍지를 꼈다.
질투라는 말에 여주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대놓고 인정하는 그에게 뭐라고 반응해야 할까, 잠깐 생각했지만 진심을 표현해 주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었다.
숨김없이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건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남에게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이들을 보면서도 여주는 그게 어렵게만 느껴졌었다.
그에 반해 태오를 보고 있으면, 그의 솔직함을 닮고 싶어졌다.
“설마 싶었는데…… 전 태오 씨가 이렇게 질투가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그럼 이제라도 알아 둬요. 나도 최근에 알았는데, 남자치고 좀 질투가 많은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