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여주는 엉겁결에 태오와 함께 소파에 앉게 됐다.
호칭을 정해 보자고 했지만, 대표님 말고는 마땅하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자기? 아니,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 연인들 사이에서 부르는 말은 영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부르는 제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대표님은…… 그렇게 많이 어색할까요?”
“거래처 직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안 실장이나 여주 씨나 날 부르는 게 차이가 없잖아.”
태오의 말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의 직원도 아닌데 그렇게 부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어, 어떻게 불러 드리면 좋을까요?”
“이름 불러요. 내 이름.”
“태, 태오 씨. 이렇게요?”
여주는 삑사리를 내고 말았다.
정말이지 남의 이름 부르는 게 이렇게까지 부끄러운 일일까.
계약이긴 해도, 이 남자와는 연인이 될 일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요. 더듬지는 말고요. 내 이름 태태오 아니니까.”
“네. 태오 씨…….”
그가 웃으며 하는 말에 여주가 한 번 더 불러 보았다.
계속 부르다 보면 익숙해지겠거니 싶어서 그에게도 물어봤다.
“그럼 대표님께서는, 아니 태오 씨는 저를 어떻게 부르실 생각이세요?”
“나도 성 떼고 부를 겁니다. 여주 씨.”
“대표님은 어색하지 않으세요?”
“아니, 난 너무 편합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하는 말에 여주가 멋쩍게 웃었다.
“필요하다면 여주야, 이렇게 부를 수도 있습니다.”
연달아 하는 태오의 말에 그녀는 또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살며시 눈웃음 지으며, 제 이름을 부르는 그는 능숙해 보였고 조금은 짓궂어 보였다.
“귀가 좀 빨개졌네. 여주 씨는 빨리 익숙해져야겠습니다.”
뭣보다 다정하게 불려지는 그 음성이 그녀를 달뜨게 만들었다.
“이만 식사하러 갈까요?”
그녀의 손을 잡고서 태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으로 가자 식탁에는 이미 가정부가 잘 차려 놓고 간 저녁이 있었다.
여주가 이 집에 들어온 뒤로 처음 그와 함께하는 식사였다.
점심을 먹었던 한정식집 못지않게 간이 훌륭했다.
두 사람만 자리한 식사 자리는 조용했다.
태오가 슬쩍 여주가 먹는 것을 보다가 고기 반찬을 하나 집어서 올려 줬다.
“양념이 아주 잘 됐어요. 먹어 봐요.”
“가, 감사합니다.”
“꼭꼭 씹어 먹어요. 이것도 좀 먹고.”
그는 계속해서 다른 반찬을 더 챙겨서 올려 줬다.
아예 자신의 밥그릇은 제쳐 두고 그녀가 밥 먹는 걸 주시했다.
입을 조그맣게 벌려서 새 모이처럼 들어가는 걸 보니까 속이 탔다.
그녀가 적게 먹어서인 것도 있었지만, 가지런한 이가 드러날 때마다 이상하게 목이 말랐다.
태오는 밥 대신 물을 연신 들이켰다.
“태오 씨도 어서 드세요.”
여주도 그가 한 것처럼 똑같이, 반찬 하나를 집어서 옮겼다.
태오가 젓가락을 들어 바로 받아서 입에 넣더니,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렇게 긴장해서는 연인처럼 안 보일 텐데.”
“아…….”
“이제부터라도 우리 서로 연인처럼 대해 보도록 하죠.”
“네. 대표님 말씀대로 연습이 필요할 것 같네요.”
“그래요. 난 이미 익숙하니까, 우리 여주 씨가 연습이 많이 필요하겠네.”
우, 우리 여주라니.
스무 살의 그녀였다면 몰라도, 그녀의 정신은 스물 다섯이었다.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잖아.’
회귀하기 전,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의 남태오 대표와는 그리 차이가 많이 나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면 저 남자는 지금 같은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하긴, 작가 대 사업가로 미팅이나 했을 뿐이니 어떻게 저런 얼굴을 볼 수 있었겠나.
“볼수록 귀엽네. 진짜.”
태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톡 건드리며 하는 말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낼 뻔했다.
여주는 민망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얼굴에 힘을 주고, 밥을 먹었다.
그가 저렇게 낯간지러운 말도 할 줄 아는 남자였던가?
병원에서도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려던 노력을 떠올려 보았다.
아마도 이렇게 놀림받고 부끄러워하는 제 모습을 아는 게 저 남자 하나인 것처럼, 저 남자의 저런 면모를 아는 것도 그녀 하나뿐일 것이다.
여주는 그 사실을 인지하자, 기분이 또 묘해졌다.
서로에게만 보여 주는 모습이 있다는 것이 설레기도 했다.
“……식사 끝났으면 후식 드셔야죠. 아주머니께서 메모 남기고 가셨더라고요.”
“왜 내 이름 안 부릅니까?”
“……태오 씨, 후식 드셔야죠.”
“그래요. 실전이라 생각하고 앞으로도 잘해 봐요.”
식사가 끝나고 후식을 먹을 준비를 하면서도 태오는 실전 연습을 시켰다.
덕분에 여주는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연습을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가정부가 먹기 좋게 잘라 놓고 간 과일은 다양했다.
참외와 자두, 수박 조각들 중에서 여주는 빨갛게 잘 익은 자두를 먹었다.
아삭.
다디단 자두를 한 입씩 베어 물자, 입 안에 상콤함이 번졌다.
여주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달콤하고 상콤한 게 맛있어서 하나 더 집어 먹었다.
그러다 과육의 즙이 볼에 살짝 튀었는데, 몰랐다.
“칠칠맞게 묻히고 먹기입니까?”
그가 손을 뻗어서 그녀의 볼을 닦아 줬다.
손가락이 떼어지나 했더니, 나머지 손가락이 뭉근하게 볼을 만졌다.
“저, 태오 씨?”
스무 살의 여주는 아직 젖살이 남아 있었는데, 그녀는 그게 콤플렉스였다.
하지만 태오는 그녀의 떨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볼살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느낌이 한번 손에 닿으니,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만지면, 기분 나쁩니까?”
어느새 가까워진 그의 몸에서 체향이 느껴졌다.
그녀가 샤워할 때 썼던 바디워시와 비슷했는데 뒤로 갈수록 진해지는 걸 보면 그의 체향인 듯했다.
그걸 알아챌 만큼 두 사람의 틈이 좁혀진 자세였다.
“아니, 그건 아닌데요…….”
여주는 제게서 뗄 줄 모르는 열망의 시선이 낯설었다.
행동으로 확연히 보여지는 태오의 심리 상태가 읽히고 있었다.
맞닿은 살결에서 누구의 체온인지 몰라도,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손을 떼기가 싫은데.”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주는 갈증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말하고 나서 혀로 입술을 핥았다.
분위기를 따라가는 건지는 몰라도, 그의 시선이나 말투에 그녀의 몸 역시 열이 난 것처럼 더웠다.
아직 그녀의 손에는 남은 자두 조각이 있었지만, 그의 강렬한 시선 앞에서 다시 베어 물기가 망설여졌다.
“……맛있는데, 드세요.”
여주는 그릇에 담겨 있는 걸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그게 더 맛있어 보이는데.”
하지만 그의 시선은 그녀의 입술에 꽂혀 있었다.
여주를 진득하게 바라보는 태오의 시선이 짙게 물들었다.
그녀의 볼에 닿아 있는 손끝부터 근육이 뭉치려 드는 것 같았다.
그의 심장 박동 역시 빨라지고 있었다.
“그럼 내가 여기서 여주 씨, 안고 싶다고 하면, 그래도 됩니까?”
태오는 여주가 스스로 핥은 그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가고 싶어졌다.
저보다 작은 여자를 품에 안고, 끝까지 밀어붙여 보고 싶어졌다.
문득 궁금해졌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여주가, 제게 이 밤에 어디까지 허락할까?
그리고 제 열기는 어디까지 참아 낼 수 있을까?
“혹시…… 이것도 연습 중 하나일까요?”
눈을 가늘게 내려뜬 여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결에 남태오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럴 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오늘은 참겠습니다.”
태오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지만, 아직 이성을 놓기 전이었다.
그의 손은 여주의 볼을 지나서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자그마한 귓불과 솜털이 돋은 귀를 만지면, 빨갛게 물드는 게 보였다.
유독 피부 톤이 창백한 여주가 그렇게 되는 걸 보니, 시각적으로 자극이 컸다.
“…….”
그의 숨결이 더 거칠어졌다.
여주는 그를 밀어내지도, 싫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와 비슷하게 가쁜 숨결을 내면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밀어내면 관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허락한 것처럼 보이니, 입을 맞추기로 했다.
서로의 눈에 서로를 담고, 입술이 닿았을 때였다.
탁자 위에 올려 둔 태오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병원에 있었을 때부터 그렇게 해 둔 것이었는데, 유난히 기어 다니는 소리가 컸다.
잠시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지고, 여주가 손을 뻗어 그의 핸드폰을 집어 줬다.
“전화부터…… 받으셔야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고, 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전화를 받았다.
“늦은 시간에 누구야.”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말이 곱게 나가지가 않았다.
- 누구긴 네 할애비다, 이 녀석아!
상대 역시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고 여주 귀에도 들렸다.
“회장님.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 그 아가씨랑 날짜 빨리 좀 잡으라고, 그 말 하려고 전화했다. 명 원장도 이미 같이 만났다면서, 나랑도 빨리 만나야지.
“지금 그 얘기 하려던 차였습니다.”
- 그러냐? 그럼 끊으마.
반대편에서 남 회장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태오가 허탈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먼 소파로 던져 버렸다.
한창 무르익은 분위기였는데, 아주 산통을 다 깨셨군.
그가 쓴웃음을 짓는데, 여주가 그의 팔을 어느새 잡고 있었다.
“대표님. 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지금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얘기길래. ……키스하고 나서, 마저 들으면 안 됩니까.”
그는 그러지 말라는 신호를 눈빛으로 보냈고, 여주는 망설였다.
“키스로만…… 끝내실 건가요?”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