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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팅 웨딩-37화 (37/60)

37화

“헉!”

오후쯤 여주는 병실에서 깨어났다.

악몽 같았던 마리아 원장을 만난 것이 꿈이 아니었다.

먼저 아는 척을 해 오던 그 눈빛은 여전히 소름 끼쳤다.

정말로 반가워하는 이의 얼굴이 아니라 어떻게 그녀를 이용하면 좋을까 싶은 그 얼굴.

아주 오래전에 희망 고아원에 있을 때부터 잊지 못했었다.

‘왜 한국에 들어온 걸 알리지 않았냐고?’

그건 전생에서도 여주의 선택이었다.

마리아 원장과 두 번 다시 엮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현생에서는 이렇게 쉽게 만나게 되다니.

정말이지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 수밖에…….

“깼습니까?”

태오가 그녀가 수액을 맞고 있음을 설명해 줬다.

그는 방금 막, 안 실장과 연락해 상황을 설명했다.

점심시간이 끝나도록 태오가 출근하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표님 회사 가 보셔야 할 텐데. 저 신경 쓰시느라….”

“기절한 사람 두고 내가 어떻게 출근합니까.”

그의 대답을 듣고 건너편 벽시계를 본 여주가 또 한 번 기절할 뻔했다.

이렇게 그의 시간을 오래 쓰게 했다니, 정말이지 면목이 없었다.

“그래도……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죠. 아까는.”

“차여주 씨, 일단 쉬어요. 나 아직 아무것도 안 묻고 싶으니까.”

“대표님…….”

“당신이 지금 제일 힘들어 보여서 하는 말입니다.”

여주는 태오의 따스한 말에 순간 목이 메였다.

그에게 마리아 원장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눈을 뜨자마자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고민해야만 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마리아 원장은 원래대로라면 그녀의 과거에만 머물렀어야 할 인물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마리아 원장을 보고 나서 결국 자신은 쓰러지지 않았던가.

내제되어 있던 트라우마의 발동이었을까?

그런 상황을 피하려고 노력했었는데.

‘이 남자는 대체 왜…나를 이렇게 매번…… 울고 싶게 만들까.’

늘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탓했었다.

고아원에 있을 때는 마리아 원장이 그랬고, 그녀를 따돌리던 아이들이 그랬고.

입양을 했다가 파양을 했던 미국의 부모들 역시 그랬다.

문득 밀려드는 과거사에 여주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흐린 눈으로 제 손목으로 밀려드는 수액 봉지를 보았다.

노란 액체의 양이 줄어드는 걸, 눈에 힘을 주고 노려봤다.

수액 맞다가 우는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아서.

“차여주 씨, 많이 아픈가 보네.”

그런데 태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미적지근한 온기가 괜히 더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가 그녀의 볼 쪽에 손을 짚고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 말하기 참 어렵다. 차여주 씨. 그치?”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눈가를 덮어 줬다.

병실 천장의 불빛이 시렸는데, 눈이 편안해졌다.

“다 큰 어른도 좀 울어도 됩니다.”

그윽한 목소리가 속삭이는 말에, 그녀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콧등도 시큰해졌다.

다름 아닌 자신이 태오에게 했었던 말이었다.

“어른도, 울고 싶을 때가 있잖아. 그럴 때가 있는 거라고, 누가 나한테 그랬는데.”

눈시울이 붉어지고, 뜨거운 물기가 눈가 주변으로 번져 갔다.

그의 손바닥을 적시고도, 천천히 흘러내렸다.

‘참 희한한 일이야.’

울면서, 여주는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전생에서도 이렇게 울어 본 적이 없었는데.

내내 속으로 쌓아 두길 반복했었다.

그게 다 화병이 되어, 큰 병으로 번진 줄도 몰랐었다.

‘이 남자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네.’

잠시 부끄러움도 잊고, 마냥 아이처럼 울고 싶어졌다.

그가 손바닥으로 가려 준 덕분에, 여주는 마음껏 눈물을 흘렸다.

가슴을 뒤덮었던 답답함이 그렇게나마 밖으로 표출되니 좀 나아졌다.

“한숨 자요. 내가 옆에 있어 줄 테니까.”

태오의 목소리가 마법처럼 그녀의 울분과 화기를 잠재웠다.

한숨 자고 나면, 다시 괜찮아질까요?

여주는 긴 호흡을 했고, 이내 잠들었다.

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태오와 안 실장의 대화가 한창이었다.

“대표님. 병원이라시길래 제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아십니까? 십년감수했습니다, 정말.”

“차여주 씨가 쓰러져서 나도 십년감수했어.”

“왜 안 그러셨겠습니까. 대표님. 회사도 아예 결근하기로 하셨을 정도니까요.”

두 사람은 아직 그녀가 깬 줄 모르고 있었다.

결근을 했다는 말에 여주가 다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겨, 결근이라니!

남태오 대표가 자신 때문에 결근까지 했다고?

“안 실장, 오늘 급한 일정은 나 대신 잘 처리했고?”

“물론이죠. 제가 다행히 대표님 보좌한 세월이 길다 보니까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수고했어. 그럼 가 봐.”

“대표님. 정말로 오늘 회사 안 나오실 겁니까? 워커홀릭이신 분이 갑자기 이러시니까 제가 좀 당황스럽고 놀라워서요.”

안 실장이 하는 말에 여주는 누워서 속으로 격하게 동의를 했다.

일이 좋다고, 얼마나 좋으면 결혼도 안 하고 일만 하겠다던 남자였다.

전생에서도 그가 약혼녀랑 끝내 결혼했다는 말도 못 들었는데.

“차여주 씨가 쓰러졌는데, 지금 일이 중요한가, 안 실장?”

이어지는 태오의 대사에 여주가 숨을 훅 들이켰다.

안 실장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지, 목소리가 커졌다.

“……예?! 대표님, 언제 그렇게 차여주 씨한테 마음을.”

“그렇게 됐어. 목소리 낮춰.”

“그럼, 회장님께는 그럼.”

“안 그래도 인사시켜 드릴 생각이야.”

이어 태오가 안 실장더러 먼저 돌아가게 지시하며 밖으로 내보내는 소리가 들렸다.

여주의 머릿속에서는 태오의 대사가 계속 맴돌았다.

‘남자로 안 보이냐고 묻더니, 이제는 일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고? 남태오 대표한테?’

직접 듣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웠다.

살면서 가슴이 이렇게 빨리 뛰어 본 적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머릿속이 맑게 개이는 듯했다.

태오가 돌아오기 전, 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 대신 손으로 정돈하고, 옆에 있던 물병도 들어 마셨다.

목을 축이고 나서, 목청을 좀 가다듬고 나자, 태오가 다시 돌아왔다.

“아. 차여주 씨, 안 실장 말소리에 깼구나.”

“대표님.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요.”

“저한테 대표님께서 해 주셨던 제안 말인데요. 저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대표님께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요.”

여주는 말을 하고 나자, 마음의 짐을 덜어 낸 듯 후련해졌다.

오전에 검사 결과도 좋게 나왔고, 박하나의 약점도 잡았다.

갑자기 마리아 원장을 만나 이성을 잃기는 했지만, 현재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결과가 나오고 나서 태오에게 답을 하겠다고 했으니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혼자 두고 가지 않으려고 결근까지 했다는데!

그녀도 그에게 빨리 답을 줘야만 했다.

지금이야말로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여겼다.

“차여주 씨. 그렇다면 잘 생각했습니다.”

“네. 저도 정말 대표님께서 후회하지 않으시도록 최선을 다해서 원하시는 대로 제 역할을…….”

이번 생에 그녀도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태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가능하다면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럼 일단 집으로 갑시다.”

주먹까지 꽉 쥐고 결의를 다지는 표정으로 여주가 말했다.

태오는 그 주먹을 제 손으로 잡고는 그녀를 일으켜 줬다.

“저기, 대표님. 제가 걸어갈 수 있는데요. 네?”

그다음, 그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대고 가볍게 안아 들었다.

놀란 여주가 그의 팔을 꽉 붙잡았지만 태오는 단호했다.

“가다가 또 쓰러지면 어차피 내가 안아야 됩니다.”

“하, 하지만.”

“나, 원래 내 사람은 잘 챙깁니다.”

그대로 빠르게 안아 든 채 차까지 데려가는 태오였다.

내 사람이라는 말에 여주는 또 숨을 골랐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민망한 포즈의 주인공이 됐다니.

그녀를 단단히 부둥켜안고서, 다시 차에 태워 줄 때 부드럽게 내려놓기까지.

그 흔들림 없는 안정감에 안심이 되고, 심장이 또 뛰어 댔다.

“그리고 차여주 씨는 이제부터 내 여자니까, 더 잘 챙겨야지.”

운전석에 오른 태오가 한 말에 여주는 안전벨트를 꼭 잡았다.

기쁨과 설렘, 고마움.

약간의 혼란스러움까지.

그 모든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여주는 마치 구름 위를 밟고 선 듯, 멍한 기분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태오의 손을 보자 힘줄이 툭툭 불거진 그 손이, 가볍게 운전대 위를 톡톡 건드렸다.

그게 꼭 제 심장이 건드려진 것처럼, 여주는 후욱 숨을 들이켰다.

지금 남태오 대표의 기분이 좋은 걸까?

차 안에서 콧노래 부르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어쩐지 더 부끄러워져서 여주는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니 웃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스스로 웃고 있는 얼굴이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 * *

집에 도착한 뒤, 태오는 샤워를 끝내고 1층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적당히 물기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샤워 가운을 걸친 그의 실루엣은 어느 각도로 봐도 훤칠하기만 했다.

그 잘생긴 얼굴이 약간의 고민을 하느라 눈썹 사이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마리아 원장이 쏟아 냈던 여주에 대한 정보를 기억하는 중이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 여주가 해외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곤 작가인 것과 그녀의 작품 세계는 알고 있었지만, 본체인 차여주란 여자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여주 또한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차차 알아 가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여주가 계약 연애에 응하기로 했으니, 서로가 알아 둬야 할 내용을 빠르게 숙지하고 남 회장과 태희를 만나는 게 좋을 것이다.

“대표님.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그때 샤워를 끝낸 여주가 편한 옷차림으로 나타났다.

물기에 약간 젖은 여주의 앞머리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여주의 손을 잡아당겼다.

“식사도 좋은데, 그 호칭부터 바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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