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식사가 끝나고 한정식집에서 나오던 길이었다.
여주의 소원대로 계산을 마치고, 태오는 주차된 차를 가지러 갔다.
서울 한복판이라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만 제외하면, 만족스러운 음식점이었다.
특히 여주는 전생에서 못 먹었던 진수성찬을 먹은 뒤라 한껏 들떠 있었다.
점심 메뉴는 전통죽과 구절판, 별미채, 날씨에 맞춘 냉채와 육회, 전복구이 등 신선한 재료로 만든 궁중음식이 나왔다.
후식으로 나온 한과와 전통차까지 먹고 나니 배가 불러서 터질 것 같았지만, 기분만큼은 정말 좋았다.
잡지에서 봤던 그대로, 이곳은 대문을 넘어 들어서면 아담한 정원이 나오고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별채와 갤러리들이 있었다.
마치 영화 촬영장에라도 온 것처럼 여주는 눈을 반짝이며 풍경 여기저기를 눈에 담았다.
‘범인이 막판에 쫓겨서 이곳으로 도망쳐도 재미가 있겠는걸?’
어느새 여주는 머릿속에서 소설의 다음 에피소드를 구상 중이었다.
현재 공식적으로 휴재를 띄웠지만, 수술이 끝나고 나서는 다시 연재 작업에 착수할 예정이었다.
과거에 써 놓았던 부분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한번 보완해 볼 생각이었다.
깊이 몰입해 있던 터라 계단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사람을 미처 보지 못했다.
“어어어.”
양산과 부딪쳐 한쪽으로 밀려난 여주의 몸이 비탈길 위에서 살짝 휘청거렸다.
“어머머머머. 그러니까요. 사모님께서 이렇게 갑자기 연락을 주실 줄 알았으면…… 잠시만요? 저기, 아가씨. 내가 통화 중이라 앞에 사람 있는 줄 몰랐어요. 괜찮아요?”
상대가 전화 통화를 끊더니 여주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머. 어머머! 이게 누구야. 응? 얘, 여주야! 나 알아보겠어? 나 마리아 원장이잖아.”
상대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잡으려고 했지만, 여주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 바람에 무게 중심을 잃고 한쪽 발이 꺾여 넘어지고 말았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여주가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며 말했다.
상대를 본 순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누구시냐니. 나 기억 못 하는 거니? 한국에는 언제 들어온거야? 응? 아직도 이름은 여주로 쓰는 거지?”
중년 여자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여주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차여주 씨. 괜찮습니까?”
태오가 계단을 뛰어올라와 여주를 부축했다.
“네. 대표님. 저, 저는 괜찮아요.”
여주가 그렇게 말했지만 태오가 보기에는 영 아니었다.
상대 중년 여자는 이산 가족 상봉이라도 한 것 같았다.
반면, 여주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나고 제대로 서 있지 못했다.
도지성의 폭력 앞에서도 꿋꿋하게 맞서던 때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여주야. 나를 너무 오랜만에 봐서 놀랐나 보네. 괜찮아. 그래도 한국 들어왔으면 찾아오지, 연락이라도 주지. 엄마 보고 싶지 않았어?”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그만 가시죠.”
태오는 여주의 허리로 손을 얹고 제대로 제 몸에 기대게 했다.
그다음 중년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는데, 여자는 어느새 그를 샅샅이 훑어 내리고 있었다.
“혹시…… 어디서 저하고 본 적 없으세요? 저 수상한 사람 아니고 좋은 일 하는 사람이거든요. 경기도 쪽에서 희망 고아원 운영하는 사람인데요. 마리아 원장이라고, 여기 제 명함이고요.”
중년 여자는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서 그에게 보여 줬다.
“희망 고아원이라고 했습니까.”
“어머. 희망 고아원을 알아요? 여주랑도 같이 계신 걸 보면 이거 정말이지 귀한 인연이네요.”
태오도 희망 고아원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 봉사도 따라 갔었다.
그때 찍었던 기념사진을 여주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 때의 얘기를 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지금은 상황이 그렇고, 차여주 씨 일로 찾고 싶거든 나중에 여기로 오시죠.”
그 역시 지갑을 꺼내 명함을 건네줬다.
진중한 목소리는 낮고 힘이 있어, 거역할 수가 없었다.
마리아 원장은 어떻게든 그와 대화를 이어 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쯤에서 물러가기로 한 듯했다.
“저기, 여주 그 아이 깨어나면 이것 좀 전해 주시겠어요? 제 번호거든요.”
“그렇게 하죠.”
그 사이 여주의 눈이 감기고, 몸이 그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그가 여주의 호흡을 먼저 확인하고 병원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일정의 변동이 있으므로 안 실장에게 연락도 해야만 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는 와중에도 중년 여자의 말은 끊이지 않았다.
“저 정말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그간 저 아이가 해외에 있어서 연락할 방도가 없었어요. 그런데 언제인지 몰라도 한국에 들어왔네요. 진즉 알았다면, 연락하고 지냈을 텐데.”
“병원부터 가야겠으니 비키시죠.”
태오는 쓰러진 여주를 안아 들고 마리아 원장을 지나쳐 걸어갔다.
한참을 두 사람이 빠져나간 대문을 멍하니 보던 마리아 원장이 박수를 쳤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나네. 분명히 예전 후원자 명단에 있었을 텐데.”
마리아 원장은 여주 옆에 있던 남자를 다시금 떠올렸다.
척 봐도 고급진 양복, 구두와 시계를 착용하고 있었다.
귀티 나 보이고 매우 잘생기고, 무심한 얼굴에 예의를 차리던 것까지.
“아까워 죽겠네. 여주 그 기지배가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얘기 좀 더 할 수 있었는데.”
마리아 원장의 얼굴에서 여주를 향한 원망이 숨겨지지 않았다.
그러다 전화를 받고는 급히 음식점으로 달려 올라갔다.
* * *
“시간 약속 개념이 이렇게 없어서야. 내가 앞으로 일을 믿고 맡길 수 있을까?”
마리아 원장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N유업 박 회장의 아내인 금 여사였다.
“아이고 사모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던 길에 차가 어찌나 막히던지요.”
마리아 원장은 그 자리에서 허리를 연신 굽혔다.
“퇴근 시간도 아니고 막히기는. 됐고 와서 앉아. 그래서 그 차화련이가 낳았다던 자식은? 미국에 얌전히 처박혀 있는 거지?”
“그게…… 저도 최근까지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글쎄, 저 몰래 한국에 들어왔던 모양이에요. 꼴에 남자까지 있더라니까요.”
마리아 원장은 방금 전, 차여주를 만났다는 것을 적당히 제가 알아낸 정보처럼 꾸며 냈다.
금 여사는 차여주가 그냥 미국에 남아 있길 바랐겠지만, 아까 보니까 한국에 들어온 지 꽤 된 듯했다.
옆에 남자까지 있었던 걸 보면…….
앞으로 알아내야 할 정보가 많았다.
그 말인즉슨, 마리아 원장이 금 여사한테 뜯어낼 수 있는 돈도 많다는 것이었다.
“흥. 지 엄마처럼 엉덩이가 가벼운 모양이지. 그보다 당신이 마리아 원장이랬지? 돈만 받아 챙기고 그 애한테는 관심을 전혀 안 뒀던 건 내가 잘 알겠어. 어떻게 한국에 온 것도 몰라?”
“아이고. 사모님. 저도 먹고 살기 바쁜데 언제 그렇게 입양 보낸 애들을 하나하나 신경 쓰나요. 저희 고아원 사정도 어렵고, 좀 봐주셔야지요.”
금 여사가 바짝 당겨 앉더니, 가까이 오라고 마리아 원장더러 손짓했다.
차여주에 대한 내용 중에서 궁금한 것은 딱 하나였다.
“그럼 결론부터 말해. 차화련이 낳은 애, 진짜 우리 회장님 딸 아니야?”
“……사모님도 참. 큰일 날 소리를 하세요. 어떻게 차화련 그 여자가 감히, 사모님 모르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
마리아 원장이 실실 웃으면서 말했지만, 금 여사는 눈을 더욱 치떴다.
박 회장의 핏줄이냐 아니냐에 따라 차여주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계획이 크게 달라졌다.
박 회장이 차여주의 존재를 알기 전에, 금 여사가 먼저 나서야만 했다.
“확실해? 만약에 나한테 거짓말했다가는 그놈의 희망 고아원인가 뭔가 망하게 할 수도 있어.”
“그러면요. 사모님. 만약 그랬다면, 차화련이 그렇게 조용히 죽었겠어요?”
“그럼 다음 질문. 나 말고 우리 회장님이랑도 따로 만나기로 했지?”
“……그, 글쎄요. 제가 나이가 먹어서 기억이 잘.”
금 여사는 핸드백에서 돈 봉투를 꺼내서 얹어 줬고, 마리아 원장은 헤벌쭉 웃었다.
“예. 사모님. 바로 회장님 쪽 사람이랑도 여기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이미 알고 오신 것 같은데 숨겨서 뭣 하겠어요.”
“내가 들을 수 있도록 옆방에서 만나. 더 얹어 줄 테니까.”
마리아 원장은 벌떡 일어나서 돈을 챙기고, 허리를 숙였다.
잠시 후, 옆방으로 옮겨 간 마리아 원장은 대추차를 시켰다.
곧 있으면 박 회장의 비서란 사람이 또 찾아올 것이다.
며칠 전, 박 회장과 금 여사 양쪽에서 연락을 받았었다.
그때 마리아 원장은 고아원 일로 후원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선뜻 후원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두 사람이 갑자기 미국에 입양 보냈던 차여주를 찾길래,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박 회장은 지 딸인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죽기 직전에 한번 만나 보고 싶댔지. 금 여사는 지 남편 딸인지도 모를 애를 먼저 없애 버리고 싶어 하지.’
부부가 서로 목적이 다른데, 돈 냄새가 풀풀 나는 건 똑같았다.
마리아 원장은 일단 둘 다 만나 보기로 했다.
어차피 사회적 위치, 남들의 이목을 고려해 직접 움직이시질 못하니 대신 차여주에게 접근해야 할 사람이 필요했다.
“하여간, 차화련이 살아 있을 때는 찾지도 않던 양반들이 왜 이제 와서 다 남의 과거를 못 캐서 안달이래? 돈이나 좀 잔뜩 줬으면 좋겠네.”
마리아 원장이 혼잣말을 마치고, 문이 열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그는 봉투 대신 홍삼 박스를 내려놓고 본론부터 꺼냈다.
“회장님께서는 그쪽이 차화련과 차여주에 대해 함구해야 한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 대가로 이 돈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함구요? 뭐 따로 원하는 건 없으시고요? 친자 확인은 하셨답니까?”
“그건 우리 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요. 그쪽은 입조심하고 사는 게 좋을 겁니다.”
로봇처럼 딱딱하게 말하는 비서에 마리아 원장은 저도 모르게 욕이 나왔지만, 홍삼 박스를 보고 애써 미소 지었다.
“예. 그럼요. 저야 뭐, 회장님 지시대로 따라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