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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팅 웨딩-35화 (35/60)

35화

뒷장으로 넘기자 임신 중 간단한 권고사항들이 보였다.

그건…… 여주에게도 낯설지 않는 내용이었다.

전생에서 그녀는 임신과 출산을 경험했었다.

그리고 어렵게 낳은 아이를 잃었다.

……도지성과 박하나의 배신으로 그녀가 모든 것을 잃어 갈 때쯤.

그녀의 아이는 사고를 당했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박하나 네가 임신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 이럴 때 쓰는 거지?

아이 아빠가 누군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보다는 박하나가 임신 사실을 숨기는 이유가 더 궁금했다.

앞으로의 일이 정말이지 예측이 되지 않았다.

“아까 음료 떨어트리셨던데, 제가 치워 드릴게요. 손님.”

“아……. 감사합니다.”

여주가 서류를 손에 쥔 채로 넋이 나간 사이, 알바생이 와서 친절하게 음료를 바꿔 줬다.

가방 두 개를 어정쩡하게 든 채, 여주는 종이를 제 가방에 넣었다.

박하나 성격에 이 종이를 괜히 가지고 나왔을 리 없었다.

제게 들키지 않으려 거짓말을 했지만, 결국 입덧을 했던 것이라.

나중을 위해서라도 서류는 제가 가져가기로 했다.

“차여주, 아직 안 갔어? 아직도 있었네?”

박하나는 방금 전보다 더 헬쓱한 얼굴로 돌아왔다.

여주까지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좀 괜찮니? 너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그냥 갈 수가 있었어야 말이지.”

“그럼 내가 안 괜찮을 이유가 없잖아? 아까 내가 냄새난다고 할 때부터 이 카페 딱 봐도 구린 곳 같아.”

“너 정말 힘들어 보여.”

여주가 타이르듯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박하나는 터져 버렸다.

“아씨 괜찮다니까! 이건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래. 나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이렇게 구역질하는 것도 알레르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차여주. 너 혹시 쓸데없는 생각이라도 했다가는.”

“그래. 그렇겠지. 알레르기 때문이라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겠어?”

여주는 박하나 입에서 먼저 임신이라는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것처럼, 지금 박하나는 평소보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진짜라니까? 야, 차여주. 내, 내가 설마 임신이라도 했을까 봐 그래?”

박하나가 말을 뱉고 나서야, 욕설을 뱉어 냈다.

여주는 못 들은 척, 제가 알고 있던 박하나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안다니까. 박하나 너 오이 알레르기도 있잖아.”

“너, 네가 그걸 대체 어떻게. 우리 엄마도 모르는 건데.”

정보랄 것도 없이 사소하기 짝이 없었지만.

적어도 이제부터라도 박하나가 여주를 두렵게 쳐다보게는 만들 수 있었다.

겨우 암 환자로나 알고 우습게 보던 눈빛에서 두려움이 깃든 걸 보았다.

그 순간 여주는 깨달았다.

이게 제가 보고 싶던 박하나의 얼굴이었다는 걸.

“그냥 누구한테 좀 들었어.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전생에서 바람 피웠던 도지성한테 들었던 그저 그런 말이었다.

뻔뻔하기 짝이 없던 그의 행동이라 기억했었는데, 이렇게 써먹게 되다니.

“너, 너 설마! 내 뒷조사 같은 거라도 했어? 내가 회장 딸이라고 아는 것부터 너 엄청 수상한 거 알아? 차여주 너 진짜 소름 끼친다.”

이제 박하나는 여주를 귀신 보듯이 쳐다보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건 참 이상한 광경이었다.

오히려 악독한 얼굴로 말을 함부로 내뱉는 건 박하나인데.

여주는 그저 편안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인데 말이다.

‘그래. 넌 이제부터라도 나를 좀 무서워해야 돼.’

여주는 살짝 미소 지으며 가방을 가져다줬다.

“박하나.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가방은 챙겨 가야지.”

“어? 어.”

박하나는 가방을 낚아채 가더니, 안을 뒤졌다.

“차여주. 혹시, 여기서 무슨 서류 못 봤어?”

“무슨 서류? 못 봤는데 중요한 거야?”

“아, 아냐. 못 봤으면 됐어. 차여주. 부탁인데, 나 여기서 본 거는 못 본 척해 줘. 그, 그러면 바빠서 나 먼저 갈게.”

박하나는 그대로 도망치듯 가 버렸다.

여주는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 현관 쪽으로 돌아갔다.

태오가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그녀는 서둘러 달려갔다.

“대표님.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잠깐 아는 사람을 만나서.”

“나도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요. 대표님께선 모르실 거예요. 황금배 출판사 쪽 인연이라서요. 참, 이거 아이스커피인데 시원하게 드세요.”

그가 설령 박하나를 알아봤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렇지만 박하나는 태오를 보지 못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도지성과는 이미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박하나만큼은 남태오의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막고 싶었다.

“시원하고 달달하네요.”

태오가 그녀가 건네준 음료를 맛있게 마셨다.

자연스럽게 여주도 제 음료를 마시면서 두 사람은 걸어갔다.

‘역시 맛있기만 한데, 아까 박하나는 입덧이 확실했던 거구나.’

카페에서 커피 냄새를 역하다고 하던 박하나였다.

여주는 오늘이 행운의 날처럼 느껴졌다.

검사 결과도 잘 나왔고, 박하나의 약점도 잡았으니까.

임신 진단서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 * *

차에 오르고 안전벨트를 매 주면서 태오가 말했다.

“얼핏 들으니까 박하나라고 부르던데.”

“귀도 밝으시네요. 대표님께서는.”

여주는 적당히 미소 지으며 대답을 했다.

“그 여자, 맞지 않나? 도지성하고 바람났다는.”

“기억력도 좋으시네요.”

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감탄했다.

기억하기로 전생의 남태오는 여자한테 관심이 전혀 없었다.

박하나를 기억하는 걸 보면 상당히 인상 깊었던 걸까?

“차여주 씨 일이니까. 그래서 기억하는 겁니다.”

태오의 대답에 여주는 또 볼이 발그랗게 물들었다.

마치 제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는 말해 줬다.

꼭 질투라도 하는 사람처럼 보였을까?

여주가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며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대표님. 정말 감사한데요. 제가 배고파서요. 아점 먹으러 안 가실래요?”

“아, 아점. 배고프면 빨리 나한테 왔어야지, 그런 여자를 상대하고 있었습니까.”

박하나를 상대하느라 그를 깜빡 잊고 있었다.

정말 중요한 정보를 얻었지만 서운해하는 태오를 보자 여주는 미안해져서 그가 무엇이 먹고 싶다고 하든 모두 대접하고 싶어졌다.

“그러게요. 정말 의외의 장소에서 간만에 마주쳤던지라. ……대표님, 뭐 드시고 싶으세요?”

“난 한식이 좋겠습니다.”

“그럼 제가 아는 곳으로 가시면 좋겠는데.”

마침 여주가 떠오른 곳이 있었다.

한정식 전문이었는데 전생에서도 유명했던 곳이라 잡지에서 본 적이 있었다.

한번 가 보고 싶었지만, 가 볼 기회가 없었던 터라 오늘이 기회 같았다.

“그럼 주소 찍어 봐요. 차여주 씨가 뭘 먹고 싶다니까 기분이 좋네.”

태오가 네비게이션을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신세는 오늘도 제가 대표님께 졌으니까, 제가 사 드릴게요. 지난번에 얻어먹은 것도 있고요. 먼저 계산하시면 안 돼요?”

여주가 기억을 더듬으며 주소를 쳤다.

다행히 한정식집이 전생과 같은 장소에 있었다.

변한 것이 없어 좋은 일도 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진 여주가 활달하게 말했다.

“아. 이번에도 내가 계산하려고 했는데, 차여주 씨. 눈치 빠르네요?”

태오가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잡더니 웃으며 말했다.

“제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최근에 인세도 들어왔으니까 정말 비싼 거 드셔도 돼요. 대표님.”

“좋아요. 그럼 비싼 걸로 먹으러 가 봅시다.”

“네. 대표님.”

여주는 얼마 전 통장 정리를 했다.

도지성과 사이가 정리되고 남태오 대표가 나서 준 덕분에, 황금배 출판사의 도지철 사장은 추후 문제 될 요인들을 모조리 손수 나서서 처리해 줬다.

만약 결혼까지 갔다면, 여주의 통장은 자연스럽게 도지성이 관리를 했겠지만 이제는 다른 은행에서 계좌를 만들었기 때문에 온전히 그녀의 인세를 받을 수 있었다.

전생에서처럼 큰돈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그녀가 혼자 살면서 월세를 충당하고 글 쓰면서 생활비로는 충분히 쓸 수 있었다.

뭣보다 그녀가 죽었다 살아났음에도, 글 쓰는 재능은 그대로였다.

그렇기에 여주는 자신이 있었다.

전생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써낸 글들은 인기를 얻을 것이고 곤 작가라는 브랜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전생에서처럼 먹칠을 당하지도 않을 거고, 추락하지도 않겠지.

만약 그녀가 언젠가 사라진다 해도, ‘곤’이라는 브랜드는 지켜 낼 것이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들을 보던 여주가 두 눈을 감았다.

“밤새 잠 못 잤을 텐데, 잠깐 눈 붙이도록 해요.”

“…….”

신호가 걸린 사이, 태오가 슬쩍 여주 쪽을 보다 웃었다.

이미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아이처럼 잠들어 있었다.

평소에 긴장하느라 늘 실핏줄이 약간 곤두서 있던 그녀는 지금 편안해 보였다.

그는 한 손을 뻗어 이마에 흘러내려 간지럽히는 짧은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줬다.

화장기가 옅어 말간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그녀를 어려 보이게 했다.

‘실제로 어린 나이긴 하지.’

차여주의 나이는 올해 스무 살이었다.

그녀가 하도 그 나이답지 않게 대범하고 무던하게 행동했기에, 잊고 있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나이.

대학에 다니면서, 저 또한 제가 이미 성인이 된 줄 착각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 스물보다는 서른에 가까운 제 나이에서 보니, 한없이 어려 보였다.

아직은 사회에서 홀로서기에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할 나이였다.

고아였다던 여주에게는 아무런 보호막도 없었으니, 오히려 그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이 부담스럽거나 어색할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여주는 처음처럼 그를 경계하지는 않았다.

남태오는 그래서 여주가 더 안쓰러웠고, 더 아껴 주고 싶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얼굴이 낯설지가 않았어.’

볼을 쓰다듬어 보던 그가, 신호가 바뀌자 손을 뗐다.

그는 한정식집에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속도를 늦추었다.

여주가 조금이라도 더 단잠을 잘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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