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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팅 웨딩-34화 (34/60)

34화

“네? 대표님께서도 바쁘실 텐데,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혼자 가도 괜찮다느니, 거절은 사절입니다.”

“그러면……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대표님.”

“그래요. 잘 자요. 차여주 씨.”

여주가 예의상이라도 거절하려고 했지만, 아예 원천 봉쇄해 버린 태오가 그대로 인사를 하고 2층의 방으로 들어갔다.

돌아서서 1층의 방문으로 걸어가는 여주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침대로 가서 앉는데, 훈훈한 기분이 감돌았다.

혼자 가도 정말 괜찮겠다고 생각했었다.

누구랑 같이 병원에 가서 결과를 받는다는 건 아예 고려조차 못했는데.

선뜻 먼저 같이 가 주겠다는 태오의 마음에 그녀는 든든해졌다.

“시간 참 빠르다…….”

벌써 3주가 지난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내일이면 드디어 브라카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온다니.

내일 검사 결과에 따라서 태오에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이 달라진다.

여주는 두 손을 모아 이마에 갖다 댔다.

다시 얻은 생, 처음으로 하는 기도였다.

나의 복수를 위해서도.

남태오 대표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도.

검사 결과가 좋게 나오길 바랐다.

그래야만 다시 살게 된 이 목숨에 의미가 있으니까.

“제발…… 한 번만 더 도와주세요.”

여주는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신들에게 돌아가며 빌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잠드는 순간까지도 중얼거렸다.

* * *

다음 날, 여주는 태오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내 손 잡아요. 한결 나을 겁니다.”

“저, 손에 땀이 많이 나서요. 대표님 불편하실 텐데.”

태오가 그녀더러 잡으라고 내밀었지만, 여주는 오히려 손을 뒤로 뺐다.

표정은 멀쩡했지만, 긴장한 것이 여력했는지 두 손이 축축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남태오는 속이 참 깊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를 남자라고 인식하고 나선, 접촉이 조심스러웠다.

날도 더운데, 이런 손하고 닿으면 얼마나 불쾌할까.

좋은 모습만 보여 줘도 모자랄 판에…….

여주는 속으로 아주 조금 후회를 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냥 오늘 혼자 올 걸 그랬어. 결과가 안 좋기라도 하면, 남태오 대표 얼굴을 어떻게 본담.’

만약 결과가 안 좋다고 하면 그녀야 어떻게든 마음을 추스릴 수 있겠지.

하지만, 저 남자한테는 정말 폐를 많이 끼치지 않았던가.

정말 그녀에게 희망이 없다고 한다면, 그 절망적인 느낌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데 태오가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래요. 나도 차여주 씨가 한 번에 잡을 거라고 생각 안했어.”

빼낼 사이도 없이, 커다란 손이 힘주어 꽉 잡았다.

여주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러자 태오의 구두코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에 비해 발도 참 큰 남자가 손조차 컸다.

맞닿은 감촉은 시원했고 안정감이 있었다.

“어때요. 내 손, 불편합니까?”

“……불편하지 않습니다.”

한번 잡으니까, 계속 잡고 싶어지는 느낌이었다.

여주는 자신도 모르게 이 손을 놓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불편하지 않은 정도면 그만 잡아도 되는데.”

“사실, 시원하고 좋아요. 대표님.”

태오의 말에 여주는 그가 금방이라도 뺄까 봐, 얼른 힘줘서 잡았다.

그러자 남태오가 크게 웃었다.

놀림당한 것을 알고 나서는 여주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차여주 환자분. 들어오세요.”

덕분에 이름이 불려서 들어갈 때까지 그녀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문을 열고 태오가 여주와 함께 들어갔다.

태오를 보고 명의 원장은 놀란 얼굴을 했다.

“차여주 환자분. 오오. 이번에는 남 대표님이랑 같이 왔네요. 잘 왔어요. 이렇게 보니 남 대표랑 잘 어울리네.”

“감사합니다. 원장님.”

태오가 넉살 놓게 대꾸하는 동안, 여주는 인사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지난번 혼자 왔을 때와 달리 보호자로 태오가 있기 때문일까.

신경을 덜 곤두세우면서 자리에 앉게 됐다.

“자, 브라카 유전자 검사 결과가 아주 잘 나왔어요. 다행히 유전 인자가 없는 걸로 나왔으니 아주 잘된 일이죠.”

명의 원장은 남 회장을 통해 태오와 안면도 있으니 지난번보다 더 유들유들했다.

그에게도 여주는 심상치 않았던 환자였던지라, 결과를 듣고 나서 반응이 궁금했었다.

“…….”

“차여주 환자분? 이제 마음 편히 먹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못하고 있었다.

안심하라는 듯 웃어 주는 명의 원장의 얼굴을 한 번 보다가, 태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귀가 웅웅댔다.

“차여주 씨. 괜찮아요. 숨, 천천히.”

태오는 여주의 몸이 많이 놀랐음을 알아차리고, 손으로 등을 다독여 줬다.

한 손으로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준 채였다.

그가 괜찮다고 몇 번 더 말을 해 주며 다정하게 대하는 걸 명의 원장은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요. 급할 거 없으니, 차여주 환자분 천천히 해요. 천천히.”

남 회장에게 전해 들었던 손자의 모습과 지금 눈앞에 있는 남태오 대표의 모습은 천지 차이였지만, 보기만 해도 참 흐뭇한 연인이었다.

“……저, 그럼 이제 수술만 하면 정말로 괜찮아지나요?”

잠시 후, 괜찮아진 여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아직은 수술이 안 끝났으니까 정말 괜찮은 게 아니었다.

수술이 끝나야만 정말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차여주 환자분의 종양 크기가 작아요. 림프절 전이도 안 될 것 같은데, 혹시 지금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 항암 치료, 맞나요?”

“……네. 선생님. 수술보다 그 치료가 더 힘들다고 들었어서요.”

전생에서 유방암 말기였을 때는, 항암 치료도 소용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에 비하면 희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역시 염려가 되는 부분이었다.

“맞습니다. 많은 분들이 수술 그 자체보다 항암 치료를 더 어려워하죠. 1기인 환자분 앞에서 이런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꽤 운이 좋아요. 치료를 생략하는 쪽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어 명의 원장은 수술 날짜를 2주 당기는 것으로 일정을 변경해 줬다.

태오에게 미리 언질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주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2주 동안 더 악화되진 않겠지만, 수술 당일 날까지도 환자분들이 힘들어하십니다. 그래도 차여주 환자분, 그동안 너무 걱정 말고 마음 편히 먹으세요. 수술 별 탈 없이 잘 될 겁니다.”

“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신 덕분에 저, 믿음이 가요.”

“차여주 환자분. 우리 수술 잘 끝나면, 남태오 대표랑 병원 밖에서 또 보자고요.”

명의 원장은 다음 약속을 기약했고, 여주는 돌아서서 나왔다.

“현관에서 기다려요. 차 가지고 올 테니까.”

태오는 여주를 1층까지 잘 부축해 주고,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여주는 무심결에 그의 손이 닿았던 어깨를 쓰다듬어 봤다.

아까 그가 잡아 준 손도 그랬지만, 유독 그의 손이 닿았던 곳이 화끈거렸다.

그 느낌을 되새기면서 머릿속이 차차 맑아졌다.

‘어제의 기도가 통한 걸까.’

여주는 두 손을 꼭 모아 잡았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다행이려니, 긴 한숨을 돌리는데.

“어? 차여주. 네가 여기 왜 있어?”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이 뒤에 서 있었다.

“박하나……. 나는 검사 받으러 왔는데.”

“아 맞다. 너 암이랬지? 진짜였나 보네. 이렇게 병원에서 보니까 실감이 나네.”

웃으며 하는 말이 신경을 득득 긁었다.

아니, 긁으려고 하는 말이라 더 거슬리는 것이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병원에는 어쩐 일이야?”

여주는 박하나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리 봐도 박하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가 병원이었다.

걸어온 방향을 보니 이미 왔다가 가는 길처럼 보였다.

“병원에 어쩐 일이기는. 그냥 볼일이 좀 있어서 왔어.”

“그래? 너 얼굴이 평소보다 안 좋아 보이는데, 별일 없지?”

“차여주, 너 꼭 그 말. 내가 별일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들린다?”

인사치레로 건네는 말에도 박하나는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그러고 보니 눈가가 좀 붉고, 아이라인이 번져 있었다.

“잠깐 근처 카페라도 갈래? 잠깐 앉아 있다가 가는 게 좋아 보여서 그래.”

“……그래. 생각해 보니까 날씨 때문에 내 상태가 이래.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뭐 이렇게 미쳐 날뛰는지 모르겠어. 내가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아. 네가 좀 이해해 줘.”

“그래. 이해하지.”

여주의 직감이 박하나를 이대로 돌려보내면 안 된다고 말했다.

태오 몫까지 테이크 아웃용으로 커피를 주문할 때였다.

“차여주 너, 병원에 혼자 온 게 아니었나 봐?”

“아……. 그렇게 됐어. 넌 혼자 왔어?”

“어. 뭐 좋은 곳이라고…… 아, 근데 여기 왜 이렇게 냄새가 역해?”

박하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응? 무슨 냄새?”

“여기 카페 말이야. 역한 내가 진동하는데, 넌 모르겠어?”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박하나는 아예 코를 막고 있었다.

냄새라고 해 봐야 카페니까 원두 향밖에 나지 않았다.

여주에게는 그저 기분 좋은 냄새였지만, 박하나는 혼자 심각한 얼굴이었다.

“자, 여기. 네 건 딸기 바나나 주스 맞지?”

“어. 고마워. 잘 마실게. 맛이 이게…… 우우우욱!”

음료를 건네주고 받아 마시던 박하나가 그 자리에서 구역질을 했다.

여주의 눈에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나, 나 잠깐, 잠깐만…… 우에에에엑!”

박하나는 그대로 입을 틀어막더니 화장실을 찾아 달려갔다.

가방과 음료는 바닥에 내팽개쳐 놓고 정신없이 사라졌다.

음료를 멀쩡히 테이블에 올려놓고, 가방을 챙기는데 종이가 툭 떨어졌다.

<임신 확인서>

종이에는 박하나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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