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태오가 하는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저 남자와 직접적으로 알고 지낸 시간은 길다 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처한 상황만큼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나 말고 다른 대안 찾기 쉽지 않을 텐데요.”
그가 입가를 끌어 올리며 쐐기를 박았다.
전부 맞는 말이었지만, 여주는 망설여졌다.
만약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태오와 이 이상 얽히게 된다면…….
과연, 그게 잘하는 일인 걸까?
“저는 그렇다고 해도, 대표님이라면, 저 말고도 다른 사람 찾으실 수 있으실 텐데요.”
얼마든지 그의 입맛대로 움직여 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난 차여주 씨가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태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언했다.
“……주변에라도 좋으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는데 더 고려해 보심이 어떠세요?”
“내가 고려, 안 해 봤겠습니까? 그리고 나 좋다는 여자들, 나는 별로라서.”
저 잘난 남자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 맞는 거겠지?
여주는 콕 집어 자신이 마음에 든다는 말에 의문을 품었다.
‘그럼 다른 여자들보다는 내가 별로가 아니라는 뜻인가?’
여주가 태오가 한 말을 곰곰이 유추해 볼 때였다.
“차여주 씨, 중요하게 참고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만약, 내 제안을 받아들일 시 함께 인사드려야 할 분이 계신데, 그분이 보통 성격이 아니신지라.”
“어떤…… 분이시길래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그건 내 제안을 확실하게 받아들이면 말해 주겠습니다.”
여주는 그 보통 성격이 아니신 분이 남 회장인 걸 알았지만, 일단 모른 척했다.
전생에서도 GK기업 남 회장과는 만나 본 적이 없었다.
현생에서 새롭게 맺게 될지도 모를 신기한 인연이었다.
그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어떤 성격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대표님 말씀은 저 정도면 그분을 버텨 낼 수 있다, 그런 말씀이신가요?”
“그래요. 차여주 씨, 호락호락하지 않은 성격이라 마음에 들었거든.”
남태오가 그렇게 말해도 여주는 영 믿기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남 회장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소한의 정보를 잘 기억해 두기로 하면서 여주가 천천히 말했다.
“저…… 대표님. 제가 지금 수술 날짜도 잡혀 있는 몸인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내가 개인적으로 명 원장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아마 수술 날짜, 좀 더 당겨질 겁니다.”
“……벌써 거기까지 신경을 써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대표님.”
여주는 수술 날짜가 당겨진다는 말에 거듭 고개를 숙였다.
수술만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그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더는 없었다.
어찌 됐든 남태오가 먼저 그녀가 필요하다고 하는 상황이고 자신은 늘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던 입장이었으니까.
“또 마음에 걸리는 거 있습니까?”
“……제가 답을 언제까지 드리면 될까요?”
“빠를수록 좋은데 하루면 시간 충분하겠습니까?”
“네. 최대한 빨리 답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 * *
식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함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올 때처럼, 안 실장을 부르지 않고 태오가 직접 운전했다.
단둘만 있는 것이 대화하기도 편했고, 태오도 그게 나았다.
태오는 말없이 운전에 집중했다.
적막 속에서 여주는 아까의 대화를 다시 생각하는 중이었다.
‘나, 남자로 어떻습니까.’
태오와 만난 이래,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도는 건 그 말뿐이었다.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을 것 같았다.
어느새 차는 멈춰서 시동이 꺼져 있었다.
“차여주 씨, 그거…… 안전벨트…….”
옆에서 태오가 뭐라고 했지만, 여주는 듣지 못했다.
여주는 여전히 앞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창백하게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볼 위로 옅은 홍조가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 얼굴을 태오는 저도 모르게 바라봤다.
“다 도착했는데.”
태오는 제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불빛이 번진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더 창백해 보였다.
뭔가를 깊이 생각할 때면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다.
차여주는 자기가 그렇다는 걸 알고 있을까?
“차여주 씨.”
한 번 더 이름을 불러 봤지만, 그녀는 듣지 못했다.
‘가만히 놔두면 밤새 저러고 있겠군.’
눈 뜨고 기절한 사람처럼 차여주는 미동도 없었다.
태오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손을 뻗어서 여주의 눈 앞으로 흔들었다.
“내 얘기가 많이 혼란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어, 어어.”
여주는 코앞에서 맡아지는 낯선 체취에 먼저 놀랐다.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가까워졌다.
보니까 태오의 몸이 제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빳빳하게 굳은 사이, 그의 손이 그녀의 안전벨트를 풀어 주고 있었다.
“집에 안 갑니까?”
“아, 전 괜찮습니다. 대표님.”
“전혀 안 괜찮아 보여서 안 물어봤는데.”
“네? 아, 네. 집이요? 그렇죠. 집은 가야 하는데…… 근데 여긴 집은 아닌데.”
“여기가 집이 아니면 뭘까 궁금하네.”
“어…… 엄연히 따지면 여긴 제 집은 아니죠. 대표님 집은 맞지만요. 당분간 머물라고 해 주신 것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지만요. ……네.”
“나 참. 차여주 씨, 생각보다 더 재밌는 사람이네요.”
열이 오른 사람처럼 헛소리를 하고 말까지 더듬는 차여주라니.
태오는 자신이 식사 후 했던 얘기가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기억을 더듬었다.
‘어디까지나 계약에 대한 얘기였는데.’
서로가 원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었다.
솔직히 자신이 차여주라면, 눈 딱 감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텐데.
어느 한쪽도 손해 보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 제가 방금 헛소리를 했나 봐요. 내가 정말 왜 이러지…….”
그가 웃으며 고개를 내젓자, 그녀의 어깨가 또 움찔했다.
“차여주 씨. 난 제안을 했을 뿐입니다.”
“…….”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당신 자유지. 부담 가질 것 없습니다.”
뭐, 어쨌든 그녀에게는 꽤나 충격이었다는 건 잘 알겠다.
그도 차여주가 덥썩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다.
‘그냥 다른 사람을 구해 봐야 하는 건가?’
정 안 되면 그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현재로선 차여주가 최선이었지만, 차선책도 염두에 둬야 했다.
그의 최선이라고 해서, 그녀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거니까.
여전히 여주는 별말이 없었다.
태오로서도 아쉽기는 했지만.
‘뭐, 어쩔 수 없나.’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조금은 씁쓸한 기분을 애써 넘기면서, 그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내 집으로 갑시다.”
그는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여주 쪽의 차문을 열어 줬다.
그녀가 내렸고 그는 먼저 뒤돌아서 앞서 걸어갔다.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내가 기대를 했군. 그것도 꽤나.’
그는 저도 모르게 걷는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차여주의 반응을 보니,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미 그녀의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대를 했다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니.
내가 타인에게 기대를 했다고?
내가 저 여자한테 그만큼이나 간절했다는 건가?
이건 남태오답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엄연히 따지면 여긴 제 집은 아니죠. 대표님 집은 맞지만요.’
아까 여주가 한 말은 그녀 스스로 헛소리 같다고 했지만, 헛소리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가 임시로 머물라고 하는 곳이 그녀에게 집이 될 수는 없겠지.
말에 뼈가 있는 것처럼 들렸다.
엘리베이터에 두 사람이 오르고 문이 천천히 닫혔다.
꼭대기 층에 멈춰서고 나서야, 태오가 말했다.
“내 제안과 상관없이, 집 구할 때까지 더 머물러도 됩니다.”
“……네. 대표님.”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으니까. 그럼.”
남태오는 제 실망한 상태를 여주에게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서둘러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밟아 올라갈 때였다.
“저, 대표님!”
여주가 첫 번째 계단에 발을 올리고, 난간을 잡았다.
“뭡니까.”
남태오는 드디어 거절의 말인가, 싶어서 멈춰 섰다.
대신 그녀 쪽으로 돌아서지 않고 비스듬히 섰다.
지금 제 얼굴에 묻어나는 기분을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제가 대표님께 이 말씀을 드리지 않으면, 오늘 잠을 제대로 못 잘 것 같아서요.”
“그래요. 뭡니까.”
“……저, 사실 내일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나와요. 결과가 나와야 저도 마음 편히, 대표님께 확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것 때문에 제가 조금 망설였는데…… 혹 마음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고 싶어요.”
당연히 거절의 말일 줄 알았는데.
그런데, 아니었다.
내일 검사 결과가 나온다는 여주에게, 태오는 순간 뒷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래. 수술 날짜는 당겼지만, 검사 결과가 우선이겠지.
일에는 앞뒤 순서가 있는 것인데, 제가 너무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내가 오해를 좀 했군.’
차여주 그녀도 나름대로 고민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이 방금 전보다 훤해졌다.
“그럼…… 결과가 잘 나오면, 내 제안 긍정적으로 고려해 볼 생각 있다는 겁니까?”
“네. 물론이죠. 그럴 생각, 아주 많습니다.”
“간만에 시원시원해서 마음에 드네요.”
남태오는 차여주의 대답을 듣고 피식, 웃어 버렸다.
방금 전까지 기분이 좀 가라앉았던 것이 무색하게, 다시 또 기분이 좋아졌다.
저 여자의 대답 하나에 이렇게까지 오락가락할 일인가?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미 그는 차여주를 좋아하고 있었다.
태오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다정하게 말했다.
“그럼 내일, 나랑 병원 같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