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남자로 어떻냐고?
나, 남자로?
그가 그 말을 하는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여주의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댕댕댕.
그 울림이 혈관을 타고 쭉 내려와 가슴까지 도달했다.
‘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심장이 미칠 듯이 뛰어 대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바짝 차려 보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그녀는 여지껏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
‘남태오 저 남자를 쳐다보질 못하겠어.’
어느새 태오는 손으로 턱을 괴고 비스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똑바로 보는 얼굴보다 그게 더 치명적이었다.
“차여주 씨. 어려운 질문입니까?”
평소의 서늘하던 눈매가 웃음기를 머금어서인지, 오늘따라 더 치명적이었다.
여주는 그 눈을 평소처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시선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고 남자의 콧대를 보다가 그 날카로움에 새삼 놀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과 턱선 라인까지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입술 선이 아까보다 더 올라간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재정립…… 흐흠. 재정립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건지, 저는 그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대표님.”
“지금부터 얘기할 건데, 왜 내 눈을 피합니까?”
“……피하긴요. 아닌데요.”
사실 여주도 제가 하는 말이 틀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닌 걸 말이다.
그야말로 눈 따로, 입 따로 놀고 있는 기분이었다.
남태오 앞에서 낯 팔린 적은 정말 많았지만, 지금은 정말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전부터 느낀 겁니다만. 거짓말 진짜 못하네. 차여주 씨.”
그가 또 웃으면서 말하는데, 여주는 순간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금 저 남자가 나를 놀리는 거 맞지?
왜 사람을 놀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게 더 어색할 것 같았다.
남태오 저 남자의 기분도 평소보다 더 좋아 보였다.
그리고 그런 남자의 얼굴을 보는 것이 그녀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아닌데요. 저 그렇게 보시는 거 대표님밖에 없는데.”
여주는 겨우 그 말만 할 수 있었다.
그러자 남태오가 이번에는 아예 소리 내서 웃었다.
그녀는 화끈거리는 볼에 손바닥을 올리면서 얼른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제 볼이 다 타들어 버릴 것 같았다.
“저, 대표님. 식사는 다 하셨어요?”
“네. 차여주 씨는요?”
“네. 저도 배부를 만큼 많이 먹었어요.”
“흠. 정말?”
태오가 그녀의 그릇을 건너다보면서 물었다.
사실 내색은 안 했지만, 그는 차여주를 볼 때마다 신경 쓰였다.
어떤 옷을 입어도 그녀의 가녀린 팔다리는 가려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마를 수가 있는 거지?
미모 유지를 위해 다이어트에 사활을 건 동생 태희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더 먹어야 될 것 같은데, 정말 괜찮습니까?”
태오의 눈길에 장난기가 묻어 있다는 걸 여주는 알아차렸다.
저 남자가 원래 저렇게 사람을 잘 놀리고 그랬던가?
오늘따라 그에게서 몰랐던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정말이죠 그럼.”
여주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을 마셨다.
이 물을 다 마시고 나면 긴장감이 좀 가시지 않을까.
“그럼, 이제부터 설명하도록 하죠.”
대놓고 화제 전환에 기뻐하는 여주의 얼굴에, 태오는 순간 또 웃을 뻔했다.
방금 전까지 얼굴 색이 자꾸 바뀌는 게 귀여워 보였는데.
좀 더 지켜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면, 또 얼마나 저 여자가 부끄러워할지.
궁금한 마음을 잠시 넣어 두고, 그는 본론을 풀기로 했다.
“차여주 씨만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상황이 아니라면, 좀 낫겠습니까?”
그는 말을 꺼내고, 어쩐지 열이 올라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사실 아까 들어오고 나서부터 이 방이 더워졌다.
여주가 오히려 겉옷을 꺼내 입은 걸 봐서는, 에어컨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태오만 더워하는 중이었다.
차여주 저 여자랑 단둘이 있을 때면, 유독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실례지만 대표님. 지금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전혀 모르겠어요. 막다른 골목이라니요?”
여주는 남태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태오 저 남자도 그녀와 비슷한 상황이란 뜻인가?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차여주 씨, 난 약혼녀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약혼녀가……. 아, 그분은 동생분이시랬죠. 네.”
순간, 여주는 남태오의 동생인 태희를 떠올렸다.
연애하는 남자 친구가 있었던 태희와 달리, 태오는 약혼 얘기를 하는 걸로 봐서는 남매라고 해도 약간 사정이 다른 듯했다.
“하지만 나한테는 약혼녀가 없습니다.”
“……네? 그럼, 방금 하신 건 무슨 말씀이세요?”
여주는 5초 동안, 멍을 때렸다.
잠깐 생각을 좀 해 보기로 하자.
과거에 남태오는 약혼녀가 따로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 여주가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어차피 그와 비슷한 부류였을 테지.
집안끼리 정략결혼이라고만 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없나 보네?
여주가 당황한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근데 그 얘기를 왜 나한테 하는 거지?’
태오가 저 얘기를 제게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바라시는 건 결혼 내지는 약혼인데, 약혼까지만 해도 됩니다. 2주 내로 그분 앞에 데려가야 하는데, 나한테 시간이 없습니다.”
짐작해 보건데, 그분이란 당연히 GK기업의 남 회장일 것이다.
태오에게 저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사람이란 남 회장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주 입장에서는 단번에 ‘아, 그렇군요.’ 하고 넘길 수는 없는 이야기였다.
“네. 대표님 사정이 그러시다는 건 잘 알겠지만요.”
“차여주 씨. 그러니까 역할 대행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계약 연애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혹시 그 대행이나 연애 상대가 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죠?”
“맞습니다. 이해를 잘 했네요.”
순간 여주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건 좀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정말이지, 이게 무슨 드라마 같은 이야기일까?
여주는 듣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계약 연애니, 역할 대행이니 그런 이야기 자체는 낯설지 않았다.
왜냐하면 황금그룹의 브랜드 중 황금배 출판사 말고도, 로맨스 소설 브랜드도 있었으니까.
가끔 출판사 소식이 들려오면 인기작들의 소재가 그렇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 속에서나 얘기였지.
이게 내 현실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여주였다.
“아니, 대표님. 저 이해를 잘 못 했어요. 방금 하신 말씀,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이미 다 들었는데, 무르기는 없습니다.”
“그,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난 지금 차여주 씨한테 도움을 구하는 중입니다.”
“저, 제가요? 하지만 제가 대표님을 어떻게 도와 드릴 수 있을지…….”
여주는 여전히 그의 제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 주면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도무지…….”
“그러니까 차여주 씨도 복수에 나를 이용하라고, 그 말 하는 겁니다.”
계약 연애 이야기에 이어서 복수까지…….
남태오가 그리는 큰 그림이 어디까지인지 여주는 궁금해졌다.
정말 그녀로서는 감사한 제안이었지만 그러려면 그녀 역시 태오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어떻게 나더러 당신을 이용하라는 말을 할 수 있지?’
여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그냥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면.
전생에 갚지 못했던 은혜까지 무조건 이번 생에 갚겠다 다짐을 했었다.
그러니까 발 벗고 나섰을 테지만, 문제는 그 도움이 그녀가 예상했던 스케일에서 크게 벗어난다는 것에 있었다.
“정말 엄청난 말씀만 하시네요. 복수라니.”
테이블 아래에서 그녀의 손이 꽉 쥐어졌다.
여태껏 복수는 그녀 혼자만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저 남자가 여주 혼자 짜고 있던 판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녀만의 속사정이었던 것까지 알게 됐을 때도 일이 좀 묘하게 흘러간다 싶었다.
이제는 아예 그 판에 함께하고 싶다는 말까지 할 줄이야.
“바람피운 도지성 편집장, 그리고 곤 작가 대행하려던 그 박하나까지. 그 둘한테 보란 듯이 차여주 씨 잘사는 걸 보여 주고 싶지 않습니까?”
내가 잘 사는 걸 그들에게 보여 준다고?
그게 복수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여주는 사실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들이 망가지길 바랐고, 자신만큼 아파 보길 바랐다.
그들은 전생에 불륜을 저지르고, 그녀의 아이, 그녀의 글까지 뺏어 갔으니까.
만약 제가 이제라도 행복해지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그들이 망하는 걸 모두 지켜보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녀 스스로 주체가 된 행복이란, 그녀에게 여지껏 없던 개념이었다.
“대표님께서는 그게 정말 복수가 된다고 생각하세요?”
“최고의 복수는 성공이라는 말, 알고 있습니까?”
“……저도 대표님처럼 생각하던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사람이요. 복수를 하지 않고서는 성공하겠다는 의지조차 생기지 않더라고요. 일에도 순서가 있는 거잖아요. 대표님.”
“차여주 씨 생각이 그렇다면, 나는 존중합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가 곁에 있는 것이 좋을 텐데.”
“실례지만 대표님께서 너무 밑지는 제안처럼 여겨져서, 제 입장에서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제 양심이 조금…….”
“배려는 강자가 약자한테 하는 겁니다. 차여주 씨.”
그렇구나.
강자는 남태오 대표, 나는 약자니까.
하지만 내가 그래도 될까?
당신을 감히 내가 이용해도 될까?
“보아하니 도지성 그 인간, 쉽게 안 떨어져 나갈 거고.”
“…….”
“박하나 역시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하고.”
“…….”
“차여주 씨 당신 편이라고 할 만한 사람, 나 말고 또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