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 상관없습니다. 제 약혼이든, 결혼이든. 회장님 뜻에 한 번은 따라야겠다는 생각, 늘 했었으니까요.”
“……입 달렸다고 말은 잘하는구나. 여태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시키는 대로 말만 잘 듣는 멍청한 놈은 필요 없으시다면서요.”
두 사람은 또 한 차례 주거니 받거니를 계속했다.
“그래 이놈아. 누가 키웠는지 아주 제대로 잘 컸다!”
“회장님 칭찬 감사히 듣겠습니다.”
결국, 태오의 진심 앞에 남 회장이 한 발짝 물러나기로 했다.
“2주 안에 데려와. 안 데려오면 내가 점찍은 처자랑 약혼식해야 돼!”
“……알겠습니다.”
남 회장은 늑대의 탈을 뒤집어쓰고 여우처럼 굴 줄 아는 손자에게 또 넘어갈까 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 지켜라. 늦으면, 바로 네 부모 몫이었던 주식 지분까지 다 네 친척들한테 넘길 줄 알아.”
“물론입니다. 회장님.”
남 회장은 후다닥 자리를 떴고, 태오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시간은 벌었으니, 이제 여주를 설득시킬 일만 남았다.
그의 제안을 여주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내심 기대가 됐다.
* * *
도지성은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다.
“시발. 도지철 말대로 울고불고 매달리는 것도, 눈앞에 차여주가 있어야 해 보든가 말든가 할 거 아냐.”
자존심을 버리고 도지철의 말대로 한번 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차여주 집 앞까지 여러 번 찾아갔지만 차여주가 없었다.
일부러 시간대를 바꿔서 낮과 밤으로 가 봤어도 말이다.
마치 사람이 안 사는 집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차여주의 부재가 이렇게까지 컸던가?
곤 작가는 이미 휴재를 하겠다고 출판사 측에서 공지를 띄웠다.
도지철 사장이 총대를 메고 진행시킨 일이라, 그는 권한이 없었다.
이제 출판사에서도 도지성이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어차피 차여주를 전담 케어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매일 그녀의 원고를 편집하고 매일 작업 분량을 체크했었다.
그 외의 일은 사소한 것에 불과했고, 그가 아니어도 처리할 수 있었다.
형인 도지철 사장의 눈 밖에 났다는 말이 이미 사내에 퍼졌기 때문일까?
출판사 직원들 역시 그를 쳐다보는 눈빛이 예전과 달랐다.
그렇다고 다른 작가를 도맡아서 편집자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시발, 차여주 젠장.”
차여주가 없으니까, 그의 일상이 텅 비어 있었다.
“이거 진짜 도망을 갔네?”
출판사 측에서 계약해 준 집이라 마스터키로 따고 집에 들어갔다.
혹시나 싶어 방문과 화장실, 다용실까지 전부 열어 보고 다녔다.
온 집안을 휘젓고 다녔지만, 그를 맞이하는 건 고요한 적막뿐이었다.
어디에도 그 여자는 없었다.
굽은 어깨와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걸친 채, 창백한 얼굴로 노트북만 두드려 대던.
글밖에 모르던 그 바보같은 여자 말이다.
“대체 어딜 간 건지 알아야 쫓아가 보든가 할 거 아니냐고.”
도지성은 도통 차여주가 어디 갔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위치 추적 어플은 어떻게 알았는지, 아예 핸드폰까지 두고 나가 버렸다.
“지가 쓰는 글처럼 독하기 짝이 없어. 젠장, 젠장!”
초조함에 집안의 가구들을 때려 부순 것이 벌써 며칠이었다.
그의 화풀이를 받아 주는 건 말 못하는 물건들뿐이었다.
“여, 여보세요! 여주야, 여주야.”
그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차여주의 전화일 거라고 착각했다.
저도 모르게 반갑게 손이 나가서 받아 버렸다.
- 어머. 차여주인 줄 알았나 봐. 그렇죠, 자기?
그러나 차여주가 아니라 박하나였다.
그는 대놓고 욕설을 뱉으며 종료 버튼에 손을 가져갔다.
- 자기, 전화 끊지 말고 들어요. 나 지금 산부인과야.
박하나는 그의 행동을 지켜보는 사람처럼 말했다.
“뭐? 산부인과라니. 박하나. 네가 거길 왜.”
도지성은 순간, 얼빠진 얼굴로 힘없이 되물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박하나가 임신이야? 그게 내 애라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박하나가 전화한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 그야…… 정기 검진이라도 받으러 갈까 싶어서죠.
마치 일부러 그의 속을 애태우려는 것처럼, 박하나가 느리게 말했다.
“박하나. 그런 얘기를 굳이 나한테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도지성은 애써 딱딱하게 말을 끊어 냈다.
- 나 임신일지도 몰라요. 걱정, 안 해요?
“그럴 리가. 피임은 확실하게 했고, 네가 착각한 거겠지.”
- 맞아요.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확인해 보려고요.
“박하나, 지금 장난해? 결과가 나오면 알리란 말야!”
- 그 전에 해야 자기도 쫄리죠. 나처럼, 당신도 불안해해야 공평하잖아.
“뭐? 야! 박하나!”
전화는 박하나 쪽에서 일방적으로 뚝 끊어졌다.
“이런 미친. 미쳐 버리겠네.”
도지성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박하나가 만약 임신이라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게 진짜 내 아이라면, 그래서는 안 돼.”
그렇게 되면, 차여주한테 그냥 하룻밤 실수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된 이상, 하루빨리 차여주를 찾아내야 했다.
미칠 정도로,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차여주가 한국에서는 저 말고 아는 사람도, 지인도 없을 텐데.
땅으로 솟구치거나 하늘로 솟은 게 아니라면, 뭐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태오 대표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뉴콘텐츠 건물에서는 아예 로비부터 출입 금지를 당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 내야 했다.
차여주는 그가 잡아 놓은 물고기였다.
이대로 잡힌 물고기를 놓아줄 수는 없었다.
* * *
박하나는 혼자 산부인과에서 나왔다.
임신이 확실했다.
그녀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엄마 은숙에게 보란 듯이 망가진 인생이라고 자조하며 웃어야 할까?
아니면 인생이 시궁창에 처박혔다고 울어야 할까?
박하나는 근처 공원 벤치에 가서 털썩 앉았다.
원치 않았던 임신 때문에 제 인생을 발목 잡힐 생각 따위는 없었다.
도지성 그 다음으로 환승할 남자가 필요했다.
금 여사가 전달해 준 혼처 자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자리가 필요했다.
‘그 늙은 불여시만 아니었어도 회장님을 뵐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금 여사한테 아예 차단돼서 집 안으로 들어가질 못했다.
가정부조차도 그녀가 벨을 눌러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었다.
“짜증 나 죽겠는데 쇼핑이나 할까.”
될 대로 되라고 살아온 인생이었지만, 지금처럼 막막한 적은 없었다.
박하나는 기분이 안 좋을 때 돈 쓰는 걸로 풀어 왔다.
그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기에 곧 택시를 타고 백화점으로 갔다.
한창 쇼핑을 하고 쇼핑백을 양손에 든 채로 도지성의 전화를 받았다.
- 난데 병원에서 뭐래.
“지금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나 좀 데리러 올래요?”
- 박하나. 내가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닌데.
“차여주 휴재했다고 들었어요. 지금 둘이 같이 있는 거 아니죠?”
- 어떻게 알았냐, 차여주 그게 여기 집 놔두고 튀었어.
“집 주소 보내 봐요. 내가 거기로 갈 테니까. 가서 얘기하자고요.”
차여주 관련 소식에 박하나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자기, 나 왔어요. 문 좀 열어 줄래요?”
박하나는 그대로 차여주가 살았다는 집으로 갔다.
도지성은 거실에 앉아 담배를 잔뜩 피우고 있었다.
“들어와. 병원에서는 뭐래?”
“임신이 아니었지 뭐야. 정말 다행이죠, 자기?”
“그래. 아니라니 천만다행이다.”
박하나의 예상대로 도지성은 대놓고 안심하는 눈치였다.
“근데 차여주가 진짜 집 나갔어요?”
“그래. 어디 숨었는지 머리카락도 안 보여.”
“단단히 결심했나 보네요.”
“걔 지금 제정신이 아냐. 남 대표 앞에서도 내 편이 아니라 남 대표 편을 들더라니까?”
도지성이 으드득 이를 갈면서 말했다.
“아아. 그럼 그때 차여주가 신고 나온 명품 구두, 남 대표가 사 준 거였구나?”
“구두라니?”
“그런 게 있어요. 그거 되게 비싼 거였거든. 솔직히, 자기가 언제 차여주한테 선물해 준 적 있어요?”
“없었지. 차여주는 뭘 선물하고 싶게 만드는 여자가 아니니까.”
뻔뻔하기 짝이 없는 도지성에게 다가간 박하나가 그의 팔짱을 꼈다.
오면서 생각해 봤는데, 아직은 도지성에게 이용 가치가 있었다.
차여주의 전 남친에 불과했지만 차여주에 대한 적개심으로 둘은 통했다.
“흐응. 그럼 딱 사이즈 나오네. 차여주 도와주는 거 남 대표 아닐까요?”
“남 대표가 왜? 프라이버시 강하기로 소문난 남자야.”
“남녀 관계랑 속사정은 당사자들 아니면 원래 모른다고 하잖아요. 우리처럼.”
“뭐야? 설마 차여주가 남 대표랑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이런 미친!”
“한번 고려해 보라는 거죠. 남 대표 취향이 꽤나 특이할 수도 있고.”
“그딴 건 안 궁금해. 박하나, 너도 차여주가 밉댔지? 걔가 잘되는 건 보기 싫잖아.”
“물론이죠. 그래서 내가 자기 도와주려고 이렇게 왔잖아요.”
박하나는 적당히 도지성의 분노를 옆에서 부채질해 주기만 하면 됐다.
제 손에 꼭 직접 피를 묻힐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저 다혈질에 성질 급한 도지성이 앞으로 저를 대신해서, 차여주를 망쳐 줄 테니까.
그걸 옆에서 잠자코 구경하면서, 낙태를 할 생각이었다.
임신 사실에 대해 거짓말을 한 것도 그래서였다.
‘박하나도 차여주를 미워하니까 차라리 잘됐어. 이참에 차여주한테 주제 파악 확실히 하게 해 주는 거지.’
도지성 역시 박하나가 필요했다.
일단 임신이 아니라고 하니, 그건 문제가 안 됐다.
혼자 차여주를 찾는 것보다는 둘이 찾는 게 빠를 것이다.
그리고 차여주가 정말로 남태오 대표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
도망치듯이 저를 떠난 걸 두고 두고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박하나. 일단 차여주 걔가 어디 갔는지부터 찾아야 해.”
“알았어요. 당신 연락은 피할 테니까, 내가 연락해 볼게요.”
서로의 음흉한 속내를 숨긴 채, 두 남녀는 마주 보고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