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그 시각, 평창동 남 회장 댁.
안 실장이 불려 와 바닥에 앉아 있었다.
“안 실장아. 요새 밥은 잘 먹고 다니냐?”
“네. 대표님께서도 잘 드시고 다니십니다.”
“그래?”
그동안 남 회장의 연락을 잘 피하던 그였지만 결국 올 수밖에 없었다.
하필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있는데 남 회장의 연락이 왔다.
서둘러 밥그릇을 비우고 총알같이 달려온 참이었다.
“그럼 태오 그 녀석, 여자 생긴 것에 대해서 좀 말해 봐라.”
“네? 그건 전혀 금시초문…….”
“떽! 그놈 여자한테 줄 구두 심부름까지 한 놈이 어디서 시치미냐? 내가 입조심할 테니까 얼른 불어. 안 불면 네 아버지 불러다가 알아보라고 할까?”
안 실장의 부친은 남 회장의 수행 비서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남 씨 집안에 충성하고 있었다.
“……회장님. 제가 원래는 이렇게 입이 가볍지가 않은데 말입니다.”
“알지, 내 다 안다니까. 안 실장이 효자라는 거랑, 입도 무겁고. 응? 자네는 아무 걱정 말게.”
안 실장은 자기 아버지를 고생시키는 것보다, 그냥 제가 입을 열기로 했다.
그래도 남태오 대표 무서운 건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대표님께서는 워낙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분인지라.”
“내 그러니까 자네를 여기다 앉혀 놓았잖아?”
“대표님께는 절대 비밀 지켜 주셔야 됩니다.”
사실, 안 실장은 다짜고짜 불러서 태오의 여자에 대해 말해 보라는 지시에 당황했다.
최근에 태오가 가까이 한 여자는 곤 작가와 차여주뿐이었다.
두 사람은 사실 같은 사람이었지만, 태오와 그런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말을 잘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해서 대표님께서 먼저 연락하신 걸로…… 저도 잘은 모르지만 아무튼 대표님 성격으로 봐서는…… 대단한 호감을…… 상대 여성분께서도…….”
그래도 상대는 남 회장이었고, 잔뜩 기대하는 눈빛인지라 적당히 말을 골랐다.
최대한 남 회장이 듣기 좋게끔 내용을 갖추면서도 사실에 가깝게, 전달하느라 쉽지 않았다.
“그래. 바쁠 테니 이만 가 봐.”
한참 뒤, 남 회장이 가라고 했다.
안 실장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 내며 나갔다.
“젊은 놈이 쩨쩨하긴. 별로 알아낸 것도 없구만.”
남 회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툴툴댔다.
안 실장은 남 회장이 어렸던 태오에게 비서처럼 달고 다니라고 붙여 줬었다.
태오에 대해 프라이버시 어쩌고 하면서, 가장 중요한 어떤 여자인지는 털어놓지를 않았다.
남 회장이 알게 된 건 어찌 됐든, 태오와 가까워진 사람이 여자인 게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개인 오피스텔에다 데려다 놓았단 말이지. 여자 쪽이 출판 쪽 관계자면, 태오 그 녀석이 하는 일이랑 그리 멀지는 않은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결혼해도 일을 하는 걸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남 회장은 출판업에 종사하는 손주 며느리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역시 얼굴도 모르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남 회장은 끙, 신음 소리를 내고 혀를 찼다.
“……그래도 게이 아닌 게 어디인가. 허허 참.”
일단은 그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뭐, 사람만 쓸 만하다면야.”
안 실장은 설마 몰랐겠지만 남 회장은 태오의 결혼에 진심이었다.
이미 백보 천보 양보해서 상대가 어떤 여자든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지 멀쩡하고 정신만 똑바로 박혀 있다면 말이다.
나머지 부족한 조건은 전부 GK그룹 차원에서 케어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뭔가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그래도 태오, 그 녀석한테 자리는 만들어 보라고 해야겠지.”
남 회장은 태오 몰래 일을 진행하려던 생각을 바꿨다.
아무래도 명의 원장과 태오, 셋이 하는 저녁 식사는 오늘이 좋겠다.
예비 손주 며느리의 수술 날짜부터 잡는 게 급선무였다.
* * *
“안녕하십니까. 뉴콘텐츠 대표 남태오라고 합니다.”
그날 저녁, 태오는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남 회장이 인맥을 동원해 주겠다는 말에 바로 달려왔다.
“명 원장이라고 하네. 회장님께 능력 있는 손자분 얘기, 많이 들었네.”
명의 원장은 남 회장과도 동문이었고, 오랜 지인 사이였다.
태오는 어렸을 때만 봤으니 무척 오랜만이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냥 작은 사업 하나 하고 있습니다.”
태오는 스스로를 남 회장의 손자보다는, 개인 사업가로 소개했다.
그런 고집이 뚝심으로 보였던지, 명의 원장은 감탄을 했다.
“젊은 친구가 인물도 훤칠하고 겸손까지 하네요. 회장님,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좋기는! 그러는 자네야말로 요즘 병원이 그렇게 잘된다면서.”
“예. 회장님께서도 언제 한번 검진 받으러 들르시죠?”
“에이. 그런 말 들으면 내 주치의가 섭섭해하지.”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그래도 회장님, 100세 시대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오래 사실 테니 10년쯤 지나서는 저희 병원으로 옮기시는 것도 생각 좀 해 보시죠.”
“크흠.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어. 10년이라니, 앞으로 5년도 무리일세.”
남 회장과 명의 원장 모두 사별한 처지인지라 통하는 것이 많았다.
두 사람이 회포를 풀어 갈 때쯤, 태오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회장님. 제가 좀 바쁩니다.”
“녀석. 성격 급하기는. 명 원장, 저 녀석 기다리니까 그 얘기부터 함세.”
“네. 회장님께 상황은 들었습니다. 회장님 손주 며느리가 되실 분이 수술을 준비하신다면서요. 유방암이면 제 전문이기도 하니…….”
남 회장의 눈짓에 명 원장이 설명을 시작했다.
“잠깐. 손주 며느리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태오가 불현듯 어떤 단어를 듣고, 이의 제기를 하려 했다.
“암! 그렇고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손주 며느리가 될 사람인데! 특별히 신경 좀 써 주게.”
남 회장이 큰 소리로 태오의 말을 잘라먹고, 명 원장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럼요. 당연한 말씀을요.”
마치 각본 없는 드라마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는 흘러갔다.
태오가 잠깐 당황해서 끼어들 타이밍을 놓친 사이 말이다.
‘손주 며느리? 대체 누가?’
설마 저 손주가 나인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남 회장에게 손주는 그밖에 없었다.
“참, 제가 약속이 있는 걸 깜박했습니다. 그럼 회장님, 좋은 시간 보내시지요.”
명의 원장은 제 몫은 다했다는 듯, 쏜살같이 사라졌다.
“방금, 뭡니까. 회장님?”
태오는 그야말로 눈 뜨고 코 베인 거였다.
“방금 들어 놓고 뭘 묻냐? 조만간 수술 날짜 잡혔으니까 너, 그 여자 수술 끝나면 결혼해.”
“결혼이라니요.”
“결혼이 싫으면 약혼이라도 해.”
“회장님.”
“사내대장부가 큰일을 하려면 가정부터 꾸리는 법!”
“……전 아버지와 다릅니다.”
“그러니까 내 허락한대도!”
남 회장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그동안 눌러 담았던 것을 한 번에 표출하는 것 같았다.
“내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다만. 너 말고도 내 회사에 눈독 들이는 놈 많아. 네 애미, 애비 욕했던 것들한테 회사 뺏기고 싶냐? 네 부모가 참 잘했다고 그러겠다.”
남 회장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그들이 누군지 뻔했다.
태오와 태희를 제외한, 남 회장의 형제자매들과 그 자식들이었다.
그런 결말은 태오 역시 원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알겠으면 일주일 내로 데려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태오도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어떤 여자든 제가 데려오면 인정해 주시는 됩니까?”
태오는 남 회장에게 확인부터 했다.
“그래. 내 마음의 준비 다 끝났다.”
남 회장이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태오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차여주가 떠올랐다.
굳이 꼭 결혼을 해야한다면, 그 여자가 어떨까?
“일주일 내로 데려와.”
남 회장은 우위를 점한 김에 아예 밀어붙이고 있었다.
“회장님. 제 상대한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안 주십니까?”
“그럼 수술하고 나서 얼굴 보라는 거냐? 명 원장이 제일 빨리 잡아 줄 텐데. 너도 그 정도 성의는 나한테 보여야 하는 거 아니겠냐.”
“제가 회장님 손자인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태오가 그것까지는 양보 못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마음의 준비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일주일도 많지?”
“사실 일주일도 촉박합니다.”
“그건 네놈 능력에 달린 거지, 내 알 바냐? 그러게 누가 맞선 걷어차래.”
태오가 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맞선 거절한 걸로 평생 저렇게 우려먹으시려나?
지금 차여주는 휴재를 했고, 수술을 받아야 했다.
남 회장과 결혼 얘기를 꺼내는 것도 난감한데 이렇게 촉박하다니.
한편으로는 남 회장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어찌 됐든 남태오 인생에 그렇게 오래 끼어든 여자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남 회장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아닌 척해도 결국, 자신의 핏줄인 손자인 그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걸 남은 일생의 목표라고 여기시는 분이었다.
어렸던 그를 대저택으로 데리고 가셨던 그날부터 말이다.
결심을 굳힌 태오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거면 제가 회장님께 받은 은혜, 갚는 게 되는 겁니까?”
“은혜?”
“부모 잃고 고아 될 뻔했던 저랑 태희 데려다 키워 주신 은혜, 잊지 않고 있습니다.”
태오는 처음으로 남 회장에게 진심을 털어놓았다.
협상이 불리해진다면, 실망하는 대신 상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라.
그 또한 남 회장에게 배웠던 비즈니스의 일부였다.
가장 효과가 좋은 전략은 바로 진심이었다.
“허 참. 언제 적 얘기를 꺼내고 그러냐. 그리고 내가 너희랑 남도 아닌데 뭘 감사씩이나…….”
예상치 못한 손자의 진심에 남 회장이 답지 않게, 헛기침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