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그런 말 마. 당신도 알다시피, 불쌍한 여자였어.”
박 회장이 감싸고 도는 여자는 예전부터 딱 하나였다.
때문에 그 이름 세 글자를 금 여사 역시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전생의 원수라고 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불쌍했든 안했든 나는 그 여자 얘기, 이름부터 불쾌해요. 내가 언제 회장님 앞에서 결혼 전에 만났던 남자 얘기 꺼낸 적 있어요?”
“허허 참. 있으면 얘기해 보든지. 설마 그 나이 먹고도 당신, 질투해?”
박 회장은 다 지나간 옛일처럼 말했지만, 금 여사는 그 여자가 여전히 미웠다.
죽어서까지도 박 회장에게 잊혀지지 않는다니 얼마나 끔찍한가.
“질투는요. 회장님도 이제 연세도 많으시니까, 말 좀 가려 하시라 그 말이죠.”
금 여사는 짜증 섞인 말을 쏘아붙이고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성질은 참 여전하구만.”
박 회장은 혀를 끌끌 차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날세. 지난번에 알아보라던 건? 뭐? 일하던 출판사에서도 행방을 모른다니. 희망 고아원 쪽에도 연락해 보고, 수단 방법 가리지 마.”
한참 소리를 낮춰 통화를 하던 박 회장이 전화를 끊었다.
“차여주, 차화련. 아주 제 엄마를 쏙 빼닮았던데,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평생 남부러울 것 없이, 하고 싶은 거 다하면서 살았다.
그런 그였지만 딱 한 가지, 후회되는 게 있었다.
그건 첫사랑이었던 여자를 지켜 주지 못한 거였다.
그 여자도, 그 여자와의 사이에서 생겼던 아이도.
마땅한 보상을 하지 않고서는, 편히 죽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차화련.
눈을 감으면, 그 여자가 소리 내 책을 읽어 주던 모습이 선명했다.
아마 그 여자도 제 딸을 찾아 주길, 바랄 것이다.
* * *
박 회장 방에서 나온 금 여사는 응접실로 갔다.
부르르 떨던 주먹으로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차화련. 차화련 그 계집을 아직도 못 잊었단 말이야?”
차화련, 그 이름 세 글자는 아직도 치가 떨렸다.
박 회장의 첫사랑이었던 여자였다.
글을 쓰던 여자였는데 타고나길 몸이 약했다.
“거머리 같은 게 죽어서까지…….”
금 여사와 박 회장은 집안끼리 맺어진 정략결혼이었다.
그는 딴에는 양심 있는 척, 결혼 초에 따로 만나는 여자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설령 결혼 전에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달라진 건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정략결혼이란 서로의 조건이 최우선이었으니까.
“나한테는 한 줄기 숨통이 트이게 해 주는 여자야. 당신이 그 여자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나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그때 금 여사는 충격을 받고 무너질 뻔했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여자가 얼마 못 살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어차피 죽을 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금 여사는 질투할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그 여자가 죽고 나서 지난 20여 년간은 평화로웠다.
어차피 그 여자보다 더 박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는 첩은 없었다.
‘문제는 왜 이제 와서 그 여자 얘기를 꺼내냐는 건데 말이지.’
왜 이것이 박 회장이 보여 주는 복선처럼 느껴지는 지 모를 일이었다.
그냥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차화련에게 신경을 껐었는데.
지금이라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금 여사도 준비해 두기로 했다.
박 회장이 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고, 만약 차화련이 박 회장의 핏줄을 낳았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지만, 장차 그녀와 자식들의 유산 상속을 위해서라도 처리해야 했다.
“일단 희망 고아원부터 뒤져 봐야겠어.”
금 여사가 차화련을 마지막으로 봤던 장소였다.
살아생전 다시는 그곳을 찾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편 박 회장이라면, 분명 죽기 전에 큰 사고를 칠 위인었다.
* * *
여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희 커플도 카페로 들어왔다.
“동구 씨. 여기 젤라또가 그렇게 맛있다는데……. 잠깐, 오빠?”
단번에 태오를 알아본 태희가 서슴없이 다가왔다.
팔짱을 끼고 있던 남자 역시 따라서 달려오게 됐다.
“대, 대표님.”
여주는 당황해서 그의 시야를 가리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오빠! 오빠 맞지? 남태오 씨!”
태희가 아주 요란하게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남태희, 어쩐 일이야.”
태희를 보자마자 태오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속으로는 그도 조금 당황했지만, 포커페이스를 유지 중이었다.
‘어? 저 여자를 보고도 별로 안 놀라네?’
태오의 옆에 서 있던 여주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야 데이트 중이지. 오빠야말로 점심시간에 혼자가 아니네? 참, 우리 구면이네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오늘따라 태희는 캐주얼한 옷차림에 발랄해 보였다.
통통 튀는 목소리로 먼저 아는 척을 해 주는 태희에게, 여주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전…… 차여주입니다. 안녕하세요.”
“벌써 세 번이네요. 우리 확실히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두 번 아닌가?
여주의 기억에서는 태희와 세 번 만난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생글생글 웃는 미인의 말에 토를 달기가 그랬다.
두 번이면 어떻고, 세 번이면 어떨까.
인연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태희에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태희.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만 가지?”
그런 여주가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여서 태오는 한마디를 거들었다.
친화력이 좋은 여동생 태희에 비해, 여주는 낯선 사람들이 많이 어색해 보였다.
“에이! 이제 왔는데 가라니. 오빠, 정말 서운하다. 자꾸 그렇게 남처럼 굴래? 우리 동구 씨 투명 인간 취급할 거야?”
그렇다고 얌전히 물러날 태희가 아니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남자를 확 잡아당겨서는 두 사람 앞으로 보여 줬다.
“아, 안녕하세요. 형님.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전 이동구라고 합니다. 태희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소처럼 덩치가 커다랗고 순한 눈망울의 남자가 꾸벅 인사했다.
정작 그의 인사를 받은 태오는 그쪽으로 눈길도 안 줬다.
“상견례는 나중에 날짜 따로 잡지.”
대신, 태희가 그토록 듣고 싶어 하던 말을 던져 줬다.
올해 안에 결혼할 거라고 노래를 불렀는데, 상견례 자리에 부모 대신 그더러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남 회장을 설득해 모시고 갈 계획이라는 말은 일단 넣어 뒀다.
괜히 기대하게 해서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형님, 언제 시간 한번 내주시면 태희랑 꼭 찾아뵙겠습니다.”
“고마워. 오빠. 우리 이렇게 같이 서 있으니까 가족 같고 정말 좋다!”
“가족은 무슨.”
태희의 남친은 그 커다란 덩치로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박수를 짝짝 쳐 댔다.
태희는 좋아라하며 활짝 웃고 있었다.
태오는 그런 둘을 보며 핀잔을 줬다.
다소 어색한 조합이기는 했지만, 세 사람은 그럭저럭 잘 어울려 보였다.
‘형님? 오빠? 상견례? 찾아뵙는다고?’
여주만 혼자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방금 전에 들은 키워드들을 열심히 조합하는 중이었다.
의외의 장소에서 일어난 상황이라 로딩이 좀 걸렸다.
“여주 씨, 무슨 생각하는지 제가 한번 맞춰 볼까요?”
그런 여주를 슬쩍 눈여겨보던 태희가 눈치 빠르게 말을 걸었다.
“네?”
“오빠랑 저랑, 커플인 줄 알았죠?”
“……아닌데요.”
어떻게 그렇게 생각했다고 할 수 있을까?
옆에는 태오도 같이 듣고 있었다.
“에이. 거짓말 되게 못하는 거 티나요. 여주 씨, 되게 귀여워요.”
“아하하.”
어색할 때는 그냥 웃어 버릴 수밖에.
여주는 칭찬에 익숙하지 않았다.
귀, 귀엽다니.
어렸을 때조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말이었다.
“……근데 두 분 진짜 안 닮으셨네요. 아…….”
칭찬에 내성이 전혀 없는 여주가 굳어 버린 채로, 얼떨결에 속마음을 말했다.
그러자 태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건 인정. 진짜 안 닮았죠? 오빠는 할아버지 닮았고, 저는 엄마 닮았거든요.”
“아아. 그런 거였구나.”
그제야 여주는 이해를 했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남매였다니 그건 그것대로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잠깐. 남태희. 내가 회장…… 아니 할아버지랑 닮았다고?”
“아니라고 할 생각을 마. 오빠, 내가 보기에는 진짜 판박이가 따로 없으니까.”
“너 칭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어. 용케 눈치챘네?”
“야, 남태희.”
어느새 태오와 태희는 투닥거리고 있었다.
그게 정말 보통의 남매들처럼 보였다.
외모는 닮지 않았다고 해도, 풍기는 분위기는 비슷했다.
‘오빠랑 여동생이었구나. 부럽다.’
여주는 두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아에 외동이었던 자신은 어릴 때, 늘 형제자매 하나만 더 있기를 바랐었다.
“잠깐. 차여주 씨.”
이번에는 태오 입장에서 로딩이 걸릴 차례였다.
그는 뒤늦게 여주가 자신과 동생에 대해 어떤 오해를 했는지 깨달았다.
듣고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바로 말이 나오지 않았었지만, 짚고 넘어가야 했다.
“설마, 내가 태희 쟤랑 연인 사이인 거라 오해한 겁니까?”
“……아하하. 대표님. 제가 눈치가 좀 없는 편이라서요.”
여주가 멎쩍게 웃어 보이자, 태오는 피식 웃었다.
“눈치가 아니라 안과 가서 시력 검사를 해야겠네요. 차여주 씨는.”
진지하게 권하는 태오에, 여주는 스리슬쩍 시선을 피했다.
“내 말이!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지? 여주 씨, 진짜 안과를 가 보는 게 어때요?”
전에 태희도 저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지금도 맞장구를 치는 걸 보니 이제야 알겠다.
두 사람이 남매는 확실히 남매였구나.
“저기, 저도 처음에는 태희가 말해 주기 전까지는 두 분 사이 조금 오해했었습니다.”
태희 남친 이동구가 옆에서 조심스레 편을 들어 줬다.
여주도 적당히 눈인사로 감사 표시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들 관계에 자신이 속한 것이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