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비록 그녀가 남녀 관계에는 무지했지만, 이 순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 저 여자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모습을 태오가 보게 해서는 안 됐다!
“대표님! 잠시, 이쪽으로 와 보세요!”
“뭡니까?”
“그게, 그러니까 저 카페! 저기 젤라또가 너무 맛있어 보이네요!”
“나한테 사 달라는 겁니까?”
“일단 저기로 가시죠! 빨리요!”
그의 입장에서는 어이없을 상황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주는 재빨리 태오의 팔을 잡아 당기며 애원하듯 말했다.
그녀와는 단지 비즈니스 관계일 뿐인데도, 폭력을 행사하려던 도지성에게 거침없이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던가!
불의를 못 참는 남태오 대표의 성격에, 여친이 다른 남자와 있는 걸 본다면?
‘만약 들킨다면 저 남자는 오늘 반드시 죽을 거야.’
그러니까 일단은 이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았다.
“차여주 씨, 이게 무슨…….”
“얼른요. 대표님. 어서 가시죠.”
“나 참.”
태오는 얼떨결에 여주에게 잡혀 끌려갔다.
가장 어이없는 건 그녀에게 잡힌 제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고 있었다.
내가 이 여자에게 순순히 잡혀 주고 있다니.
뜨거운 태양 아래,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고작 손 한 번 잡은 여자에게 말이다.
그런데도 기꺼이 잡혀 걸어가 주는 제 모습을 좀 보아라.
‘내가 정말 미친 건가.’
남태오의 눈썹 사이는 좁혀졌지만, 반대로 입매는 웃고 있었다.
* * *
이은숙과 박하나는 겨우 시간 맞춰 박 회장 댁에 도착했다.
“허허. 잘 왔네, 잘 왔어. 어여들 와 앉어.”
박 회장은 병색이 짙었지만, 기분은 좋아 보였다.
거실에는 이미 먼저 와 있었던 남 회장의 가족들과 다른 첩의 자식들이 보였다.
저마다 박 회장 눈에 들기 위해서 한껏 꾸민 차림새였다.
“축하드려요. 회장님.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박하나는 옆에서 눈치 주는 은숙에 준비한 말을 꺼냈다.
“회장님. 이럴 때는 한 말씀 하셔야죠. 남의 집에 오면서 빈손으로 오다니요.”
박 회장 옆에 있던 금 여사가 들으라는 듯 날카롭게 말했다.
“저희 형편이 좋지 못해서요. 사모님.”
어차피 뭘 가져온들, 금 여사 눈에는 차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빈손으로 가자고 박하나가 고집했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미처 준비 못 했어요.”
박하나는 뻣뻣이 서 있고, 은숙은 머리를 조아렸다.
“괜찮아, 괜찮아. 이렇게 와서 얼굴이나 보이면 됐지.”
박 회장은 적당히 하라며 다독였다.
“빨리 들어와서 앉지 않고 뭐 해? 아줌마는 나이 먹더니 눈치까지 없어졌어?”
금 여사의 딸이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얼굴 보니까 다들 안녕하신 것 같네요.”
박하나 역시, 배다른 형제들을 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사모님. 죄송해요. 요즘 우리 하나가 몸이 좀 안 좋아서.”
“젊은 게 몸이 안 좋으면 얼마나 안 좋다고 유난은!”
은숙은 연신 굽신거렸고, 금 여사는 싫은 티를 팍팍 냈다.
“사모님. 오늘은 정말로 하나가 몸이 안 좋아서 그래요.”
늘 이 집에 올 때마다 익숙하게 봤던 광경이었다.
박하나는 주먹을 꽉 틀어쥐고, 주방으로 갔다.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데, 금 여사가 따라왔다.
“내가 너희 모녀 속셈을 모를 것 같아? 회장님 동정심이라도 사서 뭐 떨어질 거 없나 온 모양인데 꿈도 꾸지 마. 회장님 돌아가시면 네들 몫은 하나도 없어.”
박 회장 앞에서는 꾹 참았던 말이었지만, 금 여사의 진심이었다.
“어차피 여사님 돈도 아닌데, 무슨 참견이세요?”
박하나가 똑바로 쳐다보며, 대들자 말자 금 여사의 손이 박하나의 뺨을 날렸다.
찰싹!
“감히 어디서 말대꾸야? 너, 이딴 식으로 나오면 재취 자리도 어려울 줄 알아?”
“사모님. 재취 자리라니요? 그게 무슨 소리죠?”
의기양양한 눈빛의 금 여사 앞에서, 박하나의 눈이 흔들렸다.
맞은 뺨이 부어올랐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무슨 소리기는. 회장님이 너 혼처 자리 알아보라셨어. T식품 박 영감 차남이랑 결혼해.”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는 듯, 금 여사의 말투는 단호했다.
“마, 말도 안 돼! 미쳤어요? 차남도 영감탱이에 나만 한 아들이 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차남이라고 해도 벌써 60대에, 대머리였다.
심지어 그녀만 한 아들이 둘이나 있었다.
“네 처지에는 그것도 감지덕지한 줄 알아야지. 이것아.”
“그뿐이면 내가 말을 안 해요. 그 차남, 본처는 정신 병원에 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허울뿐인 재취 자리로 들어가 봤자,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그저 노인네 병 수발 드는 젊은 첩 자리로 앉혀 놓는 거였다.
박하나는 이제야 이들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말이 재취 자리였지, 혼외 자식에 이어 새롭게 채워지는 족쇄였다.
“알았으면 조용히 네 처지 분간해서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내가 왜? 당신이 일부러 꾸민 짓이지? 그렇지?”
박하나가 눈을 뒤집으며, 금 여사에게로 달려들었다.
키는 박하나가 좀 더 컸으므로, 손을 뻗자마자 바로 머리채를 잡아쥐었다.
“이, 이게 감히 어디서! 이거 안 놔, 놔놔!”
“내가 여사님이라고 불러 주니까 진짜 뭐라도 된 줄 알지? 본처면 다야 본처면 다냐고!”
제 인생을 끝내 망치려 드는 금 여사에게 내리눌렀던 분노가 폭발했다.
한바탕 두 사람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몸싸움이 벌어졌다.
“아이고, 하나야! 하나야, 너 뭐 하는 거야!”
딸이 없어진 걸 알고 나타난 은숙이 놀라서 달려왔다.
그러나 금 여사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아, 오히려 머리채를 잡히고 말았다.
셋이 붙어서 주방이 소란스러워지자, 박 회장이 고용인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시끄러우니까 당장 저것들 끌어내!”
메이드들은 금 여사를 감쌌고, 은숙과 박하나는 밖으로 끌려 나갔다.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회장님. 박 회장님!”
박하나가 대문 밖으로 끌려가면서도, 불렀지만 박 회장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대문이 닫히고 나서야, 모녀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들었지? 금 여사 저년이 뭐라고 하는지. ……이제 만족해? 엄마에 이어서 나까지 첩으로 살아? 그러면 좋겠냐고!”
박하나가 시뻘게진 눈으로 은숙을 노려봤다.
“……하나야. 그래도 너 시집가야 돼. 지금 이렇게 사는 거보다는 나을 거야. 응?”
은숙은 눈물을 흘리며 박하나를 껴안으려고 했다.
“드디어 엄마도 미쳤어? 짜증 나니까 저리 비켜!”
박하나는 은숙을 밀쳐 내고, 계획을 바꿔 도지성한테 알리기로 했다.
혼자서만 머리로 끙끙 앓는 것보다, 그게 나았다.
이렇게 혼자서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대머리 영감의 첩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나 너, 지금 만나는 그놈한테로 갈 거면 관둬. 관두라고!”
그런 박하나를 은숙이 힘겹게 매달려 잡아챘다.
은숙은 이미 딸에게 남자가 있다는 것, 정상적이지 못한 관계라는 걸 알고 있었다.
둘의 관계를 가볍게만 여기고 모른 척했는데, 이제 보니 실수였다.
“엄마가 뭔데 관두래? 엄마가 뭘 아는데!”
“너, 너 그놈 애 가진 거 다 알아.”
은숙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내뱉었다.
“어, 엄마가 그걸 어떻게!”
처음으로 박하나가 뒷걸음질 치면서 동요했다.
순간, 떠오르는 건 화장실에 버린 임신 테스트기였다.
언젠가 은숙에게 알려야 하나 고민은 했었지만, 지금 그 얘길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서 뭘 어쩌려고? 그러게 뭐 하러 떳떳하게 만나지도 못할 남자를 만나!”
“엄마가 나한테 그런 소리 할 자격은 있고?”
“이 철없는 것아! 사모님한테 평생 무시받는 나 봤으면서, 너도 나처럼 되려고 그래?”
은숙은 두 눈이 뒤집혀 대드는 박하나를 잡아채 골목 쪽으로 끌고 갔다.
박하나의 임신 사실이 알려지면 재취 자리도 물 건너가고 말았다.
어떻게든 잘 타일러야 했다.
“하나야. 여기서 더 망하면 안 돼. 너, 지금이라도 엄마가 시키는 대로.”
“내가 이렇게 망가진 건 다 엄마 때문이잖아?”
“하나야…….”
“난 엄마랑 달라! 내가 찍은 남자한테 절대 먼저 버려지지 않을 거야. 버리더라도 내가 먼저 버릴 거라고. 알아들어?”
박하나는 은숙을 거칠게 밀쳐내고 혼자 차에 올라탔다.
버린 자식인 걸 오늘 확실히 알았으니 차라리 잘됐다.
이제는 박 회장이나 금 여사 눈치 안 보고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하나야, 하나야!”
박하나가 시동을 걸고, 은숙이 차 창문에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두 손을 힘껏 뻗었지만, 은숙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놓쳐 버린 딸 대신, 희뿌연 매연 속에 갇혔다.
* * *
박하나 모녀를 쫓아낸 금 여사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박 회장은 침대에 누워 쉬고 있었다.
“회장님. 몸도 안 좋으시면서 왜 그 모녀를 굳이 부르셨어요? 그냥 나중에 따로 통보하면 될 것을.”
“글쎄. 내가 갈 때가 되긴 한 모양이야. 자꾸 눈에 밟혀.”
배다른 자식들까지 앉혀 놓고 잔치를 벌인 박 회장이었다.
그들은 박 회장에게는 제 핏줄이니 자랑거리일지 몰라도, 금 여사에게는 수치였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봐준 것이었다.
박 회장이 죽는 그 날이 그것들의 제삿날이었다.
금 여사는 오직 그 하루를 위해 지난 세월을 버텨 왔다.
“하나 걔, 지 뜻대로 작가 된 거 아닐 거야. 지 엄마한테 뭔가 들은 거지.”
“정말 요즘에는 개나 소나 작가……. 아니에요. 회장님 말씀하세요.”
금 여사는 못마땅한 기색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내가 당신이랑 결혼 전부터 만났던 사람, 차화련이 기억하지? 그 여자가 몸은 약한데 글 쓰는 걸 참 좋아했었지.”
죽을 날을 받아 놓고 나니, 박 회장은 부쩍 추억에 잠기고는 했다.
특히 최근에는 옛 여자를 떠올리고는 했다.
“불길하게, 이미 죽은 여자 얘기는 뭣 하러 꺼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