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흥분한 도지성은 말을 되는 대로 내뱉고 있었다.
“야, 일단 알았으니까 너부터 진정하고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너 지금 꼴에 사장이라고 남 의식하냐? 어?”
“자자, 들어가자고. 도지성 편집장님.”
도지철은 다른 직원들의 눈을 의식했기에 문을 닫고 들어갔다.
보는 눈이 없자, 그 역시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먼저 바람났다며? 능력 좋네 이 새끼. 크큭. 그래서 잤냐, 그 여자랑? 누구냐? 어? 이름 말하기 쪽팔리면 성이라도 대 봐. 직원이야? 아니면 작가인가? ”
도지철은 도지성의 약점을 잡아 놓칠 인간이 아니었다.
배를 잡고 천박한 웃음소리를 내자 도지성이 바로 발끈했다.
“신났지. 아주 신났어. 도지철 너! 지금 그딴 게 중요하냐? 어?”
“이 자식이. 아까부터 자꾸 하늘 같은 형님한테 새끼라니. 너야말로 이제라도 줄 잘 서야 할 텐데?”
“줄이라니. 야, 도지철! 그게 무슨 개소리야?”
“연로하신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면, 결국 이 출판사 누구한테 갈 것 같냐? 내가 장담하는데, 너 자꾸 이렇게 미운털 박히면 너 나중에 처지가 아주 곤란해질걸? 낄낄.”
평소 같았으면 벌써 두 형제 사이에서 주먹 다툼이 벌어져야 했다.
그들 사이의 적대감은 하루 이틀 쌓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지철은 오늘 도지성의 약점을 잡고 기분이 좋았기에 웃고만 있었다.
도지철이 보기에 도지성의 상황은 무척이나 불리했다.
어차피 모든 것이 장남 위주로 돌아가는 집안이었다.
별다른 실적이 없었던 그를 사장 자리에 앉혀 놓은 것부터 부친의 뜻이었다.
그들의 부친은 황금 출판 그룹의 회장이었다.
즉, 황금배 출판사는 황금그룹의 자회사이자, 출판 브랜드 중 하나였다.
도지성이 악착같이 차여주를 담당하려는 것은, 어떻게든 실적을 올려 부친의 눈에 들기 위함이라는 걸 도지철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야 도지철! 너, 내가 없으면 이 출판사가 제대로 돌아갈 것 같아?”
“너는 없어도, 차여주가 있으면 되는 거 아냐?”
“이 새끼가!”
“도지성아. 너보다 내 머리가 좀 딸려. 근데 말이다. 때로는 약아빠진 게 별로더라고. 이 형님이 충고 좀 해 줄까? 내가 너라면 이럴 시간에 가서 그 곤 작가한테 빌지 빌어.”
도지철은 한껏 비아냥거렸다.
처음부터 황금 출판의 회장 자리는 제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도지성이랑 사귀던 차여주가 일개 직원이 아니라 곤 작가였다?
지금까지는 도지성이 차여주를 꽉 쥐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아니라는 것.
그의 입장에서는 이게 나쁘지만 않았다.
도지성이 이대로 실적을 더 이상 올리지 못하면, 오히려 제게는 이득이었다.
다 잡은 물고기였던 차여주를 놓치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 여자 뒤에 뉴콘텐츠 대표인 남태오가 있다면, 일단은 제가 물러나는 것이 맞았다.
도지성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도지철은 알고 있는 비밀이 있었다.
“뭐, 내가 왜 빌어? 바람 한 번 피운 게 뭐 대수라고?”
끝까지 저 잘났다고 큰소리치는 도지성이었다.
“도지성 너도 생각을 좀 해 봐라. 네가 여자면, 남태오 대표한테 눈이 안 가겠냐? 한창 잘나가는 사업가에 생긴 것도 뻑 가게 생겼더만.”
“하여간 여자들은 돈 좀 많은 남자만 보면 미쳐서는.”
“미쳤기는. 남자인 내가 봐도 남 대표, 돈 빼도 끝내주던데.”
“됐고 도지철 사장님, 할 말 끝났으면 그만 나가 봐도 되겠지?”
“가든가 말든가.”
도지성은 그길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심드렁하게 책상으로 간 도지철이 이쑤시개로 이빨을 쑤셨다.
“도지성이. 너도 남태오 대표가 누구 손주인지 알고 나면 뒤집어질 거다. 아마. 크큭.”
부친은 그에게만 남태오 대표가 누구인지 넌지시 귀띔을 해 줬다.
그래서 더 납작 엎드렸던 것이었다.
차여주 뒤에는 남태오, 또 그의 뒤에는 GK기업이 있었다.
이쪽은 구멍가게 수준이고, 그쪽은 공룡이었다.
도지철이 이런 고급 정보를 당연히 미워 죽겠는 동생 놈한테 공유할 이유가 없었다.
도지철은 아까 차여주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도지성을 버리면, 수술 끝나고 이번 연재까지는 마무리지어 줄지도 모르지.’
차여주를 보니까 이미 마음이 돌아선 게 확실해 보였다.
그러면 도지철은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해야 했다.
그는 장사꾼이었고 벌써부터 미래를 점치고 있었다.
‘만약 차여주가 남 대표와 이뤄지기라도 한다면?’
남 대표가 그렇게까지 나서 주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었다.
거기다 남녀 관계는 원래 당사자들이 아니면 모르는 법이었다.
차여주와 남태오 대표.
앞으로 그 둘 사이가 더 재밌어질 것 같았다.
* * *
“도지성 이 개자식! 지금 감히, 내 연락을 지가 피해?”
그 시각, 박하나는 화장실에서 똥줄이 타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임신 테스트기가 들려 있었다.
희미하지만, 두 줄의 빨간 선이었다.
“이걸 어쩔 거야, 어쩔 거냐고!”
예정에도 없던 임신이라니,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상황을 이렇게 만든 도지성은 연락이 안 됐다.
“아아아악!”
박하나는 부재중으로 넘어가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내던졌다.
열 번이 넘어가는 걸 보니, 그녀를 대놓고 피하는 게 분명했다.
‘도지성.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도지성과의 관계가 불장난으로 시작했다는 건 인정했다.
하지만, 관계를 끝내는 건 이쪽이 해야 했다.
시작도 이쪽이 했으니까 그게 당연했다.
‘끝내 차여주한테 가기로 한 거야? 그래?’
박하나가 욕조에 기대 앉아서 부르르 떨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하나야. 도대체 뭐 하길래 화장실에서 나오질 않아. 어? 이러다 늦겠다니까!”
박하나의 엄마인 이은숙이었다.
박하나는 얼른 휴지통으로 임신 테스트기를 던져 넣었다.
“아씨! 짜증 나게 왜 자꾸 부르는 건데?”
그러고는 성질을 내며 거칠게 문을 열었다.
“회장님 기다리시겠어. 생신날인데 우리도 늦지 않게 가야지, 응?”
은숙은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평소와 달리 화색이 돌았다.
그걸 본 박하나가 왈칵 짜증을 냈다.
올해 박 회장의 팔순 잔치에는 두 모녀도 참석 허락을 받았다.
그래 봤자 박 회장의 본처와 그 자식들을 위한 들러리밖에 더 될까.
어쩌다 한 번 불렸다고 좋아하는 꼴이라니.
“어쩌다 한 번 불려서 가는 처지가 그렇게 좋아? 좋냐고!”
“나 좋자고 이래? 다 회장님께 너 예쁨 받으라고 그러지.”
“퍽이나 그러겠다. 내 얼굴이나 안 까먹으셨나 몰라.”
“너, 회장님께는 말 좀 예쁘게 해. 엄마 말, 알아듣지?”
“아 몰라! 엄마는 비참하지도 않아? 엄마가 세컨드 취급도 못 받고 사니까 나까지 이런 꼴이잖아.”
“하나도 안 비참해. 그래도 우리한테 돈 주시는 거 회장님뿐이야. 빨리 나와.”
“씨. 알았어, 알았다고!”
박 회장이 한때 은숙을 아꼈다지만, 한때일 뿐이었다.
빨리 나오라고 재촉하며 돌아서는 은숙을 보면서, 박하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휴지통 사이로 슬쩍 삐져나온 임신 테스트기를 보자 저절로 이가 갈렸다.
……하필 이 시기에 망할 임신이라니!
쓰레기가 되기 직전의 그것처럼, 저 역시 비참하기만 했다.
* * *
“여기도 웨이팅이 있다는데, 어쩌죠?”
“그냥 내가 아는 곳으로 갑시다.”
여주는 태오에게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열심히 인터넷 검색을 했다.
하지만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을 간과했다.
어딜 가도 사람들로 붐비고 대기 줄이 장난 아니었다.
결국, 태오의 단골 레스토랑으로 갔다.
꼬르륵. 입구에 들어서는데, 여주의 알람이 울렸다.
“웨이팅은 없을 겁니다.”
태오가 흘낏 보며 하는 말에 여주는 부끄러웠다.
“대표님. 오랜만에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말대로 웨이팅은 없었다.
태오를 알아본 매니저가 먼저 반갑게 자리를 안내했다.
“오늘은 동행이 있는데.”
“네. 늘 드시던 자리로, 드시던 메뉴로 2인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그가 단골인지 주문은 간단명료했다.
“대표님께서는 늘 이곳으로 오셨나 보네요.”
마치 그의 사적인 공간으로 초대된 느낌에 여주는 기분이 묘했다.
“이곳에 있으면 방해받지 않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홀에서 조금 떨어진 개별 룸이라 일단 조용했다.
잠시 후, 바로 요리된 메뉴들이 서빙됐다.
양이 적었지만 하나같이 맛이 훌륭했다.
‘돈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여주는 품위 있게 식사하는 태오를 보았다.
다른 계층의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돈을 소비하는 방식도 저와 여러모로 달랐다.
그에게는 그만의 취향이 묻어난다는 걸, 그녀도 배우고 싶어졌다.
식사가 끝나고 여주는 카운터 앞에 섰다.
“맛있는 식사 하셨습니까? 계산은 이미 끝나셨으니 안녕히 가십시오.”
카드를 꺼내자마자 매니저는 말했다.
“네?”
“그렇다니 갑시다.”
태오는 자연스레 그녀를 이끌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녀더러 밥을 사게 할 생각은 없었던 것처럼.
“저, 대표님. 오늘은 꼭 제가 사 드리고 싶었는데요…….”
“정 사고 싶으면 다음에.”
“……다음이요?”
그녀는 순간, 그 다음이 언제인지 고민했다.
정말 다음에 만나는 그날인지, 아니면 그냥 형식상 하는 말인지.
“언제든지, 또 나랑 밥 먹죠.”
돌아온 남태오의 대답은 명확했다.
“차여주 씨 단골 식당도 괜찮겠지.”
태오의 말에 여주의 이마 사이가 좁혀졌다.
‘내 단골 식당? 그런 거 없는데.’
열심히 검색해서 하나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저 여자, 어디서 본 얼굴인데?’
건너편에서 팔짱을 끼고 다가오는 두 남녀가 있었다.
특히 여자 쪽은 멀리서 봐도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눈이 아주 초롱초롱했다.
‘포, 포메라니안!’
여주는 뉴콘텐츠 대표실 앞에서 여자를 봤던 걸 기억해 냈다.
‘남태오 대표 여친이 왜 다른 남자랑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