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사실 남태오는, 직접 안 실장을 대동하여 이곳으로 올 때부터 기분이 별로였다.
와서 도지철을 혼자 상대하고 있는 여주를 보고 나니 더 가라앉았다.
왜 그런 것인지는, 그 이유를 스스로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내 심경 변화가 저 여자, 차여주 때문인 건 이제 알겠군.’
필요 이상으로 차여주를 챙기려 드는 제 모습을 보니까 알겠다.
저 여자가 도지철을 일대일로 상대하게끔 놔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라.
이상하게 차여주를 생각하면, 이성보다 몸이 앞섰다.
그냥 안 실장을 보내도 됐을 일을 직접 온 것도 그래서였다.
차여주가 보냈던 문자를 보자마자, 걱정이 됐던 것이다.
막상 오고 나니, 차여주에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계약서까지 내보였지만 도지철 사장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일부러 말을 빙빙 둘러 가며 알아듣지 못하는 꼴을 보니, 직접 나설 수밖에.
차여주 저 여자 나름대로 잘 해 나가고는 있었지만, 그가 끼어들었다.
“나한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입니까?.”
도지철을 쫓아내고 나서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면 궁금해 미칠 것 같았으니까.
저 여자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도지성 같은 인간하고 엮였는지.
헤어지지 않았다면 정말 결혼이라도 하려던 거였는지.
그는 정말로 궁금했다.
일적인 관계는 둘째 치고, 인성이 그런 인간하고 왜?
거기다 도지철 사장은 또 어떠한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형제가 하나같이 거머리였다.
“아니요. 대답하기 곤란하다기보다는…… 듣기에 따라 굉장히 이상한 말처럼 들리실 수도 있으실 텐데요. 저한테 선택지가 도지성 같은 남자 하나뿐이었다고 하면……. 저도 그런 인간일 줄 알았더라면,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예요.”
차여주답지 않게 평소보다 말이 길었다.
그녀는 태오의 물음에 대답을 함과 동시에 스스로 다짐하였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 덕분에 도지성과는 헤어졌고, 부부가 될 인연조차 차단했다.
이제는 황금배 출판사가 망하는 것과 도지성이 무너지는 걸 볼 차례였다.
‘박하나보다는 도지성을 먼저 처리하자.’
생각이 그렇게 굳어졌다.
“그렇게 생각했다니 다행이군요.”
“대표님께서 곤 작가 본체에 실망하셨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겠죠. 아무래도 제 상황에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라는 말이 맞겠네요.”
순순히 웃으며 제 과오라고 인정해 보이는 여주였다.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데, 어째서인지 남태오는 화가 났다.
그녀는 엄연히 피해자였다.
그런데 가해자가 짊어져야 할 죄책감까지도 짊어지고 있었다.
그게 또 아무렇지 않다고 말해 보이는 것까지도.
‘진짜 이렇게까지 기분이 드러운 것도 간만이군.’
그가 원하던 대답을 들었음에도, 태오는 후련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차여주 저 여자의 문제였다.
저 여자의 어조가 너무나 담백했다.
저 여자의 태도 역시 너무나 무미건조했다.
이제 막 상처 받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마치 지나간 상처를 돌아보는 관조적인 태도라고 할까.
그래서 더 씁쓸하게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이런 느낌은 또 처음이군.’
그런 그녀가 거슬린다는 게 무척 신경 쓰였다.
태오는 이번에도 그답지 않은 행동을 하기로 했다.
그건 바로 차여주 인생에 오지랖을 부리는 거였다.
“차여주 씨. 잠시 내 여동생이라 생각하고 충고 하나 하죠.”
“네. 대표님께서 말씀하시면 새겨들을게요.”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됩니다. 물론, 연애에서는 남녀 모두 상대방을 잘 만나야 하지만 차여주 씨 입장에서 말하는 겁니다.”
여주는 남태오가 저렇게 말해 주는 것이 의외였지만, 일단 경청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보다 더 그녀의 입장을 잘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혼자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보다 그의 조언을 참고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특히 차여주 씨처럼 능력 있는 여자일수록 더 잘 만나야 합니다. 도지성은 당신 같은 여자를 감당할 능력이 안 됐던 남자였던 거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이해가 되네요.”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란 말입니다. 연애도, 결혼도 신중히 하도록 하고. 내 말, 이해했습니까?”
“네. 이해했습니다. 대표님. 미처…… 그런 말씀을 해 주실지 몰랐습니다만. 제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제껏 아무도 제게 그런 말은 해 주지 않았어요. 저, 살아오면서 대표님한테 이런 말 처음 들어요.”
여주는 그동안 글만 쓰느라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나 사람 일에 대해서는 그리 눈이 밝지 않다는 걸 묵묵히 인정했다.
스스로를 한심하게만 여겨서는 성장해 나갈 수가 없다.
그것이 전생에서 깨달았던 점이었다.
또한 나를 돕는 이가 있다면, 그 도움을 감사히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기 때문이라는 걸, 남태오 저 남자를 만나서 배우게 됐다.
나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지만 이렇게 배워 나간다.
그렇게 생각하자, 더는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가끔 굉장히 의외야, 차여주 당신.”
태오는 제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있는 여주에게 그 말만 했다.
그동안 봐 온 여자의 성격으로 받아칠 줄 알았다.
지난번 호텔에서 아이스크림 묻은 옷을 입고 울 때처럼.
그런데 지금은 잘못을 저지르고 어른한테 꾸중받는 어린이 같았다.
심지어 그의 참견에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래, 저 여자 고아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아무도 그녀를 위해 생각하고 어떤 말이라도 해 주지 않았다.
정말 그랬을 것 같았다.
태오는 조언은 우선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그 대신, 물끄러미 관찰했다.
가만히 있는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늘 혼자였던 사람처럼 말하는 차여주였다.
씁쓸한 눈빛.
그 나이대 또래들이라면 하지 않을, 모를 눈빛.
그런가.
저 여자는 늘 혼자 고민하고 선택해야 했던 건가?
그동안 차여주, 그녀가 참 외롭게 살아왔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제 여동생과는 또 전혀 다른 여자라는 것도 깨달았다.
여동생은 저라는 언덕이 있었지만, 차여주에게는 비빌 언덕조차 없었겠지.
그래서 그렇게 곤 작가로 글을 쓸 수 있었나 보다.
한편으로는 저 여자가 곤 작가라는 것보다 차여주라는 인물이 더 강하게 제게 각인되고 있다는 것 역시, 흥미로웠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감사할 것까지야.”
남태오에게 누군가의 감사 인사는 낯설었다.
그는 원래 남을 쉽게 돕는 성격이 아니었다.
보통 그의 주변에 있고 싶어 하는 낯선 사람들은 그에게 무언가를 얻고자 주변을 맴돌았다.
하지만 차여주는 아니었다.
당신 같은 여자를 보았다면.
누구라도 그 상황을 보게 됐다면 화를 내 줬을 거야.
그러니까 그가 필요 이상으로 오지랖을 부린 건 아닐 거다.
자신의 도움이 저 여자에게 부담까지는 아닐 거다.
태오는 그러길 바랐다.
또한, 차여주를 저렇게 만든 두 남녀.
도지성과 그 박하나란 여자까지.
그게 누구든 간에 그들은 뿌린 대로 거두리라.
요즘 세상이 하늘이 무심하다고는 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결국 악인은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를 망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안 되면 되게 하라. 회장님께서 늘 그러셨지.’
어린 태오에게 남 회장은 그렇게 가르쳤다.
정의가 없다면, 정의를 실천하라고.
그 시점에서 태오는 저도 모르게 바라고 있었다.
차여주를 저렇게 아프게 한 두 남녀가 땅을 치며 후회할 날이 오기를.
“저기, 대표님. 여기까지 와 주셨으니까 커피라도 대접하고 싶은데요.”
남태오가 더 말이 없자, 할 얘기가 끝났다고 느꼈는지 여주가 말했다.
어떻게든 그녀 딴에는 감사 인사를 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지금 점심시간인데.”
태오는 굳이 거절할 이유야 없다고 여겼다.
기왕이면 이곳보다는 근처 다른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싶었다.
식사는 혼자 하는 편이었지만, 차여주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아아. 그랬죠. 그럼 식사를 하시겠어요? 그런데 안 실장님과 같이 하시려던 거 아니셨나요?”
“안 실장, 혼자 밥 잘 먹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여주와 단둘이 식사를 하려고 했다.
안 실장을 먼저 보낸 것도 그래서였다.
여주는 이런 쪽으로는 좀 눈치가 없는 것 같았다.
“……네. 저 그럼 이 근처에 음……. 대표님께서는 뭐 좋아하세요?”
여주는 호기롭게 말은 꺼냈지만, 이내 깨달았다.
주변에 뭐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걸.
요즘 어떤 맛집이 유명한지, 이 동네에는 카페 거리가 있다는 것도.
오랫동안 작업실에 갇혀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그녀였으니, 뭘 알 리가 없었다.
“일단 나갑시다. 차여주 씨.”
선뜻 나가길 머뭇거리는 그녀를 대신해, 태오가 먼저 일어섰다.
자신감 넘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안도했다.
곧고 길다란 남자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대표님! 어디 가시든지, 계산은 제가 할게요!”
그녀답지 않게 뒤에서 소리치며 그를 따라갔다.
“그래요. 정 그러고 싶다면.”
차여주다운 고집에, 앞서 걸어가던 태오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동시에 여주 역시 안심했고, 살짝 웃었다.
남태오도, 뒤따르던 그녀도 스스로 웃고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
* * *
도지철은 남태오 대표를 피해 출판사로 도망쳤다.
“야, 도지철! 네가 굼벵이야? 기어 오셨어요?”
그런데 사장실 앞에는 동생 도지성이 버티고 있었다.
“이 새끼가 형한테. 근데 네가 나한테 무슨 일로 찾아왔냐?”
가족이 다 같이 모일 때가 아니면 형제는 서로 말도 안 섞었다.
“무슨 일이냐고? 네가 차여주를 왜 만나는데! 이놈이고 저놈이고 남의 여자한테 왜 눈독을 들이는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