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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팅 웨딩-24화 (24/60)

24화

도지철은 상황 파악을 못하고, 농담 따 먹기만 하고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도 성추행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고 소문난 이유가 있었네.

여주는 계약 관련 일부터 꺼내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본론부터 꺼냈다.

“사장님. 제가 정말 어시일 거라고만 생각한 건 아니실 텐데요? 아시잖아요. 도지성 편집장, 이유 없이 저를 출판사에 들인 게 아니라는 걸.”

“뭐 둘이 사귀던 거 아니었나? 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서 그 녀석이 차여주 씨, 편의를 봐준 거 아니었냐고. 지금 차여주 씨가 있는 곤 작가 어시 자리, 그거 시켜 준다고 하면 줄 설 인간들 널렸다는 것 정도는 알지?”

“도지성 편집장님과 저, 이제는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곤 작가의 계약서 얘기를 하려고 나온 거고요.”

여주가 꺼내 든 것은 곤 작가로서 친필 사인을 했던 출판 계약서였다.

본인이 아니고서는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아니. 진짜로 차여주 씨가 그, 그럼?!”

도지철의 양옆으로 쫙 찢어진 눈이 갑자기 세로로 커졌다.

여주의 손에서 낚아채듯이 계약서를 가져가 보던 그가 이내 희한한 신음을 내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계약서에는 필명 말고도 본명을 적어야 했는데, 보란 듯이 ‘차여주’ 이름 세 글자가 있었다.

“사장님께서 계약 해지할 수 있게 도와주시면 좋겠는데요.”

여주는 ‘역시 상견례 전이라 몰랐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가 먼저 밝힌 게 나았다.

도지성의 입을 통했다면, 분명 형제가 작당해서 무슨 일을 또 꾸밀지 몰랐다.

이 자리에서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아니, 자, 잠깐만! 그럼 작가님이랑 도지성하고 무슨 문제가 생기셨어요? 어떤 일이었는지 몰라도 꼭 출판사까지 옮기실 필요가 있으실까, 싶은데 말입니다만.”

방금 전의 건방진 태도를 싹 고친 도지철이 공손하게 존칭을 했다.

출판사 매출의 크나큰 지분을 담당하는 작가 앞이었으니, 안면이 바꼈다.

“합의해 주시면 기계약작까지는 계약 연장하는 조건, 따라 드릴게요.”

하지만 여주는 도지철을 설득하려고 나온 게 아니었다.

설명을 줄줄이 늘어놓는 것보다 현실적인 제안을 하는 게 나았다.

“그, 글쎄요. 작가님께서 그렇게 나오셔도 엄연히 우리는 계약을 한 사이고, 위반을 하게 된다면 이건 소송감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생각 잘하셔야 될 텐데요.”

도지철은 존칭을 하고 있었지만, 상황이 불리해지자 고소 얘기부터 꺼냈다.

전생에서도 도지성의 편을 들면서 저렇게 협박하더니.

지금의 황금배 출판사는 아직 대형급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러는 걸 보니, 참 우습기만 했다.

“지금 저를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저는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말씀드리려 한 건데 오히려 소송을 얘기하시니까 당황스럽네요.”

“저기, 작가님? 나는요. 도지성 편집장한테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했단 말입니다. 내 입장에서는 이거 굉장히 당황스러운 일이라니까요.”

도지철이 전혀 몰랐다는 식으로 일관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주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비록 두 형제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해도, 엄연히 그들은 사장과 부하 직원이었다.

더군다나 도지성 역시, 출판사 사장 자리를 노리고 있는 걸 모를 리 없는 도지철이 몰래 감시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건 부하 직원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상사의 문제이고요.”

“뭐, 뭐라고요?”

“하지만 사장님은 그런 상사가 아니시죠. 편집팀에 나보고 씨, 사장님이 도지성 감시하려고 심어 둔 끄나풀이었잖아요. 아닌가요?”

“아니 그걸 다, 당신이 어떻게.”

이것 역시 전생에서 기억했던 정보 중 하나였다.

편집장 자리에 앉아 곤 작가를 휘두르며 실적을 쌓아 올린 도지성이었으니.

그런 도지성에게 억하심정을 느꼈던 도지철은 오래전부터 끄나풀을 심어 뒀었다.

말문이 막혀서 눈만 이리저리 굴리는 도지철의 손에서 여주는 계약서를 다시 뺏어 왔다.

그리고 친히 손가락으로 조항을 가리켜 보였다.

“자, 여기 계약서의 10조를 보시겠어요? 천재지변이나 전쟁 등의 불가항력으로 인해, 혹은 갑의 일신상의 사유로 계약상 의무를 이행할 수 없을 경우 당사자 어느 일방도 그로 인한 상대방의 손실에 대해 책임을 부담하지 않기로…… 더 읽어 드려야 할까요, 도지철 사장님?”

“하, 거 참. 작가님. 저도 눈이 있는데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직접 읽어 주실 것까지야.”

“눈이 있는데도 못 읽는 것 같아서 읽어 드렸어요.”

“작가님 참…… 보기하고 다르게 성격이 좀 많이 화끈하십니다.”

도지철이 두 손을 마주 비비며 혀를 내둘렀다.

사실, 도지성한테 아무런 보고를 받지 못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는 출판사 돌아가는 모든 일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제 이득에 따라 모른 척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결정을 잘해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저기, 작가님? 이 질문 좀 드리고 싶은데, 그럼 왜 갑자기 출판사를 옮겨야겠다는 생각까지 가셨을까요? 도지성이 그래도 작가님 데뷔작부터 맡았던 놈이라 일하기는 편하셨을 텐데.”

“한 가지 분명한 건, 도지성이 제 원고를 담당할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도 영 궁금한데…… 혹시 그놈이 바람을 피웠다거나, 다른 여자가 생겼다거나 그래서…….”

“자세한 건 동생한테 직접 들으시고. 그럼 저는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니 작가님! 이렇게 가 버리시면 어떡합니까. 예?”

여주가 계약서를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도지철이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고 매달렸다.

누가 도지성 형 아니랄까 봐, 아주 막무가내였다.

찰싹!

축축한 땀으로 범벅된 그 손이 닿자마자, 여주는 쳐내 버렸다.

이렇게 말이 안 통한다면, 협박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남태오 대표님께서 선투자금 30% 우선 지급도 없던 일로 하실지 모르는데.”

“……에, 에헤이! 작가님, 그렇게 무서운 말씀은 넣어 두시고 차분히 앉아서 예? 말로 좋게 좋게 해 봅시다, 네?”

아직도 도지철은 사태 파악을 못했다.

두꺼비 같은 손으로 여주의 손목을 강제로 잡았을 때였다.

“5초 안에 안 치우면, 그 손 꺾어 버립니다.”

남태오 대표가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안 실장이 함께였는데, 어느 사이엔가 빠르게 도지철의 손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아, 아아악! 아, 아파요. 아픕니다. 아니, 남 대표님 아니십니까! 어쩐 일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남태오를 알아본 도지철 사장이 바로 저자세로 굽혔다.

죽는 시늉을 해 대는 도지철을 빤히 보던 남태오가 손짓하자, 그제야 안 실장이 손을 휙 놓아줬다.

“대표님…….”

여주 역시 놀란 얼굴로 남태오를 올려다봤다.

혹시 몰라 도지철 사장을 어디서 만난다고 문자는 해 놨지만, 안 실장만 보내 줄 줄 알았다.

사실 그 정도 도움만 줘도, 든든했을 텐데 그가 직접 행차를 할 줄이야!

정말이지 저 남자는 모든 행동이 의외였다.

“차여주 씨, 자리 좀.”

“아, 네.”

태오는 자연스럽게 여주를 옆자리로 옮겨 앉게 하고, 대신 앉았다.

“도지철 사장님.”

“아, 네. 대표님. 말씀하시지요. 예예.”

그가 자리에 앉으니 도지철은 반대로 일어섰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저렇게까지 낮출 줄이야.

여주는 자신을 상대할 때와는 천지 차이인 반응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난, 도 사장이 그래도 동생보다는 머리가 좋은 줄 알았는데.”

태오는 빳빳하게 서 있는 도지철에게 앉으라는 말조차 예의상 하지 않았다.

바로 말끝이 짧아지니 저절로 기선 제압이었다.

옆에서 보는 여주 입장에서도 긴장될 만큼.

하긴, 상대는 남들 머리 꼭대기에 군림하는 게 특기인 남자였다.

타고난 피가 그랬고, 어릴 때부터 철저히 교육받고 자랐으니 말이다.

‘저기서 얼마나 더 수그리나 한번 봐줄까?’

여주는 도지철이 어떻게 나오나,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저기, 대표님. 저는 그저 작가님이랑 대화를 좀 해 보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어쩌면 우리 도지성 편집장이랑 결혼했을지도 모르고, 아 그럼 장차 가족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인데요. 제가 남 일처럼 보고 있을 수가 있었어야 말이지요.”

두 손을 모아 잡고 도지철이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말했다.

어지간해서는 볼 일이 없던 훤히 드러난 정수리가 오늘따라 잘 보였다.

가족이 됐을 거라는 끔찍한 소리를 웃으며 하는 말에 여주가 입을 벌렸다.

“도 사장, 그만 가 봐요. 족 같은 소리 말고.”

남태오가 대신 나서서 시원하게 쏘아 줬다.

“예? 아니 아직 저하고 작가님하고는 얘기 안 끝났는데 말입니다만.”

“10%로 깎이고 싶나?”

“아하하. 대표님, 농담도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하네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지철은 능구렁이 같은 웃음을 만면에 띠며, 사라졌다.

“안 실장, 가서 먼저 식사하고 있지.”

남태오가 안 실장까지 내보내자, 여주는 살짝 불안해졌다.

‘적절한 타이밍이긴 했지만, 왜 직접 온 걸까?’

가능한 그녀의 전생 시댁 사람들과 태오가 엮이지 않길 바랐다.

‘시’ 자가 붙었던 사람들은 도지성만큼이나 치가 떨리는 이들이었다.

남태오 대표 같은 사람이 그런 작자들과 엮여서는 안 됐는데, 미안하게 됐다.

“대표님.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잠깐 점심시간이라 지나다가, 우연히 들어온 겁니다.”

태오가 하는 말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누가 봐도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끼어들어 줬으면서, 우연이란다.

행동과 달리 말만 무뚝뚝한 남자다웠다.

“저는 늘 대표님께 도움만 받는 것 같네요.”

여주는 그가 표현하지 않는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고맙고, 미안하기도 했다.

“내가 차여주 씨한테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대표님.”

“진짜 도지성하고 결혼할 생각,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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