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팅 웨딩-22화 (22/60)

22화

“며칠 여기서 지내도 좋습니다.”

태오가 데려간 곳은 그의 펜트하우스였다.

여주가 며칠 전, 곤 작가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왔던 곳이었다.

“저……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께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차여주 씨 말대로 미래에 대한 투자인 셈 치죠.”

“혹시라도 제가 대표님,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그렇게 하죠.”

여주는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투자 가치를 논할 때, 스스로 곤 작가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평상시에는 남태오가 그녀를 차여주로 대해 주는 게 마음이 편했다.

“일단 차여주 씨 문제가 해결돼야, 곤 작가 일도 잘 될 테니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주는 몇 번이고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 보니 작가로서 자존심을 따질 때가 전혀 아니었다.

물질적인 보상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전생보다 더 가진 돈이 없었다.

살던 집에서 더 가지고 나올 것도 없이, 그녀가 가진 것은 제 몸뚱이가 전부였다.

“개인사가 복잡하면, 일에 집중 못 합니다.”

“네. 그것도 맞는 말씀이세요. 아…….”

벨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도지성한테 계속해서 전화가 와서 난리였다.

“꽤 거슬리는데.”

“꺼 두겠습니다. 저도 시끄럽다고 생각했거든요.”

태오의 무미건조한 눈빛에 여주는 바로 핸드폰 전원을 껐다.

이내 그는 거실 소파로 가자며 걸어갔다.

“그럼 두 분이서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안 실장이 물을 가져다주고 퇴근했다.

여주가 목을 축이는 동안, 남태오는 넥타이를 잡아 당겨서 풀어 버렸다.

셔츠 윗단추도 두어 개 풀고 나자, 그는 집 밖에서보다 훨씬 편해 보였다.

집 안에서는 저런 모습으로 있겠구나 싶어 여주는 저도 모르게 쳐다봤다.

그가 소매를 걷자, 손목이 훤히 드러났다.

적당히 햇빛에 그을린 피부 톤과 정갈한 손톱 모양.

힘줄이 불거져 있는 손등과 길다란 손가락까지.

남자다움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듯한 남태오의 생김새.

알고는 있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남자였다.

문득, 그를 보고 있자면 소설적 영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만큼 아름다운 피사체는 보기가 드물었다.

“어쩌다 헤어지게 된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그녀의 눈길을 느낀 남태오가 두 손으로 깍지를 껴서 무릎 위에 얹고 질문했다.

“네. 물론이죠.”

이미 여러 차례 그의 도움을 받은 이상, 여주는 숨길 생각이 없었다.

도지성과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 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도지성 편집장과는 곤 작가 관련 일로 저와도 예전에 틀어졌었어요. 작품 집필 외적인 사항들이나 프로모션 관련해서 의견이 맞지 않았거든요. 그러던 차에 도지성한테 다른 여자가 생겼어요.”

여주는 도지성의 만행을 일부나마 낱낱이 밝혔다.

“바람을 피웠다?”

“네. 하지만 그보다 제가 도지성 편집장한테 실망했던 건. 제가 암 판정을 받고 나서 보여 준 행동 때문이었어요. 작가인 제 건강을 우선하기보다 사업적인 욕심을 내세웠거든요. 저는 몸이 좋지 않아 휴재의 뜻을 분명히 밝혔지만, 대필 작가까지 찾으려고 했죠.”

“대필 작가, 그게 누굽니까?”

“제 생각이 맞다면, 황금배 출판사 박하나 작가일 겁니다.”

“!”

그때 남태오가 주먹으로 소파를 내리쳤다.

남의 일처럼 냉정을 잃지 않고 잘 말하던 여주가 화들짝 놀랐다.

꽤나 격한 동작과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어떻게 감히 곤 작가를 대신할 작가를 찾을 생각을 하지?”

“대표님…….”

“도지성 편집장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씀까지, 저도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남태오는 기분이 가라앉았으므로, 존칭을 생략했다.

여주는 그의 감정 변화에 놀란 것도 잠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누군가 그녀를 대신해 화를 내 주다니.

내 편이 있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본인의 일도 아닌데, 저렇게 반응하는 남태오 대표가 정말로 고마웠다.

“나한테 차여주 씨를 어시라고 말했던 것도, 딴 속셈이 있던 거였군.”

“네. 저도 전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어떻게 제가 어시라고 듣게 되신 거죠?”

여주도 그 얘기가 좀 궁금했었다.

대체 어쩌다가 작가인 자신이 어시스트로 둔갑해 버렸던 것인지 말이다.

“일전에 출판사에 갔다가 차여주 씨를 봤습니다.”

“저를 보셨다고요?”

“도지성 편집장 자리를 묻지도 않고 잘 찾아가길래.”

“아…….”

“출판사 직원으로는 안 보여서.”

“그러셨군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대표님 처음 뵀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런 것치고는 그날도, 오늘도 말을 참 잘해 줬습니다.”

남태오는 칭찬에 인색한 편이었으나, 여주에게는 과감히 잘했다고 했다.

차여주의 상황 판단 능력은 마땅히 칭찬받아야 했다.

반면, 도지성은 밑바닥까지 보고 나자, 모든 게 실망스러웠다.

수 틀리면 여자에게 폭력도 행사하는 인성인 것까지 제 눈으로 보았다.

앞으로는 비즈니스 파트너에서 제외시킬 작정이었다.

“도지성 입장에서는 순진한 차여주 씨를 제 마음대로 휘두르려던 거겠지.”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이번 경험을 통해 배우면 됩니다.”

남태오가 눈썹을 한껏 곤두세우고 도지성을 비난했다.

그의 신랄한 말에 여주는 정말 드물게,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도지성을 까내리는 건, 솔직히 말해서 듣기가 매우 좋았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을 듣자니, 그녀가 도지성의 심부름차 들렀던 날이었다.

이상하게 그녀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단다.

가고 나서 도지성에게 물어보니, 어시라고 했단다.

‘그냥 도지성이 둘러댄 거였네.’

별다른 에피소드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엄청나게 임팩트 있는 일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 정도면 무난한 첫인상인걸.’

여주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태오는 여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턱 끝을 쓸면서, 묘한 미소를 지었다.

차여주는 도지성의 만행을 밝혔지만, 그건 일부일 것이다.

파고 또 파면 더 나올 인간인 게 분명했다.

‘그때 S호텔 그 여자가 박하나인가?’

누군지는 자세히 못 봤지만, 분명 어떤 여자와 함께였다.

그들을 먼저 알아보고 차여주가 피했던 것이리라.

직장 상사 어쩌고 변명조를 한다 했더니.

그게 아니라 똥이 더러워서 피한 것이었나?

그때 차여주의 태도가 얼마나 침착했던지,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 알게 된 일이 아닌 것처럼.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 애가 차여주 씨 또래입니다. 어디서 그런 꼴을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도왔겠죠. 그게 상식이니까.”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는 여주에게 그가 설명을 했다.

그에게도 여동생이 있었고, 여주의 또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좋지 않은 일을 겪었다면, 누구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것이라.

남태오는 자신의 도움이 절대 과하지 않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계획은 생각해 봤습니까?”

그렇기에 남태오는 차여주에게 물어보았다.

여려 보이는 외양과 달리 차여주가 대담한 여자라는 걸 알게 됐다.

그의 앞에서 직접 곤 작가임을 드러내 보인 결단력.

암 판정을 받았지만 그렇게 심하지 않다던 태도까지.

강한 여자였다.

곤 작가가 아니었다고 해도, 도와주고 싶었을 것 같았다.

“네. 대표님. 우선, 저는 다른 출판사로 옮겨 가고 싶습니다. 더는 황금배 출판사에서 출간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려면 편집장이 아닌 더 윗선과 얘기를 나눠 보려고 해요.”

여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와 앞으로의 상황을 공유하게 된 건 분명 신기한 일이었다.

고맙게도, 태오는 그녀의 앞길을 같이 도모해 주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 말해도 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표님. 정말 감사해요.”

“차여주 씨를 돕는 게 곤 작가를 돕는 길이니까.”

남태오는 이어 손목의 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2층에서 지내면 되니까, 차여주 씨는 1층에서 지내요.”

“아……. 저는 그냥 방 하나만 주셔도 정말 괜찮은데.”

“난 괜찮지만, 차여주 씨는 불편할 테니까.”

남태오는 용건이 끝나자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갔다.

더 있다가는 차여주가 감사 인사를 하면서 하도 숙이느라 고개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로서는 당신이 내 공간에 있는 것이 안심이 돼.’

아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그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표현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남자는 쓸데없이 말을 많이 하느니, 말수가 적은 게 낫다.

그것은 남 회장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남태오가 보기에는 차여주도 비슷한 유형이었다.

저 여자, 속 얘기를 술술 풀어놓은 타입이 아니었다.

알게 된 시간은 서로 길지 않았어도, 그는 확신했다.

‘오늘 같은 일이 아니었다면, 끝내 입을 다물었겠지.’

그가 사인을 받겠다는 핑계로 차에서 내려 두 남녀를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저 여자는 결코 먼저 사정을 얘기하지도,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을 거다.

태오는 이내 안 실장한테 전화해서 지시했다.

“황금배 출판사에 박하나란 작가, 누군지 알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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